728x90

오늘 이동범 샘에게 양구 쪽에 있는 용늪이란 곳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이곳 마을 주민들은 매년 용늪에 재를 올리는데, 비가 오지 않을 때에는 어김없이 큰 기우재를 지낸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난 것이 용신에게 비는 것만이 아니라 때로는 혼내기도 하고, 때로는 아직 용신이 신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가르쳐야 한다며 비 내리는 법을 알려주기도 하고, 또 때로는 일부러 부정 타는 행위를 자행하기도 한단다.

 

마을 주민들의 기우재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이서 기우재만 지내면 어김없이 비가 온다고(가끔은 지나쳐서 큰비가 오기도 함) 철석 같이 믿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이 용늪의 과학적 가치에 대한 발견(몇 천년에 걸친 퇴적물을 분석하며)으로 관현 학자들의 로망 같은 곳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미신적인 부분은 쏙 빠지고 그냥 과학적 가치만 강조하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이곳에서 가뭄이 심할 때 지내는 재는 일종의 복지제도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재를 주관하는 곳이 관청이었다고 하는데 그 재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물자를 동원하고, 재가 끝나고 난 뒤 그 물자를 나누어쥬는 일들이 일대의 주민들에게는 단비 같지 않았을까?

 

그리고 마을공동체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중요한 역할도 했을 테고, 생업인 농업과 관련해서도 짚어볼 것들이 많이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마을마다 있던 민속을 그냥 민속 자체로 박물화 시키지 말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일이 필요할 것 같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하는 게 좋을까?

728x90
728x90

고대 그리스인들의 주요한 영양공급원은 생선이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삼면이 바다이니 물고기를 구하기 쉬운 자연환경이어서 그럴 것이다. 그런가 하면 육고기는, 상류층만이 먹을 수 있는 고급 식재료였다고 한다. 그리스의 자연환경은 생각보다 척박한 걸 떠올리면 쉽게 수긍이 된다.


당시 그리스 사람들도 지금처럼 하루 세끼를 먹었단다. 아침에는 주로 와인에 빵을 적셔서 먹었다고. 알코올 중독자도 아니고 아침부터 와인이냐고? 당시에는 사진과 같은 잔에 와인을 담아 물보다 훨씬 많이 마셨다고 한다. 심지어 아이들도 한두 잔씩 마셨다고 하니 말 다했다. 




빵은 보리로 만들었다고 한다. 밀이 아니라 보리. 보리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밀빵보다 딱딱했을 테고, 그래서 그것을 부드럽게 만들어 먹으려고 와인에 적시어 먹었을 것이란다. 날마다 빵을 먹는 데에 질리면 테가니테스τηγανίτης라는 팬케잌 비슷한 걸 먹었단다. 그건 밀가루와 올리브유, 꿀, 응유로 만들어 치즈나 꿀을 얹어 먹었다고. 이렇듯 지금도 그렇겠지만 아침은 간단히 먹었단다.


점심은 마음에 점을 찍는다는 동양의 표현처럼, 노동 이후 허기를 채우며 재충전을 하는 식으로 간략하게 먹었단다. 점심식사에는 무화과, 소금에 절인 생선, 빵, 올리브에 곁들여 아침과 달리 와인을 마시는 식으로 먹고 말았단다. 


그리고 하루의 가장 중요한 식사는 바로 저녁이었다고 한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고대 그리스의 남성들이 친구들과 모여 저녁을 먹으며 철학에 대해 논하거나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여성은 남성과 따로 먹었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한국이 그러했듯 여성은 남성들의 식사자리에 동석할 수 없었단다. 노예가 있다면 그들이 저녁식사를 차리고 남성이 먼저, 그리고 여성이 다음으로 먹고, 마지막으로 노예들이 먹었단다. 노예가 없는 집에서는 남성이 먼저 먹고나면 여성이 저녁식사를 했다고. 

저녁이 메인인 만큼 저녁식사로 다양한 음식을 먹었다.생선, 콩, 치즈, 올리브, 빵, 무화과, 메추리알이나 달걀, 아르굴라나 아스파라거스, 당근, 양배추 같은 제철채소를 잘 차려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육고기는 앞서 말한대로 상류층에서 미리 예약하여 즐길 수 있는 식재료였다고 한다.


우리집도 아침은 간단히, 점심은 간략히, 저녁은 푸짐히 먹으니 몇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모습은 다 비슷한가 보다.

728x90
728x90

한국과 일본의 1인당 연간 먹을거리 소비량을 비교한 자료를 보았다.

쌀; 67.4kg : 56.7kg
밀; 48kg : 41.4kg
설탕; 28.1kg : 16.7kg
소고기; 10kg : 6.9kg
돼지고기; 23.8kg : 14.8kg
가금류; 14.9kg : 13.3kg
유제품; 27kg : 32kg
해산물; 58.1kg : 53.7kg
(출처: 과학동아 11월호)

이거 완전히 한국인이 대식가라고 할 수밖에 없다. 매우 흥미롭다.


728x90
728x90




모든 농가의 이야기처럼, Fernando Funes Monzote 씨도 가혹한 요소와 오랜 역경에 맞선 장엄한 투쟁으로 시작한다.


대학에서 농경제학을 전공한 Funes 씨는 4년 전 아바나 교외의 침식이 심하고 잡풀이 무성한 산허리에 정착하여, 바위 같은 흙에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근처의 다른 농민들은 그가 미쳤거나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농생태학"을 이야기하는 이 박사 나부랭이가 곧 쿠바의 농업 현실이란 벽에 부딪칠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Funes 씨는 드릴이 없어서, 그와 조력자들은 바위층을 손으로 사용하는 연장으로 뚫어야 했다. 7개월 뒤 15m 정도 뚫었고, 그들은 차고 맑은 물이 나오는 샘을 맞닥뜨렸다.





Fernando Funes Monzote 씨가 도착한 일꾼들을 맞으며 웃고 있다. (Sarah L. Voisin/The Washington Post)




“저에게, 그건 농생태학에 대한 은유였습니다”라고 44세의 Funes 씨가 말한다. 그는 친환경적으로 농장을 관리하는 기술을 이곳과 네덜란드에서 공부했다. “손으로 매우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일했고, 그 노력만큼 결과가 있었다.”


현재 Funes 씨는 가장 잘 나가는 쿠바 요리업계의 한 명이다. 그의 어머니 이름을 붙인 약 2만4천 평의 Finca Marta 농장에서는 아바나의 최고 등급의 소규모 가족경영 식당에 많은 유기농산물을 공급한다. 


Funes 씨는 물을 절약하도록 주의깊게 설계한 계단밭에서 60가지 이상의 채소와 과일, 허브를 재배한다. 그는 목초지를 구분하기 위해 "살아 있는 울타리"로 관목을 심었고, 그곳은 새들의 서식처도 제공한다. 그는 양봉으로 지난해 1.5톤의 꿀도 땄다. 


농장과 그곳의 관개체계는 거의 다 태양에너지로 운영된다. Funes 씨는 분뇨에서 나오는 메탄을 파이프를 통해 부엌의 난로로 보내 깨끗하고 푸른 불꽃을 내는 “생물침지기biodigester”를 가동한다. 


쿠바 농업에 대한 Funes 씨의 전망은 그 퇴보 때문에 급진적이다. 그는 자본주의 농업과 식량의 60~80%를 수입하던 1960년대 쿠바에서 구현되던 국영농장 모델에 대한 대안으로 나온 현명하고 자원 효율적인 장인의 농업을 지지한다.  


쿠바는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세계 경제에 다시 끼어들고자 하는 이때, Funes 씨는 위태로운 쿠바 농촌문화의 생존을 모색한다. 


그는 자신의 목표가 많은 사람들이 농사를 포기하고 도시 지역으로 이동했을 때 쿠바의 농민들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라 한다. “쿠바의 농업이 다시 예전처럼 외국 기업에게 지배당하지 않으려면, 쿠바의 가족농이 자신의 농장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야 합니다”라고 Funes 씨는 말한다. 그의 아버지는 작물학자였고 어머니는 생물학자로서, 두 분 모두 농업 부문을 연구하는 집안에서 성장했다. 


Funes 씨는 일주일에 두 번씩 러시아산 승용차로 아바나에 있는 24개 이상의 식당에 이탈리안 아루굴라, 체리토마토, 꽃상추 등의 신선채소를 배달한다.


이러한 농산물은 대부분의 쿠바인들은 잘 모르지만, 관광객과 외국인 거주자들을 통해 조금씩 알려져 돼지고기와 왕질경이를 주로 먹던 쿠바인들도 소비를 늘리기 시작했다. 


“더욱더 많은 쿠바인들이 이러한 채소들을 발견하고 그들의 지평을 넓히고 있습니다”라고 미국 대사관 근처에 2년 된 식당인 El Litoral의 수석요리사 Alain Rivas 씨는 말한다. Funes 씨의 농장에서 이곳에 신선한 유기농 샐러드의 식재료를 공급한다. 


8~10달러로, 샐러드가 좀 비싼 편이지만 자신의 고객이 지역에 많다고 Rivas 씨는 이야기한다. 


Rivas 씨는 먼저 Funes 씨와 상의해서 식단을 계획하곤 한다. 농장에서 식탁까지의 전례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쿠바 사람들은 핸드폰이 거의 없었다. 현재 Funes 씨는 요리사와 식당주, 여타 소비자들과 이메일과 문자메시지를 이용해 연락하며, 음식물쓰레기를 최소화하려는 계획을 짜고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쿠바 농민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일하지 않는다. 신속하게 시장에 접근할 수단이 없기 때문에 많은 수확물이 손실될 것을 예상하고 과잉 생산을 한다. 이런 접근법은 겨울 영농철에 공급 과잉을 낳아 가격을 확 떨어뜨린다. 그런 다음 양상추와 토마토 같은 수요가 높은 채소는 카리브해의 뜨거운 햇살 아래 빠르게 상하여 재배자가 손실을 입고 싶지 않아도 여름 영농철에 다시 부족해진다. 


“문제의 일부는 더 효율적인 분배와 조정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Funes 씨는 말한다.


물론 다른 부분은 장비와 기술에 대한 더 나은 접근이다.


최근 쿠바의 국가 평의회 의장 라울 카스트로는 식량 수입을 줄이기 위하여 개인 농민과 협동조합에게 비생산적인 상태의 토지 수백만 핵타르를 넘겨주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농산물 시장에 더 큰 풍요로움과 다양성을 가져왔지만, 특정 부분에 너무 많은 중개인들이 끼어들면서 가격이 뛰었다.  


쿠바 농업의 관료주의를 부수는 일은 농민들을 위해 생산량을 높이고 생산비를 줄일 수 있는 트랙터와 트럭, 기타 농자재를 수입해야 하기에 여전히 근본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정부는 농기구와 기타 농자재 공급을 위해 도매시장을 창출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Funes 씨는 그의 러시아산 승용차를 냉장트럭으로 업그레이드하고 싶어한다. 그는 사회적 사명의 일환으로 자신의 배달처에 출산 가정을 추가하고, 지역사회 지원 농업의 쿠바판으로 개별 가정에 매주 꾸러미를 배포하고 싶어한다. 


Funes 씨는 토지를 더 늘리지 않고 더 집약적인 방식으로 간단히 수확량을 높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다른 쿠바 농민들이 더 나은 농법을 받아들여 자신의 농지에서 농생태학을 조금이나마 시도해 보도록 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이 있다. 


그는 “그 체계를 뭐라 부르든 중요하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자연자원을 활용하여 농민들이 자신의 토지에 뿌리를 내린 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출처 http://www.washingtonpost.com/rweb/world/an-arugula-growing-farmer-feeds-a-culinary-revolution-in-cuba/2015/08/21/35307864-407d-11e5-b2c4-af4c6183b8b4_story.html?tid=kindle-app

728x90
728x90




며칠 전부터 조금씩 짬을 내서 <탐식의 시대>를 읽는다. 진도는 지지부진한데 깔끔하지 못한 번역 때문에 더더욱 속도가 나지 않는다.


19쪽 밑에서 두번째 줄에 "곡물 요기"는 "곡물 요리"의 잘못이겠다.


22쪽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기장과 조로 음식을 만들려면 우선 절구에 공이를 반복해서 내리쳐 먹을 수 없는 껍질을 부서뜨려야 한다. BC 1세기경부터 농부들은 공이를 발로 밟아 땅에 묻혀 있는 절구에 내리찧는 기구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 기구는 손을 사용하는 것보다 힘이 훨씬 덜 들었다. 껍질이 모두 부서지면, 곡식을 바구니에 담은 다음 키질을 하여 가벼운 껍질들을 털어냈다. 그러고 나서 세발 단지에 넣고 곡식이 부풀어 가벼워질 때까지 약한 불에 쪘다."


이 문장을 이렇게 바꾸면 더 낫겠다.

"기장과 조로 음식을 만들려면 우선 절구에 공이를 반복해서 내리쳐 겉껍질을 벗겨야 한다. BC 1세기경부터 농부들은 디딜방아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 기구는 손을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힘이 덜 들었다. 껍질을 모두 벗기면, 곡식을 바구니에 담아 키질하여 검불 들을 날려 골라냈다. 그러고 나서 세발솥에 넣고 곡식이 익을 때까지 약한 불에 쪘다."


25쪽 위에서 아홉번째 줄에는 "물로 단맛이 나는 맥아 시럽을 추출하고"라고 하는데, 이는 "감주를 만들고"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아무튼 <탐식의 시대>를 보는데 그냥 영문을 번역하는 데에만 집중해서인지 걸리는 곳이 많아 진도가 팍팍 나가지 않는다.

728x90
728x90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103&sid2=245&oid=028&aid=0002275283

 

 

소로리에서 출토된 볍씨가 1만7000년 전의 것이라고 해서 벼의 원산지가 한국이라 주장하기는 어렵다. 기사에서도 지적하듯 그것이 재배종인지 야생종인지 판단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근거 없는 믿음은 광신 또는 맹신에 빠지기 쉽다.

 

광신, 맹신이 지나치고 또 그러한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면 하나의 종교가 탄생한다. 경계하고 또 경계하며,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신중하게 잘 살펴 그러한 길에 빠지지 않도록 하자.

 

아무튼 이번 논 유적의 발굴로 한국에서 벼가 논에 재배된 역사는 3200년 전으로까지 거슬러올라가게 되었다. 세종시 인근에서 발견되었을 뿐이지만 인간 사회를 생각할 때 당시 보통 전국 곳곳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농사를 지었겠거니 유추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사회, 경제, 기술 등도 추측할 수 있겠다.

 

정말 중요한 발견, 발굴이 아닐 수 없다. 꼭 보존되었으면 좋겠다.

728x90
728x90

쌀 시장 개방 문제를 다루는 한도숙 한국농정신문 대표의 칼럼을 읽었다. 

그런데 한도숙 대표가 마지기 개념을 착각했는지 틀리게 사용하여 지적하고자 한다.


그의 글을 보면, 1섬을 수확하는 면적을 '마지기'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는 '섬지기'라고 해야 옳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더 큰 문제는 이것이다. 

보통 마지기, 섬지기라고 하는 것은 수확량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파종량을 기준으로 한다. 

그러니 한도숙 대표의 사용법은 완전히 틀린 것이 된다.


그의 칼럼이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은 알겠으나, 틀린 내용을 버젓이 쓰고 있음에 안타깝다.


728x90
728x90

오늘은 이런 글을 읽었다.

 

http://www.dongascience.com/news/view/6259/special

 

 

그래서 의문이 들어 글쓴이에게 이렇게 물었다.

 

"농경을 올인하는 주식 투자에 비유하셨는데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농경생활 초기의 작물은 분명 지금만큼의 수확량이 나지 않는 품종이 거의 전부였을 테고, 어떻게든 위험을 분산시키려 노력했을 것 같습니다.

 

하나에 올인하는 식의 농업관행은 오히려 근대의 녹색혁명 이후 극심해졌다고 합니다. 전통적인 농경생활을 영위하는 집단의 생물다양성은 지금보다 풍부했다고 하는데요. 이는 초기 농경민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답변을 들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농경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다음 '건강이 악화'된 인골 특징을 보면 대안이 없이 농경에 의존한 (혹은,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결과로 봅니다."

 

이것만으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아 다시 물었다.

 

"사회, 정치, 경제 체계와도 긴밀하게 연관하여 탐구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렵채집과 농경의 생활양식에서 가장 큰 차이는 바로 그 점이 아닐까 싶어서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답을 듣고 질문을 멈추었다.

 

"예! 사실 농경은 이렇게 간단한 컬럼에서는 충분히 다루기 힘든 주제입니다. 워낙 그 범위, 정의, 영향이 방대하기 때문이죠. 수렵채집 역시 전에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복잡한 주제입니다. 많이 공부하고 알려주세요!"

 

인류는 왜 고생스러운 농경을 생활양식으로 선택한 것일까? 과연 초기 농경민들이 농사만 짓고 살았을까? 궁금한 일이 한둘이 아니다.

728x90
728x90


밀 농사는 현재의 터키에서부터 남쪽(보라색 화살표)과 북쪽(노란색 화살표)을 통해 유럽으로 퍼졌다. 그런데 이번 Bouldnor Cliff의 바닷속 토양에서 복원한 DNA를 분석하니 영국에서 밀이 재배되기 2천 년 전에 전파되었음이 밝혀졌다.




영국 남부 해안에 살던 수렵채집인들이 영국 제도에 밀 농사가 싹트기 2천 년 전에 밀을 수입했다고 새로운 연구에서 제시되었다.


이러한 수렵채집인과 농민들 사이의 거래가 북서 유럽 전역에 농업이 확산되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영국 워릭Warwick 대학 고고유전학과(archaeogenetics)의 Oliver Smith 씨와 그 동료들이 제의했다. 지금까지 연구자들은 이주 농민들이 유럽의 수렵채집인 무리를 급속히 밀어내거나 그들이 농경생활로 서서히 전환했다고 주장해 왔다. 


현재 와이트 섬의 침수된 지역인 Bouldnor Cliff라는 곳의 약 8천 년 된 토양에서 추출된 DNA가 밀이 작물화된 초기인 터키의 그것과 일치한다고 과학자들이 2월 27일자 Science에 보고했다. 터키의 농민들은 10,500년 전 밀과 다른 몇몇 식물을 작물화했다. 작물 재배는 7,600년 전 프랑스 서부에서 영국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해, 400년 뒤 Bouldnor Cliff에 이르렀다. 그리고 영국에서 경작은 훨씬 뒤인 약 6천 년 전에 시작되었다.




잠수부들이 밀 농사를 짓기 2천 년 전에 수렵채집인들이 밀 생산물을 얻었던 곳인데 현재는 침수된 지역에서 발견한 석기를 들고 있다.



Bouldnor Cliff에서 잠수부들이 석기와 기타 고대인들의 유물을 발굴했다. Smith 씨의 팀은 8천 년 전 해수면이 상승하기 전에 밀봉된 토탄지의 토양 샘플 네 가지에서 DNA를 얻었다. 복구된 DNA에서 나무, 풀, 허브만이 아니라 작물화된 밀이 나왔다. 과학자들은 Bouldnor Cliff에서 밀이 재배되었다는 아무런 증거를 발견할 수 없었다. Smith 씨 들은 놀랄 만큼 정교한 무역망이 적어도 일부 유럽의 수렵채집인과 발전된 농경민 사이에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https://www.sciencenews.org/article/wheat-reached-england-farming

728x90

'농담 > 농-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1섬을 수확하는 면적이 마지기인가?  (0) 2015.03.07
초기 농경은 어떠했을까?   (0) 2015.03.05
로마의 달력  (0) 2015.02.25
인공감미료는 해로운가?   (0) 2015.02.21
일본의 볏짚공예에서 배우다  (0) 2015.01.22
728x90

 

2세기 무렵 제작되었다는 로마의 달력이다.

 

여기에는 축제일, 황도대, 달의 위상 등이 기록되어 있다. 즉, 농사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