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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농업 전반

뱃구레의 근대 -종장 뱃구레로 본 일본 근대

by 雜s 2026. 4. 2.

종장 뱃구레로 본 일본 근대 -먹을거리와 사람들을 잇는 지역의 가능성

 

 

 

1. 뱃구레의 고립화와 집단화

 

근대란 어떠한 시대인가?

마지막으로 새삼스레 최초의 물음에 답한다면, 근대란 뱃구레의 '고립화'와 '집단화'가 동시에, 또 급속히 진행된 시대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두라는 세기의 전환기에 일본의 인구 증가는 유례없는 속도로 진행된다. 그걸 부양할 만큼의 농업 생산의 향상, 시장 경제와 유통 가공을 포함한 민간 기업의 발전을 볼 수 있던 것이 먼저 이 시대의 중요한 특징이라 해도 좋을 듯하다. 그리고 증가한 인구의 대부분은 도시 노동자로서 농촌에서 도시로 유입되었다. 즉, 다이쇼우 시기부터 본격화하는 공업화와 도시화는 그들의 뱃구레가 농촌에서 떨어져 도시로 집중함에 따라서 진전되었다. 그리고 도시 노동자가 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식료품 자급적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이와 같은 사회의 변화는 '뱃구레가 어디에서, 어떻게 채워지는가?'라는 물음의 답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되었다. 즉, 근대에는 「방랑기放浪記」의 주인공인 '나'처럼 가족이나 지역이라 하는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자유로운 동시에 부자유스런 고립된 뱃구레를 지닌 사람들이 그때까지 이상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날마다 무언가를, 어딘가에서 먹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먹기 위해서 모이는 장소가 속속들이 등장했다. 공장, 군대, 기숙사, 학교 등의 식당, 공영 식당이나 한그릇식당 같은 각종 외식 기회와 시설이다. 이렇게 급속하고도 대규모의 변화 속에서 그때까지와 다른 '먹을거리'의 장과 경험이 생겼다.(1) 식료품 자급적 기반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 바라는 상품으로서의, 즉 화폐와 교환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먹을거리'의 비율이 확대되었다고 해도 좋을지도 모른다. 이것들에 의해 먹을거리의 집단화가 시작되었다. 이리하여 뱃구레는 '고립화'된 뒤 새로운 집단 속에서 재편성되어 '집단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새로운 집단 속의 식사는 새로운 먹을거리의 장을 만들어 낸 것만이 아니라, 식재료의 생산이나 유통 체계의 구조적 전환을 촉진했다. 외식 산업의 융성과 맞추어 절임을 비롯한 먹을거리의 대량 생산, 대량 가공이 시작되었다. 이것을 이 책에서는 '먹을거리의 산업화'라고 설명했다. 각지에서 식재료의 주산지가 형성되고, 시장이 정비되며, 수송망이 부설됨에 따라서 근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의 식재료 생산, 유통, 소비의 체제가 정비되었다.

그리고 뱃구레의 문제는 '식재료 소비'의 문제이기도 한 동시에, '식재료 생산'의 문제이기도 했다. 농업과 공업, 또는 농촌과 도시 사이에 노동력의 유통이란 측면만이 아니라, 식재료의 생산과 소비라는 측면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던 것도 근대라는 시대의 한 특징이었다.

 

 

 

 

 

 

2. 먹을거리와 사람들과 지역의 일상사

 

사회적인 뱃구레의 고립

이와 같이 다양한 사례를 살펴보면서, 이 책에서는 나아가 고립화와 집단화라는 단순한 말로만은 설명할 수 없는 3가지 물음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나는 뱃구레의 고립화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뱃구레'는 한 사람에게 하나밖에 없는 소화기관인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먹는다는 행위를 뱃구레의 소유주 이외의 누군가가 대체해 줄 수 없다. 그래서 애초에 뱃구레는 물리적으로는 고립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민영 식당, 공영 식당이나 공장 급식에서 보았듯이, 그 개개의 뱃구레가 누군가에게 염려받고 있는, 또는 관계를 맺음으로써 뱃구레는 사회와 연결되는 하나의 경로가 된다는 것도 또한 중요한 사실이었다. 먹는다는 행위는 매우 '개인적'인 것으로 보이나, 사실은 동시에 매우 '사회적'인 것이다.

먹는다는 것에 본능인 식욕의 충족 이외의 의미를 부여하는 건 인간이 손에 넣은 하나의 가능성이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여공들이 쟁의를 통해 '충분히 먹는 것', 곧 노동 환경의 개선을 쟁취했던 일, 유곽의 창기들이 '함께 먹는 것'을 통해 사회를 바꾸는 한 걸음을 내딛었던 일, 그날그날 살아가는 사람들이 5전 식당의 실천을 통해 신뢰할 수 있는 의지처를 얻은 일 등은 고립된 뱃구레가 '자율'을 자각하고 '연대'해 나아갈 가능성을 발견했던 과정이었다고 의미 부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모두 어떠한 이유에서, 가족이나 지역으로부터 분리되어 도시로 유입된, 어느 의미에서 사회에 부유하는 분자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해고 등에 의한 실직과 늘 이웃해 있었다. 만약, 집단화하는 장을 얻지 못했다면 그 뱃구레는 누구에게서도 염려받지 못하게 되어 관계가 끊어짐으로써 아주 간단히 사회로부터 분리되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면, 이와 같은 말하자면 '사회적인 뱃구레의 고립'이란 위험이 대규모로 확대하는 것이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된 '근대'라는 시대였던 것이다. 

 

 

 

 

곤궁에서 빈곤으로 -근세로부터 근대로의 연속과 단절

그럼 언제부터 우리는 먹는 것이 자기 책임의 범주라고 생각헤게 되었던 것일까? 이것이 두 번째 문제이다. 이 물음은 근세와 근대, 그리고 현대로 이어지는 장기적인 시야에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근세의 마을 문서 등을 읽으면, 빈번히 '곤궁'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기후 불순이나 재해에 의해 작황이 좋지 않아 마을이 '곤궁'해져 있기에 감면을 바란다는 진정서의 종류이다. 문서는 사건이나 소송 등 무언가 의도가 있을 때에 작성되는 것이란 점을 고려하면, 그 빈도를 직접 문제로 삼을 수는 없지만 마을의 총의로서 '곤궁'의 타개책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 여기에서는 주목하고 싶다. 즉, 먹는 것은 결코 자기 책임으로 돌려야 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2) 각 마을은 연공미의 수납과 흉년 대비 저축을 목적으로 한 공동 창고(향장郷蔵)을 가진 곳도 적지 않았다. 이 저곡은 재해 때 이용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마을의 곤궁자에게 이자(나락)를 정해서 빌려주는 '사창미社倉米 제도'로도 이용되어, 이 농민의 상호부조적 생활보장제도가 지역의 안정을 확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이 저곡은 먹을거리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나락 이자의 일부를 매각함으로써 신사와 사찰의 수선이나 축제에 사용하기도 했다.(3) 마을 수준만이 아니라, 막부의 어장御蔵(오쿠라)에도 위미囲米(카고이마이)라 부르는 흉년 대비 저축, 쌀값 조정, 군사용 쌀이 상비되어 있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냉해 등에 의한 흉작이 빈발했던 요네자와米沢에서는 1802년에 번주였던 우에스기 요우잔上杉鷹山(하루노리治憲)이 「카테모노かてもの」(4)라는 흉년 대비 식량의 해설서를 쓰고, 널리 영내에 반포했던 일도 알려져 있다.(5) '카테모노'의 카테란 '밥밑(糅)'으로 쌀로 밥지을 때 다른 걸 더하는 일을 의미한다. 기근이나 재해가 반복되는 근세 사회에서는 뱃구레가 비게 되는 일은 '남의 일'이 아니라 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의 일'이라고 실감하는 문제였다.

농촌만이 아니라 도시에서도 뱃구레의 책임 소재는 결코 개인에게만 돌리는 것은 아니었다. 도시와 빈곤의 관계를 근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를 포함해 밝혔던 키타하라 이토코北原糸子에 의하면, '빈민'인 것이 당연했던 시대로부터 '빈곤'에 빠지는 걸 부끄러워하고 은폐하는 사회로 향하는 과정이, 에도로부터 도쿄로 이행하는 과정이었다.(6) 근세에서 근대로 빈곤이 이어졌다고 하기보다는, 근세와 근대의 사이에는 '빈곤함'에 대한 근본적인 대처의 차이가 있다는 지적은 중요하다. 예를 들면 교우호우享保의 기근(역주; 1720년대의 심각한 기근) 때에는 힘을 합쳐 서로 돕는 '고우리키合力' 제도가 장려되었다. 그 뒤, 이 사회통념은 베푸는 자와 베품을 받는 자의 상하 관계를 전제로 한 마치카타町方 '시행'으로 바뀌어 갔다. 화재, 지진, 기근 등의 재해는 항산이 없는 도시 하층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 사회적 경험을 풍화시키지 않았다고도 키타하라는 기술한다.   

또한 1787년 '텐메이天明의 다이우치코와시大打ちこわし'를 계기로 해서 마츠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는 칠분금적립七分金積立의 법을 정해 정회소町会所를 설치하고, 마을 운영비 안에서 절약할 수 있는 금액의 70%를 적립하게 했다. 이 금액은 매년 2만 냥에 상당해, 반절은 금융 자본으로 하고, 반절은 나락 창고에 위미(카코이마이)로 비축하게 했다. 또한 이시카와지마石川島의 닌소쿠요세바人足寄場(역주; 부랑자나 노숙자 등을 수용해 직업 훈련과 자립을 돕던 시설)도 이때 설치되었다.(7) 이들 시책은 바로 곤궁 상황과 사람들의 뱃구레를 어떻게 할까 하는 문제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근대가 되자, 이들 시스템은 차례차례 사라져 갔다. 먼저, 메이지 시기 이후 자본주의의 형성과 지역의 확대 재편성을 배경으로 해 영주의 제약과 보호를 잃은 향장은 급속히 폐절되어 갔다. 1934년의 도우호쿠東北 대흉작을 계기로 해서 내무성이 향장의 부흥 정책을 내세움에 따라 이와테현岩手県에서 부흥하게 되어,(8) 도우호쿠 지방에서는 비교적 광번위하게 근세적인 향장이 잔존했다고도 전해지는데,(9) 전국적으로 보면 폐절된 것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에 마을의 총의로 뱃구레의 문제를 서로 이야기할 기회가 조금씩 감소하기 시작했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그렇다고 하지만, 그 뒤에 시작되는 전시 체제, 공황에 대한 경제 재생운동 등의 와중에 다시 그 기회가 찾아오게 되었더라도, 그건 근세 이래의 향장에 부대되어 왔던 질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유신 이후, 정회소나 칠분금적립도 또한 폐지로 향하고, 나락 창고의 위미는 1868년 6월에 마치부교우町奉行의 후신이 되었던 시정재판소市政裁判所에 그 운영이 이관되었다. 그 결과, 칠분금적립은 폐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약 5만 5000섬이 시민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임시응변적으로 방출되고, 그걸 상회하는 약 6만 6000섬이 군사비 등으로 소비되었다고 전해진다.(10) 이 경위를 감안하면, 메이지 시기에 시작되는 '빈곤'에 대한 시책은 근세의 시책과 단절하는 걸 그 출발점으로 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시작된 근대에, 마을의 총의를 대신해 먼저 중시된 것은 '호戶'였다. 에도 시대의 인별첩人別帳으로부터 메이지 시대의 호적대첩戸籍台帳으로 전환한 건 사람들이 형성하는 호, 바꾸어 말하면 '가家'가 국가의 기본 단위라는 것이 공인된 것을 의미하며, 호적은 그걸 사람들에게 자각시키는 장치에 지나지 않았다.(11) 근대에 시작되는 '가정 요리'의 융성도,(12) 이 문맥에 포섭된다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근세 이래의 마을은 새로운 행정 구획으로 편입되고, 그곳에 호가 재편성되었다. 이와 같은 변천 속에서 제도적으로는 사람들의 뱃구레 문제는 마을의 총의에서 호로, 나아가 새로운 행정구에 맡기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집이나 마을을 나와 임노동자가 된 사람들의 뱃구레는 자기 책임에 의해 채울 수밖에 없었다. 다음의 문장은 도쿄시가 관할하는 간이숙박소의 숙박자(40세)가 1929년에 기록한 일기이다.

 

10월 27일. 인간의 생명과 생활은 불가사의한 힘에 지배되고 있다. 이 힘은 무슨 힘일까? 인간 세계는 언제나 살아가기 위해 양식을 다투어야만 하는 걸까? 인간의 활동이라 하는 단어는 약탈하는 상태를 말하는 걸까?
10월 30일. 이웃은 무료 숙식소이며, 앞은 농림성 미곡물 창고로 쌀 가마니가 충만해 있다....... 그리고 이는 수매해서는 쌀값의 하락을 막고, ...... 매각해서는 그 길의 상인의 배를 살찌우는, 불가사의한 작용을 하는 존재물이다. 평민들이여, 세상이란 그런 법이다. 놀랄 것도 없고, 근심할 일도 없지 않은가? ...... 우리 토요아시하라豊葦原의 벼이삭의 나라 국민이 배를 두드리며 천하태평을 노래하는 때는 언제이려나.(13)       

 

 

농촌에서 도시로 사람들이 유출되자, 그들의 뱃구레는 결국 그들만의 것이 되었다. 쌀 가마니로 가득차 있는 농림성 미곡 창고 옆의 무료 숙박소에서, 40세의 노동자는 공복을 감싸며 이 일기를 썼다. 어느새 '곤궁'을 호소하는 건 마을에서도 집에서도 아닌 그 자신이 된 이 상황은 근대 사회의 구조 전환에 의해 생겨난 것이었다. 농촌만이 아니다. 시오미 센이치로우塩見鮮一郎가 에도에서 제국 수도 도쿄로 이행하는 시기를 주의깊게 묘사하듯이,(14) 도시 잡업층에게도 근세에 기능하던 생활 보장 시스템의 소멸에 따른 뱃구레의 고립화는 피하고 싶은 현실이었다. 그러한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그들에 의해 새롭게 형성된 도시 노동자층을 중심으로 해서 먹는 일이 자기 책임으로 이야기되는 상황이 정착해 나아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안전망의 재편

그러나 근대에는 그와 같은 엄혹한 상황을 바꾸어 가려 하는 움직임도 동시에 나타났다. 제2장이나 제3장, 제5장에서 보았듯이, 고립화된 뱃구레를 먼저 집단화시킨 것은 공장주들, 민영 식당, 각종 사회사업 단체 등이었다. 그들은 비교적 소규모의, 눈앞의 지역의 삶을 재편성하는 것에 온힘을 다하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하나의 느슨한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이 움직임은 단순히 뱃구레를 집단화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내 고립된 뱃구레의 의지처가 되기도 했다. 이걸 이 책에서는 '지역사회사업'의 맹아로 의미를 부여했다. 국가나 과학에 의한 뱃구레의 집단화가 진행된 전시를 별도로 하면, 근대에 고립화된 뱃구레를 집단화시킨 것은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중간조직이 모색하면서 구축했던, 말하자면 손수 만든 '안전망'이었다.(15)

지역을 기반으로 한다는 건 안전망의 상태가 지역의 역사적인 경위와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이 책 전체를 조망하면, 도쿄와 오사카와 아이치라는 3대 도시 지역의 각각에서 먹을거리를 둘러싸고 특색 있는 지역사회사업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 배경에는 그림 -1에서 보듯이, 기계나 화학공업이 집적해서 남성 노동자가 모이는 도쿄와 오사카, 염직공업이 집적해서 여성 노동자가 모이는 아이치라는 차이가 있으며, 또 고용 구조에 주목해서 보면 근세 이래 단기계약화와 일용화가 진행된 도쿄와, 고용 기간의 장기화와 상인 가문의 내부 노동시장 형성이 나타났던 오사카라는 차이를 볼 수 있다. 전자에는 잡업층의 확대와 그들에 의한 비교적 이른 주기의 세대 형성이 보이고, 후자는 만혼화를 촉진해 인구 억제로 이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16) 

 

그림 -1 공장업종과 직공 남녀비의 도시 비교(1921년)

출처: 「공장통계工場統計』 1921년에서 작성.

 

 

이들을 뱃구레의 상태로 바꾸어 놓고 보면, 세 도시가 안고 있는 문제는 증가하는 도시 노동자의 뱃구레를 어떻게 할까 하는 공통의 문제와 맞물려, 노동자의 성차, 가족의 규모와 유무, 노동 내용의 차이에 따라서 지역별로 다른 문제를 동시에 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근대는 뱃구레의 문제가 자기 책임이라 이야기되기 시작한 시대였던 것과 동시에, 한편에서는 지역별로 특색 있는 안전망이 형성되어,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것들이 중충적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새로운 시대의 개막에는 자본의 탄생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탄생과 증가가 빠질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노동자될 수 있으려면 그들의 일상 생활이 '먹는 것'에 의해 계속되어야 했다. 그에 의해 새로운 경제 체제의 맹아가 가능했다고 한다면, 뱃구레의 문제는 역시 사회의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 사람들을 둘러싸고 -민중과 타자

 

'사람들'이란 누구인가 

세 번째는 '사람들'이란 누구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책에서는 근대의 혼잡을 거리를 오가는 다양한 직업과 입장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먹을거리와 사회의 문제를 생각해 왔는데, 그 과정에서 종종 '사람들'이라고 한 마디로 설명해 버리면 오히려 간과하고 마는 문제에도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사람들'을 '민중'이라 바꾸어 말하면, 아래에서는 민중사 연구의 한 가지 한계에 다가서게 될 것이다. 

그건 민중 세계에도 일종의 계층이 뚜렷하게 존재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사쿠사의 식당가에서 보는 노동자와 걸식, 후카가와 식당의 1층 손님과 2층 손님, 키시와다 방적 쟁의에서 본 일본인 노동자와 조선인 노동자, 아이치의 방적 여공과 오사카 선착장의 점원, 칸다 시장을 오가는 채소 상인과 날품팔이꾼 등, 먹을거리를 둘러싼 배제와 차별 또한 민중이라 불리는 사람들 사이에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프랑스 2제정 시기의 파리에 새로 건설된 중앙시장을 무대로, 대량의 식료품과 잡다한 군중으로 넘쳐나는 세계를 생생한 필치로 그려낸 에밀 졸라의 『파리의 뱃구레』(17)는 사람들의 '올바름' 안에 잠재된 잔혹함을 묘사한 소설이다. 주인공인 몽상가 공화파 청년 플로랑은 1851년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 당시 억울한 죄로 체포되어 유형에 처해진다. 그리고 유배지에서 굶주려 야윈 몸으로 돌아온 파리는, 빛나는 유리와 견고한 철로 새로 건설된 중앙시장을 중심으로 한 기계 장치의 도시로 변모해 있었다. 그곳에서 그가 본 것은, 제정이 가져다준 안정과 번영에 도취된 사람들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먹을거리의 홍수 속에 굶주림이 있다는 것, 같은 민중 안에도 뚱뚱한 자와 야윈 자의 싸움이 있다는 것을 보고 고뇌한다.

『파리의 뱃구레』는 작가 졸라 자신이 1872년 무렵 파리 중앙시장을 상세히 취재하고 관찰한 것을 바탕으로 썼으며, '물질적이고 상업적인 파리의 현대 생활'의 공과 죄를 그려내고자 하는 의도로 가득 차 있다.(18) '올바름'이란 곧 그 시대의 도덕, 상식, 체제이며, 그것에 의심 없이 순응하는 것이 안정과 번영으로 이어진다. 한편, 그로부터 떨어져 나간 사람들은 '야윈 자'로서 더욱 밑바닥에 놓이게 되었다. 졸라가 청각, 후각, 촉각 등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여 시장의 혼잡, 끊임없이 코를 찌르는 먹을거리의 냄새를 통주저음처럼 그려낸 중앙시장의 세계는 바로, 모순으로 가득 찬 시장 사회에 대한 비판적 표현이기도 하였다.(19) 메이지의 관료들이 시찰하러 가서 일본 공설시장의 모범으로 삼으려 했던 이 거대한 시장 속으로 깊이 침잠해보면, 파리 중앙시장에는 휘황찬 빛만이 아니라 깊은 어둠 또한 동시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란 누구인가라는 논점으로 돌아가면, 지금까지 필자 자신이 어떤 의미에서 사로잡혀 있던 자본가 대 노동자라는 이항 대립 도식으로는 결코 보이지 않는 세계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20) 즉, 노동자 안에도 시대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전환하여 새로운 시대의 풍요를 누릴 수 있었던 사람들과, 그로부터 떨어져 나가 배제되어 변화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노동자조차 될 수 없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이것은 근세 이래의 통속 도덕적 민중 세계의 변용과도 관련된 문제라고 생각된다. 근세와 근대의 결정적인 차이 중 하나는 '동력 기계'와 '공장'의 유무인데, 기계화와 공장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물결 속에서 그때까지의 통속 도덕이 통하지 않게 되고, 시대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사회 밑바닥으로 전락해 갔다. 이것이 민중 안에 더욱 큰 계층 차를 만들어내고, 밑바닥의 사람들이 '개인의 자유', '자기 책임'이라는 새로운 통속 도덕에 의해 '텅 빈 뱃구레'를 감싸쥐게 된 것은 아닐까. 이것은 지금까지의 노동자 연구에서는 돌아보지 않았던 측면이었다. 이처럼 거스르기 힘든, 그야말로 거대한 기계 장치의 시대 속에서 '왜 먹을 수 없는가'라고 물었던 것은 데구치 나오出口なお(역주; 일본의 신흥 종교 오오모토의 창시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시기 통속 도덕의 변화를 민중 생활상의 근대화와 '도시열'이라는 색다른 민중 세계의 탄생으로 재의미화한 오오카도 마사카츠大門正克는, 그것이 전후 기업 사회를 준비하는 도덕적 기반으로도 이어진다고 지적했다.(21)

이렇게 시대의 '올바름'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사람들은 '타자'로 소외되어, 새롭게 형성된 '민중 세계'의 바깥에 놓이게 되었다.(22) 유곽 안에서 '뭔가 세상이 이상하다'(24)고 중얼거린 타부치 스마田淵スマ의 말은 그것을 상징하고도 남는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사·문화사를 넘어서

너무나 일상적인 일이며, 너무나 가까이 있기 때문에 기록되지 않았던 작은 이야기들이 우리 바로 옆 발밑에 무수히 존재하고 있다. '먹는다는 것'은 바로, 특별히 기록되거나 논의된 일이 거의 없었던 이야기이다. 그러한 작은 이야기들은 지금까지 역사학의 중심적인 연구 대상이 되는 일이 드물었다. 사료에 근거한 실증이 어렵다는 점, 경제 활동 중에서도 생산 활동에 대한 주목으로 편중되었던 기존 연구 속에서, 생활을 둘러싼 여러 사건과 현상은 역사화되지 않은 채 남겨져 온 것이다.
그러한 연구 동향 속에서 이에 의문을 제기한 두 가지 흐름, 즉 새로운 역사학을 출범시킨 아날학파를 중심으로 한 '사회사', 서구 여러 나라를 하나의 도달점으로 삼는 단선적인 경제 발전론과는 다른 또 하나의 길을 제시한 '문화사'가 등장한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먹을거리를 둘러싼 역사의 서술은 사회사와 문화사의 등장으로 인해 자각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거시적 관점에 서는 기존의 국민국가사나 정치사, 장기 경제 분석 등을 시야에 넣은 상태로 상대적인 논의를 빠뜨리고 있었기 때문에, 미시적 사례 분석이 다수 축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필자는 지금까지 생산과 생활을 합친 '삶' 전체상으로부터 인간과 사회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왔는데, 그것들은 개별적인 미시사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이러한 역사학의 동향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최근에는 작은 이야기를 통해 그려내는 역사가 글로벌 시대의 역사학에야말로 중요하다는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그것을 명확한 논리로 설명한 것은, 미국 역사학을 이끌어온 린 헌트Lynn Hunt이다. 그녀는 저서 『세계화 시대의 역사학』에서, 역사를 형성하는 '큰 이야기(탑다운)'와 '작은 이야기(바텀업)' 양쪽을 시야에 넣고 그 대항해 싸움을 그려내는 것이야말로, 세계화가 진행되는 복잡한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를 제공하는 새로운 역사학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24)

 

 

 

 

임시 방편의 역사인 일상사

그렇게 생각했을 때, 먹을거리와 사람들과 지역의 일상사는 어떠한 의의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일까? 

사회의 큰 파도와 그 원동력을 논할 때, 작은 이야기인 한 사람의 특별한 존재에 착목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침묵하는 대중, 이른바 침묵하는 다수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 이 책이 혼잡한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의 누구나가 몸에서 떼어 놓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뱃구레'라는 신체에 착목한 것은 이러한 침묵하는 다수가 축적했던 조용한 역사, 즉 보이지 않는 역사를 역사학의 도마 위에 올리는 걸 의도했다. 

살아 있는 건 모두, 무언가를 먹으며 살아간다. 오랜 생애를 온전히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공복을 채우고, 그 자리를 버티며, 어떻게든 변통하며 살아남기 위해 먹는다. 이와 같은 '그 자리를 버티기', '변통하기'라는 행위는 임시 방편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다. 최근, 경제나 복지 등을 논할 때, 이 임시 방편의 측면을 주목하게 되었다.(25) 

그건 큰 이야기 속에서 논해졌던, 예를 들면 세계의 인구와 식량 생산이 어떻게 추이했는지, 생활 수준이나 평균 수명은 어떻게 변동했는지 하는 것에 대한 이해와 맞추어, 그것만으로는 깔끔히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까지도 해명하려고 하기 위함이다. 이 책에서 논의했듯이, 작은 이야기의 위상으로 내려가면, '대중의 뱃구레'라고 일괄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가 드러났다. 산업 발전의 한편에서 사람들은 왜 뱃구레의 자유만이 아니라 부자유도 안게 되었는지, 사람들은 어떠한 시대 상황 속에서 빈곤에 직면했는지, 그에 대해 어떠한 손이 내밀어졌는지, 또한 내밀어진 손은 어떠한 동기에서 지탱되었는지, 급속한 도시화에 의한 도시 농촌 사이의 관계 변화는 사람들의 먹을거리에 대한 사고방식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그리고 애초에 사람들은 실제로 무엇을 먹고 그 먹을거리는 어디에서 왔는지.

이와 같은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 쌍방을 시야에 넣은 물음이 사회 정책의 입안, 운용 등에는 빠질 수 없다고 인식하게 되어, 그건 임시 방편 경제라는 개념으로 논의되기 시작한다. 이 사고방식에 의거하면, '일상 생활의 변통', 즉 뱃구레로부터 역사를 그리려 하는 이 책은 '임시 변통의 역사'의 구체적인 실천 가운데 하나이며, 따라서 새로운 역사학을 구축하려고 하는 시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4. 뱃구레의 현대로 -매일 먹는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 책을 '뱃구레의 현대'와 연결하고자 한다. 

근대의 뱃구레를 둘러싼 다양한 문제를 물으면서, 그 대부분에 영향을 미치고 있던 사건은 '쌀 소동'과 '칸토우 대지진'이었다. 단순히 말하면, 쌀 소동을 계기로 해서 '먹을거리'를 사회의 문제로 생각하는 시점이 생겼다. 또한 칸토우 대지진 이후는 '먹을거리'를 지역사회사업의 일환으로 편입하면서, 노동의 합리화라는 목적 이외의 평가가 이루어지게 되었다(그림 -2, 그림 -3). 즉, 그것은 '고립화'된 뱃구레를 단지 '집단화'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자율'하게 하고, '연대'하게 하는 사회적인 운동이라 바꾸어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곳에 새로운 공동체가 재편될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자는 오사카시 사회국의 공영 식당의 운영, 각지의 공설 시장의 설치, 오오하라 사회문제연구소의 설립, 오코시 공동취사조합의 설립이며, 후자는 아이치현의 공존원, 중선관, 오코시 보육소, 오사카의 세틀먼트 운동, 잔반을 분배하는 지역사회사업 단체의 탄생 등이 그에 해당한다.

그림 -2 칸토우 대지진의 밥지어 나눔(사진그림엽서, 1923년)

출처: 필자 소장

 

그림 -3 바쿠로마치馬喰町 화재 현장 수제비 판매

출처: 두루마리 그림 연구회(絵巻研究会) 편찬 「다이쇼우 진재 그림집(大正震災画集)』 일본판화사日本版画社, 1924년, 센린洗鱗 그림. 국립 국회도사관 디지털 콜렉션. 

 

 

먹을거리의 분배 논리로서 '공공성'이 중시된다는 점에서, 공설 시장은 제2장에 등장한 '공영 식당'과 비슷하다. 양자는 쌀 소동을 계기로 해서 급속히 전국으로 확산되었단 점에서도 공통된다. 1922년에 간행된 「본방사회사업本邦社会事業』에서도 제8장이 '공설 시장'이며, 제9장이 '간이식당 및 공설 목욕탕'으로 되어 있듯이,(26) 근대 일본의 '사회사업'으로서 시장과 식당은 늘 함께 논의되었다. 

먹을거리의 가격 변동과 재해는 어느 쪽도 꽤 광범위하게 많은 사람들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쌀 소동과 대지진이 먹을거리와 사회를 생각하는, 또는 텅 빈 뱃구레의 존재를 사람들이 공유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현대의 뱃구레도 또한 틀림없이 사회 전체의 문제에 연동되어 있을 터이다. 끊임없는 물가의 변동과 지진 피해는 바로 현대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은 여기에서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다.  

먹는다는 일이 자기 책임이라 여겨지게 되고나서 오래된 현대에서는 그 역사적 경위를 바탕으로 사회 제도를 논하는 것의 중요성이 가벼이 여겨지는 경향이 있는데, '누가 뱃구레의 걱정을 하는가?'라는 물음에는 좀 더 유연하고 다양한 논의가 있어도 좋다고 생각한다.(27) 앞에 기술한 근세에서 근대로 변화한다는 안에서도 그 하나의 답을 찾을 수 있다. 정책적으로는 근세로부터 단절하기 시작했다고는 하나, 이러한 상황 안에서 필연적이라 할 수 있는 근대 빈곤 문제의 분출은 여러 작가에 의해 그려지고, 또한 행적 각 기관이나 민간 연구소도 상세한 조사를 실시하고 개선책을 제안했다. 그리고 지역 사회사업의 실무가 네트워크에서 보았듯이, 눈앞의 지역의 문제를 우선 해결하는 걸 목적으로 해 '구제', '방빈', '감화' 등을 내걸었던 새로운 시책이 차례차례 탄생했다. 요컨대, 근대에는 아직 심각화되며 또 확대되는 빈곤 문제에 대해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입장에서 사회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사회적 관심'이란 것은 국가라는 큰 주체만이 아니라, 지역의 산업 담당자나 사회사업가 같은 국가와 개인의 사이에 자리매김되는 중간적인 조직의 존재에 의한 것으로, 그들이 수행한 역할과 연대를 포함한다. 

그 뒤, 바로 일본 전체의 뱃구레가 위기에 처해진 것은 연이은 전쟁의 시대였는데, 2차 세계대전 이후 사람들의 뱃구레를 우선 채웠던 것은 해외로부터 보내져 온 대량의 원조 물자였다.(28) 또한 전후, 특히 고도 경제성장기 이후 농촌과 도시 사이에는 근대에 경험했던 이상의 극적인 변화가 발생해, 농업의 기계화, 화학화가 급속히 진행된다. 나아가 유통 혁명이 시장 경제를 점점 광역화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29) 흙과 뱃구레의 거리는 멀어지기만 하고,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뱃구레가 비게 되는 일도, 그리고 뱃구레를 가지고 있다는 것조차도 잊어 버렸다. 이것이 현대의 뱃구레를 둘러싼 문제를 더욱 보기 어렵게 하고 있다. 그리고 풍부한 먹을거리의 홍수 속에서 그 먹을거리가 어떻게 생산되고 있는지를 상상조차 할 수 없고, 타인의 뱃구레만이 아니라 자신의 뱃구레에조차도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 오가는 현대 사회가 도래했던 것이다. 먹는다는 것이 본격적으로 자기 책임화되는 것은 오히려 현대부터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방랑기』로 돌아가자. 이 소설에, 차라리, 이 소설을 쓴 하야시 후미코가 말하려고 했던 것에 귀를 기울여 보고자 한다.

『방랑기』 속의 '나'는 공복이면서 위고의 「비참한 사람들(레미제라블)」을 읽고 있다. 그리고, "단 한 조각의 빵으로 19년의 감옥 생활을 견뎌 가고, 인간도 인간. 세상도 세상이겠지"라 중얼거리고, 막과자가게로 가서 1전의 눈깔사탕을 5개 사서 배고픔을 참고 견딘다. 그러한 상황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먹는 것만 생각하는 것도 비참한 생활이다. 대체, 나는 누구지? 뭐야 이게. 어째서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걸까"라고 자조적으로 표현하고, 

 

삶은 달걀아 날아 와라.
팥소 붕어빵아 날아 와라.
딸기잼 빵아 날아 와라.
호우라이켄蓬莱軒의 중국 국수야 날아 와라.
아아, 메밀국수집의 삶은 물이라도 그냥 마시고 올까?

 

라고 부르짖은 뒤, 먹기 위해서 '나'는 위고를 팔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50전도 어려울 듯하다..."(30)라고 하야시는 '나'에게 말한다. 

위고의 「비참한 사람들」이란 프랑스의 소설가 빅토르 위고가 1862년에 쓴 「레 미제라블」이다. 하야시는 '나'에게 공복으로 이 책을 읽게 하고, 이 상황이 세계의 어딘가에도 똑같이 있는 보편적인 사실이란 것을 시사함과 함께, 공복인 사람에게 뱃구레에 넣을 단 한 조각의 빵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적혀 있는 한 책은 겨우 50전도 되지 않는다는 말을 마지막에 덧붙임으로써, '내'가 빠져 있는 이 엄혹한 상황에 대해 사회가 무관심함을 가장하고 있는 문제의 심각함을 은근히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걸 묻기 위해, 하야시는 이 문장을, 다시 말하자면 「방랑기」를 쓴 것이라 생각한다. 

 

사랑 따위란 뻔한 것이다
흩어지는 마음 참으로 덧없이
한 그릇의 밥에 무너져 내리는 걸식의 환희
콧물을 훌쩍이며 자존심을 완전히 버리고
이 밥 먹는 모습의 평온함
이것도 나이고 진실의 내 모습이요
가엾게도 모든 걸 잊어버리는 굶주림의 길
꼬리를 흔들며 먹는 오늘의 밥이다.
노숙자의 발길 닳는 곳
온통 광야로 변한 거리의 바람
아아 무정한 바람과 나뒹구는 내 모습이여.

 

넘치는 듯한 먹을거리의 풍요함 속에서 먹을거리 그 자체에 대한 무관심, 분배의 불균형에 대한 무관심을 짐짓 모른 체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올바르게' 살고 있다고 믿는 우리 안에 잠재된 잔혹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뱃구레'를 가지고 있다는 것, 살기 위해 누구나 '날마다 먹는다'는 것, 다만 이 단순한 사실을 깨닫는 데에서부터 시작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거기에서 세계를 바꿀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나뿐만이 아닐 터이다. 

 

 

 

주석

(1) 이와 같은 시점에서의 연구로, Katherine Leonard Turner, How the Other Half Ate: A History of Working-Class

Meal at the Turn of the Century, Califoria Studies in Food and Culture, 2014가 있다. 이 책은 주로 도시 노동자에 주목한 연구이다. 

(2) 키쿠치 이사오菊池勇夫 「기근의 사회사(飢饉の社会史)』 校倉書房, 2000년(초판은 1994년)은 근세의 기근을 생생히 묘사하는 동시에, 기근에 대한 번藩의 시행, 마을의 제재制裁, 영주의 아사 공양 등도 언급하고, 기근을 사회의 문제로 논하고 있다. 

(3) 하마타니 마사토浜谷正人 「근대 일본 농촌의 지역적 변용 -토호쿠 지방의 향장제를 중심으로(近代日本農村の地域的変容 -東北地方の郷蔵制を中心として)」 『人文地理』 28(5), 1976년, 1~31쪽.

(4) 우에스기 요우잔上杉鷹山・나카죠우 요시스케中条至資・하나토 타이가花戸太花 『카테모노かてもの』 1802년(이 책은 1914년에 요네자와米沢 시립도서관에 의해 복간되었다. 또한 원본은 이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3) 타카가키 쥰코高垣順子 「카테모노かてもの」 「調理科学』 6(3), 1973년, 185~190쪽. 

(6) 키타하라 이토코北原糸子 「도시와 빈곤의 사회사 -에도에서 도쿄로(都市と貧困の社会史 -江戸から東京へ)』 吉川弘文館, 1995년.

(7) 시오미 센이치로우塩見鮮一郎 「빈민의 제국 수도(貧民の帝都)』 文春新書, 2014년(초판은 2008년), 46〜51쪽. 

(8) 타마 신노스케玉真之介 「1934년 토호쿠 대흉작과 향장의 부흥 -이와테현을 대상으로(一九三四年の東北大凶作と郷蔵の復興 -岩手県を対象として)」 『農業史 研究』 47, 2013년, 22~34쪽. 

(9) 앞의 (3), 2쪽. 

(10) 앞의 (7), 52~55쪽. 

(11) 앞의 (6), 242~243쪽. 

(12) 에하라 아야코江原絢子 「가정 요리의 근대(家庭料理の近代)』 吉川弘文館, 2012년. 

(13) 시라이 세이조우白井清造 편 「부랑자의 일기(浮浪者の日記)」 하야시 히데오林英夫 편 「근대 민중의 기록4  유민(近代民衆の記錄四 流民)』 新人物往来社, 1971년, 211쪽(원문은 「개조改造」 1937년 3월호에 게재되었다).

(14) 시오미 센이치로우 『에도의 빈민(江戸の貧民)」 文春新書, 2014년, 앞의 (7). 

(15) 영국의 근세・근대 전화기에 주목해, 18세기를 중심으로 등장했던 '중간 단체'에 초점을 맞추어 국가와 사회의 재편 과정을 그려낸 연구로, 하세가와 타카히코長谷川貴彦 『영국 복지 국가의 역사적 원류 -근세・근대 전환기의 중간 단체(イギリス福祉国家の歴史的源流 -近世・近代転換期の中間団体)』 東京大学出版会, 2014년이 있다. 이 책에서는 중간 단체를 지역사회와 중앙 정부를 매개하는 '자발적 결사(연합)'이라고 정의한다. 

(16) 사이토우 오사무斎藤修 『에도와 오사카 -근대 일본의 도시 기원(江戸と大阪 -近代日本の都市起源)」 NTT出版, 2002년. 

(17) 졸라 저, 朝比奈弘治 역 「파리의 뱃구레(パリの胃袋)」 藤原書店, 2011년(초판은 2003년. 그 이전에 武林無想庵에 의한 번역 「巴里の胃袋』가 1931년에 春秋社에서 간행. 원저는 1873년 간행). 

(18) 요시다 노리코吉田典子 「졸라 『파리의 뱃구레』와 마네의 정물화 -근대 예술에서 물질주의와 상품성(ゾラ『パリの胃袋』とマネの静物画ー近代芸術における物質主義と商品性)」 『日仏美術学会会報』 24, 2004년, 3~25쪽. 

(19) 아사히나 코우지朝比奈弘治 「역자 해설」 앞의 (17), 440~441쪽. 

(20) 이에 대해서는 이미 라치 치카라良知力 「저편 강가에서의 세계사 -하나의 48년 혁명사론(向う岸からの世界史 -一つの四八年革命史論)』 ちくま学芸文庫, 1993년이라는 좋은 책이 있다. 

(21) 오오카도 마사카츠大門正克 「근대 일본과 농촌 사회 -농민 세계의 변용과 국가(近代日本と農村社会 -農民世界の変容と国家)』 日本経済評論社, 1994년, 4쪽. 

(22) 근대 국민 국가에게 농農을 매개로 한 국민의 형성이 중시된 나머지, 재일 조선인, 소개자疎開者, 개척 농민, 해외 이민들이 '타자'로 돌보아 오지 않았다는 것을 문제 제기한 연구로, ①야스오카 켄이치安岡健一 「'타자'들의 농업사(「他者」たちの農業史)』 京都大学 学術出版会, 2014년이 있다. 또한, 아이치현 사회과는 1928년에 간행된 「극빈자 조사』의 말미에 부록으로 「조선인에 관한 조사(朝鮮人に関する調査)」를 게재해 구빈법救貧法이 현주소 구제 제도이기 때문에, 「거주 기간 1개년 미만인 자는 구빈법의 구제 외로 두고 있다(居住期間一ヶ年未満のものは救貧法の救済の外に置かれて居る)」는 점, 따라서 조선인을 포함한 돈 벌러 온 사람들의 대부분이 구제의 '밖'에 놓여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②아이치현 사회과社会課 편 『아이치현 사회과   조사 자료   제14편   극빈자 조사(愛知県社会課 調査資料 第一四編 極貧者調査)』 아이치현 사회과, 1929년, 178쪽. 

(23) 나가사키 여성사 연구회 『나가사키의 여자들(長崎の女たち)」 제2집, 長崎文献社, 2007년, 248쪽. 

(24) 린 헌트 저, 長谷川貴彦 역 『세계화 시대의 역사학(グローバル時代の歴史学)』 岩波書店, 2016년. 

(25) 하세가와 타카히코長谷川貴彦 「Makeshift Economy론의 사정 -'복지'로의 전체사적 접근(논점을 둘러싸고)(メイクシフト・エコノミー論の射程 -「福祉」への全体史的アプローチ(論点をめぐって))」『歴史と経済』 57(2), 2015년, 33~39쪽. 

(26) 키네부치 요시후사杵淵義房 『우리나라 사회사업(本邦社会事業)』 冬夏社, 1922년. 

(27) 이에 대해서는 카모 나오키加茂直樹 「일본 사회보장 제도의 형성(日本の社会保障制度の形成)」 『現代社会研究科論集』 2, 2008년, 1~27쪽이나, 타케다 히사요시武田久義 「일본의 공동체와 생활보장 제도의 변화(4) (日本における共同体と生活保障制度の変化(四))」 『桃山学院大学経済経営論集』 50\(1・2 합병호), 2008년, 29~48쪽. 

(28) 키시 야스히코岸康彦 「식과 농의 전후사(食と農の戦後史)』 日本経済新聞社, 1996년에 상세하다.

(29)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변화에 대해서는 근대와의 연속성, 단절성의 양쪽을 시야에 넣으면서 원고를 수정할 예정이다.  

(30)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 『방랑기放浪記』 新潮社, 1985년, 311~312쪽. 

(31) 앞의 (30), 3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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