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뱃구레의 증대와 먹을거리의 산업화 -대량 생산·대량 가공 시대의 도래
1. 먹을거리의 산업화 -대량 생산과 대량 가공
지금까지 살펴본 각종 외식 시설, 집단식과 공동 취사의 융성은 대량의 식재료 소비의 실현을 의미하고, 그건 근세 이래의 식재료 공급 체제의 대규모 재편을 촉진했다. 그렇다면 근대란 '먹을거리의 산업화'가 급속하고도 대규모로 시작되는 시대이기도 했다고 할 수 있다.
메이지부터 다이쇼우 시기에 걸쳐서 소고기·돼지고기·서양요리·뱃놀이 요리(両国船料理)·남경 쌀(역주; 인디카 계통의 수입 쌀)·줄무늬엿(糸切飴)·도시락집·단팥죽집·떡국·감자가 유행하고, 우유나 빵이 출하되며, 부식이 되는 채소나 과일 등도 다양해졌다. 서양 요리가 보급됨에 따라 소스나 케찹 등 새로우 ㄴ조미료가 더해졌다. 얼음을 공업적으로 생산하는 업자가 나타나고, 캔이나 양주의 생산도 시작되었다. 경음식점은 근세에는 읍내 사람이 가장 많이 이용했지만, 근대는 그것이 더욱 널리 보급된 시대였다. 메이지 말부터 커피가게, 밀크홀, 끽다점의 종류가 증가하고, 메밀국수, 우동, 소고기덮밥, 굴밥, 두부, 찻물밥, 고기 된장국, 미꾸라지탕 등을 파는 가게도 계속 탄생했다.(1)
예를 들면, 1925년에 간행된 「대오사카 기념 박람회지(大大阪記念博覧会誌)」에 의하면, 당시 오사카 시민의 인구는 203만 명이고, 하루 식재료 소비양은 채소류 11만 2300관(1관은 3.77킬로그램으로 약 421톤), 과실류 39만 4100관, 선어·소금말린고기류 7만 6500관, 닭과 달걀류 3300관, 조수고기류 8200관, 건물류 1만 2200관, 곡물류 6800섬(1섬은 10말, 4말이 1가마니로서, 1만 7000가마니), 일본주류 0.51섬, 두숙류 0.4섬이었다고 한다.(2)
이들 대량의 식재료 생산은 누가 어떻게 떠받치고 있었을까?
산업화, 공업화의 진전이 증가하는 노동자들의 식재료 소비를 충당하는 먹을거리의 산업화를 동시에 촉진한 것에 대해서는 영국이나 미국을 사례로 한 연구가 이미 있다.(3) 그러나 일본에서는 미식米食의 보급과 그 생산 공급 구조의 변화에 대한 연구가 있는 이외에는(4) 이 시기의 식재료 생산을 산업으로서 구조적으로 파악한 연구는 발견되지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급속한 공업화를 떠받친 원재료, 연료, 식재료, 노동력의 공급원이 된 것은 농산어촌이었다. 예를 들면, 생사 생산을 위한 양잠업, 광공업의 연료가 되는 장작과 숯 생산, 도시 주민이나 공장 노동자의 식재료 증산, 가내공업 또는 공장에서 구하는 노동력의 공급 등은 모두 농산어촌에 의거하고 있었다. 이건 농촌이 상품 경제의 소용돌이에 한층 깊게 말려 들어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5) 1차 세계대전에 수반한 호경기, 쌀값 상승, 비료값 폭등, 임금 상승, 농업 노동력의 유출 같은 일련의 현상은 이러한 구조적 변화가 표출된 결과였다.
말할 필요도 없이, 도시의 식탁에 오르는 먹을거리는 농산어촌에서 생산되어 운반되어 온 것이었다. 즉, 이 시기의 산업화는 단순히 새로운 먹을거리나 식습관이 탄생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먹을거리의 대량 생산과 대량 가공의 시작을 의미하고 있었다.
이 장에서는 이와 같은 농촌과 도시의 식탁 사이에 있는 다양한 현상을 '절임'이라는 명조연에 주목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절임과 근대
코우코우香々, 코우코우, 타쿠앙沢庵', 타쿠앙
지금까지 살폅보았던 한그릇식당, 공영 식당, 「직공 사정職工事情』이나 『여공 애사女工哀史』에 기록된 여공의 식사, 스즈카마 공장의 식사, 공동 취사의 식사 안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것은 '절임'이다.
"절임인데 이건 무의 둥근 모양 그대로를 한 푼 정도의 두께로 잘라 놓아서, 이놈을 아주 소중한 듯이 2조각만 집어먹어 주는 것이다"(6)라는 기술이 있는 『여공 애사』에는 다음 같은 식단표가 자료로 게재되어 있다. 이것이 얼마나 빈약한 내용이었는지 하고 검토하기 이전에 눈을 끄는 단순한 사실은, 거의 매일 절임이 식탁에 올라오고 있다는 점이다. 이건 앞에 게시한 스즈카마 공장, 오코시 공동취사조합의 식단에서도 똑같다. 무의 쌀겨절임을 오사카에서는 '코우코우'라 하고, 도쿄에서는 '타쿠앙'이라 한다. 아무튼 절임, 절임, 타쿠앙, 타쿠앙이다.

당시 전국의 공장에서 식사 또는 한그릇식당이나 공영 식당의 한 접시, 나아가서는 배달상이 만드는 도시락에 거의 반드시 타쿠앙이 들어가 있었다고 하면, 그건 얼만큼의 양이 되었을까? 또한 그 무는 대체 누가 생산하고, 누가 절임으로 만든 것일까?
새로운 기호嗜好와 대개혁
야나기타 쿠니오가 「메이지 다이쇼우 역사 세상편(明治大正史世相篇)」에서 "따뜻한 밥과 된장국과 조미액 절임과 차와 하는 생활은 사실은 현재의 최소 가족제가 겨우 만들어낸 새 양식이었다"고 기술하는 점은 이미 지적했다. 공장에서는 체계적인 취사를 정비함으로써, 거의 이에 가까운 집단식을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절임은 '조미액 절임'이 아니라 '타쿠앙'이나 '칠채 절임(福神漬)'일 필요가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조미액 절임은 장기 보존을 할 수 없고, 3일에 1번씩 정도로 새롭게 절여야 하기 때문이다. 몇 명의 식사를 준비한다면, 소금만으로 간단히 절일 수 있는 조미액 절임은 간편한 일품일 것이다. 그러나 대량의 식사를 매일 준비하려고 하면, 적어도 수고를 줄이기 위해서는 자르는 것만, 또는 보기 좋게 담는 것만으로 끝나는 타쿠앙이나 양념 절임이 취사장에서는 요긴히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들은 장기 보존이 가능하며, 한번에 절이면 된다는 점이 이점이었다.
「메이지 다이쇼우 역사 세상편」에는 '채소와 소금'에 대해 논한 부분에 절임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절임은 지금도 일본 마을의 향기로운 것에서 두드러진 하나로 꼽히고 있는데, 이것이 유행해 또한 어느 시대의 새로운 기호이며, 또 우연한 발명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채소의 눈부신 개량은 지극히 최근이 되고나서의 사실이어서, …… 개량 이전의 채소는 줄기만 잘 뻗던 것이었다. …… 칸사이關西 쪽에서는 절임이란 이름은 무에 한정되어 있다. 곧 이 절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차츰 적용을 줄기 이외의 것으로 미치게 했던 것이었다. 타쿠앙은 과연 그 이름의 승려가 생각해 낼 법한 대개혁이었다. 소금에 절인 채소가 물기가 돌아 오래 보존되지 않는 것을 막기 위해, 또는 식해의 이치를 응용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까? 곧 무를 충분히 말린 뒤 소금에 다량의 쌀겨를 더해, 한편으로는 맛과 색을 더하고, 동시에 이로써 나머지 수분을 흡수시켜 이 특수한 발효를 완성시키려 한 것은 공적이었다.(7)
우선, 절임에도 '시대의 새로운 기호'가 발견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절임이라는 이유만으로 꽤 오래된 어느 부식물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절임도 다이쇼우 시기에 크게 변화했다. 그 첫째는 절임의 대량 생산화이다. 각 가정에서 절이는 절임만이 아니라, 집단화된 뱃구레를 위해 대량으로 절일 필요가 생긴 것이다. 물론, 근세 이래 칸사이에서는 '쿠키야茎屋', 에도에서는 '츠케모노야漬物屋'라는 절임 제조 전문의 업자도 존재했지만,(8) 다이쇼우 시기에 들어서면 신규 업자가 증가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둘째는 절임 맛의 균일화이다. 이건 대량 생산에 수반한 현상이기도 하다. 집이나 지역에 전하는 독자의 맛 가감이라는 것보다 농회, 농업시험장, 농학 박사 등에 의한 과학적 절임의 레시피가 등장했단 것이 그걸 후원했다. 셋째는 새로운 절임의 탄생이다. 타쿠앙은 쌀겨로 절인다.(9) 칠채 절임에는 간장과 설탕이 필요하다. 대량으로 절이려면, 대량의 겨와 설탕과 간장이 필요했다. 그 배경에는 흰쌀밥의 보급이나 대만으로부터 들여오는 설탕의 이입이 관련되어 있었다고 추측한다.
야나기타는 절임과 채소 재배의 관계에도 주목한다. 줄기만을 기르는 종래의 채소를 개량해 그밖의 부분, 즉 무로 말하면 '뿌리'를 비대화시키는 개량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건 특히 타쿠앙의 융성과 관련해서 생각하면 흥미로운 지적이다. 사실은 타쿠앙이란 것은 비교적 새로운 발명으로, 메이지 시기 이후 그것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것에 이 시대의 특징이 있었던 것이다.
무의 행방
농상무성의 「도쿄의 채소 과실의 판매 조직에 관한 조사(東京二於ケル蔬菜果実ノ販売組織ニ関スル調査)」는 채소나 과실이 생산자로부터 소비자의 뱃구레에 닿기까지의 경로를 조사한다.(10) 이에 의하면, 채소 중에서도 무는 '타쿠앙'으로서의 수요가 많기 때문에, 타쿠앙 제조용 말린 무에는 특별한 경로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적혀 있다.
우선, 키타토시마군北豊島郡의 카미네리마무라上練馬村, 시모네리마무라下練馬村, 오우지마치王子町, 시무라志村 등의 주산지에는 마을 안에 많은 타쿠앙 제조자를 겸한 무의 생산자가 있었다. 또한, 전문 절임 제조업자, 현지 중매인을 겸한 생산자도 있었다. 그 때문에 시장에 말린 무 채로 출하하는 것은 드물고, 타쿠앙 제조자를 겸한 생산자는 타쿠앙으로 만들고나서 절임업자에게 판매하든지, 시내의 절임가게, 요리집, 밥집, 채소가게, 또는 도매로 판매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명기되어 있다. 중매인을 겸한 자는 자가 생산의 말린 무와 구입한 말린 무를 무 전문의 절임업자에게 판매했다. 절임업자는 이 말린 무로 타쿠앙을 제조하고, 시내의 요리집, 밥집에 판매했다. 후술하듯이, 재외 일본인에게 보내는 것도 있었다. 채소의 생산자가 스스로 소매 행상이 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인분뇨 운반의 경로를 이용해 직접 소비자에게 타쿠앙을 가지고 가는 일은 자주 있었다.
채소나 과실이 사람들의 뱃구레에 닿기까지에는 복수의 업자를 거치기 때문에, 소매 가격은 생산자의 손을 떠난 뒤 2배에서 4배나 된다. 예를 들면 키타토시마군 오우지마치 키타쥬우죠우北十条에서 무 100개를 출하할 경우, 생무라면 생산비가 0.82엔인 바, 소매 가격은 2.5엔(생산자 이익 0.08엔, 도매 중개료 0.1엔, 중개 소매인 이익 1.5엔)이 된다. 타쿠앙으로 만들면, 생산비가 2.366엔인 바, 소매 가격은 5엔(생산자 이익 0.279엔, 도매 중개료 0.294엔, 중개 소매인 이익 2.061엔)이 된다. 무의 생산자에게는 좀 수고가 들어도 타쿠앙으로 만드는 쪽이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타쿠앙을 대량으로 구입할 필요가 있을 경우, 소매 가격은 생무의 2배가 되기 때문에, 비용을 삭감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궁리가 필요했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3. 공장·여공·절임·비료
집단으로 절임을 먹는다는 것
19121년 9월 15일에 우노 리에몬이 교토 오사카 고베의 공장 취사 담당자를 모아서 개최한 '취사회'에서는 '절임의 일'이 의제에 올랐다.(11) "절임은 우리나라 사람의 쌀에 버금가는 주요한 먹을거리이기에, 기숙사의 식당에서 절임의 문제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이다"라고 시작한 이 논의 안에서 각각의 취사 담당자의 말을 골라내 보자.
저희 쪽에서는 나고야 타쿠앙을 구입해 쓰고 있는데, 이것은 현지 절임 도매상에서 입찰로 구입하는 일도 있고, 나고야의 상인에게서 주문하는 일도 있는데, 대저 1관에 22전 정도의 가격입니다만, 여하튼 하루에 100관 정도 먹기 때문에 충분히 이것을 구입하려면 상당히 애를 먹고 있습니다.
저희 쪽에서는 센슈우泉州에서 절인 것을 구입하는데, 역시 100관에 22엔 정도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매실장아찌, 락쿄, 가지의 새 절임 등을 주는데, 매실장아찌라면 3개, 락쿄라면 17문, 가지는 소금절임으로 긴 가지를 1개 반의 비율로 줍니다. ······ 물론 이것은 아침뿐입니다. 타쿠앙의 필요한 양은 하루 1인분 32~33문 정도씩을 필요로 합니다만, 아침에 이런 식으로 해서 다른 것을 줄 때에는 매우 타쿠앙의 필요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그다지 비경제적이지 않습니다.
저희 쪽은 앞에 말한 대로 청부이기 때문에 그 청부인이 절임을 구입해서 오는데, 아무래도 마뜩찮아서 현재는 ······ 좋은 분량만을 그대로 먹이고, 맛이 나쁜 분량은 잘게 썰어 생강 간장을 뿌려 주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최근 어떤 계획을 세워 그 개선을 도모하려 하고 있다. 또한, 가지 등의 새 절임을 야간 작업 때에 한하여 때때로 주고 있습니다.
하루의 소비량을 보면, 고작 절인이라고 넘길 수 없는 중요한 사항임이 실감된다. 타쿠앙 이외의 새 절임 등은 매일의 식단 안에서도 특별한 일품이었던 듯하다. 야간 작업 때만 특별히 먹을 수 있는 가지의 새 절임이 있다는 것은 흥미롭다. 거꾸로 말하면, 일상은 언제나 타쿠앙이라는 것이다.
이들 절임은 입찰이나 직접 상인에게서 구입하는 방법, 청부로 절이게 하는 방법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 다음에서 보듯이, 자가 제조로 절이는 공장도 있었다.
저희 쪽은 자가 제조로, 조달 청부인이 절임 창고를 가지고 있어서 땅에 술집의 작은통을 묻고 거기에 매년 이세伊勢 방면에서 무를 구입해 절이는데, 아무래도 누름돌이 어긋나는 게 생겨 많은 양 중에는 맛이 나쁜 것이 섞어서 곤란하기에, 그걸 여공에게 주면 한 입 먹어 보고 곧바로 버려 버립니다. 때문에 그다지 맛이 나쁘지 않은 분까지도 마구 버리는 형편이라 매우 비경제적이기에, 그래서 그런 것들 가운데 좋은 부분만을 점심과 저녁에 먹이고 나쁜 부분은 잘게 썰어 간장을 뿌려 아침밥으로 주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큰 통에 몇 백 관씩 절이는 건 성적이 좋지 않기에 역시 이번은 작은 통 제도로 변경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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