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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농업 전반

뱃구레의 근대 -제5장 흙과 식탁의 간격

by 雜s 2026. 3. 23.

제5장 흙과 식탁의 간격 -음식물 생산의 구조 전환과 농민·농가·농촌

 

 

 

1. 농촌과 도시의 간격

 

'식량의 막힘 없는 공급'

사람들의 뱃구레에 들어가기 직전의 삭탁 또는 밥상 위에 있는 먹을거리는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 어떻게 생산된 것일까? 이 장에서는 논밭의 흙을 경작하는 사람들의 시점에서 근대라는 시대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민속학자인 이전에 농업경제학자였던 야나기타 쿠니오柳田國男는 1929년에 『도시와 농촌(都市と農村)」을 간행하고, 도시의 탄생과 확장에 수반하며 생긴 농촌의 변화를 논한다. 야나기타는 도시와 농촌의 문제를 어느 한쪽의 입장에서 논해서는 안 되며, 특히 지금까지 농촌의 입장에서 이 시대의 변화를 생각하는 논고가 적은 것을 비판하면서 이 책을 쓰기 시작한다. "일본의 도시가 원래 농민이던 종형제에 의해 만들어졌다,"(1) 즉 일본의 도시는 농촌으로부터 유입해 온 사람들이 '노동자'가 됨에 따라 성립했다는 것을 깨달았던 야나기타의 입장에서 보면, 도시의 문제는 곧 농촌의 문제였다.

일찍이 농촌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일단 흙을 떠나서 노동자가 되면, 그 뱃구레는 스스로가 아니라 누군가가 농사지은 먹을거리에 의해 채워지게 된다. 먹을거리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들은 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자'가 되기 때문에, 노동자의 증가는 먹을거리의 '소비자'가 늘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이미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도시에는 이렇게 해서 새롭게 탄생한 소비자가 넘쳐나, 먹을거리의 산업화가 시작되었다.

이 변화의 와중에 있던 야나기타는 '도시의 사람들'이 소비자로 '흙을 경작하는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단순한 '식량의 막힘 없는 공급'으로 수렵해 나아가는 세정을 놓치지 않는다.(2) 근세 일본의 마을에는 벼농사, 밭농사만이 아니라, 어로나 산일, 직물이나 세공물 등 다양한 여러 돈벌이를 조합시킨 복합적인 생업이 성립해, 사람들은 자신의 뱃구레를 어느 정도 자신들이 생산한 것으로 채워 가면서 일부를 시장에 내놓으며 살아가고 있었다.(3) 근대의 인구 증가와 도시로의 인구 유입은 이러한 흙을 경작하는 사람들의 삶의 구조에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야나기타는 도시의 식재료와 원료를 확보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특수한 농업은 충분히 애호하면서 다른 동종의 사정 속에서 성장하려 했던 생업, 이른바 농農이란 정의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소외시키고," 또한 "많은 농학자들은 농가를 농업자라고 부르고 농촌을 농農만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라 보려 했"기 때문에, 농촌에서 사람이 살아간다는 의미가 대단히 단순화되고, 협소화된 것을 비판적으로 논한다.

이건 구체적으로는 어떠한 변화인 것일까? 이 장에서는 제3장, 제4장과 관련지어 다시 아이치현을 무대로, 특히 나고야시 근교의 농촌이 경험했던 이 시대의 변화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새로운 농업

도시의 탄생과 표리 관계에 있는 새로운 농업의 한 가지 형태는 어느 특정 농산물을 특정한 지역에서 집약적으로 생산하는 것이었다. 이를 '주산지 형성'이라는 말로 설명했던 타마 신노스케玉真之介에 의하면, 일본의 경우 특히 2번의 세계대전 사이에 '노동자의 도시로의 집적이라는 상황에 걸맞는 대량 유통의 체제'가 '농산물 시장의 재편'에 의해 정비되었다.(4) 도시의 농산물 수요가 비약적으로 증대했던 것만이 아니라, 식문화의 서양화에 의해, 특히 청과물, 축산물의 수요가 뚜렷하게 늘어났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진행된 철도망의 확충이 이들의 광역 유통을 가능케 하자, 각지에서 청과물을 중심으로 한 주산지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소고기 전골을 먹고, 우유를 마시려면 소의 사육이 필요하고, 양식당에서 먹는 돈카츠는 양돈이나 양배추라는 서양 채소의 재배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미 앞장에서 보았듯이, 공장의 식당에서 매일, 매끼, 타쿠앙 절임을 공급한 것은 절임용 무의 대량 생산이 있어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먹을거리의 장과 경험이 크게 변화한다는 것은 곧, 농업 그 자체도 새로운 단계로 발을 내딛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시기에 먼저 '쌀'에 '누에고치'를 더한 농업 경영이 널리 보급되는데, 다이쇼우 시기부터 쇼와 초기에 걸쳐서 공황의 영향도 있어 '쌀'과 '누에고치'의 구조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상품작물을 더해 그 생산에 특화해 나아가는 움직임이 나타나게 되었다. 앞장에서 본 아이치현의 '무' 생산은 바로 그 좋은 예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그래서 아래에서는 아이치현에서 이 시기에 흙을 경작했던 사람들을 찾아, 그곳에서 무엇이 일어났는지, 사람들은 어떠한 상황에 직면했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아이치현은 도쿄부와 오사카부에 이어 공장 수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농업 생산액도 전국에서 상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1920년의 농가 호수는 전국 1위, 농업 생산액은 5위, 주요 농산물 생산량으로는 연근, 오이, 호박 등이 전국 1위였다.(5) 즉, 아이치현은 이 시기, 전국 유수의 공업 지역임과 함께 농업 지역이기도 했다.

1912년 3월에 『아이치현 산업 개황(초록)(愛知県産業概況(抄))』은 각 업종의 생산액을 보여주고, 현 안의 생산 동향을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자연 지리의 유리함에 더해 수송 기관의 시설 또한 매우 발달했기에 해마다 호수의 증가와 함께 식산 흥업의 길도 배로 발전하는 경향을 나타내기에 이르렀다.(6)

 

표 5-1에 그걸 나타내면, 이 시기 이미 전체에서 차지하는 공업 생산액의 비율이 50% 넘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료에 의해 다시 그 뒤의 수치를 더하면, 아이치현 산업 구조의 비약적인 변화는 오히려 1910년 이후라고 볼 수 있다. 그건 첫째로 생산 합계액의 급속한 증가, 둘째로 농업 생산액 비율의 저하와 공업 생산액 비율의 증가에 의해 발생했던 양자의 격차 확대로 특징지을 수 있다. 1928년에는 농업 생산액은 14%, 공업 생산액은 50%를 훨씬 넘은 81%에 달하고 있다. 1921년의 아이치현은 공장 7457(그중 섬유 공장은 2984), 직공으로 남성 5만 3576명, 여성 8만 8637명을 보유한 일본 유수의 산업 집적지역이었다. 섬유 산업의 비율이 높기 때문에, 직공에서 차지하는 여공의 비율이 높다. 공장 수에서는 도쿄, 오사카에 다음가는 규모이다. 나고야는 물론, 오사카와 고베 지역으로도 화물의 철도 수송이 가능했던 이 시기에 아이치현에 있는 농가는 공장 노동시장으로 노동력을 송출함과 함께, 도시 주민이나 공장 노동자의 증대에 따라 확대된 새로운 농산물 소비시장을 충족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표 5-1 아이치현의 업종별 생산액 총액의 추이

출처: 1916년은 아이치현 농회 『아이치현 농계 안내(愛知県農界案内)」 아이치현 농회農会, 1917년, 7-8쪽, 이외는 「아이치현 통계서(愛知県統計書)』 각 년에 따라 작성.

 

 

아이치현 현청 문서 <농사>에는 "농업노동자에 관한 조사(초록)"에 의해 1920년 각 군의 상황이 보고되어 있다(표 5-2, 그림 5-1). 각 군 가운데 도시화나 공업화의 영향에 의해 농업노동자가 뚜렷하게 감소해 부족한 것을 알 수 있는 군에 주목하면, 아이치군에서는 도시 노동자로 유출되는 것 이외에 주택지나 공장 부지로 전용됨에 따라 경작지가 축소된 것이 농업 경영을 변화시켜 원예 농업으로 추이되도록 촉진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헤키카이군碧海郡이나 아츠미군渥美郡에서는 공업 노동에 의한 수입이 많기 때문에 농업을 싫어하는 사람이 늘어난 점, 도시를 선망하는 심리가 보인 점 등, 농업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가치관에까지 파고든 지적이 눈길을 끈다.

 

 

표 5-2 아이치현의 농업노동자에 관한 조사(1920년)

농업노동자 수의 증감에 관한 기사
아이치군
愛知郡 
일반적으로 농업노동자로 고용되기보다 오히려 도시의 공업 방면의 노동에 종사하려는 경향이 있다. ... 도시 부근에서는 해마다 도시의 팽창에 수반함에 더해 시국 이래 각종 공장이 건설되는 것이 많기에 경작지는 주택지 공장 부지로 폐기되어, 농가는 점차 경지 면적을 축소당함과 함께 농업 경영 방법이 보통 농업에서 원예 농업으로 변이하려는 현황이다.
히가시카스가이군
東舂日井郡
각종 산업의 눈에 띄는 발전에 수반해 농업 이외의 각종 노동자 수요가 격증함에 따라 종래 농업 노동에 종사하던 자들을 몰아내어 그로 가게 함에 의해 농업노동자 수의 감소를 보충해 채워 왔으나 여전히 각 종류의 농업노동자를 통틀어 그 수요 계절에는 대체로 부족을 느끼고 있다.
나카시마군
中島郡
상공업이 극도로 발달한 시대에는 대부분이 노동자로 고용되는 자가 많았으나, 일단 역전되어 불황에 처하면 다시 농업노동자로 고용되는 자가 많아지게 된다.
헤키카이군
碧海郡
각종 농업노동자는 도시 및 공장 노동에 흡수되어 점차 감소하는 경향이며, 그 집중이 두드러진 것은 정규 고용 남성 청년 소년 및 여성 청년 소년으로 그들은 농업 노동에 종사하기보다 공업 노동에 고용되는 편이 비교적 수입이 많아 농사짓는 남성 여성이 되기를 꺼리는 현상이다.
아츠미군
渥美郡
최근 상공업계의 융성에 따라 농업노동자에서도 비교적 노임이 높은 지방으로 가려는 것이 아마도 현시의 추세라 할 수 있다. 다만 그 원인으로는 농업 경제에 대한 관념 발달과 도시 선망 심리에 기반하는 듯하다.

출처: 아이치현청 문서 「농사農事」 1919년, 1920년, 아이치현사 편찬위원회 편 「아이치현사 자료편(愛知県史資料篇) 8 근대 5 농림수산업農林水產業」 아이치현, 2000년, 377-388쪽에서 작성.

 

 

그림 5-1 아이치현의 군 지역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건 비율은 줄어들고 있다고는 하나, 실제 수로 보면 농업 생산액 자체는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표 5-1). 이미 기술했듯이, 1920년 아이치현의 농가 호수는 전국 1위, 농업 생산액은 5위라는 위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이치현에서는 공업 생산이 급속히 확대하는 한중간에서 농업 자체도 혁신이 도모되어 변화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농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은 공업화나 도시화를 시야에 넣으면서 경영 내용을 검토하고, 노동력 배분을 궁리하며, 때로는 도시에 대한 선망과 갈등을 안고 있으면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고 상상된다. 그래서 다음으로, 이 무렵의 농촌에서 생기고 있던 변화를, 특히 청년들에 주목해 그려 보겠다.

 

 

 

 

 

2. 농촌의 변화와 청년들

 

도시화와 주변 농촌의 변화

농촌에서 도시로 청년들이 나가서 농업의 일손 부족이 사회 문제가 되는 것은 현대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 최초의 파도는 이미 다이쇼우 시기의 도시 근교 농촌에 찾아오고 있었다.

1923년에 아이치현 농회는 농촌 상태조사를 실시한다. 이걸 보면, 각 시군의 청년들이 마을에서 나가는 모습을 알 수 있다(표 5-3). 합계 수를 보면, 같은 해에 상급 학교로 진학한 사람은 44명, 점원이 된 사람은 115명, 공장으로 일하러 나간 사람은 173명, 기타가 12명이었다. 다음으로 지역별로 보면, 나고야시 교외, 치타군知多郡에서는 공장으로 일하러 나간 사람이 많고, 특히 나고야시에서는 60명으로 눈에 띄게 많다. 헤키카이군에서는 점원이나 공장으로 일하러 나간 사람이 각각 30명 정도였다. 한편, 히가시카스가이군, 히가시카모군東加茂郡에서는 전체 수에서도 12명, 20명으로 적다. 그러나 이걸 각 지역의 직업별 호수와 합쳐서 보면, 1호로부터 1명의 출타라고 단순히 계산하더라도 전체로는 24%, 나고야시 교외에서는 50%, 실제 수는 적어도 히가시카스가이군에서는 9%, 히가시카모군에서는 36%의 집에서 청년이 출타하고 있는 셈이다. 이건 결코 적은 비율이라 할 수 없다. 

 

 

표 5-3 농촌 청년 자녀의 출타처(1923년)   (단위: 명)

 

출처: 아이치현 농회 「농촌상태조사農村状態調査 다이쇼우 12년도」 아이치현 농회, 1924년에서 작성.

주) 각 지역 한 마을을 선정한 조사이다.

 

 

이 조사에서 교육 정도와 유출처의 관계를 1918년도와 1923년도의 차이에 주목해 논한 오오카도 마사카츠大門正克에 의하면, 이 시기의 농촌에서는 도시 열망만이 아니라, 교육열의 고조도 발생했다.(7) 남자가 일하러 나가는 경우, 1918년도의 점원이나 직공에서는 심상소학교尋常小学校 졸업이 일반적이었는데, 1923년도가 되면 점원에서는 고등소학교 졸업이 주류가 되고 직공에서도 고등소학교 졸업이 늘었다. 여공의 경우에는 1918년도에는 심상소학교 중퇴나 졸업이 많았는데, 1923년도가 되면 심상소학교 졸업의 비율이 늘고 고등소학교 졸업도 늘었다. 이 조사가 보여주는 건 공황 시기를 끼고 있는 5년 동안에 다른 곳으로 유출되는 농촌의 남녀 청년들의 증가와 그들의 교육 정도의 상승이 틀림없다.

이에 더하여, 여성들이 시집간 곳을 상세히 알 수 있다. 표 5-4를 보면, 지주의 딸은 도시로, 자작과 소작의 딸은 고향으로 시집가는 비율이 높다. 따라서 도시로 이주하는 것도 포함해 전체에서 차지하는 도시로의 이주는 지주의 딸에서 63%, 자작에서 45%, 소작에서 38%로 모두 비교적 높은 비율을 나타낸다. 즉, 이 시기, 진학, 취직, 결혼을 게기로 도시, 공장 지대로 출타해 가는 청년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청년들은 '농'을 중심으로 하는 종래의 생활방식과 상공업화의 흐름 안에서 흔들리면서 각자의 생활방식을 선택해 나아가야 했다.(8)

 

표 5-4 최근 10년 동안의 농촌 여자가 시집간 곳   (단위: 명)

출처: 위와 같음.

 

 

 

청년들의 갈등

나고야시의 북서부에 위치하고 직물업이 성행했던 나카시마군 아사히무라朝日村에서는 『조일촌보朝日村報」라는 수제 마을 신문을 간행하고 있었다. 여기에 게재된 청년들의 기고문에서, 그들의 가슴속을 상상해 보고자 한다. 1919년의 마을 신문에 기고된 다음 글에는 도시 열풍의 고조 안에서 발생하는 농촌 청년의 갈등과 자존심의 미묘한 흔들림이 표현되어 있다(사료 1).

 

[사료 1] 
가난 가난, 그렇다, 나는 가난한 사람의 아들이다. 농사꾼이다. 누더기로 와서 보리 무를 괭이로 일구는 몸이다.
오늘 아침도 머리수건을 하고 김매기를 하고 있는데, 통행인이 "촌놈, 김매기하냐"라고 웃었다. 건방지게 안경을 쓰고서.... 그게 얼마나 대단하단 거냐, 내 찢어진 잠방이와 머리수건을 냉소하는 너희야말로 훨씬 꼴불견 아닌가. 누가 봐도 내 쪽을 좋아할 거다. 허름한 옷에는 얻어 입은 옷깃이 있는 법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어쩐지 기뻐서 견딜 수 없었다. 어금니가 간지러울 정도로 들떠 왔다. 그래 일하자. 그래 그래.(9) 

 

청년은 아침부터 김매기를 하고 있다. 지나는 길에 그를 깔보는 안경을 쓴 통행인의 말은 도시 열풍에 들뜬 사회의 상징이라고도 볼 수 있을 듯하다. 전반에서는 가난하다, 농사꾼이다 하고 큰소리로 자조하면서, 냉소당한 것에 지지 않으려 자존심을 분기시키는 그의 기분이 전해진다. 그러나 후반 "그래 일하자. 그래 그래"라고 자신을 타이르듯이 반복하는 말에서는 간신히 명랑하게 자신을 고무하는 것 말고 농업을 계속할 마음을 지키지 못한다는 농촌 청년들이 놓였던 엄혹한 현상이 전해진다.(10)

아이치현만이 아니라, 당시 일본 사회에서 공업 생산액의 증대에 견인된 농업 구조 전체의 변화는 농업과 공업의 사회적 분업을 일으켜 농촌으로부터 노동력이 유출되는 경향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농촌에 남은 사람들은 농민, 농가라고 다시 이름지어지고, 농공 사이의 격차를 받아들이면서도 증대하는 식재료 수요의 생산을 떠맡아 가야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것을 선택해 나아간, 또는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청년들은 농업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다음 문장에서 그걸 읽어내 보고자 한다(사료 2).

 

[사료 2]
내가 마을의 농사
들리는 바에 의하면 메이지 32~33년(1899~1900) 무렵은 논 7반보反步(2100평) 밭 3반보(1200평) 정도 있으면 가족 7~8명이어도 넉넉히 생계를 꾸려 갈 수 있고 해마다 조금씩은 저축도 할 수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이만큼의 자작으로는 돈을 빌리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어느 만큼 남긴다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오늘날에는 우선 의류 땔감 숯 비료의 폭등은 극심하고, 그에 토지세 소득세와 부현세와 마을세 조합비 등 점점 늘어날 뿐이기에, 어지간히 논밭을 소유한 집이라야 생활해 갈 수 있을 뿐이고, 대부분 여유가 없는 형편일 뿐이니 농업 만큼 재미없는 업무는 없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과연 농업은 이런 비참한 일일까? 아니 아니 농업은 귀한 업무입니다. 이익의 확실한 업무입니다. 농가의 경제를 여유롭게 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농가 제군의 연구는 아직 충분치 않습니다. 주의해서 보면 수입 증가의 길은 눈앞에 널려 있습니다.......(11) 

 

논밭 합쳐서 3000평을 자작하고 있어도 1917년에는 생활 환경이 엄혹해졌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건 의류, 땔감과 숯, 비료 등을 구입하게 된 것에 더해, 그들의 물가가 폭등했던 것에 원인이 있었다. 주의 깊게 읽으면, 이전은 자급했던 것을 시장경제를 매개로 입수하게 되었다는 근본적인 삶의 변화가 엿보인다. 또한, 이 시기는 생활 수준이 향상되고, 소비가 확대된 측면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행정의 변화나, 생산조직의 설립은 농가에게 세금이나 조합비 등의 부담도 동시에 증가시킨다는 걸 의미했다. 이들 농업이나 농촌 생활에 관한 경비가 늘어남에 따라, 예전엔 충분히 살아 갈 수 있던 농업 규모로는 삶이 성립하지 않게 되었다. 이건 앞으로 농업을 담당하려고 하는 청년들에게 매우 큰 문제였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상황이 걸핏하면 산업 전체에서 농업의 가치평가를 경시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기고자는 최후에 연구와 노력을 거듭해 수입의 증가가 기대된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하던 농업의 방식으로는 생활 환경이 조금도 좋아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던 청년들은 농업 경영의 전환을 모색했을 것이고, 그 실천을 단행하기까지에는 아버지들 세대와의 의견 충돌이나 갈등이 생기기도 했을 것이다. 대소비지인 나고야로 향한 시금치 등의 채소 재배가 농업 경영의 중심이 되어 간 카이후군海部郡의 농가 경영주인 청년은 "오로지 한마음으로 이 업의 개량과 발전에 노력하고, 특히 판로 개척에 뜻을 기울이며, 인근에 칸사이선 핫타역八田駅이 신설되어 교통 운수의 편의가 크게 열림에 이르러, 극력으로 오사카 고베 방면으로 판로를 찾고, 공동 출하의 실적을 올리고자 노력해 착착 그 효과를 거두고 있다"(12)고 새로운 농업으로 내딛어 가는 결의와 행동을 자신의 농업 경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시대에는 농업의 합리화를 목적으로 한 새로운 기술, 농업 개량 사업이나 경지정리 사업 등이 농촌에 차차 수용되어 갔는데, 그 배경으로 이러한 농촌 청년들의 명암 양방을 포함한 정신적 기반이 있었던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듯하다.

 

 

 

 

 

3. 쌀과 누에고치와 새로운 상품작물

 

어느 농가의 근대 -아이치현 히가시카스가이군 카치가와쵸우勝川町

이러한 상황 속에서 흙을 계속 경작하는 사람들은 도시화와 공업화를 어떻게 파악하고 행동했을까? 여기에서는 히가시카스가이군 카치가와쵸우의 어느 농가(A집)를 사례로 [농가 경제 조사]를 바탕으로 A집의 생활사를 그려 보고자 한다. 

히가시카스가이군과 치타군은 비농가의 비율도 40% 미만이지만, 농가 중에도 전업 농가의 비율이 높다. 특히 히가시카스가이군은 501%로 높은 수치를 나타낸다.(14)

우선 A집의 경제 상황을 개관하겠다(표 5-5). 1923년의 A집은 벼농사를 주로 하고, 양잠과 양계를 더한 농업을 경영하고 있었다. 게다가 호주는 다다마 짜기, 아내는 베틀 짜기를 겸업하고 있었다. 복합 경영이기에 수입은 비교적 안정되고, 특히 양계의 수익이 컸다. 농업 수입 가운데, 달갈과 닭이 24%(523.33엔)을 차지한다. 양잠은 봄가을 모두 성적이 양호하고 누에고치 가격이 높아 수익이 올랐다.

같은 해, 이 지역에서는 벼농사가 평균적으로 300평당 4말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A집에서는 2말 줄어드는 데 그치고, 양잠은 봄가을 모두 양호하며, 누에고치 가격도 높았기 때문에 에상 이상의 수익을 얻었다. 채소와 양계는 예년 정도의 수익이었다. 농업 조수입은 2188.25엔, 그 가운데 경영비가 1080.705엔이었기에 공제한 수익은 1107.545엔이었다. 그러나 이건 전년비로는 144.87엔 감소했다. 가계비는 1148.625엔을 지출했다. 따라서 농업 수익만으로는 41.08엔 부족하지만, 겸업 수입, 가사 수입에 의해 그걸 보충해 총계 267.272엔 잔액을 얻었다. 

 

표 5-5 히가시카스가이군 A집의 가계 수지 추이

(단위 : 가족은 명, 농업자본은 300평, 금액은 왼쪽이 엔, 오른쪽이 %)

출처: 아이치현 농회 『농가 경제 조사(農家経済調査)』 각 해에서 작성.

주1) 1923년의 지출에는 비사이尾西 은행 예금 손실 42.71엔을 포함한다. 1926년의 지출에는 마을 내 예금 손실금 25.8엔을 포함한다.

주2) 농업 조수입의 기타는 현물 감가액, 동물 감가액, 식물 감가액 등을 공제한 액.

 

 

A집의 주요 노동력은 호주(32세), 아내(27세), 아버지(62세), 어머니(53세)이다. 부양하고 있는 그밖의 구성원으로는 호주 부부의 맏딸(7세), 둘째 딸(5세), 맏아들(1세)가 있다. 농업용 토지로 논 3270평(그중 1800평은 임차), 밭 300평, 나무밭 360평(임차), 산림 60평, 합계 4230평을 경작하고 있다. 겸엄 노동 일수를 참조하면, 겸업 일수가 가장 많은 건 9월과 10월로, 2명 합해 35일, 24.4일 종사한다. 거꾸로 농업 노동 일수는 9월, 10월이 적다. 호주는 10월이 되면 오로지 다다미 가게에 종사했던 듯하다. 이 수입은 모두 현금으로, 다다미 짜기 임금은 110.7엔, 베틀 임금은 18.1엔, 합계 128.8엔으로, 농업 수입의 부족을 보충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이에 더해 소작미 요금이 18.57엔, 채권, 계, 은행 예금의 배당금과 이자가 36.94엔, 농가 경제 조사 수당, 출장 일꾼 임금 등의 가사 수입이 146.07엔, 인분뇨 1035관을 매각함에 따른 가사 부산물 수입이 20.7엔이었다. 

다음으로 농업 경영비의 내용을 보도록 하자. 총 경영비 1080.705엔 가운데,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한 것은 종묘비(20%)였다. 이 내역은 누에 씨 6엔, 어린 닭 184.25엔, 볍씨 6엔, 현미 7.2엔 등이었다. 다음으로 많은 건 비료비(20%)이다. 이 가운데 현금으로 구입한 것은 면실유박 58.48엔, 대두 17.7엔, 기타 54.44엔이다. 현물로 입수한 것은 현금 교환으로 81.4엔 분이고, 내역은 닭똥 510관, 인분뇨 828관, 말똥 2810관이었다. 사료비(18%)는 닭 사료가 152.46엔, 뽕잎 대금이 15.51엔이었다.

이에 대해 가계비의 지출은 다음과 같다. 음식비가 498.82엔(43%)로 가장 많은데, 그 가운데 자가 산물이 389.64엔, 받은 현물이 15.65엔이란 것을 고려하면, 현금으로 구입한 음식물은 겨우 93.53엔이다. A집에서는 자신들의 뱃구레는 거의 자신들이 생산한 것으로 채우고 있었던 셈이다. 다음으로 많은 건 피복비(8%)인데, 이 가운데 1.5엔은 자가 산물이다. 봄 양잠의 일부가 '가사 소비용'이 되기에, 아내는 현금 수입을 위한 베짜기 외에 가족의 의류도 짜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삶의 변화 -쌀과 누에고치와 채소와 닭

A집의 경영과 삶은 그 뒤, 어떻게 추이했을까? 1926년, 1928년, 1930년의 농가 경제 조사에서 각 해를 비교 검토해 보자.

우선 가족 구성원은 1927년까지의 사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셋째 딸과 둘째 아들이 태어나, 8명이 되었다. 인수는 늘었지만, 아버지의 서거에 의해 노동력이 1명분 줄어 A집에게는 5명의 아이들을 키우면서 적은 노동력으로 변통하는 시기가 한동안 계속된 셈이다. 경영 경지면적은 거의 변함없지만, 1928년을 경계로 논밭 경지가 약간 축소되는 배경에는, 아버지의 서거에 의한 노동력의 감소 등이 관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는 호주나 돕는 이도 생활 노동의 부담을 약간 늘리고 있다. 또한, 호주는 해마다 농업 노동 일수를 늘리고 있다. 특히 1928년 이후는 A집의 남자 손이 호주뿐으로, 겸업을 서서히 그만두고 농업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목되는 건, 이와 같은 노동력 배분의 변화가 있으면서도 경영 내용에 다음 4가지 큰 전환이 보인다는 점이다. 첫 번째는 양계에 의한 수익의 증가이다. 1923년과 1926년을 비교하면, 사육 수는 거의 똑같지만, 현금 수입은 523.33엔에서 791.66엔으로 대폭 증가한다. 논농사, 밭농사, 양잠에 의한 수입에는 별로 변화가 보이지 않는 와중에 특히 양계가 이익을 산출하게 되어 갔다는 걸 볼 수 있다. 상세하게 보면, 닭고기에 더해 달걀과 닭똥의 생산이 새로운 현금 수입이 되었다. 그 뒤, 양계는 159마리로 늘어나, 약 2배의 규모가 되었다. 닭고기와 달걀은 약간의 답례용 이외에는 모두 판매하고, A집의 뱃구레에 들어가는 것은 거의 없었던 듯하다.

두 번째는 양잠에 의한 수입의 변동이다. 누에의 생산량과 생산액은 18.85관(215.94엔), 29.14관(209.700엔), 27.03관(84.820엔), 41.76관(133.100엔)으로 추이했다. 1관당 생산액으로 환산하면, 11.46엔, 7.20엔, 3.03엔, 3.19엔으로 추이해 누에고치 가격의 폭락을 알아챌 수 있다. A집에서는 누에고치 가격이 급락한 이듬해에는 잠박 수를 2매 줄여 양잠의 규모를 축소한다. 이와 같은 경제 동향도 경영 내용에 영향을 주었다고 추찰된다. 그러나 논밭농사를 축소한 것에 더해 양잠업을 축소했지만, 거듭 누에고치 가격은 폭락했기에 1928년에는 농업 수입의 대폭 감소를 피할 수 없었다.

양잠업에 의한 수입의 불안정함을 경감하기 위해, A집에서는 양계 외에 채소 재배의 다품종화가 도모되었다. 이것이 세 번째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재배 작물을 상세히 보면, 논벼와 보리, 콩, 자운영을 조합시켰던 것이 1928년에는 논벼를 줄이는 데에다 다품종 채소를 재배하도록 변화한다. 고구마, 감자, 토란, 이세伊勢 참마, 무, 절임채 종류, 양배추, 파, 당근, 가지, 오이, 울외, 수박, 호박, 동아 등이다. 이에 맥주보리의 재배가 더해졌다. 또한, 같은 해에 해충 방제기로 분무기가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이건 채소 재배의 다품종화, 재배의 과학화와 관련된 변화라고 볼 수 있다. 1930년이 되면, 맥주보리를 늘리고, 채소 재배도 더욱 다품종이 된다. 예를 들면 재배 면적은 적지만, '양배추' 이외에도 '상추', '토마토' 같은 서양 채소의 재배도 시작된다.

네 번째 변화는 겸업의 소멸이다. A집에서는 먼저 아내가 베틀 짜기를 그만두고, 다음으로 호주가 다다미 짜기를 그만둔다. 그 때문에 겸업 수입은 감소하고, 1928년에는 소멸된다.

즉, 벼농사를 주로 하고, 양잠과 양계를 더한 복합 경영이었던 A집의 농업 경영은 양계의 경제적 자리매김을 높이면서 '쌀과 누에고치'를 중심으로 한 경영에서 탈각하는 걸 도모해, 다품종의 채소 재배를 더해 복합성을 강화해 갔다. "이 땅은 대소비지인 나고야시 부근에 있어 논벼의 재배 및 논의 그루갈이를 하는 토지"(15)라고 하듯이, 닭고기, 달걀, 서양 채소나 절임채 종류 등의 생산은 도시나 공장의 수요를 시야에 넣은 시도였다. 이리하여 농업 경영의 개량에 역점을 두게 된 한편으로, 농업 이외의 겸업은 서서히 그만두어 갔다. 즉 A집은 농업에 타업을 더한 복합 경영으로부터, 농업 경영 안에서의 복합 경영으로 전환해 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농업 경영비의 동향을 살펴보자. 농업 생산의 개량에는 말할 필요없이 종묘, 비료, 사료의 도입이 빠질 수 없었다. A집의 농업 경영비에서 그들은 약 60% 전후를 차지한다. 비료 대금은 현금으로 구입하는 비료가 늘어 212.02엔이었던 것이 1926년에는 377.66엔이 되어 증가한다. 그러나 그 뒤의 비료 대금은 감소한다. 그 배경에는 "최근 그 업의 조사 연구와 함께 다각 농업, 즉 경종에 양축, 양잠을 더한 조직으로 고치고, 노동력의 배분을 평준하게 하며, 비료의 자급을 강구해 더욱더 수익이 커지도록 노력하기에 이른다"(16)는 상황이었다. A집은 양계나 양잠에서 자급 비료를 얻을 수 있었단 점에서 유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양계 사례의 80%는 구입품으로 조달했기에, 닭고기나 달걀의 매상에 비하여 사료 대금이 높아짐에 따라 경영이 불안정해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난점도 있었다. 양계를 양잠을 바꾸는 안정된 수입원으로 삼기 위해서는 사료의 자급이 더욱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A집에서는 1930년에는 '사료비, 비료비, 가축 대금 등의 감소에 의해 작년에 비해 약 500엔의 감액'에 성공했다. "올해는 참으로 희한한 현상"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농업 경비 삭감이 곤란한 상황 속에서 A집이 꽤 노력해서 경영 방식을 꾸려 갔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4. 흙과 식탁의 간격 -'농사꾼'에서 '농가'로      

 

 

1924년과 1926년 2번에 걸쳐 도쿄부 마고메馬込에서 아이치현의 농업을 시찰하러 온 츠루미 사키오鶴見佐吉雄라는 인물은 "아이치현 농촌의 진보는 비상한 것으로, 겨우 1년 반 동안에도 전과 지금 사이에는 큰 차이가 생겼다"고 보고한다.(17)

이건 구체적으로 다음 2가지의 변화를 가리킨다. 그건 생업의 단일화와 농업의 다각화이다. 관점을 바꾸면, 농업과 공업의 분업이 진행됨에 따른 직업의 고정화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A집이 다다미 짜기나 베틀 짜기를 손 떼고 농업으로 모든 노동력을 배분하게 되었듯이, 특히 도시부의 수요를 기대한 도시 근교 농업 지역에서는 농업 이외의 여러 돈벌이를 그만둠에 따라 생업 구조가 단일화되었다. 이리하여 근대에는 다양한 생업을 손수 하는 '농사꾼'이 아니라 농업에 전념하는 '농가'가 탄생했다. 상세한 기술은 하지 않겠지만, A집만이 아니라 히가시카모군東加茂郡(산간부 임업 지역)의 사례에서도 우산 종이뜨기를 1923년 이전에 폐업하고, 삼나무와 편백나무 묘목이나 채소의 생산을 증가시킨다.  

생업의 단일화는 개개의 가족의 자주 선택이라기보다 오히려 그들을 둘러싼 사회의 변화에 규정되었던 부분도 크다. 예를 들면 A집이 베틀 짜기를 그만둔 배경에는 비사이 직물업의 생산 구조 변화가 있었다. 비사이에서는 원래 면직물, 교직물이 주변 농가 안의 손베틀로 생산되고 있었는데, 다이쇼우 시기에 들어와 모직물 생산으로 전환하자 손베틀은 차츰 소멸되고 공장 안에 설치된 기계 직기에 의해 생산하게 되었다. 비사이 직물업 지역에 근접한 하구리군葉栗郡의 E집에서도 1915년에는 직물에 의한 수입이 20.5엔이다. 또한, 수입에는 계상되지 않더라도 같은 해의 조사 대상 농가 5호 가운데 4호가 베틀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 뒤의 조사에서는 볼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생업이 농업으로 단순화되자, A집이 그러했듯이 양잠, 양계, 채소 재배를 더함에 따라 농업 자체는 다각화되었다. 그들은 현 산업부에 의해 '주업'인 쌀, 보리 농사의 '부업'으로 자리매김되어, 장려되기도 했다. 아이치현에서는 1921년에 각 군시장 앞으로 <부업 장려에 관한 건의 명령 통첩>이 발송되고, 이듬해에는 부업 장려비로 4327엔이 계상된다. 아이치현에서는 양계가 그 중심이었다.

농업의 다각화는 일면으로는 농업 수입의 증가에 의해 농가의 생활 환경을 좋게 하는 것을 목표로 했는데, 사실 그건 아이치현의 채소나 양계의 주산지 형성을 준비하는 것으로도 이어졌다. 이리하여 도시의 사람들이 흙을 경작하는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식량의 막힘 없는 공급'을 실현하기 위한 식재료 생산의 구조가 일본 각지에서 이 시기에 착착 정비되기 시작했다. 

 

 

 

 

주석

(1) 야나기타 쿠니오柳田國男 「도시와 농촌(都市と農村)』 아사히朝日 상식 강좌 제6권, 도쿄 오사카 아사히 신문사, 1929년, 3쪽.

(2) 앞의 (1), 44~50쪽. 

(3) 후카야 카츠미深谷克己・카와나베 사다오川鍋定男 「에도 시대의 여러 돈벌이 -지역 경제와 농가 경영(江戸時代の諸稼ぎ -地域経済と農家経営)」 農山漁村文化協会, 1988년. 

(4) 타마 신노스케玉真之介 「주산지 형성과 농업단체 -전간기 일본 농업과 계통 농회(主産地形成と農業団体戦間期日本農業と系統農会)』 農山漁村文化協会, 1996년, 57쪽. 

(5) 아이치현 편 「통계로 보는 아이치현의 지위(統計上ヨリ観タル愛知県ノ地位)』 아이치현, 1922년. 

(6) 아이치현사편찬위원회愛知県史編さん委員会 편 「아이치현사 자료편愛知県史資料編 29  근대6  공업1』 아이치현, 2004년, 35쪽.

(7) 오오카도 마사카츠大門正克 「근대 일본과 농촌 사회 -농민 세계의 변용과 국가(近代日本と農村社会 -農民世界の変容と国家)』 일본 경제평론사, 1994년, 73~74쪽. 

(8) 오카다 요우지岡田洋司 「1930년대의 농촌 청년 -아이치현 안의 한 지역 청년단 '회보'를 단서로(一九三〇年代の農村青年 -愛知県下の一地域青年団「会報』を手がかりとして)」 「地方史 研究」 38(2), 1988년, 66쪽. 

(9) 「아사히朝日 촌보村報」 49호, 1919년 1월 1일 발행. 四九号、이치노미야一宮 시립 비사이 역사민속박물관 소장. 

(10) 이 시기의 농촌 청년의 갈등을 청년 자신이 묘사한 것으로 시부야 테이스케渋谷定輔의 시 「새로운 생활자(新しき生活者)」나 「침묵의 분노(沈黙の憤怒)」 등이 있다. 이들 시에도 '도시인의 어떠한 욕설도 조롱도', '나는 순수한 농사꾼 소작인' 등이라 읊고 있다. 시부야 테이스케 「논밭에서 외치다(野良に叫ぶ)』 平凡社, 1926년. 또한 시부야 테이스케에 대해선 다음 문헌에 상세하다. 야스다 츠네오安田常雄 「만남의 사상사 -시부야 테이스케론 '농민 애사'의 세계(出会いの思想史 -渋谷定輔論「農民哀史」の世界)』 勁草書房, 1981년. 

(11) 『아사히 촌보」 29호, 1917년 5월 1일 발행. 이치노미야 시립 비사이 역사민속박물관 소장. 

(12) 아이치현 농회農会 「농가 경제 조사(農家経済調査)」 아이치현 농회, 1928년, 32쪽. 

(13) A집에 관한 조사는 1923년부터 시작하기에 1910년대와 비교할 수 없지만, 도시열이 높아지는 한창 때의 농업 경영의 분석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이 조사를 사용해 히가시카스가이군東春日井郡의 A집을 분석한 것으로, 우사미 마사시宇佐美正史 「1920~1930년대의 복합적 농업 경영의 전개 -아이치현 옛 히가시카스가이군 카치가와쵸우의 자소작 농가를 대상으로(一九二〇~三〇年代における複合的農業経営の展開ー愛知県旧東春日井郡勝川町の自小作農家を対象として)」 「기후岐阜 경제대학 논집』 42(3), 23~46쪽이 있다. 

(14) 아이치현 산업부 편 「아이치현 농사 통계』 아이치현 산업부, 1922년, 13~14쪽. 

(15) 아이치현 농회 『농가 경제 조사」 아이치현 농회, 1930년, 69쪽. 

(16) 앞의 주석 (14), 69쪽. 

(17) 츠루미 사키오鶴見佐吉雄 「아이치현의 모범적 농업 경영(愛知県下の模範的農業経営)」 馬込村, 1916년,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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