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부엌이 담당하는 구제와 경제 -공설 시장·중앙도매시장의 정비
1. 먹을거리의 교환과 분배
여행과 장사(아키나이商い)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먹을거리의 교환과 분배가 빠질 수 없다. 꽤 오래된 시대부터 먹을거리는 분배되고, 교환에 의해 다양한 것을 얻을 수 있는 구조가 정비되었다. 뱃구레의 문제는 이 먹을거리의 교환과 분배의 구조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 구조는 지역에 따라서, 또는 시대에 따라서 다양한 변형이 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근대는 이 교환과 분배의 구조가 크게 전환되는 시기에 해당하고, 또한 그걸 뒷받침하는 사상에도 뚜렷한 변화를 볼 수 있었다. 도시의 뱃구레를 채우기 위해서는 다만 단순히 대량의 식재료를 생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걸 집하하고, 유통시키며, 분배하는 구조가 동시에 정비되어야 한다. 이 장에서는 앞 장에서 다루었던 '규격화되고,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농산물'이 흙으로부터 떨어져 사람들의 뱃구레에 다다르기까지의 경로를 좇으면서, 먹을거리의 교환과 분배의 변화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원래 경제의 근본에는 교환이 있다. 교환이란 것은 집이나 마을의 범위를 넘어서 '밖'과의 교섭에 의해 본격화되기 때문에, 예를 들면 민속학의 분야에서는 여행자인 상인이 마을들을 돌아다닌 것에서 '장사'의 기원을 찾고 있다.(1) 애초에 '장사'란 것은 농한기인 '가을(아키秋)에 영위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행상인들을 이방인으로 마을들에서 맞이했던 것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다. '시市'는 '재齋', 즉 성스런 장소에서 하는 교환과 분배를 의미한다.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란 곧 행상인이었다.
예를 들면 산간부를 이동하면서 살아가는 '산사람'들이 여러 가지 대나무 제품을 가지고 와서 산과 마을의 경계에 두면, 농민이 보리나 채소를 가지고 와서 그곳에 두며 양자가 교환된다. 이걸 '침묵 교역'이라고 한다.
또한 '닭의 날 시장(토리노이치酉の市. 역주; 11월의 닭날酉日에 거행되는 鷲神社의 축제에 서는 장)은 일찍이 에도 시내와 농촌부의 딱 경계 부근에서 행해져, 읍내에서 만든 도구류와 농촌에서 농사지은 채소 등이 교환되었다. 중세 말엽에는 그곳에 상인과 농민이 모여서 물건을 교환하는 관습이 생기고, 근세가 되면 벼농사의 길흉을 점치는 '한 해 점치기'로서 도박도 공인되는 장이 되어 갔다.

토리노이치의 기원 발상지라 하는 오사카부 사카이시堺市의 오오토리 신사에서 아직도 이런 축제가 열리고 있다(역주).
시세의 결정 법에도 독특한 관습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바라키현의 밭농사 지대의 츠키요미月読 신사에서는 음력 초사흘 날에 농민이 모여서 달의 차고 이지러지는 상태를 보고 팥의 시세를 결정했다. 수급 관계가 시세를 결정한다는 오늘날의 이른바 '경제학'과는 꽤 다른 논리인 것처럼 보인다.
다이쇼우 시기부터 쇼와 초기의 생선 행상인을 조사한 세가와 키요코瀬川清子가 쓴 「사사기메販女』의 모두에는 다음과 같다.
어부가 잡은 생선을 그 아내가 팔러 걸어가, 아침저녁의 밥짓는 곡물과 '교환'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자연스러워 오랜 세월 동안 방방곡곡의 민가에서 나오는 연기는 이러한 부부의 고기잡이와 장사를 겸한 노동력으로 피어 올랐던 것이다.(2)
에히메현 이요군伊予郡 마사키쵸우松前町의 생선 행상인들은 농촌에 단골을 가지고 있어, 봄에는 보리, 가을에는 쌀과 생선을 교환했다. 이 지역에서는 이를 '교환'이라고 했다. 즉, 어촌과 농촌의 물물교환이다. 이와 같은 교환 행위는 일본 각지에서 볼 수 있었다.
물론 행상만이 아니라 정기 시장이 발전하고, 나아가 상설 시장이 등장하면 사람들은 장사의 다양한 방법과 장에서 먹을거리를 얻게 되었다. 그 풍경을 구체적으로 그리는 건 어렵지만, 메이지 초기의 일본을 여행한 외국인이 남긴 기록에서 그 단편을 볼 수 있다.
메이지 10년대의 일본을 여행한 영국인 여성 이자벨라 버드Isabella Bird는 니이가타를 방문했을 때, 먹을것을 취급하는 가게의 여러 가지를 다음처럼 기록한다.
식료품점이 모여 있는 한 귀퉁이는 언제나 혼잡하지만, 우리나라의 큰 읍내의 이와 같은 곳과는 달리, 큰소리로 값을 깎는 사람은 전혀 없다. 쌀 경단이나 보리로 만든 과자를 팔고 있는 볼품없는 노점의 과자가게나 가다랑어 토막이나 붕장어, 가자미, 불가사리, 오징어를 대 위에 가득 늘어놓은 생선가게, 말린 생선, 쌀이나 곡류를 파는 상인, 조미료와 향신료나 간장을 파는 상인, 술집, 찻집 등이 북적거리고 있다. 과일가게에서는 비파나 자두(모두 매우 시다), 신선한 순무, 당근, 오이나 대두 등의 두류를 팔고 있으며, 아침 일찍부터 사람이 모인다. 꽃집에는 꽃가지나 작은 장식 가지, 화분의 멋진 분재가 품격 있게 진열되어 있다. 오이의 소비가 많음에는 약간 놀란다. 남자도 여자도 아이도 누구나 오이를 먹는다. 하루에 3~4개를 전혀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 4전만 내면 꽤 큰 바구니에 한가득 살 수 있다.......(3)
거리에 미곡, 간장, 어패류나 채소가 빽빽이 진열되어 있는 모습이 눈에 떠오른다. 먹을것을 사고파는 장은 어느 시대에나 활기차다. 일본에서는 19세기에 농산물이나 그 가공품의 상품화가 진행되어, 상인이 성장해 이미 광역의 상권이 성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4) 이 시대는 아직 철도가 통행하지 않아서 이들 상품은 사람이나 소와 말의 등, 배 등으로 운반해 왔다. 아마 채소류는 근처의 농촌에서 모인 것인 듯하다. 행상인이 운반해 온 것, 교환에 의해 얻은 것도 많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사에서 상업으로
그 뒤, 이러한 먹을거리의 교환과 분배의 방식에 큰 변화가 방문했던 것은 철도나 자동차가 등장해 운반 수단에 대전환이 일어났던 때였다.(5) 다만, 철도가 등장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바로 철도 수송이 되었던 것은 아니고, 종래의 장사도 잔존하며 잠시 동안은 양자가 병존했다. 예를 들면, 메이지 시기부터 다이쇼우 시기에 걸쳐서 생긴 다양한 사회의 변화를 유심히 바라보던 야나기타 쿠니오는 『메이지 다이쇼우 역사 세상편(明治大正史世相篇)」 제6장 '새로운 교통과 문화 수송자輸送者' 안에서 다음처럼 기록한다.
철도가 산맥의 여기저기에 큰 구멍을 뚫고 자동차가 높은 봉우리를 오르내리는 시대에, 한쪽에서는 아직 1000년 이전부터 하던 등짐 운반법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어, 때로는 그들이 하나의 고개 입구에서 만나는 일도 있다.(6)
그러나 그 뒤, 점점 판로가 열림에 따라서, 장사의 형태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변화해 갔다. 야나기타는 다음처럼 변화의 과정을 설명한다. 미노美濃 히다飛騨 지역에는 산간의 마을로부터 생선이나 소금, 쌀 등을 구하러 홋카이北海의 저지를 오가는 '봇카ボッカ'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산에서 20관 정도인 삼실을 지고 나와 읍내에서 교역하고, 읍내에서 얻은 물품을 주문자에게 판매하는 독립된 행상인이었다. 소나 말을 장사하는 소몰이나 마바리꾼도 일종의 행상인이다. 그러나, 판로가 널리 열리면, 도저히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공급할 수 없게 되어, 공급을 전문으로 전담하는 '도매상'이 늘어나, 행상인들은 단순한 '짐삯꾼'이 되어 장사의 형태인 행상은 차츰 쇠퇴해 갔다.(7)
야나기타가 말하기에는, 그때까지 전개된 일본 문화는 장사 여행을 하는 행상인들에 의해 문화나 기술, 다양한 정보의 전파를 유지하는 바가 많았다. 그 때문에 교통의 발달과 수송의 혁신에 의해 행상인이 쇠퇴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이러한 문화의 전달자를 잃어 가는 것도 의미했다.
농촌에 사는 사람들은 채소와 무를 거리로 지고 나가는 것만 하고, 상인은 대부분의 읍내에서 오게 되었다. 세상이 새로워져 갈 때마다, 장사를 하는 행상은 서서히 모습을 감추고, 장사가 담당했던 부분을 편입하면서 읍내가 번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양한 담당자, 방법, 장을 내포한 '장사'가 아니라, 상품을 취급하는 전문가에 의해 화폐를 매개로 교환하는 것을 전제로 한 이른바 '상업'이 발전해 먹을거리의 교환과 분배는 오로지 상업의 범주 안에서 행해지게 되어 갔다.
이렇게 보면, 일본의 근대화 과정은 그 이전까지 장사를 유지시켜 왔던 교환이나 시세의 논리, 신용 관계를 떠맡은 일종의 종교적, 문화적 측면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배제시켜 가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8) 그리고 먹을거리를 둘러싼 교환과 분배는 새로운 상업의 형태와 법 아래로 재편되어, 직접 거래하는 '장'이 되는 '시장'은 뒷방으로 물러나고 재화에 의해 물건과 서비스가 매매되는, 더욱 추상적인 개념을 지닌 '시장'이 상업의 정식 무대로 발전해 나아가게 되었다.(9)
농업과 상업
먹을거리를 둘러싼 교환과 분배가 새로운 단계로 발을 내딛어 나아가는 원동력은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근대 일본이 경험한 인구 증가, 자급적 기반을 지니지 않은 노동자의 증가, 그리고 그들의 뱃구레를 채우고자 도입된 새로운 상품작물과 그 전문적인 생산 확대에 있었다. 철도망의 정비는 그에 박차를 가해, 교환과 분배의 규모는 인근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전국으로 확대되어 농업과 상업의 분업, 산지 사이의 분업이 진행된다.
이에 대해 야나기타는 『메이지 다이쇼우 역사 세상편」 제10장 '생산과 상업'에서 변모해 가는 농업과 상업의 관계를 논한다. 다이쇼우 시기의 농업은 새로운 상품작물이 도입되어 산지가 형성되는 것에 특징이 있었다. "토지의 산업만큼 경쟁에 직면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건 경제의 서적에도 자주 적혀 있"(10)지만, 이 시기의 농업은 "치열한 동료 사이의 경쟁을 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11) 어느 작물에 특화된 산지가 형성된다는 것은 "더욱 이 갑작스런 경쟁에 휘말려 타격을 받기 쉬운 농가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12)라고도 덧붙인다. 그리하여 농가 자신도 "자가에서 소비하지 않는 물건을 많이 생산하고, 생산하지 않는 물건을 많이 소비하"(13)게 되었다고 하는 건 앞 장에서 본 대로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상업은 점점 발전하고, 선전에 의해 사람들의 소비를 촉진했다. 먹을거리의 분배는 오로지 상업 부문이 담당하게 되어, 메이지 말기 무렵부터 '상업은 무엇보다도 흥미가 많은 직업'이 되었다.
그런데 주지하듯이, 광역화하고 분업화가 진행된 상업은 세계 경제와도 연동된 호불황의 영향을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거듭되는 전쟁 때문에 먹을거리의 분배는 되풀이되는 호불황 속에서 농락당할 위험을 안게도 되었다.
많은 상인을 매개로 한 복잡한 시장에서 하는 거래는 때로 때때로 생각치도 못한 식량 가격의 상승을 불러오기도 했다. 그 때문에 가격의 상승에 비례한 임금의 상승이 나타나지 않을 경우, 사람들이 뱃구레를 채우는 일 자체가 곤란해졌다. 즉, 근대라는 시대는 이러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불만과 불안이 불온한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쉬운 구조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
2. 뱃구레와 도시의 부엌
시장이 공설된다는 것
먹을거리의 분배를 전면적으로 시장에 맡기게 됨에 따라 발생한 이러한 뱃구레의 불만과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메이지 말기부터 다이쇼우 시기에 걸쳐서 '공설 시장'의 설치를 검토하게 되어, 시장의 재평가가 시작된 것은 흥미로운 사건이라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시장이란 영업자가 일정한 일시 및 장소에서 서로 또는 공중에 대해 생활필수품의 매매 거래를 행하는 장소이다. 이것에는 '사설'과 '공설'의 두 가지가 있다. 전자는 주로 영리를 위해 설치된 것인데, 공설 시장은 '공익'의 입장에서 신선한 생활필수품을 저렴하게 공중에게 공급해 그에 의해 국민의 생활난을 완화하기 위한 '사회적 시설'로 자리매김된다.(14) 사설 시장은 고대부터 존재하는데, 공설 시장은 구미에서는 19세기 중엽부터 등장하고, 일본에서는 19세기 말엽부터 설치의 필요성을 논의하게 되었다.(15)
당초는 구미의 공설 시장을 시찰하고 온 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되는 데 그쳤지만,(16) 1차 세계대전 때에 물가가 상승하자 공설 시장 설치의 기운이 급속히 높아졌다. 이 시기, 가장 빨리 설치를 본 것은 오사카시로, 1918년 4월에 시비 3만 엔을 투자해 4개소(타니마치谷町 경계, 카와川、텐노우지天王寺, 후쿠시마福島)에 공설 시장이 설치되었다.(17) 이것이 큰 호평으로 초년도는 예상외의 호성적을 올렸기에, 시비와 합쳐서 대장성과 체신성의 저리 자금을 빌려서, 1925년까지에는 27개소가 개설되었다.
오사카의 공설 시장은 소매시장과에서 경영과 감독을 당당하는 2개의 계를 배치해 시장에 관한 사무를 집행하고, 시장마다 1~2명의 감독원, 2명의 잡역부를 배치해 출점 상인의 감독과 시장 안의 정비를 담당했다. 출점 상인은 생산자, 제조자, 도매상 또는 소매점 중에서 신용이 있는 곳을 선발해, 시의 지정 가격에 따라 공중에게 판매했다. 각 조사원은 매일 이른 아침에 텐마天満, 자코바雑喉場, 키즈木津 등의 종래의 각 도매시장의 매매 가격을 조사한 뒤 판매 가격을 결정했다. 그리고 공설 시장에서는 현금 거래만 하고, 외상, 행상, 통신 판매 등은 일절 하지 않도록 했다. 판매품은 주로 쌀, 잡곡, 말린 것, 채소 과일, 생선 닭고기, 된장, 간장 등 일상 생활의 필수품에 한정되었는데, 물가가 계속 상승하면서 이 시장에서 빈번히 발을 옮기게 된 사람들은 분명 한숨을 돌릴 수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새색시는 먼저 공설을 배우자(18)
이건 공설 시장의 개설 20주년을 기념해 모집한 표어의 하나이다. 이 표어에서 공설 시장이 없으면 오사카 시민의 부엌은 하루도 원활히 돌아가지 않을 만큼 공설 시장이 사람들의 삶에 뿌리 내리고 있던 모습을 알 수 있다. "부엌 차림 그대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갈 수 있는 편안함과 손쉽고 빠르게, 안심하고 비교적 싼 값에 물품을 구할 수 있는 게 공설이 인기 있는 이유"(19)였다.
사회 정책이었던 공설 시장 -쌀 소동과 도시의 부엌
공설 시장은 오사카에 개설되고나서 전국 각지에 차례차례 설치하게 되었다. 그 직접적 게기는 1918년 이후 각지에서 빈발했던 '쌀 소동'이다.
쌀 소동은 토야마富山의 어촌 여성들이 일으켰다는 건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어촌은 실은 토야마 유수의 쌀 이출항으로 쌀 상인에 의해 일찍부터 자본주의 사회에 편입된 마을이었단 점, 그곳에는 타지에 돈 벌러 온 사람, 겸업 농가, 어촌의 부업, 하역인의 증가를 볼 수 있었다는 점, 냄비를 걸어도 넣을 것이 없어서 깨진다는 의미의 '냄비 깨지는 달'이라 부르는 쌀이 떨어지는 시기(7~8월)에 쌀 소동이 빈발했단 점 등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20) 쌀 소동은 시장 경제에 한층 깊이 말려들어간 결과, 그 파도 머리에 선 사람들이 쌀을 지고 나르는 데도 그걸 '먹을 수 없다'는 모순에 직면해 그것이 뱃구레의 문제로 표출된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이 사태에 직면해 '시장'이란 장에는 '상인이 집합 거래를 행하는 장'으로서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존에 필요한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한 장치'라는 의미가 더해지게 되었다.(21) 즉, 공설 시장의 설치는 당초 '경제 정책'이라기보다도 오히려 '사회 정책'으로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도쿄시의 공설 소매시장은 공설 셋집, 간이식당, 아동 수탁소와 함께 도시 사회 정책의 일환으로 설치되어, 당초는 도시 하층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염가 판매 장치로서 시작된다.(22)
내무성 위생국은 재빨리 1919년 1월에 "각 지방의 시장에 관한 개황"이란 조사를 실시한다.(23) 이에 의하면, 이 시점에서 공설 시장을 설치했던 것은 20개 현, 기타 시장의 설치가 있는 건 12개 현, 설치가 없는 건 15개 현이라는 상황이었다.
공설 시장은 반드시 경제적인 유희는 아니고, 사회 정책의 일시적 유행이어서는 안 된다(24)
네모토 세이로쿠根本清六는 <소매상 습관과 공설 시장(小売商習慣と公設市場)>이란 논문을 이 말로 맺는다. 네모토에 의하면, 일본의 소매상 습관의 특징은 첫째로 생산자과 소비자 사이에 너무 많은 상인이 개재되기에 가격이 상승하는 점, 둘째로 거래의 방법이 현물이 아니라 품목 매매이기에 그 품질의 보증이 불안정한 점, 셋째로 지불은 현금이 아니라 외상이 중심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선대나 금전 융통의 주고받음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최종적으로 먹을거리가 사람들의 뱃구레에 겨우 다다를 무렵에는 생각치 못한 높은 가격이 붙어 있는 것이다. 이 구조 자체를 바꾸기 위해서 공설 시장의 설치가 구상된 것이다.
바로 쌀 소동이 일어난 직후, 그에 대처해야 할 시기에 네모토가 기록한 다음의 말은 세계화가 진행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먹을거리를 둘러싼 문제에 대한 경종으로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
물자 수요 공급의 투합을 간이하게 하고, 수요자 즉 소비자와, 공급자 즉 생산자의 거리를 접근시킬 필요가 있음은 물론이고, 특히 물가 약등의 이 시기에 즈음해서는 더욱 그러하다.(25)
네모토는 도쿄 일용품 시장협회가 의원금을 모아 설립한 도쿄의 8개 공설 시장(신쥬쿠新宿, 나카시부야中渋谷, 시나가와品川, 테라시마寺島, 닛포리日暮里, 타키노가와瀧野川, 니시스가모西巣鴨, 시모시부야下渋谷)에 대하여 그 실태를 기록한다. 이 논문을 참고삼아 도쿄의 공설 시장을 들여다보도록 하자.
취급하는 물품은 외국 쌀, 조선 쌀, 간장, 된장, 선어, 소금 절여 말린 생선, 소고기, 돼지고기, 달걀, 잡곡, 말린 것, 설탕, 채소, 과일, 조림, 절임, 병캔류, 과자, 빵, 면류, 차, 옷감 직물, 헌 옷, 양품 잡화, 비 등의 잡화, 철물, 면 및 실, 우산과 신발류, 도자기, 유리그릇, 종이, 문방구, 칠기, 땔감, 목탄, 조개탄 등이다. 이들을 취급하는 가게는 첫째로 생산자이거나 생산자의 단체, 둘째로 생산자이거나 생산자의 단체로부터 위탁받은 곳, 셋째로 일반 상인에게서 우량이라 인정받은 곳이라는 우선 순위가 있었다. 생산자 자신이 판매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던 걸 알 수 있다.
공설 시장의 설치에 따른 성과로는 다음 7가지를 들 수 있다. ①목탄 가격 폭등의 응급책으로서 대림구서大林区署로부터 거액의 매수를 행해 1일 평균 500가마니를 판매, ②외국 쌀을 싸게 판매해 영세민 마을의 곤란을 완화, ③통킹 쌀과 조선 쌀을 싸게 판매해 쌀값 조정, ④칭타오산青島産 소고기라고 공시해 판매함으로써 일본산과 칭타오산을 섞어 판매하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 ⑤자반 연어의 산지에 대해서도 본고장 제품과 캄차카 제품을 바르게 표기, ⑥간장, 된장을 1관 50전 이하로 해서 판매, ⑦닛포리 시장은 부근에 영세민이 많기에 엄중한 소독을 실시한 헌옷을 판매해 경제적 및 위생적인 효과를 올렸다. 이처럼 해서 공설 시장은 소매상 관습에 내재한 '올바르지 않은 일'을 고치고, 시가를 조정함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28년에 오사카시 산업부 소매시장과장이었던 스미타 신지로우住田新次郎는 공설 시장이 최초는 '사회구제적 시설'로서 시작되고, 그 뒤 도시 식료 정책적인 '경제적 시설'이며 또한 '보건'과 '문화'에도 관련된 시설로 발전했다고 그 다기능성의 중요성을 지적했다.(26)
같은 해 10월에 상공성 상무국이 실시한 <소매 시장에 관한 조사>에 의해 전국적인 동향을 보면,(27) 공설 시장이 설치되지 않은 건 겨우 6개 현(후쿠시마현, 군마현, 미야자키현, 사가현佐賀県, 야마나시현, 도치기현栃木県)이었다. 그림 6-1은 나가사키 시영 공설 시장이다. 설립 당초의 것으 ㄴ아니고, 아마 쇼와 초기 무렵이라 생각되는데, 공설 시장의 번화함을 볼 수 있다. 짐수레를 끄는 사람들, 멜대를 진 사람들, 바구니를 양손에 쥔 사람들, 땅바닥에 앉아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 그리고 장을 보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림 6-1 나가사키 시영 공설 시장(사진엽서, 연대 미상. 아마 쇼와 쵸기일 것)
출처: 필자 소장
시장 수로 보면, 사설 시장이 756에 대해 공설 시장은 350이다. 매출로 보면, 사설 시장이 8254만 9511엔인 바, 공설 시장은 7815만 5432엔인데, 한 시장당으로 환산하면 공설 시장은 사설 시장의 약 2배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셈이었다.
6대 도시의 사설 시장과 공설 시장
공설 시장은 마을보다도 도시, 소도시보다도 대도시에서 중요했다. 마을이나 소도시에서는 사설 시장이 일반 공중을 대상으로 하고, 또 판매자는 생산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는 데 반해, 대도시에서는 그것과는 전혀 반대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도쿄, 오사카, 나고야, 요코하마, 교토, 고베의 6대 도시에서는 생산자 또는 그 위탁자가 도매상, 중매인, 소매상인을 대상으로 매매를 하고, 일반 사람들에게 판매하는 건 오히려 드물었다. 그 때문에, 특히 대도시에서는 공설 시장의 설치를 서둘렀다. 1920년의 내무성 조사에 의하면, 공설 시장 총 수 181개소 가운데 참으로 113개소가 6대 도시에 입지했다.(28)
6대 도시 가운데 공설 시장이 가장 많은 건 도쿄(79)이고, 오사카(11), 고베(8), 교토(6)로 이어지고, 적은 건 나고야(5), 요코하마(4)였다. 그런데 1일 평균 매출액으로 보면, 오사카가 1위로 도쿄는 최하위였다. 또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개재하는 중매 장치를 배제하는 것이 공설 시장의 목적이었는데, 도쿄에서는 공설 시장에도 종래의 상업 관행이 깊게 관여했던 듯하다.(29)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선 부나 시가 구미 각국에 이미 설치되어 있는 '중앙시장'을 만들고, 이에 의해 시장의 통일 연락을 도모하며 생산자와 소비자의 중간에 서서 우량 저렴하며 물가의 적정선을 유지하면서 물자의 공급을 원활히 할 필요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논의가 높아지기 시작했다.(30)
3. 중앙 도매시장의 탄생 -구제 정책에서 경제 정책으로
분배 시스템의 재편
1922년 8월, 정부는 물가 조절 19항목을 발표하고, 공설 시장의 개선과 증설 및 '중앙 도매시장'의 설치 방침을 밝혔다.(31) 다음 달에 내놓은 '공설 시장 개선 요강'과 '중앙 시장 설치 요강'에 의하면 지금까지 병존했던 종래의 기존 시장도 편입한 재편이 구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시장 정책의 새로운 방침은 1921년 10월의 사회사업조사회에 대한 자문을 받아 정부의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이 자문에서는 중앙 도매시장의 문제는 지금까지 공설 시장에 관여했던 '내무성'의 주관이 아니라, '농상무성'의 주관으로 해야 한다고 제안되었다. 이때, 시장 정책으로 의식되었던 것은 '산업의 발전'과 '무역의 진흥'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923년에는 노동력의 재생산, 자본의 축적을 기획한 시장 정책으로 '중앙 도매시장법'이 성립했다.
중앙 도매시장 제도는 종래의 도매상 자본을 핵심으로 하는 소비지 도매시장을 재편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이러한 조직화는 소규모 생산자의 출하조합에 대한 조직화를 수반하고 있었다. 즉, 공설 시장의 설립 당초에 중시되었던 '생산자'와 '저소득층'을 위한 '사회 정책'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도시 소비자'를 위한 조직으로 재편하는 것이 중앙 도매시장 제도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중앙 도매시장은 즉시 설치된 것은 아니었다. 최초에 설치를 본 교토시에서도 1927년 개설이고, 다음으로 1931년에 오사카시, 1935년에 도쿄시에서 개설이 이어졌다. 그림 6-2는 '동양 제일'이라 자랑하던 오사카 중앙 도매시장의 사진그림엽서이다. 광대한 부지와 통일된 건물과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바로 앞에는 채소 과일을 나르던 짐수레가 줄지어 늘어서고, 손수레를 밀고 있는 사람, 자전거를 타고 있는 사람, 짐을 어깨에 맨 사람이 오가고 있다.

그림 6-2 오사카시의 중앙 도매시장(사진그림엽서, 연대 미상, 아마 쇼와 초기일 것)
출처: 필자 소장
나고야시에서는 중앙 도매시장법이 시행되고나서 27년 뒤인 1949년에 마침내 개설되었다.(32) 이건 지역마다 축적되어 왔던 종래의 시장 관행, 공설 시장과 사설 시장의 관계, 생산지와 소비지의 거리 등에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생각한다.(33) 나고야시에는 근세 이래 '비와지마桃杷島'나 '아츠타熱田'에 중심적 시장이 존재했는데, 근대의 급속한 도시화를 배경으로 러일 전쟁 이후에 새로운 시장이 속속 등장했다. 메이지가 되고나서 개설된 시장은 1910년에 '어채魚菜 종합 도매시장 중앙시장 주식회사'(이하 중앙시장(주)로 표기)이 되어, 노포 시장의 지위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공설 시장의 필요성을 부르짓게 된 정세 속에서, 이 중앙시장(주)은 나고야시의 재정 결핍을 보완하는 식으로, 말하자면 공설 시장의 선구자가 된 실천이라고 평가되고 있다.(34) 나고야시의 경우, 중앙 도매시장의 개설이 늦어졌다고는 하지만, 비와지마 등 종래의 시장, 중앙시장(주), 공설 시장의 병존 체제에 의해 이미 새로운 유통 구조로 재편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먹을거리 생산 시스템의 계통화
공설 시장의 설치에 의해 생산자와 생산자 단체가 유통에 직접 관여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은 이미 기술했다. 그 생산자 단체의 하나는 농회였다.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 일본 농업을 시장과 농회의 관계로부터 밝혔던 건 타마 신노스케이다.(35)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증대하는 뱃구레, 특히 도시의 뱃구레를 채우기 위한 식재료가 증산되고, 전문화된 산지가 형성되며, 그것을 새로운 유통 시스템으로 분배하게 되었는데, 타마에 의하면 그 중요한 담당자가 '농회'라는 조직이었다.
이 책 제5장에서 상세히 보았듯이, 이 시기의 식재료 수요 증대에 대응하고자 농업 경영을 전환시켰던 아이치현의 농가는 양잠에서 벗어나 채소나 양계를 부업으로 한 다각 경영으로 방향을 바꾸고, 자급 비료의 연구와 함께 합리적으로 비료를 사용하는 방법을 모색하며 회계 장부를 꾸준히 작성하며 경영의 개선을 도모했다. 이러한 농가를 통솔했던 것이 '농회'로, 그건 시정촌市町村 농회, 군 농회, 현 농회로 조직되어 제국 농회와 연속되는 '계통 농회'로서, 개개의 농가를 재편하며 확대해 가는 시장을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첫 번째 단계로서, 상품 경제가 농촌으로 침투해 나아감에 따라 농회는 미곡, 누에고치, 특산의 과수를 판매하는 '판매 알선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건 지방 시장의 범위를 넘는 것은 아니었다. 두 번째 단계는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도시화가 진행된 시기로, 주요 군과 시에 농회의 판매 알선소가 모두 나왔다. 이 시기, 철도망의 정비, 농산물의 주산지 형성이 진행된 것도 맞물려, 각 농회 연합에 의해 운영되었던 판매 알선소는 제국 농회에 의해 일원화되었다. 그리고 생산 출하 통제로서, 산지 사이의 출하 협정도 성립되기 시작했다. 그 조금 전에 중앙 도매시장이 등장했던 것이 이 움직임을 촉진했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 농회가 조직적인 발전을 이루는 원동력은 1919년 4월의 '주요 식량 농산물 개량 증식 장려 규칙(개량증식규칙)'에 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농산물을 증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농림성은 종자와 기술의 새로운 시스템을 확립하고자 했다. 구체적으로는 농림성의 예산으로 각 군도부현에 종자를 생산하는 채종포를 만들고, 기술원을 배치했다. 채종포는 농가상조합農家商組合이 경영하고, 그들을 채종포 네트워크로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논벼에 대해서는 1927년부터 전국을 9구역으로 나눈 지정 시험지 제도가 정비되고, 인공 교배에 의한 우량 품종의 육종과 보급이 시도되었다. 이른바 농림 ○○호라는 품종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 쌀과 보리의 우량 품종의 통일이 진행된다.
일본 농업 정책에서 쌀 소동은 '지주 농정'에서 '식량 농정'으로 전환하는 큰 획기였다.(36) 그리고 그 뒤 중앙 도매시장법의 제정과 그에 의한 시장의 재편, 전국으로 그 규모를 확대한 판매 네트워크의 형성, 국내 통일 시장의 탄생은 식재료를 소비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식재료를 생산하는 사람들로부터 보더라도 중요한 획기일 수밖에 없었다. 근대 일본의 청과물을 중심으로 한 상업적 농업은 계통 농회와 판매 알선 사업 없이는 발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앙 도매시장법의 제정은 1921년의 미곡법과 마찬가지로, 국가가 농산물 시장에 항상적, 제도적으로 관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 논리는 '사회 정책', '구제 정책'이라기보다도 오히려 '경제 정책'이라는 성격을 짙게 해 나아가는 것이었다. 먹을거리의 교환과 분배를 뒷받침하는 사상은 여기에 이르러 크게 전환했다. 즉 그건 공설 시장이 사회 불안의 해소를 첫 번째 목적으로 했던 데에 반해, 그에 이어지는 전국 시장의 통일 과정은 도시로 모이는 노동자의 뱃구레를 채우고, 자본주의의 경제 구조를 뒷받침하기 위한 대량 생산, 대량 유통 체제의 확립을 목적으로 크게 방향을 바꾼 것을 의미했다.
주석
(1) 미야타 노보루宮田登 「인터뷰 경제학과 민속학(インタビュー 経済学と民俗学)」 「大航海 特集 反経済学』 26, 1999년, 58~70쪽.
(2) 세가와 키요코瀬川清子 『판녀販女』 三国書房, 1943년, 1쪽.
(3) 이자벨라 버드 저, 金坂清則 역주 『완역 일본 오지 기행2 니이가타新潟-야마가타山形-아키타秋田-아오모리青森』 平凡社, 2012년, 52쪽.
(4) 이오쿠 시게히코井奥成彦 『19세기 일본의 상품 생산과 유통 -농업・농산가공업의 발전과 지역 시장」 일본 경제평론사, 2006년.
(5) 히로타 마코토廣田真 편 「근대 일본의 교통과 유통・시장」 清文堂 出版, 2011년 등에 상세하다.
(6) 야나기타 쿠니오柳田國男 「야나기타 쿠니오 전집』 26, ちくま文庫, 1997년, 194쪽.
(7) 전시 중의 식량 통제기나 통제 해제 직후부터, 다시 행상인이 농산물이나 해산물을 짊어지고 유통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 경우, 반드시 남편이 잡은 생선을 지고 간다는 형태는 아니고, 이동 수단도 도구도 매입 방법도 변화했다. 대규모화, 계통화된 유통 시스템이 확립된 최근에, 오히려 이와 같은 소규모의 장사가 재조명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야마모토 시노山本志乃 『행상 열차 -깡깡 부대를 좇아서(行商列車 -カンカン部隊を追いかけて)」 創元社, 2015년은 행상과 장사를 현대와의 관계에서 고려하기 위한 좋은 책이다.
(8) 경제학 중에서 이와 같은 논의를 전개한 희한한 연구로서, 이와이 카츠히토岩井克人 『베니스 상인의 자본론(ヴェニスの商人の資本論)』 ちくま学芸文庫, 1992년은 주목된다.
(9) 도매시장卸売市場 제도 50년사 편찬위원회 편 『도매시장 제도 50년사(卸売市場制度五十年史)』 제1권・본편 I, 사단법인 식품수급연구센터, 1979년, 13~16쪽에서는 '시장' 개념에는 ①상품의 거래를 위해 설치된 특정 장소나 건물이라는 의미, ②실존하는 각 상품이 거래되는 추상적인 장소라는 의미, ③거래 기능, 활동만을 포착해 추상적으로 표현한다는 의미, 그리고 ④일정 상품이 팔리는 수요처 등이라는 복수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10) 앞의 (6), 283~284쪽.
(11) 앞의 (6), 283쪽.
(12) 앞의 (6), 284쪽.
(13) 앞의 (6), 285쪽.
(14) 키네부치 요시히사杵淵義房 『우리나라 사회사업(本邦社会事業)』 冬夏社, 1922년, 180쪽.
(15) 지금까지 근대 일본의 자본주의와 중앙 도매시장법의 특정 관계에 대해서는 언급되었지만, 공설 시장을 언급한 것은 적다. 그중에서 하라다 마사미原田政美 「근대 일본 시장사의 연구(近代日本市場史の研究)』 そしえて, 1991년은 그 이전 역사로서 공설 시장론의 형성과 전개의 역사적 의의를 밝혔던 연구로서 주목된다.
(16) 예를 들면, 농상무성 상무국商務局 『공설 시장에 관한 조사(公設市場二関スル調査)』 농상무성 상무국, 1912년(독일, 이탈리아, 중국, 영국에 관한 조사 보고), 내무성 사회국 『프랑스 공설 시장 제도 개요(仏国公設市場制度概要)』 내무성 사회국, 1900년(프랑스에 관한 조사)가 존재한다.
(17) 스미타 신지로우住田新次郎 「공설 시장에 대하여 -어차 요리 강습회 강연 속기(公設市場について -魚茶料理講習会講演速記)」 『가사와 위생』 4(12), 1928년, 76~78, 87쪽. 이하 같은 자료에 의한다.
(18) 코스기 하나木杉花 「오사카의 부엌 -공설 시장 해부(大阪の台所 -公設市場解剖)」 『가사와 위생』 14(5), 1938년, 48쪽.
(19) 앞의 (18), 48~49쪽.
(20) ①하세가와 히로시長谷川博・마스지마 코우増島宏 「'쌀 소동'의 제1단계 -현지 조사를 중심으로(「米騒動』の第一段階 -現地調査を中心として)」 『社会労働研究」 1, 1954년, 146~169쪽. ②같은 사람 「'쌀 소동'의 제1단계(완결) -토야마현의 현지 조사를 중심으로(『米騒動』の第一段階(完結)富山県下現地調査を中心として)」 『社会労働研究』 2, 1954년, 114~173쪽.
(21) 쿠기미야 토쿠타로우釘宮徳太郎 「공설 시장 안내』 金洋堂書店, 1919년, 1쪽.
(22) 앞의 (15), 27쪽.
(23) 내무성 위생국 편 「각 지방의 시장에 관한 개황(各地方ニ於ケル市場ニ関スル概況)」 내무성 위생국, 1919년.
(24) 네모토 세이로쿠根本清六 「소매 상습관과 공설 시장(小売商習慣と公設市場)」 「三田学会雑誌』 12(10), 1919년, 106쪽.
(25) 앞의 (24), 94쪽.
(26) 앞의 (16).
(27) 상공성 상무국 『소매시장에 관한 조사 그 1(小売市場ニ関スル調査其ノー)』 상공성 상무국, 1930년.
(28) 앞의 (14), 193~194쪽.
(29) 도쿄의 시장과 공공성에 대해서 논한 것으로, 야마구치 요시토山口由等 『근대 일본의 도시화와 경제의 역사(近代日本の都市化と経済の歴史)』 東京経済情報出版, 2014년이 있다.
(30) 앞의 (14), 191~192쪽.
(31) 앞의 (14), 195쪽.
(32) 앞의 (15), 132쪽. 이하, 같은 책을 참조해 기술한다.
(33) 나고야시 중앙도매시장 본장本場 편 「나고야시 중앙도매시장사(名古屋市中央卸売市場史)』 나고야시, 1969년, 115쪽.
(34) 앞의 (15), 106쪽. 나고야시 시장의 변천에 대해서는 앞으로 검토할 여지가 남아 있다.
(35) 타마 신노스케 『주산지 형성과 농업 단체 -전간기 일본 농업과 계통 농회』 농산어촌문화협회, 1996년. 이하, 같은 책에 의한다.
(36) 오오에 시노부大江志乃夫 「일본 파시즘의 형성과 농촌(日本ファシズムの形成と農村)』 校倉書房, 19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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