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사람들과 사회를 잇는 부엌문 -시장 경제가 낳은 포식과 결핍
1. 부엌문에서 보는 역사
식당의 부엌문
마지막으로 우리는 식당의 뒷문으로 발을 옮겨야 한다. 왜냐하면 그곳도 또한 중요한 먹을거리의 장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집으로 말하면 현관이 아니라 부엌문이다. 그곳은 사용인이 출입하고, 식재가 운반되어 들어오고, 근방의 소문으로 꽃이 피며, 그리고 취사장이나 식탁으로부터 정리된 먹을거리의 잔반이 나와서 가는 장소이기도 하다. 뒷문에서 보이는 세계는 정면의 입구에서 보이는 세계와는 달리 숨겨져 있기 때문에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사료도 결코 많지 않다. 그러나 그곳에는 때때로 사람들의 겉치레가 아닌 본심의 세계가 있어, 포장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먹을거리에 관련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부엌문'으로부터 본 역사로서 다시 그려 보고자 한다.(1)
앞 장까지는 식당이나 공장에 발을 옮기는 사람들이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시대에 식당에조차 발을 옮기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대체 그들은 어떻게 이슬 같은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을까?
그 한 가지 대답은 식당이나 학교, 병원에서 나오는 '잔반'에 있다. 메이지, 다이쇼우 시기의 도시에서는 식당의 뒷문에서 내놓는 그 잔반은 독자의 유통 경로를 따라 사람들의 뱃구레로 분배되었다. 식당과 그곳에 발을 옮기지 못하는 사람들을 연결하는 길, 그것은 식당의 부엌문에서부터 시작된다.
취사장과 사회를 연결하는 것
취사장과 사회를 연결하는 것은 부엌문에서 그날의 잔반을 모으고 돌아다니는 '잔반집(残飯屋)'이다. 메이지 시기의 도쿄를 그린 마츠바라 이와고로우松原岩五郎의 「가장 암흑의 도쿄(最暗黒の東京)』에는 '잔반집'이라는 직업이 등장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나'는 잔반집의 하인이 되어 일하면서 그 실태를 취재해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쓴다.
매일, 아침은 8시, 점심은 12시, 저녁은 똑같이 오후 8시 무렵부터 큰 짐수레에 용수 같이 생긴 길쭉한 철포 소쿠리(鉄砲笊)라 부르는 지름 1자 남짓한 큰 소쿠리, 멜통, 또는 반절 통, 간장통 등을 싣고서 동료 2명과 함께 사관학교 뒷문으로 들어가, 3번의 일상식에서 남은 걸 매입해 돌아오는 것인데.......(2)
잔반집은 매끼마다 큰 짐수레를 끌고서 주는 걸 받으로 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받아오는 곳은 이 문장의 경우 사관학교이다. 그럼 대체로 어느 정도 양의 잔반이 나온 것일까?
팔아 치우는 것은 곧 그 사관학교에서 나오는 것으로, 한 말 분량 소쿠리(밥 양 무릇 15관) 50전에 받아서 이를 1관 무릇 56전 정도에 판다.(3)
1관당 3전 3리 정도에 사들여 5전에 판다고 한다면, 1전 1리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잔반의 구체적인 양과 내용은 "천여 명을 먹이는 주방의 잔반이라면, 어떤 때는 저 철포 소쿠리로 3개에서 5~6개 정도 나오는데, 국물과 반찬도 그에 준해 타쿠앙 절임의 끄트머리부터 국수 찌꺼기, 아니면 생선 바른 뼈, 누룽지 등 모두 각각의 그릇에 모아서 짐을 꾸리면"이라 한다. 철포 소쿠리 3~6개라는 건 날에 따라, 또는 아침, 점심, 저녁에 따라 양이 일정하지 않다고 읽힌다. 내용은 밥만이 아니라, 부식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큰 짐수레를 끌고 돌아오면, 가게 앞에는 구름 같이 사람들이 모여 기다리고 있어, 수레의 그림자를 보면 "쏴아 하고 길을 헤치며 지나갈지 말지" 하는 상황이다. 또한 '너도나도 앞다투어 소쿠리, 찬합을 내민다. 2전 주세요, 3전어치 주오, 이쪽엔 1관, 여기도 500돈어치라고 외치며 어깨 너머로 밥통을 내밀고 겨드랑이 아래로 돈을 던지는" 모습은 마치 강변 어시장의 아침 장 같다고 마츠바라는 표현한다.
잔물은 많이 얻는 날도 있으면, 거의 얻지 못하는 날도 있다. 거의 얻지 못하는 날에는 잔반집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주방을 수소문해, 될 수 있는 한 많은 잔반을 가져다 그들에게 분배하려 힘쓰며" 분주하다. 마차바라의 르포르타주에서 볼 수 있는 건 이와 같은 먹을거리의 풍경이었다.(4)
그러나 물론 이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잔반을 다루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떠한 인물일까? 잔반집은 당시 어느 정도 존재했던 것일까? 이들에 대해 체계적인 조사를 실시한 것이 도쿄시 사회국으로, 그 보고서가 거의 유일한 단서가 된다. 아래에서는 도쿄시 사회국이 칸토우 대지진 전과 후에 실시한 2회의 조사를 바탕으로, 잔반을 둘러싼 문제를 생각해 나아가도록 하자.
2. 『잔반 수급에 관한 조사(残食物需給ニ関スル調査)」
도쿄시 사회국의 조사(1922년)
도쿄시 사회국은 잔반에 관한 조사로 1922년에 「부랑자 및 잔반에 관한 조사(浮浪者及残食物に関する調査)」를, 1930년에 「잔반 수급에 관한 조사」를 실시한다.(5)
마차바라 이와고로우가 그린 메이지 20년대의 도쿄에는 아직 공장 노동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메이지 후기가 되면 속속들이 공장이 생겨, 노동자가 증가했다. 그와 연동하듯이 빈곤한 사람들, 갈 곳이 없는 사람들, 입에 풀칠하기 위해 잔반을 구하는 사람들도 또한 증가했을 터이고, 도쿄시 사회국은 바로 그 실태를 파악하려고 이 조사를 시시한 것이라 생각한다.
우선, 칸토우 대지진 이전의 조사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이 조사의 개설은 다음 같이 시작한다. 조금 장문이지만 인용하겠다.
도쿄 시내 및 군 지역 정촌町村에 소속된 병영의 병사 또는 학교 공장 등 부속의 기숙사에 기숙하는 자로, 일상의 식사를 함에 있어, 그 식품을 먹다 남기는 자가 있다. 또한 세 끼 식사 제공의 도시락을 필요로 하는 자로서 그걸 먹다 남기는 자와, 다시 극장에 입장 관극하는 자와 또는 도시 각 방면에서 영업하는 대소의 요리점, 유곽 등에 찾아가는 자로 식품을 먹다 남기는 자 혹은 병원 수용의 환자로서 급식으로 공급되는 세 끼를 먹다 남기는 자 등이 있어, 이 종류의 잔식물은 그곳으로부터 날마다 값이 있는 것이 되고 또는 대가 없는 곧 값이 없는 것이 되어, 현지, 수요자에게 공급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른바 잔반집이란 것은 값이 있는 것인 잔반의 수요를 영업으로 하는 것으로, 값이 없는 것으로 나오는 잔반을 수요하는 건 이른바 '다이가라모라비ダイガラもらひ(부엌 찌꺼기 얻는 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전자는 영리적으로 잔반을 파는 것이고, 후자는 대개 잔반을 대가 없이 산출자에게서 공급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다이가라모라이ダイガラもらい 안에는 자기만의 수요에 충당하는 것과, 나아가 이를 자기 이외의 자에게 분배하는 것이 있어, 이 자기 이외의 자에게 분배하는 경우에 이르러서는 다소의 이익을 얻고 분배하는 것도 있다.(6)
그림 7-1에 의해 잔반집의 모습을 엿보아 알 수 있다.

그림 7-1 다이쇼우 시기의 잔반집
출처: 도쿄시 사회국 편 「부랑자 및 잔식물에 관한 조사」 도쿄시 사회국, 1923년, 속표지 그림.
마츠바라의 르포르타주에서는 병영 병사의 잔반이 사례가 되어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그외에 학교, 공장, 도시락 가게, 극장, 요리점, 유곽, 병원 등의 부엌문에서도 또한 잔반이 나왔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모두 이 시기에 점점 뱃구레가 모이게 된 장소이다. 이 조사에 의하면, 잔반은 두 가지 경로로 유통된다. 하나는 '잔반집'이라 부르는 전문업자로, 또 하나는 '다이가라모라이'(7)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1922년 12월의 조사 시점에서, 잔반집은 도쿄 시내에 16개 업자, 군 지역에 10개 업자, 합계 26개 업자가 존재했다.
잔반의 수급 관계 -잔반집의 가게 앞
잔반이 나오는 구체적인 장소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극장이란 제국 극장(그림 7-2), 신토미자新富座, 메이지자明治座, 이치무라자市村座이며, 학교란 학습원 대학 남자부, 케이오우키쥬쿠慶應義塾 대학, 쇼우센商船 학교, 아오야마青山 사범학교이다. 유곽은 요시와라吉原 유곽을 1위로, 다음은 스사키洲崎 유곽의 이름이 거론된다. 세 끼 조달 도시락 가게가 있는 건 니혼바시日本橋, 마루노우치丸の内이며, 크고 작은 요리집에서 나오는 산출양이 가장 많은 건 뭐니뭐니 해도 아사쿠사 공원 일대였다. 이에 근위보병 제1연대, 같은 기병 연대 등 합계 18개의 군 관계 시설이 더해졌다.

그림 7-2 도쿄 제국 극장의 제2 식당(사진그림엽서)
출처: 필자 소장.
이들 잔반의 산출 지역 각각을 단골 거래처로 하는 잔반집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 그 때문에 잔반의 산출 지역과 그걸 소비하는 지역에는 명확한 대응 관계를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코우지마치麹町의 제국 극장에서 나온 잔반은 M이란 업자에 의해 시외 닛포리마치日暮里町 부근으로 운반되었다. 카메이도亀戸의 동양 모스린 등의 방적 회사에서 나온 잔반물은 K라는 업자에 의해 혼죠쿠本所区 타이헤이쵸우太平町로 운반되었다. 그외의 장소도 마찬가지로 거래 관계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잔반은 얼마에 팔렸을까? 백미는 시가의 1/3, 남은 반찬은 일정하지 않지만 국 잔반은 1되 약 2전, 자반 연어 토막 1개 5리 정도이다. 이들은 잔반집에서 '한 그릇 퍼서 판매(丼売り)' 또는 '저울로 판매(秤り売り)'로 판매된다. 예를 들면, 요츠야四谷의 S에서는 남은 밥 1그릇 수북히 3전, 조금 2전, 부식물은 2전, 국 2전, 절임 1전으로 판매한다.(8) 저울 판매로 사는 사람들은 보자기, 된장 거름망 등의 용기, 또는 쌀 걸 가지고 사러 온다. 대형 된장 거름망 한 그릇에는 약 300문의 남은 밥이 들어가고, 이걸로 5전이다. 절임은 한줌 1전, 남은 반찬은 소고기, 생선 등은 4토막 정도에 5전, 참치회 등은 반찬 접시 1 그릇 5전, 그외의 부식물은 반찬 접시 1그릇에 대략 2전이다.
'한 그릇 퍼서 판매'는 '정식定食'이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3곳의 전문업자가 존재했다.(9) 이것은 식당과 비슷한 식사처를 설치해 이른바 '밥집'을 방불케 하기에, 하루에 이들 세 가게에서 약 330명이 식사했다. 고봉밥을 주문하는 사람 중에는 그곳에서 반절을 먹고, 나머지를 도시락통에 담아 점심 또는 저녁으로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조사를 할 때는 17곳의 잔반집이 매입하는 잔반은 하루 평균 320관, 그 가운데 식용은 166관이었기 때문에, 50% 이상은 사람들에게 소비되었다고 계산된다. 이 시점에서 잔반을 수요하고 있던 건 580명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하루 1인 평균 280문(약 1kg)(10)을 소비하는 비율이 된다. 가족의 것을 사러 왔다면, 이 수요자 수와 소비자 수는 다르기 때문에 실제로는 1인당 소비량은 더욱 적었다고 보아도 좋다.
1912년 12월의 「츄우오우 신문中央新聞』에는 "연말의 빈민굴(歳晩の細民窟)"이란 기사가 연재된다.
좁은 거리 사이에 끼어 있는 생선가게 앞에는 꽁치 토막이 산더미처럼 진열되어 있는데, 밥때가 되면 가게 앞은 영세민으로 가득하다. 한 손에 남은 밥을 들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 손에는 토막을 들고 간다. 올해는 연말이 되어 날씨가 계속 좋은 탓인지 전혀 곤란한 기색도 없고 이 일대 경기는 바라던 대로 꽤 좋은 편이라 해도 좋다. ...... 쌀가게에 들어가 묻는다. 팔리는 쌀은 3등미가 많고, 10전, 15전, 20전어치를 보자기나 소쿠리를 들고 사러 오는데, 그중에는 5전어치라 하는 사람이 있다. 그건 대부분 통근하는 직공이라든지 여공으로, 그날 도시락을 쌀 만큼 사 가는 것이다. 잠시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이런 손님이 줄줄이 온다. 쌀가게를 나와 군고구마 가게를 들여다보니 이곳도 만원이라 굽는 게 따라가지 못할 정도, 오후 간식으로 팔린다고 하는 이외에 이 고구마로 생명을 이어가는 이들도 꽤 많이 있는 것이다.(11)
1912년 해가 저물어 가는 도쿄의 혼잡한 거리 안에는 이와 같은 사람들이 엇갈리고 있었다. 사회국의 조사만으로는 알 수 없던 것은 잔반과 신선한 생선을 조합시킨 식사, 아침점심저녁 가운데 점심만은 구입한 쌀로 만드는 도시락, 쌀만이 아니라 군고구마로 뱃구레를 채우는 한 끼라고 하는 다양한 상태이다. 이렇게 보면, 잔반을 구입한다는 건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기외한 것이 아니라, 어느 한정된 지역이었지만 사실은 지금보다도 훨씬 일상적인 풍경이었을지도 모른다.
잔반으로 보는 세상 -1930년의 변화
1930년의 조사가 이루어지자, 잔반의 산출원으로 새롭게 백화점이 더해진다. 구체적으로는 니혼바시 시로키야白木屋, 긴자銀座 마츠야松屋, 신쥬쿠新宿 호테이야布袋屋, 신쥬쿠 마츠야에서 나오는 잔반의 어느 정도인지는 사회사업가 또는 독지가를 통해 식용으로 이용되었다. 잔반에 관한 배우로서 사회사업가 등이 등장한 것이 이전 조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 시기의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그러나 이 시기가 되면 대부분은 양돈의 사료로 이용하게 된 것도 또한 중요한 변화로서, 우에노와 긴자의 마츠자카야松坂屋, 무로마치의 미츠코시三越에서 나오는 잔반은 모두 사료가 되었다.
잔반집에 주목하면, 칸토우 대지진 전에는 26곳 가운데 축산 전문의 업자가 4곳만 있었던 바, 두 번째 조사 시점에서 그건 10곳으로 늘어났다. 또한 이 시점이 되면, 대지진 전에 존재했던 '한 그릇 퍼서 판매'가 모두 사라지고, 대신 잔반으로 도시락을 만들어 이걸 판매하는 업자가 나타났다.
1차 세계대전 이전, 특히 10년 전까지는 잔반의 수요자는 매우 많아 축산이나 그외의 용도는 소량이었다. 그에 비해, 1922년의 조사 시점에서는 잔반의 수요자는 감소했다고 한다. 1916년 말에 비하면, 3/10이 되어 사회국이 조사를 실시한 해의 최근 3개년 이내에 5곳의 잔반집이 폐업했다.(12)
1차 세게대전의 영향으로 노동 수요가 높아졌던 것도 그 배경에 있었다고 1930년의 조사에서도 언급된다.(13) 그러나 그 한편에서 시내 각 방면에서 양돈업을 영위하는 것이 해마다 증가해, 잔반은 양돈용 사료로 쓰이게 되었다. 1928년 도쿄부 안에는 36곳의 축사가 있고, 1212마리의 돼지가 사육되었다. 덧붙여서 치바현, 카나가와현에서도 똑같은 경향이 보여, 근위 사단의 각 부대에서 나오는 잔반은 거의 축산용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1930년의 조사 시점에서는 하루에 나오는 잔반의 수량은 상급 밥 191관, 하급 밥 288관, 남은 반찬 26관, 밥과 반찬을 섞은 것 168관, 빵 3관, 합계 676관이었다. 이 가운데 식용으로 전환하는 것은 상급 밥 170관, 남은 반찬 26관, 빵 3관으로, 전체의 약 1/4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이 조사를 할 때에 잔반으로 굶주림을 이겨내는 사람들은 하루 631명에 달했다. 이전 번 조사의 580명보다도 증가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한 번 감소했던 잔반의 수요자도 이 해에는 증가하는 경향이고, 또 이전 번 조사할 때와 비교해 축산업에서 사용도가 더해짐에 따라 식용 잔반 공급량의 감소가 잔반과 그 수요자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고 사회국의 조사는 전하고 있다.
잔반 품질을 양부에 대해, 사회국이 중시한 것은 '부패'의 진행이다. 밥과 국이나 부식물을 따로 모아서 두는 경우, 그리고 세 끼마다 주고받은 것이 있는 경우에는 비교적 양질의 먹을거리가 되지만, 모든 걸 똑같은 용기에 담고, 또 주고받는 것이 하루에 1번인 경우 등은 당연하지만 부패가 진행되기 쉬워진다. 이걸 감안해 사회국은 "극장에서 나오는 잔반은 일양 함께 처리 방법을 강구하면 인간의 식용에 적합한 품질을 갖춘다", "각각의 큰 백화점에서 나오는 잔반은 이를 적당히 처리만 한다면 거의 모두 인간의 식용에 적합하다"(15)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극장이나 백화점이 융성하며 잔반이 늘어나는 한편으로, 그것은 가축의 사료로 유통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날의 식사에 곤란한 사람들의 뱃구레로는 분배되지 않게 되었다.
3. 먹을거리의 홍수와 텅 빈 뱃구레
식도락과 결핍
잔반은 그걸 필요로 하는 생활 실태만이 아니라, 사실은 그걸 만들어 내고 정비를 하면서 풍요롭고 사치스런 사회가 도래하는 걸 거꾸로 비추는 역할도 한다. 잔반의 내용, 품질, 수급 관계는 그대로 군대, 극장, 대학, 병원, 백화점, 공장, 요리점, 유곽에서 사람들의 뱃구레를 반영하는 거울이었던 것은 이미 지금까지 기술해 온 대로이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보이는 것은, 이 시대에는 먹을거리의 '도락'과 '결핍'이 동시에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이 시대에만 한정한다는 건 오히려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즉, 우리가 태어나는 현대도 또한, 바로 똑같은 상황에 처한 것에 눈을 돌리지 않으면, 이 먹을거리의 '도락'과 '결핍'의 공존이 세상을 널리 뒤덮어 가는 것의 시작이 이 시대에 있었다고 해야 할 듯하다.
메이지 시기는 먹는 것이 하나의 '도락'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식도락食道楽』은 메이지 시기의 신문 소설가였던 무라이 겐사이村井弦斎에 의해 1903년에 <호우치報知 신문>에 연재되어, 열광적인 인기를 끌어, 간행되자마자 공전의 대히트를 쳤던 소설이다. "뱃속의 새해(腹中の新年)'라고 제목 지은 이 소설의 모두는 뜻밖에도 의인화된 '위'와 '장'의 회화로부터 시작된다. 사치스런 식사뿐인 주인을 지닌 몸으로서, 정월도 쉬지 않아, 매일 힘들다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오이 이키치胃吉 씨,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야아 이건 쵸우조우腸蔵 씨, 작년에는 여러 가지로 신세 많이 졌습니다. 또 별고 없습니까, 아하하. 그런데 쵸우조우 씨, 오늘은 정월 초하루라고 해서 1년에 한 번뿐인 날이니 우리 서로 좀 쉬고 싶네요. 우리처럼 1년 내내 바쁘고 고달픈 존재도 없지 않습니까. ...... 우리만큼은 1년 내내 쉬지도 못하잖아요. 우리는 하루에 3번씩 일하면 제 역할이 끝나야 하는데, 여기 주인은 간식을 좋아해서 세 끼 식사 외에도 과자가 들어오질 않나, 경단이 들어오질 않나, 술도 가끔 흘러들어오니 정말 이거 감당이 안 되네요.
이 소설의 히로인 '오토와お登和'의 모델은 저자인 무라이의 아내, 타카코多嘉子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오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의 사촌 형제로, 그녀는 모친의 여동생이 고토우 쇼우지로우後藤象二郎의 후처로 미츠비시 재벌인 이와사키岩崎 가문과도 인연이 이어졌다.(17)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듯이, 『식도락』에는 실로 다채로운 요리들이 계절마다 등장하는 극적 고안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의 최초의 속표지 그림에는 야마모토 쇼우코쿠山本松谷가 그린 "오오쿠마 백작 저택 부엌의 그림'이 실려 있다(그림 7-3). 일하는 여성들과 요리사, 중앙의 선반에는 이 부엌의 명물이라 일컫는 여러 제철 채소가 바구니에 쌓여 있다. 큰 가마솥이나 통, 이제 막 옮기려는 정돈된 상, 서양 냄비나 전구 시계, 오븐 같은 것도 보이며, 서양식 도구도 풍부히 받아들이고 있다.

그림 7-3 오오쿠마 백작 집의 부엌
출처: 무라이 겐사이村井弦斎 『증보주석増補注釈 식도락食道楽』 春の巻,報知社 출판부, 1903년, 속표지 그림扉(山本松谷 그림).
이 속표지 그림을, 또는 이 책에 등장하는 화려한 여러 요리들을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어느 사람은 공감을 하고, 어느 사람은 동경을 품고, 또 어느 사람은 현실이 아닌 꿈의 세계를 엿보며, 그리고 책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은 책의 소문을 듣고 놀라움과 체념의 한숨을 쉬든지, 또는 전혀 다른 세계에 지나지 않다고 무관심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책의 존재조차 알아채지 못했던 사람들은 그날의 돈벌이 유무와, 뱃구레 안에 들어갈 것을 구할 수 있을지, 그 일에 고심했을 듯하다.
어쨌든, 이와 같은 식도락을 즐겼던 것은 아마 매우 극소수의 사람들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틀림없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사실은 식도락과는 거리가 먼 일상을 보내던 사람들이나, 적어도 식도락을 문자로 읽고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하는 걸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도시의 부엌문 -시장의 번화함 속에서
지금까지 기술했듯이, 메이지 시기에는 새로운 먹을거리가 등장하고, 다이쇼우 시기에는 채소 재배와 가공 기술의 혁신에 의해 대량 생산과 대량 가공이 시작되었다. 나아가, 유통망의 발달이 그에 박차를 가해 먹을거리는 각지의 중앙시장을 기점으로 대량으로 집산하게 되었다. 시장은 말하자면 도시의 부엌문이다.
예를 들면 도쿄에서는 칸다神田 시장, 아이치에서는 비와지마枇杷島 시장, 오사카에서는 텐마 시장이란 근세 이래의 시장이 재정비되고 크게 북적거렸다. 그림 7-4는 「풍속화보風俗画報』에 게재되어 있는 메이지 30년대의 칸다 시장이다. 에도 시대부터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오오타大田 시장으로 이전하기까지의 시장을 풍부한 자료를 수록해 묘사한 「칸다시장사神田市場史』에 의하면, 메이지 말기에는 철도 보급에 따라 과일이 장거리 수송으로 도쿄로 보내지는 한편, 채소도 특히 감자나 호박 등 비교적 변질되기 어려운 품종의 것이 널리 재배되어 대도시의 수요에 응하도록 되었다.(18) 아이치의 비와지마로부터 촉성 채소의 입하를 보게 되면, 시장에서는 이걸 '레일모노レール物'라 부르고, 이후 이 '레일모노'가 각지로부터 속속들이 수송되어 오게 되었다.

그림 7-4 칸다 시장의 번화함
출처: 『풍속화보』 임시 증간增刊, 203호, 1900년.
이 시장의 번성을 마츠바라 이와고로우의 펜은 다음처럼 생생하게 표현한다.
채소가게의 큰 선반은 다이하치大八라고도 부를 만한 대형 짐수레를 써서, 채소가게의 작은 선반은 다이로쿠大六라고도 부를 만한 중형 짐수레를 써서, 또한 채소가게의 가장 작은 선반 및 길거리의 소상인은 한 짐의 광주리를 써서 저마다 그 시장을 향해 달린다. 이건 참으로 매일 아침의 과업으로서 365일, 일요일도 축제날도 공휴일도 명절도 없이 매일의 과업이다. 시바芝, 아카사카赤坂, 교우바시京橋 및 니혼바시日本橋의 채소상은 데에코가시大根河岸의 시장으로, 혼죠本所, 후카가와의 사람들은 미카와시마三河島의 시장으로, 시바, 아자부麻布의 사람들은 메구로目黒의 시장으로, 코이시카와小石川, 혼고우本郷, 시타야下谷의 사람들은 코마고메駒込 및 야나카谷中의 시장으로, 요츠야四ツ谷、우시고메牛込、아카사카의 사람들은 신쥬쿠의 시장으로, 아사쿠사, 혼죠, 카사이葛西의 사람들은 센조쿠千束, 코즈카하라小塚原 및 혼죠 각처의 시장으로 향해 각각 물건을 산다. ...... 중앙 정부라고도 할 만한 중추의 대시장은 도쿄부의 15구 안의 채소상이라 할 만한 채소상이 모이지 않는 이가 없는 과실의 커다란 '마켓'으로서, 아침의 도쿄 으뜸의 성황, 아마도 아침의 일본 으뜸의 장관으로 남겨질 것, 이것이 일반에서 다쵸우多町의 청과물 시장이라 부르던 대시장이다.(19)

다이쇼우 시기의 데에코가시 시장의 모습.
이 다쵸우의 청과물 시장이 칸다 시장으로, 그 거리에는 240개의 청과물 도매상, 37개의 건물乾物 가게, 23개의 잡화 및 완구 도매상, 47개의 짐수레 도매상, 12개의 음식점이 늘어서고, 그 500개 남짓 가게가 사방 몇 구역에 걸친 사람들의 모습은 "산간의 한 작은 도시를 개척해 인간을 메운' 듯하다고 마츠바라는 묘사한다. 매일 아침 모이는 사람의 수는 무려 5만이라고 하는 이 대시장에는 전국에서 모이는 다양한 채소나 과일이 죽 늘어서 있었다. 칸다의 큰 가게, 이세쵸우伊勢長의 친척 집안은 오오쿠마 시게노부 저택을 거래처로 삼아 채소를 판매하는 채소상이었다.(20) 그림 7-3의 중앙에 보이는 오오쿠마 저택 부엌의 명물이라 여겨진 광주리에 가득 담겼던 계절 채소를 운반한 주체라는 것이다.
때마침 시장은 가을의 초입의 출하라서 채소와 과일의 색은 풋콩, 가지, 옥수수, 호박의 노르스름한 서리가 내린 것, 배가 익어 좋은 때를 맞은 것, 수박은 첩첩이 쌓여 길가에 가득하고, 토란 줄기는 숲처럼 처마를 막아서며, 양하와 햇토란, 유자, 작두콩 등은 반절 또는 멍석에 펼쳐서 사람이 그 위를 걸어다니는 것도 아랑곳없이 내버려두고, 햇생강의 색에 붉은기가 감도는 것, 토란의 알줄기를 허옇게 씻어낸 것, 대포 같은 서양종 수박, 동아, 참외가 산을 이루는 사이에도 포도, 복숭아, 배의 과반은 상자 거래를 해서 사는 사람은 그 안에서 견본을 골라 1개의 맛을 본다. 사면이 채소와 과일의 색에 묻혀서 왕래는 다만 사람의 발만, 사람 어깨가 서로 겹쳐서 동전 1전 떨어질 여지가 없다. 그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광주리, 그 발 밑을 긁는 짚신, 그 바퀴와 바퀴가 맞물리는 짐수레. ...... 밭의 진액이 수레로 운반되고, 산의 정기가 짐에 담겨 보내진다.......(21)
칸다 시장에서 펼쳐지는 "격렬한 거래, 넘쳐흐르는 채소, 혼잡한 사람의 모습, 뜨거운 열기, 북적거림, 사회 생활의 무리진 울림의 분연, 잡연한"(22) 상황을 멋지게 그려내고 있는 마츠바라의 펜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그럼, 이 먹을거리의 홍수 같은 시장을 엇갈려 가는 사람들의 뱃구레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었을까? 말할 필요도 없이, 먹을거리가 눈앞에 넘칠 만큼 있다고 해서 그걸 먹을 수 없는 것이 '시장'이라는 장이다. 즉, 무언가와 교환해야 비로소 얻는 '상품인 먹을거리'가 넘치고 있는 것이고, 이를 얻는 데에는 교환 수단으로서 화폐나 환이 필수였다. 칸다 이세쵸우가 시세를 정확히 판단해 낙찰받은 밀감으로 큰 돈을 버는 똑같은 장에서, 매일 아침, 무려 5만이라 일컫는 인파 안에는 이 시장에서 일하는 채소상의 사환이나, 큰 짐수레를 끄는 운송 일꾼, 그 수레를 길에서 기다려 뒤에서 미는 것으로 일당을 버는 타칭보우立ちん坊, 인근에서 한 짐의 채소를 날라 오는 농부, 상인이나 관료를 나르는 인력거의 차부 등이 엇갈려 가고 있었다. 그들은 이 넘치는 듯한 먹을거리의 홍수 한가운데에 있으면서 그 뱃구레에는 한그릇식당이나 포장마차에서 급히 먹는 약간의 밥과 국, 또는 어젯밤에 먹었던 잔반이 들어 있는 데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며, 그렇지 않으면 굶어서 텅 빈 뱃구레를 감싸고 일한 뒤에 먹는 한 조각의 찹쌀떡을 즐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그림 7-5). 이렇게 상상하면서 다시 그림 7-4를 보면, 이 대시장 안에는 먹을거리의 홍수와 텅 빈 뱃구레가 병존하고 있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림 7-5 도쿄의 포장마차 가게
출처: 미타니 카즈마三谷一馬 「메이지 물건 팔이 그림 모음(明治物売図聚)」 中公文庫, 2007년, 속표지 그림(원화는 「風俗画報」 261호,1902년, 야마모토 쇼우코쿠山本松谷 그림, 이 책 표지를 참조).
「칸다 시장사」의 집필자였던 에바토 아키라江波戸昭는 칸다 시장의 번영을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한편, 그 뒤 『도쿄의 지역 연구(東京の地域研究)」를 집필해 도쿄부 안의 다양한 직업, 노동자의 존재 형태, 그들과 근대 공업의 관계성을 논한다. 틀림없이 에바토는 칸다 시장을 묘사하면서 메이지, 다이쇼우 시기의 도쿄 내부에서 생기고 있던 먹을거리의 도락과 결핍의 이중성을 알아차렸을 터이다. 그 증거로 『도쿄의 지역 연구」(23)에서는 요코야마 겐노스케横山源之助의 「일본의 하층사회(日本之下層社会)」(24)를 채용하면서 1900년의 「도쿄부東京府 직업 조사」의 상세한 분석에 따라 구 지역에서 가장 많은 직종이 2만 호에 가까운 인력거꾼인 것, 노동자와 날품 같은 불안정 임노동도 상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유신 이후 '여러 지방의 날려 쌓인 곳'으로서 유입 인구가 급증하고 있던 당시 도쿄에서 안정된 임노동을 얼마나 얻기 어려웠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고 기술한다. 덧붙여서 도쿄에는 공장제 공업에 종사하는 임노동자와 도매상제 가내공업에 종사하는 장인이 지역적인 차이를 가지고 병존했던 점, '근대적'이라 여겨지는 공장 노동자보다도 '전근대적'이라 여겨지는 장인의 쪽이 오히려 안정되고 경제적으로도 우위에 있었다는 지적은 중요하다.
4. 식당의 부엌문으로부터 지역사회로
잔반집과 지역사회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잔반'의 행방과 주고받음 속에서 희망을 찾는다는 것에 납득되지 않는 독자도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자는 이 시기의 구체적인 두 가지 사실에서 일종의 희망을 찾아내고도 있다. 하나는 아이치현의 방면위원이 되었던 잔반집의 주인 이야기이다. 『가장 암흑의 도쿄(最暗黒の東京)』에 등장하는 잔반집이 대체 어떠한 사람들인지 오랫동안 필자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장사 잘하는 상인일까,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적은 돈이라도 빨아먹는 수완 좋은 사업가일까? 이 의문에 하나의 답을 대답해 주는 건 제2장에서 언급했던 아이치현의 방면위원회 설립에 관여했던 사람들 이야기였다. 중복되지만, 그 부분을 인용하겠다.
미카미와 함께 오사카를 방문한 것은 막 선발된 아이치 방문위원들이었다. 위원을 선발할 때에는 '최초에 적임자를 소수 엄선해 충분히 훈련하고, 그 뒤에 계속될 위원의 모범을 만드는 것이 긴요', 직업의 점에서 보면 '종래 사회사업 등에 연고가 없었던 상인 등의 사이에 오히려 적임자가 있다. 지원과 보호를 받는 자를 친밀히 접할 수 있는 것이 필수 조건이다'라는 오가와의 조언을 의지해 미카미는 인선을 진행했다.
그 결과, 위원 중에는 나막신의 굽갈이나 신발 수리를 업으로 하는 사람, 군대의 잔반 판매를 생업으로 하는 사람, 절의 스님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프록코트, 낡은 양복, 구식 문양을 수놓은 일본식 겉옷과 하의, 그 아래에 고무 단화 등 위원의 개성 그대로 복장은 다양하면서 가랑비에 젖은 진흙 묻은 신발로 찾아온 이 일행을 오가와는 ...... 환영했다.(25)
아이치현 사회사업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고자 선발된 초대 방면위원 중에 '군대의 잔반 판매를 생업으로 하는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지원과 보호를 받는 자를 친밀히 접할 수 있는' 인물로서 선발된 것이다. 즉, 이 잔반집은 단순히 상인이라기보다 오히려 영세민 거리의 사람들과 허물없이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인물로, 그것이 가능했다는 건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고 있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건 예외일지도 모르고, 또는 일부의 특징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적어도 이 시대의 아이치현에서는 그러한 잔반집이 확실히 있었다는 것의 의미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닐 터이다.
또한, 1922년 도쿄시 사회국의 조사에도 몇 가지 단서가 있다. 잔반집을 이용하는 손님 중에는 날에 따라서 일이 없고 일당이 들어오지 않았던 날이 계속되는 등의 사정으로 잔반을 사려는 사람도 있다. 때로는 무전취식자도 있었는데, 그 경우는 잔반집이 7일 동안의 기한을 주고 소지품을 담보로 맡김으로써 무전취식을 허용하기도 했다. 따라서 잔반집은 언제나 보자기에 싼 보관물을 2~3포 보관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관습이 관헌으로부터 주의받게 되어, 차츰 보관품을 받는 걸 그만두게 되었다. 그 대신, 무전취식자가 나타났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잔반집이 빌려주게 되었다. 이리하여 빌려준 것의 반절 이상은 후일 다시 내장해 끽식할 때 변제했다. 잔반집에 의하면, 아무리 밑바닥 신세에 있더라도 도덕적 책임 관념을 잃지 않는 사람은 있었다고 한다.(26)
이처럼 무전취식자를 보관하는 것, 또는 대금의 대여로 허용하는 잔반집의 모습에 단순한 장사 이상의 사회적 의의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빵 꼬투리의 행선지와 후타바二葉 보육원의 5전 식당
앞에서 1930년의 조사에서는 새롭게 사회사업가가 잔반에 관여하게 되었다고 기술했는데, 이 장의 최후로 그 점을 상세히 기술하고자 한다. 그건 도쿄 후타바 보육원의 실천이다. 이 보육원은 1900년에 화족華族 여학교 부속 유치원에서 근무했던 노구치 유카野口幽香와 모리시마 미네森島美根에 의해 설립되었다. 두 사람은 가난한 아이들을 화족 유치원의 아이들과 똑같이 보육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코우지마치麹町의 셋집에서 6명의 아이들을 모아 개원했다. 창립 당시부터 자선 유치원으로서 걷기 시작해, 1906년에 메이지 시기의 3대 빈민가의 하나였던 요츠야四谷 사메가하시鮫河橋로 이전해 200명 이상의 아이들을 입원시켜 지역의 향상에 힘썼다. 1916년, 이 무렵 이미 영유아도 보육하게 되었기 때문에, 사회 제도의 변화에 맞추어 보육원으로 개칭한다.(27)1930년 도쿄시 사회국의 조사에서, 이 보육원은 사회사업가로서 잔반에 관계하게 된 단체로 등장한다. 조사에 의하면, 메이지 제과 신쥬쿠 매점에서 하루 2관 공급되는 빵의 재고를 취급하는 사람이 이 보육원이었다. 그 하루 수요 인수는 80명,(28) 즉 원아들이다. 이 빵은 도대체 어떻게 사용되었을까? 사료에는 "샌드위치를 만들 때 빵의 탄 부분 또는 딱딱한 부분은 절단하기에, 이 절단부는 후타바 보육원에 공급되어 이 보육원에서는 오후 3시 무렵에 이것을 탁아의 각자에게 속칭 간식으로 주고 있다"(29)고 한다. 잔반이었던 빵의 절단은 흑밀을 뿌려 아이들의 간식이 되었다. 이 보육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물론, 그 부모들도 또한 그날의 양식에도 곤란한 가난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래서 1929~1930년 무렵부터 이 보육원은 또 '5전 식당'의 운영을 시도하게 되었다. 이 보육원의 역사와 실천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는 카미 쇼우이치로우上笙一郎와 야마자키 토모코山崎朋子 『빛은 은은하지만 후타바 보육원과 토쿠나가 유키(光ほのかなれども 二葉保育園と徳永恕)」 안에서 '5전 식당'에 언급되어 있는 부분을 아래에 인용하려 한다.
그날의 양식을 그날의 노동으로 구해야 하는 저변 사회에서는, 비가 내리거나 안타깝게도 인력거에 탈 손님이 없든지 한 날에는, 1번 밖에 식사를 하지 못하거나 어쩔 수 없이 굶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고구마 꼬다리 하나 먹지 못하고 물만 마시며 보내는 이러한 모습을 사람들은 자조적으로 '금붕어'라고 부르는데, 어른은 아직 그렇더라도 발육하고 있는 아이들에게는 이건 무엇보다도 괴로운 일로, 게다가 신체의 발육을 저해하는 건 뚜렷하다. 보는 걸 못 견딘 유키는 쇼와 시기에 들어오자 본원·분원의 쌍방에서 아이들에 대한 급식을 개시해 점심밥만은 원아에게 결식이 없도록 배려했는데, 그걸 한 걸음 나아가서 원아 이외의 아이들이나 그 부모들도 '금붕어'로 보내는 일이 없도록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선 가능한 바부터 착수하기로 해, 1929~1930년 무렵부터 값싸고 영양가 있는 반찬을 만들고, 한 접시 2전 아니면 3전에 파는 일을 시작했다. 이건 그런대로 호평을 받아, 싸구려 여인숙에 사는 독신자나 부자父子 가정 등이 매일 같이 사러 오고, 그 가운데 "반찬만이 아니라 밥도 나누어 받고 싶다, 된장국도 바란다"라는 소리가 나오게 되어 이걸 받아들여 유키들은 1931년부터 한 끼분의 밥과 반찬을 갖추어 먹을 수 있는 염가의 식당 -곧 5전 식당을 경영하기 시작했던 듯하다.(30)
보육과 먹을거리가 결부되는 실천은 제3장에서 다루었던 비사이 직물업 지역의 하야시 요우조우林曜三의 실천과도 호응하는 바가 있다. 당시, 이 후타바 보육원에 다녔던 노무라 토시오野村敏雄에 의하면, 이 보육원에서는 식당 사업 외에도 야간 치료, 야간 재봉부, 염매부, 야학생을 위한 급식부 등도 직접 했다. 5전 식당에 대해서는 야나기 츠루柳つる라는 보모가 다음처럼 기록한다.
구멍이 난 5전 동전! 유아조차 간식값도 되지 않는 것을 알고 있다. 유키 선생님을 추모하며 '5전 식당'의 이름은 1929~1930년 이후의 동료들에게 어딘가 그리운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걸까? 후타바 보육원과 5전 식당? 고개를 갸웃거리는 분들도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당시 신쥬쿠 남쪽 출구의 육교를 아사히마치旭町로 내려가는 언덕의 길가에는 이른바 부랑자란 사람들이 뒹굴뒹굴 거리며 멍석 위에서, 또는 지면에서 그대로 잠들어 있었습니다. 일거리를 얻지 못했을 때에는 고봉밥 10전의 소고기덮밥에 소주 1잔조차 먹지 못하고 가로누워 있는 일이 가장 경제적인 생활의 지혜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토쿠나가 유키 경영의 5전 식당 개업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개점의 식단은 팥밥에 정어리 통구이. 갑자기 인기를 끌어 밀지 마 밀지 마 대성황에, 아사히마치의 동료 회원도 흥분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습니다.(31)
또한 『후타바 보육원 35년보(二葉保育園第三十五年報)(1934년도)』에도 5전 식당의 광경이 다음과 같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한 끼 5전. 덮밥 한 그릇의 밥과 국과 반찬, 절임, 이것만이 한 세트로. 앞의 빈 집을 빌려서, 설비도 그대로, 6첩의 봉당에 2개의 테이블에서 12명이 만원, 아침 6시부터 시작해 2시간 정도씩 아침점심저녁의 3번 있었고, 저녁밥이 끝나는 건 8시 무렵. 매우 호평을 받아 한때는 하루 200명을 넘었던 시기도 있었는데, 최근은 대저 100명 내외의 이용자. 따로 반찬이나 밥을 사러 오는 사람도 있다. 아침밥 뒤에 도시락을 싸서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새 온화한 공기가 생겨서, 안녕하세요, 잘 먹었습니다 하고 인사하고 출입하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때때로 다른 곳에서 술에 취해 와서 터무니없는 부탁을 하는 사람, 교활하게 굴려는 사람 등이 있으면, 우리의 손을 기다리지도 않고 여기는 다른 데 밥과는 다르다, 그런 교활한 자는 서로의 얼굴을 더럽히는 것이라 말하며 서로 제재를 가합니다.
오늘은 아무리 해도 3전의 일밖에 없었다, 내일 다시 벌어서 가지고 오겠습니다 하고 작은 소리로 부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튼 한 끼 5전, 1개월 4엔 50전 있으면 먹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단 경영으로서는 시작했던 당초는 물가가 낮았기 때문에, 재료비만은 꽤나 궁리하면 어떻게든 충당해 나아갈 수 있었는데, 겨울이 되고 또 요즘의 물가로는 그 재료비조차 부족하기 일쑤여서, 집세 35엔, 도우미 비용(이것도 현재의 2명은 여자 혼자서 병든 남편과 아이를 부양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일자리 알선의 의미로 일을 시키고 있습니다) 기타로 월 80~90엔의 부족이 생깁니다.(32)
이 5전 식당을 실현하기 위해서, 유키 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가능하면 값싼 재료를 찾았다. 예를 들면 제국 호텔에 부탁해 스프를 만들 뒤의 고기 조각을 받아 와서 그걸로 스튜를 만드는 등 다양한 궁리를 했다.(33)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영으로서는 수지를 건전히 유지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던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실천은 실패였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일상의 먹을거리를 계속 제공하면서 이용자들 사이에 "여기는 다른 데의 밥과 다르다"라는 의식이 싹터, 식당이 단순한 끽식의 장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사람들의 의지처, 신뢰할 수 있는 장소, 인사를 나누며 서로의 존재를 염려하는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고립되고, 누구도 염려해주지 않던 뱃구레가 이 식당에 모임으로써 누군가에게 염려받고, 자율적인 의식을 지닌 뱃구레가 되어, 지역사회와 이어지는 하나의 확실한 통로를 얻을 수 있었다.(34)
주석
(1) 츠쿠바筑波 대학의 오오하마 테츠야大濱徹也 씨의 강의 「일본의 역사 개론(日本の歴史概論)」(1993년)의 "부엌문으로 세계를 보자(勝手口から世界を見よ)"라는 단어에서 시사를 받았다.
(2) 마차바라 이와고로우松原岩五郎 『가장 암흑의 도쿄(最暗黒の東京)』 岩波文庫, 1988년(초판은 1893년에 民友社에서 간행. 1892년에 「国民新聞」에 발표된 것에 가필), 41쪽.
(3) 앞의 (2), 41~42쪽. 15관은 1관을 3.75kg이라 하면, 약 56kg.
(4) 앞의 (2), 41~45쪽. 마차바라의 「가장 암흑의 도쿄』와 무카이 소우호向井藻浦의 『오사카의 빈민굴(大阪の貧民窟)』을 비교해, 도쿄와 오사카의 차이, 두 사람의 취재의 차이 등을 논한 연구에 코토우 마사토後藤正人 「20세기 초두, 오사카의 '빈민굴' 상태 -마차바라 이와고로우 『가장 암흑의 도쿄」와의 비교를 통해(二十世紀初頭、大阪における『貧民窟』の状態 -松原岩五郎『最暗黒の東京」との比較を通じて)」 『和歌山 大学 教育学部 紀要 人文科学』 56, 2006년, 164~176쪽이 있다.
(5) 실제로 도쿄 사회국의 조사를 실시한 중심 인물은 쿠사마 야소우草間八十雄(1875~1945)였다. 쿠사마에 대해서는 야스오카 노리히코安岡憲彦 「시리즈 복지에 살다 2 쿠사마 야소우(シリーズ福祉に生きる二 草間八十雄)』 大空社, 1998년에 상세하다.
(6) 도쿄시 사회국 편 「부랑자 및 잔식물에 관한 조사(浮浪者及残食物に関する調査)』 도쿄시 사회국, 1923년, 109쪽.
(7) 이 책 제1장에서는 이미 이 부엌 찌꺼기(ダイガラ)에 대해서 아사쿠사浅草와의 관계에서 언급한다.
(8) 앞의 (6), 126쪽.
(9) 도쿄시 사회국 편 「잔식물 수급에 관한 조사(残食物需給二関スル調査)』 도쿄시 사회국, 1930년, 5쪽.
(10) 1문 3.5g으로서, 약 1kg이다.
(11) 고베 대학 경제경영연구소, 신문기사 문고, 「中央新聞』(1912년 12월 13일자).
(12) 앞의 (6), 144〜145쪽.
(13) 앞의 (9), 24쪽.
(14) 상급 밥(上飯)이란 반합에 담긴 그대로인 것, 또는 끽식자가 차나 된장국을 붓지 않은 것, 하급 밥(下飯)이란 차나 된장국을 부은 것, 또는 이미 부패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앞의 (9), 3쪽.
(15) 앞의 (9), 4쪽.
(16) 무라이 겐사이村井弦斎 「식도락食道楽』 상, 岩波文庫, 2014년(문고 초판은 2005년, 저본은 「식도락食道楽』 전 4책, 報知社出版部, 1903~1904년), 18쪽. 또한, 무라이에 대한 연구는 야마모토 아야노山本文乃 「무라이 겐사이 연구 -식생활 개량론(村井弦斎研究 -食生活改良論)」 「研究紀要』(文教大学 女子短期大学部) 26, 1982년, 44~56쪽 등이 있다.
(17) 쿠로이와 히사코黒岩比佐子 「잊혀졌던 메이지의 계몽 소설가(忘れられた明治の啓蒙小説家)」 무라이 겐사이 「식도락』 상, 岩波文庫, 2014년, 584쪽.
(18) 칸다시장협회神田市場協会 칸다시장사 간행회 편 『칸다시장사神田市場史』 상권, 칸다시장협회 칸다시장사 간행회, 1968년, 616쪽.
(19) 앞의 (2), 91~93쪽.
(20) 칸다가와 사이오우神田川菜翁 「경매인 이세쵸우 일지 채소시장 이야기(競り人伊勢長日誌やっちゃ場伝)』 農経新聞社, 2003년(초판은 1993년), 123쪽.
(21) 앞의 (2), 93~94쪽.
(22) 앞의 (2), 95쪽.
(23) 에바토 아키라江波戸昭 「1897년 '도쿄부 직업 조사'(明治三十三年の「東京府職業調査』)」 「東京の地域 研究』 大明堂, 1987년, 47~64쪽.
(24) 요코야마 겐노스케横山源之助 「일본의 하층 사회(日本之下層社会)』 教文館, 1899년.
(25) 이 책, 77쪽.
(26) 앞의 (9), 136〜137쪽.
(27) 사회복지법인 후타바二葉 보육원 홈페이지를 참조(2015년 6월 20일 접속).
(28) 앞의 (9), 24쪽.
(29) 앞의 (9), 5쪽.
(30) 카미 쇼우이치로우上笙一郎・야마자키 토모코山崎朋子 「빛은 은은하지만 후타바 보육원과 토쿠나가 유키(光ほのかなれども二葉保育園と徳永想)」 朝日新聞社, 1980년, 190~191쪽.
(31) 노무라 토시오野村敏雄 「신쥬쿠 뒷골목 3대기(新宿裏町三代記)』 青蛙房, 1982년, 206~207쪽.
(32) 앞의 (30), 191~192쪽.
(33) 앞의 (30), 192쪽.
(34) 야마다 신조우山田慎三 「간이식당 사시 한그릇식당에서 간이식당으로, 그리고 도시락 생활에서 직장 급식으로 -식풍속문화사적 변천의 한 단면으로 (하) (簡易食堂事始 一膳飯屋から簡易食堂へ、そして腰弁生活から職場給食へ -食風俗文化史的変遷のひとこまとして(下))」 「学苑』 518, 1983년, 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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