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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농업 전반

뱃구레의 근대 -제3장 공동 취사와 집단 급식의 기원

by 雜s 2026. 3. 17.

제3장 공동 취사와 집단 급식의 기원 -공장의 탄생과 의식주의 재편

 

 

 

1. 공장 급식의 세계

 

여공의 탄생

여기부터는 '공장'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에서 먹을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생각해 나아간다. 한그릇식당과는 달리, 그 모이는 방식은 우연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공장 경영의 목적으로 뒷받침되었던, 어느 의미에서 제도적, 체계적인 집단화이다. 아래에서는 공장 중에서도 특히 방적·방직업을 사례로 그곳에서 일하는 여공들의 생활에 초점을 맞춘다.

근세와 다른 근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여성이 집단적으로 이동하고 모여 직업을 얻을 기회가 공장에 의해 전해졌다는 것이다. 바로 이 시기, '여공'이라는 존재가 탄생했다.

여공들은 공장 주변 또는 원격지의 농산어촌에서 나와, 공장의 기숙사에서 살며 직업을 얻음과 함께 의식주도 공장에 의해 공급받았다. 공장에 직장을 얻어 여공이 되면, 농산어촌이란 지역 또는 태어나 자랐던 집과는 완전히 다른 규모와 규범과 윤리 안에서 그녀들의 의식주는 재편되었다. 그중에서도 '직업'과 아울러 '먹을거리'를 얻게 된다는 것이 농산어촌을 나오는 동기가 되었다.

 

 

 

공장의 식당과 식사

공장에서 하는 식사에 관한 기술로 가장 이른 것은 아마 토미오카富岡 제사장製糸場에서 하던 생활을 묘사한 와다 에이和田英에 의한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가 입장했을 무렵은, 모두 자신의 방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 그 인원수만큼 밥도 반찬도 두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 세 번 큰 나무통에 밥을 담아 수레로 끌고 왔습니다. 부족할 때는 불러서 받았지만, 11월 무렵부터 큰 식당이 생겨서 밥그릇과 젓가락을 들고 가는 것이었습니다.(1)

 

설립 당초는 각 방에서 먹었지만, 머지않아 큰 식당이 생겼던 것이 기록되어 있다. 

메이지 후기의 공장과 직공의 조사 보고인 『직공사정職工事情』에도 공장에서 하는 식사를 둘러싼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공의 주거에서 반드시 일어나게 될 문제는, 그들이 일상적으로 먹는 바의 음식이라고 해야 한다. 여공이 매일 쾌락으로 삼는 음식은 일반적으로 조악하여 밥은 쌀 7 보리 3 정도면 상등으로 치고, 보통은 쌀 3 보리 7 정도이다. 부식물은 된장국, 단무지 및 채소 무 토란 등의 조림이다. 공장주가 일반 식비로 지출하는 바는 하루 8전 내지 10전으로 볼 수 있다. 급식은 대개 공장주가 경영하는 곳이지만, 지방에 따라 여공들에게 자취(自炊)를 시키는 관습도 있다. 이 방법은 각 여공들이 교대로 자취 당번을 하는 식이다. 공장에 따라서는 따로 취사계를 고용해 두는 경우도 있는데, 취사계의 급료는 직공들의 부담으로 하며, 공장주는 그 반액 정도를 보조하고 또 장작·숯 종류도 공장주가 보조하는 바이다.(2)

 

이처럼 공장을 운영하면서 식사와 그걸 공급하는 취사는 필요불가결했다. 공장이 탄생한 근대에는 그곳에서 일하는 많은 노동자가 집단으로 식사를 하는 상황이 생겨, 그걸 가능하게 하는 취사 체계가 정비되었던 것이다.(3)

 

 

 

 

 

『여공애사女工哀史』와 『우리의 「여공애사」(わたしの「女工哀史」)』

콘 와지로우가 식당에서 이 나간 밥그릇의 조사를 하던 무렵, 도쿄 카메이도亀戸의 서점 2층을 빌려서 매일 원고용지를 향해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호소이 와키조우細井和喜蔵라고 한다. 1923년 7월에 쓰기 시작한 이 원고는 1925년 7월에 『여공애사』로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그는 이 책이 출판되고나서 겨우 1개월 뒤에 세상을 떠난다. 

그의 아내는 '토시오としを'라고 한다. 그녀는 1902년에 기후현 이비군揖斐郡 쿠제무라久瀬村에서 숯장이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1913년 3월에 마을로 여공 모집인이 오자, 12세로 실보무라지를 줍는 유여공幼女工으로 오오가키大垣의 도쿄 모직 주식회사에서 일하게 된 그녀는 그 뒤 나라현 야마토코리야마大和郡山의 방적 회사, 나고야의 토요타豊田 직기를 전전하면서 일하고, 18세에 상경해 후카가와의 방적 공장에 들어갔다. 호소이를 만났던 건 1921년, 그녀가 20세 무렵이었다.  『여공애사』의 기술은 사실 그녀의 경험이 녹아 들어간 부분이 많다. 나중에 그녀 자신의 내력이나, 공장에서 한 생활, 호소이와의 결혼 생활, 그 뒤의 인생 등을 잇댄 문장은 『우리의 「여공애사」』(4)로 1980년에 출판되었다. 

여론의 무대에 선 『여공애사』와 비교해, 토시오의 인생은 말하자면 '잊혀졌던 애공애사'로서 오랫동안 그녀의 가슴 속에 머물러 있었다. 두 사람이 정식으로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호소이의 사후  『여공애사』의 인세가 그녀에게 지급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공애사』의 일종의 모델이기도 한 그녀 자신의 인생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막을 내리려 했다. 2015년에 이와나미岩波 문고로 재판된 『우리의 「여공애사」』 해설에서 사이토우 미나코斎藤美奈子가 상세히 기술하듯이, 그녀의 마음을 연 것은 기후의 여성사를 그리고자 토시오를 찾아간 기후岐阜 세이토쿠聖徳 여자 단기대학短期大学(1998년부터 기후 세이토쿠 학원대학 단기대학부)의 '현대 여성사 연구회'의 학생과 교원들이었다. 그녀들은 현 안의 방적, 직물 공장에서 일하고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단기대학에 다니는, 말하자면 '일하는 여자 학생'이었다. 그러한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토시오 자신이 펜을 잡을 결의를 하고 발표된 것이 『우리의 「여공애사」』였다.

토시오의 문장은 집단적인 여공의 상황을 그린 『여공애사』와 비교하여 실재했던 어느 한 여공의 경험을 기록한 것이란 점에서 귀중하다. 아래에서는 이 책을 참고로 우선은 여공의 입장에서 본 다이쇼우 시기의 생활과 먹을거리에 대해 기술해 보도록 하겠다.

1913년에 12세, 만으로 세어 10세 5개월일 때 오오가키의 모직물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토시오의 일급은 13전이었다. 거기에서 식비 9전을 차감하고, 비누(9전)나 화장지(1첩 3전)이나 1개월에 한 켤레의 일본 짚신을 사면 1전도 남지 않았다.

 

식당은 더럽고, 어두었으며, 반찬이랄 것도 없이 매일 된장국과 절임 뿐으로, 단무지도 오래되어 냄새가 나고 된장국도 건더기란 것은 들어 있지 않으며, 때로는 파리나 바퀴벌레가 떠 있었습니다. 이름짓기를 복어국(鉄砲汁)이라 했습니다. 더구나 밥은 수입산 백미로, 가늘고 긴 쌀이 찰기도 없이 훌훌 날려 젓가락으로도 막대로도 집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5)

 

이것만 읽으면, 먼저 그 열악한 상황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토시오는 다음에 일했던 나고야의 직물 공장에 대해서는 이런 것도 적었다.

 

기숙사치고는 꽤 편하고, 모두 사이 좋고 친절했습니다. ...... 그리고 지금까지 제가 일하던 곳보다도 음식도 좋고, 나이 많은 사람이 모두 친절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야근할 때 밤중에 식당에 가면, 취사계 아저씨가 된장국 건더기를 수북히 담아 주면서 "잘 먹고 크게 커라, 너 같은 작은 아이가 밤중까지 일하는 게 안쓰럽네, 일요일에는 놀러 오렴" 하고 말해 주셨습니다.(6)

   

 

공장제가 막 시작된 메이지 시기와는 달리, 다이쇼우 시기가 되면 공장 경영에서 노동자의 식사나 보험 등이 조금씩 정비되고 있었다. 물론, 공장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직공사정職工事情」 간행 이후 공장법의 시행 등과도 맞물려 공장 급식에도 사회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시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토시오의 말에서는 이러한 공장의 제도적인 변화라기보다도 오히려 공장에서 일하는 것에 대한 토시오 자신의 의미 부여를 읽어낼 수 있다. 나고야의 공장에서 경험한 그녀의 말에서는 편안함까지 전해진다. 이건 도대체 무슨 일일까?

「여공애사」가 간행되고 호소이가 세상을 떠난 뒤, 그녀는 호소이의 아내였단 건 밝히지 않고서 공장에서 일하며 동료들과 쟁의에 계속 참가하기를 바랐다. "저도 방적 여공이라 말하며 동료에게 들어가서 저녁밥으로는 주먹밥과 매실장아찌, 꽁치 소금구이 반찬으로, 오래간만에 일하는 동료들과 활기찬 저녁밥을 먹어서 그 맛있었던 일."(7) 오사카에서 "기숙사로 안내되어, 밤이 되어 20명 정도의 동료들에게 소개되었던 때는 정말로 기뻤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8) 토시오에게 공장에서 하는 생활과 그 안에서 하는 식사는 함께 일하는 동료나 신경 써주는 취사계와의 관계에서 보듯이, '고독하지 않다'고 확인하는 장이었다. 즉, 고립된 뱃구레가 집단 안에서 거처를 발견한 뱃구레가 되는 징이었던 것이다. 그곳에서는 무엇을 먹는지 하는 것보다도, 누구와 먹는지, 어디에서 먹는지 하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건 이 시기 공장 노동의 지독함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지독함 속에서 거처가 있다고 한다면, 뱃구레가 집단화함으로써 일단은 매일 먹을거리를 걱정할 필요로부터 해방되어, 누군가와 먹음으로써 고독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다는 상황이 공장의 식당에는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함바제飯場制에서 직영 식당으로 -여공관女工観의 전환    

 

 

집단으로 식사를 한다는 것은 근대 이전에도 행해졌다. 예를 들면, 임업이나 광업에서 노동자의 식사는 '함바'라는 위탁 제도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위탁 방식을 경영 측의 직영제로 바꾸어 나가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 근대이며, 그것을 최초로 시도한 것은 쿠라시키倉敷 방적 공장을 경영한 오오하라 마고사부로우였다고 전해진다. 앞에 기술한 오오하라 사회문제연구소를 설립한 인물이다. 카네다 레이코兼田麗子 『오오하라 마고사부로우 -선의와 전략의 경영자(大原孫三郎 -善意と戦略の経営者)』(9)에 의하면, 쿠라시키 방적의 경우는 3명의 '함바두飯場頭'가 좌지우지하고 있어, 취사 준비나 노동자에게 일용품의 판매, 직공의 입사나 퇴사 등에 관련하며 착취나 부당 이익의 획득, 폭력에 의한 지배가 버젓이 통용되었다. 이것을 오오하라는 만년이 되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직공 임금은 그 함바가 회사로부터 수취하고, 식비 기타를 공제하고 남은 걸 직공에게 건네고 있었다 ...... 그래서 나는 직공을 모아서, ...... 앞으로는 회사에서 식당의 경영이나 물품의 판매를 해야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함바는 날이 저문 31일에, 회사가 보증해 주지 않으면 여공에게 떡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회사는 읍내의 떡집에서 떡을 사 모아, 황급히 판매소를 열었다.(10)

 

이 무렵, 위탁 제도가 직공 문제의 화근이 되었던 것을 알아챈 오오하라는 함바 제도를 전폐하고 직영 식당으로 전환했다. 이리하여 이 공장에서는 취사장, 보일러실, 식당이 증설되고, 최신 설비도 들여오게 되었다. 

오오하라는 나아가 기숙사의 개축에도 착수했다. 그에 앞선 1906년 6월 하순, 기숙사에서 장티푸스가 발생해 사망자 7명이 나오는 참사가 일어났다. 이에 따라 인책 사임한 아버지 대신에, 3개월 뒤인 9월에는 당시 26세였던 오오하라가 2대째 사장으로 뽑혔다. 이와 같은 경위가 있어서 사장 취임 이후 오오하라의 급무는 장티푸스 유행의 뒤처리와 선후책에 전력하는 것이 되었다. 로버트 오언Robert Owen의 업적이나 타국의 공장 경영법을 공부했던 오오하라가 새롭게 건축한 건물 또한 획기적이었다. 노동자가 토지에 뿌리를 내리고, 공장이 주민의 공동작업장이라는 자리매김을 하도록 기숙사가 아니라 직공 사택 마을을 건설했던 것이다.(12)

이와 같은 쿠라시키 방적의 실천에는 단순한 공리주의적 경영과는 다른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일반적으로 식사나 주거를 포함한 복리후생을 공장 측이 정비하는 건 저임금을 실현하고 노동력의 안정적인 확보에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오오하라가 목표로 한 방향성은 결코 공리주의적인 경영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당시 카네가후치鐘淵 방적의 경영자였던 무토우 산지武藤山治(1867~1934)가 제창해 사회적으로 유명해졌던 '온정주의'(13)도 아니다. 

오오하라는 '인격 향상 주의'라는 말을 좋아하고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이건 노동자의 인격을 중시하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우하며, 그와 동시에 교육에 의해 인격이 존중되도록 하는 걸 돕는다는 의미였다. 즉, 쿠라시키 방적이 직영 식당으로 전환한 것은 단순한 공장 부속 설비의 갱신이 아니라, 여공들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우하고, 교육하는 대상으로 본다는 '여공관의 전환'이라고도 해야 할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구빈적인 사상은 종종 유복한 자가 가난한 자에게 '베풀고' 또는 종교적인 규범이나 더욱 넓은 '인류애'에 의해 동기 부여를 받는다고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오오하라의 경우, 오히려 그 어느 쪽도 아니고 여공을 '한 사람'이라 대우하고 경제적인 격차가 있더라도 인간으로서는 자신과 '대등'하며, 사회의 성원으로서의 차이는 없다는 관점에 서 있었던 듯하다고 생각한다. 왜, 오오하라가 이와 같은 관점에 설 수 있었을까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현 시점에서는 충분한 답을 제시할 수 없지만, 적어도 아래의 두 가지 점은 중요했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먼저 하나는, 그가 1900년대 초두부터 교육 진흥에 힘을 기울여 교육에 의해 인간의 가능성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 하나는 1902년 12월부터 시작된 '쿠라시키 일요 강연회'에 의해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널리 사회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이에 의해 오오하라는 오오하라 가문 또는 쿠라시키 방적, 그리고 오카야마현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만이 아니라,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문제의 배후에 있는 더욱 넓은 사회 구조를 통찰하게 되었다.(14)

오오하라가 내세운 '인격 향상 주의'라는 이념은 이후에 앞 장의 말미에서 보았던 사회 사업의 실무가 네트워크를 지탱하는 근본 이념으로 연결되었다고 보아도 틀림없을 것이다.

 

 

 

 

공장에서 여공의 식사    

그럼, 실제로 공장은 어떻게 경영되고, 그곳에서 여공들은 어떻게 일하며 생활하고 있었을까?

공장 측의 사료를 분석해 여공들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그려 보도록 하자. 1921년의 공장 퉁계에 의하면, 전국의 공장 수가 많은 것은 1위가 도쿄, 2위가 오사카, 3위가 아이치였다. 이 세 도시는 각각 공업의 종별로는 명확한 차이가 있었다. 도쿄는 염직, 기계, 화학공업이 동률로 높고, 남성 직공이 많다. 오사카는 염직과 기계가 많고, 남성 직공이 75%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에 대해 아이치현은 염직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걸 반영해 여성 직공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앞에 등장했던 호소이의 아내 토시오도 역시 기후나 아이치에서 염직 공업에 종사했던 여공이었다. 한 사람의 여공으로서 토시오의 경험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도, 아래에서는 여공이 많이 모였던 아이치현을 무대로 그곳에서 전개되었던 직물업과 여공과 그녀들의 '먹을거리'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아이치현의 서쪽, 키소강木曽川 좌안에 위치하는 비사이尾西 모직물 산지에서는 '식단(献立) 예정 실시표'(15)를 비롯하여 여공들의 먹을거리 실태를 알 수 있는 문서가 몇 점 남아 있다. 이 사료는 일찍이 이 지역에서도 유수의 방직업자였던 스즈키 카마지로우鈴木鎌次郎가 경영하던 스즈카마鈴鎌 공장의 사료군에 포함되어 있다. 이들 사료에 의해 여공들의 식사를 분석하기 전에, 우선은 이 공장의 상황을 파악해 두자.

1891년 노우비濃尾 대지진은 이 지역의 목화농사에 큰 타격을 주는 한편, 산업의 부흥을 계기로 개량 직기의 도입과 대작업장의 건설을 촉진했다. 지진 피해 복구 공사를 위한 오카자키岡崎 지방에서 온 목수에 의해 처음으로 밧탄バッタン 직조기(16)가 제작되자, 유력 방직업자가 그걸 도입했다. 또한 지진 피해에 의해 자가 공장과 하청 공장의 파괴를 받은 방직업자의 일부에서는 재건에 즈음해 대공장의 건설을 시도하는 자가 나타났다.(17) 여기에서 사례로 삼는 오코시쵸우起町 산죠우三条의 스즈키 카마지로우가 바로 그 한 사람이었다. 창업 당시의 스즈키 가문은 베틀에 의한 베틀집에 지나지 않았지만, 노우비 지진 이후에는 대공장을 신축한 뒤, 솔선하여 밧탄 직조기를 채용하는 등 비사이 직물업을 견인하는 유력 방직업자가 되었다.(18) 이 공장은 1902년 시점에서는 비사이 직물업 지역에서 직공 수가 가장 많은 공장으로 자리매김한다.(19) 그림 3-1은 비사이 직물 생산의 추이를 나타낸 것이다. 1920년대에 생산량은 비약적으로 증가해, 모직물 생산으로 이행한 것이 그걸 촉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3-1 비사이 직물 생산의 추이

출처: 모리 토쿠이치로우森徳一郎 편찬 「비사이 직물사(尾西織物史)」 비사이 직물 동업조합, 1939년, 136-138쪽에서 작성.

 

 

청취 조사에 의하면,(20) 스즈카마 공장이 모직물을 시작한 것은 1902년 무렵으로, 스즈키가 러일 전쟁에 병사로 파견되었을 때 양복과 모직물 시대의 도래를 확신하고, 1907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모직물 생산을 시작했다. 1917년 무렵에는 공장의 기계화를 진행하고, 1921년 무렵에는 상사 부문을 만들어 직물의 판매에도 착수했다.(21) 1920년 여공 고용인 수는 257명으로,(22) 1922년에는 동쪽 공장, 서쪽 공장, 손짜기 공장의 세 공장을 소유했던 것이 확인된다. 이 해까지는 손짜기와 기계짜기를 양립시키고 있었지만, 이 해 이후 손짜기를 폐지했다. 1923년에는 130명을 고용하고, 그 가운데 남성이 32명(영업 11, 디자인 10, 공장 11), 여성이 98명이었다.(23) 1924년에는 152명으로 변하고,(24) 대략 150명 전후의 직공을 고용했던 걸 알 수 있다. 

공장의 경영에서, 여공의 식사는 어떠한 위치에 있고, 어떻게 운영되었던 걸까?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1921년 스즈카마 공장의 <금전출납부>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이 장부에는 공장의 지출과 수입이 매일 기입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직물업에 관한 경비만이 아니라 여공의 급료, 식사, 의료, 보험, 농업,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이 장부는 각 해마다 작성되었기 때문에 경년적経年的 분석도 가능하지만, 여기에서는 당장은 1921년을 살펴보겠다. 이 해는 스즈카마 공장이 아직 손짜기와 기계짜기를 병존시켜 기계를 정비해 가면서 모직물 생산을 확대해 나아가는 중요한 전환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 해는 공장으로서 1만 2762엔의 이익이 있어 경영 상황은 양호했다.(25) 수입 가운데 75%가 직물, 16%가 염색 공장에 의한 것으로, 합계 91%는 염직 부문으로부터 얻었다.(26) 손짜기 공장에서 얻는 수입은 동력 공장에 의한 그것의 약 1/10 정도였다. 한편, 지출은 직물 생산에 관한 경비가 약 33%, 급료가 약 36%이며, 이 두 항목만으로 약 70%를 차지하고 있다. 직물 생산에 관한 경비에는 '기계'의 구입, 운반, 설치, 수리, 부문이나 기름 등의 구입 등이 포함되며, 바로 이 시기에 기계 생산으로 이행해 가는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급료의 지불이 2월과 8월에 특히 많은 것은 반기마다 상여의 지불이 있었기 때문이다.(27) 그외에 매일 '급료 가불', '직임織賃 가불'이라는 기재도 자주 나오고, 여공에 대한 급료의 지불에는 통상의 지불 이외의 방법도 꽤 있었던 걸 볼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지출의 나머지 30%의 내용이다. 거기에는 연료, 전기료 외에 주로 직공에 관한 경비로 매일의 '식사', 자급 채소를 재배하기 위한 '농업비', 여공의 입원비, 약값 등의 '의료, 보험비', 새로 고용하는 데 드는 '모집비', 이불이나 밥그릇 등의 '주거비' 등이 포함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장부의 내용을 보면, 예를 들면 6월 30일에는 15명 분의 '급료' 지불 외에 '가스 이전비', '염료비', '생선 비용', '보리 비용', '우유 대납비', '기계 수리비', '쌀 비용'이 지출되어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생산과 생활의 혼연일체가 된 내용이 공장을 운영하기 위한 지출의 전체상이며, 그 안에는 직물 생산에 직접 관련되는 경비만이 아니라, 여공들의 생활에 관한 경비를 무시할 수 없다. 말할 필요없이, 특히 '식사'ㄴ는 공장 경영에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공장의 취사장

공장이 설립되고 많은 직공이 모이면, 그들에 의한 식재료 수요가 높아진다.(28) 그에 대응해 비사이 직물업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각각의 공장이 취사장을 설치했다. 스즈카마 공장 같은 대규모 공장은 자기 부담의 취사장을 설치했다.(29) 스즈카마 공장에는 물품의 구매부로 '공장기계부', '건축재료부', '점용품부'에 더해 '식량신탄부食糧薪炭部'(30)가 설치되어 있어, 미곡과 된장, 간장, 설탕, 채소, 생선, 닭고기, 과자, 목탄, 장작 등을 대량으로 구입했다.(31) 또한, 스즈키 가문에 남은 '식단 예정 실시표' 등에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당시 여공들의 식사나 생활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우선, 1924년 9월의 식사 상황을 보면(표 3-1), 취사에 든 경비는 1151엔이었다. 그 가운데 주식인 곡류가 55%를 차지하고, 1개월에 드는 곡류는 백미 11섬 6말 8되(약 29가마니)(32), 대만 쌀 2섬 5말(약 6가마니), 개량 보리 3섬(약 8가마니)로 합계 약 43가마니에 달했다.(33) 다음으로 많은 것은 취사 연료인 장작과 숯으로, 이건 경비의 12.4%를 차지한다. 채소는 '매입' 분량과 '자가용 채소'로 농부를 고용해 재배하는 두 가지 경로로 입수했던 듯하다. 청취 조사에 의하면, 공장 부지 안에 밭이 있어 근처 농가에서 일하러 오는 여공의 부친 등에게 농작업을 위탁하고 있었다(그림 3-2). 채소, 조미료, 어류, 절임 등의 부식물은 식사비 전체의 25%를 차지하고, 나머지의 약 8%가 취사 도구나 취사 인부의 임금이었다. 이 해의 스즈카마 공장의 총원수는 152명이었기에, 하루 1인당 25전의 식사비를 들였던 셈이다.  

 

표 3-1 스즈카마 공장의 식사 상황

 

 

 

출처: 「다이쇼우 13년 10월 10일 노동조사에서 부록 사업표의 안 식사부의 실지조사(労働調査二付事業票ノ内賄ノ部実地調査) 9월 1개월분」 스즈키 타카시鈴木貴詞 가문 소장에서 작성.

 

주) 당시 총원수는 152명으로, 하루 1인당 0.25엔의 경비였다. 백미는 11섬 6말 8되, 대만 쌀은 2섬 5말. 개량 보리는 3섬이었다.

 

 

 

 

 

 

 

 

 

그림 3-2 스즈카마 공장의 기숙사와 자가 텃밭(1955년 무렵)

출처: 스즈키 타카시 가문 소장. 청취 조사(스즈키 타카시 씨, 2014년 8월 3일)에 의하면, 전쟁 이전 시기부터 거의 변함없는 풍경이었다고 하기에 참고자료로 제시한다. 

 

 

 

다음으로, 1921년의 어느 1주일 동안의 식사를 살펴보자(표 3-2). 기본적인 식단은 쌀과 국과 절임인데, 국에는 제철 채소를 넣어서 반찬으로 먹었다. 1922년부터 1923년의 '청물통(青物通)'(34)에는 감자, 귤, 연근, 원통 어묵, 땅두릅, 토란, 완두, 말린 오징어, 죽순, 취나물, 바나나, 오이, 키리보キリギ(35), 호박, 외, 감, 학꽁치, 당근, 사과, 순무 등을 구입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 채소, 과일, 생선이 취사장에서 조리되어 여공들의 삭탁에 올랐다. 다이쇼우 시기의 스즈카마 공장 식당의 사진은 남아 있지 않지만, 다른 공장을 참조하면 그림 3-3과 같다. 긴 탁자와 긴 의자가 일렬로 늘어서 있고, 그 수는 100을 넘는다. 탁자 중앙에 갓 지은 밥을 담은 밥통이 놓이고, 한 사람씩 밥그릇, 반찬 접시, 절임 접시가 배식된다. 하여간 대량의 식사이다. 

 

 

표 3-2 스즈카마 공장의 식단과 비용(1921년)

출처: 「식단 예정 실시표(献立予定実施表)」 스즈키 타카시 가문 소장에서 작성.

주) 이 사료는 식단의 예정과 실시 내용이 병기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실시 내용을 추출했다.  

 

 

그림 3-3 모스린 공장 내 식당(사진그림엽서)

출처: 필자 소장

 

 

2차 세계대전 이후 스즈카마 공장의 식당 모습은 그림 3-4와 같다. 여공들이 실제로 '먹고 있는 모습'을 담은 귀중한 사진이다. 당시의 식당에서 절임이 빠질 수 없는 일품이었던 건 표 3-2에서 읽어낼 수 있다. 이건 이 공장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직공사정職工事情』(36)이나 『공장 취사 요람(工場炊事要鑑)』(37)에도 많은 공장에서 똑같은 상황이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38) 그밖에 저녁밥 칸에는 '목욕'이란 기재가 있어, 목욕물을 더우기 위해 취사와 맞추어 장작이 소비되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림 3-4 스즈카마 공장 내 식당

출처: 스즈키 타카시 가문 소장.

 

 

여기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만큼 많은 식재료와 연료가 실제로 이 시기에 공장이나 기숙사 안에서 소비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양은 공장의 증가와 규모 확대와 함께 더욱 증대되어 간다고 생각한다. 이건 스즈카마 공장에 한정된 현상이 아니라, 비사이 직물업 지역 전체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하고,(39) 노동자의 증가에 수반한 이와 같은 식량, 연료 수요의 증대는 지역차를 동반하면서 이 시기에 일본 전체에서 발생한 산업 지형 형성의 한 국면이었다.(40)

 

 

 

 

키시와다岸和田 방적 쟁의 -재일 조선인 방적 여공의 노동과 생활

공장 식사는 때로는 쟁의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오사카의 방적 공장으로 눈을 돌려 살펴보자. 오사카는 일본에서 가장 재일 조선인이 집중되었던 지역이었다.(41) 남성은 고무, 유리, 도금 등의 화학공업 외에 금속·기계 공업 등 영세 공장의 노동자나 토목 노동자로 일하고, 여성은 방적업을 비롯한 섬유 공업의 노동자가 되었다. 그녀들의 대부분은 제주도 출신자이다. 오사카의 재일 조선인들은 이른바 하층 노동자로서 일본의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존재였다. 또한, 이 시기의 재일 조선인 방적 여공에 대해서는 김찬정金賛汀・방선희方鮮姫 「바람의 통곡 -재일 조선인 여공의 생활과 역사(風の慟哭 ー在日朝鮮人女工の生活と歴史)』(42)나 김찬정 「조선인 여공의 노래 -1930년 키시와다 방적 쟁의(朝鮮人女工のうた -1930年・岸和田紡績争議)』(43)에 상세하다.

당시의 상황을 <오사카 매일신문毎日新聞>(1917년 12월 26일자)은 다음과 같이 보도한다. 

 

오사카부에서 거주하는 선인鮮人 노동자의 인원 및 직업별에 대해 우리들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실로 아래와 같아, 부府에 거주하는 선인 노동자 수는 총계 약 2천 명을 초과하고, 그중에 오사카시에 있는 사람이 약 1500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직공, 인부가 많이 모이는 곳(淵叢)이라 해야 할 쿠죠우九条, 시칸시마四貫島 방면에 가장 많아 부 거주자 총수의 약 1/3을 차지하고 있다. 군 지역에서는 자타공인 쥬우소우바시十三橋 경찰서 관내는 공장의 수가 많은 만큼 선인 노동자의 수 역시 비교적 다수로 약 300명을 헤아리며, 방적 및 직물 공장이 많은 키시와다岸和田 방면이 그 다음이다. 그러면 그들 선인 노동자의 성별은 어떠한가 하면, 9할까지는 남공이고 여공은 겨우 150~160명 이상은 나오지 않는다. 이는 실로 조선총독부가 선인 노동자 특히 여자 노동자의 일본 이주에 대해 세심히 조사를 행한 결과에 다름 아니며,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방적과 연초 기타 공장은 여공 결핍의 상황이기에 경쟁하여 선인 여공을 맞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전체 그들의 직업별은 어떠한가 하면, 남녀를 통틀어 방적 직공이 가장 다수를 차지하여, 방적 공장 중 최근 증추(増錘) 계획을 하는 방향이 많아 직공(職工)의 수요 또한 따라서 크지만, 간요한 직공 지원자는 수입이 많은 직공, 조선(造船) 방면에 치우쳐 방적을 등한시하여서 모집 성적이 심히 오르지 않고, 따라서 그 보급책으로 선인 노동자를 맞이한 것으로, 방적 같이 비교적 기교를 사용하지 않는 작업에서는 선인 노동자도 일본인 노동자도 그렇게 능률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기에 앞으로도 계속하여 선인 노동자를 모집해 올 듯하다.

 

방적 공장에 대부분의 조선인 노동자가 고용되어 있었다는 것, 그 중심은 키시와다 방면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선인 여공을 많이 고용한 것은 키시와다 방적으로, 이 회사는 1차 세계대전에 따른 호황으로 여공 부족이 발생했기 때문에 1918년부터 조선인 여공의 고용을 개시했다. 최초는 50명, 다시 100명을 모집하고, 1921년에는 오사카부에 2500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있으며 그 가운데 500명이 여공이라는 상황이 되었다.(44)  

노동 조건에 대해 <고베 신문>(1920년 3월 1일자)에는 다음과 같다. 

 

호경기에 따라서 노동자의 콧대가 쓸데없이 사나워 자본가들은 노동자를 고용하는 데 매우 곤란을 느끼는 바이기에, 여러 궁리 끝에 일본인 노동자와 같이 8시간제를 제출하거나, 임금의 증급을 제의하거나 하는 성가신 노동자보다는 능률에서 7할밖에 일하지 않지만 약 4할의 급료로 노동에 종사하는 순종적인 조선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최근 선인 노동자가 들어가는 사람이 급히 늘어났다. ......

 

일본인 여공에 비해 약 40%의 급료로 고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1925년 2월에 실시된 사카이堺 조선 노동 동지회의 조사에 의하면, 키시와다시, 센난군泉南郡 하루키마치春木町, 사카이시堺市의 각 방적 공장의 조선인 여공의 일당은 초임급이 50전 안팎, 1년 뒤에 70전 안팎이라는 저임금이었다.(45)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는 와중에, 센슈우泉州 지방 최대의 방적 자본이었던 키시와다 방적에서는 1922년 7월에 조선인에 의한 쟁의가 발생했다. 상여가 일본인에 비해 저액이었던 것에 항의하여, 조선인 직공 271명(그 가운데 여공이 219명) 전원이 파업을 일으킨 것이다. 또한, 1928년 8월에는 조선인 여공 300명 가운데 약 100명이 파업을 일으켰다. 그 호소는 "반찬의 양을 일본인 직공과 똑같이 해달라, 다다미를 새로 해달라"는 대우 개선의 요구였다.(46) 

'반찬의 양'에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격차가 있었다는 사실은 무겁다. 이 기사는 노동 임금만이 아니라, 일상의 공장 식사에서 행해진 차별이 존재했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또한, 다른 공장에서 행한 청취조사에서도, 일본인 여공과 식사의 장소가 구별되었다는 점, 조선인 여공에게는 생선의 머리나 꼬리가 담겼다는 것 등이 기록되어 있다.(47)

 

저의 공장에서는 조선인이 40~50명 밖에 없었기에 일본인 여공과 똑같이 식당에서 식사를 했는데, 식당을 절반으로 구분해서 일본인은 상석에서, 조선인 여공은 구석 쪽에서 하는 식이었습니다. 일본인 여공 쪽이 밥의 양도 많고, 게다가 정어리 주더라도 1마리는 여분으로 붙어 있었습니다. 단무지도 한 조각이지만 조선인 여공보다도 많았습니다. 그런 일본인 여공의 자리에 조선인 여공의 우등생만 2~3명을 들였는데, 우리들에게는 그것이 부럽고 부러워서 어쩔 줄 몰랐어요.(48)

 

 

 

 

 

 

2. 공동 취사의 시작

 

산업의 성쇠는 취사장의 두 어깨에 걸렸다

공장의 식사가 함바제로부터 공장의 직영제로 바뀌었다고는 하나, 공장마다 취사를 하는 이상 식사의 질과 양에 차이가 생기게 된다. 그 차이에 따라 쟁의가 발생하기도 하고, 또 식사의 차를 이유로 여공들이 공장을 옮기기도 했다. 따라서 안정된 노동력 확보를 위해 식사의 문제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중소 규모의 공장에서는 취사에 전념하는 노동력을 확보하기도 또한 곤란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이치현의 비사이 직물업 지역에서는 중소 규모의 직물 공장주들의 모임에서 어느 제1구 공장회(이치노미야一宮・이마이세今伊勢・야마토大和의 생산업자)가 1918년 4월에 직물업자 사이의 유지 34명이서 자금 6500엔을 모금하여 공동 취사조합을 설립했다.(49) 

 

이곳 직물의 성쇠도 이 취사장의 두 어깨에 걸려 있는 걸로 조절해야 한다.
그 책임이 무겁고, 그 임무가 크다. 

 

1923년 5월 1일, 새로운 증기기관을 설치하고 임한 취사장의 낙성식에서 하야시 요우조우林曜三는 이처럼 연설했다.(50) 직물업의 성쇠가 '취사장'의 두 어깨에 걸려 있다는 이 말은 직물업을 운영하는 데 노동자의 식사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였는지를 단적으로 전하고 있다. 당시 하야시는 아이치현 나카지마군中島郡 오코시 공동 취사조합의 조합장으로, 쿄우린샤共林社라는 직물 공장은 운영하는 31세의 젊은 경영자였다. 아이치현의 비사이 직물업자의 출자에 의해 1918년에 설립된 이 오코시 공동 취사조합은 일본에서 공동 취사장의 효시로 자리매김한다(그림 3-5). 

 

그림 3-5 오코시 공동 취사 주식회사 준공식

출처: 앞과 같음

 

 

1918년에 오코시 공동 취사조합이 설립되었을 때 가장 빨리 그 시찰로 방문한 것은 당시 노무관리의 계몽가로 활동하던 우노 리에몬宇野利右衛門이었다. 우노는 자신이 편집한 『직공문제자료職工問題資料」 B88(51)에 "오와리尾張 이치노미야一宮의 공동취사장"이란 제목을 붙인 보고를 제출한다.(52) 아마 우노는 막 설립한 오코시 공동 취사조합의 시찰을 통해 앞으로 확대할 공동 취사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예견했던 듯하다. 이 조합의 설립 당시의 사료는 좁은 견식으로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에, 아래에서는 우노가 남긴 당시의 기록에 따라 그걸 보충해 그 이후의 전개를 오코시 공동 취사조합의 사료 분석으로부터 살펴 나아가겠다. 

조합의 규약에는 다음과 같이 있다.

 

제1조 이 조합은 방직업 공동 취사조합이라 칭한다,
제2조 이 조합은 취사장을 이치노미야마치에 설치한다,
제3조  목적   이 조합은 위생상 적당한 조리 음식을 공급한다.(53)

 

이 조합을 방문한 우노는 먼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공동 취사조합의 경우는 종래 50여 공장에서 각자가 작은 취사장을 가지고, 몇 명의 계원을 사용해 계속 준비했던 직공의 식사를 이들 소공장주가 내놓은 자본금에 의해 대규모 취사장 1개소를 설치하고, 이곳에서 통합해 조정하여 그들을 각 공장으로 배달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렇게 함에 의해 이 지방의 방직업자들은 물가 폭등 때문에 겪고 있던 고통을 크게 완화시킬 수 있으며, 더하여 번거로운 수고를 줄여, 저렴한 가격으로 품질 양호한 식사를 직공에게 공급할 수 있다.(54)

 

여기에서 오코시 공동 취사조합의 설립은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물가 상승과 그에 대응한 식재료 배급 체제의 정비 속에서 진행된 움직임이었단 것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설립 당시를 돌이켜보며 하야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취사조합은 공장 위생의 완비를 달성시켰다. 첫 걸음으로 식료품의 개선을 기하고 직공 대우의 통일을 도모함과 아울러 위생과 경제를 고려해 24명 유지가 서로 모의해 조합을 조직하고 자본금 6500엔으로 다이쇼우 7년 10월 오코시의 동쪽 교외에 위치를 정해 기공, 이듬해 1월 개업한 것이다.(55)

 

흥미로운 것은 '직공 대우의 통일'이라는 말이다. 앞에 기술했듯이, 청취 조사에 의하면(56) 중소규모의 공장 사이에 식사의 질이나 양에 차이가 발생하면, 그것이 여공들의 불만이 되고, 나아가서는 그것을 계기로 다른 공장으로 이동하는 일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와 같은 문제의 해결책으로, 공장 사이의 여공의 대우를 평등하게 하는, 즉 식사에 차이를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공동 취사가 시작되었다는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도면으로부터, 취사장을 나타내면 그림 3-6과 같았다. 부지 188평, 건물 약 96평의 취사장에 최초는 바닥이 평평한 가마솥의 아궁이를 설비했는데, 1923년 11월에 증기솥 방식으로 고쳐 원동기를 설치하고, 이듬해 9월에는 전동기를 설치해 정미 사업을 시작했다.(57) 이 절 모두에 나온 하야시의 연설은 이 조합에서 이와 같은 합리화가 한창 진행될 때 행해진 것으로, 여기에서 다시 한 번 그 의미를 이해하길 바란다. 구체적인 설비의 변화는 다음의 말에서 엿보아 알 수 있다. 

 

라이스 보일러에는 식료품을 펄펄 끓이게 되고, 더욱더 영양가 높은 신선한 식료품을 경제적으로 공급하게 된다. 오호, 이것의 완성은 위생상 큰 개선이라 중시되는 것은 물론 하루 1인당 7리씩 1개년 이른바 위상과 경제를 겸비한 이상적 취사장이라 할 만하다.(58)

 

그림 3-6 오코시 공동 취사장의 평면도

출처: <오코시起 공동취사조합 서류철> 하야시 키요林喜代 가문 소장에서 작성.

 

 

이와 같은 콘월Cornish 증기 보일러와 후쿠이식福井式 2중 가마솥 5개(3말들이 2개, 2말5되들이 2개, 2말들이 1개)를 갖춘 취사장에서는 매일 대량의 식사가 만들어졌다.

 

 

 

 

식단과 공동 취사의 운영

그럼 실제로 여공들은 매일 무엇을 먹고 있었을까?

식단 예를 살펴보자. 공동 취사조합이 배식하는 식사는 주식(일본 쌀 3홉, 대만 쌀 1.5홉, 맷돌에 간 보리 1.5홉)(60)와 부식으로 이루어진다(표 3-3). 아침밥과 저녁밥은 밥, 된장국, 절임을 기본으로 하고, 점심밥은 밥, 조림, 절임이란 식단이다. 무말랭이, 말린 무채는 오와리 지역의 특산물이다. 절임은 매끼 빠질 수 없어 1인당 2조각씩 식탁에 올린다. 이건 당시 대규모 공장의 식단과도 큰 차이는 없다.(61)

 

표 3-3 오코시 공동 취사조합의 식단(1918년)

출처: 우노 리에몬 "오와리 이치노미야의 공동 취사장(尾張一宮に於ける共同炊事場)" 같은 편編 「職工問題資料」 B88, 工業教育会, 1918년, 10-13쪽에서 작성.

 

 

 

취사에 필요한 식재료는 대부분 근처 지역에서 조달했다. 주요한 식재료인 쌀은 해당 지역산과 미노산美濃産을 조합해 정미하고, 보리는 주로 기후 지방 산물인 개량 납작보리를 사용, 생선과 육류는 이치노미야 시장 또는 미카와가마군三河蒲郡에서 구하며, 채소는 지역산을 구입했다.(62) 1923년 6월 31일 현재의 물품 조달로부터 재고 식재료 및 물품의 양과 가격을 알 수 있다(표 3-4).

 

표 3-4 오코시 공동 취사조합의 물품 조서(1923년 6월 현재)

 

출처: <오코시 공동 취사조합 관계 서류철> 하야시 키요林喜代 가문 소장에서 작성.

 

 

높아지는 식료품 수요를 인근 지역에서의 이입으로 채웠다는 상황은 이 사례에 한하지 않았다. 시대는 다르지만, 예를 들면 1938년 시점에서 일본 최대의 규모였던 토치기현栃木県의 키류우桐生 공동 영양식구매조합에서는 아침 6100끼, 저녁 7000끼,(63) 밤 6300끼를 제공하기 위해 식재료로 군마 및 도쿄 후카가와 방면에서 현미를 구입하고, 부식물인 채소는 현지 생인에게서 염가로 구하고 있었다. 또한, 동물성 단백질의 공급원을 생선과 고기에서 구해, 일본 수산의 자회사인 합동식품에서 특별 계약으로 구입하고 있었다.(64) 이와 같은 동향은 전국 각지, 특히 공장 집적 지역에서 볼 수 있던 현상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을 바탕으로 보면, 공동 취사란 단순히 식사의 합리화, 노동력의 안정적 확보를 실현했던 것만이 아니라, 식재료 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식재료 생산의 합리화나 유통망의 정비 등과 연동하는, 근대 지역 형성의 한 축을 담당하는 사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다음으로 조합의 운영 상황을 검토한다. 이 조합에서는 식비를 하루 1인 5홉, 25전 7리로 정하고, 따로 한 끼당 원료 외 돈 6리를 과징하고, 잡비 및 건물 기계 기구의 상각비에 충당했다. 또한, 출자금에 대해서는 연 5푼의 이익 배당을 행했다.(65)

경영에 관한 사료는 1923년의 것이 남아는 있지만, 그 뒤 1937년까지는 결여되어 있다. 다만, 배식 수에 대해서는 경년적 자료를 입수할 수 있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우선 1923년의 상황을 명확히 하고, 그 뒤의 경영 동향에 대해서는 배식 수의 추이로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1923년 전기의 사업보고서에 따라 사업의 개황을 보면, 집업 일수는 170일, 총 배식 수는 23만 8734끼였다. 이것은 전년 후기와 비교하면, 2만 1860끼가 증가했다. 같은 해 1월 31일에는 증기 보일러의 설치 공사가 완료되고, 2월 12일 오후 2시 반부터 보일러에 점화, 역원이 입회한 뒤 2중 가마솥에 불을 때는 시도를 한다. 그리고 5월 1일에는 직공 위안회를 겸한 낙성식이 봉행되어, 하야시가 앞에 기술한 연설을 했다. 또한 10월 22일에는 토우호우東邦 전력 주식회사와 전력 사용을 계약하고, 11월 18일에는 정미장을 신축했다. 같은 해 후기의 집업 일수는 177일, 총 배식 수는 23만 9345끼였다. 전기와 비교해 611끼 더 증가한다. 단순히 계산하면, 연간 집업 일수는 347일이고, 휴일은 겨우 18일이었다.

손익 계산표를 바탕으로,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자. 표 3-5는 수입과 지출을 나타낸 것이다. 사업 규모가 조금씩 확대되고, 또 이익을 얻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표 3-6에 의해 지불금의 내역을 보면, 60% 이상이 주식인 쌀과 보리이고, 그 뒤로 부식물, 급료, 연료, 조미료가 이어진다. 직접 취사에 관련된 쌀과 보리, 부식물, 된장, 장작과 숯의 합계로 실로 90% 가까이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표 3-5 오코시 공동 취사조합의 손익 계산(1923년) (단위 : 엔)

 출처: 위와 같음.

 

 

표 3-6 오코시 공동 취사조합의 지불금 내역(1923년) (단위 : 엔)

 

출처: 위와 같음.

주) 1923년 후기는 지난 기말 미지불분 지불 251.82엔을 포함한다.

 

 

다음으로 경년적인 경영 동향을 살짝 살펴보고자 한다. 배식 수의 추이를 보면(그림 3-7), 1930년대 후반까지 증가하고 그 뒤 약간 하락하지만 대략 증가 경향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조합이 설립된 이듬해 1919년에는 <오사카 매일신문>에 의해 "성적이 매우 양호하여 현재 공동취사장에서 식량의 공급을 받고 있는 직공 수는 24공장 600여 명이 된다. ...... 다이지大字, 코노부小信, 산죠우三条의 기업가로부터도 신청을 계속 받고 있지만 현재 설비의 관계로 사절하고 있다"(66)라고 이미 공동 취사의 호평이 보도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설비를 확대한 뒤, 1926년에는 20구좌 1000엔을 증자했다. 도중에 전쟁 때에는 직물 공장이 군수 공장으로 전환했던 시기가 있었지만, 공장 경영 그  자체는 계속되었기에, 취사조합의 배식에 대한 수요도 이어졌다. 

 

그림 3-7 오코시 공동 취사장에 의한 배식 수의 추이

출처: 위와 같음.

주) 각 해 전기와 후기의 자료를 나타낸다. 단 1944년은 전기만의 수치.

 

 

 

이 신문기사를 쓴 1919년에는 배식 대상이 24공장, 600명이었던 바, 약 20년 뒤인 1938년에는 54공장, 2668명으로 대폭 증가한다. 공장 수가 약 2배인 데 대해 직공 수가 4배 이상이라는 점에서, 한 공장당 일하는 직공 수 자체가 증가했다고 알 수 있다. 오코시 공동 취사조합에서 일하는 사람은 10명이다. 청취 조사에 의하면, 조합 취사장 전에는 리어카나 자전거의 뒤에 푸른 덮개가 달린 상자를 붙인 배식차가 줄지어 서 있고, 아침점심저녁 바쁘게 배식을 돌아다녔다고 한다.(67)

그러나 그 한편으로, 같은 해의 사업보고서에는 "중일 전쟁 3년차에 들어가, 전시 경제 체제는 차차 통제를 강화시켜 물가는 폭등하고 당 조합사업도 그 영향을 받아 배급식 수의 감소를 보이는 것은 멈출 수 없는 바이다"(68)라 하여, 전쟁과 통제 경제의 영향이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또한, 같은 해 12월 9일에는 후생성에 의한 전국 영양식 공동취사조합이 개최되었던 듯하여, "당 조합 상무이사 대리 오가와 히데오小川英雄가 출석해, 전쟁 중에 제산력의 확충 국민 체위 향상에 관해 협의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이르러, 노동자의 식사를 제공한다는 행위와 그것을 먹는다는 행위에는 다양한 의미가 부여되었던 것이다.

 

 

 

 

먹을거리에서 본 여공의 생활

여기에서 다시 한 번, 하야시 가문을 사례로 여공의 생활이란 시점으로 되돌아가 살펴보고자 한다.

하야시 요우조우의 아버지 에이자부로우栄三郎가 설립한 쿄우린샤共林社는 다이쇼우 시기에 소폭小幅의 토요타 직기를 25대, 2폭의 직기를 15대 갖춘 직물 공장이었다. 기숙사는 4개 방으로, 40명 정도의 여공이 일하고 있었다.(69) 그녀들은 비교적 가까운 기후현이나 먼곳으로는 아키타현이나 이와테현에서 돈을 벌러 왔다. 다양한 방언이 뒤섞이고, 태어나 자란 고향의 식사와 비교해 익숙치 않은 맛에 당황하는 여공들의 모습도 있었다고 상상할 수 있다.

하야시 요우조우의 딸인 키요(1918년생)은 공장 안의 식당에서 여공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던 일이나 아침, 그날의 식사 수를 확인해 공동 취사조합으로 배식을 주문했던 일 등을 기억하고 있다. "카랑카랑 종을 울리면 식사 시간이 되었다." 직기의 굉음 속에서 울리는 종소리는 컸다. 그때에 배선되는 공동 취사조합의 식사를 자신도 먹은 일이 있다. 아침과 밤은 밥과 된장국의 조합이 기본이고, 점심은 된장국 대신에 조림 등의 반찬이 나온다. 능숙하게 조리하기에 맛은 나쁘지 않았다. 식당에는 4개의 큰 식탁이 있고, 긴 의자가 비치되어 있었다. 한 개의 탁자에 10명 정도의 여공이 모여서 먹었다. 남성은 받침대 위에 식기를 놓고 먹었다.

키요에게 가장 맛있었던 것은 우동 가루로 만든 떡을 팥과 설탕과 물을 끓인 국물에 넣은 '팥죽 떡'이다. 이건 가끔 등장하는 식단으로, 공동 취사조합에서 "오늘은 팥죽 떡이예요"라고 이야기하면, 희망하는 인수분을 특별히 주문했다. 식기의 준비나 정리는 여공들이 분담했다. 또한, 식당의 옆에는 공동 목욕탕이 있어, 우물물을 목욕탕에 모아 끓이는 작업도 여공들이 교대로 분담했다.

공동 취사로부터 전달되는 식사 이외에도 공장에서는 몇 가지 식사 장면이 있다. 특별한 행사가 대접은 하야시 가문이 준비했다. 10월 19일에 축제가 끝나면, 에비스코우恵比寿講(역주; 음력 10월 20일 상인들이 에비스에게 지내는 제사)가 있다. 이때에는 반드시 생선이 식탁에 올랐다. 생선이란 민물 숭어이다. 그에 더해 모란떡, 당근밥, 도미 모양을 한 사탕 종류인 라쿠칸落雁을 즐겼다. 과자가게에 주문해 만들어 받은 라쿠칸에는 달달한 팥소가 들어 있다. 또한 쿄우린샤에서는 오코시마치 안의 농가에 의뢰해 무 절임을 30통 만들어, 그걸 부식으로 제공했다고 한다. 여공들이 스스로 용돈을 들고 외식하는 일도 있었다. 공장 근처에는 과자가게, 우동가게, 채소가게 등이 늘어서 있어, 일을 끝내고나서 또는 휴일에 우동, 찹쌀과자인 아라레, 꼬치구이 경단, 과일, 오방떡, 도미빵을 먹거나, 귤맛 음료(みかん水)나 라무네ラムネ를 마시기도 했다. 오코시마치에서는 1과 6이 들어간 날에 '일육'이라는 장이 서서, 그곳에 가는 일도 여공들의 즐거움이었다.

또한, 당시는 공장법에 의한 규제가 엄혹했던 것도 인상에 남아 있다. "이불은 흰색이어야 한다"고 하여 기숙사의 침구를 정비했다. 쿄우린샤에서는 여주인이 이치노미야의 삼팔 장에 나가, 여공들을 위해 장을 보았다. 백중이나 연말의 증답품, 시집가기 전까지 필요한 것을 사 모아 가는 것이다. 또한, 기모노 등은 행상이 온다. 그걸 여공들은 '가게 없는 옷가게'라고 부르며 기대하고 있었다.

 

 

 

 

 

 

3. 먹을거리와 '지역' 사회사업

 

하야시 요우조우의 인물상과 '공동'이란 의미

 지금까지 공장에서 하던 취사는 단순히 노동 임금의 인하와 효율적인 노동력 확보를 목적으로 했던 사업으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쿠라시키 방적에서의 직영 식당 경영의 개시나 스즈카마 공장에서 여공의 생활, 나아가서는 오코시의 중소 방직업자들이 설립한 공동 취사의 시도를 보면, 먹을거리를 통한 이들의 실천이 지역의 사회사업이란 의미를 겸비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하야시 요우조우의 실천은 그것을 부각시킨다. 딸인 키요의 말을 빌리자면, 방직업 경영만이 아니라 '공동 취사나 보육에 정성을 쏟았던' 하야시였는데, 그의 눈에 당시의 사회, 특히 그가 태어난 비사이 직물업 지역은 어떻게 비추었던 것일까? 면직물부터 모직물로의 전환, 기계의 도입과 여공의 증가, 전쟁에 의한 호경기와 그 뒤의 공황, 물가의 상승, 노동 임금의 급등, 주변 농촌에서 일어나는 소작 쟁의, 공장에서 일어나는 노동 쟁의가 차례로 일어났던 시대이다.

중소규모의 직물업 동료와 상의해 그때까지 각각의 공장에서 만들었던 식사를 공동으로 만들기로 결정했을 때에는, 직물 생산의 향상 때문에 영양가 있고, 경제적이며, 위생적인 식사를 합리적으로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지역 안에서 생활을 공동화하는 것을 통해 격변하는 사회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자 모색했던 것이 아닐런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공동 취사와 보육소의 설립은 모두 근대에 새롭게 요구되었던 '지역'의 생산과 생활을 재편하기 위한 사회적 실천이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70) 이 책에서는 이걸 '지역' 사회사업의 시작이라 의미짓고자 한다.(71)

 

 

 

 

칸토우 대지진 피해와 공존원共存園

하야시가 아이치현의 사회 주사였던 미카미 타카모토三上孝基와 교류하면서 훈도를 받았던 일은 이미 기술했다. 둘 다 당시 30세 전후의 젊은이였다. 하야시는 세 살 아래의 미카미와 어떠한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하야시 들이 1918년에 오코시 공동취사조합을 설립한 뒤, 1926년에 오코시 보육소를 개소하기까지 그 동안에는 칸토우 대지진이 일어난다. 이 무렵의 모습을 아는 것은 보육소의 설립에 이르는 경위를 밝히는 데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922년에 미카미는 사회 주사에 임명되자, 방면 위원 제도의 출범과 아울러 조급히 근대 사회사업의 모델 하우스를 나고야 최대의 이른바 도야가ドヤ街(츄우구中区 소테츠마치蘇鉄町)에 설립하라는 명을 받았다.(72) 미카미는 이듬해에 목조 2층 건물의 아담한 보육원 중심의 린보관隣保館(세틀먼트)를 건설하고, '공존원'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해 9월, 칸토우 대지진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 원은 우선은 피난자의 임시 숙박소로 이용되었다. 여기에 첫 번째 보모 견습생으로 킨죠우金城 고등여학교를 막 졸업한 미즈노 요시오水野よしを라는 여성이 방문했다.(73) 칸토우 대지진이 일어나고 3일 뒤, 그녀는 여름방학의 숙제를 정리하려고 나고야의 기숙사로 돌아가려 했다. 도중에 나고야역에서 본 광경을 그녀는 다음처럼 이야기한다. "도쿄 방면에서 도망쳐 온 피해자들이 역의 안팎에 넘쳐서 그건 매우 혼잡했다. 역 앞의 대광장에는 가설 휴게소가 설치되어, 그곳에는 반쯤 탄 옷을 입은 사람이나 충분히 옷도 걸치지 못한 사람들이 몇 백명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도움을 신청해 피해자에게 말을 걸면서 5일 동안 나고야역 앞에서 일했다. 그 경험이 그녀를 공존원으로 이끌었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재학중에 카가와 토요히코賀川豊彦의 「사선을 넘어서(死線を越えて)』에서도 감명을 받았다. 

도쿄에서 도피해 온 사람들을 가득 실은 열차는 나고야에서 많은 피난자를 내려놓았다. 사실은 이 열차에는 호소이 와키조우와 토시오도 타고 있었다. 옷만 입은 채로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서 열차의 창으로 농가의 사람들이 감자를 나누어 주었던 일을 토시오는 기억한다.(74) 나고야역에 도착한 이 많은 피난자를 받아들인 것은 미카미가 막 설립한 방면 위원을 중심으로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많은 시민이 구원에 나섰다. 

하야시가 방면 위원에 임명된 것은 1926년이었기 때문에, 칸토우 대지진의 구원 활동과는 직접 관련이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나중에 방면 위원에 임명되는 하야시에게 이 지진과 구원 활동은 무관심할 수 없었던 일이 아니었을까? 그 경험이 이후 보육소 개소까지의 경위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을지 그걸 알 방법은 없지만, 미카미나 그 뒤의 공존원에서 한 실천을 통해 기업 경영만이 아니라 더욱 너른 시야에서 사회의 문제를 생각할 필요성을 하야시는 미카미와 이야기했던 건 아닐까 하고 생상한다. 실제, 하야시는 방면 위원으로 일을 하면서 연수에서 본 나고야시 소테츠마치 보육원으로부터 다대한 영향을 받는다.(75) 그들은 앞 장에서 기술한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사회사업의 실무가 네트워크와도 간접적으로 이어져 있었을 터이며, 그 의미에서 하야시의 삶의 태도는 지방의 한 기업가, 또는 지방 명망가라는 틀을 넘어 더욱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4. 공동 취사에 의한 뱃구레의 연대

지금까지는 주로 공장과 여공의 생활 세계를 살폈다. 그러나 그건 공동 취사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병원, 학교, 군대, 유곽, 감옥, 회사, 농촌 등에서도 공동 취사는 시작되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그 모두를 다룰 수는 없지만, 당시의 신문이나 사료를 단서로 삼아 공장 이외의 공동 취사와 그 사회적 의의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한다. 

 

 

 

유곽의 식사와 인권 획득이란 면의 공동 취사

우선 유곽에서 시작된 공동 취사의 움직임으로 눈을 돌리자.

원래 유곽의 창기들의 식사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걸 아는 건 간단하지 않지만, 다이쇼우 시기에 실시된 어느 조사를 아주 작은 단서를 제공한다. 그건 오사카 시립 위생시험소의 이와오岩尾 기사가 실시한 오사카의 쓰레기통 조사이다.

 

시민이 집집마다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는 주방의 12~13만 관, 시에서는 현재 그것이 소각 이후 처분 문제에 대해 연구중인데, 이와오 기사는 시민의 식재료 문제-보건 문제라는 입장에서 이번 여름 이래 오른쪽의 쓰레기에 대해 화학적인 시험에 착수해, 드디어 일부의 조사를 마치고 그 성적을 발표했다. 이와오 씨는 먼저 쓰레기의 영양 분석을 하기 위해 근처의 니시구西区 안 8개소의 쓰레기통을 가져와 그중에서, 주방의 잔여물과 쓰레기를 선별하니 잔여물은 평균 전체 양의 16, 쓰레기는 84라는 비율이었다. ...... 이 조사 결과, 영양소가 가장 많은 것은 쿄우마치보리京町堀, 아와자阿波座이고 이에 비해 유곽 중심지인 신마치新町, 마츠시마松島 등이 가장 열등한 것은 이 일대에 대체로 음료가 활개를 치고 있기에 인간의 입에 들어가는 것은 수분 위주가 많아 다른 것과의 비례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 인정된다. ...... 쓰레기통이라 하는 쓰레기통이 어디든지 식물성-채소류의 잔여물이 활개를 쳐서 영양소로서 주요한 지방과 단백이 매우 적어 전체 양의 1/10에 미치지 않는 점에서 보면 오사카 시민이 평소 어느 정도 조악한 식사에 안주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상황에서 그 참을성 강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그는 혀를 차고 있다.(76)

 

이 조사의 결론은 오사카시 전체에서 식사의 영양소는 낮고, 특히 지방과 단백질이 적다는 것인데, 주시할 만한 건 지역적으로 본 경우 유곽 중심지가 가장 낮았다는 사실이다. 그 때문에 다른 지역과의 비교가 정확히는 어려울지라도, 적어도 유곽 중심지에서 하는 식사는 충분하다고 할 수 없었다는 점은 틀림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근대의 유곽을 안쪽에서 묘사한 얀베 유우헤이山家悠平 『유곽의 파업  여성들의 20세기・서설(遊郭のストライキ 女性たちの二十世紀・序説)』(77)에는 창기들의 파업이 수없이 그려진다. 그 가운데 한 사람, 타부치 스마田淵スマ(1918년생)은 나가사키의 어느 유곽 안에서 「방랑기放浪記』를 읽고 있었다. 그녀는 다음 같이 당시를 회상한다.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손님은 와서도 책만 읽고 있었다. 어느 때, 하야시 후미코의 「방랑기』를 빌려 주었는데 책을 펼쳐도 한자를 읽지도 쓰지도 못해기에 이면지에 몇 번이나 연습하고, 다음 기회에 다시 보게 되었다. 하야시 후미코 씨도 큰 고생을 하신 분이라 생각했는데, 내 입장에서 보면 아직 행복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어떻게 되더라도 인간입니다. 창녀인 저는 상품이기에 주인의 허가가 없으면 당신의 집에도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이 큰 차이였습니다. 기루 주인의 아내들은 오늘은 연극 구경, 내일은 미츠코시三越라고 매일 좋은 기모노를 입고 외출합니다. 유녀가 눈물과 엉덩이로 번 돈으로 흥청거리며 외출하러 간다. 그런 모습을 보고 샘이 나기보다 "무언가 세상이 이상하다"라고 늘 생각했습니다.(78)

 

얀베의 말을 빌리자면, "'상품'인 창녀로서의 생활, 즉 매춘이라는 경험도 포함한 극단적인 소외"가 여기에는 있으며, 그 고뇌를 타부치는 「방랑기』 안의 '나'는 자신과 비교해서 아직 행복한 것이라는 말로 토로하고 있다. 한편, 그 안에서 타부치는 다음처럼도 말한다. 

 

나중에 생각하면 유곽이 나의 학교 같은 곳이었습니다. 선생님 한 사람, 학생 한 사람이서 머리가 나쁜지 제가 알 때까지 손님인 선생님은 가르쳐 주었습니다. 수렁에서 구원해 주었습니다.(79)

 

나중에 타부치는 유곽 안에서 통신 학생이 되어, 졸업 증서를 받고 새 인생을 맞이했다. 또한 잡지 등을 통해 유곽 밖의 세계를 알게 된 창기들은 유곽 안의 세계를 조금씩 바꾸어 나아갔다. 그것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것이 "유곽 파업"이었다. 사실 이 노동 쟁의로 얻은 것 중 하나가 '취사를 함께 한다"는 것이었다. 장소는 다르지만, 1926년 7월 16일자의 <오사카 매일신문> 부록 큐슈九州 아사히朝日의 기사는 그걸 다음처럼 전한다. 

 

취사를 함께 하고, 각 기루에 배식해서 기루 주인과 창기가 똑같은 것을 먹는다. 이것이 가고시마의 대우 개선. ...... 종래는 유곽이 제각각 식사를 하던 것을 폐하고, 판매 조합을 조직해 일체의 식료품을 공동으로 구입, 취사를 해서 각 유곽으로 배포. 기루 주인도 창기도 똑같은 것을 먹게 되어 종래와 같이 팔리지 않는 창기를 학대하는 일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나아가 이 방법을 손님의 음식물에까지 이르게 하면, 유흥비도 쉬이 올라기는데, 이건 산업 조합원이 아닌 사람에까지 물품을 공급하는 셈으로, 산업 조합법의 규칙에 위반되기에 현재 문제가 되고 있다.(80)

 

그때까지는 식사가 학대로 연결되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되는데, 또한 주의 깊게 읽으면 '취사를 함께 한다'라는 곧, 경영의 합리화라기보다도 오히려 창기들이 대우 개선을 획득하는 것으로 이어졌다는 의미 부여를 읽어낼 수 있다. 그와 관련해 또 하나의 기사를 소개하겠다. 

 

나가사키시 토마치戸町 유곽 대실 20채 500명의 사람들이 15일부터 공동 취사를 운영해 대가족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 걸 기록했다. 고용주와 피고용인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이해 상반하지만 적어도 그 사람들이 같은 가마솥의 밥을 먹고, 된장국을 마실 때만은 조금 따뜻한 기분이 된다. 같은 냄비에 넣은 여러 가지 먹을거리가 혼합 융화해 하나의 맛을 만들어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양자의 의지가 어느 정도까지 융합해 화합하는 것만은 사실이다.(81)

 

여기도 낙관적으로 보는 감은 부정하지 못하지만, 이리하여 나가사키의 유곽에서 공동 취사가 시작되었단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서도 역시 '같은 가마솥의 밥을 먹다'라는 것이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융화로 이어진다고 의미 부여하고 있는 것에 주목해 두고자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유곽이란 장소도 또한 고립된 뱃구레가 모이는 곳이었다. 지역에서 다섯 손가락에 들어간다고 하는 대농의 장녀로 태어난 타부치는 부모의 이별에 의해 남의 집 양녀가 되었다. 그리고 소학교 졸업과 함께 보모 봉사에 나선 뒤, 다시 방적 공장의 여공이 되고, 마침내는 양부가 쇼우린구省林区에서 몰래 벌목을 했던 것에 의해 벌금 지불 때문에 16전에 유곽의 창기로 전락했다. 말하자면, 그녀의 인생은 유소년 시기부터 오랫동안 가족으로부터도 지역으로부터도 고립된 뱃구레를 품고, '모르는 불'의 밥을 먹어야만 했던 나날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무언가 저항하기 어려운 이유로 '모르는 불'의 밥을 먹을 수밖에 없게 된 창기들에게, 공동 취사라는 실천은 유곽이란 진흙탕 속에서 '같은 불'의 밥을 먹는 걸 통해 인권을 획득하고 '연대'해 나아가는 걸 의미하고 있었던 것이다.   

 

 

 

 

회사의 평등 식사주의와 식당 쟁의

공장 노동자가 아니라, 이른바 화이트칼라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서도 공동 취사가 시작되었다. 이건 이른바 '사원 식당'의 시작이라 해도 좋을 듯하다.(82) 그건 주로 점심밥의 세계이다.

<오사카 아사히 신문>은 1922년 2월부터 11월까지의 사이에 "'밥'으로 본 대회사의 겉과 속"이란 흥미로운 기사를 연재한다. 이 기사에 의하면, 중역부터 잡역부에 이르기까지 같은 가마솥의 밥을 같은 용기, 같은 방, 같은 식탁에서 먹는 회사도 있다면, 이사와 보통 직원, 사환 아이의 3계급으로 구별하고 먹을거리도 방도 따로따로 하는 회사도 있다. 이 회사에서는 "아래층의 식당에서 한 끼에 10전 정도의 밥을 좔좔 집어넣는" 평사원 300명이 '동찬회同餐会'라는 식당 위원이라는 것을 조직하고, 그들이 1주일분의 식단을 결정한다. 또한, 식당에 대한 사원의 불평이 끊이지 않아, '식당 쟁의'가 차츰 일어나는 회사도 있었다. 또는 직공과 사원의 '잡다한 집단' 같은 회사도 있다. 이 경우, 양자의 뱃구레가 요구하는 것이 질이냐 양이냐 하는 차이가 있다고 한다. 몇 가지 기사를 발췌해 살펴보자.

 

이 회사는 이른바 근육 노동자와 정신 노동자의 잡다한 집단이기에 근육 노동자에 속하는 공장 종업원은 노동이 심하기 때문에 '질'보다도 '양' 꽃보다 경단 주의인 사람이 많고 부식물은 무엇이든 전혀 신경쓰지 않으며, 가능하면 많이 담는 것이 사원 ...... 특히 설계계 등과 같이 책상에 들러붙어 자나 주판으로 혹사되고 있는 계급은 좋아하는 것이라면 한 방울의 국물이라도 핥아먹는 대신에 싫어하는 것은 돌아보지도 않고 다시 원래 책상에 들러붙는다고 하는 식이며, 그에 반하여 사원, 중역 들이라 하는 자본가 계급들은 조용히 젓가락을 움직이면서 비교적 많이 먹는 걸 한다.(83)

 

일본 은행이란 엄격한 관청 분위기의 장소가 또한 평등주의의 식사를 채택하고 있는 건 좀 드물다. 더욱이 좀 전까지는 도시락 지참주의였다고 하는데 최근에 들어서는 중역, 행원 급사, 부인, 사환 200명이 한 아궁이의 밥을 미어지게 넣고 씹듯이 민주화해 왔다. 다만 방이 중역 행원 급사와 부인과 사환의 3개로 구분되어 있는 것만이 공무원 냄새가 아직 빠지지 않은 느낌이다.
도쿄 본점의 600명, 전국 15~16개의 지점도 위의 오사카 지점과 마찬가지로 한 끼 30전 정도의 것을 먹고 받아 식비는 국고 부담으로 일절 무료, 전체로 1년 약 13만 엔을 지출한다는 건 큰 것이다.(84)

 

 도시락 지참주의로부터 공동 취사, 행원 식당으로 변화해 간 것을 알 수 있다. '한 끼 30전'이라는 것은 한그릇식당의 3배나 되는 식비이다. 게다가 행원은 무료이며, 그 식비는 '국고 부담'이었다. 이 기사가 작성된 1922년은 이 장 전반부에서 검토한 직물 여공들의 세계와 같은 시기인 점에 다시 한번 유의해야 한다. 

 

 

 

 

상점과 처마 밑 식당

오사카 선착장의 어느 상점에서는 꽤나 활기찬 식사 풍경이 쭈욱 펼쳐져 있다.

 

과연 따뜻한 옛날 선착장 기분을 벗어나지 않고 독신자와 급사는 아침점심저녁 세 끼, 유부남은 점심밥만으로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월급 70엔인 곳에서 아침저녁 두 끼에 4엔 50전인 점심의 부식물은 요즘에는 유부에 무 조림 같은 시골풍의 것이나, 때로는 이즈모야いずも屋의 장어구이 이상으로 배고픈 뱃가죽을 요동시키는 계란찜의 따뜻한 향이 전 점원에게 정오의 도래를 기다리게 만든다고 한다. 식당으로 들어가는 순서는 물론 정해져 있지 않지만, 먹고 싶어하는 한창 때의 급사들은 아침밥을 9시 무렵에 먹는 관계로 오후 1시 지나서 먹으면 바라던 대로 맛있게 먹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시각에는 중역이나 지배인들이 식당의 중앙에 버티고서 자리를 진치고 노려보기에 콤마コンマ 이하의 아랫사람들은 가장 먼저 무례를 범하게 된다.(85)

 

식당 외에 선착장에서는 도시락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다음에 열거하는 기사에서 전해준다. 도시락밥은 대저 40전과 50전 두 종류로, 40전은 아침이 10전 점심 16전 저녁 14전이고, 밥의 분량은 40전인 것이 세 끼에 3홉 9작, 50전인 것이 5홉이라 한다. 그것과 함께 만쥬우 가게, 팥죽집 등의 '처마 및 식당'이 번창하고 있었다.

 

하녀를 고용해도 잠자게 하는 곳도 없는 바이기에, 자기 집에서 취사를 하는 것을 그만두고, 아침점심저녁의 세 끼를 일체 도시락 배달집에서 받는 것이 많은 선착장, 시마노우치島之内에서 한 구역 떨어진 곳에 늘어서 있는 도시락가게의 주력은 대부분 이들 상가이다.
이렇게 하면, 하녀를 고용하는 급료와 목탄 비용과 수도 요금이 크게 절약되지만, 한창 먹을 나이인 점원 모두는 도저히 이 도시락밥으로는 배를 채울 수 없고, 그리고 가게의 일에 방해되어 애써 따뜻한 음식도 식어버린 다음에야 공복을 채우는 일이 잦다. 이런 식으로는 인간의 신체에 빼놓을 수 없는 칼로리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지배인들은 일하는 틈을 타서 근처의 우동집이나 단팥죽집에 몰래 들어가 겨우 뱃속 벌레를 달랜다.(86)  

 

요컨데, 도시락으로는 뱃구레가 만족되지 않기에 그 분량을 다른 곳에서 채우는 것이다. "상가의 인색함이 '처마 밑 식당'을 북적이게 한다는 건 참으로 진귀한 현상이다"(87)라고 기사에 있다. 게다가 그런 일을 할 만한 여유를 갖지 못한 견습생 아이들은 마련한 약간의 돈으로 고구마를 사서 그걸 먹고, 일하는 원동력을 얻고 있었다. 

이와 같이 오사카에서는 도시락과 처마 밑 식당이 사람들의 뱃구레를 채우고 있었다. 나중에 상세히 기술하겠지만, 오사카에 공동 취사조합이 거의 성립되지 않았던 이유도 어쩌면 이와 같은 상황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즉, 공장 안에 취사장을 갖지 않은 중소규모의 공장에서 하는 식사는 이미 존재하고 있던 배달상을 중심으로 한 도시락 판매, 한그릇식당, 식당의 융성이 그걸 뒷받침하게 된 것이다.

 

 

 

 

'101번 식당'의 대량 생산 6전 양식洋食

1930년 일본 식료 주식회사 고베 지점이 고베시 키타모토마치北本町에 '양식 한 접시 6전'의 '101번 식당'을 개점했다. 그건 신문에 소개되어 "뭐든지 다 합리화의 세상 속에서, 이건 또 살아가는 데에는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될 인간의 근본 문제에 닿은 식료품 합리화를 표방해 '식료품과 시대의 해결'이라고 크게 내걸고 태어난 일양식(和洋食) 6전 균일의 식당이다"라고 보도되었다(그림 3-8).(88) 

그림 3-8 101번 식당의 간판

출처: <고베 우신일보又新日報> (1930년 11월 19일자)

 

 

가격은 '일양식 한 접시 6전 8전 균일, 백반 5전, 술 1홉 10전, 하이시라이스, 카레라이스는 각 8전, 커피 3전, 국 3전'이라는 저가이다. 이 회사의 주주는 오사카의 텐마天満나 자코바雑喉場 부근의 청과물, 생선 도매상의 주인들이나 상인들이다. 기사에 의하면, 드디어 중앙도매시장법이 시행됨에 따른 장사의 제한 축소를 예상하고, 대중을 위한 식당 경영에서 가능성을 찾아낸 것이었다. 원료품을 유리하게 사들이는 전문층의 텐마 상인을 뒤에 두고 대량 생산과 합리화에 계통화된 판매조직에 의해 기존 설립된 공설 식당보다 1~2전 싼 가격을 실현한 이 식당에서는 이윽고 10전 도시락도 내다팔 예정으로, 각 공장과 회사 등에 대량으로 배급하는 일도 계획하고 있었다. 제1호점은 '101번 식당'으로 하고, 순차적으로 1번 식당부터 앞뒤로 개점할 예정이라 한다. 기사에는 다음처럼 나온다.

 

당장 오사카시 시칸지마四貫島에 공장을 세우고, 매일 5만끼분의 식료품을 제조해 부근에 산재한 이 회사가 경영하는 식당에 배급하기로 되어 있는데, 장래에는 아마가사키尼崎 부근에 대공장을 건설해서 제조한 그대로의 음식을 보온장치를 갖춘 30대의 자동차에 싣고 멀리 교토 오사카 고베의 직영 식당에서 밥그릇을 두드리며 기다리고 있는 손님의 상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테이크나 카츠를 내놓겠다는 초스피드의 거대한 식료품 왕국의 실현을 기하고 있다.  

 

아쉽게도 그 뒤의 점푸 확대의 동향을 파악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101번 식당은 고베에 존재하며 대량 생산에 의한 저가의 식사 공급이란 시도는 실시했다고 보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 식당의 운영 회사의 주주들 면면을 보면, 당시 고베나 오사카에서는 도시화와 산업화의 결과로 태어난 대량의 식료품 수요를 장사 기회로 보고, 대량 식료품 공급이라는 새로운 사업이 개시되었단 것을 알 수 있다. 이건 아이치현 비사이 지역의 공장 취사와는 다른 특징을 갖춘, 다른 모습을 한 공동 취사의 전개였다고 할 수 있겠다. 

 

 

 

 

 

5. 뱃구레와 기업·국가·과학

 

공동 취사의 확산

그럼, 공동 취사장은 일본에 어느 정도 존재했던 것일까?

모리카와 키쿠森川規矩에 의하면, 공동 취사란 "특정의 취사장을 설치하든지, 또는 기존 설치된 큰 취사장을 이용해 공장, 학교, 상점, 상회常会, 린조隣組, 은행, 회사, 여관, 요리점 업자 등이 일정 요금이나 또는 소요된 만큼의 비용을 지불하는 방법으로, 영양식의 공동 취사를 하고, 각 가입 공장, 가정 기타 사람들에게 식사를 배급하는 방법"이다.(89) 그 특징은 ①영양적, ②경제적, ③위생적인 것이라 여겨진다. 1938년 3월에 후생성 노동국 노무과가 발행한 『공장 급식의 개선과 공장 영양식 공동취사장(工場食の改善と工場栄養食共同炊事場)」에는 '공장 영양 공동취사장 조사'라는 일람표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같은 해 6월에는 거의 같은 내용을 협조회協調会 산업복리부가 발행했다.(90) 이 두 책의 관계는 상세하지는 않지만, 후자에는 일람표의 내용에 가필이 되어 있기 때문에 아래에서는 후자를 이용해 분석을 진행하겠다. 협조회의 조사 목적 등에는 유의할 필요가 있지만, 공동취사장의 전국적인 파악을 실시하는 것은 좁은 견식에 한해 이 두 가지 조사뿐이기에, 여기에서는 우선 이 일람표를 바탕으로 일본의 공동취사장 설립 시기와 그 지역적 특징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표 3-7).

 

표 3-7 공동취사장 일람(1938년 3월 31일 현재)

 

출처: 협조회 산업복리부産業福利部 「공장식의 개선과 공장 영양식 공동취사장」 협조회 산업복리부, 1938년 및 「공장식의 개선과 공장영양식 공동취사장」 후생성厚生省 노동국労働局 노무과労務課, 1938년. 이상으로부터 작성.

 

 

이 조사에 의하면, 1938년 3월 31일 시점에서 공동취사장은 전국 69개소에 존재했다.(91) 언뜻 보고 알 수 있듯이, 그들은 공장 집적 지역에 입지하고 있다. 그 내역은 기계 기구 공장이 5, 직물·염색·실꼬기 공장이 44, 주물 공장이 3, 불명이 15이다. 직물·염색·실꼬기 공장이 가장 많아, 전체의 64%를 차지한다. 도도부현별로 보면, 도쿄에 기계 기구 공장이 많고, 교토와 효고, 니이가타, 사이타마, 군마, 미에, 아이치, 시즈오카, 기후, 후쿠이, 이시카와에는 직물 공장이 집중되어 있다. 또한, 사이타마에는 카와구치시川口市의 주물 공장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도 주목해 두고 싶다. 

공장이 많을 터인 오사카시에는 영양식 공동취사장이 존재하지 않은 듯하다. 이 사료에서는 오사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오사카시 공장 지대에서 최근 두드러지게 발달하고 있는 도시락 배달상의 문제가 있다. 예를 들면 오사카에서는 대표적인 대공장 및 다수의 중소공장에 늘어선 상점에서 아침, 점심, 저녁 도시락의 배급을 행해, 큰 배달상에서는 공장 노동자에 대해 배급하는 갯수가 7000을 넘는다고 한다. 또 시내의 배달상은 조합을 결성해 중앙시장과의 사이에 연락조직을 가지고, 또는 또 부식물과 같은 것에서는 정연한 분업조직을 가지고 그걸 가공하고 있다.(92)

 

죽, 조사 시점의 오사카시에서는 영양식 공동취사장이 설립될 여지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하게 된다. 이미 기술했듯이, 오사카에서는 배달상 외에도 한그릇식당을 비롯한 외식 가게가 담당한 역할이 컸던 것도 관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건 근대 이전의 도시와 먹을거리의 존재 방식을 반영하는 현상이라 해도 좋다. 

많은 공동취사장은 공장에 부속되어, 복수의 공장이 가맹하는 임의조합으로 설립되어 있었다. 설립 해에 주목하면, 대부분이 1935년 전후인 와중에 아이치현과 기후현에서는 1918~1922년이라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설립된 공동취사장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특필하게 된다. 앞에서 본 '오코시 공동취사조합'은 이 안에 포함되어 있으면서,  표 3-7 안에서는 가장 빨리 설립된 조합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다이쇼우 말기에 쇠퇴한 공영 식당과는 대조적으로, 다이쇼우 시기에 시작된 공동 취사는 그 뒤 1930년대에 걸쳐서 서서히 확산되어 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 그걸 밝히기 위해서는 공동 취사를 둘러싼 더 넓은 사회적 환경에 눈을 돌려야 한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공장 급식과 공동 취사는 아이치현에만 국한된 움직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키워드가 되는 것은 먹을거리의 '과학화'와 '합리화'이다. 그건 '영양'과 '위생'이라는 개념이 먹을거리에 관련된 중요한 사항으로 등장했다는 것과 발걸음을 맞추어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걸 추진했던 세 가지 주체, 곧 기업, 국가, 과학(영양학)이 사람들의 뱃구레에 어떻게 관여하게 되었던 것인지 아래에서는 그걸 생각해 보고자 한다. 

 

 

 

노무 관리란 측면의 먹을거리 -뱃구레와 기업

공장법이 시행되어 국가나 경찰이 공장의 일생에 관여하는 움직임과는 별개로, 쿠라시키 방적 같은 공장주 자신의 자발적인 운영을 중시하며 그걸 촉진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는 나중에 노무 관리라는 발상으로 이어져 일본다운 노사 관계를 형성하 나아가는 저류가 된다. 우노 리에몬宇野利右衛門은 그 대표적 계몽가의 한 사람이었다. 공장이 대규모가 되면 될수록, 경영자와 노동의 현장은 괴뢰되어 가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 빈번히 공장 시찰을 가서 현장의 노동자나 감독자와 접촉하고 그들의 의식이나 행동을 깊이 이해한 우노의 활동은 기업에게도 현장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94)

우노 리에몬은 1875년에 시가현滋賀県 야슈우군野州郡 오즈무라小津村에서 의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95)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에 생활이 곤궁해, 그는 13세일 때 중학교를 중퇴하고 상가에 사환으로 가서 20세에 그 상가를 떠나가까지 상업에 종사하면서 문학과 경제학의 대요를 독습했다. 1895년 봄, 우노가 30세일 때 어머니가 병으로 쓰러지자,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오사카에서 직공 생활에 들어갔다. 사실 그의 누나와 여동생은 모두 방적 공장에서 여공으로 일하다가 결핵에 걸려서 사망했다. 그 자신만이 아니라, 누나와 동생들도 직공으로 메이지 시기의 공장 노동과 깊이 관련되고, 그리고 그곳에서 가족을 잃은 점은 그의 이후의 활동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상상할 수 있다. 우노의 저작은 일관되어 공장의 현장에서 그 상황을 조금씩이라도 개선하고자 하는 제안으로 가득차 있다.

메이지 말부터 쇼와 초기에 걸쳐서, 산업계의 중간 지도자(96)로서 활약한 우노와 그가 주최한 노무 문제 계몽단체(공업교육회)는 일본 노동자의 생활 실태에 맞는 노무 대책을 제안하고 보급시킨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우노는 주로 방적 직물 공장의 남공과 여공의 처우에 대해, 그들의 생활 상태를 포함한 실지조사를 행해 많은 보고를 남긴다.

그중에서 취사에 관한 것으로는 「직공 문제 자료職工問題資料」(97) 제1집 수록 <식사 개선론>과 「공장 취사 요람工場炊事要鑑』 상・하권이 있다. 전자는 1912년에 간행된 것으로, 공장의 식사에 관하여 우노가 복수의 공장 경영자와 인터뷰한 내용이 정리되었다. 우노가 주최한 '취사회'라고 부르는 식사나 식당 설비에 대한 담화 형식의 보고에서는 경영자의 눈으로 본 공장의 식사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후자의 상권은 1925년, 하권은 1928년에 간행되었다. 이건 「직공 문제 자료」 B로 우노 자신이 정리한 공장 식당, 취사장, 음식 조리에 관한 연구 사료를 편집한 것이다. 여기에는 일본 각지의 방적・직물 공장의 실제 취사장이나 식당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몇 개의 밥솥이 갖추어진 취사장, 대량의 식기, 넓은 식당, 절임용 무가 산처럼 쌓여 있는 모습 등을 보면, 새삼스레 한 곳에 모이는 여공의 많음과 식재료 수요의 많음을 엿보아 알 수 있다. 

우노에 의하면, 공장 취사는 군대나 학교 기숙사 등의 단체 취사와 비교해 ①먹는 자가 모두 직공인 점, ②비가정적 군거 생활의 필요함이라기보다 오히려 직공 우대 기관으로서 경영된다는 점이 특징이라 한다. 그 때문에 경제, 위생, 합리화에 더해 '유쾌하게 식사하게 한다'(99)는 것을 이상으로 내걸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와 같이 공장 급식은 근대를 상징하는 과학, 위생, 합리화, 관리의 체계화와 밀접히 관련되면서 전개되었다. 

우노는 '식사를 개선하고, 더욱 많은 영양분을 직공 일반에게 급여함으로써 노동력의 보전을 완비하겠다는 것은 직공 대우에서 중요한 사항'이라고 주장하고, 「직공 문제 자료」 제1집 안에서 '식사 개선론'을 전개한다.(100) 우노에 의하면, 메이지 말년 시점의 직공 기숙사를 가진 공장을 조망하면, 그중에는 식사가 잘 정비되어 있는 공장도 있지만, 대다수는 아직 불완전하여 개량해야 할 점이 남아 있었다. 그건 첫째로, 직공에게서 징수하는 식비가 저렴하기 때문에 회사의 보조를 더하더라도 음식의 품질이 조악하다는 점, 둘째로 식당의 정비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앉아 있기가 나쁘다는 점, 셋째로 식단이 단조롭고 식욕을 증진시키지 못한다는 점이라는 세 가지로, 이 부족한 점이 직공의 영양 부족, 위장의 질환, 노동력의 건강하지 않음을 일으킨다고 우노는 말한다.

"직공 우대의 첫째 의의는 쌀과 이부자리에 있다"라고 했던 것은 카네보우鐘紡 타카사고高砂의 공장장 타츠카와 카츠이치로우瀧川勝一郎였는데, 우노는 이걸 인용해 직공 보호의 2대 요의는 '식사'와 '안면安眠'에 있다고 하고, 특히 식사는 직공의 건강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에 연구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주로 공장의 경영자를 계몽하는 입장에 있던 우노는 이러한 내용에 대해 각 공장의 취사 담당자를 모아서 의견 교환을 행할 목적으로, 1912년 9월 15일에 '취사회'라는 회합을 열었다. 교토 오사카 고베의 각사 공장 30여 곳으로 안내를 보낸 바, 8개 공장으로부터 10명의 담당자가 참여하고 공업 교육회의 멤버가 더해져 합계 14명의 소집회가 되었다. 조촐하지만 이 기록은 각사의 취사나 식사를 아는 데 귀중한 사료가 된다. 참가한 것은 아마보우尼紡 츠모리津守 공장, 아마보우 본사, 모스린毛斯綸 방적, 일본 방적 본사, 오즈小津 세사방적, 미에보우三重紡 니시나리西成 공장, 제국 제마 오사카 공장, 후쿠시마 방적 본사의 면면이다.

우선 식비 문제에 대해 보면, 여공으로부터 징수한 것은 1일 세 끼분으로 8전에서 9전이다. 이 무렵, 식비를 조금 인상해서 식사의 질과 양을 높이려고 하는 논의가 일어나고 있었다. 우노는 그걸 상세한 식단과 경비의 분석을 통해 주장한다. 그에 대해 아마보우 츠모리 공장의 담당자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몇 홉의 쌀만으로도 이미 10전 가까이 드는 일이기에, 어떻게 해도 그들의 불만족을 면할 수 없어서, 많은 여공 중에는 외출할 때마다 여러 음식을 먹을 뿐만 아니라, 기숙사 안으로까지 가지고 들어오는 걸 볼 수 있다. 그 때문에 여공이 낭비하는 돈이라는 건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회에 1전 또는 2전을 인상해서 혹시 충분한 만족은 줄 수 없다 하더라도 조금이나마 어떻든지 개선하고 싶다는 것은 우리가 일찍부터 생각해 오던 일이지만 모집지와의 관계 때문에 단행하기를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공장의 모집지는 큐슈의 끝에 있어서 생활의 정도가 매우 낮은 곳으로, 1일 1인 5~6전이라도 있으면 충분히 생활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도시의 사정을 모르는 부형은 8전의 식비를 1~2전이라도 올린다고 하면 묘한 오해를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101)

 

기업 측의 불평을 보면, 여공의 처우 개선이라는 시점은 부족하고, 노동력 질의 개선을 노동자 자신의 부담으로 실현하려고 하는 점에 먼저 유의해야 한다. 한편으로, 식비를 싸게 하더라도 결국은 간식으로 여공들이 낭비해 버리는 점, 도시의 물가고를 모집지에 주지하는 것이 어렵단 점, 식비를 둘러싸고 공장과 여공의 가족 사이에 신뢰 관계가 흔들리는 점을 기업 측이 우려하고 있었던 것 등, 식비의 인상을 둘러싼 구체적인 곤란이 전해진다.

기타의 공장도 각각 식비의 사정에 대하여 정보 교환을 한 뒤, 이 모임에서는 식비의 인상에 의해 식사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사회인 우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회고하자면, 지금으로부터 2년 이전, 제가 시작해 이 모임을 설립하여 『직공 문제의 연구(職工問題の研究)』를 발간했을 무렵에, 식비의 인상은 회사, 직공 쌍방의 행복이어서 직공 문제의 해결에는 첫째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극력 논하여 두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그걸 이론으로는 좋지만 실제로는 적절치 않은 공론이라고 하여, 대다수의 분들이 찬성하지 않았지만, 2년 이후인 오늘날에 이와 같이 전원 일치의 동의를 배청하는 것을 얻은 건 쌀값의 폭등이라는 것이 한 원인이라고는 하나, 직공 문제에 대한 여러분의 사상적 진보와 이 길을 위하여 경하를 이기지 못하는 바입니다.(102)

 

 기타로도 이 모임에서는 '밥의 일', '절임의 일', '국의 일', '부식물'이 의제로 올랐다. '부식물'에 관해서는 "일품만 최근 여공에게 주어서 평판이 좋았던 부식물"을 서로 소개하는 것이었다. 일부 인용해 보겠다.

 

언제라도 여공이 좋아하는 부식물은 자반 연어라든지 말린 생선이라든지, 소금이 강한 생선을 구워서 지급한다. 

우엉과 곤약과 구운 두부에 붉은팥을 넣어 설탕을 많이 넣고 졸인, 이른바 '이토코니従姉妹煮'라고 하는 것이 인기를 끄는 듯하다.

얏코두부奴豆腐에 가츠오부시를 곁들인 것도 약간 세련된 것입니다. 1전의 두부를 반분, 거기에 가츠오와 간장을 곁들여 2리, 즉 7리로 올린 것이 그만큼 겉모양도 좋고 평판이 좋은 편이다.

두부껍질, 박고지, 얼린 두부 등도 양념을 해서 조려 두고 거기에 멸치를 더해 밥에 섞은 것, 속칭 카야쿠메시かやくめし 등은 이건 부식물은 아니지만 가장 기뻐하는 음식인 듯하다. 최근 이걸 만들었던 곳이 1끼에 13섬이나 먹어 버려서 큰 인기를 끌었다.

가지의 기름조림 등은 너무 좋아하는 채소인 듯하다. 그건 냄비 안에서 기름을 끓여 두고, 거기에 가지를 적당히 자른 걸 넣고 충분히 볶아 놓고, 거기에 간장과 설탕과 물을 더해 양념을 한 것이다.

소고기, 양파, 감자 등의 조림 등은 너무 여공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끓인 우동을 먹였는데, 여공이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건 우동을 사 와서, 한번 그걸 데쳐 놓고, 거기에 파, 얇게 깎은 우엉, 유부 등을 더해 설탕과 간장으로 양념을 해서 먹는 것이다.(103) 

 

각각의 공장 식생활이 엿보임과 함께, 취사계는 막연하게 업무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공이 먹는 모습으로부터 평판을 파악하고, 기호를 이해하려 하는 상황을 읽어낼 수 있다. 

또한 1912년 1월에는 제2회 취사회가 개최되어, "식기에 관한 건", "취사 일꾼에 관한 건", "식당의 정리에 관한 건" 등이 서로 이야기되었다. 이러한 우노의 활동과 모였던 취사계의 회화를 통해 보이는 것은, 기업이 사람들의 뱃구레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 그 관여 방식을 시행착오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직공 사정」이 간행되었던 때부터, 공장에서는 상황이 개선되고 있는 경우도 있고, 또 이와 같은 우노의 대처를 통해 개선의 필요성이 계몽되어 나아가는 듯했다. 앞에 기술했듯이, 이 시기는 오오하라 마고사부로우에 의한 쿠라시키 방적에서의 여공관의 전환이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했는데, 그건 쿠라시키 방적에 그치지 않는 움직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회문제연구소를 설립한 오오하라는 오오하라 사회문제연구소에 있던 테루오카 기토우暉峻義等를 쿠라시키로 불러들여, 1920년 2월에 심야의 공장 견학을 예고 없이 실시했다.(104) 그 목적은 쿠라시키 방적의 노동자의 노동환경을 파악하고, 그 개선의 실무를 당시 30세였던 테루오카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공장 안에 쿠라시키 노동과학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카네다 레이코兼田麗子가 이미 지적하듯이,(105) 테루오카는 노동 능률에 편중되어 있는 테일러 시스템을 비판적으로 파악하며 "어떤 체제에서라도 노동자 대중을 위한 것"인 노동과학의 확립을 목표로 했다. 즉, 구미에서의 움직임도 계속 시야에 넣으면서 단순히 효율의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중의 시점을 중시한 실천적 학문이 되는 노동과학이 이 연구소에서 태어난 것이다.(106) 테루오카는 가혹한 근무가 여공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조사해 발표했다. 이건 1929년 심야 노동을 금지하는 공장법 개정의 실시로 이어졌다고 전해진다.(107) 

의학자였던 테루오카는 또한, 피로 회복에 필요한 영양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의 하나로 '노연労研 만두'가 있다. 테루오카는 두번에 걸쳐서 만주로 여행하고, 만주의 사람들이 흔히 먹는 밀가루로 만든 만두를 알고 그걸 쿠라시키 노동과학연구소에서 개량해 '노연 만두'를 개발했다. "'빵'보다 제법이 간단하고, 종래 일본의 부엌 용구를 써서 만들 수 있으며, 더구나 주식물로 이용하는 것도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각 단체, 각 가정에서 그걸 자급한다고 하는 것이 노연 만두의 입장이다." "오카야마시나 구라시키시에서 일반을 위해 배급하고 있는 것은 단가를 1전 2리 5모(곧 5개 5전으로 팔아야 하는 걸 4개 5전으로 한다)로 한정하고 있다. 그리고 노동과학연구소 추천이라는 문자를 사용하는 걸 허가하고 있다. ...... 공장이나 군대 방면에도 조금씩 수요가 늘어나 간다"고 테루오카 자신이 논문에서 설명한다.(108) 이 만두는 분식을 촉진하는 주식 대용식으로 공장, 사회사무소, 은행, 학교 등의 점심 도시락에 적당하며, 단가 1전당 영양가는 쌀밥, 쌀보리밥, 빵, 우동 등에 비해 우수하다는 특징이 있었다. 

교토, 오사카, 고배에서 판매되기 시작하자, 노동과학연구소로부터 양도 받은 효모로 만두를 만드는 판매점이 계속해서 증가해, 전국 37개 점포가 제조 판매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인 에히메현愛媛県 마츠야마松山의 '노연 만두 타케우치たけうち'는 1931년에 마츠야마 야학교에서 교사였던 타케우치 세이이치竹内成一가 불황으로 학자금에 시달리는 야학생을 원조하기 위해 효모를 양도 받아서 노연 만두를 만든 것에서 시작된다.(109) 그 뒤, 마츠야마 야학교에서 개인 경영이 되어 2018년 현재 이 가게만이 그 당시의 효모를 사용해 만두를 계속 만들고 있다(그림 3-9, 그림 3-10).

 

그림 3-9 마츠야마 야학교 공장 앞

출처: 노연 만두 타케우치 제공 자료. 

 

 

그림 3-10 노연 만두의 라벨(복각판)

출처: 위와 같음.

 

 

 

 

경찰에 의한 먹을거리의 관리 -뱃구레와 국가

다이쇼우 시기의 공장 취사를 조사하면, 경찰의 사료에 다다르는 일이 많다. 그건 당시, 결찰이 공장 감독에 관여하는 행정을 소관하여 공장 취사도 그 관할에 따랐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사례로 말하자면, 아이치현은 경찰부 공장과 안에 아이치현 공장회를 두고, 이 회는 1923년에 『공장 음식물 식단표(工場飲食物献立表)』를 간행한다. 그곳에는 "지금 유럽 대전란의 결과는 공업회에 미증유의 발전을 가져와, 사업의 확장 및 신설 등 점차 번성함이 극에 달하는 때에, 직공의 건강에 유의하는 바 없이 한갓 눈 앞의 이익을 얻기에 급급해 영구적인 앞날을 잊는 일이 있어서야 되겠는가"(110)이라 한다. 이 장에서 사례로 소개한 스즈카마 공장의 사료군에는 이 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1928년에는 전국에서 선구적으로 에히메현 경찰부 공장과에서 영양관리 기수가 배치된다.(111) 원래 위생 행정은 경찰의 관할이고, 직공의 생활은 각 현의 경찰부 공장과에 의해 관리되어 때로는 조사가 실시되었던 것이다.

나아가 경시청 공장과에서는 "노동자의 건강을 유지해 나아가며 체력의 증진을 도모해, 생산 능률의 증대"를 내세우며 1932년에 『공장 급식의 개선(工場食の改善)』(112)를 간행했다. 이 책에 의하면, 1929년 8월에 이 과 안에 전문 영양 기수가 배치되어 공장에서 급여되는 식사에 대한 기초 조사를 행하고, 일정 계획을 세워 각지에서 강습회를 개최해 실지 지도가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공장 급식에 대한 경찰의 관여는 공장법과의 관련 안에서 진행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1916년 이 법의 시행에 앞서, 농상무성 상공국 안에 공장과가 신설되고, 이듬해에는 각 부현의 경찰부에 공장 감독관이 배치되었다. 이러한 경위 속에서 감독관은 공장의 현장 검사나 공장법 위반의 단속 및 지도를 담당하게 되었다.(113)

그런데, 경시청 공장과에 의한 실지 지도란 어떠한 것이었을까? 경시청 공장과와 도쿄 공장협회가 1931년에 공동 주최한 강연회는 국립 영양연구소에서 개최되어 강사는 이 연고수의 소장이었던 사에키 타다스佐伯矩, 경시청 공장과 경찰 기사였던 호시아이 진노스케星合甚之助가 담당하고, 각 공장의 조리 주무자가 모였다. 이건 구체적으로는 '공장 급식 개선 강연회'라는 것으로, 특히 영양학의 지식을 중심으로 한 지도였던 듯하다. 그럼 공동 취사에 도입되었던 영양학의 지식이란 어떠한 내용이었을까? 다음으로 그걸 살펴 나아가려 한다. 

 

 

 

 

사에키 영양학교와 국립 영양연구소 -뱃구레와 과학

원래 집단 급식에 대한 관심은 먼저 군대의 식사를 개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 그 뒤 1923년의 개정 공장법에 의해 기숙사를 가진 공장에서 식단표의 작성이 의무화됨에 따라 공장 급식에도 관심이 향하게 되었다. 

그에 우선해, 1914년에는 사에키 타다스(1876~1959)가 영양연구소를 설립했다. 사에키는 전염병 연구소에서 세균학이나 효소에 대해 배운 뒤 미국으로 건너가 10년 동안 유학을 거쳐 영양학을 체계화하고 독립된 학문으로 만들겠다는 걸 결의하고 귀국했다. 그리고 사설 연구소를 설립한 것이다.(114) 1921년에는 내무성 부속 기관인 국립 영양연구소가 설립되자, 당시 45세였던 사에키는 이 연구소의 소장으로 취임함과 함께, 1925년에는 영양학교를 설립했다.(115) 같은 해에는 국가의 식량 문제과 식생활 개선을 목적으로 한 '양우회糧友会'도 발족한다.(116) 당시의 영양 연구의 목적은 먹을거리를 건강·경제·도덕의 문제로 파악하고, 특히 공장 급식은 산업 입국을 목표로 한 일본에서 특히 중시해야 할 중요 과제로 여겨졌다.(117) 공동 취사에 대한 영양학교의 영향은 적지 않았던 듯하여, 앞에 기술한 <공장 영양 공동취사장 조사>에서는 영양사의 유무가 기재되어 있다. 69개소 가운데 38개소는 영양사를 고용했고, 오코시 공동취사조합에서도 1명의 남성 영양사가 있었던 것이 기재되어 있다.

1930년대에 협조회에 의해 공동취사장의 조사가 실시된 배경에는 이러한 공장 급식 개선 운동이 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공장 급식의 개선과 공장 영양식 공동취사장(工場食の改善と工場栄養食共同炊事場)』은 제1집 <공장 식사의 개선>과 제2편 <영양식 공동취사장 설치의 안내서>로 이루어지고, 특히 전자는 영양학의 견지에서 다양한 제안이 되어 있다. 그 주지는 "세상이 진보하고 과학이 발달한 와중에 식사만큼 뒤처져 개선되지 않은 것은 없다"(118)이라 하며, '영양학'이란 걸 보급시킨다는 것이었다. 당시, 공동취사에서 중요시 된 '영양식'이란 단백질, 칼로리, 무기질, 비타민이라는 4가지 조건을 갖춘 먹을거리이다.(119)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지식을 갖춘 영양사의 양성은 식생활 개선을 통한 부국강병을 목적으로 했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사에키는 1926년에 「영양栄養」(120)이란 책을 간행한다. 이 책에 의하면, 서양에서는 식이요법이란 것이 존재하고 동양에도 식양食養이란 개념이 옛날부터 존재했지만, '영양'이란 것을 과학적으로 취급하게 된 것은 비교적 새로운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 서양의 지식이 수입되고나서의 일이다. 그걸 독립적 사업으로 전환하고자 1920년, 국립 영양연구소가 설립된 것을 고려하면 사에키 자신이 일본의 영양 연구의 1인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에키는 영양 연구의 필요성을 ①생물학적인 필요, ②사회 정책적인 필요, ③식량 정책적인 필요, ④체격과 체질 개선의 필요, ⑤병 치료의 필요, ⑥과학의 정수라는 측면의 필요라는 6가지 관점에서 주장하며, 단편적이었던 영양 연구를 새로운 양식에 따라 통일, 체계화하기 위해 '소비'라는 행위를 생리학, 경제학, 사회학의 세 방향에서 보고, 그것들을 융화시키는 '영양 삼륜설'을 제창했다(그림 3-11). 

 

그림 3-11 사에키의 영양 삼륜설

출처: 사에키 타다시佐伯矩 『영양栄養』 영양사栄養社, 1926년, 16쪽.

 

 

그에 따라서, 『영양』은 3편, 곧 '하늘' 양리편養理編, '땅' 조리편調理備, '사람' 식정편食政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모두에는 사에키 자신이 작사한 '영양의 노래'라는 것과 '식품의 성분과 효과'에 대한 그림이 게재되어 있다. 이건 앞에 기술한 오코시 공동취사조합의 자료철 안에도 철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부터, 각지의 공장이나 공동취사장에도 전해졌던 것으로 보아도 좋다.

사에키의 논리가 지닌 독자성의 하나는 '식정食政'이라는 시점이다.

 

사람도 국가도 먹을거리 위에 서 있다. ...... 먹을거리의 중함은 사람의 중함 때문이다. 먹을거리를 잊지 않는 사람은 사람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한 국가의 융성에는 식정이 먼저 강구되어야 한다.(121)

 

이렇게 주장하고, 영양 연구는 의학의 일부에 편중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와 사회 정책과도 밀접히 관련되어야 한다고 했다. 쌀과 보리가 농민만의 것이 아니고, 부유한 사람이 먹을거리를 점유해서는 안 된다. 이걸 "음식의 도덕" 또는 "먹을거리의 사회화"라고 정의하며, 그걸 실현하는 장이 "공동 부엌" 및 "공설 식당"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공장 급식은 중요하기 때문에, 공장법안에도 취업원의 영양에 관한 사항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기술한다. 
사에키의 이러한 주장이나 국립 영양연구소에서 한 작업에 의해, '영양사'의 양성이 추진되었고, 그들이 공장의 영양사나 경찰부 공장과의 영양 기사로서 '영양'이라는 과학적 지식과 사회적 실천을 각지로 보급시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영양식 배급소와 공장식 개선운동

다이쇼우 시기에 시작된 영양학에 의한 뱃구레에 대한 관여는 '공장식 개선운동'으로 전개되어 급격한 보급을 보았다. 국가의 사회국 노동부는 그 동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공장식의 개선운동은 점차 최근 10년 동안 극도로 급격히 보급하게 된 것으로, 그 전개의 방향은 우선 공장과 또는 보안과에 전임 기술자의 배치가 보급되고 강습회, 강연회 등을 계속 개최하면서 영양에 관한 이론과 실제적 방면의 지식 계발이 이루어지고, 다시 실지 지도에 의해 양호한 성적을 올리는 방법이 강구되는 한편, 중소공장의 집단이 모여 있는 지구에 대해서는 조합 조직에 의한 공동취사장의 설립이 권고되어 가서, 장래 국민 체위의 향상이라는 여론에 자극을 받아 더욱더 발전 보급해야 할 것이 충분히 예상된다.(122)

 

그 실천의 하나가 '영양식 배급소' 또는 '영양식 공동취사장'이라 부르는 시설의 설치였다. 앞에 실은 표 3-7은 이 시설의 일람을 나타낸 것이 된다. 

당시 일본에서 최대 규모의 시설은 군마현 키류우시桐生市에 있었다. 키류우라고 하면 직물의 대산지이다. 도쿄, 오사캉, 아이치 등의 대도시와는 달리, 농촌 지역에 인접한 지방 도시에 입지한 대규모 공장에서는 대규모의 취사장이 필수였다. 최대 규모라는 것도 있고, 당시 키류우에는 식품회사, 영양학 연구자 등이 찾아와, 그 보고를 남기고 있다. 예를 들면 1937년의 『영양과 요리(栄養と料理)』에는 <키류우 공동 영양식 구매조합 참관기(桐生共同栄養食購買組合参観記)>라는 기사가 게재되어 있다.(123)

기자는 버스를 타고 공장으로 향하는 길인데 "황색 대형 자동차가 3대 하얀 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해 오는 모습을 보고, "그 순간 육감으로, 조합의 것이다 하고 알아챘다." 그리고 그걸 기자가 예상한 대로, 조합의 배식차였다. 유한책임 키류우 공동영양구매조합은 1936년 3월에 설립되었다. 그에 앞서, 1934년에 군마군 공장협회 키류우 지부가 설립되었기에, 그 사업으로서 영양 공동취사사업의 연구가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출자금 총액은 6만 3620엔, 조합원은 645명, 호수로 하면 380호였다. 직업별로 보면, 직물 공업 574명, 상점 43명, 광공업 10명, 잡업 18명이다. 배식 수는 약 7000끼, 15명이나 20명분을 하나의 용기에 담아 5대의 자동차로 배식한다. 작은 가건물을 배식소로 58개소 설치하고, 그곳에 설비한 선반에 용기를 꽂아 넣고, 오래된 용기를 가지고 돌아가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다. 가장 먼 배급소는 1리 반(6km)이기 때문에, 배식하는 데에는 1시간 반 정도 걸렸다고 한다.   

 이 배식소 전속 영양사에 의하면, 식단은 콩 또는 콩 제품이 많고, 동물성 식품으로는 소금 절임이나 말림, 깡통, 말린 멸치가루 이용이 많다. 생선은 대개 하루 건너, 고기는 1주일에 2번 정도 사용한다. 생선은 일본 수산 주식회사(현 닛수이ニッスイ), 쌀은 주로 군마 및 도쿄 후카가와深川 근처에서, 채소는 현지 상인에게서 구입했다. 다만, 맏물 채소는 도쿄 쪽이 더 싼 일이 있어, 그때는 도쿄에서 구입한다.

기자는 이 배식소에서 한 끼 8전의 점심을 먹고 "어째서 상당히 맛있었다"고 기록한다. 반찬은 여러 가지를 담아 토란과 설튀김, 우엉, 당근, 오징어 볶음에 고물을 끼얹은 것. 밥은 덮밥 한 그릇의 7분도 쌀이었다.

조리장은 단층 건물 1동, 라이스 보일러실 1실, 조리실, 식당, 두부 제조실, 튀김실, 소독 예비실, 마른 식품실, 잡품고, 복도, 주차장으로 구성된다. 그밖에 정미소, 미곡 창고, 기관실, 자동차고, 채소 저장소, 하수조, 수조, 저탄장, 기숙사 등의 설비가 있다. 약 5만 엔의 투자를 해서 이들 설비를 정비했다.

여기에서 일하는 건 총원 68명, 그 가운데 조리부에는 밥짓기가 6명, 조리 10명, 영양사 1명, 기관실 3명, 정미소 2명, 배급의 운송수 6명, 배급원 12명이었다. 얼마나 대규모 취사장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림 3-12는 이 배식소의 라이스보일러실이다. 사토식佐藤式 자동 3중형 증기 취사 장치와 츠치야식土屋式 솥뚜껑을 배열한 25대의 라이스보일러가 쭈욱 늘어서 있다. 하나의 가마솥에서 된장국 2섬 2말, 쌀 6말을 충분히 조리할 수 있는 크기였다.

 

그림 3-12 키류우 공동 영양식 구매조합의 라이스보일러실

출처: 일본 수산 주식회사 편찬 「영양식 공동취사 독본(栄養食共同炊事読本)』 일본 수산 주식회사, 1938년.

 

 

흥미로운 것으로, 이 사진은 일본 수산 주식회사에 의해 촬영된 것이다. 일본 수산은 당시 계속 확대되었던 공동취사나 영양식 배급소를 새로운 고객으로 만들고자, 그 시장 조사도 겸하여 전국적인 조사를 실시했다.(124) 실제, 이 키류우 공동 영양식 구매조합에서는 일본 수산의 생선 및 생선살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이처럼 대량의 식재료 수요의 발생은 식품회사와도 밀접히 관계하면서 전개되기도 했다.

 

 

 

 

농번기 공동 취사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도시나 공장이라는 장소만이 아니라, 농촌에서도 공동 취사의 필요성을 주창하게 되었다. 농촌에서 하는 공동 취사는 2단계로 진행된다.

농촌부에서는 첫째 단계로 다이쇼우 후반기의 생활 개선운동 속에서 영양 개선을 제창하게 되었던 것과 연동해서, 농번기에 임시 공동 취사가 시도되었다. 다이쇼우 시기부터 쇼와 초기는 주로 '영양의 합리화'를 실천하기 위한 공동 취사였다.(125) 또한 농번기에는 농촌의 여성들, 특히 아이가 있는 여성들이 격무에 종사하는 동시에 취사를 담당해야 하는 것을 감안하여 건강의 유지, 유아의 발육, 가족 활동을 위하여 7~8월, 또는 7~9월의 단기 공동 취사가 필요하다고 여겨졌다.(126) 이리하여 농촌부의 공동 취사는 '농번기 공동 취사'라는 형식으로 시작되었다.

그 뒤, 두번째 단계로 전쟁 상황에서 '영양'은 점점 더 중시되어, 그 결과 도시부만이 아니라 농촌부에서도 영양식과 그 공동 취사의 필요성을 한층 강조하게 되었다. 그건 농업 공동 작업과 농번기 탁아소를 포함한 조치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국민의 영양 상태는 구미 여러 나라의 그것에 비교해 눈에 띄게 손색이 있다."(127) 특히 영양 섭취량, 그중에서도 지방의 부족이 문제이다. 이건 1943년에 간행된 『농촌 영양   공동 취사의 운영(農村栄養  共同炊事の運営)』이라는 책의 모두에 나오는 말이다.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농촌 공동 취사는 노동력 조정, 건강한 병사 건강한 국민(健兵健民), 전시 생활 쇄신, 이웃을 지키고 서로 도움(隣保共助), 모성 보호, 인구 정책 등등의 목적으로써 전국에 전개한 사업인데, 지금 농촌 공동 취사의 목적은 전쟁에 이기기 위한 농업 경영, 식량 증산, 협동체 건설의 기저가 되는 중요성이 확인되었다.

 

여기에서는 농촌 공동 취사의 목적은 전쟁에 이기기 위하여 중요하다고 설명되어 있다. 이 책은 그를 위한 지남서이며, 전편의 농촌 영양에서는 '농촌 영양', '주식물 영양의 섭취법', '부식물 영양의 섭취법', '도시락 영양의 섭취법', '간식 영양의 섭취법', '임산부 영양의 섭취법', '산모 영양의 섭취법'이 기술되고, 후편의 공동 식생활에서는 '농촌 공동 취사의 개설', '공동 취사 식단 조리의 실제', '공동 취사 위생 관리', '도시 여자 청년 농촌 근로 봉사', '공동 취사의 새 전망', '농촌 식사 제공의 방법', '농번기 농민 영양 가르침(訓)', '농촌 공동 저장식의 방법'이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 농촌에서 공동 취사의 목적을 단적으로 이야기하는 '농번기 농민 영양 가르침'을 다음으로 뽑아서 적어 보도록 한다.

 

제일 가르침(第一訓)   체력과 피로에 대비하라, 피로하기 전에 영양이 첫째
제이 가르침   배부름과 영양은 별개의 것, 단지 배를 부풀려서 만족하지 마라
제삼 가르침   흰밥이나 치우친 반찬은 피로의 원인 병의 원인
제사 가르침   일하기에 좋은 칠분도 쌀, 쌀 절약을 잊지 말고, 감자, 당분, 기름기 등을 덧붙이라
제오 가르침   고기, 생선, 달걀, 콩, 된장 등을 소모되는 피와 살의 보충으로
제육 가르침   피로 방지와 골질 강화로, 채소, 해초, 잔 물고기 등을 배합해서 취하라
제칠 가르침   골고루 취하라 영양식, 아침밥, 오차즈케와 저작에 신경쓰라 
제팔 가르침   피로의 회복에는 우선 비타민 B와 C  중탄산소다, 소금에 달달한 것
제구 가르침   국가를 위하여 과로를 피하고, 임산부에게 영양, 아이는 보육
제십 가르침    공동 작업과 공동 취사, 서로를 위해, 국가를 위해, 승리를 위해(128)

 

제일 가르침부터 제팔 가르침까지는 영양의 효용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제구 가르침과 제십 가르침에서는 전쟁 상황에서 하는 공동 취사는 "국가를 위해"라고 덧붙여 강조한다.

구체적인 사례로 치바현을 살펴보자. 치바현 농회農会 회의실에서는 1939년 7월에 "농업 협동 작업과 농번 탁아소 및 공동 취사"에 관한 연구회가 개최되었다. 그곳에 출석한 것은 현 농회의 간사와 기사, 현청의 농무과와 위생과의 직원, 그리고 치바현 안 9개 마을의 농가 조합장이나, 농사 실행조합장 들이었다. 그리고 이 연구회의 기록은 제국 농회가 정리해 간행했다.(129) 계속해서 제국 농회는 치바현 농회에 "공동 작업·공동 취사·농번 탁아소 실시에 수반한 농촌 노동력 사정 조사"의 실시를 위탁했다.(130) 그 목적은 "중일 전쟁 발발 이후 농촌의 노동력은 차츰 감소해, 종래 노동력 과잉이라 이야기되던 농촌은 거꾸로 노동력 부족의 사태에 안이했다. 농업 노동력의 부족은 농업 생산 확보에 치명적 영향을 미친다. 노동력 부족에 대응해 계통 농회가 공동 작업의 전국적 보급을 도모함과 함께, 그 실태의 객관적 파악에 입각해 적절한 지도통제를 가했던 것도 오로지 노동력 부족 대책의 완벽을 기하기 위함"이었다.(131) 이리하여 농촌의 뱃구레는 총 뒤의 노동 능률 증진을 위하여, 제국 농회와 현 농회, 농사 실행조합, 농가라는 계통 안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이 장에서는 공장 취사에서 시작해 유곽, 회사, 상점 등의 공동 취사를 살펴보았다. 그곳에서는 식사와 취사의 합리화라는 이외에도 다양한 목적이 있었다. 즉, 공장에서는 여공관의 전환과 유곽에서는 인권의 획득과 회사에서는 평등주의의 주장과 밀접히 관계되면서 공동 취사가 실시되었다. 한편, 오사카의 상업 지역에서는 자유롭고 활달한 개인주의 안에서 공동 취사가 성립하지 않았던 점도 밝히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계속 확대되었던 농촌의 공동 취사 동향에서 보이는 건 공동화에 의해 실현하는 영양 섭취의 향상과 취사의 합리화가 최종적으로는 '국가'와 '전쟁'에 공헌하게 한다는 매우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과학과 국가가 사람들의 뱃구레에 관여하게 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공동 취사에 의해 실현하는 뱃구레의 연대는 사람들이 인간으로서 받아야 할 존엄을 쟁취해 나아가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때로는 사람들을 통제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었다는 측면에도 유의해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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