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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농업 전반

뱃구레의 근대 -제2장 식당에서 보는 사람들의 관계

by 雜s 2026. 3. 1.

제2장 식당에서 보는 사람들의 관계 -먹을거리를 둘러싼 정치와 실천

 

 

 

 

1. 도시 노동자 문제와 민영 식당

 

오사카 자강관自彊館의 간이식당

오사카시가 주목했다는 민영 식당의 사업주는 오사카 자강관이었다. 이 관은 1912년 6월 25일에 니시나리군西成郡 이마미야무라今宮村에 사립 숙박 구호 및 직업 소개부를 병설한 일자리 알선 사업의 시설로 창설되었다.(1) 식당 사업은 '제1 간이식당'으로서 1918년부터 시작된다(그림 2-1). 

그림 2-1 오사카 자강관의 간이식당 외관

출처: 사회복지법인 오사카 자강관 소장

 

 

오사카는 근세부터 이미 지방에서 돈을 벌러 오는 사람이 잇달아 모여드는 지역이었다. 그 때문에 봉행소奉行所는 그들을 가능하면 한 지역 안에 거주하게 하는 정책을 취해, 당시 소우에몬쵸우宗右衛門町부터 나가쵸우長町에 이르는 일대에는 근세 말기까지에 많은 여인숙이 모이게 되었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자, 도시 개발이나 치안의 이유 때문에 시내에서 여인숙의 영업은 제한하게 되고, 당시 아직 오사카 시역에는 없었던 니시나리군 이마미야무라의 카마가사키釜ヶ崎 주변으로 여인숙의 관계자, 이용자, 또는 노숙생활자, 그리고 메이지 36년(1903)의 내국 박람회의 개최에 맞추어서 퇴거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카마가사키(현 아이린あいりん 지역)로 이주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에 의해 근대 이후 이 지역에는 많은 도시 노동자나 빈곤자가 모이고, 그들은 공적인 부조가 미치지 못한 메이지 시기에 열악한 생활 환경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1911년 내무성의 일행이 카마가사키를 방문하게 되는데, 그건 이 상황을 국가나 오사카부, 오사카시가 도시 문제의 일환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찰의 일행 중에는 사법성을 막 퇴직한 오가와 시게지로우小河滋次郎가 있었다.(2) 이때에 안내역을 맡았던 것이 오사카 자강관의 창설자 나카무라 미츠노리中村三徳이다.

당시 오사카부 경찰부의 보안과장이었던 나카무라는 이 시찰의 며칠 뒤에 경찰부장으로부터 "위생적이고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시설"의 건설을 타진 받아, 이후 자금 조달, 건물의 건설, 운영의 나서게 된다.(3)

부지 946평, 그 가운데 340평에 2층 건물 2동을 세우고, 취사장, 수예실, 창고, 사무소, 판매소, 사택, 변소 등을 설치한 이 관의 정원은 150명이었다. 이불과 목욕까지 숙박료는 1박 5전, 식사는 밥 3전 5리, 반찬 2전, 된장국 1전, 절임 5리였다. 3세 이상 12세 미만의 숙박료는 반액, 3세 미만은 무료였다.(4) 창립 당초, 오사카 자강관의 정문 옆에는 다음 같은 것이 적힌 간판이 걸려 있었다. 

 

1. 이 관은 무신戊申 조서의 주지를 본으로 하여 생긴 것입니다
1. 이 관은 곤궁한 사람을 위하여 설립된 여인숙입니다
1. 이 관은 염가이고 청결하며 편리하여 목적을 세우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곳입니다
1. 이 관은 정신이 선한 사람을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도와 드립니다
1. 관 내에서는 음식 및 기타 일용품 일절 이익을 취하지 않고서 판매하는 방법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1. 머물고자 하는 사람은 접수처에서 상세히 문의하시고 조금도 주저하지 마세요

 

평판은 퍼지고, 개관하고 1년 뒤에는 1일 평균 120명이 이용하기까지 되었다. 

1917년부터 이듬해에 걸쳐서, 1차 세계대전 등의 영향도 있어서 수입품이 감소하고, 국내 물자의 부족 때문에 물가가 폭등했다. 다이쇼우 7년(1918)에 토야마富山에서 쌀 소동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오사카 자강관에서는 쌀이나 간장, 숯 등을 염가로 판매하는 '실비염매소実費廉売所'와 '분배소'를 개설하고, 시내 8개 소에서 최장 9개월에 걸쳐 판매했다. 염매소에는 연일 장사진이 생기는 상태를 보고 오사카시도 공설 시장을 4개월 개설했다. 

나아가 오사카 자강관에서는 1918년 6월 6일에, 저가로 식사할 수 있는 '제1 간이식당'을 오사카시 미나미구南区 닛폰바시日本橋 스지히가시筋東 잇초우메一丁目에 개설했다. 102평의 토지는 지역의 유력자, 이노우에 쥬우조우井上重造에게서 무상으로 빌릴 수 있었다. 이 식당은 71평으로, 객석이 100석이며, 한 끼 10전으로 무제한으로 먹었다. 여기에도 장사진이 생겨, 하루 이용자가 1000명을 넘는 날도 있었다고 한다. 다시 한 번 그림 2-1로 돌아가, 입구 상부에 걸린 간판에 눈을 집중해 보면, "누구든지 들어오세요"라 하고, 그 왼쪽 끝에는 신사복과 모자의 신사가, 그리고 오른쪽 끝에는 인력거꾼이 그려져 있다. 이 대조적인 풍모, 계층의 사람들이 동석할 수 있는 장이라는 점이 이 작은 식당의 이상이었다.

이 식당은 급히 지은 임시 건물이었지만, 말쑥한 분위기 좋은 '민중적 식당'이었다.(5) 입구에는 푸르른 화분이 늘어서 있고, 손님은 입구의 손 세정대에서 땀과 먼지로 더러운 얼굴을 씻고서 한 끼 10전의 식권을 구매한다. 아담한 화병의 꽃이 놓여 있는 식탁에 이르면, 정식의 반찬이 운반되어 온다. 식당 안에는 축음기에서 음악도 흘러 나왔다. 그림 2-2에서는 당시의 활기가 들려오는 듯하다. 또한 그림 2-3에서는 식당을 위한 대규모 취사장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취사 일꾼은 모두 남성이었던 듯하다. 

 

그림 2-2 오사카 자강관의 간이식당 내관

 

그림 2-3 오사카 자강관의 취사장

 

 

"처음 이를 기획할 때, 전국에 아직 유사한 사례가 없고, 따라서 참고 자료가 부족하여, 개업 후의 성적은 바야흐로 발흥하려 하는 사회사업의 앞날에 지대한 관계를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며, 요금의 균일, 식재료의 신선, 가격의 저렴, 피고용인의 선발, 기물 및 조리의 위생적이어야 할 것 등에 가장 심혈을 기울인다"고 하듯이, 전국에서 가장 빠른 시도였던 이 간이식당의 실천은 급속히 팽창하는 도시가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를 완화하기 위한 사회사업의 시작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식食과 직職

오사카 자강관의 목적은 그날 먹는 것에 곤란한 사람들의 뱃구레를 '식'에 의해 채운다는 것만이 아니라, 앞으로 앞날을 살아가기 위한 '직'에 도달할 입구를 제공한다는 것에도 있었다. 그건 직업 소개와 직업 알선 사업의 두 가지 실천에 의해 진행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직업 알선 사업으로, 오사카시로부터 12대의 미싱을 불하 받아서 여성을 대상으로 봉제 작업을 시작하게 했다. 또한, 남성에게는 하루 5전의 사용료로 짐수레의 임대 사업을 시작했다. 이건 매우 호평을 받아, 다이쇼우 8년(1919)에 이 사업이 폐지되기까지 약 2만 6000명이 이용했다.

오사카 자강관은 2018년으로 창립 105년을 맞이한다. 구호, 장해자 지원, 고령자 개호, 개호 예방 지원, 지역 개괄 지원 등 운영하는 사업은 오늘날의 요청에 부응하여 여러 갈래에 이르는 것이 '자강불식'이란 정신은 변함없이 계승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관의 급식 사업에 오랫동안 종사해 온 직원의 말에 의하면,(7) "의식주 가운데 식의 제공은 매일, 매끼의 승부로, 이타적이면서 안정을 요구하는 직접 처우의 최전선"이다. 그 최전선에서 자강관의 식당에서는 지금까지 두 가지를 중요시했다. 하나는 대면으로 보기 좋게 담기이다. 밥을 누군가에게 눈 앞에서 직접 떠 주고, 더 먹고 싶을 때에는 대면으로 그걸 부탁하는 행위 안에는 먹을거리를 통한 타인과의 관계가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식판이 아니라 접시로, 따뜻한 것은 따뜻하게, 차가운 건 차갑게, 튀긴 것은 갓 튀겨서 제공한다는 것이다. 자짓하면 합리화가 진행되기 쉬운 집단 급식의 장이기 때문에, 식사는 단순한 영양 보급이 아니라 '문화'라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걸 식당의 식사를 통해 이용자가 실감할 수 있도록 한다는 실천이다.

오사카 자강관에서 먹을거리는 사회와 이어지는 하나의 창이었다. 식당이나 식사가 지닌 이러한 다면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오사카 자강관 같은 민영 복지시설만이 아니라, 다음 절 이후에서 행정의 대응도 정리한 다음 다시 고려해 보고자 한다.      

 

 

 

 

 

2. 뱃구레에 대한 행정의 관여

 

공영 식당의 탄생

공영으로 식당을 설립하는 것은 오사카시만이 아니라 당시의 도시부에서는 똑같이 검토되는 일이었다. 도쿄시 사회복지과의 식당 계장이 정리한 <공익 식당의 경영 -겸 도쿄시 설립 식당 사업 보고(公益食堂の経営ー兼東京市設食堂事業報告)>(8)을 바탕으로 그 연혁을 좇아가 보자.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물가 상승에 의해 대중의 생활난이 뚜렷해져, 1918년 7월에는 쌀값이 1가마니 30엔을 넘었다. 각지의 거래는 정지하고, 같은 해 8월에는 더욱 폭등한 결과, 쌀 소동이 발발했단 것은 이미 기술한 바이다. 이 쌀값 폭등에 대한 사회정책적 시설로, 각 도시에서는 공익 시장과 공익 식당의 설치가 계획되기에 이르렀다. 다이쇼우 7년(1918) 1월에, 도쿄시내에서 평민식당을 설치한 것이 그 시작이며, 이어서 오사카, 고베 등의 여러 도시에서도 차례로 설치되었다. 다이쇼우 8년(1919) 11월의 야마가타山形에서 촬영된 간이식당의 사진이 있다(그림 2-4). "혼마치本町 청년 간이식당"이란 이름으로부터 읍의 청년단이 운영 주체가 되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림 2-4 야마가타현 혼마치 청년 간이식당(사진 그림엽서, 1919년 11월)

출처: 필자 소장.

 

경제 생활의 절박은 저액소득자의 식사를 곤란하게 하고, 옥외 근무자는 시중의 음식점을 이용해 영양의 보전을 도모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빈곤과 질병은 인생의 2대 불행으로, 그들은 서로 관련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 해결책으로 종래의 간이식당의 관념을 발전시킨 '공익 보건 식당'의 경영이 필요하다는 것이 식당 계장의 설명이다. 이 식당에서는 일반 음식점에서 있는 주위의 떠들썩함, 주류의 권유, 팁의 암묵적 요구에 번거로울 일이 없다는 주장으로부터, 거꾸로 앞에 기술한 한그릇식당의 실태도 유추할 수 있다.

아무튼 공영 식당의 탄생은 시민의 뱃구레에 행정이 적극적으로 관여하려는 움직임이었단 점에서, 한그릇식당과는 달랐다.

시대가 조금 앞서지만, 1927년 6대도시의 시영 사회사업에 관한 조사(9)에서는 간이식당의 수가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오사카시에는 위탁경영 5, 도쿄시에는 직영 5, 위탁 경영 4, 나고야시에는 위탁 경영 2, 교토시에는 위탁 경영 2, 고베시에는 직영 6, 요코하마시에는 위탁 경영 2의 간이식당이 있었다.  

도쿄시의 간이식당은 도쿄 임시 구제회의 기부금에 의해 다이쇼우 8년(1919)에 카구라자카神楽坂, 우에노上野에 설치되고, 다음으로 미츠비시三菱 합자회사의 기부금에 의해 니혼바시日本橋, 칸다바시神田橋, 타이헤이쵸우太平町, 샤미센보리三味線堀의 4개소에 개업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1923년의 대지진을 만나 카구라자카 식당을 제외하고 모든 식당이 폐업했다. 

그 뒤, 진재선후회震災善後会에게서 지정 기부금을 받아, 부흥 사업으로 니혼바시 외 9개소에 임시 식당이 설치되어 한때는 이용자가 쇄도했는데, 개축 기타 사정에 의해 차례로 폐쇄되고, 내무성 교부금에 의한 식당 5개소(마나고마치真砂町、사루에猿江、오오즈카大塚、시바우라芝浦、마루노우치丸之内), 제국 수도 부흥 계획에 의한 식당 10개소(샤미센보리三味線堀、칸다神田、야나지마柳島、쿠단九段、미도리마치緑町、우에노上野、신쥬쿠新宿、카야바쵸우茅場町、타쵸우田町、후카가와深川)의 준공을 보았다.(10)

오사카시에서는 1918년 9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사이와이쵸우幸町, 텐마天満, 쿠죠우九條, 이마미야今宮, 칫코우築港, 니시노다西野田의 6개소에 간이식당이 설치되었다. 일본 요리업에 오랜 세월 경험을 지닌 시내의 업자를 지정해 식사의 공급을 청부하는 형식으로 시작했다.(11) 사설로는 에비스마치恵美須町 히노데야日の出屋, 카미후쿠시마上福島 후지富士, 시청 청사 지하실 식당이 있었다.(12)

 

 

 

 

장내에 한가득인 식기의 울림

1921년 가을, 어느 저녁 무렵, 부슬비가 내리는 도심의 어느 간이식당 앞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어제 저녁, 쇼우헤이바시昌平橋 옆 간이식당의 식사 시간인 5시 개장 1시간이나 전부터 노동자, 직공, 상점원, 학생, 양복 차림 등 거의 1000명 가까운 손님이 비에 젖은 채 밀지 마, 밀지 마 하며 입구에 빽빽이 서 있었다. 그때 개장 신호의 종이 딸랑 하고 한번 울리자마자 양쪽 입구로 몰려든 인파는 마치 성난 파도처럼 그 비좁은 장내로 쇄도하여 수백 개 자리가 순식간에 꽉 들어찬 초만원을 이루었다. 늦게 들어와 봉당에 서서 체념한 얼굴들의 표정은 보기에 참으로 처량하고 장내에 한가득인 식기의 울림 안에서 다른 사람이 게걸스레 먹는 모습을 침만 삼키며 기다려야 했다. 여기의 한 끼는 10전. 반찬으로는 1홉 5작 남짓한 밥을 담은 밥그릇에 생오징어와 토란 조림, 우엉채 볶음이 곁들여져 나왔다. 그것이 6시 무렵의 혼잡함이라면 차라리 섬뜩할 정도였다. 한때는 그다지 붐비지 않았던 이 식당이 최근 다시 이렇게 대성황을 이루며 매일 매진·퇴장 조치를 반복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최근의 쌀값이나 물가 상승의 영향, 긴 비에 갇혀 있던 야외 노동자의  얇아진 지갑 등이 뚜렷하게 엿보인다.(13) 

 

 

 

 

밀지 마, 밀지 마 하는 소리, 개장 알림 종소리, 식당에 들어가는 성난 파도와 꽉 들어찬 만원 인파의 열기, 장내에 한가득인 식기의 울림, 먹을 걸 게걸스레 먹는 소리와 침 삼키며 기다리는 모습, 식당의 밖과 안의 혼잡. 이 신문기사를 읽으면 눈앞에 그 정경이 펼쳐지고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1918년에 시작된 도쿄시의 식당 정책은 1921년에 이르러 매우 성황이었다고 보인다. 같은 해는 불황으로 실업자가 문제가 되었던 시기임과 동시에 쌀값의 상승과 물가고가 그에 더해진 상황에서 성황을 이룬 데 주시할 필요가 있다. 식당 주임과의 인터뷰를 게재한 이 기사에 의하면, 하루의 손님은 대략 3000명 정도였던 바, 최근은 3200, 3300으로 증가하고, 급기야 3828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다시 약간 기사를 읽어 보도록 하자. 

 

한편 우에노上野 쿠루마자카車坂의 시설市設 공중식당도 요즘 비슷하게 입장자 증가로 하루 3000명을 밑돌지 않는다고 한다. 이곳은 아침이 10전, 점심이 15전, 저녁이 15전으로 어제 저녁은 1홉  5작의 밥에 고등어 조림과 후쿠진福神 절임(역주; 무, 가지, 작두콩, 연근, 오이, 차조기 열매, 표고버섯 등 7가지 채소를 곱게 다진 뒤 간장·설탕·미린으로 절인 것)이라는 부식이 있었다. 조리는 '다루마だるま'의 청부로, 쇼우헤이바시처럼 직영은 아니다. 우시고메카구라자카牛込神楽坂 근처의 요코테라마치横寺町에도 시설 식당이 있어, 이곳은 손님의 70% 정도가 학생으로 다른 곳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있는 쿠루마자카와 마찬가지로 이이즈카 하루노스케飯塚春之助의 청부로, 어제 저녁은 다랑어회덮밥(鉄火丼)에 콩자반이 나왔다. "요즘 급격히 입장자가 늘어 하루 4000명 가까이 들어옵니다"라고 사무원이 말한다. 쇼우헤이바시와 비교하면 쿠루마자카와 요코테라마치 모두 시설은 건물도 크고 깨끗한데도 손님이 적고, 그건 식비도 비싸지만 차라리 직영과 청부에 따라 손님 접대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1921년 무렵은 어느 시영 식당도 성황이었던 듯하다. 시설에서도 직영과 청부의 차이, 입지하는 장소의 차이에 의해 손님 수나 고객층에 차이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후카가와深川 식당과 후카가와 밥집

또 다른 간이 식당에 들어가 보자. 여기는 도쿄시의 후카가와 식당이다(그림 2‑5). 입구의 문을 열면 물빛, 분홍색, 초록색, 흰색 등 다채롭고 섬세한 타일로 마감된 계단이 보인다(그림 2‑6). 당시로서는 세련되고 새로운 건축 자재를 사용한 현대적인 건물이었음에 틀림없다. 작은 창 앞에 줄을 서서 식권을 산다. 타일로 마감된 계단은 부드럽게 곡선을 이루며 2층으로 이어진다. 2층은 한그릇식당과 비슷한 저렴한 식사를 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에 비해 1층은 그보다 조금 더 고급스러운 기호품·음료·과자·과일을 즐길 수 있는 장소였다. 『도쿄 100년사(東京百年史)』 제5권의 「도쿄시설식당 조례시행세칙(東京市設食堂条例施行細則)」에 의하면, 당시의 메뉴를 알 수 있다.(14)

 

 

그림 2-5 후카카와 모던관(옛 후카가와 식당)의 외관

출처: 2015년 3월 필자 촬영

 

그림 2-6 후카가와 식당의 계단. 현재는 후카가와 도쿄 모던관으로 당시의 면모를 남기고 있다.

출처: 위와 같음

 

 

정식은 아침의 갑 10전, 을 8전, 점심과 저녁은 각각 15전, 10전이다. 기호품은 일양식 런치류 40전부터 50전, 닭고기계란덮밥 30전, 튀김덮밥과 햄라이스 20전, 카레라이스와 고기우동류 15전, 샐러드와 튀김 15전, 빵과 밥(많이) 7전, 보통 양의 우동과 밥(조금) 5전, 채소 절임(상) 3전, (하) 2전이다. 나아가 음료 과자 및 과일로는 케이크류 10전, 카스테라와 소다수류 7전, 우유와 커피류 5전, 생과자 싯가, 녹차 2전으로 되어 있다. 한그릇식당보다도 약간 비싸다. 게다가 한그릇식당과 달리 차는 무제한으로 마실 수 없는 듯하다. 메뉴는 일양 양방이 갖추어져 있다. 

예전에 이 식당을 이용했던 사람의 이야기로, 보통은 2층을 이용하지만 1층이 궁금해 어쩔 수 없이 1층에 가보자고 생각하면서 계단 중간에 앉아 있었다는 에피소드가 남아 있다.(15) 하나의 식당 안에 일상의 식사와 동경의 식사라는 두 가지 세계가 계단을 달리 하여 공존하는 흥미로운 건물이다.

타키자와 쥰瀧澤潤의 <도쿄시설 식당의 설치 -도쿄시 후카가와 식당을 중심으로(東京市設食堂の設置-東京市深川食堂を中心に)>에 의하면, 후카가와 식당은 쇼와 7년(1932) 설립된다. 다이쇼우 시기에 시작된 도쿄 시영 식당의 설치라는 흐름 속에서도 최후의 시설에 자리잡고 있다. 좌석 수는 98석이었다.(16)

그런데 후카가와라고 하면 '후카가와 밥'이 유명한데, 이건 바로 한그릇식당의 일품이었다. 마츠바라 이와고로우松原岩五郎의 「새카만 도쿄(最暗黒の東京)」에는 다음과 같다.

 

이는 개랑조개의 살에 파를 썰어 넣고 삶아 익히고, 손님이 오면 흰밥을 그릇에 담고서 그 위에 올려 내는 즉석요리임. 한 그릇 똑같이 1전 5리, 평범한 사람은 비릿내가 나서 먹기 힘들다고 할 정도였지만 그의 사회에서는 겨울날 가장 간이한 음식점으로 크게 번창함.(17)

 

메이지 시기에는 특히 인력거꾼들이 들러서,

 

이마 위의 땀을 닦으면서 여기에 들러서 한 눈은 왕래를 바라보고 한 눈은 식기를 쳐다보면서 젓가락과 밥그릇을 잡고서 사방을 살피며 손님에 주의하고, 좋은 기회가 있으면 식사 중에도 놓치지 않으려고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황급히 먹어치우고서 젓가락을 놓고 식도가 아직 정리되지도 않았는데 발길은 이미 돌아가 손님을 쫓아가는 일이(18)

 

있었다고 한다. 인력거꾼들이 덮밥을 급히 먹는 이 속도감도 또한, 한그릇식당의 특징이다. 다이쇼우 시기에 들어와도 후카가와에는 아마 이와 같은 한그릇식당이 여러 채나 있었을 텐데, 그에 대해 새롭게 생긴 공영 후카가와 식당은 그들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서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는 않았을지 상상한다. 

 

 

 

 

식당과 부속 시설의 다기능성

식당이라는 공간은 음식을 먹는 이외의 장이기도 했다. 숙박소, 직업 소개소, 인사 상담소, 이발소 등이다.(19) 정확히 말하면, 간이 숙박 시설이 다기능을 갖추고 거기에 식당이 부속되어 있던 상황이다. 숙박소에서는 정신 수양, 저축 장려, 위생 사상 등의 계발을 목적으로 한 강연회가 열리기도 했다. 도쿄에는 시영 숙박소가 14개소 있고, 그 가운데 4개소는 무료였다. 이들 숙박객에게는 무료 숙박소의 전부, 유료 숙박소 8개소에 유료 식당을 설치해 두었다. 앞에 오사카시 감독을 받으며 시작된 ‘오사카 자강관’은 사립 시설이지만, 여기에도 숙소, 취사장, 식당, 사무소, 목욕탕 등이 있어, 주로 항만 노동자의 공동 숙소로 운영되었다.(20) 조금 전으로 돌아가 그림 2‑4를 보면, 야마가타의 간이식당에서 품평회를 개최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모다 쥰下田淳의 『선술집의 세계사(居酒屋の世界史)』에서는, 유럽에서는 선술집이 다기능을 갖는 것에 비해 일본에서는 그 다기능이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21) 이에 대해 필자는 일본에서는 선술집이라기보다 한그릇식당이나 식당이 그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식당도 술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는 경우에 따라 선술집이 될 수 있다. 어쨌든, 음식을 매개로 인간 관계가 형성되는 장소라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따라서 식당에 발을 옮기는 사람들 중에는 오늘의 뱃구레를 채우기 위한 목적뿐만 아니라, 내일부터의 뱃구레를 위해 일을 찾고, 비와 이슬을 피하며,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상의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도쿄시 사회국이 1929년에 시내의 여인숙 생활자와 각 시설 숙박소의 숙박인들에게 쓰게 한 일기가 남아 있는데,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27세, 10월 28일, 오전 5시경부터 가랑비. 하루 종일 침상. 오늘 비가 오는 상황에서 일에 망한 사람들 중에는 집들의 처마 아래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원망하듯 바라보면서, 지인에게 5전 빌려주고 10전 빌려줘서 점심을 먹지 못한다는 등이라 비통한 말이 여러 곳에서 들려오는 때, 참으로 자유 노동자의 비참한 상황이 실제로 드러난다. 며칠간 좋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일은 여름철의 절반밖에 안 되는데, 오늘 비가 오니 참으로 일반 노동자의 지갑이 텅 비는 것은 당연한 이유이다.

 

40세, 10월 27일, 토목공. 한 면으로 보면 일종의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무릇 육상의 일은  작은 건 좁은 길부터 크게는 철도 같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처음은 토목공의 힘으로 기초는 성립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는 이를 노가다라며 가벼이 여기고, 우리 자신도 스스로를 비하하는 건 어떤 일인가.(22) 

 

날품팔이 노동자 자신이 남긴 이 기록은 단편적이지만 그들이 처했던 상황과 심정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실업과 구제의 근대사(失業と救済の近代史)』를 저술한 카세 카즈토시加瀬和俊에 따르면, 일본은 1880년대 후반부터 근대 공업의 발전기에 들어가, 1900년대에 자본주의 국가로 이행해 가고 있었다. 그곳에는 취업자로는 아직 농민이 많았다고는 하나, 경제를 움직이는 중심적 산업 분야는 가족 경영에 의한 농업 부문으로부터 기업 경영에 의한 공업 부문으로 전환되었다.(23) 그 결과, 농가, 가족적 영세 상공업 세대의 경영주 이외의 형제와 자녀들은 피고용인이 되어 도시로 유입될 뿐만 아니라 세대를 이루게 되었다. 이리하여 인구는 증가하고, 일자리를 찾는 사람도 늘어나는 한편, 실업 문제가 발생하는 구조가 확대되어 갔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실업이나 날품팔이라는 불안정한 상황과 사회의 결절점이 되던 장소, 그 하나가 다기능성을 갖춘 식당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3. 시영 식당과 그 뒤

 

시영 식당의 폐쇄와 사회 정책에 대한 비판

쌀 소동에 대한 대응, 칸토우 대지진의 부흥 사업이란 의미를 부여하면서 한때는 성황이었던 시영 식당이었지만, 그 뒤는 이용자가 감소해 폐쇄가 잇달았다. 도쿄시에서 1920년부터 1934년의 식당 이용자 총수와 하루 1개소 평균 이용자 수의 추이를 그림 2-7, 그림 2-8에 나타냈다. 이용자 총수는 1928년, 평균 이용자 수는 1922년을 정점으로 이후 감소의 일로를 걷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도쿄시는 1934년에 「시설 식당 경영책에 관한 조사 -부록, 도쿄 시설 식당 개혁 의견(市設食堂経営策に関する調査 -附、東京市設食堂改革意見)』(24)을 간행했다. 

그림 2-7 시설 식당 수와 이용자 수의 추이(도쿄시)

출처: 도쿄시 사회국社会局 편編 「市設食堂経営策に関する調査 一附,東京市設食堂改革意見』 東京市 社会局, 1936년, 1-3쪽에서 작성.

 

그림 2-8 1일 1개소당 평균 이용자 수와 매상의 추이(도쿄시)

출처: 위와 같음.

 

 

"우리나라의 대도시에서 시설 식당의 현상"이란 문장은 쌀 소동을 계기로 시작된 당초의 상황과 오늘날의 상황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기술한다. 특히 교토시는 식당을 서서히 폐쇄하고, 조만간 모두를 폐쇄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었다. 이것을 받아서 도쿄시에서도 "이것을 존속해야 할지, 장차 또 폐지해야 할지, 존속한다고 하면 어떻게 이걸 전환해야 할지"라는 기로에 서 있었다. 도쿄시에 의한 이 조사는 도쿄시, 오사카시, 교토시, 고베시, 요코하마시, 나고야시의 여섯 도시를 대상으로 하며, 어느 도시나 공통의 상황이 보인다고 정리할 수 있다. 

겨우 몇 년 뒤의 시영 식당의 쇠퇴는 쌀값 상승에 대하여 대처 요법적으로 저렴한 먹을거리의 장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이며 지속적인 해결은 되지 않았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1924년에 『시사신보時事新報』에 실렸던 다음의 신문 기사는 사회 정책이 실시되는 것에 먼저 평가를 부여한 다음, 사회 정책비를 포함한 국가 사업비의 출처, 즉 세수의 방식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다.  

 

국가 사회를 유지하는 무거운 짐의 대부분은 강자 부자가 부담하고, 약자 빈자는 매우 경미한 부분을 부담하게 하는 걸 원칙으로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현재의 조세는 총액의 10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 소득세로 부자의 부담이 누가된 것을 20분의 1 안팎의 해관세에 사치품과 기타에 약간 경중의 과세 차를 설치한 것 외에는, 대체로 빈부 모두 동률의 조세를 부담하는 제도이다. ...... 노동자가 저녁 무렵 선술집을 들어가 기울이는 한 잔의 술도, 백만장자의 손에 든 술과 동률의 세금을 부과하여......, 그런데 국고의 세입 20억 엔 가운데 겨우 소득세와 수입세의 합계 3억 3000만 엔을 제한 나머지 대부분은 우선 빈부 동률의 과세로 어디에서 사회 정책의 희미한 빛이나 볼 수 있을까?(25)

 

즉, 납세 제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빈부의 차는 매우기는 커녕 넓어지기만 하고, 자칫하면 빈민 계급의 납세가 일부 지불되어 공영 식당이 운영된다는 모순에 빠진다고 이 기사는 설명한다. 덧붙여, 다음과 같이도 말한다. 

 

한 채의 공중 식당이 생기면, 부근에 있는 다수 오뎅집, 일품요릿집, 소바집이 망하거나 하여 실업자의 무리에 들어가는 걸 어떻게 할 것인가? 직업 소개소의 밖에 몇 백 채의 소개업자가 폐업을 강요받게 될지 모른다. 공중 목욕탕, 공설 시장 모두 마찬가지로, 목욕탕집, 채소가게, 쌀집, 땔감집 및 가족 종업원의 수천 수만 명은 모두 입에 풀칠하는 길을 빼앗겨, 암흑계로 떨어질 것이다. 

 

실제로 어느 정도 폐업했는지는 명확하진 않지만, 한 채의 공영 식당이 생김으로써 부근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았던 건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공영 식당이 도리어 민업民業, 즉 일반 음식점 경영을 압박한다는 여론도 점점 커졌다는 것을 간과할 수는 없다.(26)

이러한 여론은 행정이 사람들의 먹을거리, 뱃구레에 관여하는 것은 일시적인 구제는 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반드시 발본적인 사회 변혁으로는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 지적한다. 먹을거리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뱃구레 걱정을 해야 하는 사람들의 이해를 사회 정책에 반영시키기 위한 보통 선거의 실시와 조세 제도의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은 중요하며, 현대의 사회 정책을 고려하는 데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민업 압박을 배경으로 공영 식당이 쇠퇴했다고 설명하기보다 오히려, 실제로는 사람들의 외식 이용률이 계속 높아져 민업에 의한 먹을거리의 공급이 증가해 사람들이 그걸 선택한 결과로 보는 쪽이 현실적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에게 선택의 여지를 줄 정도로, 공영 식당만이 아니라 민영 식당을 포함한 식사의 장이 확대되기 시작했다고 파악할 수 있다.

 

 

 

 

도쿄 시설 식당 개혁 의견  

<도쿄 시설 식당 개혁 의견(東京市設食堂改革意見)>으로는 최종적으로 정책의 재음미가 주장되었다. 사회국 복리과가 관리하는 시영 식당은 위생 시험소 영양조사부나 교육국 체육과가 관여하는 학교 급식과 연계, 통일해 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 주지이다. 또한, 학교나 시립 병원의 취사장도 포함해 시영 식당으로서, 더욱 널리 사회 개량 사업의 일환으로 자리매김하여 식당을 경영해 가야 한다고도 한다. "앞으로 경영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은 시민의 일상생활 속에서 식사 취사의 사회화, 과학화, 아울러 기계화 관념의 채택과 그 실행에 있다고 생각한다."(27) 그 때문에 참고로 해야 할 건, 이 무렵 설립이 잇달았던 "영양식 배급소"의 설비와 사업 내용이라고 이 의견서를 정리한 요시카와吉川라는 인물은 사견을 기술한다. 

 

 

 

 

협동조합에 의한 식당·취사장 경영 -공동 취반사共同炊飯社

이와 같은 상황을 받아서 공영 식당 이외의 방법을 모색하기 위하여, 도쿄시는 시점을 넓혀서 구미의 레스토랑, 독일의 공중 급식소를 접하고, 일본 국내에서 기타 움직임에 주목한다. 곧 협동조합이나 공제조합에 의한 식당, 또는 공동 취사장의 운영이다. 

예를 들면 도쿄시의 한 예로 '공동 취반사'가 소개되어 있다. 이건 카가와 토요히코賀川豊彦의 지도를 받아 1933년 3월에 업무를 개시한 취사장이다. 카가와는 다이쇼우, 쇼와 시기의 기독교 사회운동가로, 전쟁 이전 일본의 노동운동, 농민운동, 생협조합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다. 1920년에 캬이죠우샤改造社에서 출판된 『사선을 넘어서(死線を越えて)』(28)은 고베의 빈민가에 계속 살며 구빈 활동을 행한 그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했다. 

공동 취반사는 그가 경영하는 산업 청년회의 뒷쪽에 있는 9평의 건물에서 하루 배급 취반 백미는 3가마니 정도, 종업원은 3명 정도의 소규모였다. 취반이 주이지만, 반찬도 1종류 팔고 있었다. 5전부터 판매하는데, 때로는 3전인 경우도 있었다. 이용자의 60%는 조합원, 40%는 조합원 이외이다. 

5전, 3전으로 먹을거리를 구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이 취반사는 한그릇식당, 시영 식당에서조차도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설립되었다고 보아도 좋다. 게다가, 그러한 사람들이 실제로는 적지 않았다고 하는 상황이었다. 이들 사람들은 종교 단체나 공제회 등에 의한 사회사업단체가 경영하는 간이식당을 이용했다고 생각된다. 도쿄시에서 사회사업단체 경영 간이식당은 표 2-1에 보이는 대로이다. 표 안에서 볼 수 있는 후타바二葉 보육원이 경영하는 식당에서는 10전으로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5전의 식사도 제공했다고 한다.(29) 후타바 보육원에 대해서는 제7장에서 다시 한번 기술하고자 한다.

 

표 2-1 도쿄시 안의 사회사업단체 경영 간이식당

출처: 위와 같음, 46-47쪽 

 

 

 

 

 

 

 

4. '지역'사회사업과 실무가의 네트워크

먹을거리는 행정과 민간, 즉 관과 민 어느 한쪽에 떠맡기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보아 온 것은 실제로는 그 양자가 떨어져 살면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혼재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상황이었다. 사실 거기에는 관과 민을 연결하는 실무가 네트워크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 네트워크가 바로, 근대 일본의 사회사업 창설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가게 된다. 다음 장으로 연결하는 가교로서 이 장의 최후에 그 네트워크를 살펴보아 두고자 한다. 여기에서는 이 시기의 사회사업에 관련된 실무가를 망라적으로 다루기보다, '먹을거리'를 둘러싼 실천이라는 점에 집중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오가와 시게지로우小河滋次郎, 이시이 쥬우지石井十次, 오오하라 마고사부로우大原孫三郎, 테루오카 기토우暉峻義等, 미카미 코우키三上孝基, 하야시 요우죠우林曜三이란 6대 인물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은 입장도 활약한 지역도 다르지만, 거의 동시대에 태어나 먹을거리를 지역이나 사회의 문제로 생각했단 점에서 공통된다. 그 때문에 근대의 먹을거리 문제를 그리고자 하는 과정 속에서는 그들이 도처에 등장한다. 그리고 주의 깊게 보면 그들 사이에 느슨한, 그러나 확실한 네트워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가와 시게지로우의 감옥론과 식당론

이 책의 서장에서 이미 등장하는 오가와 시게지로우(1864~1925)는 감옥론과 식당론을 전개했다. 이 두 이론을 연결하는 것은 '감화 교육'을 중시하는 오가와의 형법 사상이다.

오가와는 「감옥학監獄学』(30) 등 근대 감옥 행정에 관한 전문서를 몇 권이나 저술했는데, 그 안에서  「옥사담獄事談」(31)이라는 한 책이 있다. 그건 그 자신이 방문한 해외의 감옥에서 겪은 견문을 정리한 것으로, 그 자체가 정말 흥미로운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그 안의 한 절, 미국은 뉴욕주의 엘미라 감옥에 대한 기술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 감옥을 감독했던 브록웨이는 감옥을 '사회로 복귀하는 것'을 준비하는 '리허빌리테이션rehabilitation'의 장이라 파악하고, 감옥 안에서 사업을 일으켜 수익을 얻는 중요성을 주장하고, 감옥의 자율적인 운영을 지향했다.(32) 그 하나의 사업으로 '식당 경영'이 있었다. 오가와는 그걸 사진을 첨부해 상세히 설명한다(그림 2-9, 그림 2-10). 덧붙여서 감옥 안의 식당에서는 형의 무거움에 따라서 식당의 이용에 관한 규제가 달랐다는 점에도 오가와는 주목한다. 즉, 감옥에서 식당이란 장은 식사를 하는 장이란 점만이 아니라, 자율적인 리허빌리테이션의 장이자 갱생을 위한 자숙의 장으로서도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림 2-9 감옥 안의 식당

출처: 오가와 시게지로우 번안 『꿈 같은 감옥 이야기(監獄夢物語)』 巖松堂, 1911년, 70쪽.

 

그림 2-10 감옥 안의 취사장

출처: 위와 같음.

 

 

오가와는 1911년, 감옥 관료를 그만두고나서 「꿈 같은 감옥 이야기(監獄夢物識)」(33)라는 일종의 유토피아적 작품을 번안한다. 이 책을 『감옥담獄事談』과 비교해 읽어 보면, 명확히 그 무대가 되었던 것은 이 엘미라 감옥이었단 것을 알 수 있다. 모두에는 "이 책, 구상이 기반한 곳은 미국의 리포마토리Reformatory 시스템, 즉 감화식 감옥 제도라고 칭하는 것이 바로 그것으로, 감화식 그것을 엘미라 시스템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 책 안에는 '요리집 영업'이란 항목이 마련되어, 감옥 개량의 한 구체적 방법이 '식당'의 운영에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여기에서는 취사계도, 배식계도, 그리고 손님도 수인으로, 그 모든 프로세스에 사회 복귀의 준비라는 의미가 부여되어 있었다. 감옥론과 식당론은 오가와의 안에서는 이와 같은 문맥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 뒤에 오가와는 감옥이란 장에 한하지 않고, 더욱 넓은 사회라는 장에서 감화를 모색하는 데에 중심을 옮겨 가게 된다. 그리고 미완의 「구빈요론救貧要論」을 쓰고, 「구제연구救済研究」지誌에 여러 사회 문제에 관한 논문을 기고하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1932년에 발표된 '간이식당론'(34)이었다. 

 

"먹는 것이 곧 인생이다(Was der Mensch isst, ist er)"라는 격언을 인용하며 시작되는 이 논문은 생존 조건으로 필수인 의식주 가운데 식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당시 오가와의 주장에 의해 작성되었다. 일반적으로는 "인간은 그가 먹는 것이다(Der Mensch ist, was er isst)"라는 이 독일의 격언은 "인간이란 그 먹는 바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먹을거리는 그 사회적 지위와 그를 둘러싼 문명·문화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는 의미이다.(35) 오가와는 이것을 실수로 썼을지도 모르지만, 독일에 유학해 독일어가 뛰어났던 그가 일부러 앞뒤의 단어를 바꾸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먹는 것은 살아가는 것이다"라는 더욱 단순한 진리를 확실히 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메시지로부터 이 논문은 시작하는 셈이 된다. 그건 '사회 문제는 위의 문제이다'라는 그의 말과도 합치하고, 먹는 것의 어려움을 어떻게든 해소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오가와의 사상을 뒷받침한다.

또한 그는 다시 "옛날에는 일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다고 하던 것이 지금인 즉슨 일해도 오히려 쉽게 영양을 충분히 채우는 식사를 얻을 수 없다"(36)고 하는 시대의 상황을 설명한다. 근면과 검약이 안정된 삶을 담보한다는 통속 도덕의 힘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사회의 변동이 찾아오고 있는 가운데, 일하더라도 여전히 충분히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사회를 오가와는 바라보고 있었다.

1932년이라 하면, 이미 적었듯이 공영 식당이 설치되기 시작한 무렵이다. 감옥 관료였던 오가와는 '범죄 기타 각종 반사회적 성분'의 요인으로 영양 불급, 노동 능력의 쇠퇴를 들며 "지금의 사회 문제가 되는 것도 궁극적인 바는 즉 위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문제 제기하고, "다수 민중의 위에 만족을 줄 수 있는지 하는 여부가 이른바 사회 정책의 골자가 되는 바이다"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독일의 피플 키친이나 쥬페Suppen 하우스, 영국의 커피 퍼블릭하우스, 그밖에 프랑스나 러시아의 간이식당을 소개하고, 일본 간이식당의 가능성을 설명한다.(37)   

각국의 간이식당을 총괄하여 이들의 실현을 본 것은 19세기 중반이며, 간이식당은 노동 문제의 발흥에 수반해 출현했다는 지적은 오가와가 당시 일본의 상황을 꽤 객관적으로 바라본 뒤에 식당론을 전개했단 것을 짐작케 한다. 이 의미에서 "간이식당이란 것은 자선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38)으로, 무료로 하지 않음으로써 이용자는 당당하게 고객으로 대우받을 권리를 가질 수 있으며, 그 장이 간이식당이라는 주장은 중요하다.

오가와 이외에도 감옥에서 이루어지는 감화의 중요성을 논설한 인물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토메오카 코우스케留岡幸助(1864~1934)라고 한다. 오카야마에서 태어난 토메오카는 18세 때 기독교의 세례를 받고, 도우시샤同志社 영학교 별과 신학과에 입학해 졸업한 뒤에 단바丹波 제1교회에 부임했다.(39) 그 뒤, 1894년에 홋카이도의 소라치空知 집치감集治監에서 교회사教誨師를 맡고 있던 중, 순시하러 온 오가와와 만난다. 토메오카는 소라치의 경험으로부터 감화 사업의 필요성을 알고, 1894~1896년 미국으로 유학하고, 감화 교육을 중심으로 사회 사업 전반을 연구했다.(40) 토메오카는 바로 엘미라 감옥에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귀국한 뒤 바로 「감화 사업의 발달(感化事業之発運)」(41)을 출간했다. 이 책의 서문은 토메오카의 청으로 오가와가 썼다. 나아가 토메오카는 1899년, 도쿄 스가모巣鴨에서 '가정 학교'라고 이름 지은 감화원을 설립했다. 오가와는 유럽에 머물며 토메오카로부터 「오카야마 고아원 연보(岡山孤児院年報)』를 송부 받고, 그 답신으로 고아원 사업과 감옥 사업은 공통성이 있다고 기술한다.(42) 이 오카야마 고아원을 운영했던 것은 이시이 쥬우지 石井十次(1865~1914)라는 인물이었는데, 아마 오카야마 출신인 토메오카는 거의 동세대였던 이시이를 알고 있으며, 오가와는 토메오카를 통해 이시이를 알게 되었다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오가와는 오오하라大原 사회문제연구소와도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오가와는 이 연구소 설립 이전부터 당시 쿠라시키倉敷 방적의 사장이었던 오오하라 마고사부로우大原孫三郎(1880~1943)과 면식이 있었다. 1918년, 오가와는 오오하라 마고사부로우가 주최한 쿠라시키 일요강연회에 초빙되어, 빈곤 방지 활동을 행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오오하라가 의견을 구했던 것이다.(43) 그 때문에 우선, 사회 문제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연구소의 설립이 급무라고 아베 이소우安倍機雄(도우시샤 대학, 와세다 대학 교수)와 함께 답한 것이 오가와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오오하라는 오래전부터 구상하고 있던 오카야마의 사회사업가 이시이를 기리는 '재단법인 이시이 기념 아이젠엔愛染園'을 오사카에 설립했다. 여기에서 오가와와 이시이는 다시 한 번 연결된다.

 

 

 

 

오사카의 세틀먼트 운동과 오오하라 사회문제 연구소

 이시이 쥬우지는 1865년에 미야자키현 코유군児湯郡에서 하급 무사의 집에서 태어났다. 의학에 뜻을 두고, 오카야마에서 공부해 대진의代診医로 부임한 곳에서 가난한 순례자들을 만났다. 그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이시이는 오카야마 고아원을 시작했다(그림 2-11).(44) 최성기에는 1200명의 고아가 있었다고 하는 이 고아원에 금전적 원조를 계속했던 것은 오오하라 마고사부로우였다. 오오하라는 상경해서 유학하며 여러 방탕함이 원인이 되어 근신하던 때 이시이와 만나, 큰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된다. 

 

그림 2-11 오카야마 고아원 여자부 숙소의 식당(사진그림엽서)

출처: 필자 소장.

 

 

 

이시이는 오사카에도 오카야마 고아원의 분원을 만들어 활동하고, 1902년에 아이젠바시愛染橋 보육원, 아이젠바시 야학교, 직업 소개시설인 동정관同情館을 개설했다. 그러나 그 뒤, 1914년에 이시이는 요절했다. 오오하라는 그 활동을 계속하고자 '재단법인 이시이 기념 아이젠엔'을 오사카에 설립했던 것이다.   

자선, 구빈이 아니라, '빈곤 방지'를 목적으로 한 활동을 전개하고자 했던 점이 이 시설의 특징이다. 이것에는 오가와의 사상도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이 아이젠엔 안에 우선은 구제 사업 연구실이 설립되었다. 여기에 1918년에는 도쿄 양육원에서 일하며 내무성 촉탁이었던 타카다 신고高田慎吾라는 인물이 초빙되었다. 타카다는 오가와의 제자로, 오가와에게 권유를 받아 아이젠엔에 왔던 것이다.(45) 타카다는 미국에서 아동 사회사업을 배운 인물이었다. 

쌀 소동이나 농민운동, 노동운동이 발발하는 사태를 맞아, 1919년에는 구제 사업 연구실을 발전시켜, 오오하라 구제 사업 연구소가 설립된다. 그 4개월 뒤에는 구제 문제와 사회 문제라는 두 가지 부문으로 이루어진 '오오하라 사회문제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여기에서 오가와도 연구원으로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무렵 오가와는 오사카시의 사회 사업에도 중심적으로 종사하고 있었다. 또한, 이때 당시 30세였던 테루오카 기토우暉峻義等(1889~1966)이란 청년이 초빙되었다. 앞에 연구원이 되었던 타카다가 오오하라에게 부탁을 받아 테루오카를 만나러 가고, 테루오카는 입소를 승낙했다. 테루오카는 1916년부터 경시청의 의뢰로 도쿄의 빈민가를 조사하고 있었는데 부름을 받아 오오하라 사회문제연구소로 옮겼다. 

이렇게 보면, 이 시기 사회 문제를 생각하려면 오사카에 계속해서 그 담당자가 모였다는 걸 알 수 있다. 1919년 시점에서 보면, 연구소를 설립한 젊은 실업가였던 39세의 오오하라를 중심으로, 연구원으로 55세의 오가와, 30세의 테루오카, 39세의 타카다 들은 당시 모색하기 시작했던 사회 사업에 눈을 돌린 기예의 인물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이 그 뒤 오사카, 게다가 일본의 구제 사업, 사회 사업의 실무적 중핵을 담당해 가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이 연구소가 수행한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이치愛知 방면方面 위원 제도와 미카미 코우키三上孝基

1923년에 칸토우 대지진이 일어나기 10일 전, 아이치현에서는 방면 위원 제도가 발족했다. 그리고 대지진 이후의 부흥 사업이 바쁜 와중에 어느 남자가 몇 사람의 남자들을 데리고 오사카의 오가와를 방문했다. 아이치현에서 시작한 사회 사업 주사가 되었던 미카미 코우키(1893~불명)이다.(46) 주사로 임명되었을 때에는 약관 28세였던 이 청년은 취임하자마자 소테츠마치蘇鉄町 공존원共存園의 설립과 방면 위원 제도 실시의 준비에 착수했다. 사실 그도 또한 오오하라 사회 문제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그곳에서 이전부터 오가와의 향도를 받고 있었다. 이 인연을 의지해 미카미는 오가와를 방문했던 것이다 이미 오사카에서 방면 위원 설치를 실현했던 오가와를 만나, 선진지 오사카의 사업을 배우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미카미와 함께 오사카를 방문한 것은 막 선발된 아이치 방면 위원들이었다. 위원을 선발할 때에는 "최초에 적임자를 소수 엄선하고, 충분히 훈련해서 그 뒤에 계속해서 위원의 모범을 만드는 것이 핵심", 직업이란 점에서 보면 "종래, 사회 사업 등에 연고가 없었던 상인들 사이에 도리어 적임자가 있다. 지원 받는 사람과 친근하게 접하는 일이 필수 조건이다"라는 오가와에게 받은 조언을 바탕으로 미카미는 인선을 진행했다.

그 결과, 위원 중에는 나막신 굽쟁이나 신발 수리를 업으로 하는 사람, 군대의 잔반 판매를 일로 하는 사람, 절의 스님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프록 코트, 낡은 신사복, 고풍스런 문양을 넣은 일본의 짧은 겉옷과 하의, 그 아래에 고무 단화 등 위원의 개성 그대로, 복장은 다양하고 가랑비에 젖은 진흙 신발로 방문한 이 한 무리를 오가와는 다음처럼 환영했다.

 

실례하지만, 오늘 이 아이치현의 방면 위원 분들의 풍체를 배견하고, 평소 저의 주장 대로인 분들인 것을 알고서 이 정도면 아이치현의 방면 위원 제도가 발전할 것임은 틀림없다고 믿고 의지를 다졌다.(47)      

 

 

이 오가와의 말에 미카미는 한숨 내쉬며 어깨를 쓰다듬어 내렸다. 

 

 

 

 

 

하야시 요우죠우林曜三와 오코시起 보육원, 그리고 공동 취사로 

 

이 미카미에 영향을 받은 남자가 아이치현 나카시마군中島郡 오코시쵸우越町에 있었다. 하야시 요우죠우(1892~1977)라는 그 인물은 이 지역의 중심적 산업이었던 직물업의 담당자로서, 쿄우린샤共林社라는 베틀집을 운영했다. 

다음 장에서 등장할 오코시 공동 취사조합의 설립에 관여하고, 조합장을 지낸 인물이기도 하다. 그것만이 아니다. 1926년 오코시 공동 취사조합장이었던 하야시는 근대 아이치의 사회 사업 시설로서 오코시 보육원을 개원하고, 그 운영에도 전력을 다했다.(48) 그 인물상에 대해서, 딸인 키요喜代는 "장사는 좋아하지 않지만 교류를 잘하고, 필요하다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행동하는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한다.(49) "공동 취사 조합장, 오코시 위생조합장, 방직업 조합장, 오코시 방면 사업 조성회 간사, 자치회 의원, 아이치현 공장회 부회장, 비사이尾西 방면 탁아소 연맹 이사, 기타 공직을 겸하고, 또 오코시 보육원의 경영자"(50)라는 약력으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지역의 문제 해결에 힘을 다하는 그의 모습이다.

이 시기에 하야시가 교류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앞에 등장했던 아이치현 사회 사업 주사, 미카미였다. 미카미는 나중에 마츠자카야松坂屋의 이토우 지로우자에몬스케타미伊藤 次郎左衞門祐民 등의 출자에 의해 나고야시에 설립된 세틀먼트 '중선관衆善館'(51)의 주사가 되는 인물이기도 했다.(52) 직물업이 성행한 오코시쵸우에서는 방직업이나 방직 하청으로 여성이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에게 눈길을 주지 못하거나, 실을 나르는 짐수레의 바구니에 넣은 아이가 떨어지거나 하는 것을 볼 때마다 예전부터 하야시는 쵸우립町立 보육원 설립을 요청했으나, 이해를 얻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53) 그러한 상황에서 아마 하야시는 미카미와 교류하면서 자신이 중심이 되어 민간에 의한 봉육소를 설립하려는 착상을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방직업을 경영하면서 공동 취사장의 운영에 분주하고, 나아가서는 보육소의 설립을 결의했던 하야시의 눈에 이 지역, 이 시대는 어떻게 비추었을까?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세히 기술하고, 이와 같은 와중에 그가 '오코시 공동 취사조합'을 설립했다는 사실을 여기에서는 확인하며, 다음 장에서는 직물 공장과 여공들의 생활을 조명함으로써 그 구체적인 의미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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