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한그릇식당(一膳飯屋)*과 도시 -뱃구레로 보는 근대 일본의 도시 문제
*역주; 일본어로 이치젠메시야一膳飯屋는 간단한 반찬 몇 가지와 한 그릇 가득 담은 고봉밥을 파는 식당으로, 여기에서는 사전에 나오는 간이식당으로는 이 의미를 적확하게 옮길 수 없어 한그릇식당으로 번역한다.
1. 10전 동전 하나의 밥(덮밥)
노동자와 고기두부 -식당의 빛과 그림자

고기두부
다시 「방랑기」를 참고로, 우선은 다이쇼우 시기의 한그릇식당을 들여다 보도록 하자.
아침, 오우메青梅 가도 입구의 밥집으로 갔다. 뜨거운 차를 마시고 있으면, 진흙투성이 노동자가 뛰어들듯이 들어와서,
"아가씨! 10전으로 뭔가 먹을 수 없을까나, 10전 동전 하나밖에 없는데."
큰소리로 말하고 똑바로 서 있다. 그러자 십오륙 세의 소녀가,
"밥에 고기두부로 괜찮을까요?"라고 말했다.
노동자는 갑자기 싱글벙글 하며 평상에 앉았다.
큰 밥그릇. 파와 잘게 썬 고기두부. 탁한 된장국. 이것만이 10전 동전 하나의 영양식이다. 노동자는 천진난만하게 입을 크게 벌려 밥을 게걸스레 먹는다. 눈물 나는 풍경이었다. 천장의 벽에는 한 끼 10전부터라고 적혀 있는데, 10전 동전 하나인 이 노동자는 솔직하게 큰소리로 염원을 떠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눈물이 날 듯한 기분이었다. 밥의 양이 나보다 많은 것 같았지만, 저걸로 배가 부를까 싶기도 하다. 그 노동자는 매우 밝고 명랑했다. 내 앞에는 밥에 잡탕에 채소절임이 나왔다. 참으로 가난한 산해진미이다. 합계 12전을 치르고 가게 문을 나서자, 너무 고맙습니다 하고 여자 종업원이 말한다. 차를 실컷 마시고, 아침 인사를 나누고, 12전인 것이다. 막다른 세계는 광명과 종이 한 장 차이로 정말로 명랑하다. 하지만 저 40 가까운 노동자의 일을 생각하면, 이건 또 10전 동전 하나로, 실망, 밑바닥, 추락과 종이 한 장인 건 아닐런지-.(1)
다이쇼우 시기의 신쥬쿠新宿에 있는 한그릇식당에서 일어난 한 장면이다. 한그릇식당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사료가 거의 없어 이 묘사는 역시 귀중하다.
진흙투성이의 노동자가 10전 동전 하나를 꼭 쥐고서 뛰어 들어온다. 여기에서 아침밥을 먹는다는 건 이 40세 전후의 노동자는 아마 돈 벌러 떠나온 사람이거나 혼자 사는 사람일 것이다. 일하고 있는 건 십오륙 세의 소녀. 이 소녀도 또 다른곳에서부터 일하러 온 것이 틀림없다. 밥과 고기두부와 된장국으로 딱 10전. 고기두부는 한그릇식당의 기본이다. 보아하니 차는 무제한 같다. 기뻐 보이는 노동자. 그와는 반대로, 먼저 식당에 들어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도 몸을 둔 '막다른 세계'의 빛과 그림자를 보는 카페의 여급인 '나'. 그녀는 오노미치尾道에서 홀로 나왔다. 3명의 등장인물은 모두 도쿄에서 일하는 노동자이며, 저마다 자신의 뱃구레를 스스로 채울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고립된 뱃구레가 모이는 하나의 장소, 그곳이 한그릇식당인 것이다.
하야시林는 '내'가 먹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음식점에 들어가, 문득, 젓가락통의 더러운 젓가락 다발을 보니, 나에게는 비천한 것밖에 없다는 걸 느낀다. 남의 혀에 닿았던, 닳아서 벗겨진 젓가락 두 개를 뽑아서 그것으로 덮밥을 먹는다. 마치 개 같은 모습이다. 더럽다고도 생각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 인류도 뭐 별것 아니다. 다만, 맹렬하게 맛있다는 감각만으로 정어리 구이에 달려든다. 작은 접시 속의 물에 잠긴 푸성귀의 향기.(2)
세간에서는 민주화다, 새로운 세상이다, 평등이다 이야기하지만, 매일 뱃구레를 채우는 행위 속에서조차, 아니, 오히려 일상 속이기에 결코 평등한 사회를 느낄 수 없는 우울. 그럼에도 살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는 현실에 대한 괴로움. 그 두 가지가 이 단문에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런데, 10전이란 도대체 어느 정도의 금액일까? 『방랑기』의 도처에 등장하는 물건과 그 가격을 열거해 보겠다. 식당에서 술 15전, 모둠전골 2인분 60전, 밥이 한 그릇 5전, 단팥빵 1전, 신쥬쿠의 여인숙 1박 30전, 우동 2그릇 16전, 도미 구이 10전, 방세 2첩 5원, 다리 접는 밥상 1원, 밥공기 20전, 국그릇 30전, 다쿠앙 11전, 젓가락 5전, 떡 담는 망 12전, 원고용지 1첩 8전, 직업 소개 수수료 3원, 자색 비단 24m 5원.
그에 대해 그녀의 급료는 어느 정도일까? 밤 유과 공장 일급 23전, 2주일 아이 보기 2원, 완구 셀룰로이드 도색 일급 75전. 이들을 종합해 생각하면, 10전 동전 하나로 식사할 수 있는 간이식당은 꽤 저렴한 외식점의 부류이지만, 날품팔이나 부업으로 살고 있는 그녀에게는 결코 저렴한 식사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콘 와지로우今和次郎의 이 나간 밥그릇 조사 -식기의 사회화
『방랑기』의 '내'가 이러한 모습으로 한그릇식당에서 덮밥을 먹고 있었던 것과 딱 같은 무렵, 도쿄의 어느 식당에서는 식사 때마다 사용한 밥그릇의 파손 형태를 스케치해서 1주일 걸려 48매의 밥그릇 그림을 모은 남자가 있었다. 고현학考現学 학자인 콘 와지로우이다. 1927년에 정리된 그 스케치는 「모더놀로지(고현학)」이란 책으로 담긴다.(3) 먼저 그 그림을 살펴보자(그림 1-1).

그림 1-1 이 나간 밥그릇 조사
출처: 콘 와지로우 「모더놀로지(고현학)」 春陽堂, 1930년, 209-210쪽
콘이 말하기를, 매일 다니는 식당의 밥그릇이 매우 더럽고, 이 나가 있는 밥그릇이 다수였기 때문에, 이 스케치를 시작하기로 했다. 콘은 실물 크기의 평면도와 측면도를 주머니에 넣고 가서, 점심마다 몇 개씩 스케치한다는 철저함이다.
"2-3개의 금이 간 건 아직 용납할 수 있다 치고, 밥그릇 주위가 톱니 모양인 것, 부스럼 딱지 모양인 것, 고양이 발 모양 인 것, 이 나간 게 심한 것, 그리고 진짜 40번 같은 건! 완전 폐물 아니냐! 그리고 그들 이 나간 건 죄다 차의 때로 물들어 있다"(4)라고 분개하면서도 적확하게 분석한다. 참으로 이런 밥그릇으로 먹었던 건지 지금 보면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다음의 지적이다.
도기류의 취급 방법이란 것은, 요즘 점점 공영적인 식당이 늘어나는 추세에 있을 때 다시 생각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고 ー즉 재래는 가정 안의 부드러운 손만으로 비교적 소수인 그것들이 다루어지던 상태로부터 이제 새로운 진전에 즈음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고 ー이 조사를 무의미하게 끝내지 않고 제대로 마무리하자는 생각이 듭니다.(5)
모두 함께 여러 가지로 쓰는 밥그릇이라면, 사실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식당의 밥그릇은 쓸 수만 있다면 괜찮다는 것이 되어, 이만큼 이가 나가도 그걸 신경쓰는 사람은 없다. 이것을 콘은 밥그릇을 '공영적 식당'에서 사용하게 된 결과라고 설명한다. 바꾸어 말하면 밥그릇의 '사회화'이다. 식탁의 '사회화'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가족에서 소유하는 식기라면 식당보다도 소중히 다루어, 여기까지 이가 나갈 리는 없을지도 모른다. 뱃구레가 가족으로부터 떨어진다는 것은 식기도 또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모이는 집단 안에서 집합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단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콘이 밝혔듯이 식당에서는 이 나간 밥그릇이 다수라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당시의 한그릇식당이란 장소는 이 나간 밥그릇과 벗겨져 버린 대나무 젓가락이 식탁에 놓이고, 그 그릇으로 밥, 고기두부, 잡탕, 절임채소 등을 먹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떠드는 가운데 겨우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 그 순간을 기뻐하고 쾌활해 함과 동시에, 매일 밑바닥을 실감할 수밖에 없는 일종의 우울함이 동거하는 공간이었단 것을 알 수 있다.
2. 혀로 쓰는 식당 경제학 -이시즈미 하루노스케石角春之助
단바丹波의 아야베綾部와 도쿄 양육원
이와 같은 간이식당과 식당이 흥성한 도시의 혼잡을, 또 다른 시점에서 계속 주시한 남자가 아사쿠사浅草에 있었다. 자유 기고가이자 저널리스트였던 이스즈미 하루노스케이다.(6) 이시즈미는 1890년에 현재의 교토부 아야베시에서 탄생했다.
이건 완전히 우연이지만, 근대 일본 사회 가장 하층의 고난을 겪으며 대본교大本教의 교조가 되어 구제 사상의 저류底流를 이끌었던 데구치 나오出口なお의 출생지도 아야베이다.(7) 그녀는 텐포우天保 기근이 일어난 1836년에 태어나, 쌀 소동이 일어난 1918년에 사망한다. "정말로 뱃구레가 작아졌다고 생각될 정도로 배부르게 먹은 적도 없다"라고 술회한 가난한 그녀의 생계는 바로 '먹기 위한' 고난으로 가득차 있으며, 그럼에도 여전히 살아가야 하는 현세에 대한 무의식적 저항의 외침을 수반하고 있었다. 목화 농사와 실잣기의 부업이 성행했던 아야베에서 기계제 실의 파도가 도래한 것은 메이지 20년대 초두였다. 야스마루 요시오安丸良夫에 의하면 이 무렵 아야베는 사회 체제의 큰 변동 속에서 지금까지 몸에 익혔던 능력이나 기능이 쓸모없어지게 된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 되었다. 데구치 나오도 그 예외는 아니라, 기계화의 파도 속에서 실잣기 일을 잃고, 넝마주이로 전락한 한 사람이었다. 이시즈미가 아야베에서 이 세상에 생명을 받은 것은 데구치 나오가 고난 속에서 살아가던, 바로 그 시기였던 것이다.
이시즈미는 간사이 대학, 일본 대학 등에 적을 두고, 최후는 메이지 대학을 졸압한 뒤, 「호우치報知 신문」의 기자가 되었다. 그 뒤, 자유 기고가가 된 뒤부터는 많은 문장을 남기게 된다. 대표작이라 일컫는 「걸식 뒷이야기(乞食裏譚)」(8)는 1929년 그가 39세 때 썼다.
「걸식 뒷이야기」의 무대였던 당시의 아사쿠사는 그의 언어로 말하자면 "씹을수록 맛이 있고, 알싸한 맛이 있으며, 떫은 맛이 있는데, 그러면서도 그곳에는 무언가 말할 수 없는 가벼움과 친근함이 있는"(9) 거리였다. 또한 그 반면 "인간의 가장 추악한 창자를 끌어낸 듯한, 불결과 증오가 엉켜"(10) 있는 듯한 거리이기도 했다. 그 거리에서 그는 "아무리 넋을 잃더라도 또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여자들이나 유랑자의 생활"(11)을 계속 기록했다. 걸식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까지 기록한 이시즈미의 문장을 읽으면, 호기심이나 동점심에서가 아니라, 어떻게 그들의 시선에서 당시 아사쿠사의 혼잡을 묘사하고자 했는지가 전해진다.
처자가 없고, 한없이 하층 사회에 가까운 곳에서 살았던 이시즈미는 1939년 병으로 쓰러져, 도쿄시 이타바시板橋 양육원 병원에 입원해 48세로 이 세상을 떠났다. 양육원이란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에 의해 설립된 일본 최초의 공립 구빈시설이다. 아야베에서 생을 받아, 친척이 없는 아이, 노인, 길거리 생활자나 장애가 있는 사람 등을 구제할 목적으로 설립된 이 시설에서 최후를 맞이한 그의 인생과 포개어서 그가 써서 남긴 작품을 살펴보고자 한다.
에도와 도쿄 -아사쿠사 식당 경제학
이시즈미는 오랫동안 아사쿠사에 살며 『걸식 뒷이야기』(그 이후에 『근대 일본의 걸식(近代日本の乞食)』으로 복간) 등 빈민가의 르포르타주를 남겼다. 그런 그가 1933년에 지은 한 책이 『아사쿠사 경제학(浅草経済学)』이다. 메이지·다이쇼우·쇼와의 변천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아사쿠사의 경제사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에는 식당에 관한 기술이 매우 많다. "예전에 아사쿠사의 식당을 모조리 다닌 적이 있다."(12) 이시즈미에 의하면, 아사쿠사는 대중을 흡수하는 소비경제의 현장이었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먹을거리'이며, 그것이 어수선하게 구별없이 모여 있는 장소가 아사쿠사밖에 없다고 한다. "아사쿠사는 온갖 식당이 대중의 호흡을 확고히 붙들고 있다."(13) "그래서 저는 특히 식당에 관해서, 전력을 기울여 할 수 있는 한 많은 종이를 바쳐 상세함을 샅샅이 파헤치려 한다"(14)는 이시즈미는 "식당의 연구는아사쿠사 전체의 연구"(15)라고 하며, 자신의 '혀'로 아사쿠사의 식당 경제학을 그리는 데 집중했다. 이 제목에서는 아카데미즘 경제학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경제란 원래 교환에 의하여 먹을거리를 분배하기 위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면, 먹을거리를 둘러싼 다양한 문제야말로 더욱 중시되어도 좋지 않을까? 그렇게 주장하기 위해서 이시즈미는 굳이 '혀'로, 바꾸어 말하면 '먹는 것'으로부터 『아사쿠사 경제학』을 그리는 데에 집중했던 것은 아닐까 상상된다.
이시즈미에 의하면, 1884년부터 1886년에 걸친 공원지의 정비가 근대 아사쿠사의 첫째 변혁기였다.(16) 아사쿠사의 식당은 이 시기에 거의 우후죽순처럼 증가했다. 1933년 시점에 공원 귀퉁이에만 400 몇십 채의 식당이 있어, 여기저기에서 '어서 옵쇼'라는 소리가 들렸다.(17) 요리별로 보면, 일본요릿집, 일품 요릿집, 카페, 중국요리, 초밥집, 메밀국수집, 끽다점, 대중식당이 처마를 맞대듯이 서 있었다.
근세부터 번화가인 아사쿠사는 근대가 되어서도 역시 사람들이 모이는 '먹을거리'의 장이었다.
새끼줄 포렴(縄暖簾)에서 대중식당으로
"아사쿠사의 식도락은 메이지 말기에 이르러 몹시 대중화되었다"(18)고 이시즈미는 말한다. 그 무렵에 지금까지 한그릇식당이었던 '새끼줄 포렴'의 식당이 차차 대중적인 식당이 되고, 동시에 일양 절충의 '간이식당'이 되었다. 아사쿠사에서는 새끼줄 포렴의 밥집은 근세부터 명물이었는데, 그들 밥집이 식당으로 변화한 것이다.
근세의 조림 가게나 새끼줄 포렴에 대해서는 이이노 료우이치飯野亮一 「선술집의 탄생(居酒屋の誕生)」(19)에 상세하다. 이 책에 의하면, 사실 새끼줄을 여러 가닥 늘어뜨려 발처럼 만든 새끼줄 포렴 자체도 18세기 후반 무렵부터 가게 앞에 걸리게 된 새로운 풍습이다. 그때까지는 문어나 가다랑어포 등 그날 파는 물건을 매달아 놓았는데, 차츰 새끼줄 포렴의 가게가 늘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메이지 시기에 들어서자, "새끼줄 포렴이라 하면 선술집. 선술집이라 하면 새끼줄 포렴"이라는 이미지가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메이지 말기에 식당으로 모습을 바꾸어 갔다는 것이다. 소비의 현장과 밀착된 '먹을거리'의 장은 지금도 옛날도 변화가 멈추는 일이 없다.
그럼, 그들 새롭게 모습을 바꾼 아사쿠사의 식당을 살짝 엿보도록 하자. 이 시기의 아사쿠사에는 똑같은 식당이란 스타일 안에서도 손님층이 달라, 노동자만이 아니라 공장주도 다니는 가게가 있고, 부인 동반으로 식사할 수 있는 가게도 있다면, 무산계급인 '룸펜'을 상대로 하는 가게, 걸식 선술집도 있었다.
예를 들면, 메이지 41년(1908)에 개업한 한그릇식당 '무사시야武蔵屋'는 아침 5시부터 밤 10시까지 연달아서 나고들며 번창한다. 여기에서는 5전으로 훌륭한 식사를 할 수 있다. "그것도 남이 먹고 남긴 다이가라(역주; 잔반을 받아 먹으며 사는 거지를 가리키는 말로, 3등급에 해당)라든지 나머지라면 5전이 3전이어도 결코 싸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갓 지은 밥에, 말에게 먹일 정도의 큰 그릇에 된장국이 한 그릇, 거기에 채소 절임이 딸려서, 이것으로 자그마치 5전 동전 하나이다."(20) 이시즈미가 다녔을 무렵에는 그외에도 양식류, 맥주, 브랜디, 술 등도 있어서 대중식당으로서의 특징을 갖추게 되었다. 그의 저서 『근대 일본의 걸식 -걸식 뒷이야기(近代日本の乞食 -乞食裏譚)」에 의하면, 다아가라란 초밥집에서 나오는 잔반을 전문으로 모아서 먹는 걸식이다. 이 무렵의 아사쿠사에는 초밥집이 죽 늘어섰기에, 다이가라들은 당면한 공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고 한다.
미카와야三河屋에서는 "전골류 모두 10전 균일, 덮밥 한 그릇 무엇이든 10전 균일이란, 정말로 사바 세계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저렴"했다. 10전 동전 하나로 식사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시대의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한 가지 조건이었다. 10전을 이시즈미는 '텐센テンセン'이라 읽고, 당시 아사쿠사의 식당에서는 '텐센 균일', '텐센주의主義'의 가게가 적지 않았다고도 쓴다.
청취 조사에 의하면, 다이쇼우 시기에는 가게를 짓지 않는 형태, 즉 포장마차 음식점도 존재했다(그림 1-2). 예를 들면 1918년에 양식 포장마차를 시작한 코우노 킨타로우河野金太郎는 네 대의 포장마차를 끌고서 카레라이스를 10전 균일, 커틀릿이 10전, 그걸 모두 덮밥으로 올린 카츠카레를 20전에 팔아서 번창시켰다.(21) 포장마차에 풍로를 쌓고서 그걸로 조리를 했다고 한다. 사료나 통계에는 거의 남지 않은 이와 같은 포장마차도 당시는 아마 무수히 있었을 것이다.(22)

그림 1-2 일품 양식 판매
출처: 미타니 카즈마三谷一馬 「메이지 물품 판매 그림집(明治物売図聚)」 中公文庫, 2007년, 144쪽 (원화는 「太平洋」 1903년, 세린 그림洗鱗画)。
더구나 , 시오미 센이치로우塩見鮮一郎가 「빈민의 제국 수도(貧民の帝都)」(23) 등에서 상세히 기술하듯이, 아사쿠사 일대는 옛날부터 번화가임과 동시에, 예전에는 수용소(溜)나 유곽(吉原)과 인접한 장소이기도 했다. 그런 고로, 메이지 시기 이후는 특히 사회 구조의 큰 전환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단 것을, 여기에서는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시즈미가 묘사했던 것은 그와 같은 아사쿠사에 응축되어 볼 수 있는 격동과 모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먹는 모습에 불과하지 않았다.
3. '천하의 부엌'의 근대 부엌 사정 -오사카시의 간이식당 조사
도시 문제인 먹을거리
그럼, 무대를 또 하나의 대도시, 오사카로 옮기자. 여기에서는 다이쇼우 시기에 실시된 어느 사회 조사(24)를 자료로 한그릇식당과 도시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도시가 커지고 상공업이 성행하게 되면,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먹을거리'였다. 3대 도시의 하나인 오사카시의 산업부는 1918년에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도시의 팽창, 사업계의 발흥은 당연 도시 주민의 생활문제, 특히 노동자, 무산계급 생활에 여러 문제를 샘솟게 한다. ...... 그중에서 음식 문제는 가장 직접적으로 와닿는 긴요 사항으로, 전년부터 오사카시에서 생선, 채소, 기타 일용 식료품의 폭등이 특히 두드러져, 그 시민에게 미치는 영향은 이를 보건으로 보아도 물가 조절로 보아도 간과하기 어려울 것이다.(25)
바로 '먹을거리'가 중대하고 중요한 도시문제였다는 점을 전하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에 직면한 오사카시는 시영 식당의 설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오사카시에는 시영 식당에 앞서서 '오사카 자강관自彊館'이란 민영 시설이 존재했다. 이 오사카 자강관이 운영하고 있던 식당이 호평이었던 것에 주목한 오사카시에서는 이와 같은 시설을 더욱 늘려 가려는 의논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26)
그리고 이러한 시설의 증설을 실현하기 전에, 우선은 한그릇식당의 조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왜냐하면, 시내 각처의 산재하고, 주로 노동자나 통근자 등에게 간이음식 공급을 실제로 담당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한그릇식당'이라 부르는 것으로, 그 영업 상태는 경시할 수 없다고 오사카시가 생각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조사한 선에서, 같은 시대에 한그릇식당의 상세함과 체계적인 조사로는 이것이 유일한 것이다. 그래서 아래에서는 이 조사를 참고로 하면서, 다이쇼우 시기 오사카의 간이식당 실태, 출입하는 사람들, 지역에서 한그릇식당의 의미 등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간이식당 생활 방식과 번화함
1918년 4월 하순부터 5월 상순에 실시된 이 조사에 의하면, 오사카시에 있는 음식점 가운데 통칭 '한그릇식당'이라는 가게가 458호 있으며, 그곳에서 일하는 피고용인은 1441명, 영업자와 합하면 1900명에 달했다.
영업자가 여성인 것은 145호였다. 즉 전체의 1/3 정도는 여성의 가업이었던 점을 알 수 있다. 단순히 이것으로부터 1호 평균을 구한다면, 각 밥집은 종업원을 3명 정도 고용해, 약간 여성 종업원의 비율이 많았던 듯하다.
건물과 식당의 평수로 보면, 1호 평균 12평 6홉 정도이다. 여기에는 영업자 자신의 거주 부분이 포함되어 있단 것을 고려하면, 식당은 1호당 평균 겨우 4평 5홉 정도가 된다. 다다미로 말하면, 9첩이다. 여기에 식탁과 의자를 늘어놓고 손님이 들어온다. 조사 중, 가장 작은 한그릇식당으로 1평 5홉부터 3평의 가게에, 7홉부터 1평의 식당만 마련한 '반노점식'인 것이 몇몇 곳 있었다. 가장 큰 것은 27평 5홉이다. 대략 10평 이상의 식당이라면 비교적 대규모로 보아도 좋고, 시내에는 그와 같은 한그릇식당이 18호였다.
그럼, 어느 정도의 사람들이 이 한그릇식당에서 뱃구레를 채웠던 것일까?
458호의 한그릇식당에 출입하는 손님이 지불한 음식 대금의 정확한 수치를 파악하는 것은 곤란하지만, 이 조사에 따라 그 대략적인 수를 알 수 있다. 조사원도 각 점포가 신고하는 액수가 필시 실태보다도 적다고 이해하여, 매상액에 50%을 증액한 수치가 '다소 사실에 가까운 계수'일 것으로 본다. 그 수를 살펴보자.
하루 평균 매상은 합계 5460원, 연내객수 5만1600명, 1호 평균은 113명이었다. 당시 오사카시의 전 인구 가운데 3.3%가 한그릇식당에서 식사하고 있다는 계산이 된다. 영업자로부터 청취한 것에서는 매출의 약 반액이 쌀 대금이란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금액 2734원이 되고, 매일 91섬의 쌀을 소비하고 있다는 계산이 된다. 4말을 1가마니로 환산하면, 약 228가마니의 쌀이다. 또한, 1섬이라 하는 것은 1000홉이기에, 한 끼 1홉이라 환산하면 91섬은 9만1000끼를 충당하는 셈이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실제로는 이것 이상이 된다.
참고로 오사카 시영의 간이식당에서는 6월 6일의 개점부터 6월 말까지 25일 동안에 내객수 2만4388명, 하루 평균 976명이었다. 간이식당은 30평이고, 한그릇식당보다 규모가 크기 때문에 내객수도 많다. 특히, 전체로 보면 하루당 한그릇식당에서는 5만 1600명, 간이식당에서는 976명의 뱃구레를 채웠던 셈이다. 이 비교로 보면, 당시 한그릇식당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한 그릇의 내용
다음으로 궁금한 것은 '한 그릇'의 내용이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도대체 무엇을 먹었던 것일까? 그것은 크게 나누어 세 가지이다. 우선은 '쌀', 그리고 반찬으로 '부식물', 더하여 '술'이다.
쌀은 통상 밥공기나 밥통에 수북히 담아 대, 중, 소 세 종류였다. 대와 소라는 두 종류로 나누는 가게도 있다. 평균하면, 대는 1홉 9작 6으로 5전 9리, 중은 1홉 6작 8로 4전 9리, 소는 9작 25로 2전 9리이다. 사용하는 쌀의 종류는 일정하지 않고, 되도록 경제적인 종류를 각 가게에서 연구해 사용한 듯하다. 업자에게 한 청취 조사에 의하면, 조선산 쌀이 많았다. 흔히 훼フェ라 부르고, 밥을 짓는 양이 많아 가장 경제적이었다. 이 쌀은 알이 작기 때문에 찬밥이 되면 훌훌 거려 맛이 없어지는 것이 단점이지만, "한그릇식당에서 찬밥을 손님에게 제공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다. 한그릇식당에서는 언제나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던 것 같다.
부식물은 가격이 싸고, 기호가 좋은 것으로 채소가 가장 많은 수요였다. 여기에 어류, 육류가 다음이다. 이들 부식물은 1품 최저 5리부터, 최고 20전에 이르기까지 각종이며, 대개 작은 사발에 담는다. 각 가격별로 상 위에 늘어놓고, 손님은 좋아하는 걸 골라서 가는 시스템이다. 5리부터 1전의 저렴한 반찬은 절임이다. 채소, 콩 등은 4전부터 6전, 어류와 육류가 6전부터 20전이라는 물품 목록이다.
술은 1홉 판매, 도쿠리徳利 또는 병 판매, 컵 판매 세 종류이다. 1홉 판매는 최저 6전부터 16전, 도쿠리와 병 판매는 분량이 각기 달라 가격이 일정하지 않고, 컵 판매는 크기에 따라 4전(7작)부터 8전까지이다. 전혀 술을 취급하지 않는 밥집은 시내 전체에서 48호이고, 총 수의 약 10%이기에, 대부분의 밥집이 술을 취급하고 있었던 셈이다.
한그릇식당에 모이는 사람들
그럼, 여기에는 어떤 사람들이 발을 옮겨 뱃구레를 채웠던 걸까? 거리의 혼잡에 귀를 기울여 보자.
한그릇식당은 오는 사람을 거절하지 않기에, 오월동주, 낮밤 갖가지 계층, 직업의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다만, 대개는 중류 계급 이하의 사람들이 중심이고, 특히 노동자를 첫째 손님으로 하고, 다음 손님으로는 행상인이 많았다고 하는 것도 기록되어 있다. 나아가, 한그릇식당이 영업하는 장소에 따라서, 어느 특정 직종의 사람들이 모이는 경향도 볼 수 있다고 한다. 표 1-1은 손님의 직업과 지구의 관계를 보여준 것이다.
표 1-1 고객의 종류별로 본 한그릇식당(오사카 : 1918년)

출처: 오사카시 산업부 「大阪市 商工時報』 15, 1918년, 22-23쪽에서 작성.
크게 나누면, 노동자를 주요 고객으로 하는 가게는 359호이고, 전체의 약 80%로 가장 많다. 그 다음으로 상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 74호, 기타 군인, 관공리, 회사원, 학생 등을 주로 하는 것이 12호이다. 나머지는 여행인을 손님으로 하는 것이 7호, 잡종 6호라 되어 있다. 그렇더라도, 물론 손님의 대부분은 혼재되어 있는 것이 실정이었다.
또 흥미로운 것은 손님과 장소의 관계이다. 예를 들면 포병 공창 직공이 많이 오는 것은 공창의 소재지 부근 가게이다. 12호 가운데 10호는 모두 다이쇼우 2년(1913) 이후의 개업으로, 전시의 직공 증가와 관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버선 커버 공장이 산재한 지역, 칫솔 공장이나 전등 회사가 있는 지역에는 그 직공들이 모였다. 바닷가 지역에는 선원, 조선 인부, 석탄 인부가 모이고, 군 지역과 시내를 잇는 관문이 되는 지역에는 분뇨 수거인이 모이는 가게가 있다. 시장 근처에는 행상인, 빈민가 입구에는 출입 상인, 도우지마堂島에는 쌀 투기꾼을 오로지 고객으로 하는 가게가 있다. 텐만天満 신사 경내의 노천상만을전문으로 하는 가게도 1호 있고, 청과물 시장 상인, 과자 도매의 중매인이나 짐꾼을 고객으로 하는 가게, 병영 근처에는 병사를 상대로 하는 가게가 있다. 그외에 회사원, 학생, 전차 승무원, 역무원, 기선의 승객 및 관람객, 유람객, 재판소에 출입하는 사람들, 대학병원에 왕래하는 사람들 등 한그릇식당에 발을 옮기는 고객은 참으로 다양한 면면이다. 그 대부분이 메이지, 다이쇼우 시기에 새롭게 등장해 점점 성행하게 된 업종의 주역들이었다.
오사카시는 이상과 같은 한그릇식당의 실정을 얼추 이해한 뒤에 개선점으로 '위생' 상황을 들고 있다. 영업 장소, 기구의 소독, 파리 잡는 기기 설치, 환풍, 채광, 소독 청소, 선풍기의 설치, 식기의 세정과 열탕 소독, 대젓가락과 젓가락통의 소독 등 꽤 구체적인 제안이다. 그러나 "두세 사람만 지나치게 청결하게 될 경우는 어느 면에선 고객의 품위를 높여 예를 들면 월급 받는 계급의 사람을 맞이하기 쉬운 대신에 다른 면에선 하급 노동자는 꺼려 그걸 싫어하여 멀어지는 모습이 있어, 그 때문에 영업에 일장일단이 있어서 노동자가 들어오기 쉽지 않음이 있기 때문에 설비를 조잡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눈치채고 있다. 즉, 너무 지나치게 깨끗하면 들어오지 못하는 손님이 나오기에, 그것도 또 곤란한 문제라는 것이다. 누구나 들어오기 쉬운 공간을 어떻게 만들어 내는가 하는 점이 여기에서 핵심이며, 식당이란 단어에다 '간이', '대중'을 붙인 것은 그 의미에서 중요했다.
그래서 오사카시로서는 시가 관리하는 한그릇식당 동업조합이란 것을 만들게 하고, 요소에 간이식당을 설립해 모범을 보이며, 시의 지도에 부합하는 모범적 영업을 하는 가게를 지정 식당으로 보조를 해준다는 세 가지 대체안을 내놓고 있다.
그럼, 오사카시의 이후 간이식당 증설과 한그릇식당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다음 장에서는 그 전개를 좇는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오사카시를 중심으로 하면서, 도쿄와 아이치를 포함해 도시 정책과의 관련에서 생각해 나아가고자 한다.
수상 한그릇식당 -먹지 않을래(くらわんか) 배와 수상 행상
오사카는 물의 도시이다. 그 때문에 특히 근세 이래 오사카에서는 육로만이 아니라, 항구나 하천에서도 화물이나 사람을 나르는 배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당연히 이 왕래하는 배와 그 승객들을 상대로 수상의 간이식당이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림 1-3은 안도우 히로시게安藤広重가 그린 요도강淀川의 풍경이다. 큰 30섬 배에 노를 저어 다가간 작은 배가 보인다. 이 풍경은 19세기 초에 짓펜샤 잇쿠十返舎一九가 쓴 「동해도 도보 여행(東海道中膝栗毛)』에는 요도강 연안의 숙소, 히라카타枚方에 당도하는 장면으로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그림 1-3 교토 명소 중 요도강(연대 불상)
출처: 안도우 히로시게 『京都名所之内』 국립 국회도서관 소장(국립 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상인 배 여기로 노 저어 오고, 저어 오고,
장사꾼
"밥 먹지 않을래, 술 마시지 않을래, 자자 모두 일어나쇼. 좋아, 누워 자는 놈들이구나" 하고 이 배에 대고 사양 없이 자리를 펴고 고함을 지른다. 이 장사꾼 배는 말투가 거친 것을 명물로 여기는 바,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다.(27)
"밥 먹지 않을래, 술 마시지 않을래"라고 자고 있는 손님을 깨우면서 거친(난폭한) 말로 음식을 파는 이 음식배는 그 독특한 외침 소리 때문에 통칭 '먹지 않을래 배"라고 부르며, 근세부터 요도강의 명물로 알려져 있었다. 짓펜샤 잇쿠는 이 먹지 않을래 배와 손님의 대화를 재밌고 유쾌하게 생생히 그리고 있다. 대강 접객업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 말로, 반쯤 손님을 도발하면서 감자와 우엉 조림, 술 등을 파는 상인에 대해, 손님도 지지 않고 되갚는다. 수면에 떠 있는 한그릇식당의 활기가 들리는 듯하다.
10섬 전후(약 5m)의 작은 배로 2명 정도가 타고서 화로를 갖추고, 떡과 술, 초밥, 우엉국, 조림 등을 팔았다. 일설에 의하면, 세키가하라関ヶ原의 전투에서 토쿠가와군의 물자 보급에 협력한 덕분에, 이후 막부에 영업 특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28)
또한 19세기 후반에 쓴 「요도강 양안 일람(淀川両岸一覧)』에도 다음 같은 기술이 있다.
니우리부네(貸食船)는 이곳의 명물로, 밤낮 없이 자그마한 배에 밥술국떡 등을 채워, 오르내리는 통선通船을 대상으로 , 열쇠 같은 걸 그 배에 던져 걸고서 졸고 있는 선객을 깨워 소리 높여 시끄럽게 술과 음식을 파니, 속되게 이를 먹지 않을래 배라고 부른다.(29)
'니우리부네'는 '조림 판매 배(煮売船)'로, 이 기술에서도 취급하는 품목은 밥, 술, 국, 떡 등이었던 걸 알 수 있다. 먹지 않을래 배는 공문서에는 '챠부네茶船'로 등장한다.(30) 카에이嘉永 6년(1858)의 「챠부네 청부의 일(茶船請負之事)」에 의하면, 챠부네를 빌려서 장사를 하려면 1척당 1개월에 3관500문의 차용료가 요구되었다. 먹지 않을래 배에서 제공했던 먹을거리의 판매 가격이 대략 10~20문 정도였다고 하면, 차용료를 지불하려면 적어도 350끼 이상을 팔아야 한다. 먹을거리나 숯과 땔감의 구입 비용도 포함하면, 더 팔아야 한다. 그렇더라도, 문서를 보는 한, 배를 빌려 장사하고 싶을 정도로 이 챠부네 장사는 번창했던 듯하다.(31)
그럼, 이 장사는 근대가 되면 어떻게 되었을까? 먹지 않을래 배에 관한 아마 유일하게 정리된 논고인 이즈미오 테루마사泉雄照正 『먹지 않을래 배 고 -하시라모토 챠부네의 양태(くらわんか船考ー柱本茶船の様態)」에는 근대가 되면 강 증기선의 출현과 철도의 개통에 의해 요도강 교통은 그림자처럼 사라지고, 챠부네도 또한 그 모습을 감추었다고 적혀 있다.(32)
그런데 오사카 시립 중앙도서관에 30섬 배에 가까이 다가간 작은 배인 먹지 않을래 배의 사진 그림엽서가 소장되어 있는 걸 알았다(그림 1-4). 아마 다이쇼우 시기부터 쇼와 초기의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에, 먹지 않을래 배는 예전의 번창함은 없다고 해도, 이 시대에도 건재했던 듯하다. 참고로 왼쪽 위에 찍혀 있는 '먹지 않을래 밥그릇'은 하사미요波佐見焼(나가사키), 토베요砥部焼(에히메) 등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었던 도자기가 사용되어, 지금도 요도강의 강바닥에서 발견되는 일이 있다고 한다.

그림 1-4 먹지 않을래 배와 먹지 않을래 밥그릇. 앞의 작은 배가 먹지 않을래 배(연대 불상)
출처: 오사카 시립 중앙도서관 소장.
원래 주요 항만에서 정박 중인 운송선의 승무원이나 도해선渡海船의 승객에게 음식물을 파는 니우리부네는 더욱 넓은 의미에서는 '판매선(우로우로부네売々船, 우로부네うろ船)'라고 부르며, 먹지 않을래 배는 그 하나에 포함되었다. 근대가 되면 통칭 '우로우로' 또는 '오키우리沖売'라고 부르는 수상 행상인들이 비슷한 장사를 했던 것을 알고 있기에, 먹지 않을래 배에 유사한 장사는 근세와는 또 다른 형태로, 말하자면 '수상의 한그릇식당'으로 근대에도 계승되어 존재했던 셈이다.(33)
오사카시 사회부는 1930년에 <수상 생활자의 생활과 노동(水上生活者の生活と労働)>이란 조사를 실시해, 그 안에서 이 수상 행상인을 다루고 있다.(34) 이 조사에 의하면 같은 해, 수상 생활자로는 거룻배 노동자가 약 3269명, 모래 채취 노동자가 약 642명, 그리고 수상 행상인이 약 784명 있었다.
수상 행상인이 다루는 상품은 근세에 비해 다종다양해져 흥미롭다. 구체적으로 그들의 상품을 살펴보자(표 1-2). 뭐니뭐니 해도 음식물이 많다. 수상 행상인의 반 이상은 음식을 취급하는 배(55%, 433척)이었다. 다이쇼우 7년(1919) 오사카시의 한그릇식당이 458호였단 것을 생각하면, 수상 행상인도 그와 비슷한 정도의 존재였던 셈이다. 다음으로 파치 매매의 '니고荷粉'가 21%, 잡화상, 신발 및 수선, 새 양복과 오래된 양복 상인, 약 판매상이 그에 이어진다. 신발, 화장품, 만년필, 귀금속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갖추어져 있다.
표 1-2 오사카의 수상 행상인이 취급하는 품목(1930년)

출처: 오사카시 사회부 조사과 편찬 『수상 생활자의 생활과 노동(水上生活者の生活と労働)』 오사카시 사회부 조사과, 1935년에서 작성.
주) 음식물에 관계되는 것에는 ○을 표시했다.
음식물에는 떡, 과자, 초밥, 군고구마, 과일, 푸성귀, 생선, 술, 간장, 된장, 두부, 절임 등이 있으며, 단팥죽, 아이스크림, 히야시아메冷飴(역주; 엿기름 물엿과 설탕을 뜨거운 물에 녹이고 생강즙을 넣어 만든 칸사이 지방의 대표 청량음료) 등도 있다. 잔반을 취급하는 배가 5척이나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35) 이들은 배의 승객인 것만이 아니라 거룻배 노동자, 모래 채취 노동자, 기타 배의 승무원들 뱃구레에도 들어갔음이 틀림없다. 또한, 큰 상선의 취사장으로 운반해 가는 것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수상의 가격은 육지에서 거래하는 가격보다도 10~20% 정도 비싸서, 예를 들면 육지에서 6전으로 사들인 두부를 수상에서는 10전으로 팔았기 때문에, 수상에서 장사를 하는 것에는 그 나름의 장점이 있었다. 수상 행상인은 수상에서 음식물 기타 물품을 판매 교환하는 사람들로, 뭍과 물이란 차이는 있어도 영업 형태는 육지의 소매상인과 다르지 않다. 대부분이 독립 자영업자였다. 배의 소유로 보면, 367명(47%)은 자가 소유이고, 나머지는 임대 선박이든지, 통선이나 동료의 배에 편승해서 장사를 한다. 그들은 오사카 부령 수상 행상 단속 규칙 제1조에 의한 영업자로서 '오사카 함선 상업조합'을 조직했다.
'농담 > 농업 전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뱃구레의 근대 -제3장 공동 취사와 집단 급식의 기원 (0) | 2026.03.17 |
|---|---|
| 뱃구레의 근대 -제2장 식당에서 보는 사람들의 관계 (0) | 2026.03.01 |
| 뱃구레의 근대 -서장 먹을거리와 사람들 (0) | 2026.02.24 |
| 뱃구레의 근대 -먹을거리와 사람들의 일상사 / 목차 (0) | 2026.02.24 |
| 흙과 거름과 미생물 -맺음말, 참고문헌 (0) | 2025.1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