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간이식당과 도시 -뱃구레로 보는 근대 일본의 도시 문제
1. 10전 동전 하나의 밥그릇(덮밥)
노동자와 고기두부 -식당의 빛과 그림자

고기두부
다시 「방랑기」를 참고로, 우선은 다이쇼우 시기의 간이식당을 들여다 보도록 하자.
아침, 오우메青梅 가도 입구의 밥집으로 갔다. 뜨거운 차를 마시고 있으면, 진흙투성이 노동자가 뛰어들듯이 들어와서,
"아가씨! 10전으로 뭔가 먹을 수 없을까나, 10전 동전 하나밖에 없는데."
큰소리로 말하고 똑바로 서 있다. 그러자 십오륙 세의 소녀가,
"밥에 고기두부로 괜찮을까요?"라고 말했다.
노동자는 갑자기 싱글벙글 하며 평상에 앉았다.
큰 밥그릇. 파와 잘게 썬 고기두부. 탁한 된장국. 이것만이 10전 동전 하나의 영양식이다. 노동자는 천진난만하게 입을 크게 벌려 밥을 게걸스레 먹는다. 눈물 나는 풍경이었다. 천장의 벽에는 한 끼 10전부터라고 적혀 있는데, 10전 동전 하나인 이 노동자는 솔직하게 큰소리로 염원을 떠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눈물이 날 듯한 기분이었다. 밥의 양이 나보다 많은 것 같았지만, 저걸로 배가 부를까 싶기도 하다. 그 노동자는 매우 밝고 명랑했다. 내 앞에는 밥에 잡탕에 채소절임이 나왔다. 참으로 가난한 산해진미이다. 합계 12전을 치르고 가게 문을 나서자, 너무 고맙습니다 하고 여자 종업원이 말한다. 차를 실컷 마시고, 아침 인사를 나누고, 12전인 것이다. 막다른 세계는 광명과 종이 한 장 차이로 정말로 명랑하다. 하지만 저 40 가까운 노동자의 일을 생각하면, 이건 또 10전 동전 하나로, 실망, 밑바닥, 추락과 종이 한 장인 건 아닐런지-.(1)
다이쇼우 시기의 신쥬쿠新宿에 있는 간이식당에서 일어난 한 장면이다. 간이식당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사료가 거의 없어 이 묘사는 역시 귀중하다.
진흙투성이의 노동자가 10전 동전 하나를 꼭 쥐고서 뛰어 들어온다. 여기에서 아침밥을 먹는다는 건 이 40세 전후의 노동자는 아마 돈 벌러 떠나온 사람이거나 혼자 사는 사람일 것이다. 일하고 있는 건 십오륙 세의 소녀. 이 소녀도 또 다른곳에서부터 일하러 온 것이 틀림없다. 밥과 고기두부와 된장국으로 딱 10전. 고기두부는 간이식당의 기본이다. 보아하니 차는 무제한 같다. 기뻐 보이는 노동자. 그와는 반대로, 먼저 식당에 들어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도 몸을 둔 '막다른 세계'의 빛과 그림자를 보는 카페의 여급인 '나'. 그녀는 오노미치尾道에서 홀로 나왔다. 3명의 등장인물은 모두 도쿄에서 일하는 노동자이며, 저마다 자신의 뱃구레를 스스로 채울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고립된 뱃구레가 모이는 하나의 장소, 그곳이 간이식당인 것이다.
하야시林는 '내'가 먹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음식점에 들어가, 문득, 젓가락통의 더러운 젓가락 다발을 보니, 나에게는 비천한 것밖에 없다는 걸 느낀다. 남의 혀에 닿았던, 닳아서 벗겨진 젓가락 두 개를 뽑아서 그것으로 덮밥을 먹는다. 마치 개 같은 모습이다. 더럽다고도 생각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 인류도 뭐 별것 아니다. 다만, 맹렬하게 맛있다는 감각만으로 정어리 구이에 달려든다. 작은 접시 속의 물에 잠긴 푸성귀의 향기.(2)
세간에서는 민주화다, 새로운 세상이다, 평등이다 이야기하지만, 매일 뱃구레를 채우는 행위 속에서조차, 아니, 오히려 일상 속이기에 결코 평등한 사회를 느낄 수 없는 우울. 그럼에도 살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는 현실에 대한 괴로움. 그 두 가지가 이 단문에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런데, 10전이란 도대체 어느 정도의 금액일까? 『방랑기』의 도처에 등장하는 물건과 그 가격을 열거해 보겠다. 식당에서 술 15전, 모둠전골 2인분 60전, 밥이 한 그릇 5전, 단팥빵 1전, 신쥬쿠의 여인숙 1박 30전, 우동 2그릇 16전, 도미 구이 10전, 방세 2첩 5원, 다리 접는 밥상 1원, 밥공기 20전, 국그릇 30전, 다쿠앙 11전, 젓가락 5전, 떡 담는 망 12전, 원고용지 1첩 8전, 직업 소개 수수료 3원, 자색 비단 24m 5원.
그에 대해 그녀의 급료는 어느 정도일까? 밤 유과 공장 일급 23전, 2주일 아이 보기 2원, 완구 셀룰로이드 도색 일급 75전. 이들을 종합해 생각하면, 10전 동전 하나로 식사할 수 있는 간이식당은 꽤 저렴한 외식점의 부류이지만, 날품팔이나 부업으로 살고 있는 그녀에게는 결코 저렴한 식사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콘 와지로우今和次郎의 이 나간 밥그릇 조사 -식기의 사회화
『방랑기』의 '내'가 이러한 모습으로 간이식당에서 덮밥을 먹고 있었던 것과 딱 같은 무렵, 도쿄의 어느 식당에서는 식사 때마다 사용한 밥그릇의 파손 형태를 스케치해서 1주일 걸려 48매의 밥그릇 그림을 모은 남자가 있었다. 고현학考現学 학자인 콘 와지로우이다. 1927년에 정리된 그 스케치는 「모더놀로지(고현학)」이란 책으로 담긴다.(3) 먼저 그 그림을 살펴보자(그림 1-1).

그림 1-1 이 나간 밥그릇 조사
출처: 콘 와지로우 「모더놀로지(고현학)」 春陽堂, 1930년, 209-210쪽
콘이 말하기를, 매일 다니는 식당의 밥그릇이 매우 더럽고, 이 나가 있는 밥그릇이 다수였기 때문에, 이 스케치를 시작하기로 했다. 콘은 실물 크기의 평면도와 측면도를 주머니에 넣고 가서, 점심마다 몇 개씩 스케치한다는 철저함이다.
"2-3개의 금이 간 건 아직 용납할 수 있다 치고, 밥그릇 주위가 톱니 모양인 것, 부스럼 딱지 모양인 것, 고양이 발 모양 인 것, 이 나간 게 심한 것, 그리고 진짜 40번 같은 건! 완전 폐물 아니냐! 그리고 그들 이 나간 건 죄다 차의 때로 물들어 있다"(4)라고 분개하면서도 적확하게 분석한다. 참으로 이런 밥그릇으로 먹었던 건지 지금 보면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다음의 지적이다.
도기류의 취급 방법이란 것은, 요즘 점점 공영적인 식당이 늘어나는 추세에 있을 때 다시 생각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고 ー즉 재래는 가정 안의 부드러운 손만으로 비교적 소수인 그것들이 다루어지던 상태로부터 이제 새로운 진전에 즈음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고 ー이 조사를 무의미하게 끝내지 않고 제대로 마무리하자는 생각이 듭니다.(5)
모두 함께 여러 가지로 쓰는 밥그릇이라면, 사실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식당의 밥그릇은 쓸 수만 있다면 괜찮다는 것이 되어, 이만큼 이가 나가도 그걸 신경쓰는 사람은 없다. 이것을 콘은 밥그릇을 '공영적 식당'에서 사용하게 된 결과라고 설명한다. 바꾸어 말하면 밥그릇의 '사회화'이다. 식탁의 '사회화'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가족에서 소유하는 식기라면 식당보다도 소중히 다루어, 여기까지 이가 나갈 리는 없을지도 모른다. 뱃구레가 가족으로부터 떨어진다는 것은 식기도 또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모이는 집단 안에서 집합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단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콘이 밝혔듯이 식당에서는 이 나간 밥그릇이 다수라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당시의 간이식당이란 장소는 이 나간 밥그릇과 벗겨져 버린 대나무 젓가락이 식탁에 놓이고, 그 그릇으로 밥, 고기두부, 잡탕, 절임채소 등을 먹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떠드는 가운데 겨우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 그 순간을 기뻐하고 쾌활해 함과 동시에, 매일 밑바닥을 실감할 수밖에 없는 일종의 우울함이 동거하는 공간이었단 것을 알 수 있다.
2. 혀로 쓰는 식당 경제학 -이시즈미 하루노스케石角春之助
단바丹波의 아야베綾部와 도쿄 양육원
이와 같은 간이식당과 식당이 흥성한 도시의 혼잡을, 또 다른 시점에서 계속 주시한 남자가 아사쿠사浅草에 있었다. 자유 기고가이자 저널리스트였던 이스즈미 하루노스케이다.(6) 이시즈미는 1890년에 현재의 교토부 아야베시에서 탄생했다.
이건 완전히 우연이지만, 근대 일본 사회 가장 하층의 고난을 겪으며 대본교大本教의 교조가 되어 구제 사상의 저류底流를 이끌었던 데구치 나오出口なお의 출생지도 아야베이다.(7) 그녀는 텐포우天保 기근이 일어난 1836년에 태어나, 쌀 소동이 일어난 1918년에 사망한다. "정말로 뱃구레가 작아졌다고 생각될 정도로 배부르게 먹은 적도 없다"라고 술회한 가난한 그녀의 생계는 바로 '먹기 위한' 고난으로 가득차 있으며, 그럼에도 여전히 살아가야 하는 현세에 대한 무의식적 저항의 외침을 수반하고 있었다. 목화 농사와 실잣기의 부업이 성행했던 아야베에서 기계제 실의 파도가 도래한 것은 메이지 20년대 초두였다. 야스마루 요시오安丸良夫에 의하면 이 무렵 아야베는 사회 체제의 큰 변동 속에서 지금까지 몸에 익혔던 능력이나 기능이 쓸모없어지게 된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 되었다. 데구치 나오도 그 예외는 아니라, 기계화의 파도 속에서 실잣기 일을 잃고, 넝마주이로 전락한 한 사람이었다. 이시즈미가 아야베에서 이 세상에 생명을 받은 것은 데구치 나오가 고난 속에서 살아가던, 바로 그 시기였던 것이다.
이시즈미는 간사이 대학, 일본 대학 등에 적을 두고, 최후는 메이지 대학을 졸압한 뒤, 「호우치報知 신문」의 기자가 되었다. 그 뒤, 자유 기고가가 된 뒤부터는 많은 문장을 남기게 된다. 대표작이라 일컫는 「걸식 뒷이야기(乞食裏譚)」(8)는 1929년 그가 39세 때 썼다.
「걸식 뒷이야기」의 무대였던 당시의 아사쿠사는 그의 언어로 말하자면 "씹을수록 맛이 있고, 알싸한 맛이 있으며, 떫은 맛이 있는데, 그러면서도 그곳에는 무언가 말할 수 없는 가벼움과 친근함이 있는"(9) 거리였다. 또한 그 반면 "인간의 가장 추악한 창자를 끌어낸 듯한, 불결과 증오가 엉켜"(10) 있는 듯한 거리이기도 했다. 그 거리에서 그는 "아무리 넋을 잃더라도 또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여자들이나 유랑자의 생활"(11)을 계속 기록했다. 걸식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까지 기록한 이시즈미의 문장을 읽으면, 호기심이나 동점심에서가 아니라, 어떻게 그들의 시선에서 당시 아사쿠사의 혼잡을 묘사하고자 했는지가 전해진다.
처자가 없고, 한없이 하층 사회에 가까운 곳에서 살았던 이시즈미는 1939년 병으로 쓰러져, 도쿄시 이타바시板橋 양육원 병원에 입원해 48세로 이 세상을 떠났다. 양육원이란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에 의해 설립된 일본 최초의 공립 구빈시설이다. 아야베에서 생을 받아, 친척이 없는 아이, 노인, 길거리 생활자나 장애가 있는 사람 등을 구제할 목적으로 설립된 이 시설에서 최후를 맞이한 그의 인생과 포개어서 그가 써서 남긴 작품을 살펴보고자 한다.
에도와 도쿄 -아사쿠사 식당 경제학
이시즈미는 오랫동안 아사쿠사에 살며 『걸식 뒷이야기』(그 이후에 『근대 일본의 걸식(近代日本の乞食)』으로 복간) 등 빈민가의 르포르타주를 남겼다. 그런 그가 1933년에 지은 한 책이 『아사쿠사 경제학(浅草経済学)』이다. 메이지·다이쇼우·쇼와의 변천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아사쿠사의 경제사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에는 식당에 관한 기술이 매우 많다. "예전에 아사쿠사의 식당을 모조리 다닌 적이 있다."(12) 이시즈미에 의하면, 아사쿠사는 대중을 흡수하는 소비경제의 현장이었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먹을거리'이며, 그것이 어수선하게 구별없이 모여 있는 장소가 아사쿠사밖에 없다고 한다. "아사쿠사는 온갖 식당이 대중의 호흡을 확고히 붙들고 있다."(13) "그래서 저는 특히 식당에 관해서, 전력을 기울여 할 수 있는 한 많은 종이를 바쳐 상세함을 샅샅이 파헤치려 한다"(14)는 이시즈미는 "식당의 연구는아사쿠사 전체의 연구"(15)라고 하며, 자신의 '혀'로 아사쿠사의 식당 경제학을 그리는 데 집중했다. 이 제목에서는 아카데미즘 경제학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경제란 원래 교환에 의하여 먹을거리를 분배하기 위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면, 먹을거리를 둘러싼 다양한 문제야말로 더욱 중시되어도 좋지 않을까? 그렇게 주장하기 위해서 이시즈미는 굳이 '혀'로, 바꾸어 말하면 '먹는 것'으로부터 『아사쿠사 경제학』을 그리는 데에 집중했던 것은 아닐까 상상된다.
이시즈미에 의하면, 1884년부터 1886년에 걸친 공원지의 정비가 근대 아사쿠사의 첫째 변혁기였다.(16) 아사쿠사의 식당은 이 시기에 거의 우후죽순처럼 증가했다. 1933년 시점에 공원 귀퉁이에만 400 몇십 채의 식당이 있어, 여기저기에서 '어서옵쇼'라는 소리가 들렸다.(17) 요리별로 보면, 일본요릿집, 일품 요릿집, 카페, 중국요리, 초밥집, 메밀국수집, 끽다점, 대중식당이 처마를 맞대듯이 서 있었다.
근세부터 번화가인 아사쿠사는 근대가 되어서도 역시 사람들이 모이는 '먹을거리'의 장이었다.
새끼줄 포렴(縄暖簾)에서 대중식당으로
"아사쿠사의 식도락은 메이지 말기에 이르러 몹시 대중화되었다"(18)고 이시즈미는 말한다. 그 무렵에 콘까지 간이식당이었던 '새끼줄 포렴'의 식당이 차차 대중적인 식당이 되고, 동시에 일양 절충의 '간이식당'이 되었다. 아사쿠사에서는 새끼줄 포렴의 밥집은 근세부터 명물이었는데, 그들 밥집이 식당으로 변화한 것이다.
근세의 조림 가게나 새끼줄 포렴에 대해서는 이이노 료우이치飯野亮一 「선술집의 탄생(居酒屋の誕生)」(19)에 상세하다. 이 책에 의하면, 사실 새끼줄을 여러 가닥 늘어뜨려 발처럼 만든 새끼줄 포렴 자체도 18세기 후반 무렵부터 가게 앞에 걸리게 된 새로운 풍습이다. 그때까지는 문어나 가다랑어포 등 그날 파는 물건을 매달아 놓았는데, 차츰 새끼줄 포렴의 가게가 늘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메이지 시기에 들어서자, "새끼줄 포렴이라 하면 선술집. 선술집이라 하면 새끼줄 포렴"이라는 이미지가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메이지 말기에 식당으로 모습을 바꾸어 갔다는 것이다. 소비의 현장과 밀착된 '먹을거리'의 장은 지금도 옛날도 변화가 멈추는 일이 없다.
그럼, 그들 새롭게 모습을 바꾼 아사쿠사의 식당을 살짝 엿보도록 하자. 이 시기의 아사쿠사에는 똑같은 식당이란 스타일 안에서도 손님층이 달라, 노동자만이 아니라 공장주도 다니는 가게가 있고, 부인 동반으로 식사할 수 있는 가게도 있다면, 무산계급인 '룸펜'을 상대로 하는 가게, 걸식 선술집도 있었다.
예를 들면, 메이지 41년(1908)에 개업한 간이식당 '무사시야武蔵屋'는 아침 5시부터 밤 10시까지 연달아서 나고들며 번창한다. 여기에서는 5전으로 훌륭한 식사를 할 수 있다. "그것도 남이 먹고 남긴 큰 찌꺼기라든지, 나머지라면 5전이 3전이어도 결코 싸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갓 지은 밥에, 말에게 먹일 정도의 큰 그릇에 된장국이 한 그릇, 거기에 채소 절임이 딸려서, 이것으로 자그마치 5전 동전 하나이다."(20) 이시즈미가 다녔을 무렵에는 그외에도 양식류, 맥주, 브랜디, 술 등도 있어서 대중식당으로서의 특징을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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