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 바닥의 질척질척함처럼
이 뱃구레의 쇠약을
비웃을 수조차 없는 사람들
자신의 생각조차도 어깨에 걸친 외투처럼
이 얼마나 덧없는 세상인가 하고 신에게 묻는다.
-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 『방랑기放浪記』 新潮社, 1985년
서장 먹을거리와 사람들 - 보이지 않는 역사의 구축
1. 먹을거리와 사람들의 일상사
근대란 어떠한 시대인가?
문명 개화의 시대, 서양화의 시대, 산업혁명의 시대, 노동자 계급 탄생의 시대, 민법 성립의 시대, 전쟁의 시대, 기업 발흥의 시대, 철도의 시대 등 지금까지 여러 가지 시점에서 이 시대를 이름붙여 왔다. 그러나 그들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의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어디까지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시점과 감상에서 이 시대를 생각해 왔을까? 여기에서 말하는 '사람들'이란 다양한 직업이나 입장의 사람이 포함된다. 농촌에서 도시로 돈 벌러 온 사람들, 예를 들면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 동네 공장의 직공, 상점의 견습 고용살이, 카페의 여급, 중류 계급 가정에서 일하는 식모, 또는 도시에서 도시로 방랑하는 날품팔이, 행상인, 노천 상인, 예능인, 그리고 도시의 대로를 왕래하는 관리, 경찰관, 병사, 은행원, 사무원, 학생들. 그뿐만이 아니다. 무직자, 젊은이, 노인, 아이들, 남자, 여자, 농촌에 사는 사람, 도시에 사는 사람, 유랑인, 부유한 사람, 가난한 사람, 건강한 사람, 병든 사람, 장애를 지닌 사람, 전장의 사람, 후방의 사람 등 사회를 구성하는 이런저런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다. 격동의 시대를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이렇게 생각했을 때, 이 시대의 전모는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근대라는 시대를 오가는 혼잡함 안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누구든지 시대의 주역이었다. 먼지와 소음으로 뒤덮인 그 혼잡함의 발자국은 과연 그들의 체온과 체취 안에서 이해되어 왔을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사람들'을 묘사해 온 사회사의 시도에서조차, 충분히 그려내지 못한 세계가 있는 건 아닐까? 체온과 체취가 느껴지는 세계,(1)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살아 있는 인간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면, 이 책에서는 그걸 역사로 그려보고 싶다.
근세부터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에는 근세적인 마을 질서의 밖으로, 임금노동자로서 특히 도시로 배출되는 사람들이 군郡에 속하는 지역에서의 인구 증대와 맞물려 증가했다. 노동자가 된 그들의 먹을거리는 어떻게 조달되었을까? 급증하는 도시 잡업자, 또는 그곳에서 넘쳐 흐른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손길이 내밀어졌을까? 이러한 문제는 지금까지는 정면으로 다루어지지는 않았다. 예전에 「일본노동사론日本労働史論』에서 스미야 미키오隅谷三喜男는 "기존 경제학이 임금노동을 분석한 시각은 자본의 재생산에 관련된 한도에서 이를 문제삼으며, 임금노동 그 자체가 그 운동의 모든 과정에 걸쳐 분석되지는 않는다"고 기술한다.(2) 그것은 노동자의 생활 과정에까지 시야를 넓힘에 따라 일본 근대사의 모습을 재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명확한 문제 제기였다.(3) 그러나 그 뒤, 그러한 시점에서 일본 근대를 구체적으로 밝히려 한 연구는 거의 진전되지 않았다. 그건 스미야 자신이 기술하듯이,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한다는 것은 여전히 주어진 전제로 여겨지며, 또한 '생활' 과정을 구체적으로 해명하고, '생산' 과정을 포함한 전체 모습을 통일시키는 사료의 수집이 매우 곤란했기 때문이다. 즉 이건 보이지 않는 역사였다.
이 책에서는 이 과제에 응하기 위해 '사람들'과 '먹을거리'를 잇는 문제를 중심축으로 두고, '뱃구레'를 통해 일본의 근대가 어떠한 시대였는지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4) 근대는 도시의 발달과 함께 외식이 본격적으로 성립하고, 산업의 발전과 함께 공장에서 노동자의 집단 급식 체계가 확립되어 간 시대이다. 기록으로 남기기 어려웠던 일상의 '먹을거리' 경험이나 풍경도, 먹을거리가 체계적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각지에 다양한 사료가 남겨졌다. 이들 사료를 이용함으로써 사람들의 생활과 생산을 포괄한 근대라는 시대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이상, 우리는 무언가를 먹지 않을 수 없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먹을거리는 지금까지 필요없었던 적이 없으며, 어느 시대에나, 어떠한 곳에서도,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먹을거리를 둘러싼 다양한 사실과 현상이나 문제를 논하는 것은 곧, 살아가는 것을 논하는 일이 될 것이다. '매일 먹는다'라는 것. 이 당연한 신체 감각을 놓치지 않고 역사를 묘사하는 일을 이 책에서는 '일상사'의 구축이라고 의미를 붙인다.
일상의 활동 심층에는 방대한 물질생활이 있고, 그 기반 위에 시장경제가 성립되며, 나아가 그곳에서부터 자본주의 경제로 파생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3층 구조의 심층에 무게를 두고, 일상사로서 역사를 다시 그릴 필요성을 주장한 것은 페르낭 브로델이다. 그는 "전통적인 역사서 안에서 인간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고 비판하고, "인간이란 그 먹는 대상 자체이다(Der Mensch ist <,> was er isst)"(5)라는 것이 역사에 미친 영향의 크기를 논해야 한다고 문제 제기한다. 지금까지의 역사학에서는 물질생활, 곧 화폐가 개재하지 않는 자급적 세계, 물물교환의 세계, 시장경제와는 다른 이론으로 전개되는 세계는 발전 단계의 가장 초기 형태라고 자리매김하고, 적극적으로 논하지 않았다.(6) 이에 대해 브로델은 이러한 단선적인 발전 단계 사관이 아니라, 3개의 층이 동시에 존재해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전체상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그것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것이 의식주를 둘러싼 세계인 것이다.(7) 특히 '먹을거리'의 문제는 3개의 층 가운데 결절점에 위치하는 중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이 결절점으로부터 역사와 사회를 다시 바라보려는 시도이다.
2. 근대의 도시와 인구와 뱃구레 -약식도
'먹는다'는 행위는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일이면서, 시대에 따라서 무엇을 먹는지,(8) 어떻게 먹는지,(9) 누구와 먹는지, 어디에서 먹는지,(10) 그리고 무엇을 위해 먹는지는 달라진다.
이 책 모두에 실은 하야시 후미코의 시 1절은 그녀의 자전적 소설 『방랑기』에서 발췌한 것이다. 먹을 걸 구하지 못해 쇠약해져 가는 그녀의 뱃구레를 알아채고, 염려하는 사람 없는 도시에서 겪는 고독을 노래하고 있다. 그녀를 비웃을 수조차 없는 사람 또한 쇠약해진 뱃구레를 감싸안고 있었다. "나는 숙명적으로 방랑자이다"라는 유명한 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행상인인 부모와 함께 각지를 전전한 뒤 혼자서 상경해 빈곤함 속에서 여러 직업을 방랑하는 나날을 적은 그녀의 일기에 기반하여 썼다. 시대는 1922년부터 1926년이다.
"여급 필요 전단지가 나올 듯한 카페를 차례차례로 들개처럼 찾아다니고, 다만 먹기 위해 다른 무엇보다도 나의 위장은 무언가 고형물을 바라고 있었다. 아아, 어떻게 해서라도 나는 먹어야 한다"(11)라 하며 여급이 되어 일에 매진하지만, "아아, 무어라 하나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 먹는 것의 어려움"(12)이라 탄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이제 당분간 먹는 걸 휴업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어요"(13) 등이라는 극한에서 빛나는 유머가 곳곳에 녹아 있는 것이 이 소설의 한 매력이다. 그렇더라도, "큰길의 삶은 뒷골목의 생활과는 완전히 다르다. 10전의 소고기덮밥도 먹을 수 없고"(14) "하루종일 비가 내린다. 눈깔사탕과 말린 다시마로 이슬 같은 목숨을 이어가고"(15) "어디선가 소바 육수를 끓이고 있는 냄사가 난다. 뱃구레가 부들부들 떨려서 어쩔 수 없다"(16)라는 상황은 먹는 것 자체가 자기 책임이 되어 가는 시대의 심각함을 전하는 이외의 아무것도 없다.
이러한 상황은 왜 생긴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선 근대의 사회 변화에 눈을 돌려보자. 이 시대에는 산업의 발흥 및 도시의 성장과 맞추어 일본의 인구 증가가 전례없는 기세로 진전되어,(17) 근세에는 볼 수 없었던 많은 임금노동자가 탄생했다. 근세에도 이동을 수반한 다양한 각종 생업이 존재했지만, 그 형태와의 결정적 차이는 여성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공장 노동자나 각종 잡업자로 집단적이면서도 집중적으로 이동했다는 점에 있다. 이에 의해 도시와 인구의 관계는 출생율의 상승과 사망률의 저하에 따른 자연 증감만이 아니라, 농촌에서 도시로 유입됨 등에 따른 사회 증감에도 크게 영향받는 복잡한 변화를 포함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회 변화의 약식도를 그리는 것은 사실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1920년 제1회 국세조사 이전의 전국적이면서도 계속적인 인구 동태를 파악하는 통계 사료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 그 주원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메이지·다이쇼우 시기의 인구 동태는 역사인구학의 추계에 의해 밝혀져 왔다.(18) 호구 조사에 의한 인구 증가율을 사용해 1918년 이후 전국 163도시의 인구 추계를 횅한 이토우 시게루伊藤繁에 의하면, 1893년 이후에 도시 인구의 지속적 성장이 시작되어 1920년대 무렵에 증가율이 감퇴하기 시작했다.(19) 나아가, 이 전국적 동향을 메소 스케일에서 상세히 검토한 스즈키 마코토鈴木允에 의하면, 군 지역의 높은 출생율이 지속됨에 따른 인구 증가가 도시화의 원동력이 되어 인구 이동이 활발해짐으로써 도시화가 더욱더 진행되었다.(20) 즉, 산업의 융성, 인구 전환, 도시의 성장에는 상호관계가 보이고, 그 패턴은 근대 이전의 지역적 특징이나 그 뒤의 산업화의 진행 정도 등에 규정되어 다양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21) 그중에 공장의 입지와 노동력의 집중적인 유입으로 특징되는 공업 지역은 근대 특유의 패턴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지역이었다고 해도 좋다(그림 서-1).

그림 서-1 전국의 공장 분포 추이
출처: 「공장통계표工場統計表』 각 년에서 작성.
주) 종업원 5인 미만의 공장은 포함되지 않음.
그러나 오다카 코우노스케尾高煌之助가 「장인(職人)의 세계・공장의 세계』(22)에서 기술하듯이, 근대 경제 성장 과정에서 공장 노동력의 조달 또한 경제 이론에서 상정하는 이상으로 복잡하다. 공업 부문에서 새로운 형태의 노동 수요가 발생하고, 공업 지역에서의 취업 기회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더라도 필요하면서 적절한 '질'의 노동이 즉시 공급된 것은 아니었다. 공업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노동력의 수요는 늘 '질', '양' 모두 구조적 변화를 겪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직업이나 이동이 자유로워진 데에다, 그 노동력에는 장기간에 걸친 집단적 공동작업에 종사할 능력, 필요최저한의 기초 학력(읽기·쓰기·셈하기), 기능 훈련 등이 준비되어야 한다. 또한 한 마디로 '공장'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는 3가지 형태, 곧 첫째로 재래적인 기술이나 조직을 확대해 성장한 것(양조업 등), 둘째로 외국에서 새롭게 이식된 생산 체계와 기존의 장인 조직을 활용한 것(기계기구가공업 등), 그리고 셋째로 완전 백지의 상태에서 생산 조직을 형성한 것(방직업 등)이 있었다. 이렇게 보면, 공업 규모의 확대와 함께 새로운 노동자를 끌어 당긴 첫째와 둘째의 공장 지역과 공장의 입지와 함께 막대한 신규 노동력을 필요로 한 셋째의 공장 지역이라 하듯이, 인구 이동은 지역적 차이를 수반하면서, 꽤 복잡한 모습을 나타냈다고 생각할 수 있다.(23) 그와 같은 동향을 포함하면서 전체 인구 동태의 큰 파동은 근대 일본에서 공업화, 도시화와 함께 인구가 도시부로 유입, 증가함에 따라서 근세에는 볼 수 없던 역동적인 인구의 구조 전환을 발생시켰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그들의 대부분은 음식물의 자급적 생산 기반을 갖지 않고 생활 물질을 구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인구였다는 것이다.(24)
이상을 바탕으로, 인구나 노동력을 '사람들'의 '뱃구레'로 바꾸어서 생각하고 싶다.
공업화와 도시화는 많은 뱃구레가 농촌에서 떨어져 도시로 집중됨에 따라 진전되었다. 국세 조사를 바탕으로 1920년과 1930년을 비교해 보면, 1920년 일본의 총인구는 5596만 명, 그 가운데 농림업 종사자는 1500만 명, 제조업 종사자는 500만 명, 상업 종사자는 700만 명이었던 바, 10년 뒤인 1930년이 되면 총인구가 849만 명 증가하고, 농림업 종사자는 변화가 없었던 한편, 제조업 종사자는 100만 명, 상업 종사자는 180만 명 증가했다. 또한, 도시에 사는 노동자는 466만 명에서 857만 명으로 늘어나고, 총인구에서 점하는 비율은 11.9%에서 13.3%로 상승했다. 나아가, 6대도시 인구(도쿄, 오사카, 교토, 고베, 나고야, 요코하마)에서 보면, 673만 명에서 1094만 명이 되어 331만 명 증가했다.(25) 총인구에서 점하는 업종별 비율로는 아직 농림업 종사자가 많다고 할 수 있으나, 그 비율은 저하해 이 10년 동안 가장 변화가 컸던 것은 제조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인구와 도시 인구의 뚜렷한 증가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사람들의 뱃구레는 대체 어느 정도 채워졌을까?
이 물음에 직접 답하는 것도 어렵다. 음식물의 생산량을 단순히 인구로 나누어 하나의 뱃구레에 들어가는 음식물의 양을 계산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와 어른, 여성과 남성은 뱃구레의 크기가 다르고, 육체 노동자와 사무 노동자는 뱃구레가 바라는 음식의 양이나 질이 다르며, 안정된 직업을 가졌는지 아닌지에 따라서, 항상 채워져 있는 뱃구레와 텅 비기 쉬운 뱃구레가 사회 안에는 혼재되어 있다. 따라서 경제 발전이 음식 생산의 확대를 촉진했더라도 반드시 모든 뱃구레를 충분히 채울 수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근대에 임금과 소비의 관련으로부터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검토한 연구에 의한 약식도에서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쳐 실질 임금, 개인 소비 지출 모두 상승하고, 지출에서 차지하는 음식 비율을 나타내는 엥겔 계수는 완만하게 저하했단 것을 알게 되었다.(26) 전체적으로 사회는 풍요로워진 듯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경제 발전이 반드시 생활수준을 향상시켜 사망률의 저하로 직결되지는 않았다. "경제 발전은 사망률의 저하를 가져왔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일본과 영국의 비교를 시도한 사이토우 오사무斎藤修에 의하면,(27) 영국의 경우 경제 발전이 초래한 도시화가 사망률의 상승을 불러오고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노동자 계급의 생활수준 저하와 영양 불량, 아이들의 발육 불량, 사람과 물건의 이동이 급속히 활발해짐에 따른 질병 환경의 변화가 특히 도시 지역의 사망률을 상승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도 유아 사망률에 관해서는 메이지 시기 이후에도 그 수준에 눈에 띄는 개선은 볼 수 없었다. 그 요인의 모든 건 밝혀지지 않았지만, 적어도 영양학에서 보아 사실은 메이지 유신 직후부터 1차 대전까지 25년 정도에는 음식으로 섭취하는 영양의 '양' 향상은 진전되었지만, '질'은 그만큼 변하지 않았던 것을 알게 되었다.(28) 덧붙여서 주목할 건, 직업에 따라 영양 섭취량이 다르다는 점이다. 또한, 칼로리 섭취에 한하면, 소득 격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칼로리 섭취량은 급료 생활자보다 많았단 것을 내각 통계국의 조사가 보여준다.(29) 개별 사례를 보면, 인력거꾼은 5050킬로칼로리, 하역 인부는 4126킬로칼로리이다. 영양 섭취의 질로 눈을 돌리면, 농촌과 도시에서는 식생활 패턴이 다르며, 특히 동물성 단백질의 섭취라는 점에서는 농촌이 도시보다 낮은 수치를 나타냈다.
이들 먹을거리를 둘러싼 복잡한 상황을 고려하면,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경제 발전에 의한 생활수준의 향상, 뱃구레의 만족, 건강한 성장이라는 은혜를 충분히 향수했던 것이 아니고, 특히 도시 노동자와 그 가족은 오히려 손에 넣은 임금의 대부분을 먹기 위해 쏟아붓고, 또 그들의 뱃구레는 불안정해지기 쉬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고 이해된다. 임금, 음식 가격의 변동에 더하여, 날씨에 좌우되는 날품팔이 노동, 계절 노동, 공장의 폐쇄와 해고는 드문 일이 아니었기에, 도시 노동자의 집단에 대한 귀속은 항상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3. 밖에서 밥 먹는 일 -모르는 사람의 불로 만든 식사
근대의 이와 같은 먹을거리와 사회의 변화를 동시대에 기록으로 정리한 사람들이 있다. "재래의 전기식 역사에 불만인 결과" "나라에 편만한 서민이라는 사람들이 눈을 뜨고 귀를 기울이면 시청할 수 있는 것인 한, 그리고 단지 조금만 마음을 간직한다면, 반드시 생각이 이르게 되는 바의 의견만을 기술했다"(30)라는 『메이지 다이쇼우 역사 세상편(明治大正史世相篇)』의 저자 야나기타 쿠니오柳田國男는 그 한 사람이다.
야나기타는 같은 책의 제2장에서 '먹을거리의 개인 자유'에 대해 기술한다. 우선 이 장의 제목 그것이 이 시대에 나타난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근대는 먹는 것이 개인의 자유가 되기 시작한 시대였다. 여기에서 '마을의 향기 축제의 향기' '작은 냄비 요리와 전골 요리' '쌀의 소중함' '물고기 요리법의 변천' '채소와 소금' '과자와 사탕' '육식의 새 일본식'이란 항목이 기술된 최후에 다루어지는 것이 '밖에서 밥을 먹는 일'이란 주제이다. 우선 그 문장에 주목해 당시 먹을거리의 변화를 살펴보자.
콩자반·해산물 조림 같은 모르는 사람의 불로 졸인 것이 어떤 방식도 없이 스며들어 온다. ...... 이렇게 되면 간편한 한 그릇 밥의 장사가 당당히 이루어지는 건 당연한 이치이고, 따라서 개개의 가족의 사유재산, 곧 용돈 문제가 다시금 귀찮아지게 되는 법이다. (31)
'모르는 사람의 불'이란 것은 자택의 부엌이 아니라 외부의 부엌이란 의미이다. 기성 반찬이 늘어나는 것과 함께, 한 그릇 밥이란 장사가 번창하기 시작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간이식당에서 먹는 것은 먹을거리에 대한 개인의 자유와 부자유가 확대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에 따라 식비는 가계로부터 개인으로 분리되는 형태가 된다. 그건 대국적으로 보면, 사유재산의 필요성이 높아진다는 사회 변화도 함의하는 것이었다. 야나기타의 문장을 읽으면, 일상의 식사 풍경이 사회 구조의 변화에까지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단순히 한 그릇 밥이라고만 할 수 없게 된다.
한 그릇 밥은 원래 불길한 연상이 있어, 신장대를 받드는 사람에게는 미움을 받았지만, 이제 그런 일은 신경 쓰는 사람이 사라졌다. 메이지에는 여러 큰길의 밥 파는 찻집을 차츰차츰 간이식당으로 개조했던 것이다. ...... 사발이란 그릇이 밥그릇을 대신하게 되고, 튀김 덮밥·소고기 덮밥·닭고기계란 덮밥 등의 기발한 이름이 전국적으로 퍼진 것도 모두 이 시대의 새 현상이다. 재밌는 것은 도시락이 집에서 쓸모없어짐과 동시에, 따로 그것만을 전문으로 하는 생활이 일어나고, 한편으로는 그 제조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번성하게 된 점이다. ...... 공중 식당·공동 취사의 필요는 이미 인정되고 있지만, 빵을 주식으로 하는 사회처럼 그 실현은 쉽지 않은 듯하다. 따뜻한 밥과 된장국과 겉절이와 차의 생활은 사실은 현재의 최소가족제가 겨우 만들어낸 새 양식이었다. 이를 초탈해 또 그 다음의 안을 꿈꾸기에는 그 인상이 너무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32)
한 그릇 밥이란 것은 원래 죽은 사람의 베갯머리에 바치는 것인데, 차차 그 의미는 옅여지고 한 그릇 가득 담은 밥이란 의미로 널리 일상에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근세에도 큰길 주변에는 밥 파는 찻집이란 음식 장사를 볼 수 있었지만, 메이지 시기 이후가 되면 그것이 간이식당으로 모습을 바꾸어 덮밥이 등장하고, 전국으로 보급되었다. 그림 서-2에는 장작을 멘 남자의 뒤쪽인, 시즈오카 아사마浅間 신사(현재 시즈오카시 아오이구葵区)의 앞에 간이식당이 찍혀 있다.
그리고 집에서는 도시락을 먹지 않게 된 대신에 밖에서 도시락만 먹는 사람이 늘어났고, 그것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 또 증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야나기타가 이걸 쓸 때에는 아직 공중 식당이나 공동 취사는 보급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흥미로운 건, 그것들이 보급되기 어려운 것은 따뜻한 밥, 된장국, 절임, 차라는 식사는 소규모 가족제가 생기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해진 비교적 새로운 형태이고, 그것이 사회에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그림 서-2 시즈오카 아사마 신사 앞(현재 시즈오카시 아오이구)의 간이식당과 땔감을 멘 남자(알부민 인화 사진. 메이지·다이쇼우 시기라고 생각된다). 출처: 필자 소장.
야나기타가 말하기를, 그 형식이 변화하는 것은 가족이라는 장을 초월한 다음 단계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초월하는 시대가 도래한다. 그것이 이 책의 무대가 되는 다이쇼우 시기인 것이다.
4. 사회 문제는 위의 문제 -죄와 뱃구레
야나기타가 파악한 '먹을거리의 개인 자유'에서 오는 뱃구레의 고립화라는 현상을 사회의 병리와 결부해서 그 공죄를 묻는 것은 오가와 시게지로우小河滋次郎였다.
지금의 사회 문제가 된 것도 궁극인 바는 곧 위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33)
1918년 "간이식당론"이라고 제목을 붙인 문장 안에서 오가와는 이렇게 기술한다. 노동자의 증가, 물가의 등귀 등에 의해 여러 사회 문제가 발생하는 중에 "어떻게 하면 다수 민중의 위에 만족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이른바 사회정책의 골자가 되는 바이다"(34)라고 주장하는 오가와는 메이지 행정 관료의 한 사람으로, 독일에서 유학하며 감옥학을 배워 일본의 '감옥학'을 확립한 인물이다.
오노 슈우조우小野修三 『감옥행정관료와 메이지 일본(監獄行政官僚と明治日本) -오가와 시게지로우 연구』(35)에 의하면, 나가노현 우에다上田에서 탄생한 오가와는 도쿄 전문학교 법률학과,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별과법학과에서 법학을 배운 뒤, 1886년에 내무성 경보국에 입성하여 감옥행정관료가 되었다. 감옥행정은 먼저 내무성이 주관하고 있었는데, 1900년에 사법성으로 이관되었다. 오가와의 은사인 호즈미 노부시게穂積陳重에 의하면, 오가와는 내무성 시대에 활약해 사법성 시대에는 실의에 빠져 보낸 관료였다고도 전해진다.(36) 오가와에게 형법이란 '응수応酬'가 아니라 '교육'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에, 응수를 중시하는 사법성과의 사이에서 사상적으로 어긋남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의 형법 사상은 1906년에 문과성에 제출해 법학박사의 학위를 받은 그의 논문 <미성년자에 대한 형사 제도의 개량에 관하여(未成年者二対スル刑事制度ノ改良二就テ)>에 잘 나타나 있다.(37) 그것은 나중에 '감화 교육론'(38)으로 발전해 나아가게 된다. 그 연장선 위에 있는 1915년에 쓴 <소년 재판법의 채부 여하(少年裁判法の採否如何)>라는 논문에서는 다음 같은 사회 상황이 기술되어 있다.
가내업이 공장업으로 변하였으므로 가장이 가정에 있는 일이 드문 것은 물론, 주부 또한 이른바 부부 함께 생계를 이어가게 되어 종일 집을 나가 있는 것이 대부분 노동 사회 공통의 현상이라 할 수 있으며, 관련된 사회에서 태어난 아동은 위엄 있는 아버지의 감독을 받는 일이 전무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자애로운 어머니의 사랑과 양육의 혜택을 입을 수 있는 자 또한 어느 만큼도 없다.(39)
가내업에서 공장업으로 변한다는 건 즉, 직주가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중에서 노동자가 된 부모는 아마 공장의 식당이나 외식으로 먹을 기회가 늘어나는 한편, 아이의 뱃구레는 부모와는 다른 장소에서 채워지게 되어 고립화를 면할 수 없었다. "사회 문제는 위의 문제이다"라고 한 오가와에게는 범죄가 일어나는 건 그 배경에 빈곤, 교육의 결여 등의 사정이 있다는 생각이며, "구빈, 감화, 자선, 경찰 등"과 "감옥 사무"는 연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40) 즉, 오가와의 입장에서 보면, 죄와 뱃구레는 하나로 연속되어 관련된 문제인 것이다. 감옥 관료를 그만둔 뒤, 오가와는 오오사카부에서 방면위원제도方面委員制度의 설립에 전념한다.(41) "간이식당론"을 쓴 것은 바야흐로 이 시기였다. 오가와에 대해서는 이 책 후반에서 상세히 기술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먹을거리의 문제는 사회의 문제로 이어져 있다는 오가와의 지적이다. 우리들은 이 지적의 건너편 쪽에 다이쇼우 시기의 도시 문제와 사회 변화의 구체상을, 더 나아가 현대의 먹을거리와 사회의 문제를 엿볼 수 있다. 뱃구레에 주목하는 것은 즉, 사회를 고려하는 일이다. 먹을거리를 생각하는 것은 인간을 아는 것과 다름없다. 이것을 이 책을 관통하는 시각으로 삼고자 한다.
이 책은 크게 나누어 다섯 가지 주제로 이루어진다.
첫째 주제는 '먹을거리와 도시화'의 관계이다(제1장, 제2장). 근대는 지방 도시도 포함해 대부분의 도시가 발달했던 시기이기도 한데, 그에 따라 먹을거리의 경험과 풍경은 어떻게 변했을까? 여기에서는 대도시인 도쿄와 오사카를 무대로 간이식당과 도시 문제, 공영 식당과 도시 정책에 대해 생각한다.
둘째 주제는 '먹을거리와 산업혁명'의 관계이다(제3장). 일본에서 이른바 산업혁명이 시작되자, 공장의 증가와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증가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특히 섬유 산업은 그 중심이었다. 공장을 목표로 많은 노동자가 모인다는 것은 즉, 음식 수요가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에서는 근대에 다양한 산업 집적이 나타났던 아이치현愛知県을 사례로, 공장의 1차 사료를 이용해 지금까지의 산업사 연구에서는 간과되었던 이 지극히 당연한 현상에 주목한다. 여기에서는 공장 식사의 함바 제도에서 직영 제도로의 변천, 중소공장에 의한 공동 취사와 영양식 배급소의 전개, 영양학과 먹을거리의 과학화, 합리화에 대해 생각한다.
셋째 주제는 '먹을거리의 산업화'이다(제4장). 자급적인 생산 기반을 가지지 못한 노동자의 증가는 그들의 뱃구레를 채우기 위해 필요한 음식의 새로운 생산체계와 유통체계를 필요로 했다. 공장, 근대, 밥집, 식당 어느 곳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건 사실은 '절임'이었다. 하루 중 1인당 한 끼에 2조각, 하루에 6조각이라 해도 전체 소비량은 막대한 수에 달했을 것이다. 매일 매끼니, 절임이 식탁에 오르는 것을 가능케 한 것은 식품가공의 대규모화와 채소 재배의 확대와 혁신이었다. 그 문제를 여기에서는 특히 여공과 절임의 관계, 다쿠앙 생산과 무 재배의 근대화, 가정에서 군수로 이행해 가는 세상을 통해 생각한다.
넷째 주제는 '먹을거리의 생산·유통 구조의 재편'이다(제5장, 제6장). 먹을거리의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그 재료가 되는 대량의 농산물이 필요해진다. 그건 누가 생산한 것일까? 또한, 그건 어떠한 경로를 거쳐 사람들의 뱃구레에 다다른 것일까? 제5장에서는 흙을 경작하는 농촌, 농가, 농업에 관련된 청년들에 초점을 맞추고, 제6장에서는 일본의 주요 도시에 중앙도매시장이 탄생한 과정과 그 의미를 생각한다.
다섯째 주제는 '시장 경제와 먹을거리'이다(제7장). 넷째 주제까지는 식당이나 공장에 발을 옮기는 사람들이 주인공이지만, 사실 이 시대에는 식당에조차 발을 옮기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던 건 아닐까?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이슬 같은 목숨을 이어나갔던 것일까? 그 답을 찾아서, 식당의 뒷문으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볼 수 있는 역사를 그린다. 주로 남은 먹을거리와 그 행방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종장에서는 이들 다섯 주제를 검토하면서 밝혀진 근대라는 시대의 특징을, 먹을거리와 사람들과 지역의 관계성에서 고찰하고, "뱃구레의 현대"를 생각하는 초석으로 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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