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계 곡물의 기원지
벼의 전파 경로와 시기
일본의 역사에 관하여 일본인이 가장 궁금한 것이 벼의 전래 시기와 그 경로이다. 물론 고고학자도 이 예외는 아니다. 벼의 전래는 고고학자만이 아니라 민속학이나 지리학, 농학 등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에 의하여 옛날부터 주목되어, 다양한 원산지와 전파 경로가 상정되어 왔다. 예전에는 벼의 원산지로 중국 남부나 윈난 지방 등 여러 설이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장강 중하 유역이 벼를 재배하기 시작한 장소임을 알게 되었다.
그럼 이곳에서 언제쯤 어떻게 전해졌을까? 유전학의 입장에서는 대만을 경유해 남서제도를 북상했다는 설도 있는데, 고고학적으로는 그 증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고, 중국 대륙의 연안부를 북상한 벼가 산둥 반도에서 요동 반도를 경유해 조선반도를 남하하고, 조선·대한해협을 넘어서 북부 큐슈 또는 산인 지방으로 전해졌다고 하는 경로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전파 경로이다(宮本 2003). 단, 고고학자를 여전히 괴롭히고 있는 문제는 언제 일본 열도에 전해졌는지이다. 또한, 대륙계 곡물은 벼만이 아니다. 중국 화북 지방에 기원을 지닌 조나 기장, 서남아시아에 기원을 지닌 보리나 밀 등도 일본에 언제쯤 건너왔는지 잘 알 수 없다. 이들은 고고학의 세계에서도 아직 논쟁하고 있다.
중국에서 농경의 기원과 확산
중국은 맥류를 제외하고 일본의 재배식물 대부분의 기원지라고 지목된다. 벼는 물론 조와 기장 등의 잡곡에 더해 피, 메밀, 차조기 등도 정확한 기원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중국 대륙이 그 후보지라고 생각된다. 이들 식물 가운데 그것들이 비교적 명확한 것은 벼(기원지=장강 중하 유역), 조와 기장(기원지=황하 유역 이북)이다. 최신 연구 성과에 의하면 중국에서 농경 기원의 중심지는 이것들에 뿌리줄기류 재배의 옛 열대 농경지대를 더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표4). 약 1만 년 전에 중국 화북 지방에서는 야생 기장이나 조의 이용이 시작되어, 9000~7000년 전에는 앙소仰韶 문화로 대표되는 본격적인 농경을 기반으로 한 사회가 성립한다. 마찬가지로 장강 하류 지역에서도 약 1만 년 전에 야생 벼의 이용이 시작되어, 중류 지역에서는 8400~7300년 전, 하류 지역에서는 7200~6300년 전에 본격적인 벼농사 사회로 돌입한다. 장강 하류 지역에 있는 하모도河姆渡 유적(7000~5800cal BP)은 예전에는 벼농사에 기반한 성숙한 농경 경제에 이르렀다고 평가되어 왔는데, 인근에 있는 거의 같은 시기의 전라산田羅山 유적에서 탄화 벼의 이삭대 기부 등의 상세한 연구에 의하여 탈립성 야생종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며, 이 시기에는 아직 벼의 재배화는 최고조에 달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지역에서 본격적인 농경을 기반으로 한 사회가 성립하는 것은 다음 단계인 양저良渚 문화라고 한다.
농경 유형 | 지역 | 주요작물 | 발전 단계와 그 시기 | |
건조지 농경 | 황하 유역의 황토 지대를 중심으로 하고, 몽골 남부~회하 북부 지역 | 기장, 조 | 야생 이용 개시 | 10000 cal BP |
농경 이행기 | 9000-7000 cal BP | |||
농경 본격화 | 7000-6000 cal BP | |||
벼농사 농경 | 장강 중하 유역을 중심으로 하고, 북쪽은 회하, 남쪽은 남령산맥까지의 지역 | 벼 | 야생 이용 개시 | 10000 cal BP |
농경 이행기 | 9000-6500 cal BP | |||
농경 본격화 | 6400-5300 cal BP(중류) 5200-4300 cal BP(하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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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열대 농경 | 남령산맥의 남쪽, 주강 유역 | 뿌리줄기류 | 야생 이용 개시 | 10000 cal BP 이전 |
벼농사 수용기 | 6000 cal BP |
표4. 중국의 농경 기원지 3대 섹터(Zhao 2011에서)
북방 지구의 벼농사 농경은 앙소 만기에 개시되어, 용산 문화기에 큰 발전이 있다고 한다. 앙소 문화 만기에 속하는 공현巩県 조성趙城 유적에서는 탄화 벼가 다수 출토된다. 또한 용산 문화에서는 논벼가 보편적으로 출토되고, 황하 유역에서도 논벼 경작이 행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 앙소 만기(5000 BP)부터 용산 문화에 걸친 시기(5000~4000 BP)가 황하 유역에서 가장 벼농사가 발달했던 시기이다. 황하 하류 지역에 있는 산둥 반도로 전파된 건 이미 8000 BP의 후리后李 문화에 속하는 월장月庄 유적 등의 예가 있으며 비교적 이른 단계에 전파되었다고 하는데, 유적 수가 증가하고 논 유구나 탄화 벼가 안정적으로 발견된 것은 역시 용산 문화부터라고 한다. 일본이나 조선반도에서 벼가 출현하는 건 이 용산 문화의 농경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한국 농경의 역사
조선반도 지역은 대륙계 곡물류의 2차 기원지이기 때문에, 그 연구 성과는 일본으로 전파된 시기를 생각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하다. 이 지역으로는 벼보다도 일찍 우선 화북 지방에 기원을 지닌 조나 기장 등의 잡곡 농경이 전파된다.
미야모토 카즈오宮本一夫 씨가 기술했듯이, 조선반도 남부에서는 약 5500년 전의 신석기 시대 중기가 그 전파 시기라고 생각되어 왔다(宮本 2009). 미야모토 씨는 이 지역의 농경화를 세 단계로 나눈다. 먼저, 중기에 화북 지방에서 조와 기장이 전파되고, 그중에 약 4500~4000년 전의 빗살무늬토기 시대 후기~만기에 벼가 조선반도 중부에 전해지고, 3600~3000년 전의 민무늬토기 시대 전기에 관개에 의한 벼농사 농경이 전파된다고 한다. 이것들의 단계적 전파의 배경에는 이미 각각의 시기에 일어났던 기후 한랭화가 방아쇠가 된 사람의 이동이 있었다고 한다.
이경아 씨는 탄소연대 측정 결과로부터 빗살무늬 문화를 3기로 나누어 전기(7500~5500 BP), 중기(5500~4000 BP), 후기(4000~3400 BP)라고 한 뒤, 농경화에 대해서는 전기 단계와 중기, 후기 단계로 나누어 동삼동 패총에서의 탄화 기장, 조와 평거동 유적에서의 대두, 팥의 발견을 받아들여 빗살무늬 중기 단계에 잡곡과 콩류의 재배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전기 단계부터 명아주과나 마디풀과, 기장속, 갯보리속, 개밀속 등의 종자 등의 '인위적 식상(Anthropogenic flora)'이 인지되어 경제적으로 가치 있는 다양한 야생종이나 잡초 등을 이용했다고 기술한다.
또한 이경아 씨는 잡곡 농경에 대해서도 조선반도의 중북부 지역에서는 더욱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을 지적했다. 나아가 일본의 토기와 조선반도의 토기를 비교연구하는 후루사와 요시히사古澤義久 씨도 빗살무늬토기 시대 전기에 본격적으로는 아니지만 맹아적인 조, 기장 농경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상정했다.
한국의 가장 오래된 조, 기장의 발견
2011년 2월, 큐슈 지역의 농경 자료를 추적하던 중에 압흔법을 이용해 일본 대륙계 곡물의 직접적 기원지인 한국 남부에서 행한 곡물 재배의 실태가 어떠한 것인지 알고 싶어서 한국 부산으로 갔다. 옛날부터 친구였던 복천동 박물관 관장 하인수 씨의 주선으로 동삼동 패총 토기의 압흔을 조사할 기회를 얻었다. 부산 시내는 6년 만의 대설로 하얗게 물들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생각하지 못했던 발견을 하게 된다.
동삼동 패총은 부산광역시 남부의 영도구에 있는 신석기 시대 조기~만기에 걸친 패총 유적이다. 예전은 1992년에 일본인 학자에 의하여 조사가 이루어져,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해 다종의 석기나 골각기 등 귀중한 유물을 출토한 일로 옛날부터 주목되었던 유적이다. 1999년에 하인수 씨에 의하여 정비를 위해 발굴조사가 행해져, 다량의 토기를 비롯한 귀중한 유물이 빗살무늬토기 시대 조기~만기에 이르는 다수의 문화층으로부터 검출되었다. 이 조사 결과, 층위는 지표로부터 기반층까지 10장으로 구분되고, 신석기 시대 조기의 덧무늬토기 단계부터 만기의 율리식 토기 단계까지 다섯 개의 문화층으로 합쳐져 있으며, 이 땅의 토기 편년의 기본이 되는 유적이 있는 것과 함께 발견된 끈무늬토기나 코시다케산腰岳産이나 하리오산針尾産 흑요석은 해협을 낀 한일 두 지역 교류의 깊이를 말해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유적에서 특히 주목된 것이 빗살무늬토기 중기에 속하는 수혈 주거터에서 검출된 탄화 조와 기장이다. 출토된 조의 연대 측정에 의하여 4590±100 BP라는 수치를 얻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잡곡 농경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인정되었다.
최초로 행해진 압흔 조사에서 우리는 신석기 시대 조기에 속하는 덧무늬토기에서 기장의 압흔을 검출했다(그림31). 또한 2011년 10월에 실시한 추가조사에 의하여 전기의 다량의 조를 바탕흙에 반죽해 넣은 영선동식 토기를 확인하고, 나아가서는 같은 부산시에 있는 범방 패총, 범방 유적에서도 조기, 전기로 거슬러올라갈 가능성이 있는 조와 기장 압흔을 검출했다. 또한 2012년 2월에는 국립 김해박물관의 의뢰로, 창녕 비봉리 유적의 토기 압흔 조사를 실시해 전기 전반 단계의 조, 기장 자료에 더하여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팥 압흔도 검출할 수 있었다.
거슬러 올라가는 조, 기장 농경의 전파
동삼동 패총을 시작으로 하는 한국 남부의 신석기 시대 유적의 압흔 조사에 의하여, 조선반도 남부에서 종래 생각하던 시기보다 1500~1000년 정도 이른 약 7000 BP에 기장이나 조가 재배작물로 존재했던 것이 밝혀졌다. 가장 오래된 기장 자료를 검출한 덧무늬토기의 연대(6000~5000 BC)는 거의 화북의 배리강裴李崗 문화와 같은 시기로, 조선반도 남부 건조지 농경(잡곡 재배)가 매우 빠른 속도로 확산된 것을 보여준다. 이 이른 단계에서의 농경에 대한 적응은 정형화된 것은 아니지만, 중기 이전에 이미 경운 도구로 타제 돌도끼나 매갈이 도구로 갈판과 갈돌이 존재한 것으로부터도 뒷받침된다. 다만, 이 단계는 이경아 씨가 기술했듯이 그 생업의 방향성은 다양한 야생 자원에 적합하며, 재배작물이 생업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낮고, 아직 집약적인 농경으로는 이행하지 않은 단계임에 변화는 없다.
한국에서 기장, 조 압흔을 검출한 유적에서 이루어진 토기 점수당 검출율을 보면, 벼를 포함한 재배 곡물의 압흔 출현율이 1%를 넘는 유적이 7곳 가운데 5곳이나 되고, 청동기 시대가 되면 신석기 시대보다도 곡물 압흔의 검출율이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곡물 씨앗 혼입이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고 가정하면, 검출율의 높이는 생업에서 곡물 재배의 비중이 증가함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 점은 나중에 기술하듯이 한층 더 검증이 필요하다.
조선반도 농경의 기원과 확산
이번 발견에 의하여 명확해진 잡곡 농경 개시 시기의 소급은 단순한 잡곡 재배 전파 시기의 소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제창되었던 한랭화에 의한 농경의 개시(전파)론(宮本 2003, 2005, 2007, 2009)에 관하여 재고를 독촉하는 것이다. 미야모토 카즈오 씨는 농경의 확산에 기후 현상의 악화에 의한 농경지의 인구압 등에 의한 사회집단의 분산화 현상이 따른다고 추정한다.
농경의 기원론은 여러 설이 존재하지만, 환경과 인구 균형론으로서의 한랭화 농경 기원설은 현재로서는 설득력을 잃어 가고 있으며, 한랭화에 의한 해안선 변화설도 한국의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이 지적되고 있다(Lee 2011). 적어도 화북형 잡곡 농경이 전래하는 미야모토 씨가 말하는 조선반도 농경화 첫 단계는 영거 드라이아스 시기 이후의 제3기 해퇴海退(약 5500~5000 cal BP)와는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번에 판명된 새로운 농경 개시의 시기는 오히려 그 이전인 제2기 해퇴(약 7000~6800 cal BP)와 가깝지만, 덧무늬토기의 연대관은 약 7600~7100 cal BP이고 기장 압흔을 가진 조기 후반의 덧무늬토기를 그 사이의 어느 연대에 일치시키냐에 따르지만, 약간의 연대적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 옳고 그름은 앞으로 충분히 논의되겠으나, 그것을 차치하더라도 조선반도 최초의 농경화가 한랭화에 기인하는 요동과 요서에서 온 인간 집단의 남하, 즉 농경 패키지의 이입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 이유로 농기구의 문제가 있다. 잡곡 농경의 전형적인 농기구로 갈돌과 갈판이 있다. 이 석기는 도토리 등을 포함한 식물 씨앗의 제분도구로 평가되는데, 본래의 기능은 조나 기장 등의 겉껍질을 제거하는 도구라고 생각된다.
비봉리 유적이나 범방 패총, 범방 유적의 출토 사례를 보면, 이미 전기 전반 단계에는 약간 삐뚤어져 있지만 단면이 반원형인 갈돌이 존재하고, 전기 전반에는 평면형 비누 모양의 갈돌이, 전기 후반이 되면 갈판의 크기를 능가하는 갈돌이 출현한다. 이것들은 화북형 잡곡 농경의 기원지라고 지목되는 흥융구興隆溝 유적이나 배리강 유적과 비교하면, 정형성 및 도구로서의 완성도가 낮다. 즉, 이 한국 남부에서 발달한 걸 보아, 완성된 것이 이입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이 지역의 잡곡 농경은 사람의 이동에 따르는 농경 패키지 그것의 이입은 아니고, 기원지와의 문화적 접촉에 의하여 재배 곡물과 도구(가공법)에 관한 약간의 정보만 전해졌을 뿐, 그 이후 지역마다 발전해 왔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기장, 조 압흔의 검출율에서 보면, 조기부터 만기에 걸쳐 조와 기장의 검출율은 서서히 증가한다. 다만, 동삼동 패총의 영선동식 조를 담는 토기는 전기 후반이고, 앞뒤 운동에 의한 쓿기를 행하는 정형적인 갈판, 갈돌도 비봉리 유적에서 전기 후반에 확인되는 바를 보면, 압흔의 출현율에는 드러나지 않는 무언가의 변화가 전기 후반에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여기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지금까지 중기 단계라고 생각해 왔던 농경 관련 유물의 검출 사례나 유적 수의 증가 현상에는 그 이전에 도움닫기 단계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조선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토기에 보이는 한일 교류의 모습
미야모토 카즈오 씨나 타나카 소오이치 씨에 의하면 신석기 시대 조선반도 남해안 지역과 서북 큐슈 지역이 츠시마対馬・ 이키토우壱岐島를 사이에 두고 교류 관계에 있었던 것은 그 왕래가 어로 활동을 하며 우발적인 접촉만이 아니라 시기에 따라서는 무언가 목적과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 상정된다. 그 교류의 정점은 죠몬 시대 전기 전엽과 후기 전엽으로, 전자의 시기에는 조선반도 남부에서 서북 큐슈 지역으로, 후자의 시기에는 거꾸로 북부 큐슈 지역에서 조선반도 남해안 지역으로 움직였다고 한다.
후기 전엽 이후의 교류에 대해서는 이즈미식出水式 토기 이후 키타쿠네야마식北久根山式 토기 전후의 시기까지 있던 교류 관계는 다시 저조해지고, 후기 후엽의 타로우자코식太郎迫式 토기・미만다식三万田式 토기에서 시작되는 흑색마연黒色磨研 토기 양식 시기의 교류 토기는 현시점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교류의 흔적을 인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죠몬 시대 만기 후반의 쿠로카와식黒川式 토기 단계의 공구멍무늬토기라 한다. 구멍무늬토기는 후암리식 토기부터 역삼동식 토기의 시기에 상당하고, 죠몬 시대 후기 후엽의 시기와 병행하는 조선반도 남부의 토기는 새김덧띠무늬토기(가락동식 토기)라고 한다(타나카 2009). 이 시기는 미야모토 씨가 상정하는 큐슈 성숙成熟 원경園耕 제2단계의 전반기에 상당하는데(宮本 2009), 토기로부터 본 교류는 저조한 시기라 여겨진다. 또한 곡물 자체만이 아니라, 옥 문화의 전래 등 미야모토 씨가 돈 곡물 전파의 근거에 대해서도 오카다 켄이치岡田憲一, 하인수 씨 둘은 부정한다(岡田・河 2010).
나아가 미야모토 씨의 큐슈 성숙 원경 제2단계의 후반 단계에 관해서도, 사람의 이동을 수반할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는데(宮本 2009), 쿠로카와 시기 구멍무늬토기의 평가에 대하여 토기를 연구하면 적극적인 사람의 이동을 수반한 교류는 없었다고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宮地 2006). 최근 토기 압흔 조사의 전전에 따라 칸토우関東 지방・토우카이東海 지방・츄우부中部 지방・킨키近畿 지방・산인山陰 지방에서 죠몬 시대 만기 후반~말의 조, 기장, 벼 등의 곡물 압흔이 검출되고 있는데, 큐슈 지방의 야요이 시대 조기 병행기, 또는 그 이후의 것이고, 그 이전 대륙계 곡물의 유입에 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다(中沢 2012 등).
조, 기장은 일본 열도로 파급된 걸까?
우선, 토기 문화에서 두 지역의 교류가 성행했다고 생각되는 죠몬 시대 전기 전엽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싶다. 이 시기는 바로 조선반도 남부의 신석기 시대 조기 말부터 전기에 상당하고, 앞에서 보았듯이 한국 남부에서는 이미 조, 기장의 재배가 인지된다. 특히 두 지역 사이의 교류가 성행했다고 여겨지는 이 단계의 후반기에는 교류의 방향성도 조선반도부터 북부 큐슈를 향한 것으로 평가되며, 이와 같은 토기에서 볼 수 있는 교류의 모습으로부터는 충분히 조, 기장 농경의 전파도 상정할 수 있다(표5).
표5 한국 신석기~청동기 시대의 주요 작물 조성과 죠몬·야요이 시대 편년 비교
문양과 토기 모양에 강한 공통성을 볼 수 있는 건 한국의 영선동식 토기와 일본의 니시카라츠식西唐津式 토기이다. 그러나 일본 열도에서는 이 시기에는 농경 관련 석기나 조, 기장의 탄화 곡물은 물론, 압흔으로도 곡물은 아직 1점도 검출되지 않는다. 조사 사례가 적기에 절대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행한 압흔 조사에 의하여 해당 시기의 조, 기장을 검출하지 못했다고 하는 건 만일 곡물 전파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매우 희소(소량)한지, 그 전파가 지리적으로 매우 점적이어서 큐슈 지역 또는 일본 열도 전체에 확산하지 않았단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재배 곡물의 상태는 조선반도 남부로부터 대규모 집단의 이동을 수반한 전파가 아니었단 것을 의미한다.
히로세 유이치広瀬雄一 씨는 영선동식 토기와 굴곡진 몸통부를 가진 니시카라츠식 토기가 유사한 이유로, 문화적 정보의 전달자(어민 남성)과 그 구현자(여성)의 차이에 의한 토기 정보의 불완전한 전파를 들었다(広瀬 2012). 즉, 토기의 세트 그것이 전해진 것이 아니라, 토기 제작의 기본 정보가 완전히 전해지지 않고, 취향에 의하여 문양이나 일부 토기 종류가 선별적으로 전해졌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영선동식 토기를 보던 어부가 부인에게 정보만 전해 만들게 된 것이란 도식이다.
그러나 츠시마에는 다종다양한 문양을 지닌 영선동식 토기의 기종 조성 전반이 정리되어 반입된다(그림32). 따라서 츠시마에서는 사람의 이주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조, 기장도 반드시 츠시마까지는 왔을 터이다. 이것을 찾기 위하여 2014년 7월, 츠시마시 교육위원회의 오우에 히로카츠尾上博一 씨의 협력을 받아 츠시마시의 코시다카腰高 유적, 묘우토이와夫婦石 유적, 누카시ヌカシ 유적 등 조선반도계 토기를 출토한 유적의 토기 압흔 조사를 행했다. 아쉽지만, 그 결과는 전혀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부진했다. 통영볼레나무(Elaeagnus pungens) 같은 종자의 압흔을 발견했을 뿐, 곡물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한일 신석기인들이 교류한 최전선인 츠시마에서는 어떠한 교류가 있었을까? 그 흔적은 반드시 이 츠시마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에 남아 있을 터이다. 그 흔적을 찾기 위하여 잠시 이 땅으로 발을 옮길 것이다.
조선반도로 전파된 벼
조선반도 남부에서 조, 기장을 주로 하고 대두나 팥, 들깨 등을 재배한 농경에서 벼가 들어온 것이 빗살무늬 후기 이후이다. 다만, 빗살무늬 후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벼 자료는 논의의 와중에 있다(표6). 청동기 시대, 즉 민무늬 토기 전기 단계의 벼 자료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신석기 시대의 벼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다르다. 현재, 빗살무늬토기의 바탕흙 안에서 벼의 플랜트 오팔(식물의 세포 안에 축적된 종 고유의 형태를 한 유리질)이 검출되었다고 보고되는 것은 만기의 예로 농소리 유적, 후기의 예로 조동리 유적이나 주엽리 유적 등이다. 이 플랜트 오팔에 의한 재배종의 존재 가부 검토 문제점에 대해서는 코우모토 마사유키甲元眞之 씨가 후대 자료의 혼입 가능성 문제와 함께, 동정의 어려움을 지적한다. 안승모 씨도 벼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부채꼴의 플랜트 오팔이 벼 이외의 다른 식물에도 유사한 것이 존재할 가능성을 지적한다. 쇼다 신야庄田慎矢 씨는 조선반도의 신석기 시대 벼 자료는 자료를 음미하면 토기 안의 플랜트 오팔 자료밖에 남지 않았고, 오염의 가능성도 버릴 수 없다며 그 평가는 어느 쪽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결론을 지었다. 한국에서 행한 압흔 조사에 의해서도 아직 신석기 시대의 벼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中村 외 2011).
표6. 조선반도에서 신석기 시대의 벼농사 관련 자료(宮本 2003을 고침)
최근 대천리 유적 출토 곡물류의 탄소연대측정치가 공표되었다(한 외 2014). 보리나 밀은 AMS 연대로 4380 ±60 BP와 4590 ±80 BP, 주거터의 탄화물과 똑같은 연대를 나타내는 데에 대하여 측정된 벼 5점의 연대는 1770 ±60 BP~2070 ±70 BP의 수치를 나타냈다. 조사자 한창균 씨는 똑같은 유구에서 나온 곡류의 연대에 2000년이나 격차가 있는 점에 대하여 벼의 미탄화 정도를 원인의 하나로 들고 있는데, 4점도 똑같은 측정치가 나오는 점에서 이 측정에 의하여 신석기 시대의 벼 자료가 과학적으로 부정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한국 남부의 가장 오래된 벼 자료
신석기 시대의 벼 관련 자료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곡물 자료는 청동기 시대 조기의 것이다. 청동기 시대 조기의 덧띠무늬토기 단계에서는 어은 I지구 104호 주거터에서 확인되었듯이, 조와 벼, 보리, 밀, 대두 등이 수반하고 이것은 덧띠무늬토기(미사리식)과 함께 압록강 유역 또는 요동에서 농경 생산을 기반으로 하는 주민들이 남하한 것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라 평가된다(안 2004). 이 덧띠무늬토기의 상한 연대는 연구자마다 정해져 있지 않기에, 지금까지는 연대치가 확실한 탄화 씨앗으로부터 곡물의 구성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어은 I지구의 탄화 벼 연대 2850 ±60 BP나 탄화 조의 연대 2830 ±60 BP는 죠몬 시대 만기 말의 쿠로카와식 새로운 단계와 거의 똑같은 연대치이고(이・이 2002), 조선반도 남부에서도 보리나 밀의 출현이 기원전 1000년 무렵을 거슬러 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쇼다 신야 씨에 의하여 재측정된 강릉시 교동 유적의 탄화 벼 연대치 2860 ±20 BP도 이것을 크게 거슬러 오르지는 않았다(Shoda 2010, 庄田 2011a). 그러나 최근 손준호 등에 의하여 덧띠무늬토기 단계(청동기 시대 조기)의 미사리 유적 주거터 출토 토기의 압흔 조사가 행해져, 어은 I지구보다도 오래된 기장과 벼가 같이 수반된 예가 보고된다(손 외 2010).
이것을 정리해 보면, 조선반도 남부에서는 청동기 시대 조기 후반(일본의 죠몬 시대 만기=쿠로카와식 시기)에는 조에 더하여 벼, 보리나 밀이 이미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고, 나아가 그 이전의 청동기 시대 조기 전반(죠몬 시대 후기 후반 상당 시기)에도 기장과 벼는 존재하며, 이것에는 조도 더해졌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에서는 죠몬 시대 후기 말이라 생각되는 벼 압흔 자료가 있지만, 이것은 논의중으로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다음절 참조). 이것을 제외하면, 오래된 것으로 죠몬 시대 만기 후반의 쿠로카와식 새로운 단계부터 덧띠무늬토기 출현 시기에 걸친 토기에서 벼나 조의 압흔이 검출된 예가 있는데, 야요이 조기 이후가 아니면 벼나 조에 기장이나 보리, 밀 등의 맥류를 더한 세트는 빠짐없이 나오진 않는다. 이것은 전달 방식의 문제인지, 자료학의 문제인지 확실하지 않다.
나카무라 다이스케中村大介 씨 등은 벼가 청동기 시대 조기(덧띠무늬토기) 단계에 병행하는 죠몬 시대 후기 후반에 전파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전개되지는 않았다 하고, 청동기 시대 성립의 획기적 하나로 논벼농사에 주목할 필요를 강조한다(中村 외 2011). 쇼다 씨도 죠몬 시대 후기의 벼가 존재하더라도 역사적 중요성은 없기 때문에 유무론은 생산적이 않다고 하고, 논조는 오히려 "전파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庄田 2011b).
압흔 자료에서 본 큐슈 후·만기 농경론
큐슈 지역에서 검출된 압흔
지금까지 논의된 죠몬 농경론은 주로 탄화 종실에 기반해 행해져 왔는데, 근년의 복제법(압흔법)의 진전에 의해 탄화 종실이 가진 시기 인정에 관한 애매함이 해소되기 시작해 불충분하다고는 하나 재배식물의 종류나 그 출현 및 전개 시기에 대하여 대략적인 경향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중에서 특히 나카자와 미치히코中沢道彦 씨 등이 진전시킨 죠몬 시대부터 야요이 시대에 걸친 전국적인 조, 기장, 벼 등의 대륙계 곡물의 복제법에 의한 조사는 각지에서 그것들의 출현 시기를 명확히 해 나아가고 있다(中沢 2014a, 2014b). 나카자와 씨는 큐슈 지방에서 검출된 대륙계 곡물의 압흔에 관하여 ①죠몬 시대 만기 전반 이전의 압흔 자료는 토기 형식이나 압흔 그것의 동정에 문제가 있어, 큐슈 지방에서도 열도 전체와 마찬가지로 덧띠무늬토기 출현 시기 이전에는 그 전래가 없었고, ②다만 현재 일본의 가장 오래된 벼 나락 압흔이라 평가되는 시마네현島根県 이타야板屋 III 유적의 마에이케식前池式 토기 병행 시기와 같은 덧띠무늬토기 출현 시기에는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기술한다.
필자는 일찍이 죠몬 시대 후기 후반~만기 중엽(3500~3000년 전)에 조선반도에서 대륙계 곡물(민무늬토기 잡곡 농경)이 유입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 뒤, 가고시마현 스이덴무카이 유적의 인좌식 토기 고단계의 벼 모미부과압흔을 기초로 죠몬시대 후기말의 천성·고가단계(3300년전)로 좁혔습니다. 그러나 이 스이텐무카이水天向 유적의 이리사식入佐式 토기 옛 단계의 벼 나락이 달린 이삭 압흔을 바탕으로 죠몬 시대 후기 말의 아마기天城, 코가古閑 단계(3300년 전)로 한정되었다. 그러나 스이텐무카이 유적의 벼 나락 압흔 토기에 관해서는 미야치 소이치로宮地聡一郎 씨에 의해 야요이 시대 이후의 토기일 가능성이 지적되었다. 이로써 지금까지 큐슈 지방에서 죠몬 시대 후기 이전으로 알려진 대륙계 곡물의 압흔 자료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것에 부정적인 견해가 제시된 셈이다.
야마노테라식·유우스 I식 시기 이후
이 시기에는 이타즈케板付 유적 등에서 검출된 관개 논 유구나 탄화 벼에 의해 본격적인 논벼 경작이 행해졌단 것은 분명하다. 사가현 나바타케菜畑 유적에서는 탄화 벼에 더해 탄화 조도 검출된다. 이 나바타케 유적 사례는 탄화 조 자료로는 북부 큐슈의 가장 오래된 것인 듯하다. 이 유적에서는 엔도 에이코遠藤英子 씨에 의하여 야마노테라식山ノ寺式・유우스夜臼 I식 시기에 속하는 9~12층 출토 토기 1점, 8층 위 출토 토기 2점에서 벼 나락 달린 이삭 압흔, 12층 출토의 깊은 바리의 바닥부에서 겉껍질 달린 조 알곡 압흔 4점이 검출되어, 압흔에 의해서도 해당 시기 대륙계 곡물의 존재가 확인된다. 이 이전까지는 이 시기의 대륙계 곡물 압흔은 가고시마현 카미나카단 유적의 벼 나락 달린 이삭의 압흔 사례(야마노데라식, 유우스 I식 시기)와 필자 등이 검출한 겉껍질 달린 조 알곡 압흔(유우스 IIa식 시기)가 있을 뿐이었다. 미야자키현 쿠로츠치黒土 유적은 벼 압흔이 보고서 발행 때부터 알려졌는데, 최근 나카무라 나오코中村直子 씨 등의 모임에 의하여 미야코노죠우시都城市 시내의 죠몬 만기부터 야요이 시대의 유적을 중심으로 압흔 조사가 실시되어 조를 포함한 대륙계 곡물의 압흔이 검출되었다. 나카자와 미치히코 씨는 사카모토坂元 B 유적이나 쿠로츠치 유적의 조나 벼의 압흔은 유우스 I식~유우스 IIa식 시기라고 평가하고, 이것들을 더한 전국적인 압흔 자료를 근거로 일본 열도에는 덧무늬토기 시기를 거슬러 오르는 죠몬 시대 만기 전반에 벼, 조, 기장 등의 곡류가 존재했던 증거는 없다고 기술한다.
필자 등을 포함한 최근의 해당 시기 유적의 압흔 조사에 의하여후쿠오카현 하루原 유적, 하시모토이츠쵸우다橋本一丁田 유적, 나카那珂 유적 등에서 껍데기 달린 조나 기장 알곡의 압흔 토기가 검출되고 있다(그림34). 하시모토이츠쵸우다 유적에서 출토된 기장의 압흔은 시마네현 산타다니三田谷 I유적 사례에 견주는 일본에서도 가장 오래된 사례라 생각된다. 따라서 야마노테라식, 유우스 I식 시기에는 이미 논 유구나 탄화 벼와 함께 압흔에서도 벼, 조, 기장 자료가 검출되고 있기에, 논벼 경작과 함께 조나 기장, 콩류, 들깨 등의 밭농사가 행혀졌던 것은 확실하다. 초점은 이것들이 덧띠무늬토기 출현 시기 또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오르는지에 있다.
코가식古閑式 시기 이전
그전에 쿠로카와식 토기 이전, 죠몬 시대 후기·만기 전엽의 상황을 보도록 하자.
죠몬 시대 중기 말의 아타카식阿高式 토기부터 코가식(이리사식 옛 단계) 토기에 걸친 압흔 자료 가운데 재배식물로서 대두, 팥, 들깨가 있고, 이것들에 야생 식물 졸참나무속, 산초속(머귀나무가 많음) 등의 종실, 나아가 어리쌀바구미가 더해진다(그림35). 이 시기의 확실한 대륙계 곡물은 아직 검출되지 않는다. 일찍이 이 시기의 대륙계 곡물로 평가를 받은 압흔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야마자키 스미오山崎純男 씨에 의하여 발견된 구마모토현 오오야 유적(아타카식 토기)의 벼 압흔이 있고, 이어지는 시기에는 같은 이시노모토石の本 유적(토리이바루식鳥井原式 토기, 코가식 토기)나 같은 타로우자코太郎迫 유적(타로우자코식 토기) 등에서 벼 나락의 압흔이 검출되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벼로서 동정할 요건이 부족한 점에서 나카자와 미치히코 씨에 의하여 부정되었다. 나아가 조로 보고된 후쿠오카현 시게토메重留 유적 사례(야마기식 토기, 코가식 토기 옛 단계)도 1점은 조의 요건이 부족하고, 또 1점은 탄화물 때문에 검증할 수 없다고 평가된다. 또 이시노모토 유적의 야마기식 토기의 보리 압흔이라 보고된 자료에 관해서도 보리 이삭의 요건은 충족시키지 않는다. 위에 적은 스이텐무카이 유적의 나락 압흔 토기 같이, 벼 나락이 달린 이삭으로서의 요건은 충족하나, 토기의 형식 인정에 의해 죠몬 시대 후기가 아니라 덧띠무늬토기 출현 시기~야요이 시대 조기 또는 야요이 시대 이후의 것이라 평가된 예가 있다.
이에 반하여, 이 시기의 확실한 예를 늘리고 있는 것이 콩류의 압흔이다. 미야자키현 우치노노 유적에서는 코이케바루 상층식 토기 시기의 대두나 팥이 압흔으로 검출되어, 지금까지 추정했던 큐슈 지방으로 콩류의 재배 전파가 나아가서 후기 전엽까지 거슬러 오르는 것이 분명해졌다. 팥의 탄화 자료도 노조에野添 유적이나 히로와라広原 제1유적에서 후기 후반~만기 초두의 예가 검출된다. 또한, 가고시마현 안에서는 팥-츠카가단塚ヶ段 유적(우에카세다식上加世田式 토기), 대두-우에카세다 유적(이리사식 토기)의 압흔이 추가된다.
이상의 상황으로부터 보아, 현재로서는 이 단계에서는 대륙계 곡물 압흔으로 확실한 것은 검출되지 않고, 동일본에서 전파된 팥, 대두, 들깨를 중심으로 한 밭작물이 재배되던 단계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쿠로카와식~덧띠무늬 출현 시기
문제가 되는 것이 죠몬 시대 만기 중엽~후엽의 쿠로카와식 단계이다. 쿠로카와식 토기는 세 시기 또는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쿠로카와식 토기 옛 단계의 압흔 자료는 약간이고, 중간 단계의 압흔 자료는 전혀 없다. 이것은 재배식물이 없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시기의 압흔 조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단 것을 의미한다. 쿠로카와식 토기 옛 단계의 예로는 나가사키현 쿠레이시바루礫石原 유적의 대두 씨앗 압흔, 후쿠오카현 하루다原田 쥬우라쿠十楽 B유적의 들깨 열매 압흔이 있을 뿐이다. 이 단계는 여전히 앞의 만기 전엽까지의 상황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며, 그 실태도 똑같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이 변화하는, 즉 조나 벼의 압흔이 검출되기 시작하는 것은 쿠로카와식 토기 새 단계 또는 덧띠무늬 출현 시기의 자료군이다(그림36). 2015년 2월에 <큐슈 죠몬 만기의 농경 문제를 생각하다>를 주제로 개최된 큐슈 죠몬 연구회의 자리에서, 필자가 검출한 겉껍질 있는 조 알곡 압흔을 가진 오이카현 이시이이리구치 유적 출토의 정제 얕은바리 모양(精製浅鉢形) 토기(그림36-1)은 미아치 소이치로 씨에 의하여 덧띠무늬 출현 시기라고 평가되었다. 단, 미야자키현 미기쿠즈가사코 유적의 새김없는 단면 삼각형의 덧띠를 지닌 조제粗製 바리 모양 토기(그림36-8)에 대해서는 미야치 씨는 그 시기 비정을 보류했는데, 쿠와하타 미츠히로桒畑光博 씨는 마츠조에식松添式(쿠로카와식 새 단계)라고 평가했다. 이외에 미야자키현 호시하라星原 유적이나 사카모토坂元 B유적에서 조직흔 토기에서 겉껍질 달린 조 알곡 압흔이 검출되는데, 조직흔 토기가 덧띠무늬토기까지 남았다는 가능성으로부터 시기적으로는 덧띠무늬토기의 단계라고 평가된다(나카자와 2014b). 이외에 가고시마현 코자코 유적에서 검출된 벼 나락 달린 이삭이나 들깨 압흔을 지닌 안으로 기우는 주둥이부를 가진 정제 얕은 바리형 토기(그림36-10)에 대하여 미야치 씨는 새김덧띠무늬 IIa 시기라고 평가했다. 이 유적 토기도 지금까지 쿠로카와식 새 단계부터 덧띠무늬토기 사이에 놓인 히고바루干河原 단계(東 2009)라고 평가되었던 것이다.
이상의 상황으로 보면, 나카자와 씨가 예상했듯이 덧띠무늬 출현기에는 큐슈 지방에서도 조, 벼가 확실히 존재했다. 문제는 그것이 쿠로카와 새 단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지 여부이다. 이것은 토기 편년관 여하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한국의 민무늬토기 전기의 역삼동, 후암리 단계에는 큐슈 지방에 조나 벼가 전파되었던 것은 확인할 수 있다.
남겨진 문제
남겨진 문제는 쿠로카와식 토기와 덧띠무늬토기 사이에 자리매김할 수 있는 히고바루 단계(東 2009)의 편년적 자리매김이나 쿠로카와식 새 단계의 지역별 연대차이다. 히고바루 단계의 토기는 가고시마현이나 미야자키현, 나가사키현 남부를 포함한 지역에 분포하는 지역적인 토기인데, 쿠로카와식 토기 새 단계부터 미야치 편년의 덧띠무늬 I기를 포함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덧띠무늬 II기의 일부를 포함할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면, 가고시마현 카미즈루上水流 유적의 히고바루 단계로 여겨지는 지느러미 달린(鰭付) 얕은 바리 모양 토기는 2710 ±30 BP의 연대치를 가지고, 이것은 북부 큐슈의 야마노테라식, 유우스 I식 토기보다도 50년 새롭다. 또한, 히고바루 단계가 쿠로카와식 토기 새 단계와 같았더라도 지역별로 동일한 토기 형식의 사용 연대나 사용 기간에 기울기가 있다면, 토기에서 나오는 압흔 곡물을 토기 형식별로 늘어놓아도 곡물의 확산 상황은 복원할 수 없다. 국립역사민속박물관의 연대 측정 결과에 의하면, 새김덧띠무늬토기의 지역적 연대적 기울기는 북부 큐슈와 남부 큐슈에서는 200년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 큐슈 죠몬 문화연구회의 토론회 자리에서 미야모토 카즈오 씨는 북부 큐슈에서는 덧띠무늬토기가 사용되고 있을 때, 중남부 큐슈에서는 아직 쿠로카와식 토기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제시했다.
148쪽 소실
이를 탄소연대법의 문제에 빗대어 "연대치는 얻었으나 그것을 교정 곡선에 올리자마자 2400년 문제에 직면한 듯하다"고 표현했던 일이 있다. '2400년 문제'란 간단히 말하자면, 교정 곡선이 이 시기에 수평이 되어 탄소측정치를 이 선 위에 올리더라도 연대가 정확하지 않은 현상을 말한다. 토기 압흔으로 발견되는 곡물 자료는 끝까지 파고들면 식물학이나 농학의 문제가 아니라 고고학의 해석 문제이며, 그 해석은 사람 본위의 생각이고 불안정함을 제거할 수 없다.
그러나 큐슈 지방에서도 덧띠무늬토기 출현기에 확실한 벼나 조가 있었단 것은 거의 틀림없게 되었다. 따라서 곡물 전파가 그 이전의 쿠로카와식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지 아닌지는 이론적으로 생각하면, 북부 큐슈 지역의 쿠로카와식 토기를 조사함으로써 앞의 문제를 회피할 수 있다는 것이 된다.
일본 열도 농경화의 여러 단계
세세한 부분의 문제점은 남아 있지만, 큐슈 지방에서 근년에 축적된 압흔 자료는 죠몬 시대 후기부터 만기 전반(쿠로카와식 옛, 중간 단계)까지로, 쿠로카와식 새 단계 이후와는 그 조성이 크게 다른 것을 계속 보여주고 있어, 이 지점에 큰 획기가 있는 듯하다. 그리고 곡물로서의 요건과 죠몬 토기로서의 요건 두쪽을 만족시키는, 모든 고고학자가 허용하는 확실한 대륙계 곡물은 현상으로는 쿠로카와식 신 단계 이후로 한정된다.
일본 열도에서 대륙계 곡물의 도래지의 하나라고 생각되는 큐슈 지방의 사례를 축으로, 잠정적이지만 일본의 농경화를 아래와 같은 단계로 구별하고자 한다.
I기
유용한 식물의 재배 개시 = 후기 구석기 시대 (1만 6000년 전 이전)
조롱박을 용기로 이용하기 위해 재배했을 가능성이 있다.
II기
식용 식물의 재배 개시 = 죠몬 시대 초창기~조기(1만6000~7300년 전)
삼, 들깨, 피, 십자화과가 출현하는 시기이며, 재배된 지역은 국소적이지만 섬유용 식물 이외에 곡물이나 기름용 종자 등 식용 식물의 재배가 개시된다.
III a기
콩과, 옻나무의 재배 개시 = 죠몬 시대 전기(7300~5500년 전)
종부 고지대나 칸토우 서쪽 지역을 중심으로 견과류 이외에 장기 저장이 가능한 전분원인 팥이나 대두(주식으로 이용이 가능)가 재배되어 마을의 안정화(정주)나 인구 증가 등 사회적 변화에 영향을 주었다. 이외에 전대의 재배 식물에 우엉도 더해진다.
III b기
식물 재배의 융성과 전국적 확산, 큐슈로 동일본계 재배식물이 전파됨 = 죠몬 시대 후기~만기 전엽(5500~2860년 전)
팥, 대두, 들깨의 재배 식물에 야생 식물인 졸참나무속, 산초속, 거기에 어리쌀바구미가 더해진 조성. 특히 중기 말 이후는 서일본에 콩 재배의 중심지가 이행되어 나아간다. 동·동북 일본을 중심으로 밤의 관리 재배가 개시된다. 이 단계에서 대륙계 곡물을 제외한 재배식물은 거의 빠짐없이 나온다. 들깨나 콩류 등의 재배식물은 동일본에서부터 후기 전엽에는 전파되어 온다.
IV기
대륙계 곡물(민무늬토기 잡곡 농경)의 유입 = 죠몬 시대 만기 중엽~후엽(2860~2800년 전)
쿠로카와식 토기의 새 단계 =히고바루 단계, 미야치 편년 덧무늬 I기를 포함하는 이 단계의 특히 후반기에 큐슈에서도 조, 기장, 벼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들은 동시기의 조선반도 민무늬토기 문화의 곡물 조성으로, 재래의 콩류나 들깨 등의 재배가 더해진다. 밀, 보리에 대해서는 이 단계 또는 이 다음의 V기일 가능성도 있다. 다만, 대규모 사람의 이동을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작물의 재배는 식민지적 마을에서 소규모로 행해졌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V기
논벼 경작의 도래 = 야요이 시대 조기 이후(2800년 전 이후)
조선반도 민무늬 전기의 논벼 경작을 수반하는 문화 복합이 전래하는 시기로, 일정 규모의 집단이 함께 이주한다. 복숭아, 매실 등의 재배 과수도 도래한다.
이 단계설은 최근 10년 동안 축적된 복제법을 기축으로 한 조사 연구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다. 현시점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고민족식물학의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에 기술하듯이, 복제법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세계가 새로운 기술이나 수법에 의하여 계속 밝혀져 이 단계설도 가까운 장래에 뒤집어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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