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족한 수렵채집민' 논쟁
죠몬 농경론의 지금
일본 농경의 개시에 대해서는 야요이 시대 초기에 조선반도에서 온 벼농사 경작의 전파에 의하여 성립되었다는 것이 누구나 허용하는 일본 고고학계의 일반적인 생각일 것이다. 다만, 그 이전의 죠몬 시대에 농경이 있었다는 설은 고고학 측에서는 <죠몬 중기 농경론>(후지모리藤森 1970)나 <죠몬 후만기 농경론>(카가와賀川 1966)이 그 대표격이며, 지리학이나 농학 측에서 제창된 '조엽수림 문화론'(나카오中尾 1966, 우에야마上山 외 1976, 사사키佐々木 1971·2007·2009·2011)을 끌어들여 학문적 일대 관심사가 되어 현재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이 죠몬 농경론의 역사를 보면, 후지모리 에이이치藤森栄一 씨의 <일본 원시 육경陸耕의 여러 문제>(『역사평론歴史評論』 4-4, 1950년)이나 카가와 미츠오賀川光夫 씨의 <중국 선사 토기의 영향>(『고대학연구古代学研究』 25, 1960년)이 그 첫물이며, 그 뒤 나카오 사스케中尾佐助 씨에 의한 <재배 식물과 농경의 기원>(1966)이 나왔던 것처럼 아이디어에 관해서는 고고학이 앞섰다. 후지모리 씨의 죠몬 중기 농경론과 카가와 씨의 죠몬 후만기 농경론은 그 의론의 근거나 재배 식물의 종류는 세부적으로 다르지만, 유적 규모의 확대 배경에 재배 식물이 큰 역할을 수행한 것을 중요시하는 점에서 공통된다. 그러나 어느 의론에서도 확실한 주요 먹을거리가 되는 재배 식물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최후까지 이 점에서 비판을 받아 왔다. 죠몬 중기 농경론에 관해서는 그 뒤 새롭게 주요 먹을거리로 참마가 상정되어(이마무라今村 1987·1999) 대륙계 곡물(벼, 보리, 밀, 기장, 조)는 그 후보로는 부정된다. 다만, 이 시점에서 아직 대두와 팥의 재배는 완전히 입증되어 있지 않았다. 이 벽을 깨뜨린 것이 앞에 기술한 2007년 대두 압흔의 발견이다. 필자는 죠몬 중기 농경론의 무대였던 중부 고지대나 후만기 농경론의 무대였던 큐슈 지방의 인구 증가(유적 수의 증가, 규모의 확대)를 가져왔던 것은 대두나 팥을 주로 했던 식물 재배이고, 이것들은 시간차를 가지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추이해 나아가는 것으로, 결과적으로 양자를 밀어붙여 움직이게 한 원리는 완전히 똑같았다고 생각한다.
농경의 정의
'농경'이란 무엇인가? 이 문제는 영원한 문제라고 이야기된다. '농경'이란 용어를 포기하자고 호소한 학자도 있을 정도이다. Agriculture(농경)의 정의에는 본래는 가축의 육성도 포함되지만, 여기에서는 일본의 실정에 맞추어 식물에 한하여 기술한다. 작물을 기르기 위해 밭을 갈아엎는다. 그곳에는 화전(이동식 농경)이나 관개 농경 등도 포함된다.
2009년에 세계의 저명한 식물고고학자가 모인 멕시코에서 개최된 심포지엄 "농경의 기원 -새로운 자료, 새로운 생각"에서 정의된 농경에 관련된 용어의 정의를 아래에 소개한다.
관리(Management) = 야생종(식물 또는 동물)의 조작과 어느 정도의 관리. 재배화 또는 형태적 변화 없이.
재배(Cultivating) = 야생 또는 재배화된 식물의 파종, 옮겨심기를 위한 토양의 의도적인 준비.
재배화(Domestication) = 식물이나 동물의 형태적, 유전적 변화.
농경(Farming) = 순화된 식물이나 동물의 이용.
농경(Agriculture) = 수렵이나 채집은 계속하지만, 어느 공동체의 활동을 작물 재배나 가축 사육이 지배하거나 주요 먹을거리가 되는 것.
이 성과보고서에서는 우리가 자주 죠몬 시대의 농경을 평가할 때 사용하는 '텃밭 농사(園耕)'나 '낮은 수준의 식량 생산' 등의 용어는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재배화한 또는 적어도 재배된 식물에 대한 높은 수준의 의존이나 그것이 식량 가운데 지배적이 되는 것이 '농경'을 결정하는 열쇠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재배 식물에 대한 의존도를 측정하는 것일까? 재배 자체도 유물로 남기 쉬운지에 차이가 있고, 하물며 동물질 식량과의 비율을 어떻게 계산하면 좋을까? 인골의 탄소, 질소 동위체 분석에서 주요한 섭취 먹을거리를 알아내면 되는 걸까? 그러나 여기에도 농경민이었던 야요이인과 수렵채집민이라 하는 죠몬인 사이에 뚜렷한 차이는 인지되지 않는다.
재배 식물의 증명
또, 재배 식물의 증명은 고고학적으로는 매우 어렵다. 대두나 팥의 재배화로 설명한 것처럼, 고고 자료로는 종자의 대형화 현상만이 그 입증의 근거가 될 뿐이다. 그러나 야생종이 본래 일본 열도에 없었던 경우는 사람의 손에 의해 운반되지 않는 한 일본 열도에는 뿌리내리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들 식물의 존재 자체가 재배의 증거가 된다. 그 식물의 대표가 오늘날 일본의 주요 곡류인 벼, 보리, 밀, 조, 기장 그리고 옻나무, 대마, 조롱박 등이다. 또, 본래 밤이 자생하지 않았던 홋카이도에 밤을 이입한 것도 인위적인 것으로, 재배 행위의 하나이다.
이에 대해 야생종이 존재하는 것, 재래종으로는 팥, 대두, 피, 밤 등이 있다. 이들이 언제쯤 재배되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야생종으로부터 재배종으로 변화하는 재배화의 징후(Domestication syndromes)를 고고 자료로 파악해야 한다. 앞에 기술했듯이, 그 대표가 씨앗의 대형화이고, 고고 자료로 가시화할 수 있는 것은 이 특징뿐이다. 피는 아오모리현과 홋카이도 남부를 중심으로 죠몬 시대 조기 이래 돌피부터 서서히 대형화되는(둥글고 커짐) 것이 확인되고, 밤도 과실이 세월이 지나며 대형화하는 현상이 증명된다. 밤의 경우 또한 산나이마루야마 유적의 사례처럼 꽃가루 분석에 의해서도 재배가 증명된다. 밤 꽃가루는 곤충 매개 꽃가루이기에, 어미나무에서 20미터 떨어지면 꽃가루양이 5%까지 저하하는데, 산나이마루야마 유적에서는 그 양이 매우 다량으로 있기 때문에, 유적 주변에 자연상태로는 있을 수 없는 밤나무만의 숲이 있었다고 평가되었다. 이와 같은 죠몬인이 관리 재배한 밤나무숲이란 이미지는 나라현 칸논지観音寺 유적(죠몬 시대 만기)에서 실제 매몰 숲으로 확인된다(그림11).
다만, 종자의 대형화만이 재배의 증거는 아니라는 의견(사례)도 있다. 동아시아의 유적 출토 대두, 팥 자료를 연구한 이경아李炅娥 씨는 일본 열도나 조선반도에서는 신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에 걸쳐서 콩의 대형화에 사람의 관여가 있었지만, 중국 중원에서는 더 늦은 철기 시대가 되어서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며 다량으로 출토되는 중국 신석기 시대의 작은 콩류도 재배종이었다고 기술한다(Lee 2011). 같은 것을 일본 죠몬 시대의 팥에 관하여 요시자키 마사카즈吉崎昌一 씨 등도 기술했다(吉崎·椿坂 2001). 유적에서 출토되는 상황이나 출토량 등도 그 증거로 충분한 발언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죠몬 시대에는 벼나 조, 기장 등의 대륙계 곡물의 전래 이전에 외래 재배 식물과 재래 재배 식물의 두 가지가 있고, 그것들의 재배는 죠몬 시대의 조기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식물 재배의 시작
그럼 최초의 기원지에서 사람이 어떻게 하여 재배를 시작했을까, 또 2차 기원지에서 외래 재배 식물을 어떻게 하여 받아들었던 걸까? 기원지에서 농경의 기원(재배의 개시)에 관한 이론에는 20세기 전반에 V. G. 차일드에 의하여 제창된 오아시스 이론이나, R. 브레이드우드의 자생지 가설을 비롯한 다양한 설이 있다. 그러나 이 원인에 관한 모델은 크게 나누면, "환경 악화와 인구의 균형에 의한 식량 부족 때문"으로 대표되는 밀침(Push) 이론과 "향응(술 담그기) 때문"으로 대표되는 당김(Pull) 이론으로 나뉘고, 최근에는 오히려 이 후자의 이론이 우세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특수한 조건이나 방아쇠가 없어도 사람과 식물이 오래 동조하며 서로를 잘 알게 되어 인간이 식물과 공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그를 위해서는 일정 지점에서 사계절을 보내며 식량 확보가 가능해지고, 정주성이 높아야 한다. 마츠이 아키라松井章, 카네하라 마사키金原正明両 두 사람은 정주생활에 의하여 마을 안에 쓰레기장이 창설되어, 토지의 부영양화가 일어나고 잡초가 번성해 초본 식물과 인간이 가까워진 것도 재배 행위를 촉진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Matsui and Kanehara 2006). 사람에 의한 파종과 발아, 그리고 수확이란 메커니즘을 죠몬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한국 신석기 시대의 농경 수용 원리를 언급한 이경아 씨는 그때까지 한국에서 받아들여 왔던 미야모토 카즈오宮本一夫 씨의 환경 악화론(宮本 2005·2007)에 대해 검토하고, 한국에서 농경을 수용한 시기와 한랭화나 그에 따른 해수면 저하의 시기가 부합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며, 정주화에 따른 식량의 저장 행위가 농경을 받아들이는 원인이 아닐까 상정했다(Lee 2011). 나아가, 조나 기장 등의 잡곡은 토지를 가리지 않고, 단기간에 성장하며, 게다가 가혹한 환경에 대한 내성을 가진 점 등도 수렵채집민들의 생업 일정을 크게 개변시키지 않고 그것들이 받아들여진 원인이었다고 본다. 즉, 곡물은 그때까지 이용되던 야생의 식물성 식량과 같은 입장에서 저장물의 목록 가운데 하나로 더해졌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죠몬 시대의 콩류에 대해서도, 도토리나 벼과 식물 종자(곡물)과 마찬가지로, 건조 상태로 장기 보존이 유리하다는 저장에 적합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콩류의 재배가 촉진되거나, 다른 지역에서 받아들여졌던 배경에는 재배의 용이함과 장기 보존 가능한 콩 종자가 가진 특질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갈라지는 죠몬 농경의 평가
죠몬 시대에 '농경'은 있었을까? 이 문제에는 '농경'의 정의와 출토 식물 자료의 자료학적 평가라는 두 가지 문제가 연결되어 있다.
실은 이 문제의 본질을 적확히 보여주는 논의가 있었다. 죠몬 시대의 '농경' 유무 또는 그 평가를 둘러싸고 '죠몬인은 풍족한 수렵채집민인가?'라는 논의가 캐나다 토론토대학의 G. 크로포드 씨와 일본의 환경고고학 1인자인 마츠이, 카네하라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갔다. 마츠이 씨와 카네하라 씨는 죠몬 시대의 재배 식물이란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죠몬 시대는 수렵채집 사회이며 농경사회인 야요이 시대와는 다르다는 주장으로, 죠몬인을 '풍족한 수렵채집민'이라고 평가했다(Matsui and Kanehara 2006). 이와 같은 생각은 일본 고고학자들의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생각일 것이다.
이에 대하여 크로포드 씨는 '농경'의 정의를 좁게 파악하고 있다는 점, 대부분의 일본인 고고학자에게 농경이란 '논벼 경작'과 같은 뜻이라는 점, 그것은 벼가 다양한 작물의 단지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무시한 환원론자의 논의라고 주장한다(Crawford 2008). 그리고 야요이 사회에도 다양한 식물 이용이 있었단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또한, 이것은 수렵채집민의 전형으로 여겨졌던 아이누에 대한 평가(실제는 농경을 행했음)와도 상통한다고 한다. 물론, 크로포드 씨는 중국의 신석기 시대 중기 같은 식량 생산이나 농경이 행해졌다고는 이야기하지 않지만, 죠몬 문화는 식량 생산이나 농경의 논의에서 떼어뜨릴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앞에 기술한 대두, 팥 재배 이외에 사사키 유카佐々木由香 씨가 "죠몬 시대의 사람들은 특정 한해살이 재배 식물의 재배만이 아니라, 옻나무 등의 목본 재배 식물이나 밤 등의 야생식물을 포함하여 산림 자원에 손을 대 마을 주변에 인위적 생태계를 만들고 식물을 재배, 관리하는 수법을 이미 획득해 그러한 다양한 식물에 대한 관리, 재배 기술의 확립이 논 경작을 도입하는 바탕"(佐々木 2011a)이라거나, "북부 큐슈에서 시작한 벼농사 농경 문화는 조, 기장 등의 곡류가 도입되더라도 죠몬 시대의 다각적인 식물 이용의 기반이 계승되었다"(佐々木 2011b)라고 지적하듯이, 식물의 재배 기술은 이미 죠몬 시대에 있었고 곡물 이외에도 다양한 식물의 이용이 야요이 시대에도 계속적으로 행해졌다고 하는 점에는 유의해야 한다.
출토 씨앗의 양적 평가
또한, 마츠이 씨와 가네하라 씨는 죠몬 농경이나 재배 식물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죠몬 후기 이후의 농경(밭벼와 피 등 소수의 곡물이라 생각함)은 다양한 자원의 하나에 지나지 않으며, 직접 논벼 경작에 연결되는 관개이 조작으로부터 일어나는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지 않았다, 즉 농경 사회(잉여 생산에 의한 빈부의 격차, 사회적 엘리트의 출현)로는 이행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 근거로, 대규모 원경(Horticulture=엄밀하게는 텃밭의 경작이란 의미이지만, 규모가 작은 농경을 의미해 사용되는 경우가 많음)이 수렵채집민의 계절 일정에 들어간 흔적은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과 후기 이후의 벼나 소수의 곡물이 전체 먹을거리(야생 나무의 열매나 한해살이 풀의 종자)에서 점유하는 비율이 1% 이하인 점을 들고 있다.
현재는 이 죠몬 시대 후기 이후의 곡물 자료에 대해서는 오염(자료 오염=자료의 오입)일 가능성이 높아 직접 평가할 수 없지만, 그들의 논조에 있듯이 항상 재배 식물(곡물)의 '양적 적음'이 '재배 식물의 존재'를 '농경'이라 평가할 때 브레이크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 '양적 적음'은 정말로 바람직한 걸까? 산나이마루야마 유적에서 출토된 씨앗 자료를 분석했을 때, 인위적 이용의 흔적이라 생각되는 탄화율이 높은 씨앗은 쪽가래나무, 칠엽수, 밤, 옻나무, 팥(콩과)으로, 팥도 사람들이 빈번히 이용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시료 안에서 나오는 빈도(출현율)은 쪽가래나무 100%에 대하여 팥은 33%였다(그림12). 그럼 이 숫자의 차이를 그대로 당시 먹었던 양의 비율이라 해도 좋을까? 그 답은 '아니다'이다.
속만 먹고 단단한 껍질이 폐기되는 쪽가래나무와 종자 그것을 먹어 버리는 팥은 유적에 남아 있을 확률이 뚜렷하게 차이가 있다. 그 증거로 쪽가래나무는 모든 시료에서 검출되고 있고, 딱딱한 과피를 가진 칠엽수나 밤도 높은 확률로 출현하고 있다. 이들은 견과류라 불리는 것으로, 과피가 강건하고, 물에 잠겨도, 불에 타도 남기 쉬운 것이다. 게다가 탄화한다고 하는 건 유적에 더욱 남기 쉬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쪽가래나무가 불에 타 있는 것은 식후에 남은 껍질을 연료로 사용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 고고학자는 유물 각각의 남기 쉬운 정도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탄화물도 시대가 오래되면 잔존도가 낮아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죠몬 시대의 탄화 콩과 야요이 시대의 탄화 벼를 양적으로 그대로 비교해도 좋은지는 의문이다.
콩 이용의 본래 모습
나가노현 오카야시岡谷市의 죠몬 시대 유적 토양의 부상 분리(Flotation=건조한 유적 토양을 물에 넣어 떠오른 씨앗을 회수하는 방법)와 토기의 압흔 조사를 정력적으로 행하고 있는 아이다 스스무会田進 씨는 "행하면 언제나 씨앗 압흔이 나오기 때문에, 이제는 콩이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이하 생략)"이라는 감상을 최근 필자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에서 기술하고 있다. 실제 과거 발굴할 때 채취했던 토양을 씻어도 콩이나 팥의 탄화 종자가 검출되고, 압흔 조사에 의해서도 조사를 행한 모든 유적에서 콩류의 압흔이 발견되고 있다(아이다 외 2012). 이 콩류의 출현율이 높은 건 토양의 세정이나 토기 압흔 조사 등 의식적인 식물 씨앗의 탐사에 의하여 실현된 것으로, 지금까지와 같이 유적에서 우연히 발견되는 탄화 씨앗에서만 이야기되던 호두나 밤 중심의 씨앗 구성이 매우 편중된 것이었단 것을 의미한다. 견과류라 생각되던 탄화물에 대두나 팥이 섞여 있었단 이야기도 듣는다. 재배 콩류의 낮은 평가는 죠몬 시대의 대두나 팥의 존재가 2007년 이후에 밝혀졌던 아직 일천한 고고학적 사실로, 이들을 검출하려는 의식적 조사의 축적이 매우 적은 것에 기인한다.
그 증거로 콩류 씨앗은 토양 안보다 토기 안에서 높은 비율로 발견된다. 취급하는 자료의 성격(분석법의 차이)에 의한 출현율의 차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오카야시에서 행한 압흔 조사에서도 증명되는데, 큐슈 지방에서는 콩이 출현하는 죠몬 시대 후기 이후의 유적 자료에 한하면 55자료 가운데 26자료(47%), 약 반분의 압흔 자료로부터 팥이나 대두의 압흔이 검출된다. 또한, 압흔 조사가 많이 실시되는 야마나시현의 사례(사노佐野 2015)를 참고해 보면, 죠몬 시대 조기부터 만기 전반까지의 압흔 조사 자료 31자료 가운데 29자료(93.5%)에서 콩류 압흔이 검출되고 있다. 이에 대해 호두나 밤, 졸참나무속 종실 같은 견과류는 겨우 1자료(3.2%)로 매우 적다. 미탄화, 탄화 자료의 경우 압흔 자료와 전혀 반대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어, 38자료 가운데 견과류가 32자료(84.2%)로 높은 비율을 보여주는 데 대해, 콩류는 8자료(21.1%)에 그치고 있다(그림13). 이 야마나시현의 사례는 죠몬 시대 중기를 중심으로 한 것으로, 시기적인 특징을 반영하고 있을 가능성은 있지만 압흔으로 콩류가 남기 쉬웠단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우리가 토기 압흔으로 탐사의 눈을 돌린 지 아직 일천하고, 나아가 압흔 조사 그것이 모든 지역이나 유적에서 실시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저습지와 주위보다 높은 평지
또한 의도적으로 남긴 것과 우연히 남은 것의 차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보존되는 장소의 차이도 중요하다. 댁의 부엌을 떠올려 주시기 바란다. 똑같은 식품이라도 각각의 보존 장소는 그 식품이 지닌 성질마다 달리 한다. 예를 들면, 고기나 생선, 신선 채소는 냉장고에, 건조 면이나 밀가루, 콩 등은 식기 선반이나 지하 수납고에 보존한다. 이것을 유적으로 바꾸어 생각해 보면 좋다.
졸참나무속 씨앗은 도토리류가 뭉쳐서 발견되는 것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저장굴, 별명 도토리 구멍이라 부르는 주로 저습지에 판 도토리류를 보존한 굴이 주요하다. 이들은 고고학자에게는 안성맞춤인 목표물이다. 고고학자는 평소 평지 위의 유적에서는 보지 못했던 이 '보물산'에 호기심을 품고, 기세등등하게 저장굴을 찾으려 기를 쓴다. 결과적으로 도토리가 가득 찬 다수의 저장굴이 우리 눈앞에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보통 일본 같은 습윤한 기후의 토지 상태에서는 주위보다 높은 평지 위에선 씨앗이 불에 타지 않는 한 보존되기 어렵다. 불에 탈 기회는 더욱 적었고,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면 저습지에 비하여 평지 위의 씨앗이 살아남을 기회는 매우 낮았다. 게다가 저습지의 저장물은 보존을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묻어둔 것이다. 이 둘의 남기 쉬움 차이는 일목요연하다.
저습지와 평지, 그곳의 씨앗 잔존 상황과 씨앗의 성질은 중세 유통 동전 연구에서 '비축 동전'과 '폐기, 유기 동전'과 매우 비슷하다. 사람이 의도적으로 다량의 동전을 항아리 등에 담아 묻어둔 '비축 동전'은 전국적으로 보면 출토 갯수에서 포함층이나 유구에서 출토되는 인간이 두고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린 '폐기, 유기 동전'을 크게 능가한다. 비축 동전은 갯수의 많음과 잔존 상황의 유리함 때문에 동전 연구의 주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당시의 유통 동전을 복원할 때는 비축 동전은 사람에 의하여 선택된 동전이고, 펹ㅇ된 조성을 보이기에 본래의 유통 동전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에 대해 '폐기, 유기 동전'은 의도적 선택이 전혀 없기 때문에 당시의 유통 동전의 실태 그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폐기, 유기 동전'은 유적에서 출토되는 갯수조차 적지만, 본래는 '비축 동전'보다도 상당히 많았단 것은 누구나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고고학자는 없는 것은 복원할 수 없지만, '유물(남은 것)'이란 것이 갖는 본래의 속성, '남기 쉬웠던 것만 남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인식하고, 눈에 드러나는 발견 비율의 배후에 있는 진짜 모습을 파악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콩류를 물에 담가서 보존하는 사람은 없다. 콩류는 평지 위의 거주 구역에서 건조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것을 뒷받침하듯이, 앞에 기술했듯이 콩류가 존재하는 시기나 지역에서 행한 압흔 조사에서는 높은 비율로 콩류의 압흔이 토기의 밑감 흙에서 검출되고 있다.
죠몬 시대의 재배 식물
2000년 이후
일본에서 고민족식물학의 연구는 처음으로 죠몬 시대 식물 유존체의 포괄적 목록을 만든 사카즈메 나카오酒詰仲男 씨의 연구(酒詰 1961)에서 시작해, 1970년대 후쿠이현 토리하마鳥浜 패총 등의 저습지 유적 조사에 의한 다량의 식물 유존체의 검출과 연구, 코타니 카이기小谷凱宜에서 시작해 G. 크로포드나 요시자키 마사카즈吉崎昌一 씨 등이 이끈 부상 분리법에 의한 식물 이용이나 재배 식물의 연구 등에 기세를 얻어 착실히 계속 발전해 왔다. 그러나 사사키 유카 씨가 '2000년 이후'라고 강조하듯이(佐々木 2011b) 최근 약 10년 동안 고민족식물학 연구는 전대와 비교해 큰 발전을 이루었다. 연구자 수의 증가도 그 발전에 기여한 재료의 하나로 들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식물 유존체의 검출에 관한 각종 연구법의 기술과 이론적 진전, 그리고 그것들의 새로운 시대·지역에 대한 적용이 큰 뒷받침을 하고 있다. 특히 압흔법(복제법)은 그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대형 식물 유전체에 관해서도 각종 씨앗의 새로운 동정법 확립이 큰 의미를 지닌다. 그중에서 도토리, 옻나무속 과실, 콩류 씨앗, 강아지풀속(조) 과실 등이 있다. 또한 밤이나 옻나무 등의 목본류에 대해서도 과실만이 아니라 꽃가루나 목재의 연구가 진전되어, 수목의 재배 가능성이 논의될 수 있는 단계가 되었다.
조엽수림 문화론의 지금
사사키 고메이佐々木高明 씨로 대표되는 지리학・농학의 재배 식물 기원론인 조엽수림 문화론에서는 재배 식물만이 아니라 다양한 식문화와 그에 얽힌 의례나 행사·신앙 등도 포함한다. 다만, 여기에서는 그 중심이 되는 재배 식물의 기원에 대하여 주목하고자 한다. 사사키 씨는 논벼 경작의 전래 이전에 기층문화로서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고, 그 대표적인 문화가 주로 서일본을 중심으로 전개된 '조엽수림 문화(부대밭 농경=덩이뿌리류와 잡곡)'와 동일본~도호쿠·홋카이도를 중심으로 전개된 '졸참나무숲 문화(길든밭 농경=조·기장·귀리·우엉·파·삼)'라는 두 가지 문화라고 한다. 이중에서 인용된 재배 식물과 그 시기적 평가는 고고학 입장에서 보면, 다양한 모순점이 엿보인다. 예를 들면, 졸참나무숲 문화의 모순은 사사키 씨가 기원전 1000년기 초엽에 전파된다고 주장한 재배 식물이 이미 죠몬 시대 조기 말부터 전기에 출현한다는 점이다. 고고 자료에서 피는 8000년 전, 삼은 1만 년 전, 유채과도 죠몬 시대 초창기의 예가 있다. 우엉도 죠몬 시대 전기이고, 파 종류는 죠몬 시대 초창기부터 남큐슈에서 발견되고 있다. 또, 보리가 일본에서 발견되는 것은 야요이 시대 초기 이후이고, 그 전래 경로는 북방 경유가 아니라 서일본입니다. 조와 기장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사사키 씨가 상정하는 도래 경로의 대륙 쪽 기원지인 연해주에서 재배 식물의 시기적 변천을 보더라도 이 땅에 보리나 밀이 출현하는 것은 기원전 6~1세기로, 사사키 씨가 상정하는 전파 시기에는 조와 기장을 중심으로 한 중국 화북 유래의 잡곡이 재배되고 있었다. 즉, 그가 북방계라고 주장하는 조선반도 북부나 연해주 아무르강 유역 남부의 농경은 그 발전 단계에서도 요동 지역에 기원을 갖는 이른바 '남방계'의 농경이다.
조엽수림 문화의 재배식물에 관해서도 대륙 쪽의 조엽수림대에서 받은 영향으로 가장 중요한 작물은 벼나 보리이지만, 죠몬 시대 전기는 물론 죠몬 시대 후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확실한 고고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전래 작물로 상정되는 팥 등의 콩류도 앞서 기술했듯이 일본 재래의 재배 작물이었다. 메밀에 대해서는 아직 논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 전래 시기는 야요이 시대의 늦은 시기 또는 고대까지 내려갈 가능성도 있다. 옻나무도 아직 전파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그 기원지는 동아시아의 북부 지대이다.
이와 같은 오해를 불러온 것은 고고학 쪽에도 책임이 있다. 사사키 씨도 당시에는 최신의 고고학 성과를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 단게에서는 아직 오염 자료도 충분히 정리되어 있지 않고, 고고학 분야도 충분한 검증을 행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생각했던 기층문화론은 '일본=벼농사=고등 문화'라는 편협한 사관을 타파하는 매우 뛰어난 시점을 떠받치고 있다.
오염 자료의 배제
고고 자료에는 오염이 딸려 있다. 특히 씨앗은 곤충이나 지중동물, 또는 나무 뿌리 등에 의하여 땅속 깊이 운반되는 위험성이 있다. 지금까지 일본의 고고학에서 재배 식물이나 농경사의 연구는 자료적으로 불안정한 이 탄화 씨앗이 기초 자료가 되어 왔다는 경위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죠몬 시대라고 여겨졌던 벼나 맥류 등 지금까지 죠몬 농경론의 기초 자료로 추앙받던 탄화 곡물은 지금은 그 대부분이 모습을 감추게 된다. 즉, 연대측정법의 발달에 따라, AMS법(가속기 질량분석이라고도 부르고, 극미량의 방사성원소를 고감도로 측정하는 기술)에 의하여 재측정된 죠몬 시대의 재배 식물이라 생각되던 탄화 곡물은 그 대부분이 후세 또는 근세의 것이런 것이 판명되었다(표1).
표1. 고고학자의 기대를 깨버린 곡물의 탄소연대 수치(小畑 2011에서)
나아가 압흔법에 의한 조사 사례가 증가하면서 벼나 맥류 등의 곡물은 죠몬 시대의 오래된 토기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고, 대신 콩과 팥, 들깨 등이 다수 검출되면서 그 경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즉, 압흔법도 콩이나 팥 등의 새로운 재배 식물을 검출한 이외에 연대(시기)가 확실한 식물 자료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발견된 탄화 씨앗과 비교함에 따라 기존 자료의 신빙성을 점치는 기초 자료의 지위를 확립해 가고 있다.
압흔법의 자료학 측면의 장점으로 토기 형식으로부터 생물체(씨앗이나 벌레)의 연대를 알수 있는, 압흔 씨앗은 탄화 씨앗보다 표면 형상을 정확히 유지하는 등의 이점이 있지만, 더욱 중요한 점은 오염이 없다는 점이다. 즉, 압흔은 토기에 혼입된(되어진) 시점에서 그 당시 생물체가 그대로 포장되는 타임캡슐 같은 것이다. 토양 속에서 발견되는 탄화 씨앗이나 미탄화 씨앗은 매몰 과정에서 다른 것이 부가되거나, 소멸되는 경우가 있지만, 토기의 밑감흙 안에 들어가는 데에는 다양한 경위가 있기에 압흔만으로 당시의 재배 식물이나 이용 식물을 말하는 데에는 주의를 요하지만 지금까지 축적된 자료가 보여주는 경향성은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구석기인이 재배?
일본의 작물은 지금까지 모두 국외에서 중국이나 조선반도를 거쳐 전해졌다고 생각해 왔다. 이는 농학이나 식물학의 연구에서 현재의 야생종이나 식물 화석의 분포를 참고로 그 기원지가 추정된 것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최근, 고고 유적에서 재배 식물과 잡초를 포함한 외래 식물에 관한 정보가 증가하여 지금까지 농학이나 식물학에서 제기된 그들의 기원에 관한 설을 뒤집는 예가 많아졌다.
그 한 예로, 조롱박이 있다. 조롱박(Lagenaria sicerania var. hispida)은 박과의 덩굴성 한해살이풀로서 아프리카 남부에 야생종이 있고, 아메리카나 아시아 각지에서 발견된다. 일본에서는 토리하마鳥浜 패총의 죠몬 시대 조전기 층이나 아와즈호 바닥 유적 등에서 발견되며, 아와즈호 바닥 유적의 예는 9660±110BP(NUTA-1825)의 연대치를 갖는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외래 식물로, 이전은 아프리카로부터 표류에 의해 각지로 확산된 것이 일본에도 전해졌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DNA 분석에 의하면, 신대륙의 조롱박은 동아시아의 유전적 변이로 완신세 이전에 용기로 재배되어 인류의 확산에 따라 운반된 것이라 한다. 최근 일본과 중국 출토 조롱박의 껍질 두께를 비교한 연구에 의해 전중기 완신세에는 일본과 양쯔강 유역에서 재배 조롱박이 존재했단 것이 확실해져, 그보다 이른 시기, 갱신세에 재배가 개시되어 현생 인류의 확산과 함께 야기된 재배 식물이었을 가능성이 생겼다(Fuller et al. 2010).
들깨는 중국산?
들깨에 대해서도 진짜 중국 대륙에서 죠몬 시대에 일본으로 건너왔는지 의문이다. 꿀풀과(Lamiaceae) 꿀풀속(Perilla sp.)에는 들깨(Perilla frutescens var. frutescens), 차조기(Perilla frutescens var. crispa), 새들깨(Perilla frutescens var. citriodora)가 있다. 들깨의 과실이 가장 크지만, 크기에 변이가 있기에 과실의 크기만으로 이들을 구별하는 것은 어렵다. 꿀풀속의 원산지는 중국, 인도 등이라 하며, 차조기와 들깨가 분화된 뒤 중국으로부터 일본으로 전해졌다고 한다(山口・島本編 2003). 일본에서는 죠몬 시대 조기의 예가 칸토우 서쪽 지방에 있고, 전중기도 동일본을 중심으로 하며, 후기 단계에 서일본으로도 분포가 확대된다. 중국에서 출토되는 상황을 보면, 황하 중류 지역과 장강 중류 지역 모두에 오래된 예가 있고, 형태적으로는 북쪽이 큰 들깨, 남쪽은 작은 차조기일 가능성도 있다(그림14). 우리는 조선반도 남부에서 5000년 전의 들깨 과실 압흔을 검출했는데, 중국 화북 지방에서 출토된 것은 그보다 빨라, 7000년 정도 전이기에 더 이른 6000년 전 무렵에는 들깨도 조나 기장과 함께 조선반도 남부까지 이르렀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 열도에서는 그 지리적 분포로부터 이전 서일본을 경유해 도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된 일이 있지만, 전파 경로의 한 획인 큐슈 지방에서는 죠몬 시대 후기 후반에 압흔이 나오기까지 그 존재는 알려져 있지 않다. 나아가 한국에서 들깨와 함께 발견되는 조, 기장이 일본으로 전파된 흔적은 지금으로서는 인정되지 않는다("벼는 언제 일본에 건너왔을까" 장을 참조). 안승모 씨에 의하면, 들깨의 야생지(기원지일 가능성)는 중국 북부, 조선반도, 일본에 있다고 한다(안 2008). 콩류와 같은 움직임을 하는 들깨(꿀풀속)도 중국 기원만이 아니라 일본에서 재배가 개시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재배 식물의 기원과 확산
이상 보았듯이, 아직 의문의 여지는 있지만 죠몬 시대의 재배 식물은 그 출현 시기와 기원지로부터 아래의 크게 3가지 타입으로 분류할 수 있다(표2).
①외래 재배 식물(죠몬 시대 전기 이전에 도래) = 삼, 조롱박, 우엉, 십자화과, 꿀풀속(들깨)
②대륙계 곡물(죠몬 시대 후·만기 이후에 도래) = 벼, 조, 기장, 보리, 밀
③재래 재배 식물 = 피, 팥, 대두
①에 관해서는 중국 대륙 쪽의 제2기원지가 아직 불명이다. 그 가운데 조롱박에 관해서는 앞에 기술했듯이, 후기 구석기시대에 가지고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고, 들깨도 일본산 또는 그 전파 시기가 후기 구석기시대나 죠몬 시대 초창기까지 거슬러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②에 관해서는 대륙 쪽의 제2기원지는 조선반도 남부(한국)이라 생각된다. 다만, 보리나 밀에 관해서는 지금으로선 야요이 시대 전기가 확실하며, 거슬러올라가도 야요이 시대 조기 무렵이 그 전래 시기라고 생각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벼는 언제 일본에 건너왔을까" 장에서 상술하겠다.
표2. 죠몬 시대의 재배 식물 원산지와 도래 시기(小畑 2011을 일부 고침)
죠몬 농경과 야요이 농경
지금까지 기술했듯이, 죠몬 시대의 재배 식물에 관해서는 최근의 고민족식물학 연구의 진전에 의하여 10년 정도 전에 비하면 상당히 정확히 알게 되었다. 죠몬인들은 생각한 이상으로 옛날부터 식물을 재배하는 기술에 능숙했던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머지는 고고학자가 이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이다.
'농경'을 식물 재배라 하여, 죠몬 시대에 '농경'이 있었다고 인정하는 사람도 있다(設楽 2009, 2014). 또한 '농경'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도, 죠몬 시대에 식물 재배가 있었던 것은 일부 고고학자를 제외하고 거의 인정하고 있다. 다만, 콩류는 팥 재배의 가능성을 요시자키 마사카즈吉崎昌一 씨가 주창하고 있을 뿐이고(吉崎 2003), 압흔으로 대두가 발견되어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재배화해 나아가는 과정을 지적한 것은 매우 최근의 일이다. 즉, 콩류는 재래 재배 식물로서는 신참자로, 그 평가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작물이라 할 수 있다.
죠몬인을 '풍요로운 수렵채집민'이라 부른 마츠이 아키라松井章 씨나 카네하라 마사아키金原正明 씨도 밤이나 들깨 등의 재배는 인정했지만, 아직 죠몬 대두를 발견하기 전이었다. 시타라 히로미設楽博己 씨는 최근 야요이 시대의 농경과 비교하면서 '죠몬 농경'의 특질을 기술하면서 "콩류는 주식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죠몬 중기 농경론'을 뒷받침할 가능성을 갖는다"고 평가하면서, '이를 제외하면 죠몬 시대의 재배 식물은 조기로 거슬러올라가는 삼을 포함해 차조기, 들깨, 우엉, 조롱박 등이 주요한 것이다. 농경을 사전적으로 말하자면, 식물의 재배이기 때문에 어떠한 농경은 죠몬 시대부터 존재했다고 봐야 하겠지만, 재배 식물의 대부분이 기호품 같은 식량인 점에 죠몬 시대 농경의 특질이 있다"(設楽 2014)라고 야요이 시대의 논벼 경작을 기반으로 하는 농경과의 양적, 질적 차이를 강조한다. 또한, 이시카와 히데시石川日出志 씨는 죠몬 시대의 농경은 "계절적으로 집중해 채집하는 복수의 자원과 저장을 조합시켜 사계절의 식량을 구성하여 거기에 몇 가지 재배 식물을 더하는 것이 실태였다"라고 평가한다(石川 2010). 아마도 이들이 현재 죠몬 농경에 대한 일반적인 고고학자의 이미지일 것이다.
'수렵재배민'의 제창
그러나 앞의 아이다 스스무会田進 씨의 말에 있듯이, 우리들 압흔 조사를 행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놀라움에서 일상화되어 가는 느낌이지만, 죠몬 토기의 안에서 압흔 자료로 계속 증가하는 콩류의 현상을 보고 아직도 '채집 식량에 보조적으로 더해진 재배 식물'이란 평가에 머무를 수 있는 걸까? 죠몬인들은 적어도 죠몬 시대의 전기 초엽에는, 이미 콩류나 들깨 등의 재배 기술을 가지고, 규모의 대소는 차치하고 재배(파종이나 심기와 제초, 수확)를 행하고 있었다. 우리는 벼나 조, 기장 등의 대륙계 곡물만 주요 먹을거리로 의식하기 쉽지만, 콩류 등 재래 식물의 재배로도 인구의 증가는 가능했다. 후지모리 에이이치藤森栄一, 카가와 미츠오賀川光夫 두 사람이 생각한 것처럼, 죠몬 시대 중기의 중부 고지대나 후만기의 큐슈 지방에서 볼 수 있는 유적의 대규모화(인구 증가)의 배경에는, 종류가 다른 식물 재배가 큰 역할을 한 것이다. 게다가 죠몬 초기 이래로 홋카이도 남부와 도호쿠 지방 북부에서 재배되던 피도 같은 존재였다고 생각된다.
정의로는 '농경'이 재배 식물이 생업이나 식량 가운데 '지배적'이 되는 단계인 이상, 죠몬 시대의 재배 식물 사례는 계속 늘어나고는 있으나, 아직 자료가 충분히 추출되어 있다고 할 수 없는 현상에서는 모두를 납득시킬 '농경'의 존재 입증은 어렵다. 그러나 콩류 같은 한해살이풀에 한하지 않고, 밤이나 옻나무 등의 목본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식물을 다루는 재배 기술의 높이와 재배, 관리 식물이 그들의 생활 속에서 담당한 역할을 중시해 죠몬인을 '수렵재배민'이라 재정의하고 싶다.
농경은 과정
나아가 고고 자료로서 드러나는 식물종의 양적 평가란 문제점이나 '농경'의 정의 이외에 또 하나 주의해야 할 점은 벼농사 농경의 기원지인 중국 대륙에서 농경의 발전도 단계적으로, 야요이 시대의 논벼 경작 그것은 기술·인간·사상이 모두 수입된 것이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로 이어지는 곡물을 주작물로 하는 농경만을 농경이라 생각하고 있진 않은가? 흑선이 오지 않았으면 에도 막부는 그대로 봉건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논벼 경작이 오지 않았으면 평등한 수렵채집 생활 안에서 콩 재배는 단순한 보조 식량의 공급수단으로 계속되었을까? 중국의 벼 재배도, 서서히 야생 벼에서 재배 벼의 비중이 늘어나아가는 단게를 거쳐, 완전한 농경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가 성립하기까지에는 수천 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완성된 농경 사회의 수입판인 야요이의 논벼 농경을 지닌 사회와 비교하여 죠몬 독자의 발전 단계를 낮게 평가하는 것은 위험하다.
고고학자 히로세 카즈오広瀬和雄 씨는 말한다.
'문화의 연속성'이란 관점에서 일단 이탈하면 어떨까? 죠몬 문화에서 야요이 문화로 이행한 건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그동안의 사정에 우열을 가릴 이유는 없다. 나중 시대에서 이전 시대를 재단해서는 안된다. 하나의 문화가 장기에 걸쳐 계속되었다는 사실과 그것이 해소된이유와는 합치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야요이 문화의 존재를 일단 건너편으로 맡기면, 또 하나의 죠몬 문화가 눈에 보일지도 모른다(広瀬 2003).
나는 G. 크로포드(Crawford 2008) 씨가 주장하듯이, 죠몬 시대를 농경 사회와 수렵채집 사회 같은 이분론으로 분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략 1만2000~1만3000년 동안이란 매우 오랜 기간 지속된 죠몬 시대의 사회나 문화를 하나의 틀로 묶어도 좋은지를 재검토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고도 생각한다. 그 키워드는 지금까지 누구도 적극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던 재배 식물의 존재이다. 일본 고고학계에서 죠몬 농경이 논의되기 시작한 지 70여 년이 지났지만 그동안 죠몬 토기 안의 대두에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이 사실은, 나에게는 "보려고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가르쳐주는 교훈인 동시에, 새로운 시점으로 정설에 도전하는 도전 정신과 용기 내는 일의 중요함을 가르쳐주는 교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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