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의 대전은 오닌応仁의 난
교토인
교토는 시의 인구로 말하면 146만 명으로 전국 9위(2022년 8월 현재). 교토시의 인구는 1965년에는 136만여 명으로 전국 5위의 위치에 있었는데, 그 뒤 고배시, 삿포로시, 후쿠오카시, 가와사키시에 밀려 지금의 순위가 되었다. 숫자만 본다면 교토시는 쇠퇴 경향에 있는 지방도시의 하나일 뿐이다.
한편 교토는 1100년에 걸쳐 수도가 있던 도시이며 다도, 화도華道, 가면 음악극(能)이나 희극(狂言) 등 다방면에 걸친 예술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또한 많은 불교 종파의 본산이 있으며 다도, 화도 등의 가문이 자리를 잡는 등 교토는 단 하나로서의 특징을 몇 가지나 가진 문화 도시이다. 이러한 특징도 있어 교토는 일본 유수의 관광 도시이기도 하다. 교토는 상당히 불균형한 도시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불균형이야말로 교토라는 도시에 대한 평가가 양분시킨다.
교토인에 대한 평가는 조금 신랄한 것이 많다. 예를 들면 도쿄인 중에는 교토인이 마음속을 보여주지 않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며, 정말로 속을 알기 어렵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웃인 오사카인에게도 교토인에 대한 똑같은 인상을 가진 사람이 많다.
왜, 교토인은 그러한 것일까? 물론 예전과 달리 지금은 사람의 이동도 훨씬 활발하다. 지금의 교토시민 중에 교토 태생인 사람, 또는 오래 교토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결코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토인 기질은 그만큼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문화의 재밌는 점이라 생각한다. 지금 교토에 살고 있다고만 하는 '타지인'이라 해도, 예를 들면 교토의 정월 떡국이 백된장으로 만든다는 걸 알면 한번 정도는 먹어 보고 싶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걸 알지도 못했다, 생각도 못했다고 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그래도 그중에는 어디선가 먹어 봤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초중학교에서는 급식으로 나오기도 한다. 아이들은 이리하여 지역의 먹을거리에 익숙해져 간다. 이와 같이 하여 백된장으로 만든 떡국은 지금도 남아 있고, 앞으로도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이 교토의 식문화이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 예를 들면 교토에서는 교토인일 것이다. 토박이 교토인이 언제나 눈앞에 있을 리는 없지만, 교토에 살고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교토인 기질이 계속 살아 있는 것이다. 그 기질을 여기에서는 교토인이라 부르기로 하자.
재해의 도시, 교토
교토에 수도가 설치된 것이 8세기 말의 일. 무려 그로부터 1100년의 긴 세월에 걸쳐 후쿠하라福原 천도와 남북조 시대 등 한때를 제외하고 왕은 교토에 계속 살았다. 정치의 실권을 누군가가 쥐고 있는지는 별도로 하고, 적어도 표면상으로 정치의 중심은 교토에 있었다. 아무튼 궁정 제도 안에서는 무가의 정점에 선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이라도 하나의 관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교토인의 자랑을 잘 표현하는 문구가 하나 있다. 그것이 이 장의 맨앞에 있는 '이전의 대전은 오닌의 난'이다. 일본의 많은 도시는 태평양전쟁(1941-1945)으로 파멸적으로 파괴되었는데, 교토는 최후의 파멸적 파괴가 오닌의 난(1467-1477)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에도도 오사카도 아직 그 편린조차 보이지 않던 시대부터 교토는 수도로서 일본의 중심이었다. 즉 이 말은 교토인이 교토의 도시가 얼마나 오랜 전통을 가진 도시인지를 자랑하는 데 사용하는 말이다.
물론, 교토의 도시가 큰 단절 없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는 등이라는 것은 아니다. 교토의 도시는 오닌의 난 이전부터 재해에 엄습을 계속 받아 왔다. 카모노 쵸우메이鴨長明의 <방장기方丈記>에 12세기 무렵의 교토의 도시가 입었던 재해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 건 유명한 이야기이다. 애초에 도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붕괴와 부흥을 반복해 왔다. 기록에도 잘 나타나는 것이 화재, 지진, 전쟁, 전염병 등. 이들이 반복되고, 또 복합적으로 수도를 엄습해 왔다.
오닌의 난 이후에도 교토는 점점 붕괴의 구렁텅이로 몰려 왔다. 잇달은 화재 기록은 교토의 도시가 잿더미로 돌아갈 듯한 대화재를 여러 번 경험해 왔다는 걸 이야기하고 있다. 그 의미에서 말하면 '이전의 재해'는 자꾸 불타는, 즉 금문禁門의 변(1864)에 의한 화재이다. 이때의 불씨는 교토 고쇼 주변의 2개소에서의 방화에서 발단한다. 원인은 막부방과 존왕파의 전쟁. 이 전쟁에서는 사망자도 나왔기에, 메이지 유신이 무혈혁명이라는 것은 교토란 도시의 역사를 보면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에도성이 무혈로 내주었던 일은 메이지 유신의 일면에 지나지 않는다.
신사와 절
교토는 신사와 절을 많이 남긴 도시이기도 하다. 1994년에 '세계 문화유산'에서 인정된 '고도 교토의 문화재'를 구성하는 17의 신사와 절에 대해 보면, 니죠성을 제하고 16건이 오닌의 난 이전의 창건이다. 그것도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졌다고 생각되는 것이 창건 불명인 우지시의 우지카미 신사를 포함해 10개나 있다. 그것이 이 도시를 관광지로 만든 큰 이유의 하나인데, 이들 유서 깊은 신사와 절의 존재가 교토의 식문화에 큰 영향을 주어 왔다.
중세, 무가의 시대는 액재의 시대였다. 불교가 무가와 서민에게도 침투해 사원이 각지에 건립된다. 그 가운데 몇 곳이 이 시대의 초두에 도래한 선종 사원으로, 이들은 마을과 떨어진 산속에 설립된 것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교토 5산의 이름으로 알려진 텐류지天龍寺, 쇼코쿠지相国寺, 겐닌지建仁寺, 도우후쿠지東福寺, 그리고 도우후쿠지의 탑두塔頭인 만쥬지万寿寺는 그 대표적인 것으로, 모두 임제종臨済宗의 사원이다. 또 난젠지南禅寺는 '특별' 취급을 받는다. 그리고 5산에 묘우신지妙心寺와 다이토쿠지大徳寺를 더한 7산도, 쇼코쿠지를 제하면 낙외洛外에 있다. 지금은 도심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쇼코쿠지도 도시 바깥의 절이었다. 그리고 이들 선종 사원에서는 식생활 자체가 수행의 장으로, 절에서 기거하는 수행승은 마땅히 먹을거리의 형식을 실천하고 있었다. 이것과 결부되는 형식으로 생겨 커진 것이 사찰 요리였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술하겠다.
신사는 지역사회에서 행사의 담당자였다. 지금도 많은 연중행사의 담당자는 신사이고, 그리고 그 때문에 신사와 결부된 행사 먹을거리가 지금도 많이 전해진다. 정월과 3월 3일과 5월 5월, 6월 말의 여름나기 액막이의 미나즈키水無月, 기온 축제의 갯장어 등 그야말로 하나하나 셀 수 없다.
스기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845-903)를 기리는 기타노 텐만구北野天満宮에는 독특한 사례가 있다. 기타노 텐만구는 경내의 매화원으로도 유명하다. 나무의 그루수는 1500그루. 매화원이 설치된 것은 미치자네가 매화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이것들로부터 수확한 매실은 매년 2톤을 넘는 듯하다. 이들은 매실장아찌로 가공되어 이듬해 5월의 '대복 매실大福梅'로서 참배자들에게 나누어준다. 설날에 작게 말린 매실장아찌와 다시마에 끓인 물을 부어 만든 것이 대복차. 대복 매실은 여기에 쓰인다.
기타노 텐만구에는 또 하나, 흥미로운 행사가 있다. 가을의 '토란줄기 축제(ずいき祭)'이다. 토란줄기란 토란의 잎줄기로 한자로는 우경芋茎이라 쓴다. 줄기가 아니다. 토란줄기 기부의 껍질을 벗기고 데쳐서 먹는다. 말려 두면 보존도 잘 되기에 보존식으로도 사용해 왔다.
축제에는 지붕을 토란줄기로 인 신위 가마가 거리를 누비면서 가을의 수확을 축하했다. 신위 가마는 토란줄기 이외에도 갖가지 채소가 장식된다. 신위 가마의 네 귀퉁이를 장식하는 '모퉁이 영락'은 그 천정 부분에는 흰참깨나 구죠 대파의 씨앗을 온통 박아 넣고, 또 유자, 다나카田中 고추, 적가지 등이 매달려 있었다. 더구나, 적가지란 토마토가 아니라 가지의 대목으로 여겨지는 '평가지(Solanumintergrifolium)'이다. 이밖에도 카모 가지를 표현한 장식을 달았다. 사자 머리는 머리토란(頭芋)을 거꾸러 매달아서 표현했다. 뿌리가 머리털이 되고, 또 입은 붉은 고추, 눈에는 밤이 쓰였다.
중세까지 사람들에게는 신사와 불교 사원의 차이는 현대인의 감상으로 보면 더욱 애매한 것이었을 듯하다. 수행(修験) 같은 지역성이 강한 산악 종교도 서민들 사이에 퍼져 침투했다. 교토에는 쇼우고인(聖護院)이라는 사찰이 있는데, 이 절은 중세, 쿠마노熊野의 수행이나 후지산富士山의 수행과의 관련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관련은 쿠마노와 교토, 후지산과 교토의 관련을 강화시켰을 것이다.
사람의 이동은 여행이다. 여행이 성행하게 되면 여행의 먹을거리가 생긴다. 외식의 기원이다. 외식의 기원을 에도 시대에 구하는 언설이 많은데, 그건 에도의 도시만 보아 왔기 때문이다. 종교 활동은 훨씬 오랜 시대부터 여행이란 활동을 만들고, 외식을 낳아 왔다.
아무튼 종교 시설은 행사의 담당자로서, 그때마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일종의 사회장치였다. 그리고 행사에는 먹을거리가 따라다닌다. 종교 시설이 많았던 것이 교토를 먹을거리의 선진지로 만든 큰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교토의 쌀과 술
교토의 쌀
교토는 오래도록 쌀의 집적지였지만, 쌀의 산지는 아니었다. 교외에 농지는 있었는데, 에도 시대에 이미 근교 농업이 성립되어 있어 더욱 부가가치가 높은 채소 등이 활발히 재배되었기에 쌀의 생산량은 제한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교토는 쌀의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 온 토지이기도 하다.
1933년에는 부 농업시험장 단고丹後 분장에서 주조 전용 품종인 '이와이祝'가 육성된다. 이 품종은 육성된 뒤 잠시 주조에 쓰였는데, 그 뒤 '야마다 니시키山田錦'의 융성에 밀려 재배되지 않게 되었다. 1955년 무렵부터 유지有志의 힘으로 부흥, 다시 교토의 몇 군데 주조장에서 쓰이게 되었다. '이와이'는 효고현兵庫県의 재래종 '노죠우호野条穂'에서 선발되어 육성되었다. '노죠우호'는 1917년 무렵에 효고현 카사이시加西市 노죠우野条의 호우라이 쥬우키치蓬莱重吉라는 사람이 '나라호奈良穂'라는 품종에서 선발했다고 한다(호우라이 마사시蓬莱正史 씨의 인터뷰에 의함). 즉 '노죠우'는 지명이다. '노죠우호'의 내력은 비교적 상세히 조사되어 있어 기원을 더듬어 보면, 1840년 무렵에 시코쿠四国 순례의 행각승 한 사람이 여행 도중에 발견한 한 이삭을 나라 센지奈良専二라는 사람이 받아서 개량한 '나라호'에 다다른다. '나라'호에서 '이와이'까지는 순계선발에 의한 개량이다. 즉 '이와이'는 '나라호'의 변종 중 하나인데, 나라호의 성격을 비교적 잘 지금에 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10년에는 교토시의 남서쪽 교외, 오토쿠니군乙訓郡 모즈메무라物集女村(지금의 무코우시向日市 모즈메쵸)의 야마모토 신지로山本新次郎에 의하여 '아사히旭'라는 품종이 육성된다. 육성 3년 전, 신지로는 자신이 농사짓는 논에 재배하던 품종 '히노데日ノ出'의 그루 중에서 아사히의 원종이 되는 그루를 발견했다. 그는 이것을 3년에 걸쳐서 시험재배하고, 좋은 품종이라 생각되었기에 교토부의 농업시험장에 가지고 가서 새로운 품종으로 채용하도록 부탁한다.
'아사히'는 당초는 좀처럼 보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가 이 품종을 놔두지 않았다. 세상은 부국강병, 어떤 일이 있어도 쌀을 증산해야 했던 시대로부터 조금은 질을 의식하는 시대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사히'는 이 시대, 질이 높은 쌀로 자리매김되었다. 그 재배면적은 최성기에는 50만 헥타르를 넘기기까지 했다.
'아사히'는 육종가들도 선호했다. 근현대 품종개량의 주요 수단은 두가지 품종을 인공적으로 교배시켜 새로운 품종을 만드는 '교배육종법'이다. 예를 들면, 품종 A가 '도열병이란 병에 약한' 결점을 가지고 있고, 이것을 개량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자. A는 다른 성질에 대해서는 뛰어나서 버리기 아깝다. 이때 '다른 성질은 A에 뒤떨어지나 도열병에는 강한' 성질을 가진 품종 B를 가지고 와서 A와 교배시킨다. 그리고 그 자손 중에서 'A와 비슷한 성질을 지니면서 도열병에 강한' 성질을 가진 것을 선발해 새로운 품종으로 만든다. '아사히'는 품종 A로서 활발히 이용되었다. '아사히'는 그 뒤, 농림8호를 낳고 다시 농림22호가 되며, 그리고 농림 1호와의 교배시켜서 '고시히카리'가 되었다. 즉 '아사히'가 없다면 고시히카리는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완전히 망각되어 버린 교토 태생의 품종도 있다. '교와세京早稲'가 그것이다. 이후에 와카야마현和歌山県 현의원이 된 마에지마 마사후사前島正房가 1868년 3월에 교토의 야사카 신사를 방문했을 때, 한 벼이 삭을 가지고 고향에서 시험재배했던 바 어머어마하게 성과가 좋고 또 맛있는 쌀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곳에서는 꽤 조생이었기에(8월 25일에는 수확할 수 있었다고 함), 교와세란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1893년 11월 발간된 <대일본 농회보農会報 146호>에 "희망자에게 종자를 분양한다"고 광고를 낸 바, 100명 가까운 응모가 있었다고 한다(마에지마, 1894. <대일본 농회보> 151호, 33쪽).
다만 그 뒤 '교와세'의 행방은 묘연하여 알 수 없다. 그렇더라도 마에지마는 왜 이 시기에 교토를 방문했던 것일까? 1868년 3월이라 하면 교토는 대혼란의 한가운데 있었다. 우선 이 4년이 채 되기 전인 1864년 7월에는 이른바 '금문의 변'이 일어나 교토 시가의 중심부는 몽땅 타버리게 된다. 그리고 1868년 1월의 도바 후시미鳥羽伏見의 전투에서는 오사카-교토 사이의 요도, 후시미 부근을 포함한 케이한京阪 일대가 전장이 되었다. 와카야마에서 교토로 나간다고 하면, 당연히 이 부근을 지나게 된다. 그리고 3월. 전투 이후 대혼란의 시기였을 터이다. 느긋하게 관광 유람에 나설 수 있을 만한 평화로운 시대, 장소는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교토 태생이라고 하는 술쌀 품종이 또 하나 있다. 1852년, 쵸우슈우번長州藩 무사 우츠미 고자内海五座 에몬衛門이 교토의 교외에서 좀처럼 볼 수 없던 벼이삭을 고향(지금의 이와쿠니시岩国市)에 가지고 돌아가 지인에게 재배하도록 한 바 성적이 양호했기에, 이것을 '미야코(都)'라고 이름지었다. '미야코'는 그 뒤, 영주의 진상미가 되는 등 호평을 받았는데, 1890년에는 야마구치시山口市 시내의 이토우 오토이치伊藤音市에 의해 '고쿠료우미야코殻良都'로 개량되어 그 뒤에는 오로지 술쌀로서 재배되기에 이르렀다. 현재 후쿠오카현에서 '고쿠료우미야코'라는 상표의 술이 있는데, 이것은 품종 '고쿠료우미야코'를 빚어서 만든 술로 알려져 있다.
앞의 '이와이'이든 이 '미야코'이든, 모두 알이 굵고 키가 크며 이삭이 긴 성질을 가진다. 이와 같은 특징을 지닌 품종을 '수중형穂重型'이라 부르는데, 그 가운데 특히 19세기에 서일본 각지에서 발견되었던 것을 '백옥속白玉属'이라 부르고 있다. 이 무렵의 교토나 효고의 물논 지대에서는 이 '백옥속'에 속하는 품종이 몇 가지나 탄생한 것이다.
술과 누룩
쌀에는 특수한 영력이 있다고 믿어 왔다. 도혼稲魂 신앙이다. 거울떡(鏡餅)은 찹쌀로 만들어, 정월에 내려오는 오곡신(年神)의 매개체가 된다. 정월이 끝나면 신은 산으로 돌아간다. 이떄에 거울떡을 자르면 액막이가 된다고 한다. 그리고 쌀로 만든 술도 또한, 신과는 자를래야 자를 수 없는 관계이다.
쌀의 술을 빚는 데에는 충분한 양의 쌀을 안정적으로 구하는 일이 필요하다. 쌀은 고대 이래, 세금으로 수도를 비롯해 도시에 모아 왔다. 교토는 1100년에 걸쳐 수도였던 도시로서, 많은 쌀이 모였다. 교토는 풍부한 물도 있었기에, 술 담그기에는 제격인 토지였다. 그리고, 쌀의 전분을 당으로 바꾸는 누룩도, 전문업자의 손으로 개량이 더해지고, 나아가 배양의 기술이 연마되어 발효에 관련된 지식과 기술이 집적되었다. 교토에는 이미 14세기에 '누룩조합(麴座)'이란 동업조합이 생겨서 무로마치 막부에게 독점적인 판매권을 얻어 시중의 발효산업의 우두머리 역할을 담당했다. 다만, 주조업자들은 이 조합에는 끼지 않고 별도의 업계 내에서 정보교환하며 큰 산업으로 성장해 나아갔다. 그래서 누룩조합과 주조업계 사이에는 큰 마찰이 생겼다. 소동은 히에이산 엔랴쿠지와 키타노 텐만구를 둘러싼 대소동으로 발전했다.
소동의 전말은 어찌되었든, 그 배경에 있던 것이 누룩을 사용하는 식품산업이 거대한 신사와 사찰을 끌어들이는 소동으로 이어질 정도로 큰 산업으로 발전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룩조합과 다툰 주조업자도 또한, 누룩을, 품질을 유지하면서 대대로 이어온 독자의 기술과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다. 앞에, 이 시대에는 수도 안에 340채의 술창고가 있었다고 적었는데, 주조는 이미 훌륭한 식품산업으로 발전해 있었다.
이 시대의 교토에는 도시 안의 소비를 지탱하는 주조업이 경영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성립해 있었다. 교토의 도시에 이 정도의 술 수요가 있었던 배경에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사회, 관료사호가 존재했던 데다, 신사와 사찰의 존재가 크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행사와 제사의 주최자이며, 그리고 그 행사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술이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토는 발효산업의 도시이기도 하다. 앞의 누룩조합의 한 사건 이후, 주조업자는 누룩을 자가생산할 권리를 획득했는데, 누룩 산업은 주조에 한하지 않고 된장, 간장의 제조 등 다방면에 미치고 있었다. 누룩조합의 업자들은 이들 업자에게 누룩을 팔아 이익을 얻고 있었다. 누룩의 취급에는 고도의 기술과 전문지식이 필요하다. 이 기술을 자식에게만 비결을 전하는 형태로 대대로 전해 온 것이 지금의 누룩가게가 아닐까 하는 것이, 교토의 도시에는 유일하게 남은 씨누룩 가게 '히시로쿠菱六'의 스케노 아키히코助野彰彦 사장이다. 히시로쿠는 창업 350년이라 전하기 때문에, 에도 시대 초기부터 교토에 있던 씨누룩 가게이다. 당시, 교토의 도시에는 몇 채의 씨누룩 가게가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한 채 사라지고 또 한 채가 사라져, 지금은 히가시야마구의 히시로쿠만 남았다.
히시로쿠는 현재는 술만이 아니라 된장, 간장 등 교토의 많은 발효산업에 씨누룩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교토 발효식품의 척추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 히시로쿠라고도 할 수 있다.
교토의 술창고와 식초 빚기
술창고의 수에 관한 기록은 윤택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몇 가지가 있는 듯하다. 1770년에 편찬된 <화낙명주감花洛銘酒鑑>에는 낙중의 204채의 술창고 위치와 상표가 기재되어 있다. 요시다 겐吉田玄 씨에 의하면, 에도 중기인 겐로쿠元禄 시대(1688-1704)에는 낙중에만 551채의 술창고가 있었는데, 그 뒤에는 감소한 것 같아 막부 말기까지 대략 250채 정도로 추이한다. 특히 안에이安永 시대(1772년 무렵)부터는 덴메이天明 기근의 영향에 의한 쌀 부족, 덴메이의 대화재(1788년)에 의한 사회 혼란 등이 있고, 또 다른 지역에서 오는 양질의 술 이입 등도 있어서 교토의 주조는 침체되었다고 한다.
술창고의 수는 메이지 이후 서서히 감소했다. 생산자가 줄면 과점이 진행되기 일수이지만, 술창고의 경우는 전국 규모의 판매망을 가진 창고는 별로 없다. 그 의미에서는 된장과 비슷하다. 역으로 전국 규모의 생산자를 가진 것이 간장으로, 대규모 생산자가 전체의 생산을 뒷받침하고 있다. 영세한 업자가 각지에 있지만, 생산량으로 보면 얼마 되지 않는다.
메이지 이후 많은 술창고가 폐업했지만, 남부인 후시미에 이전한 창고도 일부 있었다. 지금은 교토의 술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후시미를 떠올리는데, 그것은 주로 메이지 시대 이후의 일이다. 후시미는 에도 말기에는 지리의 나쁜점 때문에 에도로 가는 유통에서 뒤처지고, 또 토바 후시미 전투로 재해를 입어 술창고도 파멸적인 피해를 받았다. 그러나 1889년 도카이도 본선의 개통도 있고, 교통편이 좋아져서 상황이 크게 변했다. 좋은 지하수가 있는 것도 도움이 되어, 후시미는 지금 일본에서 유명한 술 산지가 되었다.
한편, 현재는 이른바 낙중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술을 계속 담그고 있는 건 가미교구上京区의 사사키 주조佐々木酒造 1채 뿐이다. 또한 카모강의 동쪽, 히가시이치죠우東一条 도로에는 마츠이 주조松井酒造라는 술창고가 있다. 시가지에 있는 옛날 그대로의 술창고는 이 두 채 뿐이다.
별로 의식하지 않는 것이지만, 술을 원료로 만드는 조미료에 식초(쌀식초)가 있다. 교토의 일정식에도 빠질 수 없는 식재료인데, 동시에 선명한 무늬를 염색하면서 물이 빠지지 않게 하는 데에도 사용되어 왔다고 한다. 그래서 겐로쿠 시대에 무늬 염색이 성행하자 식초 제조업도 크게 발전을 이룬 듯하다. 교토의 술은 전량을 사람이 마신 게 아니다. 니시진의 퇴조와 함께 식초 가게도 감소했다. 지금도 시내에 남은 식초 제조점은 아마 며 군데. 술창고도 감소했지만, 식초 제조점도 감소했다.
교토인은 '검약가'
외식하지 않는 교토인
미슐랭 3별 가게를 7개나 가진, 그밖에도 세계적인 음식점의 지점이 늘어선 교토시. 한편으로 이탈리아 음식점의 격전지, 라멘 격전지라고 물으면, 교토 외부의 사람들은 분명 교토인은 모두 미식가로 먹는 것에 까다로운 사람들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교토인의 일상적 음식은 검소하다. 좀더 사실대로 이야기하자면 교토 사람은 먹는 것에 관해서는 '검약가'이다. 이미 기술했듯이, 간사이에서는 옛날부터 "오사카는 먹다가 망하고, 교토는 꾸며 입다가 망하며, 고베는 신발을 사다가 망한다"고 하는 속담이 있다. 세 도시의 성격을 정말 잘 알아맞춘 것이기에 이에 의하면 교토는 옷의 도시이다. 먹는 걸로 말하자면 오히려 오사카가 본고장이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아래 그림은 전국 7개 도시의 외식 상황(2015-2017)을 여덟 종류의 외식에 대해 정리한 것이다. 도시 각각의 특징은 이 팔각형의 모양으로 표현되어 있다. 모양이 정팔각형에 가까운 도시는 시민들이 여덟 종류의 외식에 골고루 지출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무언가 하나의 장르가 돌출되어 많거나, 반대로 적어지거나 하면 팔각형의 모양은 어그러진다. 또한 팔각형의 크기는 외식이 성행하면 할수록 커진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이 나고야시로 그 모양은 정팔각형에 가깝고, 또 어느 도시보다도 커져 있다. 즉 나고야시는 여기에 올라온 7개 도시 중에서 가장 외식이 성행하고, 또한 장르를 불문하고 여러 가지 종류의 외식을 즐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교토시도 나고야시와 도쿄도(23구)와 마찬가지로, 정팔각형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지만, 그 크기는 도쿄나 나고야에 비하여 확실히 작다. 즉 교토시민은 여러 외식을 먹긴 하지만 양으로 보면 매우 검소하다는 것이 된다. 그만큼 관광객이 많고 가게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즉 교토의 외식점은 교토 이외의 사람들, 아마 관광객이나 사업 손님에 의하여 지탱되고 있다는 것인 듯하다. 덧붙여, 그림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교토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것이 나가사키시이다. 여기도 관광객이 많은 도시이면서, 시민의 외식은 매우 저조하다. "도시 안의 음식점은 관광객용"이란 사정은 나하시와 나가사키시 모두 관광지의 공통된 특징일지도 모른다.
또한, 이 자료는 '2인 이상인 세대'를 대상으로 한 수치에 의한 것이다. 학생 같은 1인 세대를 대상으로 하여 통계를 하면, 또 다른 경향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밥에 따뜻한 차를 붓는 속담
교토에는 '부부즈케ぶぶづけ'라는 것이 있다. '찻물밥(お茶漬け)'인데, 이 말에는 사소한 이야기가 있다. 교토에서는 부부즈케, 즉 '찻물밥'을 권한다면 귀가를 재촉당하는 것이란 이야기이다.
"부부즈케라도 어떠신가요?"라고 말하여,
"그럼 한 그릇만" 등이라 답한다면 돌아간 다음 무슨 말을 들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기원이 상류사회 만담인 '교토의 찻물밥(京の茶漬け)'에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인데, '부부즈케'란 말이 진짜인지 어떤지를 둘러싸고 인터넷 등에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나도 학생 무렵에 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행복인지 불행인지 그런 말을 들은 적은 아직까지 없었다. 가장 친숙한 술집에서 "슬슬 찻물밥으로 하시겠습니까?"라고 이야기한 적은 있었지만, 그건 '이제 돌아가'라는 말이었을까?
최근에는 다른 집에 방문할 기회가 눈에 띄게 줄었다. 특히 일하는 사람의 경우는 새해의 인사가 아니면 남의 집을 방문할 일이 거의 사라졌다. 부부즈케의 이야기 등, 원래의 배경이 사라지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옛날 교ㅗ인은 왜, 부부즈케 등을 먹었던 것일까? 당시의 부부즈케는 문자 그대로 찻물밥, 또는 따뜻한 찻물밥으로, 매우 검소한 음식이다. 지금의 그것처럼 연어 찻물밥, 다시마 찻물밥 같은 술집의 마무리 메뉴에 실린 그러한 화려한 것이 아니다. 식은 밥에 끓인 물이나 차를 붓고 살살 말은, 반찬은 기껏해야 절임 정도라는 것이 부부즈케였다. 그렇다, 부부즈케는 정말이지 교토 장사꾼의 절약 정신이 발로된 것이었다.
기타가와 모리사다喜多川守貞의 <수정만고守貞漫稿>에 의하면 에도 시대, 교토와 오사카에서는 밥은 하루 1번 점심에 짓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면 저녁도 이튿날 아침도 밥은 찬밥이 되어 버린다. 여름이라면 몰라도, 겨울에는 힘들다. 부부즈케는 신체를 따뜻하게 해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게 궁리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여름은 여름의 사정이 있었다. 예전, 밥이 쉰다는 표현이 있었다. 일종의 부패인데, 밤 기온이 높을 때 밥을 놔두면 발효가 진행되어, 시큼하고 독특한 냄새를 풍기게 된다. 지금과 달리 보온밥솥이나 보온 기능이 있는 밥솥 등이 없던 시대이다. 다 지은 밥은 밥통에 넣어 보존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할머니는 밥이 쉬면 뜨거운 물을 부어서 씻고, 다시 그것을 찻물밥으로 만들어 먹었다. 부부즈케는 쉰 밥을 버리지 않고 먹는 지혜였을지도 모른다.
상업과 가내공업의 도시 -낙중洛中
낙중의 구조 -마루타케에비스丸竹夷
그런데, 교토의 지명은 알기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특히 중심부의 바둑판 지역의 지명이 알기 어렵다는 지적을 흔히 들을 수 있다. 다른 도시에서 지명은 마을 단위, 즉 하나의 구역에 지명이 주어져, 그것이 주소 표시나 공공 교통기관의 정거장 이름에도 쓰여 왔다. 택시에 타도 행선지를 알리는 첫 마디가 그 구역명인 일이 많다. 도쿄역이라면 '토라노몬「虎ノ門' '진보우쵸神保町', 신오사카역이라면 '센리千里' '키타キタ'라는 식이다. 그런데, 교토에서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시내의 중심부에서는 동서의 도로와 남북의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을 축으로 지명을 만든다. 교토인의 머리 속에는 이 좌표축이 놓여 있다.
나의 단골 가게의 하나 '쇼우죠우안招猩庵'은 남북으로 뻗은 키야마치木屋町 도로와 동서로 뻗은 니죠 도로의 교차점(산사로三叉路)인 '키야마치니죠木屋町二条'의 남쪽(키야마치니죠사가루木屋町二条下ル)에 있기에, 택시에 타면 그렇게 알려준다. 능숙한 운전수라면 "음, 오시코우지바시押小路橋 쪽? 맞은편?"이라 묻기에, "다리가 있는 곳"이라 답한다. 즉 그 가게는 '키야마치니죠의 교차점에서 남쪽으로 일방통행인 키야마치 도로를 남하한 곳'에 있어서 어디까지 남하할지 물었기에 "오시코우지 도로(라는 좁은 골목)가 다카세강을 건너는 오시코우지바시" 부근에 세워 달라고 한다. 만약 택시 운전수에게 '나카교구中京区 이치노후나이리쵸우一之船入町'라고 하더라도 금방 감이 오지는 않을 것이다.
마루타케에비스丸竹夷, 니오시오이케二押御池, 아네만롯카쿠타코니시키姉三六角蛸錦, 시아야붓타카마츠만고죠우四綾仏高松万五条......
모르는 사람에게는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만일을 위해서 기록하자면, 마루타마치丸田町, 다케야마치竹屋町, 에비스가와夷川, 니죠二条, 오시코우지押小路, 오이케御池, 아네야노코우지姉小路, 산죠三条, 롯카쿠六角, 타코야쿠시蛸薬師, 니시키錦, 시죠四条, 아야노코우지綾小路, 붓코우지仏光寺, 타카츠지高辻, 마츠바라松原, 만쥬지万寿寺, 고죠五条라고 하는 도로의 이름이다. 노래의 기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기억해 놓으면 매우 편리하고 좋다. 오늘날 회식 장소를 참가자에게 전하는 데에는 '타코야쿠시사카이마치아가루蛸薬師堺町上ル' 같이 말하면 좋다. 말하는 쪽은 '마루타케니 ......' 하고 노래해 보고, '타코'가 산죠 도로의 두번째 남쪽의 도로라는 걸 확인하는 것이다. 덧붙여서, 교차점에서 어느쪽 방향으로 나아가면 좋을지는 '산죠 다카쿠라' 아가루上がる(또는 上ル), 사가루下がる(下ル), 히가시이루東入ル, 니시이루西入ル 네 가지의 어느쪽이냐로 나타낸다.
이 시스템이 얼마나 널리 정착해 있는지는 시내를 남북으로 달리는 지하철 가라스마선의 역명에도 나타나 있다. 가라스마선의 역명은 거의 예외 없이 동서로 뻗은 도로명을 달고 있다. 교토역을 기점으로 북쪽으로 가면, 순서대로 고죠, 시죠, 가라스마오이케, 마루타마치, 이마데가와, 구라마구치, 기타오오지, 기타야마로 이어진다. 종점인 국제회관 앞 역, 그 하나 전의 마츠카사키역松ヶ崎駅을 제외하면 모두가 동서로 뻗은 도로명과 일치한다(가라스마오이케역은 오이케 도로). 남쪽으로 향해도 쿠죠역九条駅, 쥬우죠역이 있는데, 이것도 동서로 뻗은 간선도로명과 일치한다.
그렇다고 구역명을 사용하는 시스템이 없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교토에는 에도 시대부터 주민의 자치조직이 있어 어느 정도의 독립성이 보장되어 있었다. 메이지 유신 직후, 교토시에서는 이 자치조직을 '반구미番組'라는 조직으로 개조하고, 반구미마다 소학교를 개설한다. 일본에서 가장 일찍 학구제의 소학교가 개설되었다. 교토시내에서는 지금도 'OO학구'의 명칭이 실체를 수반하고 살아 있다. 그것은 행정 단위도 아니고 경영 단위도 아니지만, 시민의 결속은 단단하다.
이처럼 교토 시가의 지명은 도러와 도로의 교차점을 좌표계와 같이 붙인 것으로, 일정 면적을 가진 지구 단위로 붙인 것과 두 가지가 있다. 그리고 시민 생활 속에서는 양자를 능숙하게 나누어 사용하고 있다.
니시진의 가내공업과 식문화
교토는 옛날부터 공업도시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던 것이 니시진이다. 앞의 낙중의 북쪽, 고쇼의 북서쪽 근처에 있는 에어리어를 이룬다. 다만 니시진이란 행정구역은 없다. 가미교구부터 기타구의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지금도 옛날 교토의 모습이 남은 지역의 하나이다.
생산되던 품목은 다양하여, '의약품, 의류 직물, 무구武具나 미술공예품, 일용잡화, 식료품' 등에 미쳤다고 한다(<교토와 교토 가도(京都と京街道), 가도의 일본사(京都と京街道 街道の日本史) 32>). 의류의 중심은 비단이었다. 무구나 미술품도, 부품은 다품종이고, 또 정치하게 만든 부품을 모아야 한다. 그리고 개개의 부품 생산량은 그만큼 많지 않았다. 이러한 공업은 대부분이 가내공업 또는 소규모 사업자가 지탱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술을 자식에게만 비결을 전하는 시스템에 의해 전해져 왔던 집도 많다.
가내공업이기에, 가족 안의 분업이 열쇠를 쥔다. 가족은 남자도 여자도 모두 노동력이었다. 전업주부 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은 근세, 슨대부터 전후에 이르기까지 그만큼 큰 큰 변화가 없었다. 니시진이 정말로 변한 것은 20세기 후반에나 들어와서부터였다. 생활 스타일이 바뀌어, 사람들은 전통 옷을 입지 않게 되었다. 전통 옷을 비롯해 일본식 정장은 소비가 줄어 생산이 채산이 맞지 않게 되었다. '옷으로 망하는' 도시의 의류산업이 눈에 보이게 쇠퇴해 나아갔다.
니시진이 이렇게 되는 과정을 실제로 체험해 온 사람들이 있다. 교토 조리사 전문학교를 운영하는 다이와大和 학원의 호스피탈리티 산업 진흥 센터장 나카타 마사히로仲田雅博 씨도 그 한 사람이다. 나카타 씨의 생가는 니시진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니시진에서는 성수기가 디면 3번의 식사 시간도 아까워하며 일이 계속되었다. 자연히, 취사 시간은 압박을 받는다. 다나카 집안의 가업은 그 장인들 일가의 식사를 지원하고 있었다. 다나카 씨도 자주 심부름을 했다고 한다.
"OO 씨에게 가서 육수계란말이를 전해줘"
육수계란말이란 육수를 넣은 계란말이. 폭신폭신하고 육수 맛이 나는 계란말이로, 일종의 패스트푸드이기도 하다. 덧붙여서, 도쿄의 두터운 계란말이와는 달리 단맛이 없다.
니시진의 사람들이 행사나 축제를 할 때 이용했던 것이 학구에 있던 요리 배달가게나 초밥집이었다. 집에서 반찬을 만들기도 했지만, 만들어 놓은 반찬이 많았다. 그것들이 지금 주목을 받는 '백반(おばんざい)'이었다. 밥은 집에서 지은 것이 많았던 듯하고, 밥짓는 건 오직 점심 때였다고 한다. 백반은 니시진 등의 가내공업이 성행한 토지의 음식 스타일이기도 했다. 일이 바빠서 식사 준비도 잘 할 수 없다. 그러한 사람들의 일종의 상비 반찬이기도 했다. 간단히 만들 수 있고, 게다가 만들어 놓을 수도 있다. 편의점도 백화점 지하의 반찬가게도 없던 시대의 수제 패스트푸드가 백반이었던 것이다. 요리 중에는 화려하게 꾸며 '뜨끈뜨끈한' 것이 생명이라고 하는 것도 많지만, 백반은 상황에 따라서는 만들어 두는, 즉 만들고나서 2-3일은 더 된다는 것에 특징이 있다. 지금이라면 냉장, 냉동기술의 발달로 대개의 요리는 보존할 수 있는데, 옛날엔 어려운 일이었다. 니시진의 가내공장처럼 바쁜 가정에서는 안성맞춤이었다. 지위가 높은 귀족 사회와는 달리, 하녀나 가정부가 어느 집에나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가내공업에서는 남편도 아내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가 노동력이었던 것이다. 지금 일본에서는 가사 분담을 둘러싸고 사회에서 '남녀 공동참여'의 논의가 활발히 일고 있다. 그러나 니시진의 가내공업 세계에서는 남녀 공동참여는 남녀평등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이미 실현되고 있었다.
대중식당의 계보
교토인이 별로 외식을 하지 않는다는 걸 이미 적었다. 한편, 중식 같은 것은 교토의 식문화 안에서 인지되어 왔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경삿날의 중식이라 하면 '배달'인데, 일상의 중식도 또한, 특히 니시진 근처에서는 도시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듯하다. 교토부 직원인 와타나베 마사히데渡邊昌英 씨는 1963년 니시진 태생이다. 와타나베 집안은 가족 경영의 마을 공장을 경영하여, 베틀로 직물을 짜고 있었다.
앞의 나카타 씨의 증언과 똑같이, 와타나베 집안에서도 나날의 식사는 느긋하게 식탁에 앉는 등이란 우아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식사는 배달집에 의뢰하든지, 점심은 음식점에서 시킨 것이나, 간단히 먹을 수 있는 '반찬빵'으로 때우는 일도 많았다. 반찬빵이란 쿠페빵 같이 기다란 빵에 세로로 칼집을 낸 뒤, 안에 볶음면이나 고롯케, 비엔나 소세지 등을 끼운 것을 말한다. 도시에는 막과자 가게, 우동 가게, 생선 가게 등이 곳곳에 있었다고 한다. 막과자 가게에는 이른바 막과자 외에, 앞의 반찬빵이나 과자빵 등도 팔고 있었다. 빵을 도매하고 있던 것은 1947년 창업한 '야마이치빵山一パン'이나 지금은 폐업해 버린 현지의 빵 제조업자였다. 1970년 만국박람회 무렵이 되면, 지금의 교토 시내에 있는 빵 체인점의 노포인 '시즈야志津屋'가 등장했다.
생선 가게는 생선보다도 조리가 완료된 반찬류를 많이 취급했다고 한다. 지금의 반찬 가게 같은 곳이랄까. 당시는 아직 가정용 냉장고가 보급되지 않았서 집에서 하는 식사는 이러한 반찬 가게를 이용하든지, 또는 '만들어 놓는 가게'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우동 가게'는 대중식당의 모습이다. 즉, 외식 가게에 해당되지만 배달도 하고 있어서 중식과 외식 겸용이라 하는 바일까. 메뉴에는 우동 이외에도 메밀국수, 덮밥 등이 있었다. '메밀국수'의 대부분은 '중화 소바' 또는 '지나 소바'였다. 면은 중화면이었는데 국물은 매우 담백해서 지금의 '라멘'과는 비슷하나 다른 것이다.
대중식당이나 이런 메뉴는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던 것인데, 그 내용은 도시에 따라 여러 가지였다. 예를 들면, 교토에서 덮밥이라 하면 나뭇잎 덮밥木の葉丼이나 기누가사 덮밥衣笠丼. '우동'도 교토 우동이다. 그리고 똑같이 간사이에서도 나뭇잎 덮밥은 오사카의 그것과는 재료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 교토의 우동은 잘게 썬 얇은 두부튀김이 올라가는 것이 많고, 단짠하게 조린 얇은 두부튀김이 올라가는 '오사카 우동'과는 내용이 조금 다르다. 대중식당은 교토에서도 니시진 뿐만 아니라 시내 곳곳에 있었다. 시민의 10%를 점하는 학생이 그 고객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대중식당은 서민의 일상적 외식의 담당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최근, 전국 체인의 외식점이 교토의 도시에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재래의 대중식당은 경영자의 고령화와 후계자 부재가 심각해지고 있다. 교토 식문화의 고유성이 여기에서도 사라지고 있다.
백반(おばんざい)의 문화
교토 서민의 음식을 '백반'이라 부른다는 건 앞에서 적었다. '경삿'날의 음식은 아니고, 일상의 음식이다. 한자로 적으면 '万菜' '番菜' 등이 된다. 어원은 정해진 것은 없는 듯한데, 만万이란 글자를 보면 '여러 가지'라는 의미일 것이고, 또 '번番' 자를 보면 '일상 쓰임' 또는 '2번, 3번'의 의미가 될 것이다. 요컨대 '백반'은 일상의 음식, 즉 '평상시'의 먹을거리이다. 도쿄의 '반찬(総菜)'(또는 惣菜)의 의미에 겹치는 것이 있는 것일까?
그 이름 그대로 백반의 종류는 실로 여러 가지이다. 다만, 어떤 느슨한 규칙이 있는 듯하다고도 생각된다. 교토의 먹을거리를 나타내는 말로, 또 하나 '타이탄たいたん(炊いた)'이란 말이 있다. '타이탄'이란 '지은 것, 익힌 것'이란 의미이다. 백반에는 이 '타이탄'이 많았던 것 같이 생각된다.
여기에 자주 쓰이는 것이 튀김이다. 교토 순무(壬生菜)나 수채水菜와 튀김의 익힘, 소송채小松菜와 튀김의 익힘, 무말랭이 익힘, 톳 익힘 등에는 얇은 두부튀김이 쓰인다. 뱅어포도 백반의 기본이 된다. 만간지万願寺 고추와 뱅어의 익힘 등이 그것이다. 앞에서 '뱅어 산초'도 원래는 이 백반의 하나였을 것이다.
백반에는 식물성 식재료가 많이 쓰여 왔다. 두부튀김이 다용되는 것도 단백질이나 지질이 풍부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백반이 채소 중심으로 영양가가 풍부한 이상적인 음식인 것처럼 이야기되지만, 그리고 일면으로는 그대로일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저단백질이란 측면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교토는 사찰 요리의 문화에 뿌리내린 도시이다. 사찰 요리라고 하면 고기나 생선은 쓰지 못한다. 앞의 푸성귀와 두부튀김의 익힘은 가츠오부시 등 생선의 육수를 쓰지 않으면 사찰 요리인데, 두부튀김 외에도 대두를 쓴 요리가 많다.
대두는 단백질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필수아미노산(체외에서 섭취해야 하는 아미노산)의 전부를 균형 있게 함유하고 있다. 대두의 섭취는 영양학의 이치에도 맞는다. 백반에도 대두 요리가 있다. '콩 익힘'은 그 대표일까. 물에 불려 놓아 부드러워진 대두를 똑같은 크기 정도의 주사위 모양으로 자른 당근이나 곤약, 다시마 등과 함께 '익힌' 것이다. 좀 고급스럽게 만들면, 여기에 말린 작은 새우를 넣기도 한다. 시중의 술집에서도 백반을 내는 가게가 많다. 내는 방법은 제각각인데, 카운터 위에 일품씩 담은 큰 접시를 늘어놓고 제공하고 있는 가게도 많다.
백반을 만들면서 힘든 점은 다품종의 메뉴를 한번에 준비해야 하는 점이다. 제철 채소나 생선, 튀김, 두부 등, 한 가게에서 쓰이는 식재료의 종류는 매우 많다. 이 점에서는 도쿄의 일정식인 '메밀국수' '장어' '초밥' 등의 전문점과 비교하여 차이가 매우 뚜렷하다. 제철 재료를 비롯해, 오늘 입수한 식재료는 무엇인지를 생각해서 균형을 잡으면서 메뉴를 조합해 간다. 백반이란 음식도 또한 일종의 종합예술인 것이다.
교토에서도 젊은 세대는 백반을 모르고, 흥미를 가진 사람도 줄고 있다. 요리연구가 오오하라 치즈루大原千鶴 씨는 백반 등 교토의 간편요리 신메뉴를 개발해 텔레비전이나 잡지에 발표하고 있다. 오오하라 씨의 시도가 더 받아들여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시가지의 한가운데 있어 에도 시대 초기부터 장사를 계속해 온 '나라야奈良屋 스기모토케杉本家'의 스기모토 세츠코 씨도 스기모토 집안에 전해지는 레시피 모음에서 백반의 발신을 계속하고 있다. 오오하라 씨도 스기모토 씨도 간단히 만들 수 있고 만들어 놓을 수 있는, 말하자면 서민의 음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이 자세가 젊은 세대의 지지를 얻고 있는 건 적어 놓아도 좋다.
낙외洛外 -교토 채소의 풍토
시외와 채소
앞에서 '낙중(시내)'라는 단어를 썼다. 교토에는 낙중, 낙외라는 단어가 있다. '낙'이란 글자는 중국의 고도 '낙양洛陽'에서 온 것인 듯한데, 본고장인 낙양에도 '낙'의 시가지를 낙중, 그리고 그 바깥을 낙외라고 불렀다. 교토의 낙중, 낙외도 거의 똑같다.
교토 낙중의 범위는 시대에 따라 크게 달라져 왔다. 이유의 하나는 낙양 등과는 달리, 성곽이나 성벽 등 도시역과 밖을 구별하는 명확한 구조물이 없었던 점에 있다. 여기에서는 그 시대의 시가지를 낙중, 그 주변 지역을 낙외라고 하겠다.
낙중에는 도시의 식문화가 발달했다. 고래로 인류가 먹을거리를 영위하는 데에는 생산하는 인간=먹는 인간이란 도식이 있었다. 도시가 생기고 나서는 이 도식에 변화가 생겼다. 도시란 식량 생산에는 종사하지 않지만, 다른 생업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모인 곳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생업에는 의식주와 관련된 자재의 생산, 건축, 토목, 식품가공, 에너지, 섬유 등의 제조업 외에 통신, 운수, 교육, 행정 등의 서비스업, 제사나 종교 행사에 관련된 일 등 다양한 생업이 존재한다. 이들의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쌀이나 채소를 농사짓거나, 또는 가축을 사육하거나 하지 않는다. 물고기를 잡는, 야생의 식물을 채취하는 등의 작업도 여가로 하는 걸 제외하고 대부분 남에게 맡긴다. 물론 도시에 있어도 특히 소도시에서는 주민들도 식량 생산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중에는 반농반어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시가 커져 인구밀도가 더욱 높아지면 시내에서 식량 생산은 차츰 곤란해진다. 그렇다기보다 경제적으로 맞지 않게 된다.
도시에 식량을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 주위에 있는 농촌이었다. 도시가 출현하고서 그 도시 사람들의 먹을거리르르 제공하는 산업이 등장했다. 이것이 농업이다. 이전까지의 농경이란 생업은 자신의 먹을거리를 직접 생산하는 생업이었는데, 자신이 자신의 먹을거리를 생산할 수 없는 사람의 출현이 농업이란 새로운 산업을 탄생시킨 것이다. 의외의 일이지만, 농업이란 생업을 발달시킨 것은 도시였다.
자, 교토이다. 1889년 발행된 지도를 보도록 하자. 교토 시가는 지금의 그것에 비하여 상당히 좁다. 지금의 JR교토역 주변에서 남쪽, 카모강의 동쪽, 니시오오지 도로의 서쪽은 대부분이 농지이고 시가지 등은 거의 없다. 여기가 '낙중낙외도'에서 말하는 낙외였던 것이다. 그리고 낙외의 농지가 교토 채소의 생산기지였다.
위 지도(메이지明治 22年、1/20000 지도 「鞍馬山」 「大原村」 「京都」 「大津」 「伏見」 「醍菌村」).
메이지 시대의 교토와 교토 채소의 분포(高嶋、2004 등에 의함)
1) 매봉鷹峯 고추 | 9) 聖護院 순무 | 17) 교토 물미나리 |
2) 히라기노柊木野 동부 | 10) 聖護院 오이 | 18) 미부나(壬生菜) |
3) 시큼 순무(スグキ菜) | 11) 새우 토란 | 19) 코오리郡 무 |
4) 줄기 순무(浮菜カブ) | 12) 야마시나山科 가지 | 20) 서원西院 가지 |
5) 다나카田中 고추 | 13) 구죠九条 파 | 21) 중당사中堂寺 무 |
6) 카모賀茂 가지 | 14) 수채水菜 | 22) 휘파람새 순무(鶯菜) |
7) 시시가타니鹿ケ谷 호박 | 15) 모모야마桃山 무 | 23) 푸른(青味) 무 |
8) 성호원聖護院 무 | 16) 교토 땅두릅 | 24) 매운(辛味) 무 |
교토역의 남쪽 입구인 하치죠구치가 면한 하치죠 도로의 한 블록 남쪽의 큰 도로가 구죠 도로인데, 이 지명을 딴 농산물로 '구죠 파'가 있다. 카모강의 동쪽, 지금 교토대학이 있는 근처가 옛날 행정구획인 오오아자大字 '요시다吉田'. 요시다 신사라는, 절분節分(입춘 전날)으로 유명한 신사도 이 요시다에 있다. 그 이름도 '요시다산'(표고105미터)의 서쪽 산기슭에 있는 신사이다. 요시다산의 남쪽 기슭의 오오아자가 쇼고우인聖護院. 쇼우고인 순무, 쇼우고인 무의 산지였다.
교토에는 이외에도 미부나, 카모 가지, 야마시나 가지, 모모야마 무 등이 있다. 교토에 한하지 않고 어느 도시에나 재래 채소의 이름은 그 지명을 붙이고 있다. 도쿄의 네리마 무와 소송채, 오사카의 덴노우지天王寺 순무, 수이타吹田 쇠귀나물 등이다.
낙중의 확대에 따라서 이들 채소는 생산지가 부 밖을 포함한 원격지로 이동했다. 또한 어느 것은 산지의 도시화에 의해, 또는 재배가 끊어지며 사라져 버렸다. 코오리 무나 도우지東寺 순무가 그것이다.
시의 서쪽은 가장 개발이 늦었던 지역이다. 큰 이유는 서쪽, 즉 우쿄가 홍수의 다발 지대였던 데에 있다.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는 닌나지仁和寺도 묘신지妙心寺도 지금은 낙중에 이어진 시가지에 접하고 있지만, 1970년 무렵까지는 논밭에 둘러싸인 교외의 절이었다.
산의 교토의 일상 요리
농수성이 2019년부터 각도도부현별로 30품목의 햐오요리를 모아, 그것을 '우리의 향토요리'로 정리했다. 교토부의 향토요리도 30점 정도가 거론된다. 나도 이 선정 작업에 참여했는데, 부에는 갖가지 향토요리가 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거론해 보겠다(아래의 목록).
교토부의 향토 요리
검은콩 조림(黒豆煮) 죽순 산초 순 무침(たけの木の芽和え) 곶감 무침(古老柿なます) 미부 순무 겨자 무침(壬生菜のからし和え) 산초잎 조림(山椒の葉の佃煮) 카모 가지 산적(賀茂ナスの田楽) 둥글게 썬 무를 흐물흐물 삶아 된장 바른 요리(ふろふき大根) 고추순 절임(きごしょう) 만간지 고추와 뱅어 익힘(万願寺トウガラシとじゃこの炊いたん) 토란대 익힘(ずいきの炊いたん) 새우토란 대구포 익힘(えびいもと棒だらの炊いたん) 설말린 죽순과 머위 익힘(たけのことふき・生節の炊いたん) 갯장어 구이(はもの焼き物) 도미 순무鯛蕪/쇼고인 순무와 도미 조림(聖護院カブと鯛の煮物) 간고등어(へしこ) 청어 가지(にしん茄子) 소고기 두부(肉豆腐) 얇게 선 순무 절임(千枚漬け) 시바 절임(しば漬け) 시큼 순무 절임(すぐき漬け) 송이밥(松茸ごはん) 밤밥(栗ごはん) 고물떡(おはぎ) 낫토떡(納豆餅) 수수떡(きび餅)、조떡(あわ餅)、칠엽수떡(とち餅) 구운고등어초밥(ばらずし) 고등어초밥(さばずし) 백된장 떡국(白味噌の雑煮) 우지 말차빙수(宇治金時) 미나즈키水無月
수도 안에도 서민의 지역 음식이라 할 만한 음식이 있다. 행사 음식 등 경사의 음식 외에, 갖가지 일상 음식, 즉 '평소'의 음식이 있었다. 이미 언급한 '백반'은 그 대표이다. '우리의 향토요리'에도 '고추순 절임' '낫토떡' 등의 이름이 보인다. 고추순 절임은 '후시미 고추'의 어린잎을 조림으로 만든 것으로, 부 안의 각지에 비슷한 요리가 있다. 낫토떡은 낫토를 섞은 떡으로 군량으로 발달한 것이라 생각된다.
덧붙여 낫토는 우쿄구 케이호쿠 지구가 기원이라고 하는데, 보존성이 높은 고단백 식품이다. 떡도 또한 보존성이 높아, 이들을 조합한 낫토떡은 틀림없이 최고의 군량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낫토떡'은 당질과 단백질의 균형도 좋고, 농작업이나 여행할 때에도 편리했을 것이다.
채소와 산나물
그럼, 채소라는 단어에 대한 말로서 산나물이란 말을 쓸 수 있다. 이것도 또한 생물학적으로는 명확한 정의를 가지지 않은 말인데, 감상적으로는 알기 쉽다. 바꾸어 말하면, 산야의 야생식물 가운데 먹을 수 있는 것이라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사전 등을 보아도 품종개량을 하지 않고, 옛날부터 산야에 있던 식물로 먹을 수 있는 것이라는 설명이 많다. 누구나 떠올리는 산나물이 하면 머위, 그 꽃인 머위 꽃대, 고비, 고사리, 두릅, 뱀밥 등일 것이다. 들풀 중에는 독을 가진 것도 있기에 무얼 먹을 수 있고 무얼 먹을 수 없는지는 사회가 공유하는 지식이 되어 다음 세대로 전해진다. 들풀의 대부분이 '떫은맛'이라 부르는 독을 가진다. 이 독을 제거하든지 해독하든지 하면 식물체 그것은 먹을 수 있다. 아니, 남겨진 소량의 독 성분은 약으로 건강 유지에 도움이 되어 왔다. 그 일부는 약초로서 특화되고, 오랜 시간에 걸쳐서 재배화되어 왔다.
또한, 떫은맛 제거 기법은 죠몬 시대에는 확립되어 있어, 토란과에 속하는 천남성 등의 떫은맛 제거가 행해져 왔다. 또, 도토리라고 총칭되는 참나무속(Quercus)의 견과도 친숙하여, 동일본의 죠문 사회를 지탱하고 있었다. 떫은맛 제거는 이 시대의 사회가 당질원을 얻기 위하여 빼놓을 수 없는 기술이었다.
산나물이 식생활 속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게 된 배경에는 아마 수행도 등의 원시적인 종교의 존재가 있다. 수행자들은 산속을 누비며 먹을 수 있는 들풀과 그렇지 않은 들풀을 경험하여 습득하고, 대대로 구전해 왔다. 어느 산의 어느 냇가에는 무엇무엇이 자라고 있다는 지식도, 사회 안에서는 공유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중에는 자신만이 그 존재를 알고 있는 비밀 장소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수행자들은 그러한 식물을 재배화하지는 않았다. 그것들을 수중에 두고 '지배'하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수행자들이 마을에 내려와 마을 수행을 시작한 것이 마을 사람들이 산나물을 접하는 계기가 되었다.
교토는 분지에 있어 주변을 산이 둘러싸고 있다. 풍부한 산나물이 교토인의 음식을 지탱해 왔다. 이것이 도쿄와 오사카의 식문화와 크게 다른 점이다. 산나물을 적극적으로 요리에 접목하려고 하는 요리집도 있다. 교토시 북부의 산속, 하나세花脊라는 마을 근처에 있는 '미야마소우美山荘'의 포인트는 '풀 요리'. 동물성 식재료로는 민물고기나 사냥한 고기, 식물성 식재료는 들풀 등도 많이 사용해 조합한 일종의 가이세키 요리라고 한다. 사쿄구의 긴카쿠지 근처에 있는 '소우지키草喰 나카히가시なかひがし'. 주인이 요리하는 마음가짐은 '매일 계곡과 들을 돌아다니다, 밭에 들러, 생명 있는 작물을 받들어 가지고 돌아'온 소재를 요리하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더구나 두 가게의 경영자는 인척 관계에 있다. 또한, 그곳에서 수업한 요리인들이 그 사상을 이어받은 요리를 전국에 퍼뜨리고 있다.
교토인의 장보기 -낙중과 낙외를 잇다
유통과 행상
채소를 비롯한 식량은 어떻게 도시로 운반되었을까? 에도나 오사카 등 큰 강에 붙어 있어 바다에 면한 도시에서는 강이 식재료 등 물자의 운반에 쓰였다. 실은 교토도 또한 수운의 도시였다. 교토는 바다에서는 50킬로미터 가까이 떨어져 있는데, 뜻밖에도 특히 근세 이후는 수운이 담당한 역할이 크다.
그 장치의 하나가 시의 동쪽을 남북으로 흐르는 카모강鴨川이다. 다만 카모강은 상당히 날뛰는 강이었던 것 같고,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 같은 제방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1614년에 스미노쿠라 료우이角倉了以, 소안素庵 부자에 의하여 개통된 다카세강이 후시미와 교토를 연결하는 물류의 대동맥이 되었다. 당시의 물길은 아직도 살아 있어, 강폭은 시가지 부근에서는 약 5.4미터. 다카세후네高瀬舟라 부르는 바닥이 평평한 배가 교행할 수 있는 정도의 폭만 되었다. 그래서 하역, 짐을 부리기 위한 배 넣는 곳(船入)라고 부르는 선착장이 9곳 마련되어 있었다. 배 넣는 곳 가운데 가장 위(=북쪽)에 있던 곳이 '1번 배 넣는 곳(一之船入)'으로, 지금의 '키야마치니죠사가루木屋町二条下ル'에 위치한다. 일본은행 교토 지점의 동쪽 옆에 해당한다. 그리고 가장 아래의 배 넣는 곳이 있던 곳이 시죠 도로의 바로 북쪽 부근. 이 사이에 약 110미터 간격으로 배 넣는 곳이 설치되어 있었다.
교토의 역사적 수운 사업의 최후는 교토 시내로 끌어당기는 비와호 소수疎水이다. 제1, 제2의 두 개의 수로로 이루어져 있고, 제1 소수의 완성은 1890년이다. 교토시의 상수 가운데 일부가 비와호 소수의 물이란 것은 잘 알려져 있는데, 소수는 그 이외에도 수운이나 공업용으로도 사용되어 왔다. 그리고 소수의 수운 기능은 철도의 개설까지 계속 살아 있었다. 교토인의 식량 중 일부가 여기 수운에 의해 조달되어 왔다는 건 물론이다. 쌀이나 오사카에서 오는 물고기 등도 요도강을 경유해 후시미로, 그리고 후시미에서 다카세강을 통해 시내로 운반되었다.
채소 등 나날의 식료품 중 대부분은 교외의 농촌에서 도시 안으로 운반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하나가 '행상'이란 형태였다. 채소 등의 식료품을 생산자 스스로, 또는 그 의뢰를 받은 사람들이 시중에 팔러 가는 것이다. 아침에 출발해 그날 안에 다 팔고 생산지로 돌아가야 하기에 이동거리에는 자연히 제약이 있다. 한 달에 걸쳐 행상하는 약장수 같은 형태와는 이 점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또, 제사나 잿날 등에 출점하는 호객상(てき屋) 등과도 성격을 달리 했다.
행상은 에도에서도 볼 수 있었는데, 에도의 경우는 시장에서부터 소비지라는 형태의 업자가 많았다. 한편, 교토의 경우는 생산자로부터 소비자에게 직접 전달되는 형태의 업자가 많았다. 여성이 많은 것도 특징의 하나로, 특히 오오하라에서 출발하는 행상의 여성들은 '오하라메大原女'라고 불리며 최근까지 활동했다. 또한, 오오하라 외에 시내 북부의 카모賀茂나 서북부의 타카가미네鷹峰 등의 토지에서 행상에 나서는 여성들도 있었다.
행상은 지금도 아직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큰 짐수레나 리어카, 또는 그것들을 끄는 사람들은 정말이지 '멸종위기'인데, 대신에 경차를 이용한 행상은 아직 남아 있다. 교토 이외의 토지에서도 경트럭의 짐칸을 개량해 채소 등 신선 식료품을 선반에 놓고 각지를 돌아다니는 사업자는, 특히 지방의 과소지 등에서는 지역의 고령자의 음식을 지탱하기까지 하고 있다.
행상은 교토에 왜 남았을까? 큰 이유가, 도시의 규모에 있지는 않을까 생각한다. 도쿄는 150년 전에는 이미 100만 인구를 거느리고, 도시의 규모도 교토보다 훨씬 컸다. 교토는 시가지의 규모도 기껏해야 몇 킬로미터 사방이고, 또 교토 분지의 크기도 기껏해야 남북 15킬로미터, 동서 12킬로미터 정도이다. 이 정도 규모의 분지이기에 모든 곳이 당일치기가 가능한 범위에 있다. 시내의 물류 형태는 당연하지만 도시의 규모를 최대의 요인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니시키 시장
그럼, 현대의 교토인들은 어디에서 장을 보는 것일까? 시내에는 전국에 체인점을 전개하는 대형 슈퍼마켓이 각소에 있어서 많은 사람이 모이고 있다. 지역의 슈퍼마켓 지점도 여기저기에 있어 시민의 친숙한 부엌이 되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다른 현청 소재지, 또는 정령시와 다름 없다.
교토인이 장보기를 하는 또 하나의 장소가 '시장'이다. 시장에는 하나의 건물 안에 많은 가게가 입점한 것, 한 도로의 양쪽에 가게가 줄지은 것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몇 개의 가게가 항상 영업하고 있는 것이나, 한 달에 몇 번, 또는 주에 몇 번 정해진 날이나 요일에만 영업하는 것도 있다. '장이 서다'라는 단어의 유래가 된 형태이다. 이 형태의 시장은 최근에는 '마르쉐' 등의 모습으로 살아나고 있다.
교토의 시장 중에서도 유명한 것이 니시키錦 시장이다. 니시키코우지錦小路라는 도로의 양쪽에 130채의 상점이 늘어선 시장으로, 지금은 관광지의 하나가 되어 있다. 니시키코우지는 시내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도로로, 똑같이 동서로 뻗은 시죠 도로의 북쪽으로 하나 위에 있는 도로이다. 니시키코우지는 동쪽으로 가면 남북으로 뻗은 신쿄우고쿠新京極 도로에서 가다 막힌다. 또 서쪽 종점은 미부강壬生川 도로이다. 니시키 시장이라 부르고 있는 상점가는 이 코우지小路의 데라마치寺町 도로부터 다카쿠라高倉 도로까지의 아케이드가 설치된 400미터 정도의 구간에 전개되어 있다.
니시키 시장은 교토인의 부엌이다. 400미터 범위에는 물고기, 채소, 절임, 주류, 닭고기, 달걀, 건어물, 밀기울, 유바와 두부 등 갖가지 식품을 취급하는 전문점이 빼곡히 늘어서 있다. 연말 12월 29일 무렵이 되면 도로는 장보는 손님으로 북적거린다. 절임가게의 앞 등은 특히 혼잡이 심해 자리뺏기 싸움 같은 상황이 펼쳐지게 된다. 교토인은 니시키에서 장보기를 끝내지 않으면 해를 넘길 수 없었다. 나도 또한, 아직 시즈오카에 살고 있던 20년 이상 전부터 여기의 단골로서, 특히 연말에는 일부러 정월 용품을 사러 다녀왔다. 지금도 한 달에 2번은 시장을 찾아, 일상의 식료품을 구하고 있다.
그런데, 상황은 최근 몇 년 사이에 크게 변했다. 우선, 상품에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일부 점포가 폐점하게 되고, 그곳에 지금까지는 없던 약국이나 기념품 가게 등의 점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와 맞물려 외국인 관광객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 맞추듯이 식도락객이나 그를 위한 상품을 파는 가게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많은 단골 손님에게서 불평이 나왔다. 나도 잠시 니시키 시장에 가지 않게 되었다. 관광객이 손에 든 먹을거리에 옷이 더렵혀지는 일도 있었고, 게다가 그들은 가게만이 아니라 그곳에서 물건을 사는 손님에게도 거리낌 없이 카메라를 들어댔다. 장보는 손님이 제3자인 관광객의 염치 없는 카메라에 찍히는 걸 이해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야말로 관광 공해인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아 더욱 문제인 건, 교토인들이 전통 음식을 만들지 않게 된 것이다. 지금 그대로 장사를 오래 계속해 나아가는 것은 조만간 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니시키 시장 사람들 사이에는 있다. 시장은 손님의 수요에 힘입어 성립한다. 수요가 바뀌면, 공급하는 것도 바뀌어 가는 건 어떤 의미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사회의 기호가 급격히 변해 왔다고는 해도, 요구하는 식재료도 파는 방식도 벼해야 한다는 것도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시장의 서쪽 끝 근처에 가게를 차린 건어물 가게 '야마이치山市'의 주인은 수요의 변화를 민감히 감지해 상품을 바꾸는 방식을 택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예전부터 오던 손님이 기뻐해 준다면 그걸로 좋다. 일부러 그 사람들을 실망시키면서까지 새로운 구색을 갖추려 하지 않는다"고 한다.
"지난주의 갯장어 구이 맛있었어요"라고 해도 "아, 그거, 맛있었나. 그런데 오늘은 없어. 미안"이라 말해 버리는 일도 있다. 니시키 시장에는 이러한 경영 방침의 가게가 아직 있는 듯하다. "다음에 또." 그래, 다음에 만나기까지 그걸 즐겁게 기다린다는 것도, 풍족한 먹을거리의 중요한 한 요소이다. 야마이치의 '정어리 말림(目刺)'에는 맛이 있다. 살짝 볶아서 뜨끈한 밥과 함께 먹어도 좋고, 따끈한 술에 곁들여도 좋다. 씹을 때 느껴지는 강한 감칠맛과 적당한 염분이, 고소함과 어우러져 무엇과도 대신할 수 없다. 이들을 어떻게든 장래에 계속하여 남기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계속 먹는 일이 무엇보다도 긴요하다.
시내에 남아 있는 상점가
교토에는 현역 상점가가 몇 군데 더 있다. 그중에서 작지만 활기찬 것이 사쿄구의 데마치에 있는 마스가타枡形 상점가이다. 여기는 니시키 시장보다 규모는 작지만, 현지 사람들의 위장을 지원하는 상점가이다. 상점가는 카모강의 두 지류인 카모강과 고우노강高野川이 합류하는 지점의 바로 서쪽 가와라마치 도로에 접해서 있다. 대략 동서로 뻗은 160미터 정도의 좁은 소로의 양쪽에 작은 슈퍼 외에 생선가게, 채소가게, 떡가게, 정육점 등의 가게가 줄지어 있다. 시계방, 서점, 헌책방 등도 있다.
예전에는 상점가가 곳곳에 있어 일상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나 구했다. 마스가타 상점가에도 아케이드가 있어서 전천후 대응이 되어 있다. 시장의 바로 옆 가와라마치 도로에는 콩찹쌀떡으로 유명한 일본과자점 '후타바ふたば'도 있다. 날에 따라서는 그 콩찹쌀떡을 사려는 손님의 긴 행렬이 생기기도 하여, 상점가의 집객에 한몫 하고 있다.
후시미구에 있는 '후시미 오오테스지大手筋 상점가'도 니시키 시장에 뒤떨어지지 않는 규모를 가진 상점가로, 케이한 전철 후시미모모야마역에서 서쪽의 오오테스지 도로를 따라 500미터 정도의 길이이다. 120개 정도의 점포를 지닌 상점가로, 역시 아케이드가 있다. 도로 폭은 니시키 시장보다도 넓고 개방감이 있는데, 식료품 이외의 가게나 외식점, 술집 등도 많고, 도시의 부엌이라기보다 소비기지의 성격을 띤 상점가이다.
산죠 도로 상점가는 그 이름 그대로 산죠 도로의, 호리카와 도로에서 센본 도로 사이에 전개하는 750미터 정도의 큰 상점가이다. 여기도 아케이드가 정비되어 각종 점포의 건물이 즐비하다. 다만, 니시키 시장이나 마스가타 상점가와 달리, 시간대에 따라서는 차가 지나다니는 일도 있다. 또한 자전거가 상당한 속도로 달려 자칫 위험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가게의 종류가 다양하고, 일상의 장보기라면 시장 안의 가게에서 거의 완결한다는 시장으로서의 일체감이 있다.
시내에는 이외에도 상점가의 이름을 남기고 있는 곳이 몇 곳 있어서 개인 상점이 즐비하다. 이러한 곳은 사람의 왕래도 활발하고 쇼와 시대의 자취도 짙어서, 고령자를 비롯해 현지 주민의 생활을 지탱하고 있다. 도쿄로 말하면 수가모巣鴨의 지조우地蔵 도로 상점가나 시나가와品川의 토고시긴자戸越銀座 상점가, 오사카라면 구로몬黒門 이치바市場, 나아가서는 2022년에 화재가 휩쓴 기타큐슈北九州의 단가 시장 같은 분위기락고도 할 수 있을까.
빵과 커피의 도시, 교토
교토인은 빵을 좋아할까?
자주, 교토는 빵을 활발히 먹는 토지라고 이야기된다. 인터넷의 기사 등을 보아도 '빵의 소비 일본 1위' 등이라 적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어떠한가?
교토에 빵이 들어온 것은 메이지 시대 후반기. 그러나 당초 그 평판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1892년에 오우미야近江屋 에이자부로우榮三郎가 데마치 산죠사가루에 '세이요우켄精養軒 제빵소'를 개업했을 때에는 빵은 '큰 카스테라' '큰 밀기울'이라 야유받아, 하루에 식빵 겨우 15개 파는 것이 고작이었다고 한다. 이 무렵, 도쿄의 가게에서는 1일 3000개를 팔고 있었다고 하기에, 보급도의 차이는 역력했다. 하지만 1895년 교토에서 개업한 '제4회 내국 권업박람회'에서 표창을 받은 것을 계기로 풍향이 바뀌어 간다. 발단의 하나는 러일 전쟁이었다. 전쟁 이후 7만이라고도 하는 포로가 일본에 잡혀왔는데, 그 대부분이 현 사카이시堺市의 수용소에 있었다고 한다. 그 포로들이 검은빵 등의 제빵 기술을 전한 것이 간사이에 퍼진 빵 문화의 단초였다. 그리고 그 영향은 이윽고 교토에도 미쳐, 몇몇 제빵업자가 시내에 차차 등장한다. 그중에서는 지금도 시내에 체인점을 전개하는 '신신도우進々堂'(1913년 창업)도 포함된다(<빵의 메이지 100년사(パンの明治百年史)>).
그렇지만 항간에 유포되는 "교토는 일본 최고의 빵을 좋아하는 도시"라는 언설은 아무래도 진실이 아니다. 교토 시민이 일본에서 가장 자주 빵을 먹고 있던 것은 2012년 무렵(2011-2013년 평균)부터 2016년 무렵까지로, 2017년 무렵 이후는 3위-6위로 만족하고 있다(아래 그림). 즉 최근 몇 년, 교토는 "일본 최고의 빵을 좋아하는 도시"가 아니게 되었다. "일본 최고의 빵을 먹는 도시"란 언설은 2016년 무렵까지의 이야기라는 셈이 된다. 참고로 빵 소비량의 상위를 차지하는 도시를 보면, 교토시 이외에는 고베시, 오쓰시, 사카이시, 오사카시 등의 이름이 거론된다. 최근 몇 년은 오카야마시의 소비 확대도 눈부시다. 즉, 빵 소비가 성행한 것은 교토시에 한하지 않고 경기권 일원부터 서일본 일대라는 것이다. 빵 사랑은 교토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소비량을 보아도 정점은 2013년 무렵의 62.6킬로그램이었는데, 최근(2020년 무렵)에는 54.3킬로그램으로까지 줄고 있다.
총무성의 자료에서는 식빵과 기타 빵의 수치도 공표되어 있다. 이 가운데 식빵의 소비량은 특히 2015년 무렵 이후는 순위도 10위를 밑도는 해도 있었다. 교토인은 그렇게 많은 식빵을 먹어 온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확실히, 2013년 무렵에 시작된 '식빵 붐'은 교토에도 미치고 있다. 특히, 전국에 전개하는 식빵을 전문으로 제조하는 업자의 지점이 차례로 출점하여, 마치 식빵 전쟁의 양상을 띠고 있는데 그렇더라도 교토는 식빵의 소비량에서 1위가 된 적은 없다.
거기에는, 아마, 교토의 샌드위치 문화가 영향을 주고 있다. 앞에 거론한 반찬빵에는 샌드위치가 포함되어, 그 위미에서 교토는 샌드위치의 문화가 옛날부터 뿌리내린 도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샌드위치용 빵은 조금도 자기주장하지 않는 식빵을 얇게 잘라 만든 것을 사용해 왔다. 최근 식빵 붐의 불쏘시개 역할을 한 식빵 전문점의 빵은 달고 촉촉한 식감을 가지며, 껍질까지 부드러운 것이 많다. 이러한 식빵은 자기주장이 너무 강하여 샌드위치에는 맞지 않다고 이노다イノダ 커피의 쿠니모토 노부오国本信夫 업무지원부차장은 이야기한다. 교토의 빵을 사랑하는 애호가들은 식빵에 요구하는 것이 다른 지역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교토 빵의 특징은 '반찬빵', 즉 샌드위치나 햄, 소세지나 계란을 넣은 것, 치즈 등을 반죽에 넣고 구운 빵 등이 많은 것일 듯하다. 카스타드 그림 등 단 것을 쓴 것도 많다. 반찬빵의 대부분에는 교토가 장인의 도시인 점이 관계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점심을 먹는 시간도 만족스럽지 못한 장인들이 일을 하면서 한손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이란 의미가 있는 듯하다.
갖가지 과일을 푸짐한 생크림과 함께 넣은 과일샌드도 유행이다. 교토에서 최초로 이것을 시작한 것은 시가지의 남서부에 있는 시죠오오미야역四条大宮駅 근처의 '야오이소ヤオイソ'. 1973년 무렵이었다. 원래는 과일의 노포 판매점이다. 시죠오오미야는 동서로 뻗은 시죠 도로와 남쪽에서 올라 온 오오미야 도로의 교차점이다. 또한, 관광지 야라시야마嵐山로 통하는 케이후쿠京福 전철 아라시야마 본선의 터미널역, 시죠오오미야역도 놓여 있다. 시죠 도로의 지하에는 오사카(우메다梅田)로 연결되는 한큐阪急 교토선의 오오미야역이 있고, 호쿠세츠北摂나 오사카와 연결되어 있다. 부근은 고찰 미부데라壬生寺나 신센조新選組의 둔소屯所 유적이 있다. 또한 1킬로미터 정도 남쪽에는 유곽 '시마바라島原'도 있었다. 도쿄로 말하면 아사쿠사와 비슷한 풍속이라고 할까.
교토인이 빵을 좋아한 이유로 또 하나 들 수 있는 것이, 교토인이 '신문물을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있다. 교토라고 하면 역사와 전통의 도시라는 인상이 강하지만, 일본에서 가장 빨리 소학교를 만든 것도, 가장 빨리 수력발전을 시작한 것도, 그리고 전차를 놓은 것도 교토였다. 그러니까 빵에도 달려들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러나 아무리 맛있는 것이라도, 새로운 것이라도 싫증이 나기 마련이다. 잠시는 붐이 일어도 오래가지는 않는다. 오래가기 위해서는 '너무 맛있지 않고'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1947년 창업한 '야마이치빵山一パン 총본점'의 야마모토 다카히데山本隆英 사장은 말하고 있다. 교토인은 신문물을 좋아하는 동시에, 반면으로 보수적이기도 하다.
커피와 차 마시는 문화
교토인은 커피를 좋아한다. 교토시는 커피의 소비량으로 일본 최고의 도시이다. 이 숫자는 가계 조사이기에 가정의 소비량을 반영하고 있다. 즉, 밖에서 마시는 커피가 아니라 집에서 마시는 커피의 양이다. 하지만, 커피는 밖, 즉 찻집 등에서 많이 마신다. 가정의 소비와 밖에서의 소비는 연동되어 있을 것이다. 시내에는 많은 찻집을 볼 수 있다. 그중에는 창업 100년 가까운 노포도 있어서 교토의 커피 문화, 차 마시는 문화를 지원해 왔다. 히가시야마東山 도로(히가시오오지東大路 도로)와 이마데가와 도로의 교차점 '햐쿠만벤'을 이마데가와 도로를 따라 200미터 정도 동쪽으로 간 곳에 있는 '신신도우進々堂'. 정식으로는 '신신도우 교대 북문 앞 지점'이라고 한다. 창업 90년이라 하니 교대의 역사를 계속 보아 왔던 셈이다. 소파는 목공예로 인간 국보인 쿠로다 다츠아키黒田辰秋(1904-1982)의 작품이라 한다. 나도 이 가게에서 졸업논문을 다 쓰고, 시험날 아침 여기에서 밤을 새고 아침식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는 커피 1잔으로 오랜 시간을 버텨도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합석. 그 경영 방침은 지금도 변하지 않은 듯하다.
빵집 체인인 '신신도우'에서도 일부 가게에서는 가게 안에서 식사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두 가지 신신도우의 창업자는 똑같지만, 현재는 다른 법인조직이 되어 있는 듯하다.
교토의 도시에 차 마시는 문화가 정착한 이유는 몇 가지 있을 것 같다. 하나는 교토의 도시가 옛날부터 서구 사람들을 받아들여, 그들의 식문화를 접할 기회가 있었다는 점. 그리고 두 번째로, 2차대전에 의한 공습 피해를 크게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쟁 중 정책에 의해 휴업을 피할 수 없던 찻집이지만, 교토에서는 전쟁 이후 곧바로 살아났다. 전쟁 이전의 차 마시는 문화가 전쟁 이후에도 계승되었다. 이것의 의미는 크다.
교토에는 몇 곳인지, 교토시를 중심으로 전개하는 찻집 네트워크가 있다. 끈질긴 조사를 결실시킨 역작 <교토 찻집 연대기(京都喫茶店クロニクル)>()담교사, 2021년)의 저자 다나카 케이이치田中慶一 씨에 의하면, 전쟁 이후 교토의 커피 문화의 원점은 '이노다 커피'로, 창업자 이노다 시치로우猪田七郎 씨가 전쟁 이후 바로인 1947년에 재개점하고, 자가 로스팅 했다고 한다. '이노다 커피'는 그 뒤 체인점을 비롯해 몇 곳의 차집 창업자를 길러낸 점에서도 특필된다. 마에다前田 커피, 다카기高木 커피의 창업자들은 모두 이노다에서 기술과 접객 등을 몸에 익힌 것 같다. 로스팅한 원두를 판매하는 사업부터 시작한 가게도 있다. 그 앞길을 연 것이 다마야玉屋 커피, 오가와小川 커피(1957), 마에다 커피(1971) 등이다.
다마야 커피의 2대째 사장 다마모투 히사오玉本久雄 씨나 총괄부장 오시카와 히로유키吉川博之 씨 등에 의하면, 교토의 도시에서 찻집 문화가 발달한 배경에는 무로마치 도로에 전개하고 있던 상가商家의 나리님네들이나, 당시 교토에서 융성하던 영화 관계자의 존재가 있었다고 한다. 우쿄구의 우즈마사太秦에는 도우에이東映나 쇼우치쿠松竹의 촬영소가 있어 지난날에는 많은 관계자가 교토에 살고, 또 체재하고 있었다. 그들이 도시의 찻집과 차 마시는 문화를 지탱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다음 항에서도 적을 학생의 존재가 찻집을 지탱하는 큰 힘이 되었다. 특히 1960년대 이후는 과외 활동이나 학생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당시는 아직 핸드폰이나 스마트폰이란 전달 수단이 없던 시대로, 활동의 거점, 연락 장소로서 찻집이 선택되었다.
음악 찻집도 또한 크게 유행해 '레코드'를 들으면서 한 잔의 커피로 몇 시간이나 눌러앉아 있는 스타일은 스마트폰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 것이 당연해진 현대에 보면 격세지감이다.
찻집은 또한 담배와도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고 해도 좋다. 지금이야 담배의 건강 피해가 문제시되어 흡연 인구가 감소해 담배를 피우는 장소는 줄었지만, 버블 붕괴 전까지 찻집은 당당히 담배를 피우는 장소의 하나이기도 했다. 어느 찻집에나 디자인에 취향을 둔 무료 성냥갑이 있고, 그 표면이나 측면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어 가게의 선전도 되었다. 찻집 문화의 한 얼굴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최근은 찻집이라 하면 번화가나 사무실 거리에서 셀프 서비스형 체인점만 눈에 띈다. 가게의 이름은 대부분이 외래어. 찻잔은 플라스틱이나 종이로 만든 것. 느긋하게 앉아서 회화를 즐기는 운치는 거의 없다. 물론 대부분이 금연. 찻집은 사업의 장, 협의의 장으로 모습을 바꾸어 가고 있다. 교토에서도 그러한 가게가 확실히 늘어난 것처럼 느껴진다. 사회의 흐름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말해 버리면 그뿐이지만, 식문화라는 관점에서는 -흡연은 차치하고- 어딘가 허전함이 느껴진다.
학생의 도시, 교토
앞에서도 적었듯이, 교토는 학생의 도시이다. 시내에 있는 대학의 역사를 보면, 도우시샤同志社 대학의 전신인 도우시샤가 창립된 것이 1875년, 교토 대학의 전신 제3고등중학교가 오사카에서 교토로 이전한 것이 1889년, 리츠메이칸立命館 대학의 전신 '사립 교토 법정학교法政学校'가 창립된 것이 1900년 등이다. 그외에, 류우코쿠龍谷 대학이 그 기원이 되는 학교 기숙사를 니시혼간지西本願寺 경내에 설치한 것이 1639년인 등, 그 전신까지 포함하면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대학이 시내에 많이 있다. 대학의 총 수는 38개에 이른다.
교토 시내에 사는 학생 수는 14만여 명. 교토시의 인구가 140만 정도이니까 시 인구의 10%가 학생이란 계산이다. 즉 교토는 학생의 도시인 것이다. 먹는 것도 그들이라면,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하는 것도 또한 그들인 것이다. 내가 지금 재직하고 있는 교토 부립대학의 학생들에게도 시내의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그, 그녀들이 많이 있다. 거리를 걷다가 그들에게 목격되는 일도 종종 있다. 나츠메 소우세키夏目漱石의 <도련님(坊っちゃん)>인 기분이다.
"아무도 모르겠지 생각해 다음날 학교에 가서 1교시 교실에 들어가니 경단 2접시에 7전이라 적혀 있다. 실제 나는 2접시 먹고 7전을 냈다."
도련님 당시의 마츠야마松山 같은 작은 도시라면 몰라도, 100만 도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빈도로 학생들에게 목격되니까, 학생의 많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학생들 중에는 기온 근처의 작은 요정에서 하녀로 종사하는 여자 학생도 있다. 하녀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그 길의 전문가' 같은 인상을 주지만, 그녀들에게는 그런 인상이 전혀 없다. 오히려 젊은 나이에 접객에 익숙해지는 것은 장래의 커리어로 이어진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그녀들이 많다. 교토 먹을거리의 경향을 결정하는 것은 어느 의미에서 학생들인 것이다.
교토란 도시의 먹을거리가 학생에 의존하고 있다고 하는 이유는 또 하나 있다. <술집의 교토학(酒場の京都学)>(가토우 마사히로加藤政洋, 미네르바 서방, 2020)에 의하면, 도쿄의 하숙이 식사 포함이 많았던 것에 대해, 교토에서는 사원이나 가정의 빈방을 쓰는 일이 많아 학생들은 밖에서 식사하는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학생 대상의 밀크홀 같은 음식점이 생겼다고 한다. 식사 포함 하숙에서는 학생은 집주인의 가족 일원과 같다. 한편 교토에서는 외식 스타일이 된다. 밀크홀이란 생소한 말인데, 다나카 케이이치 씨는 그 한 예를 도우시샤 대학 정문 앞에 있던 '와비스케わびすけ'에서 구하고 있다. 아깝게도 2011년에 폐점해 버렸는데, 감자와 양파를 볶아서 계란을 풀어 엉기게 한 '감자양파'라고 부르는 명품으로 유명한 가게였다. 교토에는 이러한 학생을 상대로 하는 음식점이 전통적으로 많이 있었다.
교토의 라멘
교토의 도시에는 '뾰족한' 라멘집이 많은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교외에 가까운 사쿄구의 시라가와 도로나, 큰 대학 근처에는 라멘집의 밀도가 높은 장소가 있다. 그런데 교토부의 라멘집의 숫자는 의외로 적어, 총무성의 자료에는 2018년 현재 472채였다. 인구 10만 명당 점포 수는 18.2채, 전국 38위라는 낮은 순위이다. 다만 교토 시내에 한하여 보면, 373점이라고 한다(신요코하마 라멘 박물관의 웹사이트에 의함. 다만 언제적 숫자인지는 모름). 인구에 비례하면 26.8채. 이 숫자는 요코하마시의 17.9채, 후쿠오카시의 18.8채 등보다도 크다. 또한, 전 프로야구 선수인 카와토우 코우조우加藤幸三 씨가 개업한 가게 등의 화제성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카와토우야川藤屋는 이미 폐점).
'신요코하마 라멘 박물관'의 웹사이트에 의하면, 교토의 라멘은 진하고 농후한 맛이 특징이라 한다. 나도 학생 시대, 심야가 되면 연구실의 선생이나 학생들과 함께 야식을 먹으러 나가곤 했다. 이마데가와 도로나 시라카와 도로에 있는 라멘집이나, 라멘과 우동의 포장마차에 가는 일이 많았다. 우동은 연한 육수에 찰기가 약한 교토 우동이었는데, 라멘은 허옇게 진한 국물이 인기였다. 또한 우동의 포장마차에는 '우동 정식'이라는, 우동에 흰쌀밥과 육수계란말이 같은 간단한 일품이 곁들여진 메뉴도 있었다. 1국 1채의 국을 우동으로 대신하는 듯한 일품이다. 라멘에도 '라멘 밥'이란 메뉴가 있었다. 지금이라면 당질 과다라고 이야기되겠지만, 운동량이 격한 학생 등에게는 인기 메뉴였다.
최근에는 라멘을 대신하여 카레집이 늘어나고 있다. 카레집의 경우 라멘과는 조금 사정이 달라서, 체인점이 개업을 하는 사례가 많은 것처럼 보인다. 라멘은 음식에 관한 서적 등으로 정평이 난 모리에다 타카시森枝卓士 씨에 의하면, 바텀업 형의 식문화라고 한다. 즉, 서민의 자유로운 발상으로 탄생한 갖가지 종류의 라멘이 있어 그 정리도 분류도 어렵다. 한편 카레라이스는 해군이 주도하여 도입한 이른바 톱다운 형의 식문화라고 한다. 똑같은 경향이 교토 시내의 라멘집, 카레라이스집에도 나타나고 있을 것이다.
교토의 중화
교토에서 중화라고 하면 위화감을 가지는 사람도 많다. 중화라고 하는 진한, 또는 향신료의 효과가 있는 인상과 교토의 음식이란 인상이 어울리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교토인은 중화요리를 외식으로 자주 먹고 있다. 총무성의 자료에 의하면 연간 지출액은 5025엔으로 전국 14위이다. 즉 교토인은 비교적 자주 중화요리집에 가고 있는 것이다.
교토의 중화는 조사할 만큼 재미있다. 교토의 중화를 이야기하려고 생각하면 우선은 강상미姜尚美 씨의 <교토의 중화>(幻冬舎, 2012)를 알아보는 게 좋다. 강씨는 교토의 음식을 발로 조사한 현장 연구자로, 그 주의깊은 조사는 놀랄 만한 가치가 있다.
강씨에 의하면, 교토의 중화는 '담백하고, 육수를 잘 이용한 교토풍'의 요리이다. 마늘과 중화요리에서 다용되는 향신료인 팔각이나 계피 등은 별로 쓰지 않는다. 그러면서 육수의 맛은 농후하다. 그리고 일정식의 육수가 '다시마와 가다랑어를 조화시킨 육수'인 데 대하여 중화의 육수는 '다시마와 닭'이라고 한다. 즉 교토풍 중화라는 게 완성되어 있단 것이다.
교토 중화의 성립에는 하마무라 야스조우濱村保三라는 한 사람의 일본인 요리사가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그가 '중국요리 하마무라'를 개업한 것은 1923년. 가게는 기온의 이른바 '북쪽'. 시죠 도로의 북쪽을 말하는데, 기온마치祇園町임이 틀림없다. 그곳에서 중화요리집을 하려면 철저한 '일식화'가 필요했다고 한다.
하마무라 야스조우가 발견한 중국인 요리사가 고화길高華吉 씨라고 한다. 그리고 그 고씨가 그 뒤 교토 중화의 길을 개척해 나아간다. 많은 가게의 '계보'를 그려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앞의 커피나 빵과 궤적을 같이 한다. 라멘이 끝까지 바텀업으로 다발적인 것과는 이 점에서 다르다.
닭을 육수에 사용하는 것은 교토의 닭 문화란 존재를 보여주는 것 같다. 앞에서 적었듯이 교토 시내에는 '토리야사鳥彌三' 같은 닭 요리집이 많이 있다. 시중에는 닭고기 전문점이 여러 곳 있어서 다양한 부위의 닭고기를 팔고 있다. 저 니시키 시장에도 닭고기 가게가 있다. 교토의 도시에서 닭고기의 소비가 많은 이유의 하나는 닭이 두 다리이고(즉 네 다리가 아님) 육식 기피의 대상에서 벗어난 데 있는 듯하고 생각한다. 토끼를 한 마리(一羽), 두 마리(二羽)라고 계산하는 것은 멧돼지의 고기를 '산고래(山鯨)'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은어, 즉 네 다리를 먹는 것에 대한 기피감을 나타낸 듯하다. 거기에는 닭이라면 당당하게 먹을 수 있다는 풍조가 있었단 것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중화라고 하면 아무래도 돼지고기의 이미지가 있는데, 교토는 돼지고기와 관계가 먼 도시이다. 총무성의 통계(2018-2020년 평균)에 의하면, 2인 이상의 세대인 교토 시민의 연간 돼지고기 소비량은 약 19킬로그램. 전국 52의 현청 소재지, 정령지정도시 가운데 47위였다. 교토인은 가정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다. 원래 돼지고기의 소비량에는 '동고서저'의 경향이 뚜렷한데, 그것을 증명한 수치이기도 하다.
그럼, 강씨의 책에도 나오지 않았던 교토의 중화요리집을 두 곳 소개하겠다. 첫번째는 가와라마치마루타마치, 고쇼의 남동쪽 구석 근처에 있는 '마담 코우란マダム紅蘭'. 품위 있고 담백하면서도 강한 감칠맛이 느껴진다. 마늘과 다른 향신료는 별로 쓰지 않는 듯하다. 덧붙여, 교토인은 고추를 꽤 좋아한다. 마늘 등을 쓰지 않는 이유는 하나는 화류계에서 경원시되었기 때문이란 점 외에, 사람과 접촉할 기회가 많은 상인에 대한 배려라는 점도 있었다고 한다. 역시 이유는 그 강한 냄새에 있는 듯하다. 또 교토의 마늘에 대해서 언급해 두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교토의 북부에 있는 카미가모上賀茂 신사(카모와케 이카즈라賀茂別雷 신사)의 신찬 중에 마늘이 포함된다. 신찬에는 갖가지 식재료가 포함되는데, 향이 강한 파, 부추, 마늘 등은 기피되어 왔다. 카미가모 신사에서 언제부터 마늘이 바쳐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상한 일이긴 하다.
마담 코우란의 간판 메뉴의 하나가 '동파 버거'. 그중에서도 '벚나무 동파 버거'는 계절 한정 메뉴라고 한다. '동파 버거'를 벚나무 잎으로 감싼 만두이다. 동파란 단짠하게 조린 돼지고기 조림. 동파 버거는 이것을 만두에 넣어, 말하자면 중화풍 버거이다. 만두는 벚꽃 향이 났다. 색은 아주 연한 분홍색. 벚나무 꽃의 소금절임이 다져 넣었을지도 모른다. 만두는 일본의 만쥬와 같이 밀가루 찐빵이지만, 일본의 그것과는 달리 안에 아무것도 넣지 않은 것이 많다. 물론 '돼지만두' 같은 고기가 들어간 것이나, 다진 갓의 기름볶음을 넣은 것 등의 변종이 있어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화북부터 황하 상류 지역에서는 아침밥의 기본이 되고 있다.
동파란 이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많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돼지의 삼겹살을 단짠하게 조린 중국요리. 돼지고기 요리는 중국에서는 장강 이남의 것. 북송의 시인 소식(호 동파)이 고안했단 설도 있다. 또한, 중국어 발음은 '동포-'. 식감은 오키나와의 라후테와도 비슷하다. 그래, 오키나와(류큐) 요리는 돼지고기를 먹는 문화이다.
교토 중화의 또 한 곳은 이들 교토풍과는 반대를 이루는 가게이다. 앞에서 소개한 '다이호우大鵬'가 그곳으로, 여기는 탁 하고 오는 매운맛이나 찐한 맛을 내는 것으로 교토에서는 두드러진 중화요리집의 하나이다. 그렇더라도 은어 식해를 사용한 요리 등 감칠맛을 추구하는 자세는 다른 교토풍 중화요리집에는 없는 자세를 느끼게 된다.
교토의 비교식문화론
동경과 선망
도쿄와 교토. 도시의 규모는 전혀 다르지만, 두 도시는 종종 비교의 대상이 된다. 한편 그것이 오사카인에게는 참을 수 없는 점이다. 도쿄와 대비되는 것이 왜 오사카가 아니라 교토이냐고. 그것은 어쨌든, 도쿄의 비교 대상은 어느 의미에서 확실히 교토이다.
벌써 25년 전, 도우카이도東海道 신칸센의 차 안에 붙은 한 장의 포스터가 화제를 일으켰다.
"그래 교토, 가자."
포스터는 아마 도쿄 사람을 대상으로 만든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도쿄는 일본을 대표하는 도시로, 그곳에는 국권의 장이 있고, 일본 국민의 상징인 왕이 있다. 인구로 보나 다른 여러 경제지표로 보나, 도쿄는 다른 도시의 추종을 불허하는 일본에서 으뜸가는 대도시, 아니 세계에서 으뜸가는 대도시이다. 그 도쿄에 사는 사람이 교토에는 눈독을 들이고 있다. 특히 음식에 관해서는 그러한 것 같다. 전 교토부 지사인 야마다 케이지 씨도 이러했다.
"교토에는 일정식의 미슐랭 별 3개의 가게가 7곳이나 있다. 도쿄는 모든 장르를 포함한다면 세계 제1의 마을이지만, 일정식에서는 교토를 당할 수는 없다. 이 좁은 마을에 미슐랭의 별 3개가 7곳이나 있다니, 이건 이미 기적이죠.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덧붙여서, 야마다 씨는 도쿄인이다.
어느 날 나는 도쿄도청의 관료에게 다음의 한 마디를 듣고서 신선한 놀라움을 느꼈다. 그는 이러한 것이었다.
"일정식이라 하면, 그건 역시 도쿄이니까."
미리 알려두지만, 그는 내가 교토의 대학에 소속되어 교토에서 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교토에는 저명한 요정이 있단 것도, 교토인들이 정월에는 백된장으로 만든 떡국을 먹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일정식이라고 하면 도쿄'라고 말하지만, 가을에는 교토에 가서 단풍을 즐긴 뒤에 히가시야마나 아라시야마에서 '유두부'를 먹고나서 돌아가는 걸 매우 즐기고 있다고 한다. 유두부 정도 도쿄에서도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단풍을 즐기고 저녁식사는 유두부라고 그는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식이라면 도쿄"라고 그는 말하는 것이다.
그가 일본인으로서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문화청이 2018년에 공표한, 일정식 문화에 관한 의식조사의 결과에도 나타난다. 설문은 "당신이 가장 친숙하게 느끼는 일정식 메뉴는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5000명을 대상으로 한 그 조사 결과, 10대부터 60대까지 어느 세대나 '초밥, 튀김, 장어'가 상위에 있다. 그리고 이들 3종의 메뉴는 모두 에도가 기원인 메뉴이다. 그가 '일정식은 도쿄'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라 생각한다.
다른 친구는 이렇게도 증언한다. 도쿄의 사람 중에는 실은 교토를 거북하게 느끼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한다. 거북한 건 아니지만, 교토의 가게를 방문하는 것은 왠지 모르게 문턱이 높다고 느끼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오사카에는 그러한 감정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교토는 특별하다고 하는 것 같다. 요컨데, 도쿄인의 교토관은 단순한 동경이 아니라, 조금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선망'이라고도 해야 할 것이다. 오사카인의 교토에 대한 생각에도 통하는 바가 있는 듯하다.
다만, 가장 많은 것은, 실은 교토를 하나의 지방도시로만 보지 않는 사람들인 것은 아닐까? 예를 들면 리니어 신칸센의 나고야-오사카 사이의 경로이다. 현행 플랜에서는 리니어는 '나라시 부근'을 통과할 예정으로, 그렇게 되면 교토는 리니어로부터는 제외된다. 교토시장은 JR과의 교섭을 계속한다고 하지만, 교섭은 곤란할 것이라 생각된다고 이야기한다. 즉, 도쿄와 간사이권을 잇는 일대 국가 프로젝트 안에서는 교토의 발언력은 결코 강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편 교토인들도, 도쿄를 복잡한 시선으로 보고 있다. 아니, 이 경우도 도쿄라고 하기보다 칸토우인이라 하는 쪽이 좋을지도 모른다. 시영 지하철 안에서 칸토우 방면에서 온 것 같은 부인들이 여행 감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기분이 고양되어 있는 것 같아 꽤 목소리가 높아 대화의 내용을 충분히 들을 수 있다.
"저 OO라는 사찰, 사진으로 보기보다 훨씬 작지 않아? 그 정도면 우에노上野의 칸에이지寛永寺 쪽이 훨씬 크겠지?"
"O(가게의 이름)의 파스타 런치, 맛없지 않아? 교토라도 이탈리안 꽤 먹을 수 있잖아!"
"맞아 맞아, 나, 교토라고 하면 모두 백반인 줄 알았잖아."
차 안의 교토인들은 물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마치 무관심을 가장하고 있지만, 마음 속에서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다.
"이 사람들, 뭐라는 거야 칸에이 쪽이 넓어, 어? 기가 막히네. 이곳의 사찰은, 모두 메이지 유신 때 토지를 몽땅 빼앗겨 좁아져 버렸다. 게다가, 1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사찰도 있어. 내친 김에 말하면, 교토는 빵의 소비량 일본 제일이야. 잘 기억해 놔!"
교토인의 도쿄에 대한 복잡한 감정은 텔레비전의 일기예보를 볼 때도 나타난다. 아침 뉴스 방송의 일기예보에서는 '도쿄는 맑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이바台場'는 하든지, 또는 '아카사카赤坂' '롯폰기六本木' '시부야渋谷' 등은 하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기껏해야 '도쿄 시부야'는 하고 표현한다. 도쿄에서는 2센티미터의 눈이 쌓이면 전국 뉴스의 톱에 나오지만, 교토에서 15센티미터의 적설이 기ㅗㄱ되어도 기껏해야 간사이 지방국의 뉴스에서 다룰 정도인데. 뉴스는 전국 방송이다. 교토인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 사람에게도 다이바이건 롯폰기이건, 요컨데 그곳은 도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도쿄의 사람이 보면 '사쿄'이든지 '우쿄'이든지 똑같은 교토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쿄 방송국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죠몬縄文 문화와 교토
1990년대 중반 무렵, 일본 고고학 역사상 큰일이 일어났다. 아오모리현 산나이마루야마三内丸山 유적의 재발견이다. 현이 아오모리시의 남서쪽 구릉 지대에 야구장 건설을 시작했던 바, 지하에서 거대한 죠몬 유적이 발견되었다. 여기에 상당히 오랜 시대의 유적이 있을 것이란 점은 에도 시대부터 알고 있었다. 스가에 마스미菅江真澄의 기록(<스미카노야마すみかの山> 1796)에 이 유적의 일은 이미 나와 있다. '재발견'이라 적은 것은 그 때문이다.
스가에 마스미의 기록은 차치하더라도, 산나이마루야마 유적의 발굴에 의하여 일본 열도는 들끓었다. '죠몬 문명'이란 우메사오 타다오梅棹忠夫 씨(국립 민족한 박물관의 초대 관장)이나 우메하라 다케시梅原猛 씨(국제 일본문화연구센터의 초대 소장)의 이야기도 등장했다. 이전까지 죠몬 문화는 야요이 문화에 비해 뒤떨어진 문화라고 여겨져 왔다. 학교의 역사 수업에서도 죠몬 시대는 야요이 시대의 전에 있던 더 원시적인 시대인 것으로 가르쳐 왔다. 이유의 하나는 야요이 문화가 벼농사 문화라는 일본 사회의 근간을 지탱해 온 쌀 음식이나 벼농사를 지원한 문화라고 생각해 왔던 데에 있다.
덧붙여서, 일본 열도에서는 진보된 문화는 대륙이나 한반도에서 큐슈 등 서일본에 전해지고, 동일본에 전해지는 건 그 이후의 일이라고 계속 생각되어 왔다. 즉, 칸토우나 도호쿠는 문화가 가장 늦게 전해진 토지라는 것이 지배적인 사고방식이었다.
죠몬 문명의 발견은 이 사고방식을 근저부터 뒤흔들었다. 아무튼, 죠문 문명은 일본 열도 태생의 문명이다. 논벼농사를 비롯하는 농경의 문명은 일본 열도에게는 외래의 문명이다. 일본에서는 고등학교까지 역사 교육 안에서 '세계 4대 문명'을 가르치고 있다. 최근에는 여기에 중국 장강 유역의 '장강 문명'을 더하여 '5대 문명'이라 하든지, 또는 종래의 황하 문명과 장강 문명을 합하여 '중국 문명'이라 하는 등의 견해도 있는데, 어쨌든 일본 열도는 고대 문명의 발상지 밖에 있다. 덧붙여서 일본인의 문명 컴플렉스를 만든 요인은 <위지 왜인전>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인전倭人伝>은 <삼국지> 안의 <동이전東夷伝>에 있다. '동이'란 동쪽 변경이란 의미이다. 즉, 왜국은 '삼국'의 주변 지역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기술이 부지불식간에 일본인의 마음에 '문명 컴플렉스'를 심어 놓은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죠문 문명이란 말은 일본 열도에서 태어난 문명이 있었단 것을 선언하는 것이 되었다. 게다가 산나이마루야마는 도호쿠 안에서도 가장 깊숙한 땅, 무츠陸奥에 있다. 그때까지 문화에 뒤쳐진 땅이라든가 문화의 끝이라고 이야기된 도호쿠 사람들에게 꿈과 자신감을 가져다주었다. 죠몬 문화의 영향이 더 짙게 남은 동일본의 사람들이 감동을 받으며 이 말을 받아들인 것은 이러한 사정에 의한다.
한편 교토에서는 산나이마루야마 유적이나 죠몬 문명의 이야기는 그렇게 뜨거운 반응을 얻지 못했다. 교토에 죠몬 유적이 없을 리는 없다. 하지만, 시민의 관심은 대체로 낮다. 시청의 발굴 담당자도 이렇게 증언한다.
"교토 시내에서 죠몬 유적이 발견되었다고 해도 관심은 모으지 못하고, 현장 설명회를 해도 보러 오는 사람은 적다. 이것이 내리内裏 유적이라든지 오도이御土居(히데요시가 만든, 교토시가를 둘러싼 외벽)가 발견되었다고 발표하면 우르르 사람이 옵니다."
교토인을 포함해 간사이 사람에게 죠몬 문화라고 하면 이질적 문화였다. '뒤쳐져 있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이질적인 또는 익숙하지 않다 정도로 느끼고 있는 사람은 확실히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토야말로 문화의 중심이라고 하는 프라이드를 교토인들은 남몰래 가지고 있다. 그 교토를 제쳐두고 외부에 뛰어난 문화의 중심이 있다, 있었다고 하는 것에 교토인은 위화감을 느끼는 것이다. 어쨌든, 일본인을 포함해 세계의 누군라도 '교토 문화'라고는 해도 '교토 문명'이라고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토와 오사카의 비교문화학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에도 등 '동쪽 나라'나 큐슈, 시코쿠四国에서 본 교토에 대한 것이었는데, 똑같은 간사이 지방에 있어도 문화는 결코 똑같지 않다. 도쿄에서 보면 똑같은 '간사이'에 있는 교토와 오사카 사이에도 큰 차이가 존재한다.
일본 지도를 보면 교토와 오사카는 이웃사촌이다. 전차에 타면 30분도 걸리지 않는다. 실거리로도 40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밖에 안 된다. 도쿄-토츠카戸塚, 도쿄-오오미야大宮, 도쿄-하치오우지八王子 정도의 거리인 것이다. 그래서 도쿄를 비롯한 간사이 이외의 토지에 사는 사람들은 교토와 오사카의 구별을 할 수 없다.
하지만 두 토지 사이에는 다른 지역의 사람들은 알지 못할 만큼의 거리감이 있다. 상당히 예전의 일이지만, 텔레비전 아사히의 저녁 뉴스 방송 '뉴스 스테이션'에서 매주 금요일에는 '금요 체크'라는 오락 코너가 있었다. 그중에서 '당신의 OO도 체크'라는 것이 있는데, 15-25항의 질문이 나온다. 적합한 대답의 많음으로 그 사람의 'OO도'를 알 수 있다는 취향이다. 어느 날, 이 OO가 교토가 되어 '교토도 체크'가 시험되었다. 그리고 그 체크 항목의 하나로 '오사카 사람과는 똑같은 간사이 사람이라고 생각되고 싶지 않다'라는 것이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오사카 사람에도 교토 사람과 같이 취급되고 싶지 않다는 심정을 가진 사람이 많다.
그런데도 '간사이 사람'이라고 한 묶음으로 취급되는 일이 교토인과 오사카인의 프라이드를 상하게 한다. '간사이 사투리関西弁'라든지 '간사이에는'이라는 표현을 결코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말투를 '간사이 사투리' 등이라 이야기하면 강한 위화감을 느낀다. 음식에 대해서는, 오사카의 요리인인 우에노 슈우죠우 씨에 의하면 "교토의 본래의 맛을 살림, 나니와의 여러 가미를 한 맛(京の持ち味、浪速の喰い味)"이라고 한다(아사히 신문 디지탈, 2022년 3월 29일). 교토는 담백하여 소재의 맛을 중요시하지만, 오사카는 육수와 소재의 상호작용을 활용한다고 하는 것일까?
그렇지만 두 도시에는 공통점이 잔뜩 있다. 식문화를 보더라도 고등어초밥, 갯장어 요리, 조림이나 다시마 육수 등. 물론 세부적으로는 여러 차이도 있다. 예를 들면 고등어 초밥. 교토에서는 고등어 초밥이라 하지만, 오사카에서는 '밧테라ばってら' 쪽이 자주 쓰인다. 물론 고등어 초밥에도 밧테라에도 변종이 있어서 '교토에서는' 또는 '오사카에서는'이라고 정리해 버릴 정도로 단순하지는 않다. 또한, 이전에도 적었듯이 '갯장어 오토시落とし'에 찍는 것은 교토에서는 매실 과육이 많지만 오사카에서는 겨자초된장이 많다.
한편, 교토에는 없지만 오사카에서는 압도적으로 지지를 얻는 것도 있다. '가루 문화(コナモン)'이란 밀가루 식문화가 그 대표이다. 타코야키(문어구이), 오코노미야키(빈대떡)나 우동 등의 면류를 중심으로 하는 식문화로, 역시 그 중심은 뭐니뭐니 해도 오사카이다. 가루 문화에 대해서는 쿠마카이 마나熊谷真菜 회장이 이끄는 '일본 가루 문화 협회'라는 조직이 연구와 보급 등의 활동을 활발히 행하고 있다.
가루 문화의 한 가지 특징은 각각이 일품으로 성립되는 패스트푸드라는 점. 포장마차도 있고 매장 판매도 있으며, 판매 형태도 다양하다. 교토인이 눈살을 찌푸릴 것 같은 서서 먹기, 먹으면서 걷기도 OK 등 확실히 서민의 편이다.
걸으면서 먹기는 가루 문화의 심오한 경지이다. 무어라 해도 갓 만든 것이 최고의 성찬이다. 갓 만든 걸 '뜨끈뜨끈(あつあつ)'이라고 표현한다. '뜨끈뜨끈한 걸 사 왔다'는 그 '만들어진 것'을 사 와서 집에서 먹을 때의 수식어 같은 것으로,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식어 버린, 그에 대한 일종의 변명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특징이 그 대부분이 밀가루의 식문화라는 점이다. 가루 문화의 대표인 오코노미야키나 타코야키, 그에 면류인 우동이나 라멘의 주식재는 모두 밀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주역이 소스. 오코노미야키, 타코야키, 야키소바에는 각각 특화된 소스가 있는 데다 상품화도 되어 있다. 걸쭉한 것도 공통된 특징으로, 모두 단짠하고 약간의 신맛과 매콤한 풍미를 가진다.
가루 문화는 20세기 이후 폭발적으로 유행한 서민의 음식이다. 어떠한 형태로든 통제를 받고, 그 먹는 방법에까지 정치의 개입이 있던 쌀 음식의 문화에 대해 큰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한 오사카 식문화의 특질을 잘 나타낸다.
교토인과 '교토를 싫어하는 사람'
그럼 교토인은 철벽의 굳건함을 자랑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이노우에 쇼우이치井上章一 씨의 에세이에 <교토를 싫어하는 사람(京都ぎらい)>(아사히 신문, 2015)라는 한 책이 있다. 20만 부가 팔린 베스트 셀러이기에 아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저자가 우쿄구 사가嵯峨라는 '시골' 태생인 것을 시내에 사는 교수에게 밀고되어 들었다는 에피소드로 시작하는 이 책은 같은 교토인 사이의 이질성을 표현한 일종의 문화론이다.
확실히 교토인은 마음 속을 드러내지 않고, 특히 처음 대면한 사람에게는 차갑다,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등 부정적인 인상으로 묶여 왔다. 심술궂은, 이른바 '심술꾼'이라는 평가가 침투되어 있는 듯하다. 텔레비전 등에서도 교토인은 프라이드가 높고, 거만해서 사귀기 어려운 사람들이라는 평가가 정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평가가 전혀 맞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교토인이 "마음 속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라는 표현은 어떤 의미에선 맞는다고 느낀다. 다만 그 이유가 심술궂기 때문이라는 건 조금 다르지 않을까 느끼고 있다. 그건 카시와이 히사시柏井壽 씨의 말을 빌리면, "상대를 마음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한"(<교토력京都力 사람을 매료시키는 힘의 정체人を魅了する力の正体 > PHP 신서, 2021) 일종의 완곡한 말투인 걸까?
그 진위는 차치하고, 이노우에 씨의 주장은 그러한 '심술궂은 교토인'의 지역이 매우 좁다는 것이다. 교토란 도시는 좁다. 특히 낙중이라 부르는 중심부는 매우 좁다. 어쨌든 이전은 '시죠 남쪽은 낙중이 아니다' 등이라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이다. 그리고 낙중과 사가 등 주변부, 주변부끼리는 다소 문화적 이질성이 아주 최근까지 남아 있었다. 그 이질성의 하나가 사소한 언어의 차이였다.
그런데 교토인에게 '경사스런' 날의 음식의 즐거움이라고 하면, 시내의 고급 요정에서 식사하는 것이다. 그것도 특별한 날. 지인 중 한 명은 '자식의 예물 교환'을 시내의 어느 요정에서 행했다고 페이스북에 적었다. 젊은 지인도 또한, 시내의 일류 요정에서 결혼 피로연을 거행했다. 젊은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차치하더라도, 그 부모 세대까지는 그 일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프랑스 요리로는 감당이 안 된다. 그리고 멀 길을 달려온 친척이나, 이제부터 친척이 될 사람들이 '그 교토의 초일류 요정에서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데에 은근한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날만은 급작스레 요리평론가로 바뀌어서 교토의 음식에 대한 깊은 지식을 쏟는 것이다.
덧붙여 말하면, 여기에서의 교토인이란 대대로 낙중에서 살아온 교토인만이 아니다. 이노우에 씨 같은 사가 출신의 사람들도,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종종 교토인으로 행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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