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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농-문화

교토의 식문화 -4장 교토의 구심력과 교토 상표

by 石基 2024.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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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의 요리점

 

교토란 이름이 상표

선물 가게나 특산물 가게에 가면, 상품명의 머리에 '京'이란 한 글자를 붙인 상품이 참으로 많다. 교-부채, 교-구이, 교-야채, 교-절임 등등. 도시에 나오면 교-요리, 교-회식 또는 교-가이세키 등의 간판도 자주 볼 수 있다. 최근에는 교-서양과자의 간판을 단 가게도 나타났다. 교마치야京町屋, 교마京間 등이라는 것도 있다. 교마란 건물 치수의 규격 중 하나로, 교토를 비롯해 간사이의 그것은 도쿄 등의 그것보다 조금 길다. 즉, 똑같은 6첩 방이라도 교토의 그것은 도쿄의 그것보다 넓다. 

교마는 별도로 하고, 대부분은 京이란 한 글자를 덧붙임으로써 품질이 높다는 것, 오랜 역사를 지녔다는 것 등을 암묵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즉 '京'이란 한 글자는 그것만으로 상표가 되고 있다. 한자 한 글자라는 간결함, 어조의 좋음, 거기에 무엇보다 '1100년의 수도'라는 이야기. 그리고 그 실력. '1100년의 역사'에 관해서는 역사학자가 한 마디 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 이야기의 진위, 정당한지 아닌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 납득을 가지고 받아들여지는지 아닌지의 여부이고, 그만한 실력이 도시에 있는지 아닌지의 여부이다. 그리고 그 실력 때문에 교토를 싫어하는 사람들조차 교토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명을 붙임으로써 부가가치가 붙는 건 여러 가지이다. 앞에서 적었던 옥돔도 교토부나 와카사若狭의 항구에서 나면 높은 가격이 붙지만, 만약 이것이 근처 현의 항구에서 잡힌다면 가격은 내려가 버리는 시대가 있었다. 물론 잡힌 항구에서 처리하는 것의 좋고 나쁨이 품질을 결정할 수도 있지만, 전통적으로 큰 것은 역시 이름이다. 똑같은 분고豊後 해협의 고등어가 오이타시大分市의 사카노세키佐賀関에서 잡히면 '세키関 고등어'로서 비싼 값이 붙지만, 맞은편의 에히메愛媛 쪽에서 잡히면 싸진다는 이야기도 과거에는 있었다. 상표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교토란 이름이 상표가 된다고 하면, 그에 덕을 입으려고 하는 움직임도 나온다. 교 뭐시기가 눈덩이처럼 늘어난다. 우후죽순처럼 출현한 '교 뭐시기' 중에 그러한 덕을 입은 것이 없다고는 솔직히 말할 수 없다. 그리고 '교토 요리' '교토 가이세키'에도 그걸 이야기할 수 있다. 

교토란 도시에서 볼 수 있는 '교토 요리' '교토 가이세키'의 간판은 교토인을 위한 간판이 아니다. 그건 그렇다. 왜냐하면 교토인이 스스로의 요리에 일부러 '京'이란 한 글자를 붙인다고는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뎅'은 간사이에서는 '칸토다키関東炊き'라고 이전에 적었는데, 칸토우 사람이 그럴 일은 거의 없다. '사츠마薩摩 튀김'이라고 하면 가고시마鹿児島의 생선튀김을 말하는데, 그것은 가고시마 사람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들과 같은 것이다.  

교토 요리는 분명히, 다른 곳에서 오는 사람을 의식해서 붙인 이름이다. 단어를 바꾸면, 여기가 교토인의 맛이라는 것이 된다. 

 

 

 

요리점의 문화

요리를 제공하는 가게 -그것이 요리점이다. 요리집이라고도, 또는 장식 등에 따라서는 요정이라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일정식의 세계에서는 교토 요리점의 실력에는 확고한 것이 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교토 요리의 상표가 지닌 지위를 확고한 것으로 만드는 것도 이 교토 요리점이고, 그 배경에 있는 이토 쟈쿠츄伊藤若冲나 린파琳派의 예술이며, 부엌칼 기법이나 꼬치 꿰기 등의 기술 체계, 그리고 오랜 역사를 거쳐서 축적된 '사찰 요리' 등의 사상을 포함한 지식 체계라고 하는 것이 될까? 이 '知' '藝' '技'의 세 가지는 인류가 발명한 정신 행위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린바는 중세 말기에 교토의 오카타 코우린尾形光琳 등에 의하여 완성된 예술의 유파로, <세계 대백과 사전 제2판>에는 (1)기반으로서의 야마토 그림大和絵의 전통, (2)풍요로운 장식성, (3)회화를 중심으로 하여 서예나 여러 공예도 포괄하는 종합성, (4)가계에 의한 계승이 아닌 사숙에 의한 단속적 계승의 네 가지 점이 그 성질로 거론되어 있다. 또한 린파의 원조 가운데 한 사람으로도 꼽히는 혼아미 코우에츠本阿弥光悦는 서예가이기도 하고, 또한 도예나 옻칠 공예의 분야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들은 노포인 요정 사랑방의 장식이 되고, 또 도예품의 일부는 현역 식기로 사용되거나 다도에서 쓰이기도 하여 이것들이 요정 문화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또, 같은 에도 시대의 교토에서 활약한 화가 이토 쟈쿠츄伊藤若冲도 상공인 출신인데, 그것도 니시키 시장의 청과물 가게(지금의 채소가게)의 점주를 맡았다고 하는 인물이다. 이것이 그의 채소 관찰안을 길러준 것일까? 더하여 그는 닭 그림을 몇 장이나 남겼는데, 그 움직임이나 신체의 구조를 상세히 알기 위하여 마당에 수십 마리를 키워 관찰했다고 전한다(츠지 노부오辻惟雄, <기발한 생각의 도보로부터 헤아림 奇想の図譜ちからくり・쟈쿠츄若冲・장식かざり>, 平凡社, 1989).

'채소 벌레 도감(菜虫譜)' '동식물 채색도(動植綵絵)'나 만년의 수묵화 '과채 열반도'에는 갖가지 채소가 등장하고, 게다가 그 안에는 지금의 '교토 채소'에 연결되는 것, 또는 감귤의 변종인 '부처손 감귤'이나 이미 절멸해 버린 '토우지東寺 참외' 또는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 수없는 것 등도 있다. 열반도에서는 교토에 있던 과채의 역사나 그 성쇠를 읽을 수 있는 것만이 아니라, 도시에 이들 채소를 식별하고 즐기는 문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지'와 '예'의 뛰어난 조화를 볼 수 있다(카노 히로유키 狩野博幸, <눈을 뜨는 이토 쟈쿠츄의 동식물 채색도目をみはる伊藤若冲の「動植綵絵」>, 初版 第五刷, 小学館, 2002).

 

 

이토 쟈쿠츄의 <과채 열반도>(교토 국립박물관 소장)

 

 

 

교토 요리의 기술이라 하면 역시 부엌칼 기술을 첫째로 들고 싶다. 부엌칼 기술의 최고는 역시 갯장어의 잔뼈를 잘라 버리는 뼈자르기일 것이다(앞에서 기술). 껍질 한 장을 남기고 3센티미터로 24번 이상 칼집을 넣는 기술의 습득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지금은 인터넷에서도 그 방법을 매우 세세히 보여주고 있다. '깎아 썰기(桂剝き)'도 부엌칼 기술의 기본으로 여겨진다. 부엌칼 기술 등 전국적으로 그리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똑같은 프로 요리인이라도 기술의 고저에는 역시 역력한 지역차가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갯장어의 뼈자르기는 역시 교토와 오사카 장인의 기술력이 다른 지역에 비해 높았던 듯하다. 

기술과 뗄 수 없는 것이 도구이다. 앞에 거론한 부엌칼로 말하면, 교토에는 중세 이후 골풀무에 의한 이즈모出雲의 옥강玉鋼이 운송되어 그것이 검 대장간(刀鍛治)의 장인을 지탱하고 있었다. 칼갈이에 빠질 수 없는 숫돌은 시 북부의 나루타키鳴滝에서 생산했고, 또 단바丹波 지방은 소나무 등 칼로리 높은 수종으로 이루어진 목탄의 산지였다. 일본도와 부엌칼에는 양날과 외날의 차이가 있어 둘의 기원을 같다고 볼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럼에도 예리하게 잘리는 맛을 내지만 부러지고 잘리기 쉬운 강鋼과 끈기가 있는 연철軟鉄을 조합하는 기술을 쓴다는 점에서는 공통이다. 

요리점의 '지'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겠다. 오랜 시간, 몇 세대를 넘어 축적된 지식은 때로는 자식 한 사람에게만 전하는 형태로, 때로는 스승-제자의 형ㅌ로 계승되어 왔다. 그리고 이들 교토 요리를 종합적으로 표현하는 장이 요정이나 요리집이다. 이들 요소를 조합시켜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종합력이 요리인의 힘인 것이다. 

 

 

 

손님이 정하는 요리집의 수준

교토의 도시에는 많은 요리집이 있다. 특히 사쿄구부터 히가시야마구에 걸친 히가시야마 산기슭에 그 밀도가 높다. 그 가운데 몇 곳은 세기를 훨씬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키쿠노이菊乃井'(히가시야마구) 같이 세계에 단골을 지닌 가게도 있다. 

 

지금은 이러한 가게를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사람이 줄어 가고 있다. 음식이 간소화되어 가는 현대, 특히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사라져 요리집에 가본 적도 없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고, 요리집의 장래에는 흥미가 없는 사람도 결코 적지 않다. 그 미래 등이 자신들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도 많이 있다. 이것은 교토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지만 이런 풍조는 교토 음식의 수준을 확실히 저하시킬 것이다. 여러 국가의 여러 도시를 방문해 느낀 점은, 먹는 것을 즐기는 도시와 그렇지 않은 도시가 있다는 점이다. 파리는 역시 전자의 대표로, 도시의 어느 작은 가게의 외관을 보며 걷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또는, 별로 비싸지도 않은 호텔의 간소한 조식에 나오는 크로와상조차 맛있는 곳이 많다. 오늘 밤은 어디에서 무얼 먹을까 생각하는 것이 즐거워지는 도시이기도 하다. 보고 있으면, 파리 사람들은 먹는 것에 아까워하지 않고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태국에서는 태국풍 볶음밥이 어디에서 먹어도 맛있다. 마찬가지로 태국을 포함한 인도네시아에서는 쌀국수가 포장마차의 조식의 기본 메뉴로, 이것도 어디에서 먹어도 맛있다. 특출난 건 없지만, 실패가 없는 것이다. 우리들이 벼 조사로 태국에 체재하고 있을 때 연구팀 안에서는 어느 새 아침은 포장마타의 면, 점심은 볶음밥이란 형식이 만들어져 버렸다.

한편, 몇 번을 다녀도 인상이 남지 않는 도시도, 나라 안팎을 불문하고 존재한다. 눈에 띄는 특징이 없는, 외식점은 체인점 뿐이거나, 술집은 있지만 제대로 먹을 가게가 없는 등등이다. 둘 사이에는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 답의 하나는 아마 가게 쪽만이 아니라 먹는 쪽의 자세에 있다. 물론 가게 쪽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하지만, 도시의 상표력을 단련해 오지 않았다는 의미에서는 소비자를 포함한 지역 사회에도 책임이 있다. 음식 문화나 그 질을 결정하는 것은 소수의 누군가가 아니라 그 지역의 모두라고 하는 것이다. 

요리점의 실력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반복해서 그 가게를 방문하는 단골 손님들이다. 단골 손님이 거리낌 없이 가게에 주문을 넣고, 가게 쪽이 그것을 받아서 문제점을 개선한다면, 가게의 대접은 세련되고 맛도 좋아진다. 반대로 단골 손님이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 또는 단골 손님의 수준이 낮으면, 가게 쪽은 연찬을 쌓지 않게 되어 질이 저하된다. 요컨대, 어느 도시의 음식점 수준은 가게와 손님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하는 셈이다.

교토란 도시는 '주방 요리(板前割烹)'라는 카운터를 끼고 손님과 요리인이 대면하는 형식의 요리집이 태어난 토지이기도 하다. 모리카와 사카에森川栄 씨가 1927년에 개업한 '하마사쿠浜作'라는 가게가 그것으로, 그 뒤 이 스타일은 도쿄나 오사카에도 급속히 보급되었다. 요리인이 안에 있는 요정의 스타일은 손님과의 사이에 대화는 생기지 않는다. '주방 요리'의 가게에서 손님은 요리인이 눈앞에서 조리하는 것을 보면서 요리인과 또는 손님끼리 대화하면서 식사한다. '하마사쿠'는 그 뒤 저명한 문인이나 예술가가 모이는 살롱의 모습을 나타냈다고 한다. 손님들은 입이 고급이었던 저명인들. 그들의 평가는 가게의 힘을 좋든 싫든 단련시킨 것이다.  

 

덧붙여, 교토에서 최초의 중국요리점 '하마무라'의 개점이 1923년(앞에서 기술). 또한, 찻집 신신도우(지금의 신신도우 교대 북문앞점)의 개점이 1930년(앞에서 기술). 1920-1930년은 다이쇼우 민주주의라는 자유의 기풍이 자란 시대였는데, 교토에서도 이 시기 새로운 식문화가 차례로 태어났던 것일까? 교토는 이 의미에서도 진취적인 기질이 풍부했던 도시였다. 

유감스럽지만 최근, 교토에서는 일부 가가가 이전에 비해 맛도 서비스도 저하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상당히 실례가 아니냐고 화를 내는 분도 있겠지만, 잠시 화를 거두고 읽어주셨으면 한다. 2020년 코로나 이전부터 교토를 방문하는 외국인의 수는 자꾸 올라가 늘고 있었다. 그 총수를 말하자면 도쿄나 오사카에 훨씬 미치지 않겠지만, 아무튼 교토란 도시는 좁다. 많은 사람이 오면 금방 포화되어 버린다. JR교토역의 음식점 등 언제 가도 사람으로 붐볐고, 게다가 그 대부분이 외국인이었다. 좋게 말하면 그건 세계화의 일면일 것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그건 문화 상실을 가져왔다. 

거기에 요정이 줄어 식재료를 모으지 않게 되면 질 높은 식재료가 교토의 도시에서는 모습을 감추어 버릴 것이다. 그건 시장 등에서 '감정'을 해 왔던 프로를 사라지게 하고, 나아가서는 제공되는 식재료의 질 전체를 떨어뜨려 버릴 우려가 있다. 

반복하지만, 어느 도시의 음식 실력을 결정하는 것은 그 도시의 소비자이다. 교토의 경우는 방문객이 더해지지만, 그것도 포함해 소비자의 실력이다. 단골들이 소원해지면, 가게의 힘은 확실히 떨어져 간다. 돌고 돌아 식재료의 질도 차츰 떨어져 간다. 힘을 기르는 데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전락하는 것은 금방이다. 

 

 

 

 

고등어 가도街道

교토의 바닷물고기

교토시에는 바다가 없다. 오래 일본인의 단백질원이었던 물고기를 시내의 교토인은 어떻게 구했던 것일까? 앞의 갯장어 외에도 교토의 물고기를 특징짓는 것이 세 가지이다. 그 하나가 민물고기이고, 그에 대해서는 이미 적었다. 

또 하나의 장르가 보존식품이 되는 바다의 물고기이다. 시내에서 연배 있는 사람에게 '교토의 전통요리는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꼭 이름이 거른되는 것이 '대구포 토란'와 '청어 메밀국수'이다.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라고 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기에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우선 대구포. 이것은 새우토란이란 토란 종류와 대구포를 단짠하게 익힌 겨울철 기본 요리이다. 이미 기술했듯이, 이것을 전문으로 내는 그 이름도 '이모보우'란 단어를 본뜬 가게도 있을 정도로, 대구포 토란은 아는 사람만 아는 일품이다. 여기에 사용되는 대구포란 대구의 머리나 내장 등을 제거한 뒤 삶아서 찬바람에 1개월 이상 건조시킨 보존식품이다. 완성품은 두드리면 캉캉 하고 높은 음이 날 정도로 단단하게 몸이 굳어 있다. 이것을 물에 넣고 적당한 크기로 잘라 새우토란과 함께 단짠하게 졸인 것이 '대구포 토란'으로, 만드는 데에는 상당히 손이 가는 일품이다. 

대구포는 교토를 포함한 간사이에서는 정월 요리에 빠질 수 없다. 그 조림은 대구포 토란과 같이 자주 담근 다음에 단짠하게 졸인 것으로, '설 음식'에는 반드시 이것이 들어간다. 연말의 니시키 시장 건어물집의 매대에는 딱딱해진 대구포가 산처럼 쌓여 있다.

다음으로 청어 메밀국수. 한자로 쓰면 鰊蕎麦이다. 메밀국수 위에 말린 청어를 단짠하게 익혀 올리는 일품으로, 이것도 또한 교토의 겨울을 대표하는 전통음식이다. 청어도 겨울을 대표하는 물고기의 하나이고, 예전에는 홋카이도부터 도호쿠東北 난바다의 동해에서 잘 잡혔다. 이걸 잡아올린 바닷가에서 손질해, 살 부분을 토막내어 찬바람에 맞혀 만든 보존식이다. '미가키みがき'란 여러 설이 있는 듯한데 일설에는 '身欠き', 머리를 떼고 등뼈를 따라 칼집을 내어 뼈와 두 조각의 살로 떠서 배 쪽의 잔뼈를 제거한 것이라는 듯하다.

대구포이든 발린 청어이든, 모두 겨울철 동해에서 잡는 물고기의 가공품이다. 대구포도 발린 청어도, 교토만이 아니라 동해 쪽 여기저기의 도시에서 소비되어 왔는데, 교토의 경우 인구가 많아 소비량이 많은 것과 최근의 음식 붐에 편승해 전국에 발신된 것이 크다. 이 의미에서도 '교토의 구심력'이 크게 작용한다.

대구포는 교토에 한하지 않고 오사카에서도 활발히 먹는다. 그러니까 대구포를 교토의 요리라고 적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그렇다면 대구포는 어족자원이 부족한 교토의 식문화라고 하는 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앞에서 적었던 갯장어와 같이 오사카에도 있는 것이기에, 대구포는 맛있는 식재료인 데다 보존이 편리하기에 교토에도 가지고 들어왔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옥돔도 또한 교토의 바닷물고기를 대표하는 것이다(앞에서 기술). 도쿄 등에서 옥돔이라 하더라도 전문가 이외에는 대부분 잘 알지 못하는데, 아마다이甘鯛이다. 그러나 교토에서는 아마다이라고 하면 "그건 어떤 도미인가?"라고 추궁 당하기 일쑤이다. 항구에 올라온 옥돔은 소금에 재워져 교토로 운송된다. 냉장 기술과 운송 방법이 진보된 지금은 생으로 옥돔을 구하지만, 옛날엔 소금에 재운 옥돔이 요정의 구이로 사용되었다. 이것도 소금 간을 잘한 것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이 맛있다.

 

 

 

간고등어와 고등어 초밥

교토의 물고기에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간고등어'이다. 이것 또한 교토의 구심력이 행해지는 기술이었다. 고등어는 거의 연중 잡히는 물고기로, 예전에는 전갱이, 꽁치나 정어리 등과 함께 '청어'의 무리에 들어가는 대중적인 물고기였다. 특히 동해 쪽에서는 잘 잡혀, 자주 먹던 물고기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들 대중적 물고기가 지금은 가격도 올라 결코 대중적이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은 유감이다.

고등어는 몸에 지방분을 많이 포함해, 상하기 쉽기에 보존에는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잡힌 고등어의 머리를 떼어내고 내장을 제거해 소금을 치면 조금은 보존이 된다. 와카사만若狭湾부터 산인山陰 난바다에서 잡힌 고등어에 살짝 소금을 쳐서 교토로 운송해 온 것이 간고등어이다.

간고등어를 운송한 길을 '고등어 가도'라고 했다. 가도하고는 하더라도 하나의 명확한 도로가 있던 것은 아니다. 실크로드와 똑같이 어디까지나 가상의 경로이다. 와카사만에 면한 츠루가敦賀나 오바마小浜의 항구에 올라온 고등어는 그곳에서 처리된 뒤에, 산을 넘어 일단 시가현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다시 고개를 넘어 교토시 사쿄구로 들어와, 오하라를 거쳐 타카노강高野川을 따라 남하한다. 또는 비와호에 들어가 오츠大津에서 오우사카산逢坂山을 넘어서 시내로 들어온다. 거리는 모두 18리(약 72킬로미터) 정도라고 한다. 

오사카에 이르는 고등어 가도도 있었다. 여기는 예를 들면 효고현兵庫県 카스미香住(현 미카타군美方郡 카미쵸香美町)나 타케노竹野(현 토요오카시豊岡市)의 어항에 잡아올린 고등어를 오사카로 운송한 것이다. 

이 간고등어를 쓴 초밥이 '고등어 초밥'이다. 고등어의 살을 머리를 떼고 등뼈를 따라 칼집을 내어 뼈와 살을 발라 성형하고, 살짝 식초로 절인 것을 초밥 위에 얹어 만든다. 가게에 따라서는 고등어 위에 얇은 초다시마를 얹기도 한다. 모양은 여러 가지이다. 대부분은 아래 사진처럼, 고등어의 살 모양에 맞춰 산 모양으로 만들고, 먹을 때는 이걸 2-3센티미터 너비로 잘라서 먹는다. 산 모양으로 만들지 않고 사각으로 성형한 것도 있다. 

기온의 초밥집 노포 '이즈우'의 사사키 쇼우고佐々木勝悟 씨에 의하면, 기온에서는 고등어 초밥은 일종의 '경삿'날의 음식으로, 요정이 연회석에서 손님에게 대접했다고 한다. '이즈우'의 고등어 모양 초밥은 코이마리古伊万里의 접시에 담고, 와지마 칠기(輪島塗)의 배달통에 넣어 전달되었다. 그것은 지금 말하는 '배달'의 일품이었다. 

 

이즈우いづう의 '고등어 모습 초밥'

 

 

 

와카야마현和歌山県의 키노강紀ノ川 유역부터 나라현에 걸친 지역에서는 고등어 초밥을 감나무의 잎에 감싼 감잎 초밥이 알려져 있다. 지금 시판되고 있는 감잎 초밥은 사각형 초밥 위에 미리 잘라 놓은 '키즈시きずし'(고등어 살을 식초에 절인 것)를 올리는 것인데, 모양으로는 고등어 초밥 자른 걸 감잎으로 감싼 것이라 할 수 있다. 

덧붙여, 나라에는 이 감잎 초밥과는 다른 고등어 가도가 있었던 듯하다. 이 가도는 쿠마노熊野 여울에 면한 미에현三重県 키이나가시마紀伊長島에서 잡아올린 고등어가 옛 쿠마노 가도, 이세伊勢 가도를 경유해 지금의 우다시宇陀市에 이르는 것이다. 이 가도는 지금은 완전히 쇠퇴해 버렸지만, 우다는 옛날부터 나라와 동국東国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이기도 하고, 또한 무로우지室生寺 등 고찰도 많이 존재한다. 

고등어 가도에 한하지 않고, 고대부터 있던 길은 산속을 통과하는 것이 많다. 현대인의 감각으로는 산속의 길 등 교통편으로는 정말 나쁜 것이라 보이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현재의 주요 도로나 자동차 도로는 급경사와 커브를 싫어하고, 도사와 도시의 사이를 최단 코스로 연결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이전의 시대, 육상 수송의 요점은 소와 말이었다. 그리고 그 소와 말에 의하여, 평야부는 저습지가 많아 오히려 걷기 어려웠다. 

 

 

 

다시마 길과 기타마에부네北前船

1872년 창업한 후쿠이현福井県 츠루가시敦賀市의 다시마 상가 '오쿠이카이세이도우奥井海正堂'의 주인, 오쿠이 타카시奥井隆 씨는 "다시마 이전과 다시마 이후 미각의 역사는 크게 바뀌었다고 생각한다"라는 시바 료우타로우司馬遼太郎의 소설 한 구절을 인용하여, 다시마가 교토의 음식에 수행한 역할의 크기를 거론한다. 그 '이전' '이후'의 경계가 되는 것은 아마 무로마치 시대. 그리고 그 이후, 다시마는 교토를 포함한 간사이의 음식을 형성해 왔다. 

『해조海藻』(호세이法政 대학 출판국, 1974)를 저술한 미야시타 아키라宮下章 씨에 의하면, 당시 교토에서는 다시마는 '우가宇賀 다시마'라고 불렸다. 홋카이도를 떠난 배는 다시마를 도호쿠부터 호쿠리쿠北陸의 몇몇 도시에서 조금씩 내려놓으면서 최종적으로는 후쿠이현의 오하마나 츠루가에서 대량으로 하역을 했다. 운송했던 것은 토야마富山 근처의 상인들이었던 듯하다. 토야마는 지금도 다시마의 소비량으로 톱클래스인데, 그것도 당시의 잔재인 것 같다. 

이 항로는 근세에 들어서면, 기타마에 항로로서 정비된다. 항로를 연 것은 카와무라 즈이켄河村瑞賢(1618-1699). 최초는 쇼우나이庄内 근처의 쌀을 위쪽으로 운송하기 위하여 개척했던 항로였다. 다시마는 그 배에 탔던 것이다. 기타마에 항로는 이윽고 와카사若狭부터 시모노세키下関를 지나서 세토瀬戸 내해에 들어가 오사카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다시마의 일부는 츠루가에서 부려져, 여기에서 가공되어 교토에 운송되었다. 

교토에서는 다시마는 '축하하다(よろこぶ)'라고 하여 어조도 좋고, 매듭 다시마 등으로 경사에도 쓰였다. 다시마는 과자에도 사용되었다. 가늘게 썬 다시마나 간 마 다시마를 깎아낸 뒤의 심을 달게 졸인 것이라 한다. 다시마와 과자는 아무래도 연결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아오모리에는 '다시마 양갱'이란 양갱이 있다. 보통의 양갱에 다시마 가루를 섞은 것으로, 다시마 향이 난다. 

수도인 교토의 도시에는 다시마 육수를 받아들일 소지가 또 하나 있었다. 교토가 절의 도시였던 점이다. 우가 다시마는 사원 등에서 국물의 재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교토의 사찰에는 임제종 등 선종 사원(선사)도 많다. 선사에서는 사찰 요리가 종종 마련된다. 사찰 요리에서는 물고기도 기피되기에, 가다랑어포도 멸치도 쓰이지 않는다. 육수에는 다시마나 말린 표고버섯 등 식물성 소재가 사용되었다. 

지금은 교토에서도 가다랑어 육수가 사용된다. 다만 도쿄처럼 가다랑어포를 단체로 쓰지는 않고, 다시마와 조합해 사용하는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와 같은 육수를 '맞춤 육수(あわせだし)'라고 부른다. 교토인의 말로 하면, 맞춤 육수의 묘미는 일종의 '만남'인 것이다. 

교토 시내의 학교에서는 맞춤 육수의 감칠맛을 체험하는 수업이 행해진다. 일정식의 요리인 등에서 조직한 '일본 요리 아카데미'가 자원하여 조직한 프로젝트로, 아이에 대한 육수 계발을 목적으로 한다. 어떤 것일지 흥미를 가지고 있던 차에, 아카데미의 이사장이고 '키쿠노이菊乃井'의 주인인 무라타 요시히로村田吉弘 씨(문화공로자)가 교토 부립대학 일정식 문화학과의 학생 상대로 똑같은 수업을 해주었다. 학생들은 우선, 다시마 육수를 입에 머금고 그 감칠맛을 느낀다. 은은한 감칠맛이 입 안에 부드럽게 퍼진다. 다음으로, 얇게 썬 가다랑어포를 한 장 혀 위에 올려서 그 상태로 다시마 육수를 입에 머금는다. 그러면 어떠할까. 이번에는 진한 감칠맛이 확 입 안에 퍼짐과 동시에 맛 좋은 향이 콧속에 퍼졌다. 학생들 사이에서 함성이 일었다. 

 

 

 

 

교토 채소라는 상표

 

교토 채소란?

'교토 채소'란 이름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도쿄에 살고 있었을 때, 어느 백화점 식료품 매장에서 '교토 야채' 코너가 있어서 그곳에서 쿠죠 파가 3개 든 한 봉지가 500엔에 팔고 있는 걸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나는 매장의 점원에게 물어 보았다. 왜 이만한 가격이냐고. 그러자 그 점원은 주눅든 모습도 없이 "본고장 교토산 교토 채소이니까요"라고 답했다. 

그해는 확실히 파가 흉작이라 비쌌는데, 교토 시내의 채소가게의 매대에서는 똑같은 것이 200엔도 안 되게 팔리고 있었다. 과연, 교토 상표, 교토 채소의 이름은 여기까지 퍼져 있는 건가 하고 나는 묘하게 납득되었다. 물론 내가 그 파를 사지는 않았다.

그런데 교토 채소에 명확한 정의는 없다. 교토부가 1988년에 '교토 전통채소'를 37품목(이에 준하는 것으로 다른 3품목) 정했는데, 선정 기준은 (1)메이지 이전에 도입된 것, (2)교토부 안의 전역이 대상, (3)죽순을 포함, (4)버섯, 양치류를 제외함, 그리고 (5)재배 또는 보존되고 있는 것 및 절멸한 품종을 포함이라는 다섯 가지로, 정의라고 하기에는 구체성이 떨어진다.

'교토 채소'가 지금의 지위를 획득한 배경에 오랜 역사와 그에 뒷받침되는 품질을 가진 것은 확실하다. 예를 들면, '코오리 무(郡ダイコン)'는 이미 그 모습을 감추어 버렸는데, 과거에는 대대로 궁중에 헌상되었던 기록이 남아 있다. 유명 신사와 사찰 중에는 전속 농가를 고용해 특정 채소 등을 재배시킨 일도 있다. 가모가미 신사(기타구)의 순무 '스구키나酸茎菜'도 원래는 그러했고, 쇼우렌인青蓮院(히가시야마구)의 새우토란도 그러했다고 전한다. 새우토란은 토란의 일종으로, 약간 가늘고 길어 새우의 체절 같은 마디 부분이 보이기에 이런 이름이다. 둥근 형태의 토란에 비하면 점성은 약하지만 혀에 닿는 감촉은 부드럽다. 그렇지만, 교토 채소가 그 실력을 발휘하는 데 이르른 이유는 아직 또 있다. 

 

 

 

 

교토 채소, 시민권을 얻다

'교토 채소'가 널리 인지되어 그 평가가 이해되었던 것은 길게 보아도 40-50년이다. 아마 1970년대 무렵까지 시중의 아주 평범한 교토인에 게는 채소는 근처의 가게에서, 또는 행상하는 농가에게서 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시가지 북부의 주민이 구할 수 있는 건 가미가모, 슈가쿠인修学院이나, 멀리는 오하라 등의 채소가 중심이었고, 남부 사람들에게는 킷쇼우吉祥院, 카미토바上鳥羽, 후시미伏見 등의 채소밖에 구할 수 없었다. 지금이야 '가미가모라고 하면 가모 가지'라지만, 당시 북부의 시민에게는 가모 가지가 가지였다. 한편 남부의 시민은 그 존재 등을 알 길이 없었다.

1970년대에 들어와 교통이 발달하고, 또한 유통이 활발해지자 전국 각지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싼 값의 채소가 출회하게 된다. 한편, 교토의 채소들도 조금씩이나마 시중 전역에 출회하게 되었다. 교토인들은 이 시점에 처음으로 교토 채소의 전용을 알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무렵부터 제철의 상실이 눈에 띄게 된다. 토마토, 양파, 오이 등 기본 채소는 대규모로 생산되는 산지의 대량생산품이 싸게 출회되었다. 생산성이 낮고 대량으로 생산할 수 없는 교토 채소는 차츰 쇠퇴해 나아갔다. 

다른 한편으로, 교토 채소의 실력을 인지하고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심에 있던 것이 농학자 타카시마 시로우高嶋四郎(1917-2003)이라는 사람이었다. 

타카시마 씨에게는 고문서를 읽는 소양이 있었다. 그래서 채소의 역사를 책에서 읽을 수 있었는데, 그 힘을 가지고 교토 채소의 내력, 기원을 차례차례 밝혀 나아갔다. 그것은 대학 선배인 키쿠치 아키오 씨를 사사한 바가 크다. 옛날 교수들 중에는 이과 전문가라도 고문서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이 교수로서의 소양, 교양이었던 것이다. 

 

타카시마 시로우高嶋四郎 씨(1917-2003)

 

 

타카시마 씨는 교토 부립대학 농학부에서 교육과 연구를 하는 한편, 많은 채소 생산자나 요리집의 주인이나 여주인들과도 교류하며 교토 채소의 질을 높여 나아갔다. 즉 소비자와 생산자를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그 의미에서, 타카시마 씨는 교토 채소를 키운 부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카시마 씨와 요정의 요리인이나 여주인과의 교류는 1960년대 중반 무렵부터 시작했다. 상세한 건 아래에 쓰겠으나 교류는 평생 계속되었고, 그에 의하여 시내를 포함한 부 내 각지에서 생산되는 채소들의 이름이 점차 알려져 나아갔다. 동시에 또한 채소 농가 등을 모아서 연구회를 조직하고, 품평회를 정기적으로 여는 등으로 농가의 기술 향상을 도모했다. 타카시마 씨의 활동 전모를 아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곤란하다. 교투 부립식물원에서 원예 지도를 하고 있는 후지메 유키히로藤目幸擴 씨(부립대학 명예교수)에 의하면, 타카시마 씨의 활동을 아는 사람은 대학 등 연구기관에는 이미 거의 없다. 타카시마 유파의 연구 자세는 유감스럽게도 대학 조직 안에 충분히 계승되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타카시마 씨와 오래 교류를 계속했던 시내 키타구의 농업 타즈루 히토시田鶴均 씨는 타카시마 씨가 항상 전통 교토 채소의 중요성을 설파했다고 한다. 교토 채소를 지키는 데에는 다소 가격이 높더라도 품질에 신경쓰고, 대량으로 만들려 하지 않고, 그 좋음을 이해해 주는 소비자와 손을 잡고 지켜 나아가는 것이라고 타카시마 씨는 생각하고 있었다. 타즈루 씨 자신도 "지금은 잘 안 되더라도, 머지않아 해뜰 날이 온다. 그걸 계속 기다리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타카시마 씨와 교류를 계속한 농가에서 지금도 현역으로 농업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타즈루 씨 외에 몇 명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숙련된 품목을 가지고, 소량이면서 고품질이며 또 균질한 교토 채소를 계속 농사짓고 있다. 

 

 

 

요리집과 농가의 교류

교토 채소의 질을 높인 또 하나의 요소가 요리집의 요리인이나 여주인과 채소 농가의 교류란 점은 앞에서 적었다. 요리인이 농가를 방문해 좋은 상품을 구하는 건 이제 당연한 일이 되어, 이것이 채소의 질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교토에서는 이와 같은 관계가 50년 전부터 이루어져 왔다. 그럼, 이와 같은 연결은 언제, 어떻게 생겼던 것일까?

사쿄구 시모가모下鴨 신사의 바로 옆에 있는 '시모가모 사료우茶寮'는 1856년 창업한 노포인데, 그 4대째, 5대째 사장을 엮임한 것이 사지 마사코佐治政子, 야에코八重子 자매이다. 4대째 사장 겸 여주인이었던 사지 마사코 씨는 그 저서 <어서 오세요, 들어 오세요. -노포의 여주인이 말하는 교토의 노포 장사법(おいでやす、おこしやす。老舗の女将が語る京都の老舗商法)>(誠文堂新光社, 1985)에서 1960년대 타카시마 시로우 씨에게서 직접 채소에 대해서 지적을 받았다고 술회한다. 이후에 5대째 사장이 되는 동생 야에코 씨와 자매로 교토 부립식물원 근처에 밭을 빌려, 그곳에서 실제로 채소의 재배를 해 보았다. 이것은 자매의 채소를 보는 안목을 키우는 데 크게 공헌했다. 

게다가 마사코 씨는 1989년 무렵 '교토 채소를 기르는 모임'을 시작해 자신은 부회장을 맡아서 활동을 계속 지원했다. JA 등의 조직과 연대하면서 시내에서 교토 채소의 품평회를 열어서는 품질 향상과 보급에 열심히 임했다. 마사코 씨는 유화를 즐겼다. 교토 채소의 그림은 130점에 이르고, 그것들은 화집으로 출판되어 호평을 받았다. 

우쿄구 아라사야마의 요정 '킷쵸우吉兆'(지금은 교토 킷쵸우')의 토쿠오카 코우지徳岡孝二 씨는 도쿄점에서 아라시야마점으로 배속되었던 당시(1960년대 중반 무렵)에 채소는 보통의 채소가게에서 구입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채소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교토의 식문화를 살리기 위해서는 더욱 질이 높은 채소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한 토쿠오카 씨는 타카시마 시로우 씨를 방문해 좋은 채소에 대해 가르침을 받고 직접 채소 농가를 방문해 좋은 채소를 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미나미구南区의 농업법인 '시마이시嶋石'의 이시와리 테루히사石割照久 씨는 1990년 무렵 사쿄구의 노포 요정 '효우테이瓢亭'의 의뢰를 받아 채소의 계약재배를 시작했다. 최초는 효우테이가 요구하는 품질의 채소를 농사짓는 데에 고생했지만, 지금은 고품질로는 정평이 나 있다. 그리고 전국 각지의 요정 등과의 계약재배로 맺어져 채소를 농사짓고 있다 한다.

이시와리 씨에게는 일본 각지의 요리인에게 받은 의뢰가 끊임없이 오는데, 중요시하는 건 대면 교류라고 한다. 교토 시내의 요정 등에는 이시와리 씨 스스로, 농사지은 채소를 전해주고 있다. 그때 자연스런 대화에서 가게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알아 낼 수 있다. 농가에게는 그 높은 요구에 응할 수 있도록 부단한 기술 향상이 요구된다. 이처럼 교토 채소의 생산 농가와 요정 등과의 사이에는 강한 신뢰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이 교토 채소의 질을 높이고, 또한 새로운 채소를 도입해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나아간다 -그런 선순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교토 채소의 질이 높은 건 흙이 좋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일도 종종 있다. '농업은 흙 만들기'라고 이야기하듯이, 좋은 흙을 만드는 것은 농가이다. 품질 높은 채소를 만드는 농가는 예외없이 흙 만들기에 엄청난 열정과 에너지를 쏟는다. 흙을 깊게 갈아서 뿌리가 땅속 깊이 내리도록 하고, 퇴비 등을 사용해 흙을 부드럽게 만들어 통기성을 유지하며, 뿌리가 양분을 잘 흡수하도록 한다. 이시와리 씨는 요리집에서 나오는 육수 찌꺼기를 얻어서 퇴비로 만드는 시도도 시작했다. 친환경적인 대처이다. 요리도 채소 만들기도 세월에 걸쳐 세대를 넘어선 승부이다. 

 

 

 

 

교토 채소를 지킨다는 것

원래 채소나 그 품종은 바뀌는 것. 100년, 아니 50년 그 모습을 바꾸지 않는 것 등은 하나도 없다. 그 이유는 이렇다. 

채소는 먹는 사람, 요리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먹는 사람, 요리하는 사람이 외면해 버리면 2년이나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없다. 특히, 옛날부터 있던 채소나 그 품종은 누군가가 의식적으로 지켜 나가지 않으면 바로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이 점이 야생식물과는 다른 점이다. 

더하여, 소비자의 선호도 해마다 변화해 나아간다. 이 50년 정도 사이에 소비자의 채소 기호는 향이 약한 것, 단맛이 강한 것으로 변화했다. 향이 없는 피망, 달달한 토마토 등이 환대받았다. 그것이 개성적인 맛을 가진 재래 품종이 경원시되는 이유가 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재래품종이 다시 주목받게 되고, 그 맛을 추구하는 사람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그에 응하여 새로운 품종도 생기고, 옛날 것은 도태되어 나아간다. 똑같은 변화는 교토의 채소에도 일어나고 있다. 

채소의 품종이 단명하는 이유는 아직 있다. 십자화과에 속하는 무나 순무 등은 '자가불화합성自家不和合性'이란 성질에 의해 자가수분할 수 없다. 자신과 똑같은 유전자형의 꽃가루가 암술에 아무리 많이 묻어도 그것이 수정될 수 없다. 그 때문에 동물과 마찬가지로 자식의 성질은 똑같은 부모에게서 생긴 형제 사이조차도 여러 가지로 달라지고, 부모와 같은 성질의 것 등은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다. 자가불화합성을 갖지 않더라도, 암수 개체가 다른 식물처럼 보통 타가수분하는 채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채소뿐인가, 자가수분하는 쌀의 품종조차 50년의 시간을 넘어서 살아남을 수 있는 건 극히 적다. 공전의 저명한 품종이 된 고시히카리도 1956년의 탄생부터 60여 년을 지난 지금은 탄생 당시의 모습을 실절적으로는 잃었다고 한다. 채소의 경우에는 수십 년이 지나면 종을 넘은 교배가 일어나 지금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종, 품종이 탄생하기조차 한다.

어느 품종의 성질을 유지하는 데에는 품종개량의 전문가나 농가의 기억과 전문 기술에 의할 수밖에 없다. 농가에서는 이전 농사철에 재배한 것과 다르다고 판단되는 것은 솎아내면서 그 품종의 성질을 되도록 보존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기온이나 강수량, 일조 등의 환경은 해마다 변한다. 이어짓기 장해가 있는 작물은 밭을 매년 바꾸면서 토질이나 지력도 매년 달라진다. 가령 부모와 똑같은 유전자형의 자식 세대를 얻었더라도, 수확되는 채소의 품질은 당연히 변하게 된다.

품질은 기억에 의한 것이니까, 올해의 순무가 작년의 그것과 같은지 등을 확인할 수도 없기 때문에 세대를 거치면서 품종의 성질은 조금씩 변해 나아간다. 특히 재배자의 대체가 일어났을 때, 그것을 계기로 품종의 성질이 크게 변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전 서적이나 쟈쿠츄의 그림에 등장하는 교토 채소들이 그 맛이나 성분 등의 성질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앞에 거론한 순무 스구키나도 20세기의 초기 무렵까지는 뿌리 부분이 매우 마른 품종이었다고 타즈루 씨는 이야기한다. 그것이 최근 100년도 안 되는 사이에 뿌리 부분도 잘 발달한 지금의 모양이 되었기에, 채소의 품종은 그 정도로 변하기 쉽다고 하는 걸 알 수 있다.

타카시마 씨가 채소 농가의 사람들에게 설파한 것이 종자의 관리였다. 내년도, 내후년도, 조금이라도 오래 같은 성질을 가진 채소를 생산해 나아가기 위해 질 높은 종자를 생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성질을 분별하는 식별안과 유전학 지식이다. 어느 특정 채소를 숙지한 농가가 그 성질을 되도록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도록 다음 세대의 종자를 계속 만드는 것이다.

타즈루 씨들은 스구키나의 유전자형을 지키는 데 고생했다. 이미 기술했듯이 십자화과 식물은 자가불화합성을 가져 다른 그루의 꽃가루로 종자를 맺는다. 공중에는 다른 십자화과 식물의 꽃가루가 날아다닌다. 채소라면 누군가가 무엇을 있는지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 문제는 자생하는 식물들이다. 한때 카모강이나 다카노강의 하천 부지에 유래 불명의 채소 꽃이 자생하고 있던 적이 있다. 거기에서 다량의 꽃가루가 날아왔다. 그 꽃가루로 수분해 생긴 후대에는 상상도 하지 않았던 변이가 나타난다. '유전자 오염'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유전자 오염'을 막을 수 없을까. 개화 시기가 같아지지 않도록 종자를 취하는 그루를 격리 재배해 보거나 등 남모를 고생이 있었다고 한다. 가을에 종자를 심고 나서도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되는 개체를 솎아버려야 한다. 이와 같이 해서 타즈루 씨는 스구키나의 유전 형질을 계속 지켰다.

유전 형질을 지키는 것의 중요함을 타카시마 씨는 설파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채소를 지키려는 기개로 가득한 농가가 그 기대에 응한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해 보면, 교토 채소가 지금의 지위를 확립한 배경에는 농가, 연구자, 요리인 각각의 노력과 삼자 사이의 현실적이고 농밀한 관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삼자의 관계를 지탱한 것은 교토의 도시가 삼자가 서로 왕래할 수 있는 적당한 크기의 도시였던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도시가 도쿄처럼 규모가 팽창하면, 자연히 인간 관계는 희박해진다. 그렇다고 도시가 너무 작으면, 이번엔 요리집은 자연스럽게 성립하지 않는다.

 

 

 

전통 행사가 지키는 교토 채소들

교토 채소를 아직도 전하기 위해 큰 역할을 수행해 온 또 하나의 요소가 여러 가지 종교 행사나 연중 행사였다. 그 예를 몇 가지 들어 보자.

하나는 앞에 들었던 시시가타니鹿ケ谷 호박이다. 사쿄구의 안라쿠지가 매년 7월 25일에 행하는 '호박 공양'에 사용된다. 절의 기록에 의하면 1790년 무렵에 무츠국陸奥国에서 가지고 돌아온 종자에서 파생한 돌연변이체를 안라쿠지의 승려가 공양에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 처음이라고 한다. 

이 호박은 이전에는 시시가타니 부근에서 재배되고 있었는데, 도시화가 진행되어 밭이 사라져 지금은 부의 북중부인 아야베시綾部市 일대에서 재배되고 있다. 절이 특별히 신경쓰는 것이 이 호박의 특징인 '잘록함'이다. 이 호박의 형태적인 특징은 표주박 같은 뚜렷한 잘록함을 지닌 것이다. 품종의 유지에는 무엇보다도 이 잘록함이 중요하다. 

공양 당일은 아침 일찍부터 절의 관계자들이 모여서, 몇 센티미터 각도로 잘라서 나눈다. 이때 잘록한 부분을 양단해 버리지 않도록 큼직하게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이처럼 만든 토막을 대나무 껍질을 깐 큰 냄비에서 육수, 설탕, 간장 등을 더하여 40분 정도 익힌다. 그걸 한 조각씩 참배자에게 대접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시시가타니 호박은 맛도 싱급고, 약간 풋내가 난다. 그것이 맛이라고 하며 맛일지도 모르지만, 진한 맛에 익숙한 현대인에게는 부족하다 느껴진다. 덧붙여 가격도 비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호박이 세기를 넘어 아직도 전해진 그 원동력은 뭐니뭐니 해도 호박 공양의 존재이다. 그리고 그 호박은 시시가타니 호박이어야 한다. '중풍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는 그 언설도 건강 붐에 농락되는 현대인의 지지를 받는 이유의 하나일까. 도시의 시장 등에도 장식 대신 놓여 있는 가게가 몇 곳이 있다. 즉 교토의 도시 안에는 시시가타니 호박은 일정한 지지를 얻고 있다. 

또 하나, '축하 무(祝ダイコン)'를 들고 싶다. 시장 등에서 보는 푸른머리 무(青首大根)에 비하면 길이도 짧고, 또 굵기도 3센티미터 정도로 가늘다. 교토 채소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나라현이 '야마토 채소'로서 인정하고 있으며 주산지도 나라현이다. '축하 무'는 교토에서도 나라에서도 오직 떡국용으로 사용되어, 연말 며칠 동안만 출회된다. 왜냐하면, 이걸 가로로 자르면 둥근 모양이 되어 떡국에 띄우기가 딱 좋다. 푸른 머리처럼 굵은 무를 쓰면 은행잎 꼴로 잘라야 하고 그러면 각이 생긴다. 이걸 싫어해서 떡국용으로 일부러 가느다란 무를 준비했다고 하는 것이 자주 이야기하는 이유이다. 가로로 썰었을 때의 단면으로 나타난 모양이 국화와 비슷해 아름다운 것도 좋다. 덧붙여, 축하 무는 교토의 전통 채소에는 더해지지 않았지만, 이전은 군郡 무가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도 이야기된다.

 

축하 무

 

 

 

시시가타니 호박이든 축하 무이든, 생산성이 낮고 또 재배에는 수고가 들기에 대량생산에는 맞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이 아직도 전해지는 것은 시시가타니 호박의 경우에는 '호박 공양'이란 행사 때문이고, 또한 '축하 무'의 경우는 떡국이란 용도 때문이다. 즉, 이들 행사가 전통 채소를 아직도 전하는 원동력이 되어 왔다. 전통 채소를 지키는 행위는 채소 종류의 다양성을 지키는 것으로 이어진다. 생물다양성의 유지에 공헌하는 행위는 지역의 여러 행사라는 문화의 다양성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교토의 고추

교토인은 고추를 자주 먹는다. 그것은 교토 채소 안에 몇 가지 고추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통계를 보았을 리는 없지만 -이라고 하기보다 아마 이와 같은 통계는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교토에서는 각종 고추를 먹고, 사용해 왔다. 고추라고 말하면, 저 캡사이신의 매운맛이 연상되지만, 교토의 고추 중에는 맵지 않은 것도 많이 있다. 그러니까 그것들은 채소로 다루어진다. 

교토 채소나 그 무리에도 '후시미 고추' '만간지 고추' 다나카 고추' '야마시나 고추' 등이 있어서 이들은 피망 같이 캡사이신의 매운맛은 거의 없다. 이들은 생으로 먹는 일은 별로 없고, 예를 들면 '만간지와 멸치 볶음' 같은 백반의 일품으로 인지되어 왔다. 만간지万願寺는 부의 북부, 마이즈루시舞鶴市의 지구명地区名이다.  이 지구에서 교배에 의해 탄생한 품종 같은데, 출생에 대해 상세한 건 알 수 없다. 현재도 마이즈루를 비롯해 부의 북부가 주산지로, '교토 상표 상품'으로 1989년에 인증된다. 만간지 고추는 살이 두텁고, 미숙과는 약간 달다. 길이는 15센티미터에서 20센티미터가 된다. 종자나 태좌胎座(종자가 연결되는 부분)도 제거하지 않고 큼직하게 썰어 기름으로 볶은 뒤, 적당량의 멸치를 더해 소량의 술, 육수, 간장으로 맛을 조절한다. 이것이 앞의 '만간지와 멸치 볶음'. 냉장고에 두면 3-4일은 먹을 수 있다. 

후시미 고추도 매운맛이 없는 품종이다. 시장 등에서는 '아마토甘と' 등이라 부르고 있다. '토'는 고추란 뜻. 만간지보다 훨씬 가늘고 길이도 짧지만, 만간지와 똑같이 조리하거나, 보통은 굽거나 하여 먹는다. 초벌구이로 가다랑어포를 얹고, 간장을 치는 것만으로 여름의 훌륭한 일품이 된다. 후시미 고추의 어린잎은 '키고쇼우'라는 조림으로 요리된다(앞에서 기술). 딴 것은 구석부터 구석까지 사용하려는 교토인의 절약 정신의 발로일까.

다나카 고추도 또한 맵지 않은 고추이다. 다나카는 사쿄구의 지명. 기타시라강의 서쪽, 카모강의 지류인 다카노강의 좌안(동쪽)에 해당한다. 다나카 고추는 약간 살이 얇고 부드러우며, 사자 고추를 조금 굵게 만든 느낌의 품종이다. 40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진 사쿄구의 '효우테이瓢亭'의 일품 중에는 이 다나카 고추를 사용한 것이 있다. 

매운맛을 가진 고추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는 교토의 조미료도 있다. '칠미(시치미七味)' '일미(이치미一味)'가 그것이다. 칠미는 전골 요리 외에, 우동과 닭구이 등의 강조점으로 빠질 수 없다. 교토는 일본 칠미의 명산지의 하나로, 시내에도 노포가 몇 채 있다. 가게에 따라서 사용되는 소재는 조금씩 다르지만, 산초, 흰깨, 삼씨, 푸른 차조기 등과 함께 고추가 반드시 사용된다. 가게에 따라서 사용되거나 사용되지 않거나 하는 것이  겨자씨, 검은깨, 귤껍질, 유자껍질 등이다. 일미는 그 이름 그대로 고추가루만 쓴다. 

고추는 이외에도 여러 요리에 쓰여 왔다. 가지와 말린 청어를 익혀 함께 담은 것, 초연근 등에 더하면 그 짜릿한 매운맛이 절호의 강조점이 된다. 된장과 염교의 단식초절임을 만드는 데에도 몇 조각의 말린 고추를 넣어 곰팡이 방지나 부패 방지 효과가 있다고 한다. 

고추의 원산지는 남미. 이른바 '콜럼버스의 교환'으로 16세기까지 유럽에 전해지고, 인도를 경유해 일본에도 전해졌다고 한다. 고추는 그로부터 불과 400년 정도의 사이에 갖가지 용도를 획득했는데, 다른 도래 식재료와 마찬가지로 우선 수도에 전해져 그곳에서 각지로 전파되었을 것이다. 

 

 

 

교토의 파

파라고 하면 도쿄나 간토우에서는 흰 부분이 긴 흰파가 보통이다. 지금은 교토의 슈퍼에서도 볼 수 있게 된 '후카야深谷 파' 등이 그 대표로, 제철 무렵의 파는 그 흰 부분에 달달한 젤리 모양의 것을 가득 머금는다. 파는 달달한 것이다. 이들은 '카가加賀 계통' 또는 '센쥬千住 계통'에 속한다. 그리고 이들은 녹색 부분은 별로 먹지 않는다. 

한편 간사이 서쪽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녹색 잎 부분이 많은 잎파이다. 그 선명한 녹색이 식욕을 돋운다. 겨울 교토의 메뉴인 '기누가사衣笠 덮밥'이나 우동 위에도 잎파의 잎 부분을 잔뜩 얹는 가게가 있다. 덧붙여 교토에서는 파의 대부분이 '쿠죠 파'라고 부르는 품종이다. 녹색 부분을 먹는 파로, 시 남부의 쿠죠 부근이 주산지였다는 데에서 따온 이름이다. 

쿠죠 파 중에서도 겨울에 재배되는 것은 녹색이 진하고, 또 달다. 신선한 것은 자르면 안에서 걸쭉하고 달달한 액체가 튀어나온다. 공동인 안쪽에 머금은 당을 포함한 점액으로, 파는 이것으로 동결로부터 몸을 지킨다. 이 녹색 부분은 너무 익히면 색이 거무스름해지고 쓴맛이 나오기에 요주의.

 

 

카모賀茂 파

 

 

  그런데 교토에는 '서쪽은 잎파'의 예외가 있다. 교토 시내 북부의 타카가미네鷹峯 지구부터 겐탄玄琢, 니시가모西賀茂 지구에는 '겐탄 파' '가모 파' 등이라 부르는 흰 부분이 큰 파가 있다. 지금도 근근이 재배가 계속되고 있는데, 최근에는 슈퍼에도 흰파가 진열하게 되었기에 완전히 모습이 희미해져 버렸다. 외관은 흰파를 꼭 닮아서 교토에도 흰파가 있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지만,  그건 오해이다. 모두 쿠죠 파에 속하는 계통이라 여겨진다. 그 의미에서는 '서일본의 파는 쿠죠 계통'이라는 표현은 지금도 옳다. 

 

 

 

 

교토의 절임

관광이나 볼일로 교토에 온 사람은 교토의 선물로 무엇을 살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인터넷에서 순위 사이트가 많이 있어서, 그걸 보면 대략적인 경항을 알 수 있다. 어느 사이트에서도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양과자', 즉 과자류이다. '아쟈리떡阿舍利餠' 등 떡 이름이 붙은 생얏하시八ッ橋, 모나카, 엿 등 외에 양과자나 일양 절충 과자, 초코렛 등 또한 노포에 의한 이른바 '창작 일본과자'라고도 부를 만한 새로운 느낌의 과자류도 많다. 

과자류 다음으로 많은 것이 절임류이다. '교토부 절임 협동조합'의 웹사이트에 의하면, 교토에는 '3대 절임'이라 부르는 절임이 있다. '순무 절임(すぐき)' '순무 절임 썬 것(千枚漬)' '붉은차조기 절임(しば漬け)'이다. 

순무 절임이란 '스구키나'라고 하는 종류의 순무를 잎도 뿌리도 포함해 통째로 소금절임을 하고, 누름돌을 올려 유산 발효시킨 교토의 독특한 절임이다. 다만, 스구키나는 20세기 전반까지는 뿌리 부분이 거의 없는 품종이었다(앞에서 기술). 그것이 어느새 뿌리 부분이 굵어져, 지금은 잎 부분과 뿌리 부분 모두를 함께 절인다. 독특한 향과 산미에 중독되는 절임이다. 

 

교토의 절임 1) 순무 절임

 

교토의 절임 2) 순무 절임 썬 것

 

교토의 절임 3)붉은차조기 절임

 

 

 

순무 절임을 가을에 수확해 잎이 달린 채로 잘 씻어, 전용 나무통에 소금과 함께 절여 넣고 겨울의 끝부터 봄까지 둔다. 산미는 유산균에 의한 것인데, 균은 잎에 서식하고 있다. 그 의미에서 순무 절임은 가미가모의 풍토에서 지원된 절임이다. 발효를 진행하기 위해 숯을 피운 방에 잠시 둔다. 먹을 때는 잎 부분, 뿌리 부분을 함께 잘게 썰어 먹는 일이 많다.

순무 절임의 큰 특징은 순무의 생산농가가 씨뿌리기부터 절임의 제조까지 일관되게 한다는 점일 것이다. 원래는 가미가모 신사의 신관 집안이 제조를 독점하고 있었다. 판매는 업자의 일로, 제조와 판매는 분업되어 있다. 다만, 생산자는 해마다 감소하고 있어, 장래의 담당자 확보가 과제이다.

순무 절임 썬 것은 쇼우고인聖護院 순무라는 둥글고 큰 순무를 얇게 가로로 썰어서 소금이 절인 겉절이 절임이다. 맛이 들게 하기 위해 다시마의 조각을 넣는데, 이 다시마가 끈적한 실을 내어 썩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일이 있다. 물론 그건 커다란 오해이다. 순무 절임 썬 것은 겉절이로 분류된다. 그렇더라도 순무 절임에 비해서라는 의미인데, 이것도 역시 유산 발효를 수반한 겨울의 절임이다. 다만 최근은 식초를 더하여 산미를 연출하는 상품이 출회하고 있는 듯하다.

이들 두 가지가 겨울의 절임인데 비하여, 붉은차조기 절임은 여름의 절임이다. 가지, 오이, 생강에 소금을 쳐서 나무통에서 절인다. 그리고 역시 누름돌을 놓는다. 유산 발효가 진행되어, 산미가 있는 독특한 풍미의 절임이 된다. 이때에 붉은차조기를 넣는다. 붉은차조기 절임의 저 자주색은 이 붉은차조기의 색이다. 이 절임에는 1000년 가까이 전부터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가 있다. 평平씨 집안과 함께 어린 나이로 죽었던 안토쿠安徳 왕의 어머니 타이라노 토쿠시建礼門院徳子가 힘을 잃고, 지금의 교토시 사쿄구 오하라의 잣코우인寂光院에 칩거했다. 그리고 실의에 빠져 있는 타이라노에게 마을 사람들이 바친 것이 이 붉은차조기 절임이었다고 한다. 오하라는 그 이후 붉은차조기의 산지이다.

이상 '3대 절임'은 모두 원래는 소금절임으로 누름돌을 올려 유산 발효시키는 점에 특징이 있는데, 아무래도 '소금 절임+누름돌'에는 의미가 있다. 유산균은 당분이나 아미노산 등을 영양으로 섭취하고 그 대사산물인 유산을 생산하는데, 이 영양분은 채소 등의 세포에서 제공된다. 영양분을 얻는 데에는 세포가 찌부러지는 게 좋다. 소금으로 문질러 비비고 압력을 가하여 세포가 파괴되고, 안에 있던 영양분이 세포 밖으로 나온다. 

여기에서 말하는 유산균은 식물 유산균이다.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절여지는 채소, 절임이나 그 용기에 서식하며 대를 이어 왔다. 채소 재배가 성행하여 많은 절임이 곳곳에서 절여져서 도시 전체가 '유산균 배양기'가 되어 왔을 것이다. 교토는 사찰 요리의 도시이기도 하기에, 3대 절임 이외에도 식물 소재를 쓴 절임이 많이 있고, 그리고 유산균을 써서 만들어진 것이 많다. 

소금 절임의 절임은 종류가 많다. 매실장아찌도 그 하나인데, 교토에도 저명한 매실장아찌가 있다. 지금은 매실장아찌용 매실의 산지는 와카야마가 기본이지만, 교토에서는 기타노 텐만구의 매실장아찌가 유명하다. 기타노 텐만구는 매실의 신사로도 유명해, 매화 정원에서 생산하는 매화의 과실을 매실장아찌로 만들어 그 일부를 '대복大福 매실'로 판매하고 있다(앞에서 기술). 와카야마의 매실장아찌처럼 대립이고 수분이 높은 것과는 달리, 작고 단단하게 건조하며 또한 염분도 꽤 높다.

이처럼 교토는 절임의 도시이지만, 그 배경에는 양질의 채소를 풍부하게 취할 수 있는 것이나, 나아가서는 사찰 요리의 이상이 깊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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