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동주택 주민의 식생활은 어떠했을까?
일본인 누구나 아침밥, 점심밥, 저녁밥으로 하루 3번 식사를 하게 된 것은 에도 시대부터이다. 그때까지 나라 시대부터 쭉 아침밥과 저녁밥 두 끼로 지냈던 것은 식량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해도 좋다. 평화가 오래 지속된 에도 시대에는 농업, 어업이 크게 발전해 육해의 교통망이 전국 규모로 정비되었기에, 각지의 산물이 에도와 오사카, 교토 등의 도시에 모여 상공업이 뚜렷하게 발달해 부유한 상공업자가 탄생했다. 일반 민중의 삶도 고대, 중세에 비하면 현격히 풍요로워져 먹는 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게 되었다. 그동안 변변치 못한 식사로 견뎠던 장인, 소상인, 그리고 농민에게도 먹는 일을 즐기는 여유가 생겼다. 이것은 오늘날에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공복을 채울 만한 먹을거리조차 충분하지 않았던 당시의 민중에게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에도는 도쿠가와 막부가 새로 건설한 도시로, 18세기 말의 칸세이寛政 연간에는 인구가 120만 명이 넘는 세계 제일의 거대한 소비도시였는데,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떠한 식사를 하고 있던 것일까?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인구의 과반수를 차지하던 장인과 소상인 등의 식생활이다.
장인의 70%는 공동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공동주택은 뒷골목에 면하고 있었다. 1채의 건물을 벽으로 몇 채로 구분해 놓은 주거지로, 1채의 넓이는 좁은 건 정면의 너비가 2.7m(9尺), 뒤끝까지의 길이는 3.6m(2間)였다. 2.7m에 90cm(3尺)의 봉당과 2.25평(四畳半)의 거실 겸 침실만 있는 주거이다. 주인의 대부분은 장인이나 행상인으로, 임대료는 1달 1000문, 현재 가격으로 계산하면 약 2만 엔이다. 공용 우물과 변소가 집밖에 있고, 취사도구는 봉당에 있는 부뚜막과 개수대, 물독, 그리고 뒤주, 냄비, 가마솥, 부엌칼, 도마, 절구, 소쿠리, 부부의 상자형 상이다. 상자형 상은 상자 모양의 상으로, 자신의 밥공기, 국그릇, 접시와 젓가락을 수납해 두고, 식사를 할 때는 상자의 뚜껑을 뒤집어 식기를 올리는 것이다.
에도 후기, 분세이文政 연간(1818-1830)에 쿠리하라 노부미츠栗原柳庵가 저술한 <문정연간만록文政年間漫録>에서 공동주택 주민의 식생활을 복원해 보자. 공동주택에 사는 목수에게는 아내와 아이 1명이 있다. 목수는 장인 중에서는 가장 높은 일당, 540문을 버는데, 비가 내려 일하지 못하는 날도 있기에 평균하여 하루 450문으로 살게 된다. 이중에서 쌀 1되를 90문, 채소와 생선, 된장, 간장을 100문으로 구매한다. 1문을 20엔으로 쳐서 현재 가격으로 환산하면 하루 수입은 9000엔, 쌀값은 1되(1.5kg) 1800엔이 된다. 당시 쌀의 가격은 현재의 가격 1킬로그램 300엔에 비하면 4배나 비쌌다. 멜대의 양끝에 생선, 채소, 두부 등을 넣은 광주리를 메고 골목에서 골목으로 팔러 다니는 행상인이라면 하루 300문 정도였기에 벌이의 60%가 먹을거리에 소비되어 버린다.
목수 일가가 하루 100문으로 살 수 있는 식재료를 생각해 보자. 당시 물가는 무 10개 72문, 채소류 1단 6문, 단무지 1개 16문, 두부 1모 60문, 유부 1장 2문, 낫토 1봉지 4문, 계란 1개 10문, 간장 1되 60문, 정어리 10마리 120문, 고등어 1마리 300문, 도미 1마리 1500문, 키조개는 껍질 있는 거 1되 20문이다. 채소의 가격은 싸고 어패류는 비쌌기에, 일상의 반찬은 채소가 주였다. 아침밥은 갓 지은 밥에 된장국과 낫토, 절임, 점심과 저녁은 찬밥, 반찬은 채소 절임, 때로는 두부, 유부나 생선구이 등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침점심저녁 세 끼 흰쌀밥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이 시대부터이다.
큰길의 상가에는 아내 외에 더부살이 지배인, 사환 아이, 하녀 등을 합해 8명이나 10명이 살고 있다. 1년 동안 매입하는 밥쌀은 14섬 4말(16량), 하루로 치면 4되이다. 그외의 식비는 18량 정도이기에, 하루로 치면 326문이다. 이것으로 10명이 먹기 때문에 공동주택에 사는 목수 일가와 다를 바 없는 변변치 않은 식사였을 것이다. 목수 일가도 상인 일가도 1인당 하루 흰쌀 약 4홉, 600그램을 먹었기에, 그것만 2100킬로칼로리를 섭취하는데 부식은 채소와 절임이 주였기에 필요 칼로리의 90% 정도를 밥으로 섭취했다. 그처럼 변변치 않은 내용의 식사를 하고 있어도 엥겔 지수는 40%를 넘었다.
2. 에도의 반찬은 어떤 것인가?
서민이 자주 먹었던 반찬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막부 말기 텐포우天保 연간(1830-1842)에 작성된 <나날의 특가 검약 요리 순위(日々徳用倹約料理角力取組)>에는 200종류 정도의 반찬이 스모 순위표에 비유되어 열거되었다. 오른쪽의 사찰 쪽에는 오오제키大関에 팔잔두부八杯豆腐(두부를 장방형으로 잘라 술과 간장으로 졸여 겨자, 간 무와 먹음), 세키와케関脇는 다시마와 유부의 조림, 코무스비小結는 우엉 조림(우엉을 채로 쳐서 설탕, 간장, 고추로 양념을 한다. 기름으로 볶은 것은 메이지 이후의 일인 것 같음), 마에가시라前頭에는 콩조림, 두부구이의 맑은국, 톳 무침, 무말랭이 조림, 토란 줄기와 유부 조림, 유부 양념구이, 소송채 무침 등, 좌측의 어류 쪽에는 정어리 꼬치, 조갯살과 무말랭이 조림, 보리새우 볶음, 다랑어 장국, 전어와 무 조림, 정어리포, 정어리 소금구이, 다랑어 회, 가다랑어 소금절임, 연어 소금절임 등이 나열되어 있다. 단무지, 매실장아찌, 쌀겨된장절임, 줄기채소 절임 등은 매일 먹는 것이었기에 심판원 칸에 기재되어 있다. 모두 현대의 우리에게 익숙한 반찬이다.
서민의 즐거움은 신사와 사찰에 참배하는 산천유람의 여행이었다. 동료와 계를 짜서 여비를 매달 적립해 나가는 것이다. '일생 한 번 이세伊勢의 참배'라고 하여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참배하는 사람은 에도 중엽에 연간 40만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이세 참배의 시중을 드는 신관(御師) 숙소에서는 참배인을 2번 상, 3번 상이 딸린 요리로 대접했다. 예를 들면 본상은 밥, 국, 회(식초와 간 무로 무친 회), 전복, 밀기울, 톳의 조림과 절임, 2번 상은 국, 회, 도미 구이, 숭어와 양하의 국물, 흰살어묵, 표고버섯, 땅두릅의 조림 등이고, 여기에 술을 덧붙인다. 일반 여관은 아침저녁 두 끼를 주고 200문에서 300문, 현재로 말하면 몇천 엔으로 숙박했다. 식사는 저녁밥, 아침밥 모두 1국 2채인데, 옥돔과 전갱이 소금구이, 표고버섯, 박고지, 어묵의 조림, 절인 채소의 참깨무침 등 평소에는 좀처럼 먹지 못하는 진수성찬이 나왔다. 그외에 가는 길의 찻집에서는 그 땅의 명물인 떡과 경단을 1개 5문 정도로 즐길 수 있었다.
3. 도쿠가와 쇼군의 옹색한 식생활
도쿠가와 쇼군은 어떠한 것을 먹었을까? 정월 등 행사가 있는 날에는 세 끼모두 2국 7채인데, 평소에는 아침과 점심이 1국 4채, 저녁밥은 1국 5채로 정해져 있었다.
11대 쇼균 도쿠가와 이에나리徳川家斉의 어느 날인가의 저녁상 상차림이 남아 있다. 본상에는 조릿대 말이 도미 초밥, 왕우럭조개, 여뀌, 생강 반찬, 밥, 절임, 오이 겉절이, 2번 상은 조림(배추, 흰살어묵, 송이버섯, 무 쌀겨절임), 탕(전갱이, 생강 초절임), 국물(보리멸 묶음, 푸른 산초). 3번 상에는 모둠 요리(鉢盛り<참새우 통구이, 얇게 썬 어묵, 전복 술조림, 도미 꼬치, 자고 조림, 차조기, 햇생강 매실 초절임)으로, 1국 5채의 사치스런 상차림이다.
그러나 쇼군의 밥상에는 사용하면 안 되는 수많은 식재료가 정해져 있었다. 파, 부추, 마늘, 미역, 톳, 꽁치, 정어리, 다랑어, 복어, 메기, 바지락, 굴, 새꼬막 등이다. 튀김, 유부, 낫토 등은 금지, 참외, 복숭아, 배 등 과일은 보기만 하고 먹지 않도록 정해져 있었다. 만의 하나 식중독, 체함을 우려한 것인 듯하다. 그래서 진수성찬을 먹었지만 맛있는 건 먹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다. 만담 '메구로目黒의 꽁치'처럼 서민이 먹는 갓 구운 꽁치가 부러웠을 것이다. NHK의 대하 드라마 '아츠히메篤姫'에는 쇼군 이에사다家定가 거실의 화로에서 떡을 굽고 콩을 볶으며 즐기는 장면이 있었다.
지방 다이묘가 되면 밥상은 검소하다. 예를 들면, 마츠시로松代 번주藩主 사나다 유키히로真田幸弘는 아침밥, 저녁밥은 1국 2채, 밤참은 1국 1채에 지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아침밥은 밥, 국(건더기는 수세미오이), 가지와 대황의 조림, 앙금을 얹은 두부, 절임, 저녁밥은 밥, 국(두부와 가다랑어), 가지와 양하 조림, 작은 도미 구이와 절임, 밤참은 밥, 국(동아와 가다랑어), 두부 조림, 절임이다.
도쿠가와 막부는 사농공상의 신분제를 정하고 각각의 분한(신분)에 응하는 생활을 하도록 강요했다. 다이묘에 대해서도 본상 요리의 품목수를 경쟁적으로 향응하는 걸 금하고, 로우츄우老中를 초빙하는 연회석에서도 요리는 3국 5채와 술안주 5품, 1국 이상 영지의 다이묘끼리라면 2국 7채, 그 가신은 2국 5채을 넘지 않도록 정해져 있었다. 이에 따라 오카야마번에서는 중신의 회합은 1국 3채와 술안주 1품, 반가시라番頭와 1000섬 이상의 사무라이는 1국 2채와 술안주 1품, 모노가시라物頭와 500섬 이하의 사무라이는 1국 2채만, 쇼우신小身은 1국 1채라고 상세히 정해져 있었다.
회사원의 월급을 샐러리라고 하는 것은 봉급을 소금으로 지불했던 로마 시대의 흔적인데, 그 시대의 무사 봉급은 연공으로 징수한 쌀로 지급되었다. 상급 무사는 치교우고쿠다카知行石高에 상응하는 연공미를 번에서 받았지만, 하급 무사의 봉록은 1인 1일에 정백미 5홉(연간 약 1.8섬)으로 계산해 10인 봉록미라면 연간 18섬이 쌀가마니로 지급된다. 가족이 부부와 아이 1인이라면 밥쌀은 1일 1되로 충분하기에, 나머지 봉록미를 환금해 14량 2푼, 하루로 치면 256문, 5000엔 정도로 살았던 것이다. 생선과 채소, 된장, 간장, 장작과 숯 등 일용품을 구매하는 것이 고작이었음이 확실하다.
하급 무사의 식사는 어떠했을까? 무사시국武蔵国 오시번忍藩의 하급 무사 오자키 주노스케尾崎隼之助는 매일 식사를 그림일기로 극명하게 기록했다. 그것을 보면, 그의 봉록은 10인 봉록이었기에 평소의 식사는 채소국과 두부, 유부, 뿌리채소, 야채의 조림, 때로는 정어리 말림, 조갯살 등으로 간단히 마치고, 생선과 닭고기, 계란의 요리를 먹는 건 동배의 집에 초대되었을 때나, 또는 요리집에서 술을 마실 때뿐이었다.
4. 농민은 잡곡의 잡탕죽으로 견뎠다
당시의 인구 3000만 명의 90%는 지방의 농민이었다. 에도 막부는 연공미를 징수하기 쉽게 만들기 위해 농민이 쌀을 상식하는 것을 꺼려, 보리나 잡곡에 채소를 섞은 비빔밥을 먹도록 강제한다. 연공미는 흉년이어도 정해진 만큼 거두어야 하기에, 농민은 손아귀에 남는 밥쌀로는 먹고 살지 못해 평소에는 잡곡의 잡탕밥을 먹으며 견디고, 경사스런 날에는 우동과 소면, 경단, 수제비 등을 먹었다. 이에 대해 에도의 마을에서는 사치스런 회식 요리를 즐기는 부유한 상공인이 있어 공동주택의 주민도 흰쌀밥을 먹으며 때로는 초밥이나 튀김, 장어 꼬치구이 등을 즐길 여유가 있었다. 먹는 걸 즐길 수 있는 도시와 먹는 데 어려움을 겪는 지방 농촌의 격차가 커진 시대였다.
<문정연간만록文政年間漫録>에 어느 농부의 생활이 기록되어 있다. 농부와 그 아내는 3000평의 논밭을 농사지어 쌀 20섬, 보리 6섬을 수확하는데, 연공을 납부하면 손에 남는 쌀은 10섬이다. 생활용품을 구매하는 비용을 제하면 부부의 1년분 식량은 쌀 1섬, 보리 3섬6말이 된다. 하루로 치면 쌀 2홉8작, 보리 1되이기에 쌀은 조금이고 보리가 주식이다. 그래도 1인당 2400킬로칼로리 미만을 섭취할 수 있는데, 부식은 밭에서 거둔 무와 채소의 절임이었을 것이다. 흉작이나 자연재해가 일어난 지역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테이메이天明의 기근으로 도호쿠에서만 200만 명의 아사자가 나왔다.
물론 농민이라 해도 부농도 있다면 빈농도 있고, 쌀 이외에 유리한 환금작물을 재배하는 마을도 있기에 하나같이 가난했다고는 할 수 없다. 목화와 채소 씨앗을 재배하는 대농의 집에서는 정월이나 마을 축제, 모내기의 위로 등에 더부살이에게도 찰밥, 떡, 된장국, 정어리나 방어의 조림으로 술을 마셨다.
그런데 에도 중기, 교우호우享保 연간(1718-1736)을 지나자 농민의 생활은 조금 편안해져 계절별 연중행사에는 진수성찬을 차려 신불에 올리고 가족이나 친척들이 모여 축하하는 습관이 생겼다. 쇼야庄屋나 나누시名主 집안의 혼례에는 2번 상이 포함된 본상 요리가 나왔다. 본상에는 1국 3채 정도의 요리인데, 산간의 농촌에서도 도미나 새우, 계란, 어묵 등이 사용되었다. 매일의 식사가 검소하고 변화가 적기 때문에 관혼상제 등 특별한 날에는 평소 먹지 않는 진수성찬을 만들어 즐긴 것이다.
5. 음식점이 번창했던 에도의 마을
일본인이 집 이외에서 식사를 하는, 즉 외식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에도 시대부터이다. 전란이 잦아들고 평안한 나날이 찾아오자, 사람들의 왕래가 활발해져 가정 밖에서 식사를 하는 일이 필요해졌는데, 가도 연변의 여관 이외에는 식사할 수 있는 장소가 없었다. 그래서 막부에 의한 에도의 마을 만들기가 완료되자, 우선 신사 불각의 문 앞에 참배객을 상대로 하여 감주, 떡, 산적 등을 파는 찻집, 차밥과 두부국, 조림을 먹을 수 있는 나라차밥 가게(奈良茶飯屋)가 나타났다. 이어서 에도 중기 교우호우 무렵이 되면, 마을 안에 소바 가게, 초밥집, 간이식당, 선술집이 생겨 메밀국수, 튀김, 초밥, 장어 등을 먹을 수 있는 이동형 포장마차, 또는 거치형 포장마차가 다수 나타났다. 화로에 불을 넣어 가지고 다니며 그 자리에서 굽거나 데워서 손님이 먹게 한 것이다.
상공인의 대부분은 수입이 적은 소상인, 장인, 그날 벌어 사는 행상 등이었기에 하루의 벌이는 400문이면 좋았던 바이다. 이런 사람들을 상대하는 음식 장사는 행상과 포장마차가 주였는데, 점차 가건물 가게와 상설 점포가 늘어났다. 분카文化 8년(1811)에는 에도에 7604채의 음식점이 있고, 그 가운데 생선조림이나 채소 조림 등을 파는 가게가 2500여 채, 우동 가게, 메밀국수 가게가 718채, 장어 꼬치구이 가게가 237채, 초밥집이 217채라고 기록되어 있기에 상공인 63명에 대하여 음식점이 1채 있었다고 계산된다. 외식점이 번성하는 현재에도 외식점은 전국에 57만 채, 주민 220명에 가게 1곳이기에 에도에서는 외식점이 얼마나 번성했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이 정도로 음식점이 번성한 것은 에도에는 독신 남성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된다. 상인 집안의 사환 아이나 견습생, 장인 견습생, 일용직 인부, 하인, 무가의 하인 등의 일을 구하러 지방에서 에도로 나온 젊은이가 많고, 무사라도 에도에서 복무하는 번의 무사는 처자를 영지에 남겨 두었다. 즉, 에도의 인구 2/3는 남성으로, 남성 2명에 하나는 식사를 만들어 줄 배우자가 없었기에, 다 익은 보리밥과 콩조림, 조림을 팔고 다니는 간이식당이나 메밀국수 포장마차는 편리한 존재였다. 밥집에서는 원통형 어묵, 표고버섯, 푸성귀 조림, 생선완자국, 밥과 절임을 100문 정도로 먹을 수 있었다. 행상에서 팔던 먹을거리는 소금, 간장, 된장, 두부, 낫토, 절임, 젓갈, 말린 김 등의 식재료, 엿과 한천 국수, 찹쌀 경단, 흰단술 등의 과자, 심지어 밥, 조림, 회 등 곧바로 먹을 수 있는 부식물도 있었다.
현재 외식점과 포장용 도시락이나 부식물 등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결혼을 하지 않은 젊은이, 배우자를 잃은 고령자 등 독신 세대가 전 세대의 30%를 차지하게 되어, 식사 만들기를 귀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남성 세대가 많았던 에도에서 음식점이 많았던 것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
6. 메밀국수 가게가 4000채나 있었다
에도의 마을에서 가장 수가 많았던 음식점은 메밀국수와 우동 가게이다. 에도가 개발되었을 당초는 상류사회를 흉내내 우동을 먹었는데, 간토우関東, 신슈信州에서 에도로 나온 사람이 많아짐에 따라 메밀국수로 바뀌었다. 메밀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기 때문에 도호쿠나 신슈에서는 자주 먹었다. 그 무렵에는 메밀가루를 뜨거운 물로 반죽해 메밀떡처럼 먹고 있었는데, 칸분寛文 연간에 밀가루를 보충해 반죽한 메밀 반죽을 얇게 펴서 자른 메밀국수를 간장에 미림을 합친 '맑은장국'에 먹게 되면서부터 급속히 인기를 끌었다. 겨울철에는 뜨거운 육수를 끼얹은 메밀국수를 먹었다.
서서 먹는 포장마차뿐만 아니라, 점포를 차린 메밀국수 가게도 있고 술을 마시게 하는 가게도 있었다. 메밀국수 가게의 행등이나 장지문에 '28 소바(二八そば)'라고 적혀 있는 것은 밀가루와 메밀가루의 혼합비율을 나타내든지, 가격이 28, 16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한다. 덴포우天保 연간 로우츄老中 미즈노 타다쿠니水野忠邦의 단속령으로 메밀국수가 15문으로 인하되었을 때에는 '35소바'란 간판을 내걸어 웃음을 샀다는 이야기가 있다. 장국 메밀국수는 1그릇 16문, 현재의 가격으로 하면 320엔이었기에, 간편히 즐길 수 있었다. 오카메 소바, 싯포쿠 소바는 24문, 튀김 소바, 다마고토지 소바는 32문이었다. 가늘고 긴 메밀국수처럼 수명이 연장된다는 염원을 담아 새해맞이 메밀국수를 먹는 습관이 생긴 것도 이 무렵이다. 막부 말기인 만엔万延 원년에는 메밀국수 가게가 에도부 내에 3763채, 참으로 주민 270명당 1곳의 메밀국수 가게가 있었다. 지금은 6000명에 1곳, 전국에 2만 곳이 있다.
일본인이 우동, 메밀국수, 소면 등 면류를 먹게 된 것은 무로마치 시대에 논의 뒷그루로 밀을 재배하게 되고나서이다. 밀과 메밀이 조선반도에서 전래된 것은 옛날 죠몬 시대인데, 본격적으로 재배된 것은 중세 후기부터이다. 나라 시대에는 밀가루를 반죽해 기름으로 튀긴 토우가시唐菓子가 중국에서 전래되어 왔는데, 귀족이나 승려가 점심으로 먹기만 하던 것에서 끝났다. 쌀은 절구질만으로 간단히 탈곡할 수 있기에 밥으로 짓는데, 밀이나 메밀은 단단한 겉껍질을 분쇄해 가루로 내지 않으면 먹을 수 없다. 무로마치 시대가 되어 농촌에 제분용 돌절구가 보급되면서부터 처음으로 우동이나 메밀국수 등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보리, 조, 피에 토란과 채소를 섞은 잡탕죽으로 견디던 당시 농민에게 우동이나 메밀국수는 경사날의 진수성찬이 되었다.
우동의 어원은 당나라에서 전해져 온 혼돈混沌이라고 알려져 왔는데, 혼돈은 오늘날의 완탄雲吞 같은 것으로 우동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무로마치 시대에 명나라에서 전혀져 온 키리멘切麵이 키리무기切麦가 되고, 에도 시대에 우동으로 변한 것 같다. 소면의 선조는 헤이안 시대에 칠석의 참배객에게 팔던 것으로 궁중에서 먹었던 소우멘素麺일 것이다. 밀가루에 소금과 물을 더하여 반죽해 기름을 묻혀 펴는 소우멘이 에도 시대에 소면素麺으로 변한 것 같다. 그런데 당시의 소면은 현재보다 훨씬 긴 것이었기 때문에 후루룩거리느라 애썼던 것 같다.
덧붙여 말하면, 현재도 '면류를 1주에 1회 이상'은 먹는다는 사람이 80%이다. 고령자에게 인기가 있는 건 옛날 그대로 우동과 메밀국수이지만, 젊은 세대는 라멘과 스파게티가 많다. 이들 면류의 1세대당 구입량은 합계하여 연간 13킬로그램 정도이기에, 한 끼분을 100그램이라 하면 130끼가 되어 3일에 1번은 면류를 먹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원료인 밀도 메밀도 국내산은 매우 적어 대부분이 수입되고 있다.
7. 에도 토박이에게 인기인 초밥
초밥은 에도에서 인기였던 먹을거리이다. '회'의 역사는 길어 나라 시대의 발효초밥(熟鮓)에서 시작한다. 나레즈시熟鮓는 생선을 소금과 쌀밥으로 장기간 절여 발효시킨 보존식이었는데, 무로마치 시대에 신맛을 띤 생선과 밥을 함께 먹는 생초밥으로 대체되었다. 그 초밥이 큰 변화를 보인 것은 에도 시대이다. 겐로쿠元禄 무렵 상류사회에서 생선과 밥에 식초를 치고 누름돌을 두어 하룻밤 절이는 '누름초밥(押し鮓)'이 되고, 나아가 발효시키는 대신에 밥에 식초를 섞어 만드는 '빠른초밥(早鮓)'이 생겼다. 오늘날의 '초밥'은 식초밥에 날생선의 토막과 와사비를 합쳐서 움키는 것으로, 분세이文政 연간(1818-1830)에 에도 료우고쿠両国의 요베에与兵衛가 고안했다고 이야기된다. 눈앞에서 움키어 주고, 재빨리 먹을 수 있는 초밥은 성질 급한 에도 토박이에게 큰 인기였다. 맥도날드사의 햄버거에도 이긴 에도의 패스트푸드였다.
자주 사용된 초밥 생선은 전어, 뱅어, 참새우, 붕장어, 대합, 계란말이 등인데, 냉장고가 없는 시대였기에 모두 날 것은 아니고 식초로 절이고, 데치고, 또는 삶아서 썼다. 초밥에는 쌀식초가 아니라 술지게미를 원료로 해 만든 값싼 지게미초를 사용해서 생선에 발그스름하게 물이 들었다. 현재의 2배 정도인 큰 초밥이 하나에 4문이나 8문에 팔렸다. 초밥을 손가락으로 집어서 한 입에 먹을 수 있는 작은 크기가 된 것은 메이지 이후의 일이다. 초밥용 생선으로 현재 가장 인기가 있는 참치는 기름기가 많아 싫어해 붉은살을 간장에 담가 두었다가 사용했다. 현재, 회전초밥집에서 인기 있는 연어알, 성게알의 군함말이는 전쟁 이후 생긴 초밥이다.
풍속화에 묘사되어 있는 초밥 포장마차를 보면 만들어놓은 초밥이 상자에 담겨 진열되어 있다. 포장마차의 초밥은 상공인이나 장인이 서서 먹는 것으로 무사의 먹을거리는 아니었지만, 인기가 높아지면서 1관이 50문, 선물로 사용되는 이중 초밥통이 3량이라는 고급스런 초밥집도 나타났다. 이 풍습은 메이지가 되어서도 남아, 다이쇼 시대까지 도쿄의 교바시京橋, 니혼바시日本橋 근처의 유명한 초밥집은 거의 서서 먹는 포장마차였던 것 같다.
유부에 양념밥을 넣은 유부초밥(稲荷寿司)이 고안된 것은 덴포우天保 연간으로, 빨간 도리이鳥居를 그린 행등을 걸고서 팔았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 식초밥에 가늘게 썬 생선, 달짝지근하게 조린 언두부나 표고버섯, 당근과 계란 지단 등을 흩뿌린 5종초밥(五目寿司)이나 회덮밥(散らし寿司), 또는 이들 재료를 속에 넣고 만 김말이는 잔치날의 행사식으로 전국 각지에서 발달했다. 오늘날에는 오카야마현의 마츠리즈시祭りずし, 야마구치의 이와쿠니즈시岩国ずし, 미에현 시마志摩 지방의 테코네즈시手こねずし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쇼와 30년 무렵까지는 고급스런 먹을거리였던 초밥은 '회전초밥'의 등장으로 단숨에 대중화되었다. 회전초밥의 제1호점은 1958년 오오사카에서 개업한 겐로쿠 스시元禄寿司인데, 그 뒤 회전초밥집은 전국에 퍼져 매출은 약 5000억 엔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근에는 아이 손님에게 인기 있는 햄버거, 비프 스테이크, 샐러드 등 서양 재료를 사용한 초밥도 있다.
초밥은 해외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일본식으로 "SUSHI" 가게가 5만 개나 있는 것 같다. 30년 정도 전에 미국에서 게살과 아보카도를 김과 식초밥으로 안에 넣고 만 캘리포니아롤이 초밥 붐을 일으켰는데, 최근 유행하고 있는 건 연어, 새우, 고등어 등을 나란히 만 레인보우 롤이다. 그러나 김 대신 채소 페이퍼나 햄으로 감싼 초밥, 나아가서는 소스를 친 초밥, 기름으로 튀긴 초밥 등 외국인 주방장이 만든 창작 SUSHI에는 일본인의 감각으로는 더 이상 초밥이라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8. 장어와 튀김은 상공인의 미식 요리
삼복 무렵 소의 날에 장어를 먹는 습관은 에도 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특히 스미다강隅田川에서 잡힌 장어는 '에도마에江戸前'라고 부르며 인기가 있었다. 장어는 고대부터 통채로 꼬치로 찔러 구운 것을 먹어서, 그 모양이 부들의 이삭과 닮아 카바야키蒲焼라고 불렀던 것 같다. 나라 시대의 시인 오토모노 야카모치大伴家持가 친구에게 여름 타는 데 약이 된다고 권한 것은 이것인 듯하다.
통채로 구워 산초된장을 발랐던 장어 꼬치구이가 인기를 얻은 건 장어의 몸을 갈라서 평평하게 꼬치를 찔러 구워 양념간장과 미림을 쓰게 되면서부터이다. 포장마차에서 팔았던 장어 꼬치구이는 1개 16문이었는데, 요리찻집에서 먹으면 1접시 200문, 4000엔이었다. 장어를 가르는 데 상류사회에서는 배쪽부터 따서 그대로 굽고 양념간장을 끼얹어 굽는데, 에도에서는 등쪽으로 갈라 그대로 구운 뒤 쪄서 여분의 기름을 빼고나서 굽는다. 장어 꼬치구이와 밥을 함께 먹는 장어밥, 현재의 장어덮밥은 장어 꼬치구이가 식지 않도록 갓 지은 밥에 얹어서 극장으로 배달시킨 것이 기원이다. 한 그릇 64문의 장어밥에는 잡아 가르는 젓가락(현재의 나무젓가락)을 곁들이는 것이 정해져 있었다. 일본 독자의 나무젓가락이 이 무렵부터 쓰였던 것이다.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등에서는 장어를 토막내서 삶든지, 스튜로 먹는데, 맛있지는 않다. 일본인은 세계에서 가장 장어를 좋아해, 15년 정도 전에는 연간 11만 톤, 1인당으로 치면 3마리나 4마리를 먹었지만, 장어가 희귀해져 비싸졌기에 반감했다. 과거 장어 꼬치구이는 전문점에서 먹는 진수성찬이었는데, 최근에는 수입 장어를 사용한 장어 꼬치구이나 장어덮밥을 슈퍼나 편의점에서 사는 일이 많다.
장어와 나란히 인기가 있던 것은 튀김이다. 에도의 마을에 튀김을 파는 포장마차가 나타난 것은 텐메이天明 연간(1781-1789)이다. 화재가 많았던 에도의 마을에서는 튀김 냄비에서 불이 붙어 화재가 날까 두려워 실내에서 튀김을 튀기는 일이 금지되었다. 유럽인이 전한 템포라Tempora는 생선 그대로 튀긴 것인 듯한데, 에도 시대가 되어 밀가루 옷을 입혀 튀기는 현재의 튀김으로 변했다.
튀김은 일정식에는 드문 기름 요리로, 생선과 채소의 수분이 고온의 기름 속에서 증발해 빠져나가 감칠맛이 농축되어 맛있어진다. 튀김유에는 당시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된 유채 기름이나 참기름을 쓰고, 먹기 쉽도록 보리새우, 조개관자, 붕장어 등을 꼬치에 꿰어 튀겨 1개에 4문 정도로 팔았다. 우엉이나 연근, 참마 등 채소는 사찰 튀김이라 불렀다. 초밥, 장어, 거기에 튀김은 이처럼 포장마차의 먹을거리로 등장한 역사가 있어서 지금도 본격적인 회식 요리에는 쓰지 않으며, 각각의 전문점에서 먹는 일이 많다.
서구에서는 일본의 튀김 같이 다량의 튀김유를 쓰는 튀김 요리는 드물다. 생선에 밀가루 옷을 두껍게 입혀 튀기는 프리터fritter는 서양 튀김 요리인데, 빵가루를 묻혀 바삭하게 튀기는 굴 튀김이나 새우 튀김은 일본인이 고안한 것이다.
9. 취향을 담은 도시락 문화
에도 시대까지는 마을이나 가도에 식사를 할 수 있는 가게가 없었기에, 멀리 외출할 때는 반드시 도시락을 가지고 가야했다. 옛날에는 구운 쌀이나 쌀을 쪄 말린 밥, 또는 주먹밥과 절임, 된장 등을 대나무의 껍질, 볏짚 꾸러미 등에 싸서 가지고 나갔다. 그것을 도시락이라 부르게 된 것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로, 도시락(弁当)이란 당장의 일을 보는 편리한 것이란 의미이다. 접이식 상자에 가마니 모양으로 칸막이한 밥과 생선 간장구이나 계란말이, 어묵, 콩조림 등을 자질구레하게 담은 도시락을 막간 도시락(幕の内弁当)이라 부른 것은 극장의 막간에 먹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된다. 에도 시대의 상공인의 최대 즐거움은 극장 구경이었는데, 국장은 이른 아침에 막이 열려 해질 때에 종연하기에 관객은 도중에 배가 고파진다. 그래서 니폰바시日本橋 요시쵸芳町의 '만구'가 막간 도시락을 1인분 100문에 팔기 시작한 바, 관람석에서 먹을 수 있었기에 대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나물 채취나 꽃놀이 등에도 계란말이나 어묵 등의 진수성찬을 담은 찬합과 술을 싸들고 갔다. 요리를 담은 찬합, 요리를 나누어 담을 작은 그릇, 술병, 잔 등을 압축적으로 정리한 찬합에는 아름다운 금과 은 무늬를 놓는 등 취향을 담았다. 에도의 꽃놀이 명소는 스미다강의 강둑, 아스카야마飛鳥山, 고텐야마御殿山 등이다. 고전 만담 <공동주택의 꽃놀이(長屋の花見)>는 가난한 공동주택의 주민이 어묵 대신 무와 계란말이 대신 단무지, 거기에 희석한 반차番茶를 술 대신 들고 꽃놀이를 즐긴다는 패러디 만담이다.
에도성에서 일하는 여러 다이묘와 숙직 사무라이 등은 도시락을 싸서 지참했다. 시대가 바뀌어 메이지, 다이쇼 시대가 되면 직장인이나 초등학생, 중고등학생이 도시락을 싸서 직장과 학교에 다녔다. 허리에 도시락 꾸러미를 매달고 다녔기에 직장인이나 하급관리를 '허리 도시락(腰弁)'이라고도 불렀다. 반찬은 소금절임 연어과 김 조림 등이 많고, 전쟁 때는 밥 한가운데 매실장아찌를 놓은 일장기 도시락이었다.
도시락은 본래 집에서 준비하는 것으로 가정 식사의 연장이었는데, 행선지에서 도시락을 사게 된 시작은 역 도시락이다. 역 도시락의 제1호는 메이지 18년(1885), 도호쿠선東北線인 우츠노미야역宇都宮駅에서 팔기 시작했다. 매실장아찌를 넣은 주먹밥 2개와 단무지를 대나무 껍질에 싼 것이 5전이었다. 신에츠선信越線 요카와역横川駅의 명물 역 도시락 '산마루의 솥밥(峠の釜めし)'을 팔기 시작한 것은 1958년이다. 열차의 창을 열고 판매원을 불러 역 도시락을 사는 것은 여행의 즐거움이었는데, 신칸센이나 특급이 늘어서 정차 시간이 짧아지자 그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은 공항에서 팔고 있는 도시락을 공항 도시락이라 부르고 있다.
전국에는 약 300종류의 도시락이 있는데, 무슨 이유인지 그 대부분은 밥에 현지의 특산의 해물이나 소고기, 채소 등을 곁들인 일정식 계통이다. 예를 들면, 하코다테역函館駅의 청어 도시락(鰊みがき弁当), 아키타역秋田駅의 도룩묵 식초밥(はたはた酢飯), 치바역千葉駅의 대합구이덮밥(焼きはま丼), 마츠사카역松阪駅의 고기전골덮밥(すき焼き弁当), 고치역高知駅의 가다랑어 다짐구이(かつおたたき弁当), 오구라역小倉駅의 오구라 카시오밥(小倉かしわ飯) 등이다. 도쿄역에는 전국에서 170종류의 역 도시락을 취합한 역 도시락 가게가 있어서 하루에 2만 개의 역 도시락을 파는데, 그 대부분은 여행에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직장이나 집에 가지고 돌아가 먹고 있다. 해마다 도쿄 신쥬쿠의 백화점에서 열리는 전국 유명 역 도시락 대회에는 200종류 이상의 역 도시락이 모인다. 그외에 급식 도시락, 택배 도시락, 포장용 도시락, 편의점 도시락 등이 바쁜 샐러리맨, 식사 준비가 귀찮은 독신 고령자 등에게 유용하다.
에도의 꽃구경 도시락, 극장 도시락부터 현대의 역 도시락이나 포장용 도시락에 이르기까지 여러 궁리를 담은 도시락은 일본의 독특한 식문화라고 이야기해도 좋다. 해외여행에서 제공되는 런치박스는 빵에 햄과 치즈, 팩에 담긴 쥬스라 밋밋하다.
10. 생선을 회로 만드는 요리 문화
일본인이 생선을 좋아하는 건 국토의 주위가 바다로 둘러싸여 사계절 내내 신선한 어패류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특히 생선을 회로 만들어 먹는 것은 일본의 독특한 식문화이다.
나라, 헤이안 시대에는 생선을 토막낸 회에 소금이나 식초를 찍어 먹었는데, 가마쿠라 시대에 식초로 무친 회로 변했다. 그런데 에도 시대가 되어서 간장이 보급되자 생선을 먹는 방식이 바뀌었다. 그때까지 날로, 또는 토막회로 만들어 먹었던 것이 간장에 먹는 회로 바뀐 것이다. 가늘게 채친 무, 땅두릅, 양하, 오이나 생김, 차조기 순, 여뀌 싹 등의 양념과 함께 늘어놓고, 간 와사비와 간장에 먹는 '사시미'는 일본 요리를 대표하는 요리가 되었다. 회는 소재 그 자체의 맛을 살려 맛보는 궁극의 일정식이라 할 수 있다. 일본 요리는 베고 삶다(割烹)라고도 하는데, 회는 '베다, 벤 것'을, 국물은 '삶다, 삶은 것'을 대표하는 요리이다. 그러니까 회와 국물을 먹으면 그 요리점의 격과 요리사의 실력을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생선의 고기를 얇게 써는 건 옛날에는 토막회라고 말했는데, 무로마치 시대에 자른다는 단어를 기피하여 우치미打ち身 또는 사시미刺身라고 부르게 되었다. 회의 어원은 생선의 토막에 그 지느러미나 꼬리를 장식으로 꽂은 것인 듯하다. 간사이 지방에서는 생선을 자른 것을 '만들다(つくる)'라고 말했기에 '오츠쿠리お造り'라고도 한다. 회로 만드는 생선도 간토우에서는 다랑어, 가다랑어 등 붉은살의 생선, 간사이에서는 도미, 삼치, 광어 등 흰살의 생선이 많다. 새우나 오징어를 회로 만드는 것은 최근이 되어서부터로, 에도 시대에는 식중독을 우려해 생식하지 않았다.
회의 써는 방법에는 생선에 따라 차이가 있어, 다랑어나 가다랑어 등의 붉은살 생선은 두껍고 평평하게 썰고, 도미나 넙치는 얇고 어슷하게 썬다. 복어나 넙치의 살은 탄력이 있고 쫄깃하기에 먹기 쉽도록 접시가 투명하게 보일 정도로 얇게 써는 방식으로 한다. 그외에 네모나게 썰기, 가늘게 썰기, 머리와 꼬리를 함께 장식하기, 찬물에 씻어 꼬독꼬독하게 만들기, 살짝 다지기, 생선 껍질을 그을려 찬물에 식히기, 다시마에 싸기 등의 궁리도 담는다. 이처럼 생선살의 특성을 살리도록 토막내는 것은 섬세한 식감을 즐기는 일본 요리만이 가능하다. 회는 고추냉이 간장으로 먹는 것이 일반적인데, 어종에 따라서 생강 간장, 겨자 간장, 무 간 것, 초된장, 겨자초된장 등에 먹어도 맛있다.
에도에서는 앞바다의 신선한 생선을 구할 수 있어 회 요리가 발달했다. 마을마다 회를 파는 포장마차와 행상이 있어 사람들은 지참한 접시에 회를 담아 먹었다. 이것이 모둠회의 시초라고 한다. 도미나 넙치의 회는 고추냉이 간장으로 먹는데, 다랑어와 가다랑어 등은 무 간 것과 간장, 또는 겨자 간장에 먹었다. 현대인이 즐기는 다랑어는 지방이 많은 하치 생선으로 천대받았지만 간장 절임으로 만든 붉은살은 인기가 있었다.
구미에서는 회처럼 여러 생선을 날로 먹는 습관은 없었는데, 최근에는 일본 요리가 해외에서 유행해 회가 대표적인 일본 요리로 해외의 요리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이탈리아 요리의 까르파쵸는 원래 소고기를 얇게 썰어 사용하는데, 최근에는 다랑어나 연어의 까르파쵸도 드물지 않다. 하와이의 포키는 다랑어나 문어 토막을 소금과 간장에 절여 기름이나 향신 채소로 무친 요리인데, 일본 이민자가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11. 요리책 붐이 일어났다
에도 시대 말기, 분카와 분세이 무렵이 되자 요리 만들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늘었기에 다수의 요리책이 간행되었다. 그중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두부백진豆腐百珍>이다. 에도의 마을에서는 두부집이 1000채나 있었다고 할 정도로 두부는 서민의 반찬부터 고급 요리에까지 긴요하게 사용되었다. 당시에도 300종류의 두부 요리법이 있었다고 하는데, <두부백진>에는 그 가운데 100종류의 요리법을 모아 놓았다. 냉두부, 구운 두부, 유부, 두부산적 등은 현재도 먹고 있는데, 생소한 요리도 있다. 예를 들면, 폭신폭신 두부(뭉갠 두부에 물에 푼 달걀을 섞고, 끓인 육수에 부어 넣음), 볶은 두부(부순 두부에 간장, 파, 무 간 것을 더해 기름을 두른 냄비에 볶음), 한천 두부(두부를 한천으로 감싸서 차갑게 만들고, 농축 겨자와 초간장에 먹음) 등이 있다.
두부백진의 평판이 좋았기에 <달걀백진玉子百珍> <고구마백진甘藷百珍> <곤약백진こんにゃく百珍>이나 밥 백진에 상당하는 <명반부류名飯部類> 등이 차례로 출판되었다. 닭고기와 계란을 에도 시대가 되기까지 먹지 않았기 때문인데, <만보요리비밀상万宝料理秘密箱>, 별칭 <달걀백진>에는 리큐달걀利休玉子(간 깨에 물에 녹인 계란을 더해 찜), 송풍달걀松風玉子(살짝 구운 계란에 작은 씨앗을 뿌림), 시우달걀時雨玉子(물에 녹인 계란에 게살을 섞어 찜), 달걀미꾸라지(미꾸라지 계란국), 달걀 조개구이(전복, 새우, 표고 등을 조개껍질에 넣어 계란국을 만듦) 등 여러 달걀 요리가 소개되어 있다.
일정식에는 밥 요리가 많다. 명반부류에는 보통 밥, 콩밥, 채소밥, 물들인 밥, 생선밥, 닭고기밥, 잡탕죽, 죽, 초밥으로 나누어 무려 148종류의 쌀밥 요리가 소개되어 있다. 채소 소금절임, 쌀겨절임, 차조기 절임, 지게미 절임, 된장 절임 등 장아찌 만드는 법을 알려주는 <지물조지남漬物早指南>에는 "쌀겨 된장절임은 매일, 뒤섞는 것을 잊지 말 것"이라고 그럴듯하게 써 있다.
기타 <도미백진비밀상鯛百珍秘密箱> <무요리비전초大根料理秘伝抄> <요리조지남料理早指南> <요리이로하식칼料理いろは包丁> 등에서 보듯이, 두부나 계란에 한하지 않고 도미, 무 등의 식재료 하나를 거론하더라도, 날로 먹거나 조리거나 굽거나 무치거나 절임을 하는 등 여러 가지 요리법이 있다. 또한 '굽다'라는 조리법에도 소금구이, 간장구이, 양념구이, 꼬치구이, 쪄서 굽기, 감싸서 굽기 등 다채로운 조리법이 있고, 양념이나 국물 끼얹는 것에도 여러 궁리가 있다. 이처럼 하나의 식재료를 여러 가지로 살린 조리법을 궁리하는 것은 일본 요리의 우수한 바이다.
활자나 사진이 었던 시대이기에 문자도 삽화도 모두 손으로 쓰고, 목판 인쇄의 요리책이 180여 권이나 출판된 것은 에도의 민중이 요리를 만드는 일, 진귀한 요리를 시도해 보는 일에 얼마나 열심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달걀백진>에는 삶은 계란의 노른자와 흰자를 바꾸어 넣는 '노른자 바꿈(黄味返し)'이란 희한한 요리법이 소개되어 있으며, <무요리비전초>에는 둥글게 썬 무가 올림픽 상징처럼 연결되는 '바퀴 교차 무(輪違い大根)'를 깎아 만드는 마술 같은 방법이 소개되어 있는 등 당시의 요리책은 실용 일변도가 아니라 유희의 요소도 다루고 있다. 현재는 요리잡지나 요리책이 서점에 범람하고 있는데, 그 대부분은 식재료나 조리료의 분량을 상세히 가르쳐주기만 하고, 요리의 이름도 '소고기와 피망을 볶아 조림' 등이라 즉물적이어서 운치가 없다.
12. 두부 요리는 인기 반찬
일정식에는 두부나 유부, 두툼한 두부튀김, 두부 완자, 언두부 등을 자주 사용한다. 중국에서 두부가 고안된 것은 당나라 시대인 것 같은데, 일본에서 두부를 사찰 요리에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무로마치 시대의 일이다. 에도의 마을에는 1000채가 넘는 두부 가게가 있었던 것 같고, 현재보다 4배나 큰 무명 두부가 1모, 600문, 약 1200엔에 팔리고 있어 일상의 반찬에 사용되고 있었다.
두부는 그 자체로 담백한 맛이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여러 양념이 가능하기 때문에, 요정의 회식 요리에도, 가정의 반찬에도 유용하다. 여름에는 토막낸 두부에 가쓰오부시포와 간장을 뿌리는 냉두부, 겨울에는 냄비에 넣는 탕두부가 맛있다. 두부를 으깨어 생선이나 채소와 무치면 흰두부 무침, 꼬치에 꽂아 굽고 된장을 바르면 두부산적이 된다. 에도 시대에는 두부 요리가 유행해, 당시의 요리책 <두부백진>에는 100종류나 되는 두부 요리가 소개되어 있다. 인기가 있었던 것은 간수를 넣어 굳기 시작한 부드러운 두부에 뜨거운 칡 전분을 뿌린 담설淡雪 두부나 순두부였다. 현재 도쿄의 우에노에 남아 있는 '사사노유키笹の雪'는 에도 시대부터 계속되고 있는 두부 요리집으로, 고풍스러운 앙금을 뿌린 두부나 튀긴 두부를 즐길 수 있다.
전골 요리로 인기 있는 오뎅은 두부의 산적이 뿌리이다. 에도의 찻집에서 꼬치에 꿰어 구운 두부에 된장을 바른 요리가 팔렸는데, 그 모양이 모내기 축제에서 전악田楽 법사法師가 흰 하의에 갈색 옷을 입고 죽마에 타서 춤추는 모습과 닮았기에 덴가쿠田楽라고 부르게 되었다. 겐로쿠元禄 무렵이 되자 두부 외에 곤약, 토란 등도 추가되고, 뒤이어 꼬치를 빼고 두부, 곤약, 무, 토란, 원통형 어묵 등을 간장 육수로 졸인 조림 산적, 즉 오늘날의 오뎅으로 변했다. 조림 오뎅은 에도에서 태어난 요리이기에 간사이에서는 간토우 카시키関東炊き라고 불렀는데, 여러 재료를 추가해 관동 대지진 이후의 도쿄에 역진출했다.
덧붙여서, 오뎅에 쓰이는 곤약은 구약蒟蒻의 땅속줄기 가루에 물과 석회를 섞어서 반죽해 땅속줄기의 다당류 글루코만난을 굳힌 것이다. 구약 땅속줄기가 전래된 것은 아스카 시대인 듯한데, 날로는 먹을 수 없는 구약 땅속줄기를 이처럼 가공해 먹은 것은 가마쿠라, 무로마치 시대인 것 같다. 곤약은 체내에서 소화할 수 없기 때문에 영양은 되지 않지만, 정장 효과가 있기에 국, 조림, 무침, 회 등으로 널리 먹게 된 것을 에도 시대의 요리서 <구약백진蒟蒻百珍>에서 엿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해학 연가로 유명한 마츠오 바쇼松尾芭蕉는 곤약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곤약은 일본 이외에 중국, 조선, 미얀마에서도 먹고 있는데, 서구인은 악마의 혀라고 하며 싫어한다. 아침이나 저녁에 들려 왔던 두부가게의 나팔 소리를 그리워하며 떠올리는 것은 전쟁 이전에 태어난 고령자뿐일 것이다. 지금은 슈퍼에서 팩에 포장된 두부를 사는 것이 보통이 되어 가족 경영의 두부 가게는 최성기에서 1/5로 줄었다고 한다. 그러나 두부의 수요는 그 정도로 감소하지는 않아, 1인당 연간 30모 정도의 두부를 먹고 있다. 가정에서 자주 만드는 두부 요리를 질문해 보면, 냉두부, 된장국, 탕두부, 튀긴 두부, 가끔은 두부산적, 두부 찬푸루, 마파두부 등이다. 구미에서는 건강한 식재료로 카레, 스테이크, 디저트 등에 사용되고 있다.
13. 에도에서 유행한 달걀 요리
일본인이 계란을 먹게 된 것은 에도 시대부터이다. 일본에서는 나라 시대부터 생물을 살생하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소와 말은 물론이고 닭과 그 알도 먹는 걸 주저했다. 드디어 에도 시대가 되어 닭고기와 계란을 요리에 사용하게 되었다.
에도 시대의 <달걀백진>이란 요리책에는 리큐달걀, 송풍달걀, 시우달걀, 달걀미꾸라지, 달걀 조개구이 등의 계란 요리가 소개되어 있다. 계란국이란 생소한 요리도 있었다. 달걀에 설탕을 섞고 거품이 날 때까지 잘 휘젓고, 냄비에 끓여 놓은 육수에 한꺼번에 부어 뚜껑을 덮어 찌는 것이다. 삶은 계란의 흰자와 노른자를 안과 밖으로 바꾸어 놓는 '노른자 바꾼 달걀'은 재현하기가 곤란한 수수께끼의 계란 요리라고 했는데, 얼마 전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노란자가 많은 유정란을 3일 동안 부화기에서 따뜻하게 한 뒤 격렬하게 흔들어 노른자막을 터뜨려 노른자와 수용성 흰자를 뒤섞은 다음, 굴리면서 삶으면 무거운 진한 흰자가 중심으로 모여 굳는다는 것이다. 교토 가이세키로 알려진 교토 난젠지 문 앞의 노포 요정 '효테이瓢亭'에는 명물 요리 '효테이 달걀'이 있다. 계란을 반숙으로 익혀 둥굴게 썰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요리이지만, 막부 말기에 가게를 열었던 무렵에는 계란의 흰자를 굳히고 노른자를 걸쭉하게 반숙으로 익히는 것을 진귀하게 여긴 것 같다.
에도 시대의 계란은 1개 10문, 200엔이나 하는 고가였는데, 몸보신하고 간단히 요리할 수 있기에 유용했을 것 같다. 날계란이나 삶은 계란을 먹으면 정력에 좋다고 해서 요시와라吉原 유곽遊郭의 손님이나 유녀遊女에게 인기가 있어, 살짝 익힌 계란을 1개 20문에 파는 달걀 행상이 있었다. 바쁜 직장인들은 갓 지은 밥에 달걀을 풀고 간장을 뿌려 먹었다. 계란 섞은 밥은 에도 시대부터 먹은 즉석요리이다.
계란이 영양가 있는 식재료로 요긴해진 것은 메이지가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전쟁 이전은 상자에 담은 계란이 병문안 물품으로 사용되고, 전쟁 이전 태어난 저자 등은 계란잡탕죽 등을 먹는 건 병이 걸렸을 때 정도이고, 소풍 도시락에 계란말이가 들어가 있다면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전쟁 이후는 브로일러 품종의 대규모 양계가 시작되어 계란의 가격이 싸지면서 푸짐히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의 식재료는 자급률이 낮지만 계란만은 자급률이 95%를 유지하고, 가격도 수십 년 동안 오르지 않았다.
현대의 일본인은 매일 1개, 1년에 330개의 계란을 먹는 세계 제2위의 계란 선호국이다. 계란 섞은 밥, 계란덮밥, 닭고기계란덮밥, 돈카츠덮밥, 계란 푼 메밀국수, 계란국 등 터트린 계란을 부담없이 요리에 사용하고 있다. 가정에서 만들 수 있는 계란 요리의 베스트 5는 일본식과 서양식이 섞여 있어 계란말이, 계란 섞은 밥, 육수계란말이, 오믈렛, 오므라이스이다. 덧붙여서, 오물렛은 프랑스 요리이지만, 오믈렛으로 케챱밥을 감싸는 오므라이스는 일본에서 고안된 계란 요리이다. 그건 그렇고, 우리들은 계란 섞은 밥, 고기전골 등으로 날달걀을 아무렇지 않게 먹지만, 외국인은 그렇지 않다. 계란 하나만 해도 동서양의 식습관이 다르다.
14. 실낫토(糸引き納豆)의 기원
실낫토를 자주 먹게 된 것은 에도 시대이다. 에도의 아침은 낫토 판다는 소리로 밝는다고 했다. 한 봉지 4문으로 구매한 낫토는 간장을 뿌려 먹든지, 또는 식칼로 두드려 된장국에 넣어 낫토국으로 만든다.
실낫토가 일본에서 태어난 것은 무로마치 시대인 것 같은데, 확실하지 않다. 대두를 삶아 볏짚으로 감싸 1-2일 발효시키면 볏짚에 붙어 있던 낫토균이 번식해 실 같은 점액이 있는 낫토가 된다. 딱딱한 대두를 부드럽게 하고 소화히기 좋게 만들어 먹는 지혜이다. 독특한 악취의 성분은 테트라메틸피라진Tetramethylpyrazine인데, 간장이나 절임과 유사한 냄새라서 일본인에게는 위화감이 없다. 끈적끈적한 실낫토는 외국인들이 예외없이 싫어한다. 낫토, 마, 곤약, 순채, 날달걀 등 촉촉하고 독특한 식감을 즐기는 건 일본인 뿐으로, 구미인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인 듯하다.
아시아의 벼농사 지대에는 대두를 발효시킨 음식이 많으며, 나라 시대에 중국이나 조선에서 전래되어 온 '된장(豉)'는 콩을 누룩과 소금으로 발효시킨 것이다. 가마쿠라 시대에 사원에서 만들던 절낫토(寺納豆)가 그것으로, 지금도 교토의 다이토쿠지大徳寺와 덴류지天竜寺 등에서 계속 만들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낫토라 부르는 '템페Tempeh'는 삶은 대두를 템페균으로 발효시킨 것이다. 끈적끈적하고 냄새는 없으며, 으깨면 고기 같은 식감이 되고, 튀기면 돈카츠 느낌이 난다.
낫토는 간장을 부어 휘젓고, 기호에 따라 겨자, 다진 파, 가츠오부시포, 계란 등을 더해 흰쌀밥에 얹어 먹으면 맛있다. 간 낫토, 낫토 볶음밥, 낫토말이, 튀김 등으로 해도 좋다. 낫토는 단백질, 식이섬유가 많고 비타민Ke를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다. 점질물에 함유된 나토키나제Nattokinase는 혈전 용해 작용이 있어 뇌혈전 등의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
전쟁 전의 가정에서 아침밥이라고 하면 밥에 된장국과 낫토, 절임으로 정해져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도 않게 되었다. 또한 낫토를 먹는 지역은 간토우, 도호쿠 지방에 한정되어 있었는데, 전쟁 이후에는 간사이와 서일본에도 퍼져 소비량은 전국 평균 1인당 연간 40팩 정도이다.
부수적으로, 대두는 익으면 딱딱해지기 때문에 덜 익어 부드러운 풋콩을 먹는 습관이 나라 시대부터 있었다. 에도의 번화가에서는 여름이 되면 풋콩 장수가 "풋콩이요, 풋콩"이라고 소리 높여 팔고 다녔다. 근래에는 맥주집에서 풋콩을 안주로 맥주를 마시는 것이 여름날의 풍경이다. 풋콩은 중국, 대만 등에서도 먹지만 소금에 데쳐서 먹는 것은 일본뿐이다. 구미에서는 건강한 일정식 재료로 인기가 있어, 스낵으로 먹고, 또는 올리브유나 치즈 등을 섞어 전채로 만들고 있다.
15. 매일 빠지지 않았던 절임
일정식에는 절임이 함께 나온다. 원래 절임은 채소나 과일을 소금에 절여 보존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헤이안 시대에 편집된 <연희식延喜式>에는 참외, 가지, 무 등의 채소, 냉이, 고사리, 엉겅퀴, 미나리, 머위 등의 산나물 절임이 기재되어 있다. 소금절임뿐만 아니라 된장절임, 쌀겨절임도 이미 만들고 있었다. 가마쿠라 시대부터 무로마치 시대에 걸쳐 사찰 요리, 본상 요리, 가이세키 요리가 발달함에 따라 절임은 요리의 입가심을 하는 「향물(香の物)」로서 식단에 빠질 수 없는 한 품목이 되었다. 절임을 '신코新香' 혹은 '코우코우こうこう'라고 부르는 것도 그에 따른 것이다. 신코에 오お 자를 붙인 것이 '오신코'이다.
에도에서는 흰쌀을 일상적으로 먹었기 때문에, 다량으로 나오는 쌀겨를 사용해 쌀겨절임이 생겼다. 쌀겨와 소금, 물을 잘 반죽한 밑절미(糠床)가 유산균으로 발효되면, 적당한 신맛과 상쾌한 향을 내며 비타민도 풍부해진다. 오이나 가지의 쌀겨된장절임은 가정에서 절였으나, 말린 무를 소금과 쌀겨로 몇 개월 절이는 단무지 절임은 근교의 농가가 절인 것을 구입했다. 단무지 절임은 1개가 메밀국수 한 그릇과 똑같은 16푼이었다. 무를 쌀누룩으로 절이는 달큰한 벳타라 절임은 에비수 제삿날 전날 밤에 니혼바시, 오오덴마쵸大伝馬町 근처에서 열리는 벳타라 시장에서 팔기 시작한 것이 정례가 되었다. 새끼줄로 묶은 무 잠깐절임(浅漬け)을 젊은이들이 여성의 기모노에 갖다 대는 시늉을 하며 "가만 있어, 가만 있어(べったら、べったら)" 하고 장난치며 걸어다녔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매실장아찌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먹었지만, 적차조기를 사용해 붉게 착색한 것은 에도 시대에 시작된 일이다.
옛날에 절임은 가정에서 절이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시판되는 것을 사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소비자의 건강 지향이 강하기 때문에 염분이 많은 매실장아찌, 단무지 절임, 배추 절임 등은 싫어하는데, 염분이 적은 하룻밤 절임이나 잠깐절임은 신선한 야채의 풍미가 남아 있기 때문에 일본풍 샐러드라는 감각으로 먹고 있는 것 같다. 최근에는 빵이 널리 퍼지면서 밥을 먹는 일이 줄었기 때문에 절임이 나설 일이 줄어들어, 600종류는 있다고 하는 절임의 연간 출하량은 20년 전보다 30만 톤이나 감소해 80만 톤이 되었다. 잠깐절임, 조미액 절임이나 김치가 증가해 전체 생산량의 40%를 차지하고, 일찍이 절임의 대표격이었던 단무지 절임은 10% 정도로 줄었다. 조미액 절임의 '오이 큐짱'은 연간 700만 봉지나 팔린 히트 상품이다. 배추를 고추, 마늘 등을 넣어 절이는 김치는 조선반도의 절임인데, 일본에서는 발효시키지 않고 조미액에 절인 것이 많다. 서양식 초절임 피클, 올리브 소금절임, 발효 양배추 등의 수요는 아직은 적다.
16. 차를 마시는 습관이 퍼지다
일본인이 차를 마시게 된 것은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 송나라에서 유학한 선승 에이사이栄西가 차나무의 씨앗을 가지고 돌아와 재배해, <끽다양생기喫茶養生記>를 저술해 말차의 제조법이나 차를 마시는 효용을 소개하면서부터이다. 말차는 쪄서 말린 찻잎의 가루에 뜨거운 물을 붓고 차선茶筅으로 휘젓고 마신다.
말차를 끓이는 작법이 무라타 주코村田珠光, 타케노 죠우오우武野紹鷗, 센노 리큐千利休 등에 의해 극에 달해 일본 독자의 '다도(茶の湯)'로 바뀐 것은 무로마치 시대 말기의 일이다. 그리고 다도에서 중히 여기는 일생에 한 번뿐인 인연(一期一会), 타인을 온화하고 조신하게 대하고 다구는 조심스럽고 깨끗하게 다룬다(和敬清寂)는 정신성은 찻자리에서 제공하는 가이세키 요리에 도입되어 후세의 요리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건 이미 언급했다.
에도 시대가 되면 차의 재배가 전국으로 퍼져, 잎차를 경쟁적으로 마시는 습관이 서민에게도 퍼졌다. 일본에서 마시고 있는 녹차는 말차抹茶(가루차)와 전차煎茶(달인차)로 구별되는데, 말차는 주로 다도의 자리에서 마시고, 일상에는 전차와 호지차焙じ茶(볶은차)를 간편하게 마신다. 차의 산지로 역사 있는 교토의 우지宇治에서는 겐분元文 3년(1738)에 찻잎을 쪄서 손으로 비비는 청차青茶(현재의 전차)를 고안해, 막부 말기가 되면 차밭에 차양을 치고 부드러운 어린잎만 따서 고급스러운 전차인 옥로玉露를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부유한 상공인층에서는 말차를 끓이는 다도, 전차를 끓이는 전다도를 즐겼는데, 일반 서민은 찻잎을 가마솥에 끓여서 간편히 마시게 되었다. 길모퉁이에는 휴대용 차솥에 차를 끓여 1잔 1전에 파는 차 행상이 나타나고, 신사 불각의 문 앞에는 차를 끓여서 1잔 4푼이나 8푼의 찻값으로 참배객을 상대하는 길가의 찻집이 번성했다. 카사모리 이나리笠森稲荷 경내에 있던 길가 찻집의 차 시중 아가씨 오센お仙은 풍속화에도 그려졌던 인기인이었다. 식후에 반차나 호우지차를 마시며 잠깐 쉬고, 일하는 틈틈이 과자, 절임 등을 차에 곁들이며 잠깐 쉬는 습관이 민간에 퍼졌던 것은 에도 시대의 일이다.
일본을 방문했던 외국인은 일본인이 녹차를 빈번히 마시는 것,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면 녹차가 몇 잔이든 무료로 서비스되는 것에 놀랐다고 한다. 차를 음용하는 습관은 영국과 유럽 여러 나라에도 있지만, 그건 찻잎을 발효시킨 홍차에 설탕이나 레몬 조각을 넣어 마시는 것으로, 발효시키지 않은 녹차를 마시는 건 일본뿐이다. 녹차의 쓴맛과 떫음은 일본인이 좋아하는 맛으로, 머위와 땅두릅 등의 산나물, 은어나 꽁치 내장 등을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전쟁 이전까지의 일본에는 녹차 외에는 이렇다 할 음료가 없었는데, 2차대전 이후에는 구미처럼 커피, 홍차, 사이다, 콜라, 주스 등을 마시게 되었다. 그에 따라 가정에서 차를 끓이는 일은 예전보다 줄었지만, 대신 캔이나 페트병에 담긴 녹차 음료를 500밀리리터 병으로 환산해 1인당 연간 400병이나 마시게 되었다. 찻주전자의 찻잎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마실 수 있는 녹차를 페트병에 담더라도 구매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되었지만, 차를 첨가물 없이 천연 음료로 가지고 다니며 외출해서 간편히 마실 수 있다는 편리함이 있는 것이다. 가정에서 소비되는 찻잎의 양이 반감되어, 찻주전자의 사용법을 모르는 젊은 세대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17. 세계에 비길 데 없는 우아한 일본 과자(和菓子)
일본인만이 가능한 섬세한 감성이나 기호를 살린 일본 과자는 대부분 에도 시대에 탄생한 것이다. 과자는 옛날에는 쿠와시くわし(과자, 과일)로서, 밤이나 호도, 곶감 등의 건과일(木菓子)과 복숭아, 감, 오이 등의 과일(水菓子)의 구별이 있었다. 견당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당과자唐菓子는 밀가루나 쌀가루를 반죽해 기름에 튀긴 쿠키 같은 것이었다. 중국에는 밀가루나 쌀가루를 반죽해 만드는 떡은 있는데, 찐쌀을 절구로 찧는 떡은 없다. 무로마치 시대의 공경 야마시나山科 가문의 일기를 보면, 쑥떡과 팥떡, 꽃잎떡, 밤떡 등을 과자로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로마치 시대가 되어 차 마시는 습관이 퍼지자, 차와 함께 즐기는 달콤한 과자가 필요해졌다. 센리큐千利休가 다도의 자리에서 자주 사용한 '후노야키ふのやき'는 밀가루를 풀어 얇게 굽고, 된장을 발라 동그랗게 만든 과자이다. 지금은 일본 과자의 대명사인 만주나 양갱의 원형은 중국의 딤섬에 있다. 고기소을 감싼 만두가 팥 앙금을 감싼 다과자茶菓子로 바뀌고, 양의 간을 닮은 양간떡羊肝餅이 팥 앙금과 쌀가루를 섞은 찐과자た菓로 변신한 것 같다. 또한 카스테라, 볼로bolo, 카르멜로, 알페로아alfeloa, 콩페이토kompeito 등은 유럽인들이 전한 설탕과자, 달걀과자이다. 당시 유럽 배나 중국 배로 수입되던 고가의 설탕은 대부분 이들 달콤한 과자를 만드는 데 사용되어 남만과자, 설탕만주, 설탕떡 등으로 불리며 귀중히 여겨졌다.
에도 시대가 되어 백설탕을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게 되자, 쌀가루와 칡가루, 팥 앙금, 흰팥 앙금 등을 재료로 일본 과자 만들기가 갑자기 활발해졌다. 교토에서는 다도의 자리에서 사용하는 고급 교토 과자가 발달하고, 양갱도 팥 앙금과 설탕을 한천으로 반죽해 합치는 반죽양갱(練羊羹)으로 바뀌었다. 반죽양갱은 1개에 200푼, 남만과자와 카스테라는 450푼이나 되는 값비싼 것이었다. 에도에서는 서민적인 넓적과자(金つば), 막대튀김과자(かりんとう), 간장 경단(みたらし団子), 전병 등이 고안되었다. 밀가루로 만든 피로 팥 앙금을 감싸 칼의 코등이 모양으로 구운 넓적과자는 쌀가루 피로 감싼 교토의 은 코등이(銀つば)를 바꾼 것이다. 둥근 찹쌀떡(大福餅)은 갓 구워낸 뜨거운 것이 1개에 4 푼, 막대튀김과자는 한 봉지에 10푼이었다. 막대튀김과자는 한자로 쓰면 '화림당花林糖'으로, 근원을 따지자면 견당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와 전한 당과자이다. 덴포우天保 연간에 에도 후카가와深川의 야마구치야山口屋 요시베이吉兵衛가 밀가루에 계란, 설탕을 넣고 반죽해 기름으로 튀겨 흑설탕을 뿌린 '카린토(막대튀김과자)'를 팔기 시작했다. 에도 막부 말기인 덴포우 무렵에는 200종류가 넘는 생과자, 말린과자(干菓子), 사탕이 생겼기 때문에, 오늘날 일본 과자의 대부분은 에도 시대에 고안된 것이라고 말해도 좋다.
오늘날 어느 관광지에서나 가장 많은 토산품은 포장된 현지의 만주와 양갱 등인데, 외국에는 이런 풍습이 없으며 양과자는 전문점에서 낱개로 판매된다. 덧붙여서, 일본 최초의 양과자점은 도쿄 천도 직후, 궁중의 양과자를 만들라고 명령을 받은 대선직大膳職의 무라카미 미츠야스村上光保가 수업을 받아 메이지 7년에 개업한 무라카미 개신당開新堂이다. 일본의 양과자는 구미의 그것과 비교하면 단맛을 절제하고 있기 때문에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과자는 예로부터 신불에 바치는 제물로, 계절의 행사나 인생의 통과의례를 과자로 축하해 온 역사가 있다. 설음식 요리에는 금단金団, 다과용 양갱(口取り羊羹), 3월 3일 행사(ひな祭り)에는 아레라모치(雛あられ), 마름떡(菱餅), 단오 명절에는 떡갈나무잎떡(柏餅), 띠잎말이떡(ちまき), 대보름날에는 달구경경단(月見団子), 신생아 한달맞이 참배의 홍백만쥬, 아이의 7.5.3세 축하일의 천세사탕(千歳飴), 결혼 피로의 시집가기 만쥬 등이다. 떡갈나무잎은 새순이 돋을 때까지 잎이 떨어지지 않는 떡갈나무를 닮아 집안의 계승을 기원하고, 도야지떡은 멧돼지처럼 새끼가 많아지는 걸 기원하며 먹었다.
일본 과자의 특징은 계절감 있고 아름다운 것이 많다는 점이다. 특히 찻자리에서 사용하는 팥소로 감싼 과자나 마른과자에는 봄의 어린 풀이나 벚꽃, 여름의 청류清流나 어린 은어, 가을의 국화나 단풍, 겨울의 살얼음이나 설경 등을 이미지로 해서 색, 모양, 무늬를 정돈한 것이 많다. 쑥떡이나 벚꽃떡, 떡갈나무잎떡처럼 계절의 어린 잎 자체를 쓴 것도 있다. 섬세한 계절감을 가진 일본인이 만들어낸 이러한 일본 과자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유례가 없는 과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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