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거리와 계절
달력에 따른 약속
먹을거리는 계절에 강하게 의존한다. 특히 식재료는 그러하다. 뚜렷한 사계절이 있는 일본 열도에서 태어난 일정식이 계절을 중요시하는 것도 이 점이 강하게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정식이 사계절을 중요시하는 건 단순히 자연만의 문제는 아니다.
계절이라고 하면 춘하추동 외에 다섯 명절이나 24절기(뒤에 기술) 등을 떠올린다. 다섯 명절이라고 하면 다섯 개의 명절을 말하는 것이 보통으로, 년의 최초의 명절인 인일人日의 명절은 1월 7일이다. 그리고 다음이 3월 3월의 복숭아 명절, 또 다음이 5월 5일의 단오 명절, 7월 7일의 칠석, 9월 9일의 중양 명절로 이어진다. 다만 이것은 원래 중국의 사상에 기반한 것으로, 일본 풍토에 얼마나 맞는지는 의문이다.
24절기는 천체의 운행에 기반한 중국의 역법인데, 지금은 완전히 일본 문화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에 대해 조금 상세히 설명해 보자(아래 그림). 이른바 천체는 천구라고 부루는 가상의 구면 위를 일주운동하는데, 일주운동의 회전축(즉 지구의 자전축을 무한의 저편으로 늘린 점)을 '하늘의 북극(남극)'이라 한다. 그리고 그 양극을 위도 90도로 하여(적위라고 함. 다만 북위, 남위라고는 표기하지 않고, 적위 플러스 몇 도, 마이너스 몇 도 같이 표현), 0도에 해당하는 선을 '하늘의 적도'라고 한다.
한편 천구 위의 태양이 지나는 길을 황도라고 한다. 지구의 공전에 맞추어서 태양은 천구 위를 1년에 걸쳐 서쪽에서 동쪽으로 움직인다. 이 궤적이 황도이다. 황도와 적도는 약 23.5도 각도로 교차하고 있다. 그리고 하늘의 적도와 황도의 두 교점을 춘분점, 추분점이라 한다. 태양이 하늘의 남반구에서 적도를 횡단하는 점이 춘분점이고, 반대쪽이 추분점이다. 춘분점을 황경 0도, 추분점을 황경 180도라고 하고, 황도를 24등분한 점을 24절기라고 부른다. 각 24절기를 그 황경과 함께 기록한 것이 아래의 표이다. 주요한 바로는 황경 90도의 점이 하지, 270도의 점이 동지이다.
달력에는 '춘분'이라든지 '하지' 등이라 적혀 있는데, 춘분이나 하지를 포함한 24절기는 태양이 황도 위의 어느 위치(황경)를 통과하는 순간을 말하는 것으로, 예를 들면 '춘분'은 그 순간이 몇 월 며칠에 있는지를 말한다. 천문학적으로는 춘분, 추분이라는 순간은 존재하지만, 춘분이나 추분이란 정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두 가지 분, 두 가지 지의 네 개의 절기 사이에 있는 것이 입춘(동지와 춘분 사이), 입하, 입추, 입동이다. 네 개의 '입'을 묶어서 4립이라 한다. 입춘부터 입하의 사이가 봄. 여름, 가을, 겨울도 똑같이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입'의 전날이 절분이다. 계절을 나누는 날이란 의미이다. 지금은 절분이라 하면 입춘의 전날을 가리키는데, 일찍이는 4립 전날에 모두 절분이 있었다.
24절기는 원래는 중국의 사상을 기초로 한 체계로, 각각의 명칭은 계절을 반영한 것이 많다. 중국에서는 이것을 농사력으로 사용해 왔던 듯하다. 지금 일본에서는 그리고레오스력에 기초한 태양력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있어서 현실감이 없는 바도 있다. 예를 들면, 입추는 통상 8월 8일 무렵인데, 실제 1년에 가장 더워지는 것은 그 뒤의 일이다.
이 계절의 체계를 철저하게 추구하려는 요리인이 있다. 교토에는 그와 같은 요리인이 많은데, 교토시의 남동부 카와바타쇼우멘川端正面에 있는 '도우라쿠道楽'의 주인 이이다 사토시飯田知史 씨도 그 한 사람으로, <72후를 맛보는 교토 요리(七十二候を味わう京料理)>(光村推古書院, 2020)이란 책을 저술한 연구자이기도 하다. 덧붙여, '카와바타쇼우멘'은 카모강을 따라 남북으로 뻗은 카와바타 도로와 쇼우멘 도로가 교차하는 곳이다. 그리고 쇼우멘 도로는 교토에 있던 대불 앞에서부터 서쪽으로 뻗은 도로였기에 이런 이름이 있다.
72후는 24절기의 절기와 절기의 사이를 초후, 중후, 말후의 세 가지로 등분하여 만든다. 24절기와 72후의 기와 후를 조합한 것이 기후이다. 구체적으로는, 예를 들면 입춘(태양 황경 315도)부터 다음 절계인 우수(황경 330도)의 약 15일 사이를 3개로 나누어, 각각 '동풍해동東風解凍(동풍이 불어 얼음을 녹인다) '황앵현환黄鶯睍睆(휘파람새가 운다)' '어상빙魚上氷(물고기가 얼음을 나오다)' 같은 짧은 문장으로 표현한다.
이이다 씨의 요리는 그 하나하나의 후를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72후이기 때문에 연중 72개의 메뉴가 실려 있다. 예를 들면, '국화 피다(菊花開)'의 후에서는 아래 그림 같이 가득 담겨 있다. 물론 사용하는 식재료가 이 후의 시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각각의 메뉴에는 그 배경에 그 식재료 나름 행사 나름에 얽힌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교토의 특질 가운데 하나는 뭐니뭐니 해도 수도가 세워져 있던 바에 있다. 지금 같이 인터넷으로 정보가 난무하는 시대와는 달리 정보는 일부 특권계급의 것이었다. 그리고 온갖 정보가 왕의 거처였던 수도에 모였다. 즉 교토는 8세기 말부터 이미 정보 수집, 발신의 거점이었던 것이다. 당연하게도, 중국의 문화와 제도 등도 우선은 교토에 왔다. 24절기의 체계도 우선은 교토의 귀족사회에 들어와, 이윽고 일반 서민에게도 도달해 오래 뿌리를 내려 왔을 것이다.
계절과 계절감
그렇지만 계절감은 이처럼 체계화된 계절과는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만약, 체계화된 계절을 톱다운의 계절감이라 한다면, 살림의 계절감은 바텀업의 계절감이다. 바텀업의 계절감은 오늘날 말하는 생물 계절이나, 그에 기반한 농사에 반영된 계절이다.
교토는 분지에 입지하여, 그 때문에 여름이 덥고 겨울이 추운, 사계절의 구별이 뚜렷한 고장이다. 식재료나 먹는 방식의 궁리에 사계절이 반영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식재료에는 제철이 있어서, 그것이 교토인의 계절 감각을 지탱해 왔다. 그런데 현대에는, 특히 식물성 식재료에서는 '제철'의 감각이 약해져 가고 있다.
어패류에서 제철은 아직 건재하다. 양식 기술은 진보되어 왔기에, 일부 어종은 제철을 보기 어려워져 가고 있지만 대부분의 종에서 어패류는 아직 천연자원이다. 동물들의 라이프 사이클은 옛날과 변함이 없고, 결과적으로 제철이 남아 있는 것이다. 앞에서 다룬 옥돔과 갯장어는 바로 그 대표이다.
예전에는 고기나 젖에도 제철이 있었다. 북부 유럽에서는 가을에 돼지 등에게 도토리 등을 대량으로 먹여서 살을 찌운 다음 식용으로 했다. 그렇다고 해도 한번에 다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소세지나 베이컨 등의 보존식이 발달했다. 젖은 출산 직후의 암컷 개체가 분비하는 것이기에, 임신과 출산의 시기가 젖의 시기이다. 가축의 생식 관리를 행해 왔던 유목민들은 젖의 제철을 알고 있었다. 현대가 되어 가축의 먹이가 농산물이 되면서 번식의 제철이 사라지고, 그래서 고기와 젖에서 제철이 사라진 것이다.
음식에 제철이 있는 것이 당연했던 시대의 사람들은 제철을 없애기 위해 몹시 고생했다. 20세기 후반까지 채소의 촉성 재배라는 말이 유행했다. 겨울에도 따뜻한 미야자키현이나 고치현에서 재배되는, 일찍 수확하는 채소가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가 더 빨리라는 요구에 떠밀려 하우스 재배가 보급되었다. 당시 초등학교 저학년의 사회과에서는 각종 채소의 계절을 답하게 하는 단원이 있었는데, 아마 지금은 이 질문은 그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토마토나 오이 등의 채소는 연중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옛날처럼 토마토는 여름 채소라는 감각은 이미 그 의미를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사람들이 제철을 없애려고 궁리한, 또 하나의 음식이 보존식이다. 이전은 지금과는 달리 음식을 언제나 윤택하게 구할 없었다. 무언가를 조금 많이 구했을 때에는 그 여분을 보존으로 돌리는 기술이 발달했다. 윤택하게 구할 수 있는 먹을거리를 어떻게든 보존하고 싶다고 하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그 대표가 절임이었다. 절임이라고 하면 지금은 식물성의 식재료를 중심으로 하는데, 과거에는 훨씬 더 다양한 식재료가 사용되고 있었다. 또한, 조림 같은 열을 가한 보존식도 있어서, 애용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식재료를 보존한다고 하는 건, 제철을 넘어 그 식재료를 먹는다는 걸 의미한다. 제철을 고집하는 건 풍요로운 음식에 혜택을 받는 현대만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덧붙여, 절임에 대해서는 뒤에 기술하겠다. 그리고 대부분의 식재료로부터 제철을 빼앗은 현대, 사람들은 오히려 제철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계절감을 연출하다
계절감을 표현하는 데 쓰인 것은 식재료만이 아니다. 가게의 장식도 또한 계절감을 표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요리집 등에서는 가게 입구에 무심히 장식한 꽃 한 송이, 명절 등의 행사 모습을 담은 식기나 도구, 좀 더 세련된 기술이 되면 계절이나 행사를 표현한 족자 등 생활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계절 연출에 사용되어 왔다. 단골 손님들은 작년에 이곳을 함께 찾은 사람들을 떠올리거나, 올해는 작년보다 단풍이 늦다고 생각하며 식사를 하면서 기억에 덧칠을 해 나아간다.
계절감 연출에 자주 사용되어 온 것은 식물의 잎일까? 특히 일정식은 식물의 잎을 자주 사용하는 식문화라고 할 수 있다. 벚나무떡처럼 그 계절을 떠올리게 하는 잎으로 감싼 과자도 많다. 벚나무떡의 잎은 작년 늦봄에 딴 잎을 소금절임을 해 둔 것인데, 벚나무떡을 먹는 사람은 그것으로 봄을 느낀다. 떡갈나무떡의 떡갈나무, 치마키粽의 조릿대나 갈대도 새잎의 향을 즐기는 것이다. 연잎이나 감잎을 접시 대신 사용하는 일도 많다. 꾸지나무의 잎은 중국의 고사를 따라서 칠석을 연출한다.
분지 주변부의 산기슭에 입지한 가게 등에서는 산천초목이 그대로 연출 역할을 수행했다. 뒷산의 단풍나무들, 한 그루의 늙은 산벚나무, 계곡을 건너는 휘파람새의 울음소리, 또는 밖을 흐르는 개천의 물소리. 그러한 것을 차경借景으로, 가게는 음식을 연출해 왔다. 나의 마음에 드는 건 다카세강에 면한 '쇼우조우안招猩庵'이란 가게로, 카운터석에서는 강가의 왕벚나무가 잘 보인다. 벚꽃이 개화할 무렵의 며칠, 이 자리에서 조망하는 벚꽃은 다시 없을 것이다. 특히 밤의 벚꽃 경관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꽃봉오리 무렵은 꽃봉오리 무렵대로, 만개 전후의 2-3일 동안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리고 꽃비는 꽃비대로 점주 마츠모토 다카시松本隆司 씨의 연출이 계획된다. 요리는 물론 봄의 요리. 도미 토막을 쪄서 말려 빻은 찹쌀가루와 소금절임 벚잎으로 감싸서 찐 도미 찹쌀가루 찜, 제철 전의 죽순과 미역을 조화시킨 '죽순 조림' 등이 나온다.
장마 전, 공기가 촉촉하게 습기를 머금은 계절에는 다카세강의 수면을 반딧불이가 날아다닌다. 100만 도시의 도심을 흐르는 강에서 반딧불이를 불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흔치 않다. 방의 전기를 끄고 반딧불이의 연무를 보면서 맏물 갯장어나 여름 채소를 맛보는 것이다.
시죠가라스마에 가까운, 시내의 중심부에 있는 '키노미木乃婦'의 주인 다카하시 타쿠지高橋拓児 씨는 박사 학위를 가진 이색적인 요리인인데, 도시 안이란 특성을 활용한 장식이란 면에서도 이채롭다. 포렴(暖簾)을 통과하면 자갈을 깐 통로가 현관까지 이어진다. 현관을 지나면 도시의 소음을 잊게 되는 조용한 공간이 펼쳐진다. 방의 안쪽에는 안뜰보다 더 작은 화분이 있고, 그 계절만의 꽃이 자연스럽게 장소를 연출하고 있다. 자신이 도심에 있다는 걸 잊어 버린다. 덧붙여서 다카하시 씨는 최근에는 일정식과 와인의 궁합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소뮬리에 자격을 따서 일정식과 와인의 조합을 연출하고 있다. 일정식 요리집도 여기까지 와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계절과 연대의식
사람은 왜 다른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인류사를 풀어 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벌써 몇 십만 년 전부터 인류는 기껏해야 몇 가족으로 구성된 몇 십 명 단위의 집단으로 살고 있었다. 식량은 그 단위에서 조달하고 있었다. 즉, 집단은 그 자기 책임으로 구성원 전원이 먹을 것 모두를 충당하고 있었다. 물론, 집단 안에는 분업 시스템이 있었을 것이다. 분업은 최소의 단위인 가족 안에도 있었다. 그리고 분업이 있었기 때문에 공식共食, 즉 함께 먹는 습관이 길러졌을 것이다.
똑같은 구성원인 음식을 오랫동안 함께 먹으면서 관련된 사람들 사이에는 무엇을, 언제 어디에서 먹었는지 등 먹는 것과 관련된 공통의 기억이 생긴다. '언제'에 관련된 기억은 몇 월 며칠이란 달력 위의 시기만이 아니다. '지금은 없는 친구와 했던 최후의 식사 날' '처음으로 데이트한 날' '작년의 생일' 등 지극히 개인적인 기념일이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물론 '3년 전 기온 마츠리의 전야제 날' 등이라는 정말이지 교토다운 기념일도 있다.
사별하는, 아이가 독립하는 등으로 함께 먹기의 관계가 끊어진 뒤에도 먹기의 기억은 계속 살아있다. 개인적으로 죄송하지만, 할머니와 어머니는 난키南紀 출신으로, 정월이 되면 꽁치 초밥을 만들었다. 초밥에 쓰이는 꽁치는 기름기가 빠진 앙상한 꽁치여야 했다. 난키의 바다에는 정월 전에는 가을이 지나며 살이 빠진 꽁치가 난바다 쪽으로 남하해 와서, 이 용도에 딱이었다. 이 마른 꽁치를 몇 십 마리나 사 와서는 등을 따고 등뼈와 내장을 제거하고 얇은 껍질을 벗겨 소금을 친 뒤, 반나절 정도 식초에 절여서 통채로 초밥을 만든다. 그 식초도 쌀식초와 유자의 착즙을 섞은 것이다. 지금도 꽁치 초밥을 발견하면 사서 먹어 보는데, 그때마다 할머니의 맛을 떠올린다.
'어디'도 '언제'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교토는 이 의미에서도 매우 유리한 토지의 하나이다. 역사적인 건물이 곳곳에 있어 화제가 될 일이 없다. 가게의 이름이나 그 연월일을 기억하지 못해도 그 장소나 랜드마크가 기억의 양성에 일조하는 것이다.
'이봐, 덴류우지天龍寺 옆의 장어집에서 먹었던 장어 오이 무침이 맛있지 않았어?"
"아아, 그 대나무 골목 근처의 장어집 말야."
등이라는 식으로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누군가가 이러한 맛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같은 체험을 한 사람끼리 만나서 그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공감이 생긴다. 맛있음이란 이와 같은 기억의 축적에 의해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느 지역의 전통식이, 우여곡절을 거쳐 지금에 전해지는 그 그늘에도 공감이 있다. 교토로 말하면, '바다의 교토'인 단고丹後의 전통식으로 알려진 '구운 고등어초밥'도 그 하나였다. 구운 고등어초밥은 일종의 상자 초밥의 치라시 초밥인데, 다른 것과 다른 건 고등어를 구워 으깬 살을 쓰는 점에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특징은 이것을 전문으로 내는 전문점이 10곳 이상이나 있는 한편으로, 대부분의 집이 직접 만든 구운 고등어초밥을 만든다는 점에 있다. 단고의 사람들에게 구운 고등어초밥은 '무언가의 시기'에 먹는 행사식이었다. '언제 어디에서 누구와 먹었는지'가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억에 새겨진다. 음식을 함께 먹는 것으로 그 화제에 접촉하는 것으로, 동석한 사람들 사이에 일종의 연대감이 생긴다. 여기에서도 맛있음은 연대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억의 축적이 없으면 계절감도, 계절감에 수반한 감회나 공감도 없다. 따라서 사람과 사람을 잇는 연대감도 생기지 않는다. 사회 안에서 가장 강한 연대감으로 맺어져 온 것이 가족일 것인데, 식탁에 둘러앉지 않는 가족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교토의 행사와 음식
음식이 계절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증거로서, 행사식을 들고자 한다. 행사식도 또한, 계절감을 잘 표현한다. 계절감의 배경에 있는 것은 해마다 반복되는 행사와 그 음식이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들어 보겠다.
교토의 정월 떡국은 백된장으로 만든 국물에 둥근떡이나 머리 토란(頭芋), 축하 무(祝ダイコン)를 얇게 썬 것 등이 들어간다. 떡은 굽지 않고 넣는다. 또한 정월 대보름에는 팥죽을 먹는 곳도 있다. 팥죽이란 달콤해 보이지만, 실은 은은하게 짠맛이다.
2월 3일 입춘 전날은 교토에서도 행사가 활발하게 진행된다. 그리고 이때 먹을 수 있는 것이 정어리 소금구이. 머리는 호랑가시나무의 가지에 꽂아서 문간에 둔다. 교토를 포함한 간사이에서 입춘 전날의 음식이라고 하면 최근에는 '은혜로운 방향의 김말이(恵方巻)'가 주목된다. 교토에도 50년 정도 전부터 있었던 듯하다. 굵게 만 김초밥을 자르지 않고 먹는 것이 관습으로, 지금은 완전히 전국구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원래는 간사이가 기원이다.
1년의 절반이 지난 6월 말, 교토의 몇몇 신사에서는 '여름나기 액막이' 행사가 행해진다. 쪼갠 푸른 대나무를 지름 2.5미터 정도의 원형으로 짜 맞추고 띠의 잎으로 감싼 '띠 고리'를 세워, 그것을 통과하면 나머지 반년은 역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 날을 중심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이 '미나즈키水無月'라고 부르는 생과자이다. 직각삼각형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떡 위에 달게 조린 팥을 고르게 발라 올린다.
7월의 교토는 특히 장마가 끝나기 직전 가장 무더운 시기를 맞이한다. 이 달, 교토시의 중심부는 기온 마츠리 일색으로 도배된다. 그리고 기온 마츠리의 음식이라 하면 무엇보다도 '갯장어'이다. 조리법은 다양하다. 데침, 구이, 초밥 등등. 재미있는 건 이 시기, 야사카 신사의 관계자는 신의 문양과 비슷하다고 해서 오이를 먹지 않는다. 이른바 오이 봉함이다. 이것도 또한 행사식이라 할 수 있겠다.
음력 10월(돼지의 달)의 돼지의 날에 먹을 수 있는 것이 '돼지떡'이다. 돼지란 멧돼지를 말한다. 멧돼지가 다산인 것에 영향을 받아 많은 아이를 낳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돼지떡을 먹는다. 원래는 궁정의 습관이었던 듯하다. 돼지의 달 돼지의 날은 가을이 깊어져 불을 사용하기 시작하는 날에 해당해, 차의 세계에서도 화로를 개시하는 날이 된다. 돼지떡은 이날의 주요 과자가 된다.
12월이 되면 여기저기의 사찰에서 무 삶기가 행해져, 참배객에게 대접한다. 상세한 건 앞에서 이야기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교토에는 이러한, 현역의 연중행사가 아직도 몇 가지나 있어, 그에 수반한 행사식이 만들어져 먹을 수 있다. 행사식을 남기고자 생각한다면, 그 행사를 남길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행사를 남기느냐 남기지 않느냐는 교토인들의 마음에 달려 있다.
교토 요리란 무엇인가
교토 요리와 다섯 체계
그럼, 교토의 일정식이라고 하면 역시 '교토 가이세키'라든지 '회식' 등이라 부르는 요리라고 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까? 가이세키와 회식이란 발음이 똑같은 것도 있어서 종종 혼동되지만, '애초'를 생각하면 둘은 구별해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가이세키 요리는 차를 마실 때 나오는 간소한 음식으로, 본래는 소박과 검약의 의도가 담겨 있다. 또한 가이세키의 풀코스는 몇 시간이나 필요하다. 현대의 감각에서는 '교토 가이세키'는 경영의 측면에서는 좀처럼 유지할 수 없다. 아마 이런 것이 관계되어 품목수도 늘려 코스의 시간을 2시간 정도로 단축한 '회식'이 저녁식사로 채용된 것 같다.
'애초 이론'이야 어쨌든, 회식 요리의 특징은 코스 요리인 점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변종은 있으나, 대강의 형태와 나오는 순서는 정해져 있다. 교토 요리라고 할 때, 대부분은 이 회식 요리를 가리키고 있다. 물론 교토 요리는 회식 요리만 있는 게 아니다. 교토에 있으니까 교토 요리인 것이지 무언가 특별한 요리 형식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다만, 인구에 비해 다른 도시보다 요리집의 수가 많은 것과 관광객이나 이전이라면 오사카에 갔을 사업 손님을 '교토 요리'로 대접한다고 할 때의 그 교토 요리의 이름이 딱 들어 맞는 것이다.
그런데, 교토에는 '다섯 체계'라고 부르는, 다섯 가지 요리의 체계가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도 다룬 사찰, 가이세키, 백반, 그 다음에 이 뒤에서 다룰 대향연, 본상의 다섯 가지이다. 백반을 대신해 예식 요리(有職)를 넣는 일도 있다. 교토의 음식 관계자는 다섯 체계를 '교토 고유의 요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교토의 '향토요리'라고나 할까. 다만 이것은 수도의 향토요리이다. 게다가 비일상적인 음식, 즉 '경사'의 음식이란 성격이 강하다. 덧붙여 여기에서는 '경사'는 민속학이 말하는 '경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더욱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그것, 즉 '경사스러운 장' 정도의 의미로 사용한다. 요컨데 교토 요리란 '경사'의 날, 즉 무언가 특별한 날의 격식을 차린 장의 요리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교토 요리의 본질
교토의 회식 요리는 다른 지역의 그것과 어떻게 다를까.
하나는 물에 대한 집착이다. 어느 유명 요리집이 도쿄에 지점을 냈을 때, 요리에 쓰는 물을 교토에서 트럭으로 운송했다고 화제가 되었다. 설마라고 생각해 확인했는데, 정말로 그랬다. 요리인은 이렇게까지 물에 집착한다. 물의 성질은 수소 이온 지수나 경도 등 여러 가지 요소로 결정되는데, 아무튼 교토의 물은 교토 요리에 맞다. 아니, 교토 요리는 교토의 물에 맞추어서 진화해 왔던 것이다.
또 하나는 교토 요리가 고도로 발달한 사람과 사람의 관계성, 즉 오랜 시간에 걸쳐서 배양된 농밀한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성립되어 온 것이다. 즉 교토 요리는 인간 관계 그 자체이다. 물론, 인류의 음식은 교토 요리에 한하지 않고 관계성을 바탕으로 성립되어 있다. 그러니까 음식은 문화인 것이다. 그렇지만 교토 요리는 그중에서도 관계성에 대한 의존도가 특별히 높은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업이라기보다는 인간 관계 그 자체라고 해도 좋다.
교토가 식재료의 측면에서는 풍부한 토지가 아니었다는 것은 거듭해서 기술해 왔다. 교토의 음식은 '다시마와 가다랑어를 조합한 육수'를 비롯해, 일본 각지의 식재료에 힘입은 맞춤 기술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 식재료는 사람이 운반해 온 것이다. 교토는 일찍부터 전국에 연결된 네트워크를 구축해 왔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어느 도시에도 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 규모로 보나 범위로 보나 도쿄가 교토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 모이는 식재료의 풍부함에 대해서 말하자면, 도쿄의 그것은 틀림없이 일본 제일, 그리고 아마도 세계에서도 톱클래스일 것이다. 이 제표로 말하면 교토는 아마, 도쿄의 발 밑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토의 식문화가 일본에서 으뜸가는 식문화인 것은 요정(요리집)의 문화가 깊이 관련되어 있는 듯하다. 요정이 이 농밀한 관계성을 체현하고 있다.
요정에서는 요리 그 자체는 물론이고, 식기나 장식, 나아가서는 정원 등도 중요한 대접의 요소가 된다. 식기만을 살펴보아도, 도기나 자기, 유리, 젓가락을 포함한 목기나 칠기 등이 있다. 최근에는 숟가락 등의 금속기도 사용한다. 물론 이들 각각에 전문업자가 있다. 이들의 손질도 필요하다. 장식이나 정원이 되면, 그 범위는 더욱 넓어진다. 그리고 남주인이나 여주인은 이들 모두에 능통해야 한다.
한편, 이것들의 관련업자에서 보자면 거래처인 요정이 어느 정도의 숫자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단 1채의 요정 떄문에 사업을 계속 전개할 수는 없다. 특히 현대는 그러하다. 어느 정도의 수요가 없으면 공급을 할 수 없어지는 건 어느 세계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각각의 요소가 오랜 역사를 가지고 기술을 집적해 온 점에 교토가 교토인 이유가 있다. 요정과 이들 주변의 업자의 관계는 세대를 너어서 이어져 왔다. 기온에서 240년에 걸쳐서 고등어초밥을 만들어 온 '이즈우いづう'의 8대째 당주 사사키 쇼우고佐々木勝悟 씨에 의하면, 가게에서 쓰는 식초는 대대로 시내의 식초 제조소인 이츠키斎 식초가게의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농밀한 관계가 요정의 요리를 지탱해 온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성이 2차대전 전부터 경우에 따라서는 메이지 유신의 전부터 계속되어 왔고, 게다가 서로 얼굴을 보는 농밀한 관계라는 점에 특징이 있다. 이것이 고유의 식문화를 형성해 왔다.
물론 교토의 도시에도 요정의 문화 등과 관계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점심은 컵라면으로 저녁은 편의점 도시락이라는 젊은 세대는 확실히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요정의 식문화는 마치 물이 스며 나오듯이 계속 침투하고 있다.
공가의 요리, 무가의 요리
공가의 요리
교토 식문화의 근저에 있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1100년 동안에 걸친 '수도의 축적'이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인류는 이 시간의 벽을 초월할 수 없다. 1100여 년의 세월에 걸쳐 수도를 설치해 놓고 있었다는 것은 왕과 왕을 정점으로 한 공가 사회가 그곳에 있었단 것을 의미한다. 그럼 왕을 정점으로 하는 공가 사회의 음식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공가 사회의 음식이라 해도 남겨진 기록은 매우 한정되어 있다. 그 때문에 그들의 음식은 수수께끼의 장막에 싸여 있다. 약간의 기록을 바탕으로, 당시의 음식을 복원한 사람이 있다. 사쿄구 오카자키岡崎의 '로쿠세이六盛' 주인인 호리바 히로유키堀場弘之 씨는 기록을 바탕으로 '왕조 요리'를 복원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찐쌀을 수북하게 담은 '고봉' 밥의 주위에 여러 가지 동물성 식재료를 지금의 작은 접시 같은 접시에 일품씩 담은 것이다. 바로 앞에는 이것 또는 작은 접시에 담은 소금, 장 등의 조미료가 놓여 있다. 먹는 사람은 이것을 써서, 직접 조미하여 먹었던 듯하다.
교토에는 이 궁중 음식의 전통을 지금까지 전하는 '예식 요리(有職料理)'라는 말이 있다. 예식이란 말은 예식이나 관직 등을 연구하는 학문(有職故実)의 예식(有職)으로 『세계대백과사전世界大百科事典』에는 "헤이안 시대 이후, 조정의 의식전례를 행하는 경우, 그 근거가 되는 역사적 사실을 고실故実이라 하고, 그 고실에 능통한 것을 유직有職이라 했다"고 한다. 즉 예식 요리란 조정의 의식전례에 관계된 요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예식 요리를 고집스럽게 지금까지 전하는 요리집도 있다. 물론 그것이 100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건 아니다. 아무리 고실이라 하더라도, 당시의 재료를 그대로 구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관례에 따른 메뉴가 지금도 전한다.
니시진의 '만카메로우萬亀楼'는 창업 300년이 되는 노포 요정인데, 요정임과 동시에 주인인 고니시 씨는 이미 기술했듯이 포정식庖丁式의 유파인 '이카마류生間流'의 계승자이기도 하다. 포정식은 먹을거리의 의식으로, 생선이나 새를 소재로 일절 손을 대지 않고 조리용 젓가락과 부엌칼만 사용하는 소정의 방식으로 잘라 나누어 가는 일종의 예식이다. 덧붙여 포정식의 유파는 에도 시대까지는 궁정이나 공가 등을 섬기는 요리인이었는데, 메이지 유신 이후는 연달아 요리집을 개업해 그 식문화를 일반 사회에 퍼뜨렸다.
이 같은 사정은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 요리의 대중화 과정과 매우 비슷하다.
고대에 귀족 사회는 특권 사회였다. 먹을거리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라, 그들은 예를 들면 한여름에 빙수를 구하는 것조차 할 수 있었다. 세이슈우 나곤清少納言의 『마투라노소우시枕草子』 제42단에는 '고상한 것'의 하나로 "얼음을 깎아 달달한 걸 넣고 신식 금속 그릇에 담는다"고 하여, 지금으로 치면 빙수에 달달한 꿀을 뿌린 걸 먹었단 것을 알 수 있다. 여름의 음식이었을 것이다.
덧붙여 공가들의 일상 음식, 서민의 음식이 어떠했는지는 자료가 부족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무가의 요리
중세에 들어와 무사가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자, 무사의 식문화가 등장한다. 그렇다고 해도, 전국 시대의 시작 무렵까지는 전업 군인은 오히려 적었고, 대부분은 평소 밭을 갈면서 만일의 경우에는 무기를 드는 농가 겸업 같은 무사였다. 무로마치 시대, 그 무사들 사회의 정점에 선 막부가 교토에 설치되어, 똑같이 교토에 있어서 왕을 정점으로 하는 귀족 사회의 관계가 늘어났다. 이에 의하여 행사나 관례 등을 받아들인 무가 사회의 요리 체계가 교토에서 생겼다. 그중에서도 다른 무가나 공가들을 대접할 때의 향응의 요리 -향응상(饗応膳)이 발달했다. 이것이 에도 시대가 되어 형식이 정비되고, 더욱 발달을 이룬 것이 본상 요리이다.
향은상의 메뉴를 보고 느끼는 것은 아무튼 양이 많다는 점이다. 이만큼을 혼자서 먹었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물론 향응의 상이기에 지금의 감각으로 말하는 1인분이라 생각할 필요는 없다. 또한 모든 걸 실제로 먹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 양이 많다. 게다가 그것이 지금의 가이세키 요리 같이 일품씩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한 상에 모아서 여러 번 나왔다고 하기에 틀림없이 호기로웠을 것이다. 일찍이 지방의 결혼식 등에서는 큰방에 사람 수대로 상이 쭈욱 즐비했는데, 그러한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사용된 식재료 중에는 학, 꿩, 종다리 등 현대에는 먹는 일이 없는 다양한 동물종의 이름이 보인다. 이들을 참가자 전원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 분량을 준비하는 건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얼만큼의 식재료를 모아서 어느 정도 취향을 충족시켰는지는 주인의 실력이나 손님에 대한 자세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향응은 무가 사회에서 이러한 인간 관계를 반영하는 거울이었다.
본상 요리는 메이지에 들어와 쓰이지 않게 되었는데, 그럼 그것이 현대 교토의 음식과 아무 관련도 없느냐 한다면 결코 그렇지는 않다. 그 본질의 부분은 시대를 넘어서 확실히 지금도 이어지고, 그리고 다음에 기술할 사찰 요리나 가이세키 요리 등 현대 일정식의 기초를 이루어 나갔다.
향응은 무가에게 중요한 행사였다. 무가의 권력 투쟁은 전쟁만이 아니라, 외교와 교섭의 기술을 필요로 했다. 향응은 교섭 상대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어떻게 평가하는지의 포인트가 되는 중요한 이벤트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것이 향응의 상이었다. 국가나 자기 일족의 명운을 거는 만큼 힘이 들어갔다. 그만큼 호사스러운 것도 많고, 그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게다가 메뉴가 세세하게 기재된 것도 많다.
향응은 전국 각지에서 행해졌기에, 향응의 요리를 교토 고유의 식문화라고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렇지만, 대규모 향응이 자주 행해진 것은 역시 교토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었을 것이고, 또한 그 정보가 많이 집적되어 온 것이 교토임도 또한 확실할 것이다.
무가의 사상이 교토의 음식에 영향을 미친 점이 아직 있다. 사찰 요리와 차 마시기가 그것이다. 무가는 가마쿠라 막부의 개막 이래 임제종臨済宗이나 조동종曹洞宗 등 이른바 선종禅宗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그 선종이 발달시킨 것이 사찰 요리의 체계이고, 또한 차 마시기의 체계였다. '자력본원自力本願'이라고도 이야기되는 선종이 질실강건質実剛健을 취지로 하는 무가의 사상과 친화성이 높았단 점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한편 무가의 식문화는 앞에 적은 것처럼 들새나 사슴, 멧돼지 등 야생동물도 즐겨 먹었다. 또한 후지富士의 몰이 사냥을 비롯해 수렵과의 관련도 깊다. 여기에는 군사 훈련의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언뜻 모순적으로 보이는 사찰 요리와 육식의 관련은 어디에 있는 걸까? 다음으로 이것을 생각해 보자.
사찰 요리
선사禅寺와 사찰 요리
일본 열도에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육식을 기피하는 '사찰 요리'로 통하는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이 뿌리를 내려 왔다. 중국의 문서인 <위지 왜인전>에는 "(야마타이국邪馬台国의 사람은) 상중에는 육식을 하지 않는다"라고 있기에, '더러움'이나 또는 음식에 의한 '부정' 또는 '액운'과 비슷한 사고방식이 있었을 것이다. 애니미즘에 뿌리내리고 있던 수행도도, 적어도 수행 기간은 육식을 금했다. 데와出羽 3산의 수행자들은 추분 무렵부터 시작하는 '겨울 봉입峰入(겨울철 수행)' 기간은 사찰 음식만 먹고, 섣달 그믐날부터 새해 첫 새벽에 걸친 수행의 끝에는 청어 초밥을 먹고 정진 마무리를 한다. 현재의 사찰 요리는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는 하나, 더 오래전부터의, 예를 들면 수행도 같은 사상이 짙게 영향을 미쳐 왔다고 봐야 한다.
나라 약사사薬師寺의 승려가 편집한 「일본영이기日本霊異記』에는 나라 시대나 그보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왔다고 생각되는 설화가 모아져 있다. 그중에는 학대받던 동물을 구하는 일로 화를 피했다거나, 좋은 일이 생겼다는 이야기나 반대로 알을 삶아 먹었기 때문에 끔찍한 죽임을 당한 젊은이의 이야기 등이 있다.
불교는 세계에 퍼진 세계 종교 중에서 어느 쪽이냐 하면 음식의 금기가 적은 종교이다. 그러나 '불살생'은 불교의 중요한 교의로, 동물성 식재료의 기피를 받아들이기 쉬운 소지가 여기에 있다.
일본 열도에서는 고대가 끝날 무렵, 재해와 정치적 혼란 등이 거듭하여 사회를 덮쳤다. 그때까지는 특권계급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던 구세의 불교가 신흥 무사나 일반 사람들 사이에도 침투해 나아간다. 특히 중세 초기에는 그때까지 있던 재래 종파에 불만을 가진 승려들이 중국에서 여러 가지 불교를 배워 귀국했던 시대였다. 일본의 젊은 불승들이 익힌 것이 선 사상과 교의였다.
임제종과 조동종도 12세기 말부터 13세기 초반에 중국에서 수입되었다. 임제종은 에이사이栄西가 1191년에 송나라에서 귀국, 1200년에 가마쿠라에 쥬후쿠지寿福寺를, 이어서 1202년에 교토에 겐닌지建仁寺를 개설한 것에서 발단한다. 조동종은 도우겐道元이 1227년에 귀국해 그 뒤 1244년에 다이부츠지大仏寺(이후 에이헤이지永平寺라고 고침)을 개설한 것에서 발단한다. 이들 선종은 그때까지의 '타력본원他力本願'의 불교와는 뜻을 달리하여, 오로지 자신을 닦는 수행에 의해 깨달음을 얻는, 이른바 '자력본원'의 종파이다. 덧붙여서 선종은 나날의 생활, 예를 들면 음식을 수행의 일부로 보았다.
그중에서도 도겐은 음식에 신경을 썼다. 다른 종파가 음식 등 일상 생활에 무게를 두지 않았던 것에 대하여, 도겐은 음식, 그것도 조리부터 먹는 것까지 음식에 관계되는 행실 모두를 수행이라 생각했다. 그 가르침은 <전좌교훈典座敎訓>에 집약되어 있다. '전좌'란 선종 사원에 있는 조리 담당 승려. 음식에 신경을 쓴 선의 가르침은 이런 데에서도 드러난다. <전자교훈>은 현대어 번역도 나와 있기에 상세한 건 그것을 보길 바라며, 거기에는 동물의 살생을 굳게 금하는 것 외에 요리의 마음가짐, 먹을 때의 마음가짐 등이 매우 세세하게 적혀 있다. 사회도 시대도 다른 지금, 그 가르침을 그대로 지키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지만, 지금 일본 사찰 요리의 또 하나의 원점이 여기에 있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유행이었나, 사찰 요리
임제종, 조동종 등 선종 사원 등에서는 개조의 기일 법요(개산기開山忌 등이라고 함)에 내오는 사찰 요리의 메뉴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있다. 사망 후 몇 년이란 개산 법요의 때에는 똑같은 메뉴의 요리가 지금도 나와, 참배자 전원에게 대접된다. 이것을 '재현'한 것이 교토에서 오래 이어온 사찰 요리 가게 '야오지矢尾治'의 우에다 노리마사上田倫正 씨이다. 야오지에서는 몇몇 선사의 개산기의 요리를 내고 있다. 그리고 그 메뉴는 최초의 법요 때 이래 바뀌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쓰는 식재료 전부가 지금과 똑같은지는 알 수 없다. 예를 들면 동일한 '무'라도 지금의 무와 당시의 무가 똑같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데, 전통이란 그러한 것이라 본다.
자, 사찰 요리가 일본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로 돌아가자. 사찰 요리의 시초가 수행도나 그것과 습합된 불교에 있었던 것은 그렇다 치고, 그럼 그것이 널리 일본 사회에 전개된 것은 어째서일까? 우에다 노리마사 씨는 사찰 요리를 퍼뜨린 힘은 불교의 교의 등보다는 오히려 일종의 유행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원동력이 된 것이 '흉내 요리'였던 것이 아닐까 한다. '흉내'란 모방하는 것. 즉 '흉내 요리'는 채소나 두부 등을 써서 고기나 생선으로 비유하는 요리를 말한다. 이 비유가 일본 문화의 정수를 담은 것으로, 이것이 에도 시대에 대유행했다고 한다.
또 하나, <교토를 싫어하는 사람>의 이노우에 쇼이치井上章一 씨도 사찰 요리에 대해서 "호텔을 운영하는 절의 레스토랑 부문의 아이디어 상품"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무로마치 시대의 후기가 되면 각지의 다이묘들은 교토를 목적지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 지금의 호텔 같은 숙박 시설은 절 이외에는 없었다. 무장들은 시중의 큰 절을 빌려 그곳에 숙박했다. 오다 노부나가도 최후는 혼노지本能寺에서 맞이한다. 그중에서도 선사는 정원의 정비에 열심으로, 그것이 무사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한다. 하지만 선사에선 동물성 식재료를 공개적으로 내오지는 못한다. 이것은 숙박업으로서는 불리한 바이지만,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 흉내 요리라는 걸 발명하여 무사들의 마음을 끈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즉 거기에는 '불교 때문의 필연'성은 느껴지지 않는다. 우에다의 설과 이노우에의 설의 공통점은 여기에 있다.
또한 불교의 교의에 깊은 관계가 없는 것이기에, 불교 관계자 사이에도 '흉내 요리'에 대해서는 여러 사고방식이 있는 듯하다. 앞의 우에다 노리마사 씨도 흉내 요리에는 조금 비판적이다. 애초에 사찰 요리는 금욕의 요리이기에, 고기를 먹지 않고, 생선을 먹지 않는다는 금욕적인 식생활 그 자체를 수행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도 '흉내'를 먹는다고 하는 것은 수행의 의미도 반감시켜 버린다. 그것도, 외관은 진짜 장어를 닮은 두부의 꼬치구이 등, 역시 본래 취지를 따르게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실제, 우에다 씨가 만든 사찰 요리에는 흉내 요리는 별로 없다.
사찰 요리의 가게는 어디에나 있다. 물론 교토에도 있다. 앞에도 쓴 각 사원에서의 개산 법요의 요리 등도 점차 알려지게 되어 일종의 붐처럼 되고 있다. 최근 주목을 모으는 비건 사상, 실천도 그 뒷밀이를 하고 있다. 지금 사찰 요리를 받아들이는 배경에는 건강 붐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찰 요리는 지금, 건강식 또는 건강 지향식으로 사회에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 근세에는 도시부만이 아니라 지방의 일반 사회에도 육식을 경원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 이유의 하나는 히데요시에 의한 칼 사냥(刀狩)의 영향에 있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칼 사냥은 농촌 사회로부터 무기를 거두어들일 목적으로 취했던 정책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산야의 야생동물을 잡는 수단을 빼앗은 것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사찰 음식으로서의 대두大豆
대두는 일본 원산으로 여겨지는 몇 안 되는 작물의 하나로, 이미 죠몬 시대부터 재배화가 진행되었다고 생각된다. 구마모토 대학의 오바타 히로키 씨는 『씨앗을 심는 죠몬인(タネをまく縄文人)』(吉川弘文館, 2015) 안에서 큐슈 등 서일본에 살고 있던 죠몬인들이 대두의 재배화를 시작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만, 대두의 유전학자들은 대두의 선조가 된 것이 '돌콩'이라 부르는 종이라 하여, 그 현재 분포의 범위로부터 대두의 기원을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일대"라고 생각한다. 즉 일본만이 아니라, 조선반도부터 중국의 일부를 포함한 넓은 지역이 대두의 기원지였다고 하는 것이다.
대두는 식물성 식재료로는 진귀하게 고단백, 고지방으로, 옛날부터 요긴했다. 특히 고단백이란 성질은 어족 자원이 부족하고, 또 신사와 사찰이 많아 사찰 요리의 전통이 숨쉬는 교토란 도시에서 수요가 높은 식품이었다.
대두는 하룻밤 정도 물에 재워 두고나서 삶아 부드러워지게 하여 돌절구에 찧는다. 또는 먼저 으깬 대두를 가열해도 좋다. 이것을 거르면 두유, 찌꺼기가 비지이다. 두유를 납작한 냄지에 넣고 천천히 가열하면 표면에 얇은 막이 생긴다. 이걸 조심스레 걷은 것이 유바이다. 유바는 생으로도 먹지만 건조시킨 말린 유바도 보존이 쉬워 여러 가지 요리에 사용되어 왔다. 돌돌 만 상태의 유바를 조름에 넣든지, 물로 원상태로 돌린 유바로 여러 재료를 말아서 튀김으로 만드는 등이다. 교토에도 몇 채의 유바집이 있다. 생유바, 말린 유바 모두를 취급하는 곳이 많다.
두유에 간수 등의 응고제를 넣어 굳힌 것이 두부. 굳힌 것을 천에 싸서 탈수해 만든다.
두부는 생으로도 먹지만, 이것을 기름에 튀기면 튀긴 두부가 된다. 얇게 자른 두부를 튀긴 것이 유부이고, 두툼한 채로 튀기면 두부 튀김이 된다. 두부를 찬바람 등에 노출시켜 동결 건조한 것이 언두부. 언두부라고도, 또는 그 산지명을 따서 고우야高野 두부라고도 한다. 이처럼 두유에서 발단하는 식재료는 참으로 다양하다. 이것에 된장, 간장 등의 발효 대두를 더하면, 일정식의 식재료 체계의 주요 부분은 대체로 커버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토의 된장
한편 대두에는 큰 결점이 있다. 조리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단 조리해 버리면 이번은 보존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그 때문에 다양한 조리법이 고안되고, 또한 수많은 발효식품이 발명되었다. 그 하나가 간장이나 된장 등의, 지금은 조미료로 여겨지는 식품이다.
간장은 무로마치 시대 말기에는 간사이에서 대규모 생산이 시작되었는데, 에도 시대 이후는 대규모 생산자가 노다野田(시모우사국下総国 카츠시카군葛飾郡, 현재의 치바현千葉県 노다시野田市) 등 각지에 등장하여, 대량생산과 수송이 행해지게 되었다. 교토를 포함한 지방에는 아직 소규모 생산자가 남아는 있지만, 된장에 비하면 그 수도 그만큼 많지 않다. 한편 된장은 간장에 비하면 전국적인 대규모 생산자는 거의 없고, 각지에 다수의 소규모 생산자가 남아 있다. 된장은 간장에 비하여 오래전부터 있는 식품인데, 생산은 간장 만큼 대형화되지 않았다. 아마도 -자화자찬 된장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된장은 가정에서 만드는 일도 많아 산업화가 늦어졌을 것이다. 특히 기후나 나가노 등에는 그런 경향이 두드러지고, 또한 알된장(玉味噌)이란 누룩을 더하지 않은 제조법도 남아 있다.
된장의 원료, 특히 대두 이외의 부원료의 종류나 비율에는 지역성이 있다. 전국적으로는 쌀이 많지만, 큐슈 등에서는 쌀 대신에 보리를 쓰는 곳도 있다. 또한 중부권에는 대두만을 쓰는 지역도 있다. 각각 보리된장, 콩된장 등이라 부르고 있다.
교토를 비롯한 간사이나 카가와현香川県 등 시코쿠四国의 일부에서는 백된장이라 부르는 된장이 있다. 문자 그대로 색이 새하얗고, 또 단맛을 가진 된장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백된장의 주원료는 쌀누룩이다. 시내의 노포 혼다本田 된장 본점의 혼다 시게토시本田茂俊 사장에 의하면, 이 회사의 백된장에 쓰이는 쌀과 대두의 비율은 대략 2:1이라고 한다. 이 회사의 보통 된장이 1:2인 것과 비교하면 쌀누룩의 비중이 큰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교토에서 백된장의 역할은 중요하다.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지금도 백된장으로 만든 떡국을 먹고 있다. 덧붙여서, 산적에 바르는 산적 된장도 백된장으로 만든다. 흰살 생선이나 닭고기를 백된장에 절인 된장절임도 많다. 도쿄에서는 백된장에 절인 생선 등을 '서경西京 절임'이라 부르는데, 교토인은 이 단어는 우선 사용하지 않는다. '서경'이란 말이 서쪽에 있는 수도란 의미이기 때문이다. 오사카 사람이 자주 쓰는 '관동 꼬치'는 오뎅을 말하는데, 도쿄 사람은 그렇게는 부르지 않는다. 그것과 마찬가지이다. 다만, 앞의 혼다 된장 본점에는 '서경 백된장'이라 부르는 상품이 있다. 아마도 도쿄를 의식하여 만든 이름일 것이다.
백된장은 과자에도 쓰인다. 센노 리큐千利休의 다도 유파인 센케千家의 하나인 우라센케裏千家의 새해 첫 다회에 쓰이는 주요 과자의 하나로 '꽃잎떡(花びら餅)'이 있다. 찧은 떡을 지름 몇 센티미터의 원형으로 얇게 펴서, 마름모꼴의 붉은 떡을 얹어 백된장을 바르고, 삶은 우엉을 심으로 하여 반원형으로 접은 것이다. 과자이 노포 '오이마츠老松'의 주인인 오오타 토오루太田達 씨에 의하면, 꽃잎떡은 원래는 궁중에서 '이가 튼튼해지는 행사'에 쓰이는 행사식이었던 것 같다.
꽃잎떡이 주요 과자로 취급되는 것도 그것이 달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백된장은 꽃잎떡 이외에도 최근은 예를 들면 떡갈나무떡의 소에도 쓰이고 있다. 이것을 백된장소라고 한다. 과자점에 따라서는 바깥쪽의 떡을 풀떡(草餅)으로 한 것은 팥알소, 흰떡을 쓴 것은 팥소, 그리고 분홍색으로 물들인 것은 백된장소라는 식으로 구별하고 있는 곳도 있다. 니시키 시장의 일본과자점 '하타노켄畑野軒 노포'(2021년 9월 개점)의 백된장소는 조금 바뀌어 있었다. 백된장에 물엿을 섞고 졸여서 만든다. 그 때문에 색은 짙어지고, 보통의 된장 같은 색조로 되어 있다.
교토의 낫토納豆
또 하나의 대두 발효식품이 낫토이다. 낫토는 삶든지 찌든지 한 대두에 낫토균을 처리해 만든 식품으로, 역사는 꽤 오래된 듯하지만 기원은 잘 알 수 없다. 낫토의 분포 범위는 동일본이 중심이고, 간사이에서 낫토는 거의 먹을 수 없다 -이 언설은 50년 정도 전까지는 옳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학생 무렵, 대학의 학생식당에서도 낫토는 놓여 있었지만 간사이 출신이 대부분인 학생들은 손을 대는 일이 별로 없었다. 낫토는 냄새나고, 입 주변이나 손이 끈적거린다는 등의 부정적 이미지를 가진 동급생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간사이 사람들도 낫토를 자주 먹게 되었다. 하나는 건강 붐이 관계되어 있다. 낫토를 하루 1팩 먹으면 사망률이 낮아지는 등의 역학 연구 성과가 이야기될 때마다 간사이에서의 낫토 소비량은 증가한다고 한다.
교토에 낫토가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케이호쿠京北라고 불리는 지역(우쿄구 케이호쿠)에는 '낫토떡'이라 부르는 향토요리가 있다. 갓 찧은 떡에 낫토를 섞어 넣은 것으로 보존식이라고도, 또는 농민병이 전쟁터로 향할 때의 군량이었다고도 한다. 떡은 당질 덩어리, 낫토는 고단백 식품이다. 이 조합에 의해 '쌀과 대두'라는 꾸러미가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그리고 동시에 보존이 어느 정도 잘 된다. 어쨌든 그 영향인지, 시내에도 낫토의 제조업자가 몇 채 있다. 모두 경영 규모는 된장업자에 비해서도 작고, 큰 공장 등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 가운데 한 채, 후지와라藤原 식품을 방문해 보았다. '카모강 낫토'란 상품명으로 몇 종류의 낫토를 내고 있는데, 주택가에 있는 아주 보통의 집인 시멘트 바닥이 제조소로 되어 있다. 제조는 주 3일 정도라고 한다. 적대두, 흑대두 등 몇 가지 품종을 사용하고 있다. 낫토균은 전용 업자에게서 조달한다.
후지와라 식품의 창업은 1899년. 사장인 후지와라 카즈야藤原和也 씨에 의하면, 후지와라 씨의 할아버지가 근처 사람들의 요구에 응하여 낫토 만들기를 했던 것이 본업이 된 것이 아닐까 했다. 옛날에는 낫토나 된장 등은 자가 제작하는 가정이 많았다. 하지만 점차 외부화가 진행되어, 마을 안에 된장집이나 두부집이 생기게 되었다.
이윽고 된장집은 조금씩 집약화가 진행되어 일부가 대형점으로 성장했다. 두부도 교외에 몇 곳의 대형 제조소가 생기게 되었다. 한편 낫토는 좀처럼 그렇게는 되지 않았다. 교토에서는 소규모 가게가 점차 모습을 감추어 가는 가운데 낫토의 소비 그 자체도 점점 감퇴해 나아갔다.
그런데, 낫토를 만드는 낫토균은 고초균의 무리로, 일본 이외의 지역에도 보통으로 자생한다. 낫토 자체도 일본 고유의 식품은 아니고, 대륙의 오지나 조선반도, 베트남, 인도네시아에도 있다. 카나자와金沢 대학의 연구팀이 대륙 방면에서 날아온 황사의 표면에 붙어 있는 미생물을 조사한 바, 낫토균의 무리인 균이 부착되어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낫토균은 공중을 둥실둥실 부유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교토에는 또 하나의 낫토가 있다. 그것이 다이토쿠지大徳寺 낫토나 잇큐지一休寺 낫토라고 불리는 식품이다. 절에서 만들기에 절 낫토 등이라 부르는 일도 있다. 교토의 '다이토쿠지'는 기타구에 있는 임제종의 선사로, 절에 있는 20개를 넘는 탑두 중에는 절 독자의 낫토를 만드는 곳도 있다. 이전은 다이토쿠지 이외의 다른 선사에서도 만들었다고 하기 때문에, 선 수행의 일환으로 각 사원에서 자가 제조되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절의 납품업자로 다이토쿠지 낫토를 만드는 제조업자도 절의 주변에 몇 곳 있다. 덧붙여 시즈오카현 하마마츠시浜松市의 다이후쿠지大福寺에서도 '하마 낫토'라고 부르는 상품을 만들고 있다.
절 낫토는 낫토라고는 하지만, 이들은 낫토균에 의한 낫토가 아니라 찐 대두에 누룩균을 묻혀 나중에 소금물에 담갔다가 건조시킨 것이다(요코야마 사토시 『낫토의 기원(納豆の起源)』 NHK Books, 2014). 다이토쿠지 낫토는 된장보다도 훨씬 단단하고, 색도 새까맣다. 그 의미에서는 절 낫토는 된장, 그것도 콩된장에 가깝다. 또는 된장의 원형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다이토쿠지 낫토를 섞어 넣은 일본과자도 있다. 상당히 안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적당한 짠맛은 단맛을 돋보이게 하기에 먹어 보면 이것이 맛있다.
계란과 닭고기
교토는 계란 요리가 많은 도시이기도 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더라도 가정에서 조리되는 그것이 아닌, 점심 또는 외식의 요리가 많다. 그 대표가 '육수 계란말이'일까? 계란을 풀어 육수와 소금을 넣고 전용 계란말이기를 써서 센 불을 멀리에서 타지 않도록 굽는다. 설탕은 넣지 않기에, 달달한 계란말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지만, 반대로 교토인에게는 달달한 계란말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육수 계란말이는 이른바 '백박'의 하나이기도 해서, 시장의 반찬가게 등에서도 놓아두고 있다. 교토의 부엌 '니시키 시장'에는 '다나카田中 계란' '미키三木 계란'이란 계란 전문점이 2곳 있는 외에, 3-4곳의 반찬가게가 판매하고 있다.
육수 계란말이 계란이 시민권을 얻은 하나의 증거가 여기저기 술집의 일품으로 메뉴에도 올라가 있는 것일까. 또는 '육수 계란말이 정식'으로 정식의 주반찬으로도 되어 있다. 육수 계란말이는 샌드위치에도 들어간다. 빵의 도시다운 조합인데, 원래는 기온의 노포 찻집이 50년 정도 전에 게이마이코芸舞妓들의 출출함을 채우는 것으로 고안한 것인 듯하다.
계란은 노포 요정의 메뉴에도 있다. 사쿄구의 요정 '효우테이瓢亭'에서는 '아침죽'에 반숙의 삶은 계란을 반분으로 잘라 살짝 소금을 친 것을 곁들인다. 또한 가이세키 요리의 일품으로 똑같은 것이 곁들여진다. 그것을 목적으로 다니는 단골손님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일품이다. 심플함 때문에 상당히 소재가 좋지 않으면 통용되지 않는 요리라고 생각한다.
덮밥이나 우동에도 계란이 쓰인다. 파드득나물 덮밥은 오사카에도 있는 메뉴인데 내용은 조금 달라, 교토에서는 어묵이나 큐죠 파 등을 달걀과 엉기게 해 밥 위에 얹는다. 마찬가지로 기누가사衣笠 덮밥은 얇은 두부튀김을 계란에 엉기게 한 것. 계란 엉긴 걸 우동에 뿌리는 것도 있다. 교토인이 말하는 '케이란けいらん'이다. 나아가 그 위에 칡가루 끓인 걸 부은 것도 있어서 이것은 겨울철의 일품이다.
교토의 도시에는 닭 전문점도 많다. 니시키 시장에도 닭이나 오리만을 취급하는 가게가 있다. 새는 두 다리로 이른바 '네 다리'가 아닌 탓에 더러움의 대상이 되지 않아 기피감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던 것이 전통적으로 계란이나 닭 요리가 발달한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채란용이든 고기용이든, 사육에 요구되는 면적은 다른 동물에 비해 작아도 된다. 화가 이토우 쟈쿠츄우가 닭 그림을 그리는 데에 마당에 몇십 마리의 닭을 키워서 관찰했다고 하는데(뒤에 기술), 그것도 닭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현대에는 닭의 품종은 고기용과 채란용이 구별되어 있어, 계란을 얻는 사업과 고기를 얻는 사업도 나뉘어 있다.
차의 교토
차나무와 차잎의 생산
교토의 산의 작물로 잊을 수 없는 것이 차이다. 교토부의 남부 산성 지역은 일본을 대표하는 차의 산지로, 산기슭부터 정상까지 차밭이 펼쳐진 독특한 경관을 볼 수 있다. 교토부도 남부의 시정촌을 중심으로 '우지차宇治茶 세계 문화유산 등록'을 목표로 하는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 이 지역의 차 생산과 생산지의 경관을 문화적 평가와 자리매김으로 보호하려고 하는 것이다.
차(차나무)는 그 학명을 Camellia sinensis라 하고, 원산지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산지 부분에 있다. 이것을 일본에 가지고 들어온 것은 8세기의 승려 간진鑑真이 최초라고도 하는데, 상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이 무렵의 차는 잎을 끓였던, 지금 말하는 '한방약' 같은 것이었던 것 같은데 소비는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그 뒤 차 문화는 일단 시들해졌는데, 12세기 말에 이르러 에이사이栄西가 중국에서 새로운 차 종자를 가지고 들어왔다. 이것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차가 되었다고 한다. 이 시대에도 차잎은 햇빛에 말려 가루로 만들어 약으로서 매우 한정된 사람들에게 이용되었다. 말차의 원형일까?
차잎의 생산은 처음에는 수도 주변에서 최초로 재배된 토가노오栂尾 등 낙북洛北이 중심이었던 것 같은데, 소비의 확대에 맞추어 차차 남부의 우지가 명성을 얻게 된다. 그리고 지금은 차의 주요 산지는 부의 남부 와즈카쵸和束町, 미나미야마시로촌南山城村, 우지타와라쵸宇治田原町, 교우타나베시京田辺市, 야와타시八幡市 등의 '산성 지구'부터 시가현, 미에현三重県의 일부를 포함한 넓은 지역에 미치고 있다. 토가노오는 토지도 협소하고 또 산이 깊지만, 우지라면 차 재배에 적합한 토지도 충분하고 또한 분지에 있어서 안개가 발생하기 쉬워 서리 피해를 입기 어려운 등의 이점이 있었다.
차의 생산에 대해서는 앞에도 기술했듯이, 교토가 그 중심지의 하나였다. 무엇보다 차의 생산량으로 보면 교토는 전국 6위(2764톤, 2018년, 전국 차 생산 단체연합회 조사)로, 1위와 2위인 시즈오카현과 가고시마현의 1/10에도 미치지 못한다. 동쪽의 시즈오카, 서쪽의 교토라고 불린 것은 지금은 옛날 일이다.
그런데 말차의 소재인 연차碾茶로 좁혀서 보면, 교토는 일약 일본 1위로 뛰어오른다(840톤, 2018년). 이 양은 무려 생산되는 찻잎의 1/3에 해당한다. 또한 전국 생산량 3463톤의 25% 미만의 양이다. 교토의 차 중 주력은 말차용 차라고 해도 좋다.
연차는 녹차가 수확한 뒤 쪄서 비비는 공정을 거치는 데 비하여, 찐 뒤에는 건조시키고 나아가 줄기 등을 깨끗이 제거해 만든다. 이를 맷돌로 가루로 내면 말차가 된다. 또한, 재배중에 직사광선이 새싹에 닿지 않도록 가림막을 하는 등의 공정은 옥로玉露 등의 고급 찐차와 같다.
차는 찻잎이란 원료를 생산하면 그것으로 소비로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포스트 하베스트 작업이 길다. 찌거나, 비비거나, 맷돌로 갈거나 하는 공정이 더해진다. 그리고 거기에는 찜기, 맷돌 등의 도구나 이들 도구의 유지 관리, 나아가 기술의 부단한 개량이 빠질 수 없다. 동시에 이들 도구를 만드는 장인, 손질을 하는 장인, 이들 도구를 사용해 작업에 종사하는 장인 등 다종의 작업에 관계하는 장인의 존재가 빠질 수 없다. 그리고 교토에는 그러한 도구나 기술을 집적해 온 역사가 있다. 즉 차 문화는 이러한 일련의 작업의 토탈 코디네이트인 것이다. 어느 하나만 빠져도 차는 완성되지 않는다.
교토에는 이 포스트 하베스트부터 브렌딩까지의 공정을 일괄하여 집행하는 노포가 몇 곳이나 있다. 이들 점포와 다도의 본가들 사이에는 옛날부터 거래가 있어, 대대로 계승된 품질을 쭉 유지하고 있다. 차 문화도 또한 이러한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지탱되고 있다.
이처럼 조망해 보면, 교토란 도시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입지한 결과를 볼 수 있다. 교토가 만약, 에도나 오사카처럼 평야에 입지한 도시였다면, 이러한 산의 식재료에 혜택을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른 대도시와는 다른 교토의 식문화가 형성된 데에는 산이 수행한 역할이 몹시 컸다고 해도 좋다. 그리고 그것은 뒤에 적을 채소에 대해서도 들어맞는다.
차 문화의 도시, 교토
말차의 주된 소비는 뭐니뭐니 해도 다도에 관계된 행사일 것이다. 특히 교토는 센노 리큐의 세가지 다도 유파(오모테센케表千家, 우라센케裏千家、무샤코우지센케武者小路千家)의 본거지가 모여 있기도 해서, 그 소비량은 다른 도시의 추격을 허하지 않는다. 교토는 역시 차의 메카이다.
중세도 후기에 들어서면 차는 교토에서 크게 감속한다. 무가나, 당시 차츰 힘을 키워가던 상인들이 눈독을 들였던 것이다. 나아가 차는 사찰 특히 선종 사원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 나아갔다. 생활에서 낭비를 떼어 내려는 선의 사상에 일치시킨 와비차侘茶의 사상이 단단히 결합된 것이다. 재치의 잇큐一休 씨로 유명한 잇큐 소우쥰一休宗純(1394-1481)에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하는 무라타 쥬코우村田珠光(1423-1502)는 찻물(茶の湯)을 다'도道'로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그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았던 다케노 죠우오우武野紹鷗(1502-1555)는 '다선일미茶禅一味'의 사상을 형상화했다. 전국 시대, 세계와의 무역 창구이기도 했던 사카이堺의 호상들이 손을 잡고, 때로는 무가의 비호 아래 다도를 문화로서 확립시켜 나아갔다. 그것을 집대성하는 모습으로 등장한 것이 센노 리큐(1522-1591). 그는 역시 사카이의 호상이었는데, 50세를 넘었을 무렵에는 노부나가에게 중용되고, 혼노지의 변 이후에는 히데요시를 섬겨 교토의 선사 중 하나인 다이토쿠지로 이주해 살았다. 차인으로서의 리큐의 인생은 환갑 무렵부터 꽃을 피운다. 함참 늦게 핀 인생이었던 셈이다.
이와 같은 역사를 배경으로 무척 전통을 중시한 것이 다도의 법식이다. 말차의 품질에서도 '언제나 변함 없는' 품질의 안정성이 요구된다. 한편 찻잎의 질은 그해의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그것을 다른 밭의 찻잎을 섞는다는 기술 -그것은 블렌드의 초절기법이라 할 만한 것이다- 에 의하여 보충해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한다.
최근 말차의 소비 동향에 변화가 보인다. 일본과자나 양과자에 섞어서 사용한다. 말차 아이스크림, 말차 초코렛 등이라는 것도 있다. 젊은 세대에게 맞춘다는 것일까. 옛날부터 있는 우지宇治 킨토키金時는 빙수 위에 조림 팥이나 앙금과 말차 시럽을 뿌린 것. 단맛과 말차의 '만남'으로 산뜻한 쓴맛이 나는 말차와 앙금의 상성이 발군이다. 거기에 개성이 강한 다른 본성과 섞이기 때문에 품질의 안정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일상 생활의 장에서도 차를 마실 기회는 쑥 줄었다. 과거에는 사무실 등에서도 회의의 출석자에게, 또는 내방객에게 차를 내는 것이 관례였다. '저기의 차는 맛있다' 등이란 평가가 보통 이야기될 만큼, 어디에 가더라도 차가 나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기회가 격감했다.
내방객에게는 페트병의 물을 내오고, 내부 회의에서는 그마저도 하지 않는 곳이 늘었다. 방문 시에는 페트병이나 자기 텀블러를 지탐하는 것이 어느새 기본이 되어 가고 있다. 외출시에는 거리의 어느 자판기나 편의점에서 페트병에 든 음료를 사는 것이 일상이라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페트병 음료의 종류도 다양화되고, 차가 아닌 물이나 탄산음료의 소비도 늘어났다.
가정에서도 아예 차를 마시지 않게 되었다. 사기 주전가 등 대부분 절멸위기종은 아닐까? 학교 급식에서도 쌀밥 급식은 늘었는 데 딸려 나오는 마실거리는 우유이다. 왜 밥에 우유인 것일까. 차로 하면 좋겠는데. 한때 찻잎을 작은 종이봉투에 담은 티백이 유행했는데, 지금은 이것도 한물갔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은 교토도 다른 도시도 하등 차이가 없다.
교토의 과자
교토의 일본과자 문화와 일본과자 가게
일본과자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지만, 그 역사는 멀리 고대의 '당과자唐菓子'에까지 올라갈 정도라고 한다. 그 이전은 과일 등이었을까. 달지는 않았다고 하는 당과자를 별도로 하면, 과자는 달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단맛은 당질로서, 포식하는 현대를 포함해 마력적인 먹을거리이다.
교토에서 과자라고 하면, 뭐니뭐니 해도 일본과자일 것이다. 일본과자에 대해서 말하면, 그것만으로 몇 권의 책이 된다고 한다. 그저 긴요한 부분만 적어 두고자 한다. 교토인이 아닌 사람에게 "교토의 일본과자는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분면 이름이 거론되는 것이 '야츠하시八橋'라고 한다. 10개를 넘는 노포가 오래된 곳에서는 에도 시대부터 이것을 계속 만들어 왔다. 제조법도 맛도 미묘하게 다르고, 명칭도 야츠하시 외에도 八ッ橋, 八ツ橋, 八つ橋 등이라 표기된다.
과자가게 중에는 500년 정도의 역사를 지닌 곳도 있다. 사쿄구의 '카와바타도우키川端道喜'는 가게의 기록에 의하면 1503년 창업이라고 하기에 놀랍다. 가게의 16대 당주 부인인 카와바타 치카코川端知嘉子 씨에 의하면 '아침 수라(御朝物)'라고 하는 왕의 조식에 해당하는 소금소를 감싼 공 모양의 떡을, 무로마치 시대의 후기부터 막부 말기까지 350년 동안에 걸쳐 빠짐 없이 각 왕에게 계속 바쳤다고 한다. 고쇼에는 그를 위한 문이 설치되어 '도우키몬道喜門'이라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가라스마 산죠 사가루烏丸三条下, 롯카쿠도우六角堂의 서쪽에 만쥬우야쵸饅頭屋町라고 하는 지명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오닌의 난 이후, 그곳에 있던 만쥬우 가게가 번창했던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15세기 말의 기록에 그 이름이 보인다. 만쥬우는 원래는 중국에서 온 림林이란 사람이 중국의 만쥬우를 바탕으로 고안한 것으로, 최초는 나라에서 가게를 개업해, 그 자손이 나중에 교토에서도 가게를 열게 되었다고도 한다. 이 만쥬우 가게는 8대 무로마치 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로부터 "일본 제1번 혼만쥬우소本饅頭所 임씨 시오세塩瀬"의 간판을 받았을 정도의 인기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만쥬우가 지금 도쿄도 츄우오우구中央区의 '시오세 만쥬우'(상품명은 '시호세만쥬우志ほせ饅頭')의 원조였다고 한다.
교토에는 이외에도 창업 300년을 넘는 가게가 몇 곳이나 있다. 시내에는 다수의 일본과자가게가 있지만, 그들을 정리해 보면 떡가게의 순계와 다과에 관계되는 순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과자가게 중에는 고쇼나 다도 집안의 납품업자로서 두터운 비호 아래에 오랜 역사를 새겨 온 가게가 많다. 신사와 사찰과의 강한 관계에 의지해 온 곳도 많다. 신사의 문 앞 과자가게에는, 예를 들면 이마미야今宮 신사 앞의 '카자리야かざりや' '이치몬지야一文字屋 와스케和輔'란 두 곳이 만든 '살짝 구운떡(あぶり餅)', 가미가모上賀茂 신사 앞의 '진바도우神馬堂' '아오이야葵家'란 두 곳이 만든 '아오이떡(葵餅)' 또는 '구운떡(焼きもち」)', 기타노텐만구北野天満宮 앞의 '텐진도우天神堂'의 '구운떡', 시모가모下鴨 신사 앞의 '에비수야ゑびす屋 카헤에加兵衛'의 '야라이떡矢来餅' 등이 있다. 떡이나 구운떡이 많은 것은 떡이 신의 공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덧붙여, 가미가모 신사의 떡을 '아오이떡'이라 표현하는 것은 가미가모 신사, 시모가모 신사의 축제가 '아오이 축제'이고, 두 신사의 신의 문양이 후타바 아오이(Asarum caulescens Maxim.)인 것과 연관된다.
사원과 깊은 관련을 가진 과자 장인도 있다. 다이도쿠지의 창건 무렵부터 다이도쿠지 낫토를 계속 만들어 왔다고 하는 '혼케本家 이소다磯田'는 또한 과자 장인이기도 했다. '마츠카제松風'를 대표 과자로 가진 카메야亀屋 무츠陸奧는 1483년에 혼간지本願寺가 야마시나山科로 이전한 이래 납품업자라고 한다.
에도 시대에는 고쇼나 유력 신사와 사찰, 다이묘들과의 관계로 부를 쌓았던 부유한 상인들의 지원도 있고, 또 학문소 등의 자극도 있어서 다회 등의 종합예술이 꽃을 피웠다. 그들도 또한 과자를 모임의 소재로서, 또는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과자를 즐겼다.
교토의 도시에 이만큼 많은 과자 장인이 있고, 공멸하는 일 없이 계속되어 온 배경에는 이러한 문화가 있었던 것이다.
덧붙여, 과자라고 하면, 교토에서는 일본과자라고 생각되지만, 교토에는 양과자가게도 있고, 크리스마스 케이크로 전국구가 된 케이크가게도 있다. 최근에는 일본서양 절충형 과자가 늘어나고 있다. 말차의 산지인 것을 활용해 말차를 더한 양과자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말차는 분말이기에 과자의 반죽에 섞어넣을 수도 있다. 말차를 섞은 초코렛, 아이스크림, 구운과자, 푸딩, 파르페 등이 차례로 등장하고 있다.
단맛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런데 단맛은 어디에서 공급되었던 걸까? 일본에 설탕이 본격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17세기에 들어오서부터의 일로, 일반 서민의 손에도 이르러 널리 쓰이게 된 것은 메이지 시대가 되어서부터의 일이다. 그 이전에 단맛은 다른 것에서 얻어졌다. 그것은 과일, 꿀, 돌외청, 조청, 단술(甘酒)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돌외청은 돌외 등의 식물 수액을 졸인 것으로, 앞에서 『침초자枕草子』의 '소중한 것'으로 다루어졌는데, 일반 서민에게는 그림의 떡이었을 것이다.
조청은 지금은 보리를 발아시켜 만든 '엿기름' 또는 '보리싹'을 원료로 한 것으로, 엿기름에 포함된 효소 아밀라제의 힘으로 보리의 전분을 당으로 바꾼 것이다. 옛날 시대에는 쌀을 발아시켜 만든 '쌀싹'도 있었겠지만, 기록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듯하다.
한편 단술을 쓰는 방법도 있다. 단술은 누룩균의 아밀라제를 써서 전분을 당으로 바꾼 것이다. 그 의미에서, 단술은 발효식품이다. 교토에서는 무로마치 시대에 누룩 조합이 생겼기에, 이 무렵에는 단술 제조가 산업화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단술과 똑같은 원리로 만든 것이 백된장이다. 그것은 예전엔 단맛으로 인식되어 온 것 같고, 아마 그 때문에 꽃잎떡이나 '밀기울 구이' 같은 달달한 식품을 만들어 왔을 것이라 나는 생각하고 있다. 밀기울 구이는 리큐가 발명한 것이라고도 하는 식품으로, 뜨거운 철판 위에서 밀가루 크레이프를 구워 백된장을 바른 관 모양으로 둥글게 말은 것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또 여러 가지 변형이 생겼는데, 뿌리는 똑같다.
엿기름이나 단술을 가지고 만든 당은 모두 포도당이나, 포도당이 2분자 연결되어 생긴 맥아당이다. 맥아당은 엿기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소재라는 관점에서 보면, 과자는 지극히 심플한 요리임과 동시에, 쌀과 콩이란 일정식의 근간을 이루는 식재료가 쓰여 왔다. 소재는 심플하지만 같은 쌀이라도 맵쌀인 '쌀가루' 등, 또는 찹쌀에도 가루를 물에 담가 희게 만들어 말린 '백옥분白玉粉'이나 찐 찹쌀을 건조시켜 빻은 한매분寒梅粉, 도명사분道明寺粉 같은 다양성이 있다. 콩도 대두라면 볶아서 가루로 만든 콩가루(黄粉), 팥이나 강낭콩(手亡豆)의 앙금 등과 손이 많이 가는 식품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일본과자는 소재만을 보더라도 그 자체가 문화인 것이다.
차과자
교토는 일본과자의 도시이다. 거리를 걸으면 도처에 일본과자가게가 있다. 떡가게, 떡가게가 과자가게로 전환한 가게, 엿가게 등등. 그리고 교토에서는 다도에 관계하는 과자가게가 실로 많다. 그렇다, 일본과자와 차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차의 수행자가 과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고 생각하는데, 과자에 주어진 사명은 그뿐만이 아니다. 과자는 다과회의 손님에게 주인의 메시지를 전하는 중요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 다과회 등 관계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사계절마다 생과자를 보고 계절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교토는 센노 리큐에서 발단하는 세 가지 센케千家의 본가가 있는 다도의 메카이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역사가 있는 과자가게가 모여 있다. 과자가게의 간판은 뭐니뭐니 해도 주요 과자이다. 차의 세계에서, 일본과자는 생과자(이를 주요 과자라고도 부름)와 말린과자로 나누는 것이 보통이다. 정식 다도에서는 가이세키 이후, 하이라이트인 주요 과자가 나와 진한 차(濃茶)가 되고, 다음에 말린과자가 나와 최후로 연한 차(薄茶)가 오는 스타일을 취한다.
과자에는 과자의 이름인 '과자명'이 붙어 있다. 각각 다과회의 장에서 제공되는 과자는 주최자인 정주亭主가 그 모임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것으로, 그 메시지도 정주가 분명히 명언한다고는 할 수 없다. 초대된 손님이 장식이나 과자와 그 과자명에 담긴 메시지를 읽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자는 일생에 한 번뿐인 인연이라고 오타 토루太田達 씨('오이마츠老松' 사장)는 말한다. 정주의 요청에 응하여, 과자 장인들이 궁리를 하여 만들어 낸다. 그것들 중에는 다회기茶会記에 남은 것도 있는데, 대부분은 두 번 다시 만들어지지 않는다.
과자 장인들이 구매자를 특정하지 않고 계절의 생과자를 만들기도 한다. 그것들 중 어느 것은 많은 과장 장인들에게 계승되어 궁리가 쌓이기를 거듭하여 그 계절이 오면 매대에 놓인다. 2월의 매화, 6월의 붓꽃이나 제비붓꽃, 11월의 국화 등을 표현하는 과자가 그것이다. 각각의 가게가 궁리를 하여 배색이 산뜻하고 과자 장인의 센스가 빛나는 것이 많다. 꽃을 사실적으로 조작한 것도 있는데, 색감과 질감 등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도 많다. 이렇게 되면 훌륭한 예술작품이다. 소비자에게는 거기에서 과자 장인들의 의도를 읽어내는 센스가 요구된다.
일정식 문화는 이미 기술했듯이 잎으로 감싸는 문화이기도 하다. 계절마다 특징이 있는 잎을 사용하여 계절을 표현하는 것이 많이 창작되어 왔다. 벚꽃의 계절에 벚나무 잎을 이용한 벚꽃떡, 5월 단오 무렵의 떡갈나무떡, 치마키의 조릿대, 갈대 등이 그 대표일까.
계절의 행사나 사건을 주제로 한 과자도 있다. 삼짓날 복숭아의 '히치기리ひちぎり'. 납짝한 쑥떡 위에 앙금을 얹은 생과자로, 그 모양은 대합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6월 말 여름나기 액막이의 '미나즈키水無月'는 쌀떡 위에 달달하게 조린 팥을 올린다. 조린 팥은 한천으로 굳히기도 한다. 음력 추석의 보름달에는 경단을 바친다. 음력 10월(멧돼지의 달)의 멧돼지의 날에는 여자아이 떡을 먹는 습관이 있다.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목적 외에, 멧돼지는 다산이기에 그에 덕을 입는다는 의미도 있는 듯하다.
이와 같은 일본과자의 성격은 카나자와金沢나 마츠에松江 등 이름난 일본과자의 산지에서도 똑같다. 특히 성 아래 마을(城下町)의 과자는 맛있다고 한다. 차 문화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에도 시대, 영주가 문화인이었던 번에서는 다도가 성행해, 그에 수반하여 일본과자의 생산이 활발해졌다. 입맛 좋은 소비자가 즐비한 도시는 또한, 각 유파의 역대 집안들의 활동 거점이기도 했다.
과자에 한하지 않고 음식은 먹어 버리면 없어져 버리는, 덧없는 문화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품이 남아 온 배경에 있는 문화를 맛보고 싶다.
설탕 도래
일본과자를 크게 바꾼 것이 17세기 설탕의 보급이다. 설탕은 포도당 1분자와 과당 1분자가 이어져 생긴 당이다. 나가사키에 들어온 설탕은 그 뒤 우선 오사카에 운송되었는데, 아마 머지않아 교토에도 전해졌을 것이다. 그때까지 단맛은 과일이나 꿀을 별도로 치면 쌀 등의 곡류에서 만들었기에 된장과 술과 마찬가지로 쌀이 없으면 만들 수 없는 식품이었다. 한편 설탕이라 하면 사탕수수라는 식물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기에, 당시는 100% 수입품이었다. 설텅의 보급은 단맛의 외부화였다. 그 뒤 설탕의 국산화 움직임도 있어 18세기 말에는 백설탕도 만들 수 있게 되었는데, 소비의 대부분은 수입품이었다. 소비되는 설탕의 태반은 아직도 수입품으로, 일본 사회는 단맛의 외부화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럼 교토에 찾아온 설탕인데, 야오 케이스케八百啓介 씨에 의하면 17세기 말의 판매 가격은 1킬로그램당 1600엔 정도였다. 현재 백설탕은 1킬로그램당 300-400엔 전후이기에, 그 5배 이상이 된다. 귀중품이었던 것은 확실하더라도 '서민에게는 아주 높은 산의 꽃이라 손이 닿지 않는다'고 하는 정도의 고가는 아니었던 듯하다. 이윽고 설탕은 일반 서민의 삶 속에 녹아들어 가서, 메이지 시대에는 소비가 급속히 확대된다.
교토에서 설탕과자가 꽃을 피웠던 것은 역시 장인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하나가 아루헤이토우有平糖였다. 원래는 서양 과자로서 16세기 포르투갈에서 전해진 것인데, 그 뒤 개량이 더해져 세세한 세공이 가해진 고급 과자로서 3월 3일 히나ひな 축제 때나 다도 모임에 나왔다고 한다.
콘페이토우金平糖도 또한 설탕을 주원로 하는 서양 과자의 하나로, 핵이 되는 매우 작은 입자에, 진한 당밀을 부으면서 알갱이를 점차 키워 간다. 핵에는 당초는 양귀비 종자가 사용되었다. 작업은 달궈진 동으로 만든 가마에서 행한다. 교토에서 콘페이토우를 전문으로 만드는 '료쿠쥬안緑寿庵 시미즈清水'에서는 이라 가루라고 부르는, 찐 찹쌀을 부수어 볶은 것을 핵으로 사용한다. 덧붙여, 지금은 이라 분으로 전분질을 굳힌 것을 사용하고 있다. 완성에는 2주일 걸린다고 한다. 그것만으로 콘페이토우는 교토에서도 고급 설탕과자로 평가를 받았다. 오사카의 기업이 이 대량생산에 성공한 것은 1903년이었다고 한다(노무라 타쿠野村㦸, 당시 오사카 당과糖菓 사장).
교토의 콩과자
교토에도 콘페이토우를 만드는 가게가 몇 곳이 있는데, 그 몇 곳에서 '오색콩'을 만들고 있다. 볶은 완두콩에 설탕을 묻히고, 빨강, 녹색, 황색, 갈색, 흰색의 오색의 색을 입힌다. 제조법으로는 콘페이토우의 양귀비 씨앗 대신에 콩을 사용한 것이라는 평가일까. 이것도 다이쇼우大正 시대까지는 궁중의 헌상품이 되는 등 고급 과자로 평가받았다.
오색콩과 비슷한 '봉래콩蓬菜豆'이란 콩과자가 입춘 전날 명절 무렵, 고쇼의 동쪽 구석에 있는 로잔지盧山寺에서 구할 수 있다. 오색콩보다는 약간 크고, 색은 홍백 두 색만. 심으로 사용되는 것은 귀신 튀치의 대두이다. 원래 콩은 단맛에 잘 어울리는 것이다. 볶은 대두를 가루로 만든 콩고물은 일본과자 원료의 기본이기도 하다. 떡을 콩고물에 굴린 '고물떡'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수하마洲浜'는 콩고물과 물엿을 반죽해 굳힌 것으로, 수하마 경단 등으로 팔리고 있다. 주요 과자보다도 훨씬 오래 보존된다. 이것도 또한 광의로는 콩과자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조금 바뀐 바로는 이마미야 신사(기타구)의 문 앞에 '아부리떡'이다(앞에 나옴). 좀 작은 떡에 콩고물을 묻히고, 거기에 구운 뒤 백된장 양념을 발라 먹는다. 대두의 모든 것(ダイズづくし)이라 했던 바이다. 콩 복주머니(豆大福)란 떡 반죽에 삶은 콩을 더한 복주머니 떡이기도 하다. 마스가타枡形 상점가 입구의 '후타바' 같이 적완두를 쓰는 것도 있는데, 종피가 검은 검은콩을 쓰는 곳도 있다. 교토에는 콩을 쓴 과자 -콩과자- 가 아직 이외에도 많이 있다. 그 예를 몇 가지 들자면, 우선 다이도쿠지 낫토를 조합한 말린 과자를 소개하고 싶다. 다이도투지 앞에 있는 '혼케本家 이소다磯田'에는 짭짤한 다이도쿠지 낫토를 성글게 쪼개서 쌀가루와 설탕으로 만든 라쿠간落雁에 섞어 넣은 과자 '시키부式部'를 내고 있다.
이것과 비슷한 것이 데라마치 오이케에 있는 '카메야 요시나가亀屋良永'의 '오하라지大原路'라고 명명한 말린 과자이다. 라쿠간의 반죽에, 여러 가지 색으로 착색된 수하마를 박아 넣은 것으로, 계절에 응한 8종류가 있다.
'신세이마메真盛豆'는 니시진의 '카나야 마사히로金谷正廣'가 만든 서양 생과자로, 볶은 검정콩을 수하마로 감싸고 다시 푸른 김을 묻힌 것이다. 리큐 무렵부터 만든 과자라고도 전하며, 그것이 사실이라면 500년의 역사를 가진 오래된 과자가 된다. 당시 그것은 콩고물에 소금을 더한 것을 사용하고 있었던 듯하여 달지 않았다고 생각되는데, 지금의 그것은 달다.
리큐의 차과자라고 하면 앞에 적은 '밀기울 구이'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백된장의 단맛을 이용한 것으로 된장 과자,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콩과자라고 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콩을 쓴 과자라고 하면, 역시 무어라 해도 앙금이다. 팥의 앙금인 '오구라앙小倉餡'에 대해서는 다음에 적겠는데, 앙금이 되는 콩은 팥만이 아니다. 완두를 쓰는 것은 '우구이스앙鶯餡'이 되고, 또한 '테보우手亡'라 부르는 강낭콩 종류의 흰콩이나 흰팥이라 부르는 콩으로 만들면 흰앙금이 된다.
앙금과 오구라앙
앙금은 대부분의 경우, 과자 안에 감싸 넣어져 있다. 이쑤시개로 잘라 보아야 안의 앙금을 알 수 있다. 예상한 색깔의 앙금이 나오기도 하다면, 좋은 의미에서 기대에 어긋나는 색깔의 앙금이 나오기도 한다. 또한 떡갈나무떡처럼 앙금의 일부가 '살짝 보이'거나, 구비求肥를 통해 색깔이 비추어 보이거나 하는 것도 즐겁다. 일본과자 도시만의 일이 있어서, 교토에는 앙금을 만드는 가게가 많다. 물론 스스로 앙금을 만드는 일본과자가게, 떡가게도 있지만, 작은 과자 장인은 이곳에 앙금의 제조를 의뢰하는 곳도 많다. 물론 가게나 상품에 따라서 앙금의 성질은 바뀌기에 생산은 주문 생산 같은 것이다. 앙금을 쓰는 일본과자는 다방면에 이른다. 다도의 자리에 쓰이는 주요 과자는 물론, 모나카와 앙미츠あんみつ, 밀기울 만쥬, 앙금떡, 고물떡이나 팥소 묻힌 떡, 경단, 만쥬 등등. 이것들에 사용하는 앙금에는 각각 특징이 있다. 예를 들면, 밀기울 만쥬의 앙금은 대체로 수분을 많이 포함해 질척질척한 형상을 하고 있고, 먹을 때 탄력 있는 생밀기울에서 앙금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으깬 앙금과 팥알 앙금의 구별도 있다. 팥알 앙금이란 팥의 껍질이 터지지 않도록 잘 졸여서 서랑 등의 단맛을 더한 것을 말한다. 으깬 앙금은 부드럽게 졸인 팥을 베로 걸러서 껍질 등을 제거하고 얻은 즙을 졸인 것을 말한다. 각각 용도가 다르고, 또한 취향도 사람마다 제각각이지만, 만드는 데 수고가 많이 드는 식품의 하나이다. 팥알 앙금을 오구라앙이라 부르는 경우가 있다. 교토에서 오구라앙이라 부르게 된 데에는 설탕의 보급이 관계되어 있는 듯하여, 예를 들면 달달한 앙금의 시초는 중세 말 무렵의 일이다. 오구라앙의 발상은 언제인 것일까? 교토시 우쿄구의 오구라산의 기슭에 있는 천태종 사원 '니손잉二尊院'의 경내에 있는 '오구라앙 발상지' 비석에는 그 시초가 9세기에까지 거슬러오를 정도라고 적혀 있다. 비석의 건립은 2005년 3월. 세운 것은 시내에서 명물 과자 '얏하시八ッ橋'를 만드는 가게의 하나인 '이즈츠井筒 얏하시'의 제6대째 사장 츠다 사헤에津田佐兵衛 씨이다. 니손잉에서 남쪽으로 걸어서 몇 분 걸리는 곳에는 교토시가 관리하는 밭이 있어서, 그곳에서 NPO가 다이나곤大納言이라는 품종의 팥을 재배하고 있다. 다이나곤 팥으로 만든 앙금을 남기기 위한 노력이다. 오구라앙의 시초에는 또 하나의 설이 있다. '오구라들'이라는 생과자가 있다. 앙금알(餡玉), 또는 구비求肥로 감싼 앙금알의 주변에 꿀로 졸인 팥 등을 빽빽하게 붙인 것이다(토라야虎屋 웹사이트 등에 의함).
앙금과 졸인 팥이 섞이는 것으로, 그것이 '오구라앙'이란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고 하는 것일 테다. 다만, 오구라노란 이름의 유래가 사슴의 반점과 비슷하다는 데에 있다고 하면, 역시 그것은 오구라라는 지명에 관련이 있다는 것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고대부터 중세의 교토에서는 사슴이라고 하면 오구라산의 대명사였다.
오구라산 봉우리들에서 우는 사슴은 몇 번의 가을을 보냈는지 아는 사람 없네(小倉山峰たちならし鳴く鹿の経にけむ秋を知る人ぞなき)
깊은 산에 단풍을 헤치며 우는 사슴의 소리를 들을 때야말로 가을은 슬퍼진다(奥山に紅葉踏みわけ鳴く鹿の声聞く時ぞ秋は悲しき)
- 사루마루 다유우猿丸太夫
사루마루 다유우의 이 노래의 무대는 '깊은 산'인데, 이 노래는 오구라小倉 100인 1수에도 뽑힌 유명 노래로, 사슴과 오구라산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0인 1수를 뽑은 후지와라노 사다이에藤原定家의 암자도 오구라산의 산속에 있었다. 어느 설도 근거가 되는 기록이 부족하고, 사실은 알 수가 없다.
덧붙여, 앙금의 원료가 되는 팥도 지금은 대부분 수입되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홋카이도산 팥을 쓰고 있다. 교토에도 규모도 작지만 산지가 있어, 그곳에서는 '다이나곤'이란 품종이 재배되고 있다. 그것들은 '단바丹波 다이나곤'이라는 이름으로 유통되고 있는데, 단바 다이나곤 중에서도 카메오카시亀岡市 우마지馬路 지구에서 생산되는 팥은 '우마지 다이나곤'이라 불리며 명품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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