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교토의 풍토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운 도시"
교토는 왜 더운가?
교토에 살고 있다고 하면,
"얼마나 부러운지"라든지, "좋겠네요, 교토이니까" 등이라는 사람이 꽤 있다.
너무 면전에서 부정하는 것도 거리껴서 입을 다문다.
때로는 "아니요. 놀러 방문하면 좋은 도시이지만, 사는 건 꽤 힘들어서"라고 본심을 말하는데, 좀처럼 납득하지 않는다. 겸손해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살기에는 힘들다'라는 건 주민에게는 그대로의 감상인 것이다. 하나의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아는 '관광 공해'이다. 2020년에 들어서자마자 세계를 혼란에 빠뜨린 신형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으로 관광객의 발길이 뚝 끊겼지만 한때는 끔찍했다. 교통기관의 혼잡, 여행자의 캐리어의 바퀴 소리나 큰소리의 대화, 음식점의 황폐 등등. 더하여 교토의 도시 전체가 테마파크화되어 시민의 일상생활까지 견학 대상이 되었다. 여행자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권리인 양 사람들의 생활에까지 서슴없이 카메라를 들이댔다. 시민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나날의 생활이 구경거리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행정은 그러한 호소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환대'를 나간 것이었다.
그렇지만 관광 공해가 찾아오기 전부터 교토는 살기 어려운 도시였다. 우선 여름의 더위이다. 도쿄에 있다면 여름 더위란 쿠마가야熊部, 코우노스鴻巣, 타테바야시館林 등 기타간토우北関東의 평야에 있는 도시의 이름이 떠오른다. 일기예보를 담당하는 기상예보사 중에는 전국 방송인 것을 잊고 "오늘 간토우는 더웠다" 등이라 감상을 기술하는 사람도 있고, 그 '도쿄 시선'에 좀 짜증나기도 하는데, 전국에는 이름난 더운 도시가 아직 몇 군데 있다. 나고야 권에서는 나고야名古屋, 타지미多治見, 기후岐阜 등, 간사이 권에서는 토요오카豊岡(효고현)이나 히라카타枚方(오사카부) 등이 그렇다. 큐슈에서는 오이타현의 히타日田 등도 덥다. 그리고 교토는 '일본 최고의 더운 도시'에 막상막하의 더운 도시이다. 덧붙여서, 2018년 여름에 교토는 최고기온 37도가 넘는 날 -난 이를 혹서일酷暑日이라 부름- 이 13일 계속된 기록이 있다(7월 14-26일). 게다가 이 해는 8월에도 혹서일이 9일이었다.
그러나 왜 교토의 여름은 이렇게 더운 것일까? 여기에는 교토의 지형이 깊은 관계가 있을 것 같다. 우선, 교토는 분지에 있다. 분지에서는 어디서나 낮 동안의 기온이 평야부보다 높아진다. 게다가 분지에는 140만 명이 살고 있다. 더하여 바람이 불지 않는다. 무풍인 곳에서 태양이 쨍쨍 비추고, 게다가 습도가 높기에 무덥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스며나오고, 불쾌하기 짝이 없다.
아직이다. 교토의 경우, 분지의 남쪽이 열려 있어 오사카 평야로 이어진다. 이 오사카 평야에서 더운 공기가 유입되어 온다. 교토 분지의 입구인 가장 좁아지는 곳에 있는 것이 승패의 갈림길인 덴노우산天王山(표고 270미터)으로, 좁게 열린 입구의 한가운데를 요도강淀川이 흐르고 있다.
여름날, 아침해가 떠오를 무렵부터 육지는 뜨거워져 상승기류가 생긴다. 비교적 기온이 낮은 바다 쪽이 국소적으로는 고기압이 되어 공기는 바다에서 육지로 불기 시작한다. 해풍이 그것이다. 오사카만에서 생긴 해풍은 오사카 평야의 도시에서 데워지면서 요도강을 따라 북상하고, 점심 전에는 교토 분지에 도달한다. 이 따뜻한 공기가 분지 안에서 더욱 뜨거워지기에 교토의 여름은 더워진다고 생각하는 연구자도 있다.
분지에 있는 교토에서는 좁은 곳에 건물이 밀집되어 왔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토지인데 그 한 귀퉁이를 광대한 고쇼御所나 쥬라쿠다이聚楽第, 또 신사와 사찰의 부지가 차지하고 있었다. 시민의 토지는 점점 좁아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무렵에 세금은 길에 접한 건물의 너비로 결정되었기에, 어느 집이라도 정면의 너비를 좁혀 가늘고 긴 집을 짓게 되었다. 그 흔적인지 교토에는 정면의 너비가 좁은 건물이 많다. '장어의 침상'이라 부르는 건물인데, 더위에 대한 대책은 잘 취해졌던 것 같다. 가늘고 긴 부지를 둘러맞추어 안뜰(중정)을 설치하고, 통풍과 일조를 확보한다. 안뜰이 있어서 공기가 움직여 약간이나마 시원함을 얻을 수 있다. 저녁이 되면 주요 도로에 물을 뿌린다. 물 뿌리기이다. 이것으로 기온이 조금은 내려간다. 이러한 궁리가 없으면 교토의 도시 안은 매우 더워서 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름의 더위와 기온 축제祇園祭
교토는 축제가 많은 도시이다. 물론 도시의 역사가 긴 것이 관련되어 있다. 신사와 사찰이 많은 것도, 축제가 많은 것에 관계되어 있다.
도시의 동쪽 끝, 동산(히가시야마東山)의 산기슭에 있는 야사카 신사八坂神社. 이 신사를 본거지로 하는 축제의 하나로 '기온 축제'가 있다. 축제의 주최자는 야사카 신사와 마을사람 둘이다. 일반적으로 마을사람이 진행하는 야마山와 호코鉾가 세워지는 행사가 잘 알려져 있는데, 원래는 '기온 어령회御霊会'라고 하는 야사카 신사의 제례였다. 기온 축제는 7월 내내 행해지는 종교 행사인 것이다. 그 기원은 헤이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는 유행하던 전염병을 종식시키고, 또 죽은자의 혼을 진정시키기 위해 시작되었던 것 같다. 기온 축제의 역사 등 그 상세한 것은 많은 좋은 책이 있기에 그에 양보하고, 여기에서는 기온 축제와 그에 얽힌 먹을거리에 대해 적고자 한다.
축제는 여름이 가장 더울 무렵에 행해진다. 식중독도, 지금의 열중증도 걱정되는 시기이다. 그 기온 축제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식재료가 갯장어鱧. 겉모습은 붕장어와도 비슷한 물고기인데, 여하튼 생명력이 강하다. 잡아올리고 난 뒤 반나절 정도 살아 있다고 하며, 그 떄문에 오사카에서 잡아올리고 교토에까지 운송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갯장어는 흰살 물고기로, 담백한 식감을 가진다. 더위를 먹어 식욕도 잃은 신체는 농후한 걸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갯장어가 중용된 이유의 하나는 이 풍미에 있다. 여름에 먹을 수 있는 흰살의 물고기, 그것이 갯장어였다.
다만, 갯장어에는 먹을 때 결정적인 결점이 있었다. 무수한 잔가시이다. 붕장어처럼 등뼈를 빼내면 그걸로 먹을 수 있을 만한 상품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교토에서는 그런 갯장어라도 먹을 수밖에 없다고 하기에, 그 자잘한 뼈를 자르는 '잔가시 자르기'라는 기술이 생긴 것이다. 등을 따서 등뼈를 뽑아낸 갯장어의 몸을, 껍질을 아래로 하여 도마 위에 두고 전용 식칼로 껍질 한 장을 남기고 등근육에 수직으로 식칼을 넣는다. 남아 있던 잔가시가 잘게 썰려 버리는 것이다.
잔가시 자르기는 칼집 간격이 생명이다. 이 간격이 성기면 가시 조각이 혀에 닿아 요리를 망쳐 버린다. 솜씨 좋은 장인은 3센티미터에 24개의 칼집을 넣는다고 한다. 잔가시 자르기는 기술의 집결이기에 장인에게도 솜씨를 발휘하는 하나이다. 손님이 앉는 카운터 앞에서 잔가시 자르기가 시작되면, 손님들도 이야기를 멈추고 젓가락을 쉬고 그 작업을 지켜본다. 서걱서걱 하는 리드미컬한 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군침이 돌 것 같다.
최근에는 교토나 오사카 이외에서도 갯장어를 내오는 가게가 나타났다. 잔가시 자르기는 간사이의 요리인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최근엔 깔끔하게 잔가시 자르기를 하는 가게를 도쿄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다. 도쿄에서도 유수의 음식점 거리가 있는 카구라자카神楽坂에 있는 캐쥬얼 프렌치 가게에서 갯장어 마리네를 먹은 적이 있는데, 잔가시 자르기가 훌륭했다.
갯장어 요리의 대표는 뭐라고 해도 '오토시'이다. 잔가시를 자른 갯장어의 살을 2-3센티미터 너비로 자른 걸 살짝 데쳐 얼음물에 담그기만 하는 간단한 것인데, 느끼함이나 비린내가 전혀 없는 정말로 상등의 일품이다.
교토에서 갯장어를 먹게 된 것은 다른 물고기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건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갯장어는 오사카에서도 자주 먹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오사카에서도 갯장어는 똑같이 잔가시 자르기를 한다. 오사카는 전통적으로 물고기, 특히 흰살 생선이 맛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 오사카 사람이 먹는 것이기에 갯장어는 "갯장어밖에 없었다"가 아니라, 잔가시 자르기의 수고를 들여서라도 먹고 싶을 정도로 맛있는 물고기였기 때문이 틀림없다.
더구나 오토시를 먹는 방법은 오사카와 교토가 조금 다르다. 오사카 사람은 이것을 녹은 겨자를 더한 초된장(겨자초된장)으로 먹는 일이 많지만, 교토 사람은 매실장아찌를 소량의 술이나 육수에 녹인 매실과육으로 먹는 일이 많다. 겨자초된장이든 매실과육이든 위장에 부드럽고, 또 적당한 자극이 식욕을 증진시킬 것이라 생각한다.
여름 교토의 먹을거리
교토의 여름 풍물시의 하나로, 니죠二条부터 고죠五条 부근의 카모강鴨川 우안에서 여름 동안만 영업하는 '유카床'가 있다. 정식으로는 '카모강 납량상納涼床'이라 한다. 계단형 지형 위에 세운 음식점이 하천 쪽에 마루를 설치한다. 영업은 여름만 하는데, 마루 자체는 붙박이이다. 하천 숨ㄴ과의 고저차는 5센티미터 정도나 될까? 그런 만큼 마루 위는 통풍이 잘 되어 시원하고, 개방감이 있다. 뇨이가타케如意ヶ岳의 '대大' 문자도 히에이산도 잘 보인다. 영업기간은 대략 5월의 연휴 무렵부터 9월 추분 무렵까지로, 그 이외의 계절은 휴업이다. 지붕이 없어서 비가 내리면 문을 닫고, 관람석에 있던 손님들은 방으로 대피한다. 즉, 관람석이 없는 시기는 실내에서, 그리고 여름철에는 관람석에서 영업하게 된다. 장르는 이전은 오로지 회식 요리, 이른바 교토 회식의 가게뿐이었는데, 최근엔 태국 요리나 중화 요리 등의 가게도 생기고 있다.
마루는 19세기 이래 교토의 여름 풍물시 중 하나가 된다. 교토의 여름은 덥다. 불쾌하다. 여름의 후반이 되면 식욕도 잃을 정도로 더위가 신체에 부담이 된다. 지금은 냉방의 발달로 많이 사라졌지만, 냉방 등이 없던 50년 정도 전까지는 해가 저문 뒤조차 더워서 실내에 있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시원함을 찾던 장소의 하나가 카모강의 하천 부지였다.
교토의 여름을 대표하는 먹을거리를 한두 가지 더 소개하고 싶다. 히가시야마東山의 산기슭에 있는 안라쿠지安楽寺에서 매년 7월 25일에 개최되는 '호박 공양'이다. 이 날에 호박을 먹으면 그해는 중풍(뇌혈관 장해)에 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공양 날에는 단가檀家의 사람들이 많이 모여, 조리를 하거나 찾아온 손님에게 대접하거나 한다.
흥미로운 건 이 공양에서 대접받는 호박이 '시시가타니鹿ケ谷 호박'이라 부르는 품종이라는 점이다. 시시가타니 호박은 표주박의 열매처럼 잘록한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호박을 세로로 반으로 잘라 밑부분 속에 들어 있는 씨앗을 제거하면 몇 센티미터의 크기로 잘라 나눈다. 그것을 대나무 껍질을 깐 냄비에 넣고, 육수와 설탕, 간장을 더해 40분 정도 조린다. 대나무 꼬치가 쑥 들어갈 만큼 부드러워지면 완성. 1인 한 조각을 작은 그릇에 담어 대접한다. 맛은 서양 호박처럼 농후함은 없고, 어느쪽이냐 하면 담백하고 약간 풋내가 나는, 옛날 일본 호박의 맛이 난다. 게다가 호박 치고는 꽤나 비싸다. 그래도 교토 시내의 어지간한 채소가게 안에는 시시가타니 호박을 두는 곳이 적지 않다. 호박 공양이란 말을 들으려는 것일까?
호박 공양은 시내 중심부(데라마치 산죠 아가루寺町三条上ル)인 야타데라矢田寺에서도 행해진다. 여기는 여름이 아니라 동지 무렵에 행해진다. 동지에 호박을 먹는 습관은 옛날부터 있는데, 야타데라의 공양도 역시 '중풍막이'의 유래인 듯하다. 사용되는 호박은 시시가타니 호박이 아니라 잘록하지 않은 보통 일본 호박이라고 한다. 다만, 매우 크게 기른 열매가 사용된다.
또 하나, 여름의 교토를 대표하는 요리가 있다. '카모賀茂 가지의 산적(田楽)'이 그것이다. 카모 가지 그 자체는 나중에 상세히 기술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그 산적에 대해 적고자 한다. 산적이란, 채소나 생기울 등의 식재료를 튀기거나 굽거나 하여 그 위에 된장을 바르는 요리로서, 사찰 요리의 하나이다. 또는 백된장과 적된장을 나누어 바른 걸 내는 가게도 있다. 카모 가지는 공 모양의 가지로, 껍질이 두텁고 검은빛깔이 난다. 큰 것은 지름이 10센티미터 가까이도 된다. 꼭지를 따고, 껍질을 수박 모양으로 깍아 적도에 평행하게 이등분하고나서 기름으로 튀기든지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볶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걸 다시 구워 절단면을 위로 해 산적 된장을 바르는 것이다. 교토에서는 된장이라고 하면 백된장이 대부분이기에, 산적 된장도 백된장을 쓰는 일이 많다.
가지의 산적 따위 어디에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건 카모 가지를 쓰다는 점이다. 푸짐하여 식사량이 적은 사람이라면 이거 하나만으로도 배가 부를 정도이다. 가지의 미네랄, 산적 된장의 염분과 당분, 거기에 지방분도 풍부한 영양가 많은 여름에만 가능한 일품 요리이다.
히에이比叡 재넘이 바람
여름이 더운 도시 교토. 그런데 교토의 겨울도 매우 춥다. 가장 겨울의 추위를 말하자면, 홋카이도나 도호쿠 지방, 또는 그 이외의 토지에서도 산속의 추위는 교토의 시가지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숫자 상으로 추위를 말하면, 교토의 추위 따위는 딱히 말할 것도 없다. 그점이 여름의 더위와는 다른 바이다.
교토 시가지가 지닌 기후의 특이성은 도시를 둘러싼 산이 낮다는 점에 있다. 교토부는 전역이 산인데, 그 최고봉은 표고 1000미터를 넘지 않는다(교토부의 최고봉은 미야코산皆子山으로 표고 971미터). 겨울의 계절풍은 도카이나 칸토우에서는 3000미터를 넘는 세키료우脊梁 산맥을 넘기 때문에 수분이 전부 한국의 동해 쪽으로 떨어지고, 푄 현상 탓에 상당히 데워져서 태평양 쪽에 이른다. 그런데 교토에서는 산이 낮기 때문에 수분이 완전히 떨어지지 않고 넘어온다. 표고차도 없고, 푄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교토의 겨울은 흐리고 구름이 끼고, 또 때로는 진눈꺠비가 흩날리기도 한다.
습도가 높기에 교토의 겨울은 살을 에는 추위가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살을 에는 추위란 무엇일까? 사전에 의하면, "살을 에는 추위"란 "신체의 속까지 추운 것"을 의미한다. 교토인들에게 물어보면, 살을 에는 추위란 분지 특유의, 뼛속까지 추운 듯한 추위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자면, '살을 에는 추위'는 교토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교토의 추위를 이렇게 표현한 교토인도 있다.
"집 안에 있으면 마루 아래쪽에서 추위가 찾아온다. 홋카이도 같은 곳과는 좀 (달라서) 겨울 추위에는 대응하지 않는다. 여름 더위에는 이런저런 궁리가 있지만."
이들의 의견을 가미해 생각하면, 교토의 살을 에는 추위에는 분지라는 지리적 특성이나 습도가 높은 데 더해 건물의 구조가 관계되는 추위라고 할 수 있다. 여름의 더위가 심한 만큼 겨울의 추위가 눈에 띄는 면도 있을지 모른다.
습도를 높이는 이유는 물이다. 교토 분지의 지하에는 비와호琵琶湖 물의 80%에 상당할 정도의 물의 양이 저장되어 있다고 한다. 즉 교토 분지는 거대한 물동이 위에 있다. 그 수분이 교토의 독특한 추위에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살을 에는 추위는 기온이란 일원적인 숫자만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감각일 것이다.
겨울에는 교토의 거리에도 계절풍이 분다. 교토에서도 그만큼 강풍은 아니지만, 히에이 재넘이 바람, 아타고愛岩 재넘이 바람 등의 바람이 분다. 히에이 재넘이란 이름은 원래는 히에이산의 동쪽 기슭, 비와호 쪽에서 부는 바람이었을 것인데, 교토인도 이 말을 사용하는 것 같다. 아타고 재넘이는 교토 분지의 북서쪽에 있는 표고 924미터의 아타고산에서 부는 바람으로, 그 때문에 산기슭의 사가嵯峨, 도리이모토鳥居本 근처는 추워진다.
또한, 교토에서 바람이라 하면 또 하나 '동풍東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동풍이 불면 향기를 전하라 꽃의 주인이 없다고 해서 봄을 잊지 마라(東風吹かば匂ひおこせよ梅の花主なしとて春を忘るな)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가 규슈 다자이부大宰府에 유배될 때 읊은 노래라고 하는데, 아마 후대의 누군가가 읊었을 것이다. 노래에 있듯이, 동풍은 초봄에 부는 바람, 즉 봄을 부르는 바람이다. 한겨울 동안 교토에서는 북쪽, 또는 서쪽의 바람이 분다. 봄이 가까워져 고기압과 저기압이 번갈아 열도를 통과하게 되면 서쪽에서 저기압이 가까워졌던 타이밍에 바람은 동쪽으로 향하게 된다. 이것이 동풍이다.
추위의 감각에는 날씨의 요소도 가미된다. 한국 동해 쪽의 지역에서는 겨울, 흐린 하늘이 계속되는 일이 많다. 하루종일 하늘은 납빛으로, 낮게 드리운 구름에서는 눈이 나린다. 교토의 거리에도 겨울은 흐린 날이 이어져, 나무들이나 건물은 색채를 잃어 도시 안이 음울한 분위기에 휩싸인다. 날씨 예보에서는 교토 시가는 오사카시나 고베시 등과 똑같이 '경기 중부'라고 하지만, 겨울 날씨라고 하는 의미에서 말하자면 한국 동해 쪽에 속한다고 해도 좋다.
교토의 겨울 요리
뼛속까지 시린 추위를 견디기 위해 교토인들은 겨울의 요리를 여러가지 고안했다. 살림살이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선호한 요리의 하나가 '자라' 요리일까? 담수어 문화를 가진 교토인 만큼 자라도 오래전부터 애호되어 온 듯하고, 이를 내는 가게는 의외로 많다. 그중에서 식도락가들의 만화인 <맛의 달인(美味しんぼ)>(카리야 테츠雁屋哲 원작, 하나사키 아키라花咲アキラ 그림)에도 등장한 '다이이치大市' 같은 자라 전문점까지 있다. 가게는 히데요시의 저택이었던 쥬라쿠다이聚楽第가 있던 곳, 즉 도시의 한가운데에 있다. 다이이치에서는 해탄骸炭을 사용해 여럿 중에 골라낸 질냄비에 1600도라는 고온으로 자라를 조리한다고 한다. 자라는 강장제라고도 해서, 이전엔 육체노동자들 사이에서 그 생피를 마시는 습관도 있었다. 또 그 독특한 풍모와 맛 때문에 꺼리는 사람도 많지만, 소재를 고른 전문가가 조리한 것은 놀랄 만큼 담백하고 중독성이 있다. 콜라겐을 풍부히 함유하고 있어서 여성들에게도 인기 식재료의 하나이다. 전골이나 '잡탕죽(〆の雑炊)' 등이 유행을 타지 않는 기본 요리이고, 겨울에는 확실히 딱 맞는 요리이다.
냄비를 쓰는 요리라고 하면, 두부탕(湯豆腐)을 드는 사람도 많다. 교토에서는 사찰의 영향도 있고, 풍부한 물을 사용한 두부 만들기가 성행해 여러 가지 두부 요리를 내는 가게가 많은데, 겨울에 한하여 말하면 역시 두부탕이 기본이다.
두부탕의 주역은 물론 두부. 두부의 원료는 대두, 물, 그리고 간수 등의 응고제뿐이다. 두부 만들기의 과정에서는 대량의 물이 사용된다. 두부의 주성분 가운데 하나가 물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만들어진 두부를 식히는 데에도 일시적으로 보존해 놓는 데에도 대량의 물이 사용된다. 그리고 담백한 식품인 만큼 콩만이 아니라 물맛이 힘을 발휘한다.
닭 백숙도 교토의 겨울철 기본 요리의 하나이다. 교토 제일의 번화가인 키야마치木屋町 거리. 그 시조 거리의 교차점에서 남쪽으로 내려간 곳에 있는 '토리야사鳥彌三'는 저 사카모토 료우마坂本龍馬도 다녔다고 하는 가게인데, 겨울에 내오는 백숙은 뽀얗게 흐린 국물에 고기가 뼈에서 간단히 떨어질 정도로 푹 삶은 뼈에 붙은 닭고기가 들어 있다.
전골 중에는 어디에도 없는 큰 냄비를 사용한 요리도 있다. 야마가타현의 향토 요리로 꼽히는 '토란 조림'은 그 대표라고 할 수 있는데, 교토에도 큰냄비를 사용한 겨울 요리가 있다. '삶은 무(大根炊き)'이다. 참고로, '삶은 무'라고 적고 '다이코다키'라고 발음하는 경우도 있기에 주의. 또한 교토만이 아니라 나라현이나 효고현에도 똑같은 행사가 있다.
교토에서는 시내의 몇 군데의 절이, 각각의 연중행사에 수반한 행사 음식을 대접한다. 앞서 호박 공양도 그러한데, 대접하는 것이니 대량으로 준비한다. 삶은 무도 절에 따라서는 1000개 단위의 무를 삶는다고 하기에 어중간한 양이 아니다. 조리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튀김과 함께 삶는 일이 많은 듯하다. '삶은 무'는 겨울 행사 음식인 동시에 '액막이'의 의미도 있었다. 1년을 어떻게든 무사히 보내고 해를 넘기는 일에 감사함, 다음해도 무병장수하길 바라는 염원을 담아서 교토인들은 삶은 무를 찾아 절에 참배했다.
신체를 따뜻하게 한다는 목적에서, 겨울 요리에는 식재료에도 궁리가 담겨 있다. 예를 들면, 갈분 음식도 그 하나이다. 갈분 음식은 식물인 칡(Pueraria montana var. lobata)의 뿌리에 모인 전분을 정제한 것이다. 이를 소량의 물에 녹여 가열해 세게 저어주면 투명하고 끈기가 강한 식품이 된다. 교토인들은 육수에 푼 '앙餡'을 계란찜 등의 찜이나 우동에 뿌려 먹는다. 차갑게 식기 어렵기 때문에 요긴하다고 한다. 갈분 음식은 원래는 흉년일 때의 구황식으로 사용되던 것이었다. 교토의 사람은 그 갈분 음식을 고급 식재료로 만들어 버렸다. 갈분 음식은 여름에도 먹을 수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하겠다.
겨울 교토의 식재료라고 하면 또 하나, 옥돔(グジ)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옥돔이라 하는 건 간사이 방언으로 전국적으로는 아마다이アマダイ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겨울 와카사만若狭湾 근처에서 잡히는 옥돔은 이전에는 고가로 거래되어 교토 시내의 요정 등에 운송되었다. 최근엔 유통이나 보존방법이 진보한 덕에 다른 지역에서 잡힌 것도 유통하게 되었는데, 역시 그곳은 상표의 저력 같은 게 있다. '바다의 교토'의 면목은 건재하다. 시내의 슈퍼마켓 등에서도 작은 것이나 약간 흠이 있는 있는 상품 등이 꽤 싼 가격에 나돈다. 고급품은 손댈 수 없지만, 일반 서민에게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이를 둘로 살을 발라 소금구이를 한다. 소금 양이 좋은 것은 정말 맛있다. 아무튼 지금은 저염이 대세인데, 염분을 줄이면 그만큼 좋지는 않다. '간(塩梅)'이란 말이 있듯이, 적당한 소금 양으로 준비된 생선은 그 맛이 한층 더해진다. 또는, 좋은 간으로 준비한 하룻밤 말린 것도, 이것 또한 맛있다.
생선의 비늘은 입에 거슬리지만, 옥돔은 비늘도 부드러워 잘 구우면 먹을 수 있다. 비늘 있는 쪽을 비늘째 굽는데, 이것이 참으로 고소하고 맛있다.
물의 교토
교토의 강
부 전체로 눈을 돌리면, 교토에는 꽤 큰 강이 몇 개 있다. 우선, 교토부 중앙부의 단바丹波 고지高地를 나와 북쪽 방향으로 흘러 한국 동해로 들어가는 유라강由良川. 똑같이 단바 고지를 나와 남쪽으로 흘러 나오는 것이 오이강大堰川이다. 이 강은 교토시를 원류로 해 가메오카시亀岡市를 흘러, 호즈保津 계곡을 경유해 다시 교토시에 흘러들어가 가츠라강桂川이라 이름이 바뀐다. 기즈강木津川은 부의 남부와 미에현三重県 서부, 나라현 북부의 산에 내린 물을 모으고 있다. 또, 우지강宇治川의 원류는 비와호이다. 우지강은 상류 쪽에서 세타강瀬田川이라 이름이 바뀌는데, 세타강은 비와호에서 흘러나오는 유일한 강이다. 이렇게 보면, 오이강(가츠라강), 기즈강, 우지강 세 강은 시가현 전역, 교토부 남부, 나라현과 미에현 일부의 물을 모으고 있다.
이 세 개의 강은 교토부와 오사카부의 경계 부근에서 합류해 요도강淀川이 되어 오사카만大阪湾으로 향한다. 이 합류점 부근은 지금은 수리공사도 진행되고 물길도 확실히 되어 있지만, 2차대전 전까지 여기에는 오구라이케巨椋池라고 부르는 거대한 유수지가 있었다. 세 강의 물길도 확실하지 않고, 홍수가 오거나 하면 오구라이케는 크게 불어났다. 이 오구라이케나 세 강의 치수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것이 히데요시로, 몇 개인지의 제방을 쌓고 물길을 고정하려 했다. 일찍이 이 거대한 저수지의 북안에 있던 후시미状見를 정비하고, 항구를 개척한 것도 히데요시이다. 후시미항状見港으로는 오사카만에서 요도강을 거슬러 올라올 수 있었다. 후시미항에서 교토의 시내로는 스미노쿠라 료이角倉了以와 자식인 소안素庵이 개척한 다카세강高瀬川이 통해 있었다. 다카세강은 지금도 건재해 그 북쪽 끝은 '키야마치니죠木屋町二条' 부근에 있다. 다카세강에 대해서는 나중에 적겠다.
다카세강의 바로 동쪽을, 똑같이 북쪽부터 남쪽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 카모강鴨川이다. 지금은 정말이지 교토다운, 느긋한 모양의 느낌으로 흐르고 있지만, 옛날엔 굉장히 난폭한 강이었다. 아무튼 시라카와白河 법황法皇으로 하여금 '천하의 뜻과 같지 않은 세 가지(天下三不如意)'라고 이야기하게 한 것 중의 하나이다. 지금처럼 둑을 보호하는 장치가 설치되기까지는 강의 폭도 훨씬 넓었던 것 같다. 시내 중심부에서는 카모강의 서쪽에 250미터 정도의 곳을 강과 거의 평행하게 남북으로 뻗은 가와라마치河原町 도로까지 강변이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카모강은 고쇼御所의 북쪽 가장자리를 동서로 통하는 이마데가와 도로의 바로 위쪽 부분에서 카모강賀茂川, 다카노강高野川이라는 두 가지 지류로 나뉜다. 이 중 서쪽의 카모강의 지류인 구라마강鞍馬川의 상류에 기부네貴船라는 토지가 있다. 강은 이미 매우 가늘고, 그 이름도 기부네강이라 바뀌어 있다. 시내에서는 차로 30분 정도의 지점인데, 시내가 찌는듯한 더위가 되어 있을 때에도 거짓말처럼 시원하다. 여기에는 구라마 가도를 따라 요리여관 등이 강의 흐름 위에 관람석(桟敷)을 만들고, 요리를 내오고 있다. 여기에서 이들 관람석은 '마루(床)'라고 부르지 않고, '강마루(川床)'라고 부른다.
가와라마치 도로에서 더 200미터 미치지 않는 서쪽에 데마치寺町 도로라는 도로가 있다. 히데요시는 이 데마치 도로와 가와라마치 도로 사이에 '오도이御土居'라는 토루土塁를 만들었다. 히데요시는 교토를 성곽으로 둘러싼 도읍으로 만들고자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튼 카모강은 교토시가의 동쪽 가장자리에 해당한다. 또, 오도이는 그 대부분이 헐려버렸지만, 매우 일부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우쿄右京의 강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도시의 동쪽 반분, 즉 사쿄左京의 강 이야기였다. 교토에서는 사쿄가 동쪽에 있어서 우쿄가 서쪽에 있다. 지금 일본에서 발행되는 지도의 대부분은 북쪽을 위로 하고 그려져 있기에, 사쿄가 오른쪽에, 우쿄가 왼쪽으로 온다. 조금 위화감이 들지만, 우쿄, 사쿄의 부르는 방법은 고쇼에서 보아, 즉 남쪽을 보아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하는 것이다.
일찍이 교토 시가에는 서쪽, 즉 우쿄에도 강이 흐르고 있었다. 다만 우쿄의 평야에는 서쪽 끝을 흐르는 가츠라강을 제하고 큰 강은 없고, 오로지 소하천만 있다. 소하천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예를 들면 텐진강天神川은 북쪽에서는 꽤 깊은 계곡을 새기고 있는데 하류에서는 토사로 강바닥이 주변 지면보다 높아져 자주 홍수를 일으켜 왔다. 텐진강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를 모시는 기타노 텐만구北野天満宮의 바로 서쪽을 흐르고 있다. 기타노 텐만구의 경내 서쪽 가장자리는 '오도이'가 되어 있고, 그 위부터 텐신강을 보면 깊은 계곡 같다. 여기는 시내에서도 오도이가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이다. 교토 시내에 이와 같은 지형이 있는 것은 시민 중에도 알고 있는 사람이 적을 것이다. 히데요시의 머릿속에서는 카모강과 텐진강으로 좁아진 토지가 성벽으로 둘러쌀 만한 도읍의 범위였을 것이다.
텐진강에서 더 서쪽에는 완만한 기복을 동반한 비교적 평평한 토지가 펼쳐져 있었다. 근처에는 작은 고분이 점재하고, 아마 고분 시대부터 사회가 형성되어 있던 것으로 생각된다. 벼농사를 포함한 농업이 영위되었을 것이다. 시대가 흘러 10세기에 평지의 서쪽 끝에 있는 아다시노化野에 지어졌던 절, 넨부츠지念仏寺에 남은 전승에 의하면, 쿠우카이空海가 근처에 점재한 유골을 모아서 매장했다고 한다. 즉, 이 땅은 고대부터 '들판(野)'이었다.
한편, 넨부츠지의 1.3킬로미터 정도 동쪽에는 사가嵯峨 왕이 9세기 초두에 건립한 '사가 리궁離宮'에서 발단하는 다이카쿠지大覚寺가 있다. 다이카쿠지의 경내에는 '나코소名古曽의 폭포'가 있었다고 한다. 헤이안 시대 초기의 귀족들은 이 폭포를 완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뜻밖에, 당시는 주위가 더욱 기복이 심하며 산수의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운 토지였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10세기 말, 후지와라노 킨토우藤原公任의 무렵에는 폭포가 이미 없었던 것 같다.
폭포의 소리는 끊어진 지 오래인데 이름이라도 흐르는 걸 듣고 싶네 -다이나곤大納言 킨토우
이처럼 보면, 이 지역은 전체적으로 상당히 물이 많은 토지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이카쿠지의 뒤, 즉 산 쪽에는 지금도 여러 줄기의 소하천이 흐르고, 또 사가뜰(嵯峨野) 일대에는 가을에 벼베기가 끝난 논바닥에는 물이 고여 있는 걸 볼 수 있다. 다이카쿠지 경내에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오오사와노이케大沢池'의 옆을 흘러 가츠라강에 합류하는 아리스강有栖川도 앞의 텐진강과 같이 하류는 토사로 강바닥이 지면보다 높아져서 자주 범람해서는 사람들을 괴롭혀 왔다. 지금도 근처는 장마철이나 가을비 무렵에 홍수가 많다. 우쿄는 물의 토지, 수해 다발의 땅이었다.
교토 분지의 물
교토시는 물의 도시이다. 아니, 물의 도시라 말하자면 도쿄(구 지역)도 오사카도 물의 도시이다. 물이 있었기에 그곳에 큰 도시가 성립했다. 인구 100만을 넘는 도시에서 바다에 면해 있지 않은 것은 교토시와 삿포로시, 사이타마시 뿐이다. 바다에서 떨어진 도시로서는 교토시가 일본 최대의 도시라고 해도 좋다. 그럼 바다가 없는 교토의 도시가 왜 물의 도시인 것일까?
이미 기술했듯이, 교토 분지의 지하에는 비와호의 80%라고도 하는 양의 지하수가 저장되어 있다고도 한다. 이 지하수를 충당해 온 것이 도시의 북쪽에 내리는 비나 눈이다. 교토가 여름에 무덥고, 겨울에 살을 에는 추위가 되는 것은 그 탓이라고 이야기된다. 지하수에는 수맥이 있다. 수맥이 있는 곳에서는 우물을 파면 그 풍부한 물을 사용한다. 특히 지금의 호리카와 도리에서 동쪽의 토지는 표면이 사력층으로 덮혀 있어서, 얕은 곳에서 양질의 물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의 고쇼에서 니죠성, 그 남쪽의 신센엔神泉苑 근처는 특히 그러하다. 한편, 서쪽은 점토층으로 덮혀 지하수가 풍부하지 않았다.
이 지하수 덕에 교토에는 두부나 술 등 좋은 물이 없으면 만들 수 없는 식품이 옛날부터 있었다. 두부는 삶은 대두를 갈아서 으깨 거르고, 만들어진 두유에 간수 등의 응고제를 넣어서 굳혀 물에 넣어 만든다. 교토에서는 두부집이 아직 시내 곳곳에 남아 있다. 그 몇 군데가 지하수를 사용하고 있다고 하기에, 교토의 두부는 바로 이 지하수의 산물이다. 시내의 두부 가게 분포를 보면, 결코 한결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후술하듯이, 물을 많이 사용하는 술, 간장, 밀기울, 식초 등의 가게도 또한, 두부 가게가 많은 지역에 겹쳐서 보인다. 그리고 이 지역이야말로 앞의 '고쇼에서 니죠성, 신센엔 근처'의 지역과 겹쳐 있다.
교토의 도시에는 시내의 중심부에조차 우물이 살아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업소가 이 우물물을 사용하고 있다. 사정은 요리집도 마찬가지로, 일찍이 많은 요리집은 우물물로 조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가장 최근에는 여러 가지 규제가 생겨, 우물물을 그대로 사용하는 가게는 -적어도 겉으로는-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우물은 시민 생활 속에서도 살아 있다. 시내에는 교토 고쇼의 주변을 중심으로 몇 곳인지 현역 우물이 있다. 몇 곳의 우물은 시민에 개방되어 있어서 물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 다만, 취수량은 제한되어 있는 곳도 있다. 고쇼의 동쪽, 나시노키梨木 신사의 '소메이染井'에서는 100엔으로 1인 1일 5리터까지라고 정해져 있다. 소메이의 남쪽 500미터 정도인 곳에는 '키요시코우진清荒神'이, 거기에서 1000미터 되지 않는 곳에는 시모고료 신사가 있어, 모두 지하수를 퍼올리는 우물이 있다. 이들 우물은 에도 시대부터의 것으로, 그곳에서 퍼올린 물은 정결한 물로 사용되어 왔다. 한편, 일상적인 가정의 조리에, 또는 차 교실에, 작은 찻집이 내는 커피에, 여러 가지 용도로도 사용되어 왔다. 물론 여행자가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하여 마셔도 좋았다.
100만 도시의 중심부에 이와 같은 우물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은 어쩌면 교토 정도일 것이다. 된장이나 술, 밀기울 등 교토의 먹을거리를 지탱해 온 사업자의 물도, 개인의 생활용수도, 적어도 이때까지는 긴 시간에 걸쳐 쌓아올려 온 관습과 규칙에 따라 지하수를 사용해 왔던 것이다. 물은 공유재산. 그것이 교토의 물이다. 최근, 공유 관념을 계속 잃어버려, 그 지속가능성에 적신호가 켜지고 있다.
교토의 물에 대한 지혜는 지하수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지표를 흐르는 강에도 궁리가 있었다. 특히 고쇼로 흐르는 배수에는 당시의 지혜가 결집되어 있었다. 고쇼의 북쪽에 위치한 쇼코쿠지相国寺의 광대한 부지에는 카모강에서 채집한 물이 흘러, 고쇼의 북쪽 가장자리부터 고쇼 안으로 들어갔다. 이 수로는 도중, 카미고료上御霊 신사와 쇼코쿠지를 통하고 있는데, 쇼코쿠지의 경내에는 그 수로 흔적이나 그곳에서 채집한 물을 사용한 시설이 남아 있다.
물로 만든 교토의 먹을거리
교토의 물이 지닌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건 연수軟水라는 점일까? 즉, 미네랄의 함유율이 낮다. 이점이 다시마 육수를 발달시킨 것이라고도 한다. 교토나 오사카의 육수는 다시마에 의한 바가 크다. 한편 도쿄의 물은 일본의 물치고는 경도가 높고, 그래서 다시마 육수 문화가 성장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경도가 높은 물에서는 다시마 육수의 감칠맛이 우러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내 니시진西陣의 요정 '만시게萬重'의 주인 다무라 게이고田村圭吾 씨가 수입 물인 에비앙과 가게의 우물물로 다시마 육수를 내어 비교하는 실험을 한 일이 있다. 에비앙은 프랑스산 물로 경도 300 정도의 상당한 경수이다. 일본에는 이렇게까지 경도가 높은 물은 수돗물에도, 생수 등으로 시판되는 각지의 명수 중에도 알려져 있지 않다. 비교 결과는 명백했다. 에비앙을 써서 우려낸 육수는 색도 감칠맛도 약해 만족스럽지 못했다. 에비앙 같은 경수는 다시마 육수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았다.
다만, 미네랄의 함유율이 너무 낮으면 이번에는 다시마가 녹아서 비린내나 끈적임이 나와 버린다. 적당한 경도의 물이 다시마 육수를 우려내는 데 좋다고 하는 것이다.
깨끗한 물이 풍부하게 있기 때문에 생밀기울도 만들어 왔다. 밀가루를 물에 녹여서 경단으로 만들고, 무명 자루에 담아 흐르는 물속에서 전분만 씻어내면 단백질의 일종인 글루텐이 남는다. 이것이 생밀기울의 주원료이다. 좋은 물을 충분히 사용하지 않으면 만들 수 없는 식품이다.
물을 지키기 위해 교토인은 신체를 바치는 일도 있었다. 후시미의 술 저장고(酒蔵)는 2차대전 이전, 주조용 물을 지키기 위해 당시의 부와 대치하며 지하수를 지켰다고 겟케이칸月桂冠의 전 부사장 구리야마 카즈히데栗山一秀 씨는 이야기한다. 후시미를 통하는 철도(지금의 킨테츠 교토선)의 부설에 즈음해, 지하로 통과하려 하는 부의 계획에 대해 주조조합 측은 지하수의 수맥이 끊어질 우려가 있다고 하는 이유로 반대해 고가로 하자고 계속 주장했던 것이다. 상당한 용기가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주장이 통하여 철도는 고가선이 되었다.
술은 물과의 연관성이 강한 식품의 하나이다. 연관성이 강하다고 하기보다, 술의 용적 중 80% 이상은 물이다. 그 좋고 나쁨이 술의 품질을 결정한다. 그리고 교토는 술의 고장이기도 하다. 지금은 술의 고장이라고 하면 오로지 도호쿠나 호쿠리쿠北陸가 떠오르지만, 적어도 그건 최근의 일이다.
예전에는 낙중(라쿠츄洛中)에도 많은 술 저장고가 있었다. 무로마치 시대 무렵에는 지금의 '라쿠츄'라고 부르는 부분에는 340채의 술 저장고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라쿠츄 인구를 20만 명이라 하면 600명 미만에 1채라는 높은 비율이다. 에도 말에는 그 수가 240채까지 감소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지역에 있는 술 저장고가 2채밖에 없다. 그 가운데 하나, 사사키佐々木 주조酒造는 1893년(메이지 26) 창업한, 다른 저장고에 비하면 비교적 새롭지만 장소는 예전의 쥬라쿠다이가 있던 곳이다. 즉, 그곳은 도시의 한가운데였던 곳이다. 또, 현 사장인 사사키 아키라 씨의 친형이 배우인 사사키 쿠라노스케 씨인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술의 주원료는 쌀, 물, 누룩, 그리고 효모이다. 원재료 측면에서 말하면 술은 매우 간단한 식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에서 다양성이 나오는 것은 바로 조합의 묘라고 해도 좋다.
분지에 생긴 도시
교토 분지의 지리학
도쿄 방면에서 오는 신칸센의 전차는 교토역에 도착하기 직전에 2개의 터널을 지난다. 처음의 긴 터널이 오토와산音羽山 터널(길이 5045미터)로, 전차는 이 터널의 안에서 시가현에서 교토부로 들어온다. 그리고 다음의 짧은 터널이 히가시야마 터널(길이 2094미터)로, 남북으로 뻗은 히가시야마를 빠져 나가 교토역에 도착한다. 전차는 교토역에 도착하기 직전에 하나의 강을 건넌다. 카모강이다. 속도도 충분히 낮추어 가고, 하차하는 승객들도 승강구 발판에 줄 서 있다. 진행방향의 오른쪽 창으로는 삼각형을 한 산이 카모강의 저 멀리에 보인다. 히에이산(표고 848미터)이다. 이 산은 교토의 역사를 말할 때 무시할 수 없다. 히에이산은 교토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일종의 랜드마크가 된다. "어디에서나 보인다"는 것은 히에이산에서는 교토의 시가지가 잘 보인다고 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 히에이산에 올라서 보면, 교토의 도시 전체가 손에 잡힐 듯이 보인다. 그러니까 엔랴쿠지延暦寺의 승려들은 그곳을 본거지로 삼았다.
히가시야마는 시가지에서는 히에이산에서 이어지는 산줄기로 보이며, 히가시야마 연산連山, 히가시야마 연봉連峰으로도 불리고 있다. 읽기는 '히가시야마'이지만, 연배가 있는 사람 중에는 '히갓샤마' 같이 발음하는 사람도 많다.
히가시야마는 노래나 하이쿠俳句로도 읊어져 왔다. 에도 시대 중기의 배우 핫토리 란세츠服部嵐雪가
이불을 덮고 자는 모습이네 히가시야마(布団着て寝たる姿や東山)
라고 노래했듯이, 완만한 산줄기가 남북으로 이어진다. 또한, 히가시야마는 지금은 나무들로 덮여 있지만, 과거의 식생에 상세한 오구라 준이치小倉純一 씨에 의하면 란세츠의 시대에는 교토 주변의 산에 나무가 거의 자라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나무들이나 풀은 베어져, 연료나 등불로 사용되고 있었을 것이다.
히가시야마의 산줄기 중간쯤, 고쇼에서 보아 거의 정동쪽에 해당하는 곳에 '뇨이가타케如意ヶ缶'가 있다. 그 중턱에는 매년 8월 16일에 행해지는 '5산 송별 불(送り火)'의 연소판의 하나 '대문자산大文字山'이 있다. 덧붙여, '5산'이라 하지만 과거에는 10개를 넘는 산이 있었다고 하는 연구도 있다.
교토의 시가지는 분지의 동쪽에 붙어 있다. 서쪽은 최근까지 개발의 손이 뻗치지 않아, 지금도 농지가 남아 있다. 분지의 가장 서부에 있는 산이 아타고산愛宕山(표고 924미터). 아타고산의 앞에도 낮은 산이 있다. 기오우지祇王寺, 니손인二尊院 등의 사원을 산기슭에 거느린 오구라산小倉山과 그 남쪽으로 전개되는 아라시야마도 이 산줄기의 일부이다. 산은 다시 '니시야마西山'이라 불리는 산으로 이어져 간다.
산에는 산의 식재료가 있다. 그것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세히 적겠지만, 이들의 존재가 교토의 먹을거리를 형성해 왔음은 틀림없을 것이다. 분지에 있다는 점이, 교토의 먹을거리를 특징지어 왔다고 해도 좋다. 그 하나가 죽순이다. 교토 분지의 주변에는 몇 개의 활단층이 뻗어 있다. 교토 대불大仏을 쓰러뜨린 것도, 이들 활단층의 하나에서 일어났던 지진이다. 장래에 이들 중 어느 것인지가 움직이면, 교토의 도시는 다시 대지진에 휩쓸려 대혼란에 빠질 것이다. 활단층 등 폐스럽기 짝이 없는 이야기이지만, 실은 죽순이 이 활단층의 존재와 관계가 있다고 한다. 교토 분지의 죽순 산지는 활단층의 파쇄대를 따라서 있다. 그리고 대나무는 활단층의 파쇄대를 보강하기 위하여 심어졌다고 지질학자 오이케 카즈오尾池和夫 씨는 쓰고 있다. 즉, 방재의 의미에서 식재된 대나무가 지금의 죽순 산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죽순의 명산지는 지진이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이야기이다.
일본 열도의 '동서東西'
자연지리학의 입장에서 보아, 교토는 일본 열도를 동서로 나누는 경계 근처에 있다. 이것이 교토의 먹을거리 특징을 형성해 온 요인의 하나가 된다. 동서의 경계선 -그 하나의 드러남을 가을의 단풍으로 보도록 하자.
교토라고 하면 단풍이 아름다운 도시라고 대부분의 일본인이 생각하고 있다. 우쿄 아라시야마의 단풍, 다카오高雄의 단풍, 히가시야마 산기슭의 난젠지南禅寺, 기요미즈데라清水寺, 도우후쿠지東福寺 등등. 교토에는 단풍의 명소가 여러 군데 있다. 그렇지만 그 대부분이 신사 불각의 곁에 있다. 신사 불각이 단풍의 명소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신사 불각이 그곳을 단풍의 명소로 만든 것이다. 아라시야마의 단풍도, 에도 시대 아라시야마를 사찰령으로 관리하고 있던 텐류지天龍寺가 관리했다. 사찰이 강 건너의 아라시야마를 정원의 일부로 이용해 정원을 배치한 것이다. 텐류지는 에도 시대까지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세력과 사찰령을 가지고 있었다.
텐류지에 한하지 않고, 교토의 신사와 사찰, 특히 불교 사원은 메이지 초기에 그 힘을 잃었다. 메이지 정부는 '신불분리령神仏分離令'에 의해 신도神道를 불교에서 떼어내어 국가 신도로 만들려고 했다.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그 사찰령이 크게 몰수되었다. '폐불훼석'의 폭풍이 전국적으로 몰아쳤던 것이다.
동일본의 단풍은 교토의 단풍과는 크게 다르다. 나도 멋진 동일본의 단풍을 2번 본 적이 있다. 한번은 오쿠닛코우奥日光에서의 일. 다른 한번은 센다이 안쪽의 아키호秋保 온천에서의 일. 눈앞에 펼쳐진 산 전체가 빨강과 노랑으로 물들어서, 그곳에 있는 자신의 신체가 붉게 물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동일본에도 신사와 사찰의 단풍은 틀림없이 있지만, 주력은 어디까지나 산의 단풍이다. 그렇다, 동일본의 단풍은 많지만, 인간의 영향은 희박한 자연의 산물이다.
동서 일본에서 단풍의 모습이 다른 배경에는 일본 열도의 자연 식생 구조가 관계되어 있다. 일본 열도의 동쪽, 북쪽 반분의 토지에서는 숨을 구성하는 주요 수종은 너도밤나무, 물참나무, 느티나무, 벚나무 등 낙엽활엽수이다. 그들은 가을에 낙엽이 지고, 낙엽이 되기 전에는 빨강이나 노랑으로 단풍이 든다. 한편 서쪽, 남쪽 반분의 숲에서는 산의 높은 곳은 별도로 하고, 조엽수(상록활엽수)가 우점한다. 수종으로는 주목, 가시나무, 모밀잣밤나무, 녹나무, 소귀나무 등이다. 이들 수종은 가을에는 낙엽이 지지 않는다. 오래된 나뭇잎은 봄에 새잎이 나오고나서 떨어져 간다. 상록활엽수의 '상록'을 '낙엽'과의 대비로 파악해 낙엽이 없는 수종이라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상록활엽수는 눈에 띄는 단풍이 들지 않는다.
두 가지 숲의 경계서은 아래 그림처럼 된다. 그리고 교토는 확실히 이 경계선 근처에 있다. 매우 흥미롭게도 이 경계선은 숲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문화 요소의 북쪽 한계 또는 남쪽 한계도 된다. 물론 문화 요소에 의하여 그들 경계선의 위치는 조금씩 어긋나지만, 이 그림을 보면 일본의 문화가 결코 한결같고 전국 일률적인 것은 아니란 점을 잘 알 수 있다.
그림을 좀 더 상세히 보도록 하자. 어떠한 문화 요소가 관계되어 있는 것일까? 식문화를 예로 보도록 하자. 우선 떡의 모양에 주목해 본다. 서일본에서는 둥근떡이 많지만, 동일본에는 각진떡이 많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갓 찧은 떡을 작게 떼어 둥글게 만든 것으로 정월의 카가미모치鏡餅는 둥근떡의 큰 것을 말한다. 한편 각진떡은 찧은 떡을 평평하게 펼치고 식힌 뒤 직사각형 모양으로 자른 다음 그것을 얇게 썰어서 만든다. 역사적으로 둥근떡 쪽이 오래되고, 각진떡은 에도 시대의 에도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떡의 동서차는 최근엔 약간 희미해진 경향이 있다. 둥근떡 권역에 속하는 교토의 슈퍼에서도 최근엔 한 개씩 포장된 자른떡이 매장에 진열되어 있다. 물론 일본과자 가게, 떡 가게에 가면 둥근떡이 봉지에 담겨 팔리기도 한다. 즉 교토에서는 지금 두 떡이 공존하고 있다.
그밖에도 파의 종류(흰파인지, 잎파인지), 간장의 종류(국간장을 사용하는지 아닌지), 장어의 조리법(등을 따는지 배를 따는지, 찌고나서 굽는지 초벌구이로 하는지) 등에서 눈에 띄는 동서차를 볼 수 있지만, 상세한 것은 생략한다.
히가시야마東山, 니시야마西山, 기타야마北山
분지에 있다고 하는 건,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교토의 도시는 세 방향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표현된다. 남쪽은 오사카 평야를 향해 열려 있는데, 동쪽과 서쪽, 북쪽에는 산이 있다. 각각 히가시야마, 니시야마, 기타야마와 같이 부른다.
앞쪽에서 언급한 숲의 분포는 생태학의 언어로는 수평 분포라고 부른다. 위도에 따라서 수종이 변화한다. 한편 똑같은 변화가, 산의 기슭에서 정상을 향하여, 즉 높이에 따라 일어난다. 이것을 수직 분포라고 한다. 교토의 산에도 수직 분포가 보인다. 히가시야마나 니시야마의 표고가 높은 부분은 삼나무 인공림으로 섞여 있고 일부에는 벚나무와 졸참나무 등의 낙엽활엽수의 숲이 남아 있다. 겨울에는 엷은 먹물을 흘린 것 같은 산의 표면이, 봄이 되면 아래쪽부터 순차로 연한 연둣빛으로 변하며 이윽고 산벚나무의 꽃이 피기 시작한다. 벚꽃이 끝날 무렵에는 수종마다 신록의 녹색이, 이 또한 아래쪽부터 위쪽으로 퍼져 나아간다.
한편 산기슭에는 많은 모밀잣밤나무가 보인다. 모밀잣밤나무는 조엽수(상록활엽수)의 대표적인 수종 중 하나이다. 모밀잣밤나무의 존재는 신록 무렵에 두드러진다. 황금연휴 전후의 시기에 히가시야마나 니시야마 근처에는 산기슭이 선명한 신록으로 물들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모밀잣밤나무의 신록은 새싹과 꽃이 선명한 노란색을 띠는 것이 특징이라 멀리서도 잘 보인다. 게다가 그 빛깔은 나무마다 미묘하게 달라서,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복슬복슬 피어오르는 뭉게구름 같은 그 모습은 늦봄의 풍물시이기도 하다. 모밀잣밤나무의 꽃은 독특한 향이 난다. 취향은 사람에 따라 나누는 듯하지만, 그 존재감은 이 향기에 의하여 더욱 두드러진다.
아마도 시가지 부분도 예전에는 모밀잣밤나무 등이 자라는 숲이었을 것이다. 히가시야마구의 이마히에新日吉 신궁의 신목에는 모밀잣밤나무 거목이 포함된다. 수령은 500년에서 800년이라 한다. 사쿄구의 시모가모下鴨 신사 경내의 다다스糺의 숲에도 모밀잣밤나무 거목이 몇 그루 있다. 둘레는 큰 것이 3미터 정도. 상당히 오래된 나무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교토에서 기타야마라고 할 때, 두 가지 다른 의미가 있다. 하나는 기타야마 도로라는 길이나 지하철 가라스마선의 기타야마역으로 대표되는 토지이다. 기타야마 도로는 멋쟁이 부티크나 빵집이 즐비한데, 도로 자체는 새롭다. 또 기타야마는 교토 공예섬유대학, 교토 노트르담 여자대학, 교토부립대학, 불교대학 등의 캠퍼스와 부립 식물원이 펼쳐진 교육, 문화 지구가 되어 있다. 이 의미에서 기타야마란 이름은 '기타야마 문화'라고 부르는 무로마치 시대에 일어난 공가의 문화와 무가의 문화, 나아가 선종의 문화 등이 융합된 독특한 문화에서 온다. 통칭 킨가쿠지金閣寺(기타야마 로쿠온젠지鹿苑禅寺)의 장소가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의 '기타야마 산장'에 있었던 것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그리고 또 하나의 기타야마는 문자 그대로 북쪽에 있는 산의 통칭으로, 히가시야마, 니시야마에 상대하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수험에 관계를 가진 구라마산鞍馬山이 있는 이외에, 기타야마 삼나무로 만드는 기타야마 통나무의 산지이기도 하다.
산의 교토
민속학에서는 일본의 문화를 '산의 문화'와 '바다의 문화'로 크게 구별해 왔다. 이 구분은 지도 위에 선을 그어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관념적인 구분이겠으나 두 가지 문화권은 우미히코海彦와 야마히코山彦, 바다의 신과 산의 신, 잉어와 도미와 같이 늘 대비적으로 이야기되어 왔다. 이 의미에서 교토의 문화는 산의 문화이다.
삼면을 산으로 둘러싸인 것이 교토의 먹을거리를 특징짓는 큰 요소의 하나이다. 산에는 산의 식재료가 있다. 에도(도쿄)나 오사카에는 이들이 없었다. 산의 식재료에는 차, 죽순, 버섯, 산나물 등이 있는데, 그 대부분이 일본 원산이나 더없이 옛날 시대에 일본 열도에 도래한 것들이다. 이들 가운데 차는 제3장에서 다룬다. 또한 죽순은 이미 기술했듯이, 분지를 둘러싼 산기슭의 단층대에서 생산된다.
산의 식재료 가운데 교토의 전통적인 요리의 소재로 빠질 수 없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우선은 덩이줄기류에서 살펴보자. 덩이줄기라고 하면 중요한 것이 참마이다. 기원은 불명이다. 교토의 참마라고 하면 <우지습유 이야기宇治拾遺物語>의 '토시히토 마죽의 일(利仁芋粥の事)'이 떠오른다. 풍채가 나아지지 않는 하급 귀족(5位)의 남자가 어느 대향연의 남은 음식에 있던 마죽을 보고 "이걸 배불리 먹어 보고 싶다"고 중얼거리는 데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중얼거림을 나중에 출세를 하는 후지와라노 토시히토藤原利仁가 들었다. 며칠 뒤 토시히토는 5위를 꾀어서 고향인 츠루가敦賀(후쿠이현福井県)로 나간다. 그리고 약속대로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대량의 마죽을 대접한다.
<우지습유 이야기>에서는 5위가 마죽을 대접하기 전후 토시히토의 저택에 머물렀을 때, 누군가가 근교의 것에게 '단면 9센티미터, 길이 9미터의 마'를 아침까지 지참하도록 큰소리로 지시하는 걸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는 이 크기의 참마가 마당에 수북이 쌓여 있는 걸 보았다. '길이 9미터'라고 한 것에서, 토시히토들의 '마'는 지금의 긴마(長芋) 같은 것이었던 듯하다. 그렇다 해도 '단면 9센티미터'의 마라고 하면 상당히 굵다.
마죽은 이 마를 껍질을 벗기고 얇게 썬 다음 미센味煎, 즉 '아마즈라(甘葛)'로 푹 삶아 만든 요리였던 것 같다. '아마즈라'가 무엇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일설에는 담쟁이 등의 수액을 졸여 만든 감미료라 한다. 즉, 이 시대의 마죽은 일종의 디저트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교토와 참마의 관계를 물어서 '간 마'라는 답이 나오면, 그건 꽤 '정통'한 것이다. 교토와 일본해 쪽을 잇는 가도 연변의 입구(교토에서 보면 출구)에 해당하는 야마바나山端에 450년 전부터 있다고 하는 요리집 '헤이하치平八 찻집茶屋'의 명물 요리가 그런 것이다. 저 기타오지 로산진北大路魯山人도 자주 다녔던 가게라고 한다. 잘게 간 마를 다시 확으로 잘 갈아서 된장의 육수에 녹인 걸 보리밥 위에 뿌려 먹는다. 이 가도는 이 책에서도 몇 번이나 등장하는 오오하라 마을을 지나서 시가현으로 들어가, 다시 산을 넘어 와카사로 빠지는 가도이다. 그리고 이 가도야말로 교토에 고등어 등의 물자를 운송한 고등어 가도의 하나였다.
참마를 쓰는 또 하나의 식품이 참마 만쥬(薯蕷饅頭)이다. 잘게 간 참마를 쌀가루나 밀가루와 섞어 만든 피에 고운 앙금을 감싸 찐 상급 과자로, 의식의 답례품 등으로 쓰는 '홍백 만쥬'는 그 대표 예이다. 참마의 점성이 만쥬의 피의 찰기로 뛰어나다고 할 것이다. 덧붙여 서여薯蕷라는 두 글자는 지금은 거의 사어로서, 차자로 상용만쥬常用饅頭(또는 상용만쥬上用饅頭)란 이름 쪽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토란
토란은 참마와 마찬가지로 나카오 사스케中尾佐助가 말하는 '뿌리 재배 농경'의 요소(나카오 <재배식물과 농경의 기원>, 이와나미 신서, 1966)의 하나로서, 태평양 서남부 섬들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아마 매우 오래된 시대에 일본 열도로 운송되었다고 생각된다.
토란은 참마에 비하면 작물의 성질을 갖는다. 그건 남방 유래의 작물이기에, 재배에는 북방한계가있다. 즉, 열도의 남쪽부터 북쪽으로 시간을 들여서 이동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각지에 고유 품종을 남겼다.
"떡 없는 정월"이란 밀속이 있듯이, 그건 떡과 등가의 것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떡 없는 정월이란 일본 각지에 남아 있는, 찹쌀떡을 대신해 토란을 사용하는 습속으로 일본 각지 군데군데에 남아 있다. 아마도 충분한 쌀의 생산이 이루어질 수 없는 토지의 습속이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그건 그렇고, 교토에서는 전통적으로 머리토란(頭芋)이라 부르는 토란을 먹는 문화가 있다. 머리토란은 어미 토란, 즉 봄에 심은 씨토란이 계절을 지나며 굵어진 것을 말한다. 대부분의 품종은 이 어미 토란 주위에 작은 토란(자식 토란)이 생긴다. 어미 토란은 양분이 빠져 버려 먹을 수 없게도 되는데, 품종에 따라서는 재배 방법에 따라 충분히 먹을 수 있다. 어미 토란은 교토나 나라 등의 오랜 가문에서는 정월의 떡국에 통채로 넣었다.
머리토란을 먹는 건 이전엔 '집주인'뿐이었다. 남의 위에 설 수 있도록, 그리고 어미 토란(머리토란)이 많은 자식 토란을 달고 있는 것처럼 자녀를 낳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모두 지금은 완전히 시대에 뒤쳐진 사고방식이 되어 버렸다.
교토의 토란 요리의 또 하나가 '토란포(いもぼう)'이다. 이름을 들어서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데, 새우토란과 대구포를 함께 익힌 것. 교토에서는 익히는 일을 '다이탄炊いたん' 이라 한다. 또한, 토란포는 이 일품을 전용으로 내는 가게, 창업 300년이라 하는 노포의 이름이기도 하다. 교토인 사이에서는 '토란포'는 종종 이 가게 이름을 의미한다.
토란포에서는 토란이 대구의 살을 부드럽게 하고, 또 대구살에 함유된 콜라겐이 토란의 빛깔을 돋보이게 하는 상승작용이 이 일품을 최고급 조합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닐까 하고 전승요리 연구가 오쿠라 아야오奥村彪生 씨는 말한다. 이처럼 절묘한 조합을 교토의 요리인들은 '만남(であいもん)'이라 부른다. 만남으로서는 이외에도 다시마와 가다랑어의 맞춤육수(あわせだし), 장어와 오이의 '장어오이(うなきゅう 또는 うざく)', '오리파(鴨葱)'라는 '오리고기와 흰파' 등 그야말로 하나하나 셀 수 없다.
산초
산초도 산의 작물 중 하나이다. 그리고 교토에서 산초라고 하면 '잔멸치산초'일 것이다. 이건 잘 말린 잔멸치와 산초 열매를 단짠하게 조린 것인데, 매우 담백하고 품위 있는 맛이 난다. 교토 시내에는 많은 제조소가 있어, 그 명칭도 '산초멸치' '잔멸치산초' 등 여러 가지이다. 단짝이란 맛은 가게마다 다르다. 교토의 현관인 교토역의 토산물 판매장에도 몇 군데의 가게에서 잔멸치산초를 진열하고 있다.
산초의 용도로 가장 넓은 건 열매의 이용이다. 우선, 아직 푸른빛을 띤 미숙 열매를 산초 열매라고 부른다. 산초 열매는 초봄에 출회되는데, 씹으면 산뜻한 청량감을 수반한 매운맛과 함께 독특한 향이 입속에 확 퍼진다. 다음으로 약간의 마비가 혀와 입술에 느껴진다. 응용 범위는 꽤 넓다. 소고기의 단짠 조림 등에 넣으면 고기의 누린내를 잡아 준다. 교토에서는 이 산초 열매가 자주 쓰인다. 그 대표격이 앞의 '잔멸치산초'이다. 도쿄에서는 '정어리 치어 말림' 쪽이 더 잘 통할까? 정어리 종류를 중심으로 한 어종의 길이 2-3센티미터의 치어로, 이를 삶아 말린 것을 말한다.
산초의 잎도 또한 요리에 쓰인다. 다만 그 시장은 산초 열매에 비하면 훨씬 작다. 시가지의 아파트에 거주하는 우리집에서도 화분에 심은 산초나무가 한 그루 있어서 그나마 죽숙 계절의 '나무순 무침'에 몇 번 쓸 정도의 양은 충분히 감당된다. 슈퍼마켓의 채소나 향미 채소의 코너에 작은 플라스틱 용기에 조금만 담긴 것이 진열되어 있고, 그것으로 200엔 등이라 하면 살 마음이 사라질 수 있지만 산초잎은 그 정도의 분량이 유통되고 있을 뿐이다.
'나무순 무침'은 데친 작은 주사위 모양으로 썬 죽순 등을 산초의 새순을 확으로 잘 으깨 백된장을 술이나 미린으로 풀어서 만든 페이스트로 무친다. 산초의 알싸한 맛과 향, 백된장의 단맛에 중독된다. 이렇게 보면, 산초는 소비량은 적으면서도 교토의 일정식에는 빠질 수 없는 식재료의 하나란 것을 알 수 있다.
산초 열매를 나무에 달린 채로 더 두어 완숙되면 새빨간 열매가 된다. 이걸 건조시켜 안의 씨앗을 제거하고, 주변 과실 부분을 잘게 바순 것이 협의의 '산초(산초 가루)'이다. 진녹색을 띤 분말로 장어, 닭구이 등에 뿌려 향을 즐긴다. 더하여, 일본 고유의 향신료이기도 한 '칠미고추七味唐辛子'의 원료가 된다.
교토, 오사카에는 '계란덮밥'이나, 계란덮밥에 파나 어묵 등을 더한 '나뭇잎 덮밥(木の葉丼)' '일산 덮밥(衣笠丼)' 등계란을 쓴 덮밥이 있다. 주로 우동집이나 대중식당의 겨울 기본 메뉴이다. 그리고 여기에도 산초 가루나 뒤에 적을 '칠미고추'를 뿌려 먹는다. 또한, 산초는 정월의 약초술(屠蘇酒)의 약제(屠蘇散)에도 더하는 일도 있다.
산초는 식물로 보면 산초의 열매, 꽃, 잎으로 구성되는 식재료이다. 산초는 자웅이주이기에, 암꽃은 암그루에, 수꽃은 수그루에 달린다. 그리고 열매가 달리는 건 물론 암그루이다. 산초나무는 감귤과의 떨기나무로, 마을 산의 식물이다. 일본의 산초는 일본 원산이라 하기에, 그 의미에서는 야생식물이다. 야생식물의 이용은 당연히 채집문화의 시대부터이다. <위지魏志 왜인전倭人伝>의 기술에서는 야마타이국에는 산초 같은 식물이 자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책에 의하면 사람들은 산초를 먹지 않았던 듯하다. 이것은 산초가 산야에 자생하고 있었다는 점, 즉 일본 원산이란 점을 뒷받침하는 것이 될 것이다.이용이 확대되자, 산초 쪽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다양한 변이체가 나타나, 그중에는 인간에게 편리한 것도 있었다. 가시가 없는 변이체도 그중 하나이다. 산초잎과 줄기에는 날카롭고 단단한 가시가 여러 개 생긴다. 잎을 딸 때나 물을 줄 때 등에 이 가시에 찔리면 펄쩍 뛸 정도로 아프다. 상당히 두꺼운 장갑을 끼지 않으면, 수확에도 지장이 있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산초 중에는 이 가시가 없는 품종이 있다. 어떤 이유에서 가시를 만드는 유전자가 파괴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수확 등의 작업에는 상당히 편리하다. '아사쿠라朝倉 산초'라고 부르는 품종이 그것이다. 아사쿠라 산초란 이름은 1680년 무렵에 편찬되었다고 전하는 <백성전기百姓伝記>에 "산초에 여러 가지가 있어 ...... 단바국丹波国 아사쿠라 산초가 좋다"라고 있기에 이 무렵에는 평판 있는 품종이었다(후루시마 토시오古島厳雄 교정 주석, 『백성전기百姓伝記』 상권, 이와나미 문고岩波文庫, 1977).
칡과 고사리
교토인은 칡을 좋아한다. 겨울에는 칡가루 소스나 요리의 걸쭉함을 넣고자 자주 쓴다. 칡에는 음식이 잘 식지 않게 하는 기능이 있어서, 겨울에 추운 교토에서 신체를 따듯하게 하는 데 딱 좋다. 조금 오래된 밥집이나 우동집에서는 칡가루 소스 우동이 기본 요리이다. 또는 중화요리(후술함)에도 종종 쓰인다.
칡은 여름에는 칡떡이나 칡만쥬 또는 칡벚잎떡 등 여름의 일본과자의 재료로 자주 사용되어 왔다. 칡떡은 칡가루를 물에 녹여 가열해 투명해진 것을 굳혀서 만든다. 칡만쥬는 팥고물을 칡떡으로 싼 것, 칡벚잎떡은 그것을 다시 소금에 절인 벚잎으로 감싼 것. 어느 일본과자점에서도 볼 수 있는데, 가게마다 취향이 한곳에 집중되어 시원스런 감상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 일종의 '견해'랄까?
이처럼 칡은 지금은 고급 식재료이다. 고사리도 마찬가지로, 고사리떡은 여름 일본과자의 소재로 빠질 수 없는 식재료의 하나이다. 덧붙여서, 야마구치시山口市 일대의 '우이로우外郎 떡'은 고사리가루로 만든다.
칡과 고사리는 20세기 중반 무렵까지는 기근 시기의 구황작물로 인식되어 왔다. 기쿠치 이사오 씨에 의하면, 에도 시대에는 올해는 흉년이 들겠다고 생각한 해에는 "우란분재 이후쯤부터 산야로 나가 고사리, 칡뿌리를 캐는 등 먹을거리가 될 만한 양식 채취에 온힘을 쏟았다"고 한다(기쿠치菊池 , 「기근의 사회사』, 校倉書房, 2000).
칡은 번식력이 강하고, 황무지 등에서 곧잘 생식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황무지란 사람의 손에 숲이 벌목되는 등 교란을 받은 뒤에 성립되는 식생인데, 식물 사이에는 강약이 있어 칡은 최강의 종 가운데 하나이다. 칡은 일단 들어오면 그 왕성한 생육으로 순식간에 퍼지기 시작한다. 더하여 알레로파시(타감작용)이라 부르는 작용으로 다른 식물종을 억제해, 이윽고 주변을 칡의 순군락지로 만들어 버린다.
도시의 교외에서도 칡의 순군락지를 보곤 한다. 그 옛날, 도시의 교외에도 칡의 군락은 많이 있었을 것이다. 전분은 그 뿌리 부분에 축적되는데, 효율 좋게 전분을 회수하는 데에는 5년 이상 생육한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교란이 자주 가해지는 개간된 토지에서는 만일 칡이 자라도 전분을 얻을 수 없다. 교토의 교외에서 칡을 채취하는 등은 지금은 바랄 수 없다.
결국, 교토의 과자점 등이 입수하는 칡 전분의 입수처는 지금은 후쿠이현, 나라현, 가고시마현 등 원격지로 옮겨 갔다. 그러나 이들 산지에서도 칡의 입수는 해마다 곤란해지고 있다. 원료가 되는 뿌리를 캐내는 것이 중노동인 데다가, 그 전분을 정제하는 데에도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생산자는 후계자 부족에 직면해 있다. 최근에는 중국에서 오는 수입품이 꽤나 출회되고 있는 것 같은데, 가까운 장래에 식재료의 원산지 표시가 진전된다면 일본과자의 원재료를 '국산'이라 표시할 수 없게 될 우려가 있다.
유자
일본의 감귤柑橘, 유자柚子. 유자는 조연 등이 아니다. 훌륭한 주연이다. 겨울에 출회되는 황색의 과실은 말할 것도 없고 여름철에도 작고 푸른 미숙 열매가 요리에 빛을 더해 왔다. 둥글게 잘라서 국물 요리의 장식으로 쓰면 독특한 방향이 코 안을 간지럽히고 식욕을 돋운다. 교토의 식문화에서는 빠질 수 없는 산의 식재료이다. 과실을 도려내고 남은 건 유자솥이라 부르며, 멋진 그릇으로 사용된다.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초무침, 무즙 무침 등 여러 가지. 유자솥 채로 찐 '유자솥찜'도 겨울 일정식의 기본이다. 껍질 가장 바깥쪽의 황색 부분은 귤껍질과 같이, 칠미고추 등 향신료의 재료가 된다. 또는 달게 조려서 껍질 조림이나 마멀레이드로 해도 좋다. 즉 버릴 것이 없다.
백된장에 유자의 착즙을 넣어 향을 더한 '유자된장'도 조미료로 활약해 왔다. 교토에도 이것을 만드는 가게가 몇 곳 있어, 무나 순무를 목욕통 모양으로 잘라 흐물흐물 익혀 그 위에 얹는 등으로 사용해 왔다. 가게 중에는 '야오산(八百三)'(히가시노요우잉아누야노코우지니시이루東洞院姉小路西入ル) 같은 유자된장 전문점도 있다.
유자는 귤속에 속하는 종으로, 원산지는 중국이라 한다. 일본에는 나라 시대 이전에 도래되어 왔던 것 같은데, 상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농림수산성에 의하면 2018년 국내 총생산량은 약 2만2000톤. 그 가운데 고치현高知県, 도쿠시마현徳島県, 에히메현愛媛県의 세 현에서 전체의 약 70%를 차지한다. 그중에서도 고치현의 몫은 1만1700톤. 전국 생산량의 반분 이상이 고치현이다. 유자의 과즙은 '유자 시보리(柚子絞り)' 등의 이름으로 상품화되어 전국에 출회되고 있다.
교토에서는 교토시 우쿄구의 미즈오水尾가 산지로서 저명하다. 우쿄구의 아타고산愛宕山의 남쪽 기슭에 있는 골짜기의 작은 마을이다. 표고는 300미터 정도이다. 유자도 또한 산의 산물인 것이다. 지금은 과소화로 고민하는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지만, 미즈오는 1900년에 교토 철도(현 JR 산인山陰 본선)이 교토와 가메오카 사이에 개통되기까지는 교토 분지와 단바 지방을 잇는 교역로에 있는 교통의 요충이었다.
미즈오의 유자 생산량은 123톤이라 고치현의 1/100도 되지 않지만, 표고가 높고 평지에 있는 산지에 비해 향이 강한 과실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또한 현재 대부분의 산지에서는 탱자나무를 대목으로 사용한 묘목이 사용되지만, 미즈오에서는 일부러 씨앗에서 발아시켜 기른 나무를 쓰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발아부터 열매가 달리기까지의 시간이 길어진다. 여하튼 "복숭아와 밤 3년, 감 8년, 유자는 아주 바보라 18년"이라 할 정도이니까. 18년이 진짜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미즈오의 토지에 있는 나무가 희소하다는 건 확실할 것이다.
생산량이 적기 때문에 미즈오의 유자는 시내의 요리집 등에 낼 정도였다. 그러나 대량 생산, 대량 판매가 가능하지 않으면 이름은 알려지지 않는다. 생산자의 고령화나, 2018년에 이 땅을 엄습한 태풍 피해 등으로 생산은 위기에 빠진다. 그래서 농가의 사람들은 조합을 만들어 과실이나 일부를 가공해 그 가공품의 판매에도 임하고 있는 이외에, 인터넷 직거래도 시작한다. 단, 예약이 필요하다.
민물고기의 도시
민물고기
사람은 에너지의 근원이 되는 당질과 피와 살 및 뼈가되는 단백질 등의 영양소를 필요로 한다. 일본 열도는 대략적으로 보면 당질을 쌀이나 덩이뿌리 등에서, 그리고 단백질은 물고기나 대두 등에서 얻어 왔다. 다만, 현대와 달리 먹었던 물고기의 대부분은 민물고기였다. 바닷물고기 식문화는 일부를 제하고 연안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교토도 앞 절에서 쓴 것처럼 분지에 입지해 바닷물고기를 구하기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교토인들은 단백질의 입수에 애를 먹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물고기는 일관되게 사람들의 단백질을 지탱해 왔다. 현재는 민물고기라 하면 장어 외에는 은어나 곤들매기 등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교토의 도시에서는 그밖에도 잉어, 붕어, 독중개, 미꾸라지, 납자루, 빙어, 비와 송어 등을 자주 먹는다. "그런 거 먹어본 적 없어"라고 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만약 시내의 일본풍 숙소에서 조식을 먹은 적이 있는 사람이나, 또는 술집에서 약간의 안주를 먹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부지불식간에 이들을 먹고 있다.
민물고기의 큰 공급원의 하나가 비와호이다. 앞에 적은 종류의 대부분이 산 채로, 또는 조림 등으로 가공되어 교토에 출하되고 있다. 시내의 니시키 시장(나카교구中京区)은 130채의 전문점이 모인 시장인데, 여기에서도 민물고기를 다루는 가게가 4채이다. 저마다 독자의 민물고기 상품을 내고 있는데, 재밌는 건 은어 조림이다. 은어는 보통, 바다와 강 사이를 회유한다. 부화한 새끼는 강을 내려가 바다에 이르고, 그곳에서 자란 뒤 조금 커지면 강을 올라온다. 그런데 비와호에는 육봉형陸封型이라고 하는, 비와호를 바다 대신으로 삼는 타입의 은어가 있다. 또한, 그중에는 흘러 들어오는 하천을 거슬러 오르지 않고, 비와호에 머무르는 타입(작은 은어)도 있다. 그러한 이유로, 계절이 되면 니시키 시장의 민물고기 가게의 앞에는 크고 작은 갖가지 크기의 은어 요리가 진열된다.
은어는 전국의 거의 어디에나 있는 어종인데, 하천마다 다른 유전자형의 집단이 생식하고 있다. 교토시의 북부에는 오오이강大堰川 수계의 강과 유라강由良川 수계의 강이 근접해 있다. 오오이강은 사쿄구의 아라시야마 부근에서 가츠라강이라 이름을 바꾸고, 기즈강木津川 및 우지강宇治川과 합류해 요도강이 되어 오사카만으로 들어간다. 유라강은 일본해로 들어간다. 즉 교토의 도시에는 일본해, 오사카만, 비와호 세 가지 수계의 은어가 모인다. 그리고 정통한 사람 중에는 이 3종을 그 맛으로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민물고기 요리집
교토 요리집 중에서는 은어의 조리에 관하여 매우 시끄러운 가게가 많다. 특히 '민물고기 요리'란 간판을 달고 있는 가게에는 그러한 가게가 많은 듯하다. '교토 깃쵸우吉兆 아라시야마 본점'의 도쿠오카 코우지徳岡孝二 씨는 "은어는 그날 잡은 자연산은 수박 맛이 난다"라 한다. 또한, 꼬치를 꿰어 소금을 친 은어는 곧바로 굽지 않으면 풍미가 사라진다고도 쓰고 있다.
옛 도카이東海 가도 근처, 사쿄구 아와타구치粟田口에 있는 '미노키치美濃吉'도 '민물고기 요리'를 표방하는 노포이다. 가게는 원래 민물고기 요리집이었다고 하는 '미노키치'의 사타케 리키후사佐竹力総 씨에 의하면, 에도 시대 중기에는 '이케스生け洲 요리'라고 하여, 선도를 보존하기 위해 활어조(生け簀)에 사육한 민물고기를 제공하는 요리집이 존재하고 있었다 한다. 즉 교토에는 밀물고기의 어획을 관리하여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유통 시스템이 완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교토 제일의 번화가, 시조四条 가와라마치河原町의 근처에 있는 '키이코喜幸'는 계절이 되면 주인이 근처의 카모강에 나가서 은어 낚시를 해 온다. 그리고 그걸 튀겨서 손님에게 내고 있다. 완전한 자연산 은어로, 매일 낚시를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메뉴에는 올리지 않지만, 그것이 단골손님의 마음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100만 도시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강에서 자연산 은어를 낚시할 수 있다니 놀랍다. 담수어가 귀중했던 만큼 카모강을 자원 관리의 장으로 모두가 중요하게 여겨 온 마음가짐 같은 게 느껴진다. 앞쪽에도 등장하는 '헤이하치 찻집'에서도 '민물고기 요리'라는 회식 요리 코스가 있다.
민물고기나 그 요리를 판매하는 가게가 많은 것도 교토의 특징일 것이다. 나중에 적을 니시키 시장의 4채의 민물고기 가게는 저마다 개성적인 상품 구색을 잘 나누어 놓았고, 그중에는 가공이 끝난 일품을 두는 가게도 있다. '노토요のとよ'에서는 종종 둥글게 자른 달달한 잉어 조림을 내놓고 있다. 운이 좋으면 도미 새끼보다도 큰 알을 품은 암컷과 마주치기도 한다. 다채로운 상품 구색의 은어도 압권이다. 늦봄부터 초여름에 걸쳐서는 살아 있는 은어도 파는데, 그보다 이른 시기에는 조림으로 가공된 은어가 가게 앞을 장식한다. 작은 개체라면 그대로, 조금 큰 개체라면 산초 열매를 넣은 달달한 조림으로 팔고 있다. 그만큼 민물고기의 소비가 많아 민물고기 먹을거리 문화가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인 듯하다.
슈퍼마켓 안에도 민물고기를 취급하는 곳이 있다. 지하철 구라마구치역鞍馬口駅 앞의 '구라라鞍楽 하우디ハウディ'의 지하 식품 판매장에는 민물고기 코너가 있다. 시민들에게도 그만큼의 수요가 있다는 것이다.
잉어와 잉어 퍼올리기
우쿄구의 서쪽 끝 근처에 있는 다이카쿠지大覚寺의 동쪽 1킬로미터 정도인 곳에 히로사와노이케広沢池라는 저수지가 있다. 둘레 1.3킬로미터의, 교토에서는 큰 저수지이다. 원래 여기에 있던 진언종真言宗 헨죠우지遍照寺의 창건 무렵(10세기 말)에 절의 시설로 생긴 저수지라고 한다. 저수지는 절이 쇠퇴하고나서도 저수지로 사용해 왔던 듯하다. 토지를 보면, 동쪽과 북쪽에 산이 있고 서쪽에는 완만한 경사면에 계단밭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남쪽이 얕은 계곡이 되어 가츠라강의 범람원으로 이어져 있다. 저수지는 이 골짜기를 막아서는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히로사와노이케에서는 매년 12월 상중순에 물을 빼고 설비를 관리한다. 이때 저수지에 있는 물고기를 잡아서 다 큰 물고기만 판매한다. 이것이 '잉어 퍼올리기'이다. 잡은 물고기들은 요리집이나 개인에게 판매한다. 어종은 풍부하여 간판에는 잉어, 납자루, 붕어, 새우 등이라 한다. 2020년 겨울에 본 바로는 잉어가 1킬로그램에 3000엔으로 꽤나 가격이 나갔다.
저수지의 조합은 매년 봄이 되면 잉어 등의 치어를 저수지에 놓아준다. 12월의 잉어 퍼올리기를 할 때 햇수가 얼마 안 된 작은 개체는 잠시 사육하다가 초봄에 다시 저수지에 물을 대고나서 저수지로 돌려보낸다. 이것을 반복하여 몇 년 키워 큰 개체만 판매로 내놓는다.
히로사오노이케만이 아니라, 교토에는 몇 개의 천연, 인공 저수지가 있었다. 지금은 그 모습이 사라져 버렸지만, 기즈강과 우지강, 가츠라강의 세 강의 합류점에 있던 오구라이케巨椋池도 그 하나이다. 그리고 여기도 또하 근처의 마을에 어업권이 설정되어 있었을 정도의 큰 담수어의 생산지였다.
그런데 교토에서 잉어는 무수히 있는 어종의 정점에 있다. 이것도 또한 교토가 민물고기의 도시라는 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니시진에 가게를 둔 '만카메로우萬亀楼'의 당주로 포정식庖丁式 이카마류生間流의 계승자이기도 한 고니시 마사키요 씨는 인터뷰에서 "포정식에서 쓰는 물고기로 최고인 것은 도미가 아니라 잉어이다"라고 답한다.
또, 현대에 도미는 최고급 물고기로 여겨져, 정원이나 혼례 의식 등에는 반드시 식탁에 올린다. 스모에서도 우승한 역사가 도미를 바치는 것을 텔레비전 등에서 볼 수 있다. <사조류포정서四条流庖丁書>에는 "맛있는 것의 위아래로, 위는 바다의 것, 중간은 강의 것, 아래는 산의 것"이라 한다(우에다 쥰이치上田純一 씨의 교시에 의함). 그러나 그것은 현대의 기준으로, 교토에서는 잉어가 그 위에 군림하는 시대가 있었다. 잉어와 도미 어느 것이 상위인지는 시대나 입장에 따라 변할지도 모른다.
붕어식해
여기에서 말하는 민물고기 요리는 물론 잉어나 은어의 그것만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자라나 인근인 시가현에 남아 있는 붕어식해도 있다. 그 붕어식해는 아래와 같이 만들어진다.
우선 주로 니고로붕어를 쓰고, 초봄에 그 아가미나 배를 따낸 걸 소금에 절여 놓는다. 6월 무렵, 전용 나무통에 지은 밥, 소금절임한 붕어를 깔고서 소금을 친다. 그리고 다시 밥을 깐다. 붕어, 밥을 번갈아 쌓아 올린다. 붕어의 안에 밥을 채우고 쌓아 올리기도 한다. 통이 가득 차면 단단히 봉하고 누름돌을 올려, 이 상태로 반 년 이상 둔다. 만드는 시기가 6월 무렵이니까 연말에는 일단 완성된다.
생물고기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썩지 않는 것은 소금과 전용 통에 서식하는 유산균 때문이다. 즉 붕어식해는 일종의 발효식품이다. 완성된 붕어식해는 독특한 향과 강한 감칠맛, 짠맛과 신맛을 빚어낸다. 게다가 밥 부분은 '일본 치즈'라고 할 정도로 농후한 맛을 지닌다.
붕어식해는 붕어로 만들기에 붕어식해인데, 은어 등 붕어 이외의 어종을 쓰는 일도 있다. 쌀을 대신해 조를 쓰는 일도 있다. 이들은 붕어식해라 총칭된다. 붕어식해는 상당히 오랜 역사를 지닌 듯하다. 이시게 나오미치石毛直道 씨는 붕어식해의 발상을 동남아시아의 내륙부라고 상정하고, 일본에는 문자보다도 이전에 전래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즉, 그것은 민물고기 요리의 일종이었다는 것이다. 붕어식해는 그 뒤, 바닷물고기를 쓰는, 채소 등을 더하는 등의 변화가 생기고 지역도 차츰 북쪽으로 퍼져 나아갔다. 밥식해(飯寿し)라는 식품이 그것으로, 이시카와石川부터 도야마富山에 걸쳐서 퍼진 순무식해(かぶら寿司), 아키타현에서 볼 수 있는 도루묵식해(ハタハタズシ) 등이 그 좋은 예이다. 또한 도호쿠 지방에는 절임에 물고기를 넣는 일도 있어서 이것도 또 식해의 일종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붕어식해, 밥식해 등의 식품은 교토에도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을 암시하는 이야기가 <금석물어집今昔物語集>에도 등장한다. 어느 남자가 지인 집을 방문했을 때, 길가에 '은어식해'를 팔고 있던 술에 취한 여성이 구토했다. 웬걸 그녀는 구토물을 상품에도 뿌려 버렸다. 어떻게 할까 보고 있자니, 그녀는 손으로 토사물을 상품에 섞어 버렸다고 한다. 매우 더러운 이야기로, 보고 있던 남자도 그녀의 행위에 강한 혐오를 느꼈는데, 냉정하게 생각하면 이 시대의 은어식해라는 것이 이 이야기에 신빙성을 갖게 하는, 강한 냄새를 내는 흐물흐물한 것이었다고 짐작케 한다.
자, 이런 이야기는 차치하고, 지금의 교토를 살펴보자. 지금의 교토에서 붕어식해는 별로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자주 등장하는 니시키 시장의 민물고기 가게. 여기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붕어식해가 놓여 있다. 시내에는 이 붕어식해에 반해, 붕어식해의 밥 부분을 숨겨진 맛으로 삼는 가게가 있다고 음식 저널리스트 모리에다 다카시 씨가 가르쳐주었다. 니죠역 근처에 있는 '다이호우大鵬'라는 중화요리 가게이다. 쓰는 것은 시가현 나가하마시長浜市 요고余吳에 있는 '도쿠야마즈시徳山鮓'의 붕어식해만. 요리의 세계에서는 '(맛이) 강한 것에는 강한 것을 조합시킨다'라고 하는데, 이것도 바로 그 예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중화요리점에서는 화학조미료가 자주 사용되고 있는 듯한데, '다이호우'에서는 쓰지 않는다. 붕어식해의 밥 부분을 쓰는 것은 식품 본래의 감칠맛을 쓴다고 하는 점에서도 이치에 맞다.
이처럼 교토에는 민물고기라고 부르는 담수어의 식문화가 옛날부터 뿌리내려, 사람들의 생명을 이어왔다. 자원이 부족한 도시의 궁리가 낳은, 이른바 '결핍 속의 궁리'가 민물고기 요리, 민물고기 식문화일 것이다. 바로,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교토 분지의 닫힌 순환
교토의 들(野)
형태 있는 것은 반드시 궤멸된다는 법칙은 우리들의 신체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우리의 몸 또한 언젠가는 반드시 사라진다. 즉, 태어난 우리들 모두가 어떤 형태로든 흙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근세 이전의 교토에는 그 자리를 들이라 불렀다.
교토에서는 '들'이란 글자를 가진 지명이 많다. 사가들嵯峨野, 아다시들化野, 무라사키들紫野, 쿠마들熊野, 토리베들鳥辺野, 렌다이들蓮台野, 기타들北野 등등. 들이란 글자가 붙은 지명 등 어디에나 있다고 생각할 것이지만, 교토의 '들' 가운데 적어도 몇 곳은 다른 지역의 들과는 조금 다르다. 왜냐하면 교토의 '들'에는 사체 놓는 곳이란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요시다 겐코우吉田兼好의 <도연초徒然草>의 제7단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아다시들의 이슬은 사라질 때가 없고, 토리베산鳥部山의 연기가 가시지 않는 것처럼 이 세상에 계속 살고 있는 관습이(あだし野の露消ゆる時なく、鳥部山の煙立ち去らでのみ住み果つる習ひ)
아다시들의 '이슬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곳에 둔 유체가 끊임없이 계속되는 모습을 표현한다. 그 아다시들이란 교토 분지의 서쪽 끝에 있는 토지이다. 아다시들의 가장 안에 있는 넨부츠지念仏寺에는 헤이안 시대부터 에도 시대 무렵에 제작된 석불이 다수 모아서 안치되어 있고, 그것이 교토의 텔레비전 드라마 등에 자주 사용되면서 이름을 날렸다.
도리베산은 지금의 기요미즈데라의 아래쪽에 있던 '들'로, 여기에서는 화장이 행해져 왔다고 한다. 도리베산의 연기가 가시지 않는다는 건 화장이 날마다 행해져 왔단 것을 이야기한다. 이 토지는 근처에 저승으로 통한다는 '육도六道의 길'이나, 또는 경내에 오노노 타카무라小野篁가 저승과 왕래할 때 사용했다는 우물이 있는 로쿠도우친노우지六道珍皇寺가 있다. 옛날 사람에게는 틀림없이 무섭기도 하고, 또 신성한 장소이기도 했을 것이다.
렌다이들은 시가지의 서북부, 후나오카산船岡山의 기슭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후나오카산은 시가지에 있는 작은 산인데, 이 산과 그 주변도 또한 특별한 장소이다. 이 산에 접하고 남북으로 뻗은 도로가 '센본千本 도로'. 스투파가 많이 늘어 서 있던 곳이라 이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교토의 사람들은 센본 도로를 올라서 장례의 전송을 했을 것이다. 이처럼 교토에서 들은 일찍이 사체 놓는 곳, 즉 장송의 장이자, 또 혼이 묵는 장이었던 것을 의미한다. 일반인은 묘와 분묘를 만드는 것이 금지되어 있던 시대의 일, 유체는 들로 운송되어 그곳에 방치되었을 것이다.
들은 약간 높은 곳에 있다. 유체는 들에서 미생물과 소동물에 의해 분해되어 미네랄은 물에 실려 마을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벼와 채소를 길렀다. 또는 강에 흘러들어가 민물고기를 키웠다. 최후에는 바다에 이르러 바다 생물의 생명을 지탱했다. 즉, 인간의 신체를 구성하는 물질은 교토 분지를 비롯한 일본 열도의 생태계 안을 둘러싸고 있던 것이다. 사람은, 그 시절, 아직 생태계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순환
'교토 오오하라大原 산젠인三千院, 사람에 지친 그녀가 혼자...'
사쿄구 오오하라. 1970년대에 유행한 에이 로쿠스케永六輔 작사, 이즈미 타쿠いずみたく 작곡의 '여자 혼자'로 유명해진 토지이다. 카모강 지류의 하나인 코우노강高野川을, 카모강賀茂川과의 합류점에서 10여 킬로미터 거슬러올라간 곳에 있다.
고즈넉한 노래 가사대로 오오하라는 예로부터 은둔의 땅이기도 했다. 산젠인의 서북 2킬로미터 정도의 쟛코우인寂光院의 주는 겐레이몬인建礼門院.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의 자녀이며 안토쿠安徳 왕의 생모였던 여성이 헤이케 사후에 은둔한 곳이 쟛코인이다.
한편 근세에 오오하라는 교토의 식량 생산기지라는 역할을 담당했다. 오하라메大原女라는 말을 아실까? 오오하라 근처에서 생산된 채소나 꽃을 시내에 팔러 다녔던 여성들이다. 남겨진 영상 등을 보면 수레를 끌거나, 멜대로 짐을 메거나, 또는 머리에 소쿠리를 올리고 운반하거나 했다. 오오하라의 중심부에서 카모강의 지류인 코우노강을 따라서 시내의 입구에 있는 코우진구치까지는 약 12킬로미터. 메이지 이후, 카모강의 동쪽이 개발되면서부터는 판매처가 강의 동쪽으로 이동한 것 같는데, 그럼에도 여성의 체력으로는 중노동이었을 것이다.
채소의 생산에는 물과 비료는 빠질 수 없다. 교토 분지나 주변 지역은 물에는 별로 곤란함이 없었겠지만, 비료는 시민의 배설물이 쓰이고 있었다. 교토는 대도시였기에, 그 배설물의 수요는 근처의 농촌으로부터 끊임없었고, 일부는 카모강을 내려와 셋츠摂津부터 카와치河内의 농가에도 판매되고 있었던 것 같다. 배설물의 거래를 둘러싼 다툼까지 일어나고 있었고, 가격이 급등하는 사태도 일어났다(미즈모토 쿠니히코水本邦彦 편집, <교토와 교토 가도京都と京街道 / 가도의 일본사街道の日本史 32>, 吉川弘文館, 2002).
그 일부는 강을 거슬러올라가 이 오오하라에도 운송되고 있었다. 오오하라 노무라쵸野村町에는 일찍이 시내에서 운송되어 온 배설물을 모아서 발효시키는 두엄발치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하며, 그 장소도 특정되어 있다.
실은 대도시 교외의 식량 생산기지는 어디나 이러한 장치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에도와 오사카에는 도시민들의 배설물을 교외로 운반하는 업자나 그를 위한 전용선이 있었다. 또는 채소를 운반해 온 농가의 사람들이 돌아갈 때 배설물을 가지고 돌아가는 일도 있었다. 지금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만, 화학비료 등이 없던 시대, 배설물은 귀중한 비료, 즉 자원이었던 것이다. 아니, 배설물을 생산지로 환원하는 구조는 일종의 '순환'으로, 식량의 지속가능한 생산의 근간을 이루는 행위이다. 즉 교도라는 도시도, 교도 분지라고 하는 하나의 지역 안에서 닫힌 생태계를 이루고 있던 것이다.
'농담 > 농-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토의 식문화 -3장 공가公家의 법식(流儀), 무가武家의 살림 (0) | 2024.08.20 |
---|---|
교토의 식문화 -2장 교토와 교토인 (0) | 2024.07.26 |
교토京都의 식문화食文化 -시작하며 (0) | 2024.07.15 |
식탁의 일본사 -5장 에도의 식탁 사정 (0) | 2024.07.08 |
식탁의 일본사 -4장 일본의 조미료 문화 (0) | 2024.07.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