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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5




제2장

논벼농사의 원풍경과 다양성 

-중국 고대의 출토 문물에서

와타베 타케시渡部武






시작하며


1987년, 우리는 안식년을 이용하여 반년 동안 정도 중국 상하이의 푸단復旦 대학에 체재했던 일이 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중국 각지의 대학과 박물관을 방문하고, 편지로만 연구 교류하던 농업사 연구자와 고고학자들과 의견 교환을 행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멀리서 온 우리를 크게 환경해 주어 사료 열람과 농업 유물 견학의 편의를 조처해 주었다. 


그때, 우리는 쓰촨성의 청두시 박물관과 광둥성 광저우시의 광둥성 박물관에서 매우 흥미로운 농업고고자료를 자세히 살펴볼 기회를 얻었다. 그것은 한나라대의 논벼농사에 관한 출토 문물로, 중국 고고학자들은 통상 이 출토 문물을 '피당도전陂塘稻田 모형' 또는 '수전水田 모형' 등이라 부른다. 어느쪽이라도 묘실 안에서 거두어들인 부장품(명기明器)으로, 손바닥에 올려진 작은 것부터 양손을 사용해도 힘에 겨울 듯한 큰 것까지 있다. 그곳에는 사람들의 농작업 모습과 동식물이 생식번무하는 비오톱 같은 저수지가 갖추어지고, 그것은 놀고 싶은 마음을 가득 실은 현대의 철도 모형에도 필적할 만큼 흥미로운 것이었다.


이 유형의 명기는 진령 이남의 중국 서남 지방 및 광둥을 중심으로 한 영남 지방에 분포가 제한되며, 게다가 그 무덤 주인들의 대부분은 입식入植 한인 또는 그 후예이라 추측되고 있다. 그들이 이와 같은 명기를 굳이 묘실에 부장한 것은 사후 세계에서 식량의 보장, 또 자기의 자산 과시 등과 같은 이유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러한 이유와는 달리 그들의 정신 구조에 관한 까닭도 가졌던 것은 아닐까? 즉, 많은 이민족이 살고 있는 신천지에서 그들자신이 들고 왔던 수리 관개와 작물 재배의 기술을 바탕으로 땀 흘려 생활의 기반을 구축해 온, 말하자면 그들 자신의 내력과 기억을 구체적 형상으로 표현한 것이 이 모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1987년의 여행 경험을 살려서 우리는 1989년 이후 대략 10여 년에 걸쳐서 중국 서남 여러 민족의 전통적 농기구의 조사에 종사하게 되는데, 이 조사 여행에서도 쓰촨, 윈난성 각지의 박물관과 문물관리소에 수집된 피당도전 모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고대 중국의 벼농사 실태에 대해서는 문헌사료 안에 단편적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그들은 도상 자료는 아니기에 어휘와 문맥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해석과 논쟁이 전개되어 공통의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 어렵다. 이 장에서는 한나라대의 부장품인 피당도전 모형 및 묘실을 장식한 화상전과 화상석 등의 눈으로 보아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재료를 문제삼아, 그것에 문헌사료와 현지조사의 성과를 병용하여 중국 고대의 벼농사 실태와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해설하고자 한다.





고대 중국 서남에 있던 한인 이주자들



진나라의 중국 통일과 사민徙民 정책


기원전 403년 춘추시대의 실력 제후국인 진晉이 한韓과 위魏, 조趙 세 나라로 분열하자 이후 중국은 동란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른바 전국시대의 도래이다. 당시 주 왕실의 권위는 실추되고, 제후는 각각 왕을 칭하며, 한·위·조 외에 산동의 제齊, 하북의 연燕, 섬서의 진秦, 장강 중류의 초楚를 더한 합계 7개국(이를 '전국 칠웅'이라 부름)의 사이에서 패권을 다투어 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둔 것은 진나라로, 그 패업을 달성한 인물이 영정嬴政(미래의 진시항)이었다. 진이 6국 병합 과정에서 가장 애쓴 것은 첫째는 병력의 확보와 치중輜重(군사 물자의 조달과 그 수송)의 충실, 그리고 둘째는 정복지의 토착 세력 해체를 철저하게 하는 일이었다. 


첫째의 문제 해결에 큰 공헌한 인물은 시황제보다도 100년 정도 전의 효공孝公(재위 기원전 361-338년)의 치세에서 임용된 상앙商鞅(?-기원전 338년 무렵)이었다. 그는 법률 전문가로서 효공을 위하여 2차에 걸친 국정개혁을 제안하고, 법률·가족·토지·부세·병역 등 여러 제도를 서로 연동시키는 것으로 진나라를 부국강병으로 이끌었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상앙의 변법'이다. 이때 농업 생산과 전투를 부담하게 된 것은 평시는 농업에 종사하고, 전쟁이라는 때에는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경전지사耕戰之士'였다. 그것은 마치 우리나라 근세의 도사土佐 쵸소카베長曽我部 씨 아래에서 행한 '일령구족一領具足'의 제도를 방불케하지만, 진나라의 경전지사는 일령구족보다 훨씬 엄격한 상벌과 연좌제의 관리에 놓여 있었다. 그것이 <한비자> 화씨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상앙은 진의 효공에게 가르쳐서 '십오什伍의 제도'(십헌조什軒組·오헌조伍軒의 인보隣保 제도)를 행하도록 해, 범죄를 밀고하게 하는 '고좌告坐의 벌칙'을 정하고, 유교의 경전인 <시경>과 <서경>을 소각하고, 법령을 분명히 하며, 권세가가 개인적인 이익을 군주에게 요구하는 걸 금지시키고, 국가를 위한 공로를 추상推賞했다. 또한 그것을 실행하여 군주의 지위는 존엄하며 평안하고 무사해져 진나라는 부강해졌다.


이처럼 상앙의 변법은 진나라에 반석의 기초를 가져왔지만, 효공의 사후 변법에 불만을 품고 있던 종실귀족의 고발에 의해 상앙은 거열형에 처해져 그 생애를 마감했다.


둘째 과제, 곧 정복지에 있는 토착세력의 해체는 계속 확장하는 진의 영토를 원활히 통치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서라도 필요했다. 그래서 진은 새롭게 정복한 토지에 군사·민정 거점인 '현縣'을 설치하고 중앙으로부터 행정장관을 파견하여 직할통치를 추진함과 함께, 종래의 씨족제의 질서를 해체하고 거주민의 재편을 도모했다. 이 현제는 춘추시대부터 여러 나라에서 채용되어 왔는데, 중앙집권적 통치기구로서 최초로 정비된 것은 전국 시기의 진이며, 진은 그 지배영역을 확대하고 현의 수를 증가하여 갈수록 몇 개의 현마다 구역으로 나누어 그곳에 상급통치기관인 '군郡'을 설치하고, 이윽고 진시황 때에 36군을 가지고 전토를 통치하는 '군현제도'가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 군현제는 전토를 일률로 면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은 군과 현의 치소 사이를 간선교통로로 연결한, 점과 선의 지배였다. 게다가 이민족이 많이 거주하던 중국 서남 지방에서는 그들의 전통적 생활 풍속과 군장 지배를 허용하여, 군 대신 '속방屬邦'(한나라대는 속국이라 부름)을, 현 대신에 '도道'를 각각 설치하고,중앙에서 파견된 행정관은 이민족에 둘러싸여서 집무 생활을 보냈던 것이다. 


진은 정복한 토지의 주민을, 지금 기술한 서남 지방 등의 벽지에까지 강제이주(사민)시킨다. 전쟁의 승리자인 진나라에게 패전국에서 대량의 난민을 내보내는 일은 유리한 계책이 아니라, 그들을 전쟁 포로의 신분에서 진나라의 '편호編戶의 백성'(호적에 평민으로 등록)이 될 수 있도록 신천지에 입식시켜 자활의 길을 모색하게 했다. 이리하여 진나라는 대규모 사민 정책을 전개해 나아갔다.




촉蜀으로 들어가는 길과 이주자의 무리 


진이 식민 개척의 후보지로 쓰촨 분지를 중심으로 한 파촉 지방을 고집한 이유는, 이 토지가 '옥야천리沃野千里'라든지 '천부天府'라고 자주 형용되어 왔듯이, 문자 그대로 대단한 농업 개발의 가능성을 감춘 비옥한 토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식자를 받아들이기 전에 군치와 현치의 거점이 되는 성읍의 건설과 교통로의 정비를 해야 했다. 진나라의 본거지인 섬서성 관중부터 파촉 지방에 이르는 데에는 우뚝 치솟은 진령 산맥(주봉인 태백산은 표고 3767미터)의 산등성이와 계곡을 타고 길을 조성해야 했다. 암반을 뚫고, 또는 측벽을 잇는 다리 같은 벼랑길을 설치하는 것과 같은 험한 길이었다. 당나라대의 시인 이백은 '촉도난蜀道難'이란 시에서 "아아! 위태롭도다, 높도다, 촉도의 험난함은 푸른 하늘에 오르는 것보다도 어렵다"고 탄식한다. 어쨌든 진한 시대에 아래의 네 가지 입촉로가 개착되었다.


자오도子午道  지금의 산시성 시안시西安市의 남쪽에서, 진령 산맥을 넘어 자오하子午河를 따라서 한수漢水 상류에 이르러, 다시 서쪽 방향으로 전환하여 성고城固·한중漢中에 이른다. 

사도褒斜道  지금의 산시성 바오지시寶鷄市의 남쪽에서, 진령 산맥을 넘어 포수褒水를 따라서 한중에 이른다.

고도故道  지금의 산시성 바오지시의 서남에서, 진령의 가장 서쪽 끝을 넘어 가릉강嘉陵江 상류의 안하安河를 따라서 간쑤성 양당현兩當縣을 지나 악양略陽에 이른다. 

음평도陰平道  지금의 간쑤성 톈수이시天水市의 남쪽에서, 흑욕하黑峪河를 따라 성현成縣을 지나 악양에 이른다. 


이중에서 가장 옛날에 개착된 것은 포사도와 고도였다. 기원전 4세기 말 진의 혜문왕惠文王 때, 장군 사마착司馬錯이 병사를 이끌고 파촉을 평정하는데, 그때 이용했던 것은 그림2-1의 포사도-석우도였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진의 파촉 지방에 대한 입식의 준비는 정비되어 갔다.


그림2-1 한나라대의 중국 서남 주요 교통로(羅二虎 2000에서)




그러면 진의 사민 정책의 실태는 어떠했던 것일까? 그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사마천의 <사기> 화식열전貨殖列傳이다. 거기에서 제철업으로 재산을 쌓은 탁씨卓氏와 정정程鄭의 성공담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촉 탁씨의 선조는 조趙(지금의 산서성 북부부터 하북성 동남부의 나라)의 사람이었다. 제철업으로 재산을 이루었다. 진이 조를 정복하자, 탁씨는 강제이주되었다. 탁씨는 포로가 되었는데, 부부만 수레를 밀고서 이주지로 향했다. 강제이주된 포로는 소지하고 있는 약간의 재산을 관리에게 뇌물로 바치고, 근처의 가맹葭萌에 거주했다. 그러나 탁씨만은 "가맹은 토지가 좁고 메마르다. 들은 바에 의하면, 문산汶山의 기슭은 비옥한 평야이며, 큰 토란()을 취해 일생 굶주리는 일이 없다. 또한 주민은 장사를 잘하고, 교역도 하기 쉽다"고 말하고, 굳이 원격지로 이주를 요구해 임공臨邛(지금의 쓰촨성 치옹라이시邛崍市)로 데리고 가서,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획책하여 전(지금의 윈난)·촉의 주민을 고용해 철산에서 제철을 행하여 가내 노예 천명을 거느린 부호가 되어, 소유하는 넓은 연못과 사냥터에서 대규모 사냥을 하는 즐거움은 제후에 필적할 정도였다.


정정은 산동(지금의 산시성 태행산맥 동부 지역)에서 강제이주된 포로(의 자손)이었다. 역시 주조업을 경영해 추결椎髻을 묶은 만족蠻族과 교역을 해서 그 부는 탁씨에 동등하며, 함께 임공에 살았다.



이 탁씨와 정정의 성공담에서 흥미로운 것은 진에 의하여 정복되어 강제이주 대상이 되었던 포로의 동향이 아무렇지 ㅇ낳게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포로를 '천로遷虜'라고 불렀다. 대부분의 천로들은 진의 이주 담당관리에게 유도되어, 마치 개미떼처럼 입식지로 할당되어 갔다. 


그들이 입식을 희망한 근처의 가맹은 한중 분지의 남쪽, 가릉강 상류의 강기슭 단구에 위치하고, 한편 임공은 성도의 서남 60킬로미터에 위치한다. 오늘날 성도는 쓰촨성의 성도로서 번영하여 임공도 그 번영의 그늘 아래 들어가 있지만, 전국시대에 진이 성도에 촉군의 군치소를 설치했던 당초에는 그 주변부에 펼쳐진 넓은 평야는 민강岷江의 어지러운 흐름과 홍수의 재난으로 시달려 개발이 진행되지 않았다. 성도 분지의 본격적인 개발은 기원전 3세기 중반, 촉군의 태수로 부임한 이빙에 의한 일대 관개시설 도강언都江堰의 완성을 기다려 처음으로 가능해진다. 이 도강언은 민강의 흐름을 외강과 내강으로 분류시켜 유세에 의하여 제방 바닥에 퇴적하는 사석을 외강으로 배출하고, 내강에서 유도한 용수를 써서 평야부를 관개하는 것으로, 그 둑의 돌쌓기 공법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활용되고 있다(그림2-2).


그림2-2 성도 평야의 농업 관개를 담당하는 도강언. 가까운 쪽이 내강, 먼 쪽이 외강(2006년 와타베 촬영)




그런데, 탁씨와 정정의 선조는 제철 및 그 가공기술에 의하여 단신으로 이민족 지대로 들어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것은 철의 제련가공이 매우 숙련을 요하는 특수기술이며, 철제의 생산공구가 토착의 이민족에 의하여 크게 환영받았기 때문이다. 그에 대하여 농업 이주자들의 그 이후의 소식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고, 아마 이민족의 생활권을 침범하지 않는 완충지대에서 개척으로 생활의 기반을 쌓아 갔다고 생각한다.





중국 서남의 호족과 피당도전 모형


호족의 대두와 성대한 장례의 유행


중국 고고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중국 서남으로 향했던 고대 개척이민의 파도는 전후 3차에 이르는 고조기가 있었다고 지적된다(羅 2000). 제1차는 앞에 기술한 진의 파촉 정복부터 진 왕조의 멸명까지. 제2차는 전한 중기의무제 치세(기원전 141-87년)에 있던 서남 리도夷道(인도[身毒]로 가는 길) 건설의 시기로, 이것은 중국 서남의 간선도로의 정비에는 공헌했지만 현지에는 경비 부담이 과중하여 실질적으로는 실패했다. 그러나 <사기> 평준서平準書에 "작자(공사 노동자) 수만 명"을 투입했다고 하기 때문에, 그뒤의 농업 입식에도 영향이 있었을 터이다. 그리고 제3차는 후한 말(2세기 말) 이후의 중원 지방의 거듭되는 전란과 경제의 쇠퇴 시기. 이 시기의 중국 서남지방은 비교적 안녕했기 때문에, 중원 지방에서의 입식자가 많이 유입되어 이민의 파도는 최고조에 달했다.


이렇게 하여 진이 파촉을 멸하고 나서 후한 시대의 말년에 이르기까지(기원전 316-기원후 220년), 중국 서남 각지의 입식 한인 및 그 자손들은 황무지를 개척하여 농지를 확대하고, 또 약간은 상업 활동을 늘리면서 순조롭게 중소 장원 지주로 성장해 갔다(宇都宮 1955). 그와 같은 호족을 대성大姓·사성四姓·호豪·대호大豪·수족首族·관족冠族 등이라 불렀다. 동진 시대의 상거常璩(291-361년 무렵)이 저술한 지지 <화양국지華陽國志>에는 파옥 지방의 대성이 145성 정도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는 전한부터 호한 말의 수백 년에 걸쳐서 관리를 배출한 일족도 있는데, 대강은 후한 시대에 성장한 자들이다. 게다가 수리 관개의 편의와 소금·철의 이익(임공에서는 제철 외에 천영 가스 이용에 의한 제염이 행해졌음)에 혜택을 받은 토지에서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복수의 대성이 사회적 지위를 경쟁했다. 또 토착의 이민족도 입식자들의 문화적 영향을 받아서, 대성의 한패가 되는 자도 출현했다.


중국인은 고래부터 사람의 '죽음'을 매우 중요시하여, 유체를 넣는 관과 분묘에 다액의 비용을 들이는 습관이 있다. 옛 예의 서적 <예기>에 "혼은 하늘로 돌아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라고 하듯이, 사람의 죽음은 혼魂(정신)과 백魄(육체)의 분리라고 생각하여, 영혼이 돌아갈 장소인 유체를 정중히 다루었다. 그리고 장묘에 금전을 소비하는 방식 나름으로 그 일족의 사회적 지위가 평정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중국에서 민속을 조사할 때, 생전에 이미 훌륭한 목관을 준비했던 노인을 만난 적이 있다. 중국의 속담에 "먹을거리는 광저우에 있다"(맛있는 걸 먹으려면 광저우)라고 하는 것은 인본인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데, 그 대구에 "죽음은 류저우柳州에 있다"(납관에는 광시 류저우의 목관을 이용하는 것이 최고이다)라는 명문구가 있는 것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상표의 목관을 보통 사람의 눈에 띄도록 하는 것으로 죽음을 소중히 한다는 걸 보여줌과 동시에, 지역사회를 향하여 자기 가문의 격을 공언하는 것이다. 


서력 1-2세기의 후한 시대에는 장의와 묘장에 자산을 투여하는 일이 크게 유행했다. 이와 같은 풍조를 '후장厚葬의 풍風'이라 부르고, 중국 서남에서는 두 가지 형식의 묘가 활발히 조성되었다. 하나는 벽돌의 일종인 전으로 구축한 전실묘(석재를 혼용한 전석실묘도 있음)로, 특히 이 지방의 전실묘에는 묘문과 묘실을 잇는 연도羨道의 요벽腰壁에 사각형의 화상전을 끼워 넣는 형식의 화상전묘가 많다(그림2-3). 또 하나는 바위산에 굴을 깊게 굴착하고, 묘실과 이실耳室(측실)을 조성하는 애묘崖墓의 형식으로, 입구의 대문, 그 틀인 문틀, 또 그 주변에 각종 도상이 돋을새김된다(그림2-4). 화상전묘와 돋을새김을 가진 애묘도, 함께 화상묘의 범주로 묶을 수 있다. 또 전실묘의 영역塋域(묘역)에 설치된 '대궐문'과 묘실에 넣는 석관에도 여러 가지 신화적 도상이 돋을새김되며, 이들도 화상묘를 장식하는 중요한 조연이었다.


그림2-3 성도시 소각사昭覺寺에서 발견된 후한 시대 화상전묘의 구조(羅二虎 2002에서)


그림2-4 쓰촨성 낙산시樂山市 교외에 있는 후한 시대의 애묘 '만자동蠻子洞'의 입구. 남북조 시대에 재이용된 흔적이 있다(1999년 와타베 촬영)



 

매장된 묘주 신분에서 검토하면, 전실묘와 애묘의 성질은 확연하게 구별할 수 있다. 전실묘의 묘주에는 군 태수, 주 자사刺史, 도위都尉, 현의 장관, 주현의 속리를 경력한 자가 많고, 애묘에는 그러한 경력을 가진 자는 매우 적다. 또한 전실묘의 묘주 대부분은 중원에서 이민한 후예이고, 그에 반해 애묘의 묘주 대부분은 토착민으로, 애묘의 출현은 토착민이 외래의 중원 문화에 동화되어 갔던 구체적 발로이기도 했다(羅 2002). 애묘에서 화상전은 발견되지 않지만, 피당도전 모형은 전실묘와 애묘 쌍방에서 출토된다. 농업에 관한 화상전과 피당도전 모형의 사이에는 공통된 모티브가 발견되기 때문에, 후한 시대의 중소규모 호족의 농지 경영의 표준은 이와 같은 것이라 상정해도 좋을 것이다.





농경 화상과 피당도전 모형


화상묘의 각종 도상에는 독특한 생사관이 반영되어 있다. 그 주조는 곤륜산 승선昇仙과 서왕모 신앙에서 발견되듯이, 당시 사람들의 '불사'에 대한 갈망이었다(渡部 1991). 따라서 호족들은 현세의 유복한 생활을 내세에까지 가지고 가서 안락하게 사는 것을 갈망했다. 그 발로가 장원과 농경의 도상이다. 성도시 증가포曾家包 1호 후한 화상전 석묘에서 발견된 '장원·쌍양가화雙羊嘉禾 화상석'은 그 알맞은 사례이다(그림2-5).


그림2-5 성도시 증가포 1호 후한 전석실묘 안의 장원·쌍양가화 화상석의 모사(羅二虎 2002에서)

 



이 화상석은 부부 합장묘의 묘실 오벽奧壁에 장식되어 있는 '장원백업莊園百業·산림사렵山林射獵 화상석'과 한 쌍을 이루고, 3단의화상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단에 두 마리의 양과 식물(가화=경사스런 곡물)은 상서로움을 표현한다. 양의 도상은 '양'='상祥'과 통하고, 일종의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진단 그림의 표현이 된다. 산동 지방의 화상석묘에는 양의 머리 부분을 표현한 사례가 몇 가지 있고, 상서로움을 표현하는 한화상의 상투적 표현법이되고 있다. 중단에는 두 채의 가옥(창고와 누각)이 묘사되고, 그 중앙의 종려나무 그루에는 한 사람의 노인이 끝에 새가 장식되어 있는 지팡이를 쥐고 앉아 있으며, 그 왼쪽에 또 한 사람의 인물이 용기를 받들고 노인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한나라대에는 80, 90세에 달한 고령자에 대하여 나라에서 비둘기가 장식된 지팡이(구장鳩杖 또는 옥장玉杖이라 부름)와 죽이 지급되는 규정이 있었기에, 이것은 양로養老의 그림이라고 하는 것이다. 오른쪽 건물의 계단 아래에는 반쯤 열린 문에서 몸을 내보이는 인물이 있다. 이것은 쓰촨의 화상에 자주 보이는 '선인仙人 반개문'의 모티브로서, 이것이 선계로 가는 입구를 상징하기에, 중단의 도상은 전체가 사자의 안녕한 생활이 보장된 사후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단의 도상인데, 이것이 장원 그림이다. 왼쪽 위에 두렁으로 구획되고 벼가 심어져 있는 논이 있고, 그 바로 아래에 피당(저수지)가 묘사되어 있다. 피당의 가운데에는 제방이 있고, 그 중간쯤에 봇둑이 설치되어 있다. 오른쪽의 수면에는 물고기, 거북이, 물새에다 작은 배를 조종하는인물이, 또한 오른쪽의 수면에는 연과 물고기가 각각 표현되어 있다. 피당도전의 오른쪽에는 토란(?)밭을 괭이로가는 농부가 있다. 또 그 오른쪽에는 쥐를 막는 장치를 갖춘 기와지붕의 고상식 곡물창이 있고, 그 옆에서 두 사람의 농부가 디딜방아를 써서 방아찧기 작업을 행하고 있다.


이와 같은 피당도전의 경관은 오늘날에도 쓰촨 분지의 주변 및 석회암 지질의 용식溶食 분지 같은 오목한 부분에 개간한 농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그림2-6의 사진을 보길 바란다. 이것은 의빈시宜賓市 공현珙縣에서 촬영한 것인데, 산기슭의 움푹 팬 땅의 낮은 부분에 저수지와 논이 조성되어, 물을 대기가 좋지 않은 곳에는 밭을 개간한다. 그리고 몇 가족의 가옥이 여기저기 있다. 바로 한나라대의 화상 안의 경관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진한 시대의 입식자들에 의한 개척 정주의 방식은 몇몇 가족이 협력하여 수해를 입지 않는 토지를 선정하고, 다음으로 수리 관개시설을 조성하며,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경지를 넓혀 갔던 것이 아닐까? 물론, 이 저수지는 단순한 관개용수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단백질원인 물고기와 거북이의 양식에도 활용되었던 것이다.


그림2-6 쓰초나 분지 안에서는 한나라대의 피당도전 모형과 아주 비슷한 경관을 볼 수 있다(쓰촨성 공현, 1996년 와타베 촬영)





피당도전 모형의 분포와 그 유형


그림2-5의 장원 화상석 안의 피당도전 부분만을 빼낸 듯한 명기의 모형은 중국 서남 각지에서 출토된다. 그 분포를 나타낸 것이 그림2-7의 '한나라대 피당도전 모형·화상 출토 분포도'이다. 이 분포도에는 명기의 모형만이 아니라, 약간의 관계 화상석과 화상전도 포함되어 있다. 분포도를 개관하여 먼저 알아차리는 건 가장 분포가 집중되어 있는 것은 성도시 주변이며, 그에 다음가는 것이 산시성 한중 분지, 쓰촨성 서창 분지, 중경직할시 충현忠縣이라는 것이다. 또한 윈난성 곤명시의 전지滇池 주변과 광둥 삼각주 및 그 주변에서도 출토되고 있는데, 광둥 삼각주 지방 및 그 주변에서 출토되는 논 모형에 대해서는 중국 서남과는 약간 다른 역사적 배경과 시간차가 있어 그 점에 대해서는 뒤에 기술하겠다.


그림2-7 한나라대 피당도전 모형·화상 출토 분포도(古川久雄·渡部武 1993에서). 이 분포도는 15년 정도 전의 자료로서, 위진 시대의 논 모형도 약간 포함된다. 그뒤 몇 가지 관계 문물이 발견되었는데, 그 출토지 분포에 관해서는 이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A-C 지구의 구분선은 아래의 출토 명기군의 특색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사키 쇼지佐々木正治의 연구에 의하여 덧붙여졌다.  A지구: 기본조성, B지구: 기본조성+돼지우리, C지구: 기본조성+피당도전 모형. 기본조성이란 창고, 우물, 부엌, 가옥류로 구성되는 명기를 나타낸다(사사키 쇼지 2004).


성도, 한중, 서창, 전지 호숫가에는 각각 한나라대의 촉군, 한중군, 월수군越嶲郡, 익주군의 군치가, 또 충현에는 파군 임강현의 현치를 두었다. 즉, 어느 토지도 군현 통치를 강력하게 진행하기 위한 가장 요긴한 땅이었던 것만이 아니라, 입식자들이 논을 개간하기에 안성맞춤인 분지와 호숫가 같은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림2-8의 '중국 서남 출토의 후한 시대 피당도전 모형'에서 볼 수 있듯이, 각각의 토지에서 출토된 명기 모형의유형도 참으로 다양하다. 


그림2-8 중국 서남 출토의 후한 시대 피당도전 모형(渡部武 1991에서).  

①도자기로 만든 피당도전 모형(섬서성 한중현 출토), ②녹색 유약 도자기로 만든 겨울의 논 모형(사천성 면현勉縣 출토), ③도자기로 만든 논 모형(사천성 신진현新津縣 출토), ④돌로 만든 피당도전 모형(사천성 아미현 출토), ⑤도자기로 만든 피당도전 모형(운남성 정공현呈貢縣 출토), ⑥도자기로 만든 피당도전 모형(사천성 의빈시 출토), ⑦도자기로 만든 피당도전 모형(귀주성 흥의현 출토), ⑧도자기로 만든 피당도전 모형(사천성 면양시 출토)





성도 분지가 수리시설 도강언의 은혜를 입었단 것은 이미 기술했는데, 똑같이 전국시대의 진은 성도성을 건설할 때 축성을 위한 채토지의 뒤를 이용하여 만세지萬歲池·용파지壩池·천정지天井池·천추지千秋池 등의 양어지를 겸한 큰 저수지를 조성하고, 군의 치소 주변의 농업 개발을 진행한다(<화양국지> 촉지). 따라서 성도에는 일찍부터 호족 세력이 성장해 갔던 것이다. 성도 지방의 벼농사 모습을 보여주는 화상전은 몇 종류나 발견되며, 특히 유명한 것으로 그림2-9의 '익사弋射·수확 화상전'을 들 수 있다.



그림2-9 성도시 교외의 후한 시대 전실묘에서 출토된 익사·수확 화상전. 이 유형의 화상전은 성도 지방 각지의 전실묘에서 발견된다. 같은 주형으로 만든 것이 많기 때문에, 당시 이와 같은 명기가 장례용품점에서 팔렸을 것이다. 화상의 상단에는 피당에서 수렵 도구인 주살을 이용해 오리 사냥(익사)를 행하고 있는 두 명의 인물이 있고, 피당에는 연이 심어지고 큰 물고기가 여유롭게 헤엄치고 있다. 하단에는 벼의 수확이 묘사되어 있다. 중앙의 3명은 이삭을 따는 도구로 벼이삭을 베어 거두고, 오른쪽 2명은 큰낫을 휘둘러 그루를 베어 쓰러뜨리고 있다. 왼쪽의 인물은 베어낸 벼이삭을 단으로 묶어 천칭으로 지고 있다.




이와 같은 장원 농지의 경작을 담당한 것은 '가동家'이라 부르는 일종의 가내 노예였다. 호족의 재산 표시에는 자주 가동의 수로 나타내는 일이 있으며, 그들이 장원 안에서 담당했던 노동에 대해서는 자중현資中縣(지금의 자양시資陽市, 성도의 동남 약 80킬로미터) 출신의 호족 왕포王褒(기원전 90-51년 무렵)에 의하여 저술된 일종의희문戯文 작품 <동약僮約>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宇都宮 1955). 또한 고농雇農도 많았다. <화양국지>에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기사가 보인다. 문산군汶山郡(강족羌族 지대. 지금의 무현茂縣, 2008년 쓰촨 대지진의 진원지)에 사는 이민족은 그 토지가 고랭지라서 쌀보리(보리의 품종군인 쌀보리 '청과靑稞')밖에 지을 수 없고, 그 때문에 겨울철에는 추위를 피하여 성도 지방으로 나가서 농작업에 종사하고 여름철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오는 생활을보내고 있었다. 그와 같은 타관벌이 관행에 의하여 성도 사람은 그들에게 '작오백석자作五百石子'(오백 석의 곡물을 재배하는 사람이란 뜻)라는 별명을 붙였다고 한다. 


그림2-8에는 한중 분지에서 출토된 2점의 피당도전 모형(①과 ②)를 문제 삼는다. 이 한중 분지야말로 중원에서온 이민이 중국 서남 개척의 첫걸음을 내디딘 땅이다. 한중은 진령의 남쪽 한수 상류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기후는 매우 온난하고, 중화 미후도瀰猴桃(키위)의 원품종 자생지는 이 지방이라 생각되고 있다. 한중시의 연간 평균 기온은 약 14도, 평균 강우량은 약 900밀리미터로, 성도시에 비교하여 약간 밑도는 정도이다. 따라서 논을 개간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을 터이다. 


①의 피당도전 모형은 작은 하천이 골짜기 분지로 흘러들어오는 장소에 제방을 쌓아 물을 모으고, 갑문을 개폐하여 아래의 논으로 적당히 관개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또 ②의 모형은 1984년 아사히 신문사의 후원을 받은 '중국 도용陶俑의 미'전에서 전시된 것이며, 그때 해설에는 '겨울 논 모형'이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이 겨울 논이란 것은 쓰촨 지방의 산간 지방에 있는 다락논에서 널리 행해 왔던 농사 관행으로, 가을 논의 추수 뒤에 이듬해의봄가뭄(봄철의 물 부족)을 고려해서 저수지 근처의 논에 물을 대 놓고, 그것을 못자리용으로 쓰는 것이다. 이 겨울 논에 대해서는 우리 자신, 중경직할시 수산토가족秀山土家族 묘족苗族 자치현의 오지에서 본 적이 있다(그림2-10). 다만 그 기원이 한나라대에까지 거슬러 오르는지는 의문이다. 통상 쓰촨 지방에서 겨울 논의 보급이 시도되었던 것은 청나라대의 가경 연간(1796-1820년)이기에(彭·王 2001), ②의 모형은 겨울 논이 아니라 단순한 산지의 완만한 비탈에 조성된 논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구나 이 겨울 논에 대해서는 논과 수로의 생물다양성을 보전하기 위하여 유효한 점에서, 일본에도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림2-10 저수지 옆에 설치된 겨울 논. 겨울철에도 물을 대어 놓고 봄철에 못자리로 사용한다(중경직할시 수산토가족 묘족 자치현 관년촌關年村에서, 1999년 5월 와타베 촬영)





그런데 각종 피당도전 모형의 유형을 잘 보면, 그것이 어떤 지세인 곳에서 조성되었는지를 알 수도 있다. 그림2-8의 ④와 ⑧의 모형은 평야부에 조성된 피당도전을 표현하고 있다. 이 ④와 유사한 돌로 만든 피당도전 모형이 도강언의 복룡관에 전시되어 있고(그림2-11), 두 모형에는 모내기 작업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인물상이 조각되어 있어 흥미롭다. 또한 ⑧ 유형의 피당도전 모형은 쓰촨 분지에서 많이 출토되고, 이처럼 얕은 쟁반 모양의 직사각형 유형과 원형 유형의 두 유형이 있으며, 그 대부분이 양어지를 겸한 저수지만 표현하고 있다(그림2-12,13). 다만 귀주성과 윈난성에서 출토된 원형 쟁반 모양의 모형은 피당과 도전이 함께 편입된 유형이 많다(그림2-8 ⑦,14).



그림2-11 후한 시대의 돌로 만든 피당도전 모형. 제방에 의하여 3곳으로 구분되어 있고, 오른쪽 위에 물새와 연,오른쪽 아래에 메기·거북이··연, 왼쪽에 나무 아래의 논에서 모내기를 행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인물이 표현되어 있다(쓰촨성의 도강언 복룡관에서, 2006년 와타베 촬영)



그림2-12 후한 시대의 피당 모형. 제방에는 물꼬가 있고, 피당 안에는 도룡농과 개구리, 거북이, 물고기 등이 배치되어 있다(쓰촨성 면양시 박물관에서, 1999년 촬영)



그림 2-13 쓰촨성 충현에서 출토된 촉한 시대의 피당 모형. 둥근 쟁반 모양의 피당 안에 연과 우렁이, 물고기가 배치되어 있다(성도시 무후사의 전시관에서, 2006년 와타베 촬영)



그림2-14 윈난성 대리시大理市 대전둔大展屯 2호 후한 묘에서 출토된 피당도전 모형. 피당 안에는 물고기와 개구리, 물새, 연등이 표현되어 있다(윈난성 대리 백족白族 자치주 박물관에서, 1992년 와타베 촬영)





또한 산지의 완만한 비탈에 개간된 피당도전 모형도 있다. 우리는 그 사례를 2점 기록했던 게 있다. 첫번째 사례는 그림2-15의 피당도전 모형으로, 현재 이것은 남경 농업대학에 신설된 중화 농업문명 박물관(남경 박물원 남경농대 분원)에 전시되어 있다. 출토지는 명기되어 있지 않았지만, 해방 전인 1940년대에 고고학자 오금정吳金鼎, 풍한기馮, 이제李濟, 하내 등의 쟁쟁한 구성원으로 구성된 '천강고적川康 고찰단'에 의하여 쓰촨성 팽산현彭山縣(성도시와 악산시의 중간에 위치함)의 애묘에서 발견된 것이다. 오른쪽 위의 1단 높아진 곳이 피당으로, 그곳에서 드렁허리와 수생동물이 표현되어 있다. 그 왼쪽에는 두렁으로 구분된 불규칙한 논이 있고, 각 논의 안에는 벼가 심어져 있는 것을 나타내는 작은 구멍이 구석구석 뚫려 있다. 이와 같은 경관을 현실에 재현한다면, 그림 2-16의 사진 같이 될 것이다. 


그림2-15 쓰촨성 팽산현 후한 시대 애묘에서 출토된 피당도전 모형. 다락논을 표현한 귀중한 고고자료이다(남경대학 중화 농업문명 박물관에서, 2004년 와타베 촬영)



그림2-16 완만한 비탈에 개간된 다락논과 저수지. 팽산현의 애묘에서 출토된 피당도전 모형과 꼭 닮은 경관을 볼 수 있다. 두렁에 심은 것은 옥수수(부릉涪陵과 중경의 중간에서, 1995년 5월 와타베 촬영)




두번째 사례는 그림2-17·18의 후한 시대 다락논 모형으로, 이것은 쓰촨성 악산시의 애묘에서 출토되어 현재 악산시 마호麻浩 애묘崖墓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모형에는 피당은 없고, 잘 보면 불규칙한 각 논의 두렁에는 모두 물꼬가 트여 있으며, 무넘이식 천수답임을 보여준다. 각 논의 안에는 역시 벼가 심어진 구멍이 구석구석 뚫려 있다. 우리는 이 마호 애묘 박물관을 3번 정도 참관한 적이 있다. 아마 두번째 방문했을 때라고 기억하는데, 쓰촨 대학의 고고학자 라이호 씨(현 상하이 대학 예술연구원 교수)가 동행해 주어, 흥미로운 점을 배웠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화양국지>에 기록되어 있는 '산원전山原田'이란, 이와 같은 다락논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산원전'의 어휘는 <화양국지> 촉지의 자·광한廣漢·덕양德陽이란 세 현의 조에 언급되고 있으며, 이 책의 상세한 주석서를 저술한 임내강任乃强은 "이용률이 낮았던 산원山原(백악기에 속한 자토紫土 구릉지)에 다락논을 조성하고, 벼와 보리를 재배하여 그 이용률을 높였기 때문에 산원전이 특기되었을 것이다"(任 1987)라고 기술한다. 경청할 만한 이야기이다.


그림2-17 쓰촨성 악산시 마호 애묘 박물관에 소장된 후한 시대 다락논 모형. 불규칙한 각 논의 두렁에는 물꼬가 트여 있다(2006년 와타베 촬영).



그림2-18 쓰촨성 악산시 마호 애묘 박물관에 소장된 후한 시대 다락논 모형의 실측도(사사키 쇼지 씨 제공)




그 다음에 그림2-8의 ⑤, 윈난성 정공현에서 출토된 피당도전 모형에 관련하여, 조금 언급하고 싶은 게 있다. 정공현은 윈난성 최대의 호수인 전지의 동안에 위치하고 있다. 호수의 남단 보령현保寧縣에 금도장 '전왕지인王之印'의 출토로 유명한 전국滇國의 왕묘 석채산石寨山 유적이 있다. 전지는 큰 폭 치고는 수심이 얕아 최고 깊이가 약 10미터이고, 평균 수심이 4.4미터이다. 그 때문에 호숫가에서는 옛날부터 벼농사가 행해져 왔다. 이와 같은 호숫가에 논을 조성하는 건, 우리나라의 사가현 비와호 주변 다이나카大中의 코미나미湖南 야요이 논터를 머릿속에 떠올린다면 비교적 쉬웠을 것이다. 그와 같은 논을 개간해 갔던 모습을 방불케 하는 원풍경은 아마 그림2-19의 사진 같지 않았을까? 다만 이와 같은 논은 우기 때의 수위 상승에 의하여 자연 관개가 이루어지더라도, 가뭄 때에는 수확에 큰 타격을 입는 일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을 보완한 것이 피당 관개였을 것이다.


그림2-19 논 개척의 원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로고호瀘沽湖 호숫가의 못자리. 못자리에는 벼와 피가 재배되고, 그뒤에 '수요지澆地'라고 부르는 본논으로 옮겨심는다. 우기가 되면 호수의 수위가 올라 자연 관개된다. 비 부족으로 수위가 오르지 않는 경우는, 벼에 피해가 나더라도 피는 수확할 수 있다. 이 땅에서는 벼의 재배보다도 피의 재배 쪽이 오래되었다고 이야기되는 것도 수긍할 수 있다(쓰촨성 노고호 진산鎭山 남촌南村에서, 1996년 4월 와타베 촬영)






화상전과 피당도전 모형에서 발견되는 벼농사 기술


지금까지 기술해 온 바에서, 중국 서남에서 찾아온 입식자가 가져온 문화 가운데 관개 기술이 특별한 의의를 가지고 있단 점이 밝혀졌다. 중원 지대에서 와 입식한 사람들의 정착생활을 지탱했던 건 밭농사 지대에서 배워 익혔던 관개 기술의 노하우였다. 전한 시대까지 중원 지대와 강회江淮 지방에서 조성된 중소규모의 피당 수는 많고, 그 조성에 의하여 주변의 개발이 진행되어 대부분의 농민이 그 은혜를 입게 되었다. 한나라대에는 원칙적으로 '강해江海·피호陂湖·원지園池는 소부少府에 속한다'(<한서漢書> 원제기元帝紀)라고 생각되어, 피당은 제실帝室의 재정을 담당하는 소부의 관할을 받고, 인민에게 임대해 주어서 제실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또한 주군의 피관陂官과 호관湖官 같은 관리가 피당·호소湖沼에서 거두는 천산물에 대한 징세를 시행했다. 그러나 중국 서남에서 했던 농업 개발은 관의 규제가 느슨했기 때문에, 상당한 부분이 입식자들의 자발적 지휘에 맡겨져 그들은 자력으로 피당을 조성해 갔던 것이다. 그것과 그들이 화북의 밭농사 지대에서 습득했던, 단위면적당 수확을 높이는 '정경세작精耕細作' 기술을 벼농사에 응용하여 개발의 방식이 정형화되어 갔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화상전과 피당도전 모형에서 어떠한 벼농사 기술을 관찰할 수 있는지 몇 가지 자료에 대하여 해설해 보기로 하자. 


먼저 경작 농기구에 대해서인데, 중국 서남의 화상과 모형 자료 중에는 쟁기에 관한 자료는 전혀 없다. 또한 철제보습의 출토와 문헌사료 중의 관계 기사도 매우 드물어서, 한나라대에 중국 서남에서 쟁기질은 아직 발달하지않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아직 발달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지세와의 관계에서 필요성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대신쟁기질용 농기구로 일종의 따비인 철제 '가래'라는 농기구가 보급되어 있었다. 그림2-8 ⑧의 피당 모형 안에 가래를 쥔 인물용이 있다. 이와 같은 손가래 용은 전실묘와 애묘 안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또한 한나라대의 촉군에는 관영 공방인 '철관鐵官'이 설치되어, 그곳에서 공방의 주조명을 넣은 철가래가 제조되었다. 그 유통 범위는 쓰촨만이 아니라, 멀리 윈난 지방에까지 미쳤다. 현재, 성도 시내의 두보초당 근처의 청공靑空 골동품 시장에서 자주 도굴품인 철가래가 팔리고 있는 걸 볼 수 있기에, 생산량은 많았을 것이다. 이것은 풍려 괭이(風呂鍬) 식으로 목제의 자루를 장착한 것으로, 괭이로도 쓸 수 있었다(그림2-20). 이 철가래가 쟁기질 농기구의 주류였다.


그림2-20 철가래와 손가래 용. 한나라대의 중국 서남에서는 철가래가 자주 사용되었다. 촉군 철관의 표시가 들어간 철가래가 쓰촨과 윈난 각지에서 출토되고 있다(와타베 모사).




그림2-21은 쓰촨성 덕양현에서 출토된 농사일 화상전이다. 두렁으로 구분된 경지에서 선두의 네 인물은 큰 낫(한나라대에는 '발'이라고 불렀음)을 가지고 골프채를 휘두르는 것처럼 몸짓을 하고, 그 배후의 성인과 아이 각 1인이 파종을 실행하고 있다. 이 화상의 해석은 두 가지 설로 나뉜다. 하나는 선두의 네 사람은 벼를 베어 거두고있는 것이 아니라, 흙 부근의 잡초를 베어 넘기고 뒤이어 뒷쪽의 두 사람의 인물이 종자를 흩뿌림하고 있다는 설.또 하나는 영성靈星을 비는 제사 의례의 무용이란 설. 이처럼 의견이 나뉘는 것은 선두의 네 사람의 몸짓이 후반의 파종 작업과 어떤 관계를 맺으면 좋을지 판단에 미혹이 생기기 때문이다. 사실은 이와 같은 골프채와 비슷한 큰 낫을 휘둘러 논 잡초의 금방동사니 등을 베어 쓰러뜨리고, 쟁기질을 하지 않고 논의 마무리를 하는 농법은 말레이 세계의 저습지에서 널리 볼 수 있다(古川 1987). 이와 같은 동남아시아의 농법도 시야에 넣어 도상을 해석하면, 화상 안의 농작업은 더욱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림2-21 쓰촨성 덕양현에서 출토된 후한 시대 농작업 화상전





그림2-22는 쓰촨성 신도현新都縣에서 출토된 피당·각운脚耘 화상전이다. 이 화상전은 한나라대에 모내기가 행해졌는지 어떤지를 판정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발로 논 잡초를 밟아 넣는 '각운' 작업은 현재도 중국에서널리 행해지고 있으며(그림2-23), 우리 자신도 광둥 삼각주와 강서성 남창시南昌市 교외의 농촌 지대에서 본 적이 있다. 또한 문헌에서는 명나라 말의 산업기술서 <천공개물>(송응성宋應星 저)에 명확한 삽화가 게재되어 있다.이 작업은 지팡이에 의지해 신체를 앞뒤로 천천히 흔들면서 발로 논 잡초를 밟아 넣는 것이다. 그 동작은 곤충인 대벌레를 연상시킨다. 각운 작업은 벼모를 똑바르게 심고 벼 그루의 줄 사이에 사람이 들어갈 여지가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다. 즉 모내기가 행해졌다는 것이다. 각운 작업에 의하여 흙속에 밟아 넣은 잡초는 거름이 되고, 벼모의 가지치기를 촉진한다고 한다. 이 각운 화상전은 앞에 기술한 그림2-8 ④와 그림2-11의 두 가지 석제 피당도전 모형 안의 엎드려서 농작업을 행하는 인물상과 함께, 한나라대에 행하던 모내기 자료로 귀중하다. 


그림2-22 쓰촨성 신도현에서 출토된 후한 시대 피당·각운 화상전. 오른쪽 두 사람은 피당에서 연근 등을 캐내고 있으며, 왼쪽의 두 사람은 지팡이에 의지하면서 논 잡초를 발로 밟아 넣는 작업을 행하고 있다.




그림2-23 1950년대 쓰촨성 양산凉山 이족彝族 자치주에서 이족의 각운 작업. 후한 시대의 화상전에서 발견되는 농작업이 계속되고 있다(쓰촨 대학 부속 박물관 제공).


 


위에 적은 이외에도 농업에 관한 화상전은 매우 많고, 그에 대해서는 일찍이 졸저 <화상이 말하는 중국의 고대> 안에 해설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를 참조해 주시기 바란다.






영남 지방의 벼농사와 리전犁田·파전耙田 모형


진한 시대의 영남 경로와 남월南越 왕국


명기의 도전 모형이 출토되는 다른 하나의 분포도로 광둥 삼각주와 그 주변 지역을 들 수 있다. 중국 서남 지역과구별하여 문제 삼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광둥 삼각주를 중심으로 한 영남 지방은 기원전 221년에 진의 시황제가 전국의 6국을 평정한 뒤에도 월족의 세력이 강하고, 기원전 219년부터 5년 동안을 소비한 영남 통일전쟁에 의하여 마침내 진의 산하에 편입된 것이다. 이때 진은 장강 지류의 상강湘江과 주강珠江 지류의 리강灕江을 연결한 파나마 식의 대운하를 뚫고, 치중輜重 부대를 보냈다. 이 운하는 도강언에 필적할 정도의 대공사였는데, 물자 수송을 위한 시설이고 농업 개발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시황제의 사후 초(항우)와 한(유방)의 항쟁 시기, 남해군의 위尉(군정장관) 임효任의 유탁遺託을 받았던 용천현령龍川縣令 조타趙 영남 전역을 병합하여 남월왕국을 세우고 번옹에 도성을 쌓아 스스로 남월국의 무왕武王이라 칭했다. 사마천의 <사기> 남월열전에 의하면, 조타는 진정眞定(지금의 하북성) 출신으로, 진의 영남 통일 이후에 월족 사회에 섞여 살게 한 유배자와 어떠한 관계가 있으며, 그곳에서 두각을 나타내 현령에 발탁된 인물인 듯하다.


한의 전토 통일 이후에도 남월국은 벽원의 땅에 있기 때문에 한 왕조는 정치적으로 개입할 수 없고, 오히려 남방의 안정을 꾀하기 위하여 조타를 남월왕에 봉하여 그 위세를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조타는 장수한 인물로 100세 정도까지 생존하고, 재위는 67년이란 긴 세월에 이르렀다. 이 사이에 남월왕국은 주변의 여러 민족을 통솔하고, 한 왕조에 따라서 제도를 정비하며, 왕은 스스로 제호를 참칭하여 마치 작은 한 제국의 양상을 보였다. 1983년 광저우 시내 상강산崗山에서 남월왕 묘(제2대인 문제文帝 조호趙胡의 묘. 출토된 봉니封泥에는 '조매趙昧'라고 표기)가 발견되어, 그 부장품의 호화로움은 많은 사람을 경탄시켰다. 그 재력의 근원은 남해 무역에 있었다.남월(현재의 광저우시)의 땅은 남해를 향한 현관 입구이기도 하여, <사기> 화식열전에 "번옹도 또한 한 도회로서, 진주·코뿔소 뿔·대모 및 남방의 과일과 천이 폭주해 오는 곳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최근 광저우 시내에서 진나라대의 조선소터가 발견되어, 그곳에서는 300명 이상의 사람을 태우는 대형 배가 건조되었단 점에서 그것을 입증한다. 


남월 왕국이 완전히 한 왕조의 지배화에 들어간 것은 전한 무제의 원정元鼎 6년(기원전 111년)의 때이다. 무제는 남월 평정 이후, 이 지방부터 인도차이나 반도에 걸쳐서 9개의 군을 설치하여 직할통치를 강화했다. 북방에서오는 입식자에 의한 영남 지방 개발은 이 이후에 시동하게 되지만, 그 전에 강남 지방의 개발이 있다. 본격적으로영남 지방에 입식자가 증가한 것은 다음 두 가지 시기이다. 첫째 시기는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의 동란기(2세기 후반-3세기 전반), 그리고 두번째 시기는 서진 왕조가 북방의 색외塞外 민족인 오호(흉노, 갈, 선비, 저, 강羌)의 침입에 의하여 요란해져 영가永嘉의 난(311년) 등의 병란을 겪고 동천하여 강남에 동진 왕조를 건설한 시기이다(3세기 말-4세기 전반). 입식자들에 의한 영남 지방의 농업 개발은 중국 서남 지방과 비교하여 시간차가 있을 뿐만 아니라, 문헌사료에 호족과 대성의 성장을 보여주는 기사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두 가지 입식자의 최고조 시기에 각각 특색이 있는 논 모형이 출현한다. 아래는 거기에 표현되어 있는 벼농사의 실태를 해설하려 한다.





후한 시대의 두 가지 논 경작 모형


광둥성의 광둥 삼각주 지대에서 후한 시대의 논 모형이 몇 점 출토되는데, 농작업을 행하는 인물용을 수반한 것이 2점 있다. 그 하나는 1961년에 불산시佛山市 란석瀾石의 후한 시대 전실묘에서 발견된 논 쟁기질 모형이다. 우리가 촬영한 사진(그림2-24)에 입각하여 발굴보고의 기사를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徐恒彬 1964).


그림2-24 광둥성 불산시 란석에서 출토된 후한 시대의 논 쟁기질 모형과 작은 배. 모형의 크기는 39x29x1.2cm(광둥성 박물관 소장, 2005년 와타베 촬영)




논은 두렁에 의하여 여섯 개로 구획되고, 각 논에는 하나의 농작업 인물용이 있다. 오른쪽 위와 바로 앞 한가운데에 삿갓을 쓴 인물의 앞쪽 논에는 각각 V자 모양의 보습이 있다. 두 사람은 쟁기의 자루를 쥐고서 조작하고 있는듯하다. 바로 앞 오른쪽의 인물은 낫을 들고서 수확 작업을 하고, 중앙의 두렁에 올라가 있는 인물은 낫을 갈고 있다. 왼쪽 위의 인물은 모내기 작업을 잠깐 쉬고 있다. 그 아래 왼쪽에는 탈곡 작업을 행하는 한 사람의 아이가 있으며, 아이의 옆에는 탈곡을 끝낸 곡물의 무더기가 셋 있다.


이 발굴보고가 계기가 되어, 후한 시대에는 광둥 삼각주에서 논농사에 쟁기가 도입되었다는 설이 정설화된다. 게다가 부리는 소의 모형이 수반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소쟁기질'의 확실한 증거라고까지 이야기하게 되었다. 우리 자신도 이 설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이 모형의 실물을 광둥성 박물관에서 자세히 살펴보기에 이르러, 쟁기질도 소쟁기질도 모두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는 보습의 앞에 있어야 할 쟁기술의 흔적을 빼놓고 있는 점. 둘째는 앞에서도 기술했듯이, 이 모형에는 부리는 짐승을 빼놓고 있는 점. 그리고 셋째는쟁기를 조작해야 할 삿갓을 쓴 옆을 향한 인물의 두 손이 가리키고 있는 연장선상에 보습이 합치하고, 이 인물용은 자루가 긴 수동식 농기구를 조작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는 점. 즉, 이 두 사람의 인물용은 자루가 긴 따비,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정창원에 전하는 '자일수신서子日手辛鋤' 같은 따비를 조작하고 있다고 우리는 판단했다. 이 추정을 확증하는 데에는 유사한 예의 출토를 기다려야 했다.


그 기회는 2005년 3월에 찾아왔다. 화남 농업대학 농업사연구실의 구면인 예근금倪根金 주임과 팽세장彭世奬 씨의 안내로 광저우시 번옹구의 번옹 박물관을 방문해, 드디어 그림2-25의 새로 출토된 논 쟁기질 모형과 대면할 수 있었다. 이 박물관의 부지 안에는 후한 시대부터 명나라대까지의 묘가 있고, 해당 모형은 그 안의 후한 시대 전실묘 안에서 1994년에 출토된 것으로, 파손이 심했기에 복제품을 제조하여 전시했다. 이 논 모형은 두렁에 의하여 십자로 사등분되고, 그중 삼면의 논에 비스듬한 두렁이 설치되어 있다. 왼쪽 아래의 두 사람의 인물 앞쪽의 논에 각각 보습 모양의 것이 있다. 이것은 분명히 소에게 끌게 하는 쟁기의 보습이 아니라, 손으로 조작하는 따비의 날이다. 또한 그 위의 두 사람의 인물은 모내기를 행하고 있으며, 배후의 두렁 위에는 벼모의 단이 늘어서 있다. 두렁의 십자가 교차하는 지점에는 낫을 갈고 있는 인물이 있다. 불산시와 번옹은 서로 인접한 행정구이고, 두지구에서 출토된 이들 논 쟁기질 모형은 공통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제작된 명기일 것이다.


그림2-25 광둥성 광저우시 번옹구에서 출토된 후한 시대의 논 쟁기질 모형(번옹 박물관 소장, 복제품, 2005년 와타베 촬영)





이들 두 점의 논 쟁기질 모형을 서로 비교하여, 해당 모형 안의 농작업이 쟁기질이란 설은 부정되었다. 그러나 광저우 지방의 같은 시기의 전실묘에서 대부분의 동물용, 예를 들면 돼지, 개, 소, 양, 닭, 거위, 집오리 등의 명기가 출토되고 있기에, 일소의 이용법을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 왜 북방의 가축인 양의 명기가 이와 같은 아열대의 광저우 지방에서 출토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후한 시대의 광둥 삼각주에 쟁기질이 존재했다는 설은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북방 건조지 농법의 기술 이전과 리전·파전 모형의 탄생


4세기 초두의 영가의 난에 의하여 서진 왕조가 멸망하고 강남의 건강建康(지금의 남경)에 동진 왕조가 건설되는데, 그때에 대량의 난민이 발생했다. 당시의 참상을 <진서晉書> 식화지食貨志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일이 많고, 기근과 역병이 만연하여 열 사람 가운데 여덟 아홉 사람의 관리가 유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민의 무리는 대거로 화북에서 강남으로 향하고, 연쇄 현상처럼 그 지방의 사람들을 휩쓸리게 하면서 영남 지방으로의 인구이동을 촉진해 갔다. 영남 지방은 비교적 평화로웠다고 보이며, 광저우시의 전실묘 등에서 발견된 명문전銘文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발견된다.


"永嘉世, 九州荒, 如廣州, 平且康" "永嘉世, 九州凶, 如廣州, 平且豊" 

"永嘉世, 天下荒, 余廣州, 皆平康" "永嘉世, 九州空, 余吳王, 盛且豊"


네 점의 명문 내용은 모두 유사하며, "영가 연간(307-313년) 천하는 크게 혼란하지만 이 광주 지방(이 경우의 광주는 광둥·광시를 포함한 영남 지방을 가리킴)은 평화롭고 풍요롭다"라고 찬양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소에게 끌게 한 쟁기로 논을 갈아엎고, 파(정확히는 초파라고 부른다. 써레임)로 흙덩이를 부수는 농작업을 한 묶음으로 한 명기가 출현한다. 이것을 '리전·파전 모형'이라 부른다. 광둥성 박물관에는 란석에서 출토된 모형과 아울러 광둥성 연현連縣에서 출토된 서진 시대의 리전·파전 모형(그림2-26)이 전시되어 있으며, 이 모형은 참으로 다양한 농경 정보를 가르쳐준다. 이 유형의 모형은 광둥 삼각주 지대 및 그 주변 지역에서 몇 가지 발견되며, 예전에 발견된 것을 그려놓은 것이 그림2-27이다.


그림2-26 광둥성 연현에서 출토된 서진 시대의 리전·파전 모형(광둥성 박물관 소장, 2005년 와타베 촬영)



그림2-27 영남 지방에서 출토된 서진-남조 시대의 리전·파전 쟁기질 모형(와타베 모사)

①남조 시대의 도자기로 만든 파전 모형(광시 장족 자치구 오주시梧州市 출토) ②서진 시대의 도자기로 만든 리전·파전 모형(광둥성 소관시韶關市 서하西河 출토) ③서진 시대의 도자기로 만든 리전·파전 모형(광둥성 광저우시 황포구埔區 출토) ④서진 시대의 도자기로 만든 논 쟁기질 모형(광둥성 광저우시 황포구 출토) ⑤서진 시대의 도자기로 만든 논 모형(광둥성 광저우시 황포구 출토) ⑥동진 시대의 도자기로 만든 논 쟁기질 모형(광둥성조경시肇慶市 황강진崗鎭 출토)




이들 리전·파전 모형에는 중국 서남에서 발견된 피당도전 모형과 다른 점이 많이 발견된다. 첫째는 피당이 표현되어 있지 않은 점. 이것은 아열대에 속한 영남 지방의 기후와 크게 관계가 있다. 이 지방에서는 우기에 강우량이많기에, 수로만 정비 관리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와 관련하여 광저우시의 연간 평균 기온은 21.8도, 강수량은 약 1700밀리미터로, 이 수치는 한중과 성도와 비교하여 훨씬 높다. 따라서 한나라대의 광둥 삼각주에서는 벼의 완숙 재배가 충분히 가능했다. 그것은 란석(광둥성 불산시)에서 출토된 모형에서 수확·탈곡·모내기가 동시 진행으로 표현되어 있는 점에서도 엿보아 알 수 있다. 


둘째는 논에는 어구인 통발이 장치되어 있는 점. 이것은 삼각주 지대의 수로와 논 사이의 접속이 좋기 때문에 많은 어류가 자연히 진입해 온다. 그것을 장치된 통발로 가만히 앉아서 잡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관은 윈난성의 논벼농사에 종사하는 타이족의 마을에서 일상다반사로 볼 수 있다. 어구가 다채로운 점으로는 타이족을 그 필두에 자리매김할 수 있겠다(그림2-28). 중국에는 옛날부터 풍요로운 수향 지대를 '어도지향魚稻之鄕'이라든지 '어미지향魚米之鄕'이라고 형용하는 표현이 있다. 벼농사와 어로는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으며, 특히 해안선에 비하여 내륙의 수계가 잘 발달된 중국에서는 담수산의 어획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그 때문에 후한 시대에는 이미 <양어경養魚經>이란 매뉴얼이 저술되고, 또 6세기 전반의 농서 <제민요술>(가사협賈思勰 저)에도 양리養鯉의 기사가 보인다. 더구나 현재 쓰촨과 광둥에서는 벼논양어를 위한 어묘魚苗(치어)를 제공하는 업자가 윈난의 타이족 농촌에서 성공을 거둔 예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림2-28 타이족 농가의 헛간에 보관되어 있던 각종 어구(윈난성 덕굉德宏 태족傣族 경파족景颇族 자치주 망시芒市 망핵촌芒核村에서, 1997년 와타베 촬영)




셋째는 가장 중요한 쟁기질에 관한 문제인데, 이 시기에 중국 서남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던 쟁기와 써레를 조합한논 쟁기질 모형의 명기가 출현한다. 그림2-26의 연현에서 출토된 사례에서는 논의 네 귀퉁이에는 어구인 통발이장치되고, 논은 한가운데의 두렁으로 둘로 분할되어 있다. 건너편의 인물은 한 마리의 황소(그림2-27 ①··⑤에는 물소가 등장하고 있는 것에 주의)에게 쟁기를 끌게 하고 있다. 모형은 점토를 손으로 빚은 관계로, 쟁기와멍에 등의 조작은 매우 조잡하다. 그러나 쟁기의 모양은 L자형을 나타내고 있기에 선쟁기이며, 소의 등 부분에 있는 두 개의 봉 모양의 것을 끌채라고 한다면, 이것은 겨리쟁기가 된다. 또한 가까운 쪽의 인물은 똑같은 방법으로 소에게 써레를 매어 끌게 하고 있다.


쟁기로 갈아엎고, 써레로 흙덩이를 부수며, 또한 번지나 끌개로 토양을 진압하는 농기구 체계는 북방의 밭농사 지대에서 고안된 건조지 농법(dry farming)의 일대 특색이다(그림2-29). 또한 건조지 농법에서 사용되는 쟁기는일반적으로 얕이갈이 유형의 눕쟁기이다. 그 건조지 농법에 있는 농기구 체계의 주요 부분이 4세기 초두의 영남 지방의 논 쟁기질에 도입되었던 것이다. 이 기술 이전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는 상세히 논한 적이 있다(渡部 2002, 2005). 다만 반복하여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북방 밭농사 지대에서의 써레는 그림2-29에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사람이 그 위에 타서 체중을 실어 조작하는 써레(踩耙, 레발이 달림)인데 그것이 논 지대에 도입되면 그림2-30의 사진처럼 상부에 손잡이가 달린 써레(耖耙)로 변하며, 그 고안은 아마 장강 중하류 지역에서 이루어져동란기의 세찬 인구 이동에 의하여 영남 지방으로 가져간 것이 아닐까?


그림2-29 간쑤성 주천시酒泉市 정가갑丁家 5호묘 전벽화 안의 건조지 농법을 보여주는 쟁기질, 써레질 작업(오호십육국 시대)




그림2-30 두 마리의 물소로 써레를 끌게 한다. 논에 물을 대어 작업은 훨씬 경감된다(윈난성 강천현江川縣에서, 1995년 5월 와타베 촬영)






끝맺음


이상 중국 서남 지방과 광둥 삼각주 지대의 묘장에서 출토된 한나라대부터 육조 시대에 걸친 '피당도전 모형'과 '논 모형'으로부터 당시 벼농사의 실태가 어떠했는지를 해설해 보았다. 이와 같은 출토 명기에 대하여 최초로 주목한 것은 고고학자 오카자키 타카시岡崎敬(1923-1990)였다. 그는 1950년대에 남경 박물원에서 쓰촨성 팽산현에서 출토된 몇 점의 논 모형을 보고, 이와 같은 문물은 계속 발견되어 머지않아 우리나라의 고대 벼농사를 생각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예언했다(岡崎 1958). 예언은 적중하여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개혁개방 경제정책에 의한 건설 러쉬로, 많은 논 모형의 새 자료가 발견되었다. 이들 문물은 출토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은 각 지방의 박물관과 문물관리소의 창고에 보관되어 공개되는 일은 거의 없다. 오랜 세월을 소비하여, 현지의 많은 지인의 도움을 얻어 관계자료를 자세히 살펴본 결과를 여기에서 정리해 보았다. 우리 자신이 중국사 분야의 출신이기에, 약간 역사적 배경에 무게를 너무 둔 경향이 있지만, 이것도 이 종류의 모형을 이해하기 위하여 필요할 것이다. 전문 고고연구자가 본다면 더욱 많은 발견이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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