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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5




제1장

이로운 도구가 되는 불 -수렵채집부터 화전 농경까지

코야마 슈죠小山修三







들어가며


타오르는 횃불을 치켜 올리고 사냥꾼들이 초원을 걸어간다. 큰 덤불과 숲이 가로막고 있으면 횃불의 불을 놓아서길을 열어 나아간다. 밤이 되면 모닥불을 피우고, 사냥과 채집으로 얻은 획물을 조리하고, 신체를 따뜻하게 해 잠든다. 그들의 지나간 뒤에는 불로 교란된 자연이 남는다. 그들의 길은 차례차례 거듭되면서 지상에 새겨진다.


사람과 불의 교제는 오래되었다. 불을 자유롭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사람을 사람답게 했다. 아프리카 남부에서나타났던 우리들의 직접적 선조 호모 사피엔스는 20만 년이란 짧은 기간 안에 지구의 전역으로 확산을 이루고, 가까운 장래에는 인구가 100억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것이 가능했던 건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먹을거리의 조달은 자연 안에 산재하는 먹을거리를 구하는 수렵과 채집의 단계부터 시작해, 자연을 개변하여 동식물을 관리육성하는 농경과 목축으로 이행해 갔다. 본론에서는 그 과정에서 '불'이 어떤 역할으 수행했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수렵채집민과 불


수렵채집민의 확산


최근 놀랍게 늘어난 인간 화석의 발견과 과학연대법, 고환경 복원, DNA 분석 등의 성과에 의하여 우리들의 직접적 선조인 호모 사피엔스의 활동이 점차 밝혀져 왔다. 그래도 정보는 점으로만 보이지만, 그 점과 점 사이의 직선을 인간이 걸었다고 가정하고, 시간과 속도를 계산한 것이 표1-1이다.



출발점

도달점

거리(km)*

시간(만 년)

속도(km/년)

아디스아바바(에티오피아)

카멀(이스라엘)

본(독일)

바이칼호(러시아)

페어뱅크스(미국)

텍사스(미국)

카멀(이스라엘)

류강(중국)

-카멀(이스라엘)

-본(독일)

-바이칼호(러시아)

-페어뱅크스(미국)

-텍사스(미국)

-몬테베르데(칠레)

-류강(중국)

-다윈(오스트레일리아)**

2660

3202

6309

5431

5132

8328

7190

5575

10

6

1.5

1

0.3

0.1

3

2

0.03

0.05

0.42

0.54

1.71

8.33

0.24

0.28

표1-1 호모 사피엔스의 이동

*직선거리   **수라바야(인도네시아) 경유




아래는 네 가지 경로에 대하여 자연환경과 사용한 도구를 감안하면서 개황을 기술하겠다.



(1)아프리카 안에서

20만 년 전 무렵에 아프리카 남부에 나타났다고 하는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를 나와 서아시아로 진출한 것은 약 10만 년 전이었다. 그것은 카프제 유적(이스라엘)의 연대로부터 파악할 수 있다. 인구론적으로 말하면, 아프리카를 가득 채우고 다음 땅으로 밀어내는 압력을 가지기까지에 10만 년이란 시간이 걸린 셈이 된다. 그 속도를 계산하면 1년에 30미터라는 매우 느린 것이었다.


고고학 유적에서 그들의 생활방식을 보면, 큰 마을을 경영한 흔적은 없고, 도구는 석기밖에 없다. 석기는 150만 년 전에 나타나 7만 년 전까지 사용된 손도끼와 약 20만 년 전부터 나타났다고 하는 찌르개가 교차하는 단계에 있었다. 그러나 10만 년 전쯤부터 발달했던 석기 문화가 나타났다고 하는 보고가 있다(Stringer 외. 2005). 이들의 석기는 짐승의 사체를 찾아 다니는 상태부터 살아 있는 동물을 노리는 수렵으로 진화해 갔던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식물성 먹을거리의 처리에 대해서는 별로 효과적인 도구는 눈에 띄지 않는다. 육식 지향의 소집단이 시간을 걸려서 차츰 생활역을 넓혀 갔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2) 북쪽의 경로

아프리카를 나온 집단은 확산을 계속한다. 그중 가장 명확한 것은 북쪽으로 향한 길이다. 그 발자국은 먼저 서아시아에서 북으로 향하고, 스페인과 프랑스, 영국에 도달하여 유럽에서 하나의 문화를 완성시켰다. 그 속도는 조금 올라 1년에 50미터였다.


그들의 석기는 소형으로 날카롭고, 그것을 이용한 복합도구, 뼈와 뿔을 가공한 창날, 게다가 투창기와 자루 달린 도구 등 수렵에 특화된 효과가 높은 도구가 있다. 그밖에 장식용 구슬과 목걸이는 장신구로서, 그리고 비너스상, 의례용 봉, 알타미라와 라스코 동굴로 대표되는 벽면은 제사 때문이라 생각되며, 정신세계가 확장되어 갔던 모습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맘모스, 들소, 순록 등의 대형 짐승에 목표를 정한 수렵사회를 만들고, 그안에서 집단의 통합과 계급제의 맹아가 있었던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재봉 바늘이 있었던 점으로부터 의복을 만드는 등 한랭지에 적응했던 것 같다. 대형 짐승을 쫓아서 동으로 이동해 갔던 길은 북극의 빙상과 타이가 사이에 있는 초원(툰드라)의 회랑을 시베리아로 향하고, 또 해수면 강하에 의하여 육지화되었던 베링 해협을 건너서 북아메리카 중앙부에 이른다. 시베리아까지 1년에 540미터, 그곳에서 아메리카 중앙부까지 1년에 1710미터로 가속하였으니 놀랄 만한 속도이다.



(3)남쪽의 경로

또 하나, 서아시아에서 북인도를 지나서 동남아시아, 남중국에 확산한 집단이 있다. 7만 년 전에는 중국 남부에 나타났다. 1년 속도는 280미터이다.


이것은 북쪽 경로와는 달리, 초원의 환경에서 출발하여 광엽혼교림, 열대우림에까지 뻗어 있다. 다양한 자연환경안에서 먹을거리의 목표는 동물뿐이 아니라, 식물에도 향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음의 농업 단게에서 오늘날의 주요 작물의 대부분이 나타났던 경로라는 점에 주목할 만할 것이다. 그렇지만 도구류는 간소하여 북인도까지는 손도끼계의 석기 복합, 거기부터는 찍개 복합으로 옮겨지는데, 식물에 특화된 도구는 발견되지 않는다.



(4)바다의 경로

동아시아, 동남아시아에서 5만 년 전에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이르렀던 집단의 길이 있다. 빙하기의 해수면 강하를 계산에 넣더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바다를 건너야 했던 길이다. 지금까지의 구석기시대 연구는 육지의 이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는데, 이미 이 단게에서도 바다의 자원 입수와 수상 이동의 수단이 진행되어 있었던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길의 도달점인 오스트레일리아의 석기류는 찍개계이고, 어획구와 식물식에 적합한 도구는없는 듯하다.




불이라는 도구


확산의 대강은 이상과 같지만, 집단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나아갔을 리 없다. 전진의 준비와 자손을 만들고 늘리기 위한 기지가 필요하다. 그들은 기지를 반영구적인 거점으로 삼았다. 그 결과, 고유의 영역이 생기고 중·소 짐승과 야생 식물 등의 먹을거리 자원을 개발해 갔을 터이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한 도구는 매우 간소한 것으로, 그작업을 충분히 수행한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럼 그 개발을 가능하게 한 방법이란 무엇이었는가.


(1) 환경의 통제

자연은 인간을 안정되게 살게 하는 어슬픈 것이 아니다. 특히 기본이 되는 식생은 극상을 만들어 식물 중심의 세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인간을 접근시키지 않을 정도의 힘을 지닌다. 그런데, 인간은 그런 환경을 개변하여 인구를 늘려 갔다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고고학 유물을 보는 한, 각 지역의 맹렬한 식물의 힘을 억누르는 효과적인 도구는 눈에 띄지 않는다. 진정 도구는 없었던 것일까?


그 도구는 불이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불의 이용은 80만 년 전의 호모 에렉투스의 단계부터 시작된 것이 확인되고 있다. 화로가 주거의 중심에 놓여 있기 때문에 조리와 조명, 난방에 쓰였을 것이다. 그 전통은 호모 사피엔스의 시대에도 계속되어, 불을 지피는 도구나 램프가 나타나, 불의 취급이 교묘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불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한 것은 환경(식생)을 바꾸는 일이었다. 그 실증이 고고학적으로 어려운 것은 발굴이 거주 구역에 한정되어 있으며, 그밖에 불태운 흔적이 발견되더라도 인위적인지 자연적인지 판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이 환경을 바꾸는 도구였단 것을 증명하는 수단은 과연 있을 것인가?


(2) 자연이 하는 일에서 배우다

인간은 불의 효용을 자연이 하는 일에서 배웠음이 틀림없다. 자연의 산불은 화산 활동과 낙뢰 등에 의하여 발생하고, 때에 따라서는 그 지역의 식생이 파괴되어 경관이 확 바뀐다. 불태운 흔적은 확 트인 초원의 환경이 되며(물론 부분적으로는 숲도 남음), 식생은 다시 활성화된다. 그에 따라 동물의 상태도 바뀐다. 인간에게는 바람직한 환경이 출현하는 것이다.


미국에는 아이다호, 몬타나, 와이오밍 주에 걸쳐서 옐로스톤 국립공원이 있다. 록키 산맥의 북부 동쪽의 매우 건조한 고원(프레리)이다. 일찍부터 공원으로 에워싸서 '자연 그대로'라는 이상에 따라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손대지 않은 자연에 가까운 온대성 낙엽혼교림과 초원이 남아 그곳에서 들소, 사슴, 늑대, 곰 등 야생 동물이 여럿 서식하고 있다. 프레리는 산불이 가장 발생하기 쉬운 환경의 하나로, 통계에 의하면 10-100년에 한 번이란 빈도로 대규모 산불이 일어난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1988년에 큰 산불이 있었다. 이 해는 100-200년에 한 번이란 이상기후로 바싹 마른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화재는 7월에 낙뢰에 의하여 발생, 그뒤 9월까지 3개월에 걸쳐서 계속 불타고, 45만 헥타르의 초원, 산림 및 주변 시설이 불탔다. 피해의 크기에 소화 활동을 진행해야 한다는 비난도 나왔지만, 공원 당국은 "산불은자연의 주기 가운데 일부, 자연적 화재는 자연 진화를 기다린다"는 태도를 일관했다. 화학약제나 대량의 물 투입은 그뒤의 자연에 큰 부담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과는 어떠했는지, 아직 산불의 흔적은 보이지만 식생은 순조롭게 회복하여 야생 동물에 대한 영향도 거의 없고, 도리어 활발해졌다.


이와 같은 산불의 효과를 인간은 경험적으로 배웠을 것이다. 그것은 숲과 초원의 화재는 긴 주기에서 보면 생태를 활성화시킨다는 지혜이며, 그 때문에 불을 인위적으로 사용하는 기술을 배운 것이 아니었을까?





숲에 놓은 불


(1) 애버리지니의 불지르기

수렵채집민이 불을 환경의 통제 '도구'로 사용하는 체계가 현존하고 있는 것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이다. 이 대륙에는 5만 년 전에 사람이 건너와, 그 이후 수렵채집 생활을 계속해 왔다. 그런데 18세기 말에 영국의 식민지가되면서부터 대부분의 사회가 사라져 갔다. 그러나 현재도 북해안의 아넘랜드와 중앙 사막의 엣 보호령에서는 30명 전후의 친족을 바탕으로 한 부족 집단이 이합집산하는 유동성이 높은 사회를 만들고, 반정주적인 캠프를 중심으로 식량을 구하며 영역 안의 지점을 선택해 이동하는 생활을 보내고 있다. 몰려드는 현대화의 파도에 저항하면서 전통을 지키고 있다.


그들이 불을 사용하여 환경을 통제하고 있다는 가설을 낸 것은 R. 존스(1941-2001)였다. 그는 1969년에 태즈매니아의 도시 호바트에서 일어난 큰불에서 발상을 얻어, 18-19세기 식민 시대에 적었던 일기, 회화 등의 기록을 샅샅이 조사했다. 그 결과,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는 애버리지니가 놓은 불에 의하여 확 트인 숲이 펼쳐져 있었단 것이 시사되었다. 그리고 현재의 태즈매니아의 동반부가 극상의 유칼립투스 숲이 되어 대부분 이용할 수 없게 된 것은 백인이 애버리지니를 멸망시킨 결과, 숲에 불을 지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의 도시가 산불에 의하여 큰 피해를 받는 것은 정부의 환경 관리 사고방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며, 이땅의 환경문제는 애버리지니에게 배워야 한다는 현대 사회를 향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Jones 1969).


존스의 가설은 격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최대의 반론은 정통 식물학자에게서 나왔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식생은몇 백만 년에 걸친 건조한 환경에 적응한 것으로, 불과 몇 만 년 동안 인간의 간섭에 의하여 그렇게 큰 변화가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근저에는 숲에 불을 놓는다는, 역전의 발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북반구 유럽인의 산림에 대한 생각이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젊은 세대의 민족학·민족식물학·생태학 분야의 연구자들이 실제로 현장에 나가 애버리지니에게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사를 시작했다. 다행히 중앙 사막과 북해안부 아넘랜드의 애버리지니령(옛 보호구)에서는 불지르기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건재했다. 그 결과, 그때까지 야만의 증거라고 했던 불지르기는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기능하고 있단 것이 밝혀졌던 것이다.


(2) 불지르기의 조사

내가 조사했던 매닝그리다 지구는 아넘랜드의 중앙부에 있다. 산불의 조사는 존스와 그 동료들에 의하여 197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1976년에 실시된 보고가 기초적인 게량 자료가 되었다(Haynes 1985). 


이 조사는 구나이족의 영역 안에서 9059헥타르의 직사각형 구획을 설정하고, 불이 발생한 장소의 연소 범위와 불탄 흔적의 상태를 애버리지니와 함께 걸어서 관찰하고, 의견을 들으면서 실시된 것이다. 구획 안의 5562헥타르가 소개림(wood land), 나머지 3497헥타르가 초원이었다. 이 해에 불에 붙은 것은 전역의 약 70%, 식생별로 보면 소개림 80%, 초원 60%였다.


불지르기가 체계화되어 있다는 것의 첫째 증거는 그 계절성이다.


이 땅의 기후는 열대 게절풍의 영향으로, 건기(3-11월)와 우기(12-3월)에 걸쳐 있다. 구나이족은 1년을 6개의 시기로 나누고 있는데, 그 단락이 되는 것은 바람 ,태풍, 비, 새가 날아옴, 식물의 개화 등 자연의 변화이다(그림1-1). 다만, 이 달력은 디지털의 시간 구분이 아니고 해마다, 그리고 다른 지역과도 미묘하게 어긋나 있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그림1-1 구나이족의 달력. 오스트레일리아 북해안은 열대 계절풍 기후로서, 우기와 건기로 나뉜다. 또한 애버리지니는 서늘한 바람, 꽃의 향기 등 체감적으로 나누고 있다. 사낭꾼들의 광역에 걸친 활발한 활동은 건기에 전개된다.




계절에 흐름에 따라서 불지르기의 경과를 보면,

①시작은 3월-5월 초순(카니리간 시기). 우기가 끝나고, 가끔 세찬 태풍이 오는 무렵이다. 먼저, 불을 지르는 건다습한 초원과 숲의 경계로, 우기 동안 왕성하게 번성한 풀이 마르기 시작한 장소부터, 조금씩 태워 간다. 작은 태운 흔적의 부분은 연결되고, 나중에 방화대의 역할을 수행한다. 불 넣기로 싹이 나기 시작한 초원은 캥거루를 시작으로 하는 동물들의 먹이장이 된다고 한다.  

②5월 초-6월 중순(예겔 시기)가 되면 기온이 내려가고, 약간 서늘해진다. 사람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유칼립투스 숲에 불을 지르기 시작한다. 시작은 가장자리를 소규모로 신중히 태우는데, 이것은 볕이 잘 들게 하고, 나무의 딸기류를 달게 만든다고 한다. 건기가 진행됨에 따라서 불지르기의 범위는 넓어지고, 숲이 환해지고, 숲의 지표면이 트여 수렵과 포획이나 채집 활동을 하기 쉬워진다.

③6월 말부터 8월(우레겐 시기)는 기온과 습도가 떨어져 살아가기 쉬워진다. 본격적인 산불의 계절로, 도처에서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불은 하루에 꺼지는 것이 이상적이라 하는데, 며칠 동안, 때로는 몇 주 동안에 걸쳐서 계속 타는 일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실패 사례라고 한다.

④8월 중순(와릴 시기)는 기온이 상승하여 사람들의 활동이 둔하고, 유칼립투스 숲에는 불을 지르지 않게 되며, 초원의 불지르기도 점차 하지 않는다. 

⑤11월 말(도르도르 시기)가 되면, 습도가 올라 때때로 세찬 비가 내리는 우기가 도래하여 불지르기도 끝난다. 

⑥우기(가샤단 시기)에는 불은 놓지 않는다. 


이상과 같이 구나이족은 습도, 온도, 동물의 움직임을 보면서 우기에 번성하여 건기에 말라 죽는 풀과 나무를 달력에 따라서 불을 놓아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불지르기가 체계화된 것이라고 하는 두번째 증거는 장소에 대한 엄격한 규제가 있다는 점이다. 


불은 소개림에 빈번하게 놓는 한편, 불에 약한 식물을 지키기 위하여 맹그로브 숲과 열대우림에는 절대로 불을 지르지 않는다.


또한 소개림 안에 성지로서 불을 붙이지 않는 장소가 있다. 나무 아래 풀이 무성한데, 여기에 일단 불이 미치면 큰불이 된다. 큰불에 의하여 숲이 무너지면 초지가 되는데, 이것은 식생을 재구성하여 새로운 자원의 장을 만드는 효과를 노리고 있는 듯하다.


불지르기 장소에 대한 제한은 신화와 금기의 형식으로 남아 있다. 열대우림 안에서 들었던 것은 불을 사용하면 '악령이 눈에 날아들어와 눈을 찌부러뜨린다"는 것이었다. 악어의 등이 까칠까칠해진 것은 불을 소홀히 다루었기 때문이라는 신화도 있다. 그들은 노래가 되어서 의례의 춤을 출 때 반복하여 부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박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 증거는 불꽃을 분류하여 때와 장소에 따라 처리한다는 점이다. 건기의 최성기의 화재를 관찰하고 있으면, 태우는 방향과 태운 흔적에 명확한 차이가 있다.




소개림疎開林


아래는 내가 1999년에 매닝그리다에서 본 우레겐 시기의 유칼립투스 숲의 산불 관찰이다.


①쿨 파이어(1) (그림1-2)


그림1-2 쿨 파이어 (1) 거듭되는 불지르기에 의해 불꽃이 낮게 통제된다.

불꽃 이 낮게 통제된 화재를 쿨 파이어라고 부른다.




화재는 매닝그리다의 거리에 가까운 차도를 따라 있는 유칼립투스 숲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그해 이미 1번 불을 넣은 장소에서, 숲의 지표면에는 유칼립투스의 잎이 얇게 흩어져 여기저기에 지난번의 화재 뒤, 이미 싹을 틔운 유칼립투스, 아카시아, 목마황 등의 어린 나무가 있으며 가운데 층에는 타고 남은 야자나무가 있었다.


불은 선상으로 뻗어서 천천히 나아갔다. 불꽃의 높이는 20-30센티미터, 불의 세력은 관찰하려고 여기저기 걸어다녀도 위험하지 않은 정도로 약하다. 서 있는 나무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뿌리 주변이 조금 그슬리는 정도이지만, 불꽃이 높이 올랐기 때문에 줄기 위의 가지 부분이 일부 변색되어 있는 것도 있었다. 불꽃이 어린 나무가 우거진 곳에 이르면, 잣 하는 소리를 내며 타오른다. 쓰러진 나무나 흰개미에게 먹힌 그루터기는 숯이 되어 불을 유지하고, 그을려서 연기를 내고 있다.


태운 흔적은 검은 융단 같고, 밟으면 사박사박 소리가 난다. 그 아래는 부식토가 전혀 없이 새하얀 생땅이 되어 있다. 풍향의 변화인지, 태우지 않고 남았던 낙엽이나 우거진 지역도 있었다. 주변에 유칼립투스의 휘발성 좋은 냄새가 나고, 언제나 항상 따라다니는 모기가 오지 않는다. 불꽃은 숲의 깊숙한 곳을 향하고 있었는데, 이튿날 보면 불은 꺼져 있으며, 불탄 면적은 매우 작았다. 고요한 불로, 애버리지니가 불은 청소에 쓴다고 하는 의미를 알 수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②쿨 파이어(2) (그림1-3)


그림1-3 쿨 파이어(2) 숲속을 걸을 정도로 불의 기세가 약하다.




다음으로 불꽃이 높게 올라 나무줄기에 이르는 것을 핫 파이어라고 부른다.


매닝그리다에서 훨씬 떨어진 (약 30킬로미터) 지점, 역시 도로에 면한 장소에서 보았다. 적어도 올해는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숲으로, 풀과 떨기나무가 많은 장소였다. 불지르기 직후답게 불은 따뜻한 북동풍을 타고 번지고 있었다. 3시간 뒤에 측정해 보면 250미터 불길이 번져 타고 있으며, 아직 숲의 깊숙한 곳으로 기세 좋게 계속 번지고 있었다.


다음날, 24시간 뒤에 불은 숲의 깊숙한 곳으로 약 1킬로미터 뻗어, 깊은 계곡의 초지에 미치고 있었다. 상류 쪽에 야자나무의 군락이 있고, 그곳으로 불꽃이 이동하여 드득드득 소리를 내며 타올라, 검은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아직 불은 계속 번지고 있었다.


3일째의 같은 시각, 계곡에 들어간 불은 습한 나무 아래쪽 풀이 있는 곳으로 번져 타는 것이 멈추고 있었다. 숲속에 들어가면 불탄 흔적이 계속해서 있었는데, 숲의 지표면 모습에서 보아, 조금 전에 있었던 다른 화재의 흔적과 엇갈려서 멈춘 듯하다. 쿨 파이어와 비교해 불꽃이 높게 나무줄기 위의 가지에까지 이른 것이 많았다.


③핫 파이어(2) (그림1-4)


그림1-4 핫 파이어. 불꽃이 높이 나무줄기에 이르고 있다.




매닝그리다에서 애버리지니령의 서쪽 경계까지 200킬로미터, 그곳에서 카카두 국립공원을 지나 다윈 거리까지 또 300킬로미터의 거리가 있다. 돌아오는 길에 카카두 국립공원의 숲에 들어가자 나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먼저, 숲 지표면의 잎과 가지의 퇴적이 두텁고, 가운데 층 식물이 많으며, 겉보기에 추접스럽다. 그렇게 느낀 것은 나의 머리가 몽땅 애버리지니가 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앞길에 거대한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현장에 가자 숲이 완전히 소멸해 있었다. 공원 안은 불지르기가 금지되어 있기에, 마른 가지와 낙엽이 모여, 불꽃이 나무줄기의 가지까지 이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정도의 화재는 애버리지니령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통제를 잃은 핫 파이어라고 부를 만할까?





초원


저지대의 초원은 조금 모습이 다르다.


①파이어 드라이브

아넘랜드의 저지대는 우기에는 침수된다. 건기에 물이 물러나면 초원이 되고, 풀의 키가 큰 곳에서는 불의 기세가 제법 맹렬하다. 우기의 끝부터 불을 넣는 것은 연못-초원-숲의 이행대 초지 부분인데, 조금씩 태운 흔적이 패치 모양으로 이어지고, 방화대의 역할을 완수하는 것은 이미 기술한 대로이다.


초원의 대규모 불지르기는 파이어 드라이브를 위하여 행한다. 몇몇 마을의 사낭꾼이 협력하여 실행하는 사냥에서, 대량으로 포획한 획득물을 즐기는 포틀래치 같은 잔치가 있다. 획득물은 까치기러기이다. 내가 본 것은 젊은이 2명을 한 단위로 하는 조를 꾸려서, 두 조로 나뉘어서 역방향으로 돌면서 말발굽 모양으로 불을 붙여 간다. 놀라서 날아오른 까치기러기를 매복해 기다리고 있는 무리의 쪽으로 몰아넣는다. 불은 풍향과 미미한 지형을 잘 보고다루기 때문에, 예정한 범위 이상으로 불타는 일은 없다. 그것이 우리들 솜씨라고 그들은 말한다(그림1-5).


그림1-5 파이어 드라이브. 연못 주변의 풀에 불을 붙이고, 까치기러기를 쫓는다.




②환경을 정비한다

키가 낮은 말라죽은 풀의 땅을 불태운 흔적이 있었다. 불은 한순간에 번져서 꺼진 듯하고, 새카만 지표면이 어디까지나 펼쳐져 있었다. 사륜구동에 탄 젊은이들이 환성을 지르면서 달려갔다. 우기에는 연못이 되는 곳으로, 건기에는 지름길이 되지만 함정처럼 습지가 남아 있는 것이 있기에 안전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태운 듯했다. 조금 높은 장소에 판다누스의 그루가 있고, 불을 받았음에도 피해는 없는 듯하다. 판다누스는 열매를 먹을 수 있고, 잎은 바구니의 소재가 되는 유용식물이다. 이것도 일종의 환경정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③중앙사막(그림1-6)


그림1-6 중앙 사막. 불지르기 실험이 행해진 흔적




초원과 똑같은 불의 이용은 중앙 사막에서도 시험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사막의 풀 본체는 지하 조직에 있고, 표면에 드러난 것은 매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지표면을 제거하지 않는 한 가지와 잎은 언제까지나 남아 있으며, 집단이 쇠약해져 버린다. 그리고 불을 태운 뒤, 비가 풍족하면 가지와 잎은 급속히 무성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사막의 식물은 반복하여 불을 태우는 상황에 적응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막의 강, 수맥, 호수 등 물이 있는 쪽의 미묘한 변화에 따라, 식물은 패치 모양이 되어 번성한다. 애버리지니는 그것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불을 놓고, 식생의 다양성을 살리는 것으로 식량, 생활재를 풍부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아카시아속의 멀가, 노이티직ノイチヂク, 콘던コンドン 등 불에 약하지만 식품으로 중요한 나무는 역시 신화와 의례에 관련시켜 주변에서 불을 사용하는 걸 엄하게 제한하고 있다. 이처럼 중앙 사막의 식물성 식량의 대부분은 불에 적응한 풀에서 유래한 것이며, 그들은 정기적으로 불을 태워서 생산이 확보되고 있는것이다. 


불에 관계되는 지식과 수법은 아넘랜드와 공통되며, 고고학 자료에서 보면 적어도 2만 년 전부터는 전대륙에 퍼져 있으며, 현재의 사막 같은 환경도 사람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Latz 1995).


1982년 중앙 사막에서 첫 접촉(문명에 처음으로 접함) 집단이 있다는 뉴스가 돌아다녀, 인류학자가 활기를 띤 일이 있다. 결국은 일종의 일행과 떨어진 집단임이 밝혀졌는데, 그들을 발견하는 계기가 된 것은 작은 불태운 흔적이 군데군데 퍼져 있는 항공사진이었다는 것을 상기한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정착한 불지르기는 석기 등의 도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대륙에서는 건조가 심한 기후와 그에 적응한 식물이 있었던 점과 문화가 수렵채집민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도 불지르기의 체계가 남아 있던 것이다. 만약 고고학에서 말하는 도구를 유형문화재라고 한다면, 불을 도구로 사용하는 이 체게는 무형문화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화전 농경

 


채집에서 농경으로


인류의 확산이 일단 끝난 것은 약 1만2000년 전이었다. 그 무렵 최종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온난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큰 환경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해수면이 올라 유라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 동남아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비롯하여, 일본 열도 등도 지리적으로 고립되었다. 한편, 식물이 활성화하여 자연이 풍요로워졌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대형 짐승이 모습을 감춘 뒤, 폭발적인 지역 문화의 다양화가 일어난다. 그 한 예가 남미 대륙의 남단에까지 인간이 도달하는 데에 2000년도 걸리지 않았다는 점, 그뒤 이 땅에서는 탄탄한 농경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이 있다. 이것을 대분화(Great diversity)의 시대라고 부를 만하다고 파건 씨는 기술하고 있다(Fagun 2003). 그러나 아메리카에 머물지 않는 세계적인(ustatic) 사건이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시간적으로는 지역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6000-4000년 전이 정점이 되는 것 같다.


이미 기술했듯이, 확산 이후 인간은 각지에서 독자의 영역을 만들어 살아가게 되고, 그래서 불을 이로운 도구로 사용해 각각의 생활양식을 완성시키며, 그 과정 속에서 유용한 동식물의 관리와 육성 체계가 만들어져 갔다.


야마모토 노리오山本紀夫 씨는 '가축화와 작물화'를 주제로 세계 각지의 사례를 문제삼아 동식물의 사육과 재배의 기원을밝히고자 하는 흥미로운 공동연구를 실시하고 있다(山本 2009).


그 안에서 사카모토 사다오坂本寧男 씨는 중요하다고 하는 재배식물을 문제삼아, 그 기원지로 일곱 지역(①지중해와 서남아시아, ②아프리카, ③중앙아시아와 인도, ④동아시아, ⑤동남아시아, ⑥메소아메리카, ⑦남아메리카라고 함)를 들고 있다(그림1-7).


그림1-7 재배식물의 7대 기원중심지역(坂本 2000)




재배식물은 곡물을 비롯하여 콩, 덩이뿌리, 채소, 뿌리채소, 유지, 과일, 너츠, 향신료, 섬유, 약용, 음료, 기타로목록에 올려진 것만으로도 200종 가까운 방대한 수이다. 그밖에 재배화가 시도되었지만 결과적으로 농경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도 많다. 인간이 식량 획득을 위하여 어느 정도의 노력을 거듭해 왔는지에 놀라울 뿐이다. 


사카모토 씨에 의하면, 수렵채집 단계에서 산림파괴, trail(밟는 길)의 확대, 배설물과 쓰레기의 흩어짐에 의하여 인간, 동식물의 사이가 가까워지고, 공생관계가 생긴다. 다음 '반재배'의 단계가 되면 환경 교란이 증대되고, 채집법과 이용법이 확립되며, 최후로 경작지의 조성과 파종부터 수확까지의 작업 주기가 확립되었을 때 '농경'이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坂本 2009).


'반재배'부터 '농경'까지의 과정과 시기는 단순하지 않지만, 어느 의미에서는 인간이 식물을 유용하다고 주목한 순간, 즉 수렵채집의 단계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간주해도 좋지 않을까? 이미 보았듯이,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는 불지르기에 의하여 식생을 구분하고, 유용식물의 생산을 올리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소철, 벼, 베리, 사이프레스 파인 등은 재배화 직전의 상태에까지 와 있었다. 그래서 불을 사용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화전 농경의 상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일본의 화전


화전은 현재도 열대우림과 사바나를 중심으로 열대 아프리카의 대부분, 인도차이나 반도, 보르네오, 뉴기니의 산악지대, 중남미의 열대에서 행해지고 있는데, 예전에는 한대와 온대에서도 성행했던 것 같다. 화전에서 재배되는작물의 대부분은 교란에 의하여 생긴 잡초성 식물이 바탕인 점과 현재의 화전 지역 대부분이 (사카모토 씨가 말하는) 7대 기원지와 겹치고 있는 점으로부터 불을 사용하는 것에 의하여 선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의 화전은 1935년의 조사에 의하면, 면적 768만 평방킬로미터, 15.2만 호가 경영하고 있었다. 1950년의 세계농림업 센서스에서는 대폭 감소하지만, 그럼에도 95만 평방킬로미터, 11만 호라는 큰 수였다. 그러나 1960년대가 되면 급속히 쇠퇴하여 간다. 


화전은 주로 산악지대에서 실시되고, 평야부의 논벼농사와는 대칭적인 경사지 농경이고, 주작물은 피, 조, 메밀, 콩류(콩과 팥), 채소(무) 등이었다. 그 기원에 대해서는 중세의 급격한 인구 증가에 대응하기 위하여 평지 농업이 산간부로 진출했다고 간주되는 것이 있는 한편, 더욱 빠른 조몬시대로까지 거술러 올라간다는 의견도 있다.


후지모리 에이이치藤森栄一(1911-1973)는 약 4500년 전에 중부 지방에서 번영했던 조몬 중기 사회가 화전 농경에 의하여 지탱되었다는 가설을 제기했다. 그렇다면, 화전은 일본에서 발생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藤森 1970). 이에 대하여, 사사키 타카아키 씨는 3000년 전의 조몬 후·만기에 서일본에서 화전이 대륙에서 도입되었다고 생각한다(佐々木 1972).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화전은 논벼농사와 거의 동시기에 대륙에서 들어온 것이 된다. 


조몬 시대에 농경이 있었다고 한다면,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작물이 있었는지이다. 최근에는 밤, 호리병박,콩, 들깨, 삼, 명아주, 우엉, 쌀, 메밀, 피 등의 존재가 확실해지고 있다(佐藤·石川 2004). 조몬의 재배식물 목록은 뜻밖에 풍부하다. 그중에서도 피는 '반재배'와 '재배' 사이를 오가는 미묘한 상태로, 조몬 전기부터 홋카이도·도호쿠 지방에서 이영되었단 것이 밝혀져 왔다(山田 2007). 피가 일본의 화전 작물의 주역이었단 것을 생각하면, 조몬과 화전 농경은 간단히 이어질 테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는 것은 화전이 밭과 논 같은 항구적인 시설을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일본에는 따비로 사용된 듯한 뗀석기의 돌도끼가 여럿 나오는 점이랑 불의 체계적인 이용을 적극적으로 채용한다면 가까운 장래에 둘의 관계는 반드시 증명된다고 예언해 두고 싶다.


그밖에, 주목하고 싶은 것은 화전에 수렵채집 단계의 요소가 짙게 남아 있다는 점이다. 구체적 사례로서 가고시마현의 '대나무 화전'에서 행하던 아토치跡地 이용을 들겠다(川野 2003).  이 땅에서는 작물을 재배하는 걸 그만둔 뒤에도 아토치를 몇 번이고 찾아가 죽순, 차, 땅두릅, 두릅, 고비, 고사리, 털머위, 호장, 누리장나무 등의 산나물을 채집하고, 때로는 그들을 옮겨심는 일도 있다고 한다. 화전을 그만둔 이후의 식생 천이를 활용하여 야생 먹을거리를 중심으로 반관리의 상태로 두고 있는데, 이것은 애버리지니가 불지르기를 한 흔적을 이용하는 방법과매우 가까운 것이다.


또 하나는 짐승류와의 관계이다. 자연림이 많은 산악지대에서 들었던 화전의 아토치는 멧돼지, 사슴, 원숭이가 서식하는 장소가 된다. 특히 회복기의 덤불은 짐승류에게 절호의 먹이장이 되기에(동물에게도 극상의 숲은 살기 어려움), 짐승과 접촉하는 기회가 늘어나는 것이다. 작물에 중점을 둔다면 해로운 짐승일 수밖에 없는 동물이라도, 육식원이라 생각하면 그 가치는 높다. 이와 같은 예는 일본 이외에서도 많은데 예를 들면, 보르네오섬에서는 밭을 돼지와 공유하는 상태의 마을도 있을 정도이다. 이와 같은 수렵채집과 농경의 흔들림이라고도 하는 상태는 각지의 민족지에서도 보이는 대로이다. 즉 그것은 세계 각지에서 수렵채집민의 불지르기 전통이 화전농경민에게 견실히 인계되었단 것을 보여준다.





마치며 


우리는 요즘 불을 다룰 기회가 뚜렷하게 적어졌다. 현대 사회, 특히 인구가 조밀한 도시에서 불은 위험한 것으로,화재를 일으킨다면 인명과 재산에 큰 피해를 입힌다. 최근 텔레비전에서 캘리포니아, 오스트레일리아, 유럽 등 외국의 산불이 자주 보도되었다. 높이 오르는 연기, 불타오르는 불꽃, 맞서는 소방수, 하늘에 날아다니는 헬리콥터, 불타버린 가옥 등의 영상이 방송된다. 그리고 산림 화재는 인명과 건물만이 아니라 자연까지 파괴하는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란 자막이 그에 더해진다. 


산림 화재라는 단어에 불안을 느끼는 것은 우리 인본인이 숲의 나라에 살아 그 푸름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 그것은 다이옥신 오염이라든지 염소 가스의 증가에 의한 지구온난화라는 현대적인 문제에까지 관련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현대에 시작된 현상이다. 어느 국제학회에서 애버리지니의 불지르기와 일본의 화전에 대하여 발표했을 때, 외국인 연구자로부터 환경에 나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받았다. 그에 대하여 "애버리지니는 5만 년에 걸쳐서 오스트레일리아 전토에서 숲을 계속 태우고 있었고, 일본에서 화전이 실시되었던 것은 1960년대까지인데, 780만 평방킬로미터의 면적이 매년 성대히 타고 있었지만 대기 오염이나 온난화의 문제는 전혀 없었습니다"라고 답한 기억이 있다. 현대의 문제는 오로지 화석연료의 과잉 소비와 그것을 사용한 기계로 식물을 벗겨내고, 지형을 개변하며, 주택과 농지를 만드는 행위에 기인한다. 확실히 생활은 편리하고 쾌적해졌지만, 더욱 환경에 꼭 맞춘 생활이 있지는 않은지, 바꾸어 말하면 선조가 부지런히 쌓아 왔던 자연과 부합하는 기술과 지혜를 완전히 버려도 좋은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본론에서는 20만 년의 시간을 소비하여 우리의 선조가 지구에서 확산되어 정주했던 과정을 생각했다. 그를 위해서는 생존에 적합한 환경을 만드는 일, 또 인구를 늘리고 지탱하기 위하여 식량을 확보하는 일이 필요하며, 그것에는 불이란 도구가 오랜 시간 동안 수렵채집 단계와 농경 단계의 양방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을 기술했다. 


우리는 1980년대에 오스트레일리아 북해안에서 애버리지니 사회를 조사하러 갔는데, 그곳에서 마을사람들과 살고 있는 동안에 불은 생활에 빠질 수 없는 것이며, 바르게 사용하면 결코 두려워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박혀버린 것 같다. 불은 그들의 생활에 밀착되어 있다. 밤의 마을에서는 여기저기에 횃불이 피우고 있다. 어둠 속에서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따뜻한 불꽃의 색과 생나무를 태우는 은은한 향기가 감돌아, 참으로 그리운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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