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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5




기고1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농경 

-이케시마池島·후쿠만지福万寺 유적의 조사에서

이노우에 토모히로井上智博





이케시마·후쿠만지 유적의 발굴조사


여기에서 문제삼는 이케시마·후쿠만지 유적은 오사카부 카와치河内 평야의 남동부에 위치하는 유적으로, 행정적으로 말하면 히가시오사카시와 야오시八尾市에 걸쳐 있다. 이 유적에서는 수해 대책을 위한 유수지인 '온치가와恩智川 치수 녹지' 건설에 수반하여 약 40헥타르의 범위가 발굴조사되었다. 발굴조사는 1980년에 개시되어,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이 유적은 충적평야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하천 활동에 의하여 모래와 진흙이 빈번하게 퇴적된 결과, 과거의 지표면과 토양이 쌓여서 유구와 유물이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야요이 시대 이후의 경작지터이다.발굴조사에서는 야요이 시대의 논터, 아스카 시대 이후의 논과 밭터 등이 발견되고 있다. 그들 중에는 하천 활동에 의하여 운반되어 온 모래와 진흙에 의하여 매몰되어 보존되었던 것도 적지 않고, 경작지 경관의 변천을 밝히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축적되고 있다.


논과 밭의 지층 위에 하천 활동에 의하여 운반되어 온 모래와 진흙이 퇴적되고, 또 그 위에 논과 밭의 지층이 존재한다는 상황도 이 유적에서는 자주 확인할 수 있다. 이것에 관해서는 경작지가 홍수에 의하여 폐기하고 없애고 홍수 이후에 복구했다고 생각되어, '홍수와 싸우면서' 경작이 계속되어 갔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해석되는 일이 적지 않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설명은 너무 단순하고, 농경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충분하지 않다. 하천의 상태와 하천 퇴적 체계와 인간 활동의 관계는 시대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그 실상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각 시대의 하천 활동 실태와 지형 형성 과정을 밝히고, 그들과 토지이용 변천의 관게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와같은 검토를 진행해 가는 과정에서 경작지의 유지에 관계된 사람들을 둘러싼 사회적·경제적 정세와의 관계도 알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는 이 유적의 조사 성과 중에서 야요이 시대와 중세 말의 15-16세기에 있던 논과 밭을 문제삼아, 발굴조사에서 밝혀졌던 과거의 농업 실태에 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야요이 시대 논의 실태


이 유적에서 농경이 시작된 것은 야요이 시대 전기 중엽의 일이다. 이 시대, 카와치 평야는 현재의 상황과는 크게달랐으며, 중앙부부터 북부에 걸쳐서 '카와치호'라고 부루는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그림1). 이 호수는 조몬 시대조기 후반-전기에 형성된 내만인 '카와치만'의 흔적이고, 개펄이 발달한 '카와치 개펄'로 변화한 뒤 조몬 시대 만기 이후 담수 지역인 '카와치호'가 되었다. 이 유적은 호숫가에서 약간 내륙으로 들어간 장소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림1 논벼농사가 전혀졌던 무렵의 카와치 평야. 이노우에井上(2007)에 수록된 그림을 수정.




이 유적에서는 야요이 시대 전기 중엽(2400년 전 무렵)·전기 말-중기 초(2300년 전 무렵)·중기 중엽(2200-2100년 전 무렵)·중기 후반(2000년 전 무렵)·후기(1900년 전 무렵)의 크게 다섯 시기의 논이 검출되고 있다. 각 시기일지라도 논두렁만이 아니라 수로와 둠벙 등의 수리시설도 발견되며, 관개 체계의 모습이 밝혀지고 있다. 


논두렁이 조성되어 논으로 이용된 장소에는 야요이 시대를 통틀어 일관된 특징이 있다. 충적 평야에서는 하천이 범람하여 모래와 자갈, 진흙이 퇴적되는데 퇴적물의 두께는 일정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두텁게 퇴적하는 장소가 있다. 그와 같은 장소는 홍수 이후에 지형이 높아져 지표면에 기복이 생기게 한다. 이와 같이 높아짐으로써 자연제방, 틈상 퇴적체(crevasse splay) 등이 포함되는데, 그들을 일괄하여 '충적 리지ridge'라고 부른다. 논두렁은 충적 리지의 가장자리 부분에 분포하는 경향이 있으며, 충적 리지 가장자리의 완만한 경사지가 논으로 이용되었단 것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여러 충적 리지가 분포하고, 기복이 복잡한 장소에서는 논을 조성하기 쉬운 장소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일이 많다. 이와 같은 지형에 대응하여 논 구획 조성의 기본적 단위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논 블록'이라 부르고 있다. 논 블록의 모습은 지형에 따라서 다르며, 기복이 적은 완만한 경사지에서는 면적이 넓고, 사각형의 논 구획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늘어선 듯한 논 블록이 되는데, 충적 리지에 둘러싸여 기복이 비교적 큰 장소에서는 면적이 작고 불규칙한 논 구획이 눈에 띈다. 


논 구역의 모습을 모형화한 형식으로 나타낸 것이 그림2이다. 논 구역의 최소 단위는 논 블록이지만, 수리시설과의 관계에 주목하면 동일한 둠벙에 의하여 물을 얻는 논 블록의 통합을 추출할 수 있다. 이들 논 불록은 수로에 의하여 서로 연계를 가지고 있으며, 관개의 기본적인 단위가 되는 점에서 '관개 유닛'이라 부른다. 논 구역은 복수의 관개 유닛의 집합체로서 구성되어 있다.



그림2 야요이 시대의 논 구역 조성. A는 야요이 시대 전기-중기, B는 야요이 시대 후기의 이미지.




논 구역의 구성을 시기별로 보면, 야요이 시대 전기 중엽의 논에서는 기존의 논 블록을 분단하는 모양으로 새롭게 너비 10미터 가까운 수로가 굴착되고, 당초 설정된 관개 유닛의 북쪽에 다른 관개 유닛이 설정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논이 경영되기 시작한 시기에는 관개 유닛이 증설되는 모양으로 논 구역이 확대되어 갔던 것을 시사한다. 야요이 시대 전기 말부터 중기에 걸쳐서 논도 기본적으로 관개 유닛의 집합체로서 논 구역이 구성되어있는데(그림2의 A), 차츰 논의 면적이 넓어지고 다른 관개 유닛에 속한 논 블록끼리 접하는 일도 많아진다. 이 때문에 관개 유닛 사이에서 물의 교환도 자주 확인되게 된다. 또한 하나의 관개 유닛 내부에 몇 개의 논 블록으로구성된 서브 유닛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단위가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관개 유닛의 모습이 복잡해져 가는 것이 야요이 시대 중기의 특징이다. 


야요이 시대 후기의 논에서는 논 구획이 광범위로 연속하여 넓어지지만, 큰 논두렁에 의하여 구획되거나, '구획 작은 논두렁'이라고 부르는 논두렁을 경계로 하여 작은 논두렁이 접합하는 방식이 변화하거나 하여, 논 블록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 주목되는 것은 논 블록의 크기가 비교적 고르게 되어 있는 점이다. 논 블록의 설정에서때로는 충적 리지의 일부를 깎아내 논 블록의 모양을 정비하거나, 논 블록의 범위를 넓히거나 하는 일이 많다. 이와 같은 일은 그 이전에도 확인할 수 있지만, 이 시기에는 빈번하게 실시하게 된다. 또 주목되는 것은 복잡한 수리 계통을 설정하고, 논 블록 3-4개에 의하여 구성되는 관개 유닛을 일정 공간 안에 가지런하게 배치하고 있는 점이다(그림2의 B). 이와 같은 관개 유닛의 배치는 하천 유로와 비교적 큰 충적 리지에 둘러싸인 공간 안에 설정되어 있으며, 그와 같은 지형적 통합을 단위로 복잡한 수리 게통을 설정하고 관개 유닛·논 블록을 계획적으로 배치한다고 하는 상황이 명확화된다. 이 개발 단위를 '논 지대(zone)'라고 부른다.


둠벙과 수로 등의 수리시설, 논 구획을 형성하는 논두렁과 같은 개개의 기술은 야요이 시대 전기부터 존재하고, 논 블록·관개 유닛을 기본 단위로 하는 논 구역의 구성 자체도 야요이 시대를 통틀어 공통된다. 또, 지형적인 통합이 개발의 단위가 되는 점도 야요이 시대 후기에 시작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야요이 시대 후기의 논 구역 구성에는 그때까지와는 달리 비교적 크기가 고르게 된 경작 단위를 설정하고, 그 단위를 복잡한 수리 계통에 기초를 두어 가지런하게 배치한다는 구상이 명확히 읽을 수 있다. 이와 같은 논 구역 구성은 야오시 규호지久宝寺 유적의 야요이 시대 중기 후반(-후기 초?)의 논에서도 확인되며, 카와치 평야에서는 야요이 시대 중기 후반부터 후기에 걸처서 발달한 듯하다. 더 말하자면, 이와 같은 상태는 고분 시대의 논 구역 구성에도 계승된다. 


이처럼 생각하면, 야요이 시대의 논벼농사는 수리 계통의 정비에 의하여 순조롭게 발달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한편으로 논 경영의 불안정함을 시사하는 상황도 밝혀지고 있다. 먼저, 모든 논 블록에서 해마다 경작이 실시되었는지 어떤지 하는 문제이다. 야요이 시대 후기의 논 블록 중에는 취수 때문에 물꼬가 인위적으로 묻힌 상태로 검출된 것도 있었다. 이것은 논 블록의 안에 휴경 또는 방기된 것이 존재했단 것을 시사한다. 또한 휴경 또는 방기는 관개 유닛 단위에서도 실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야요이 시대 중기 중엽과 중기 후반의 논 구역을 비교하면, 전자는 유적 동부의 이케시마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데 반해 후자는 유적 서부의 후쿠만지 지구를 중심으로 한다. 더구나 후자의 시기에서는 이케시마 지구에서도 둠벙과 수로가 검출되어 조사 범위보다도 북쪽에 논이 펼쳐져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러한 논 구역의 위치 변화는 하천의 매몰이나 이동, 새로운 충적 리지의 형성 등과 관계된다. 곧, 지형 변화에 대응하여 물을 얻기 쉽고, 논을 조성하기 쉬운 장소에 논 구역을 이동시켰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야요이 시대의 논벼농사에서는 고도한 관개·논 조성 기술을 사용하여 발전해 갔다고 하는 측면과 관개용수의 양과 지형 변화 등에 좌우되어 휴경과 방기, 이동을 반복했다는 불안정한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 얼핏 모순되는 듯한 둘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하천 활동에 의하여 유로의 위치가 변화하거나, 충적 리지가 형성되어 지형이 변화하거나 하는 일은 야요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고 생각하며, 또 그것을 당시의 기술로 제어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지형 변화에 대응하여 유연하게 논 경영을 실시해 갈 필요가 있었다. 홍수에 의하여 논이 매몰되거나, 하천의 매몰·이동에 의하여 취수가 곤란해지거나 한다면, 논 구역을 이동시켜 할 수 있는 한 조속히 새로운 논 구역을 형성하는 일이 요구된다. 그 경우, 복수의 관개 유닛을 단기간 안에 정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합리적인 수리 계통의 설정과 논 구역 구성의 실현이 목표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것은 논을 경작하는 경작 집단의 노동 편성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케시마·후쿠만지 유적의 야요이 시대 후기 논에서 볼 수 있는논 구역 구성의 변화는 경작 집단의 노동 편성의 변화와 연동된 움직임이었다고 상정된다. 




15·16세기에 발달한 섬밭(시마바타島畠)과 그 배경


다음으로 중세 말인 15-16세기의 상황을 문제삼겠다. 이 시기의 특징은 '섬밭'의 발달이다. 섬밭이란 논 구역의 안에 흙을 쌓아 올려 가늘고 긴 두덩을 만들어 그 위를 밭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경작지는 아이치현 이치노미야시一宮市, 교토부 조요시城陽市, 나라현 야마토코리야마시大和郡山市 등에서 현재도 발견된다(그림3).


그림3 현대의 섬밭(좌)와 발굴된 섬밭(우). 왼쪽은 나라현 야마토코리야마시에서 촬영. 오른쪽은 이케시마·후쿠만지 유적에서 발굴된 15-16세기의 섬밭.




이케시마·후쿠만지 유적에서 바둑판 모양의 토지 분할에 기초를 둔 논 구역의 안에서 가늘고 긴 두덩이 조성되게 된 것은 제7층이라고 호칭하는 지층의 단계(11세기 후반-12세기)이다. 이 층 두덩의 특징으로는 약간 높은 부분을 논으로 쓰기 위하여 평평한 면을 조성할 때, 깎아낸 흙을 일정한 장소에 쌓아 올려 조성되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이 층의 두덩이 매몰된 뒤, 뒤에 기술하는 홍수 복구형 섬밭과 똑같은 방법으로 복구된다는 점이나, 이 층보다 상위의 층에서 차례차례 똑같은 두덩이 조성되어 있는 점도 주목된다. 이러한 점들에서 보아, 제7층의 두덩은 나중의 '섬밭'과 계보적으로 연결된다고 보아도 좋다. 꽃가루 분석의 결과를 보면, 제7층에서 메밀속의 꽃가루가 소량이지만 검출되기 시작하고, 그것보다 상위의 층에서도 연속하여 마찬가지의 상황이 확인된다. 메밀 등의 재배가 실시되었던 장소는 섬밭이고, 제7층의 단게부터 논 안의 두덩이 밭으로 이용되었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셋츠국 다르미즈 서목 에사카고우 전전취상摂津国垂水西牧榎坂鄕田畠取狀>(1189년) 등에서는 '롱'이란 표현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논 안에 있는 두덩을 나타내고 황무지에 준하는 취급을 받고 있던 장소라고 추정된다(金田 1999). 이것도 참고로 하여 추측하면, 이와 같은 두덩은 황무지로서 방치되거나, 수목이 심어지거나, 밭으로 이용되거나 하는 등 용도가 정해져 있지 않았는데, 차츰 밭으로 이용되는 일이 많아져 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섬밭은 제3층이라고 홍칭하는 지층의 단계(15세기 중엽-16세기 후반)에 발달한다. 그 조성 과정은 아래와 같다(그림4). 먼저 홍수에 의하여 논 구역에 모래가 퇴적된 뒤, 그 모래를 심으로 삼아 주변의 모래와 진흙을 쌓아 올려 섬밭을 조성한다. 또, 섬밭의 주변은 논으로 이용한다. 그뒤 홍수에 의하여 섬밭이 매몰된 뒤, 섬밭이 있던 부분에 모래와 진흙을 수북히 올려 논과 섬밭을 복구하는데, 그때 섬밭 위쪽 부분에 퇴적된 모래를 남기고 섬밭을 한 바퀴 돌며 크게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홍수 복구형 섬밭). 이와 같은 섬밭은 논 구역에서 구석구석까지 존재한 것은 아니고, 유적의 서쪽을 흐르는 타마쿠시카와玉串川의 제방이 무너지며 형성된 충적 리지나 동쪽의 이코마산生駒山 서쪽 기슭에 발달한 선상지를 구성하는 두덩(선상지 로브lobe)에 치우쳐서 분포하고 있다.


그림4 홍수 복구형 섬밭의 조성 과정




15-16세기에는 홍수에 의하여 퇴적된 토사를 이용하여 활발히 섬밭을 조성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여러 지점에서 행한 꽃가루 분석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섬밭이 발달한 제3층에서 소나무속의 꽃가루가 급증하여 우점하게 되는 것과 함께, 붉가시나무 아속, 졸참나무 아속 등이 급감하여 수목 꽃가루의 조성이 단순하게 변화하는 경향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것과 똑같은 자료는 히가시오사카시 신카미코사카新上小阪 유적에서도 확인되어, 카와치 평야 남동부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현상인 것 같다. 소나무는 트이고 밝은 장소에서 자라는 양수이며, 광엽수림이 벌채되면 그곳으로 진출하여 2차림을 형성한다. 이 때문에 야요이 시대 이후에 관해서는 소나무속 꽃가루의 증가는 인간에 의한 산림파괴의 지표 중 하나로 주목되고 있다. 따라서 이코마산에서도 개발이 진행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산지가 개발되고 나지가 펼쳐지면, 강우 때에 유출되는 토사의 양이 증가한다. 이것이 평야부에 있는 충적 리지의 발달과 관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17세기의 문헌사료에는 카와치 평야의 동쪽에 있는 이코마산에는 민둥산과 풀이 난 산이 펼쳐져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논에 풀과 잎 등을 넣어 거름으로 삼는 '베어 깔기(카리시키刈敷)'를 위한 초목 채취를 생각하고 있다(水本 2003). 또한 나무 뿌리의 채취가 토사 유출의 원인이라고 지적하는 사료도 존재하는데, 그에 대해서는 등불의 연료로 소나무의 뿌리 채취, 또는 약과 식용이 되는 초목의 뿌리 채취가 상정되고 있다(村田 2009). 이들 문헌사료는 15-16세기보다도 뒤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꽃가루 분석 결과에서 보아 이와 같은 인간 활동에 수반한 산림파괴는 15세기 중엽 이후에 대규모화되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전국시대의 토고쿠東国에서는 축성에 필요한 재목과 울타리의 재료 등을 얻는 걸 목적으로 산림이 대규모로 벌채되어, 토사 유출양이 증가했단 것이 지적되고 있다(盛本 2008). 15세기 중엽 이후 대규모화하는 이코마산에서의 인간 활동에는 건축용 자재를 얻기 위한 수목의 벌채 등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어떻든, 이 시기에 일어난 섬밭의 발달은 산지에서 인간 활동이 야기한 평야부의 퇴적 환경 변화에 대한 대응책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그림5). 더구나 이와 같은 중세 말-근세 초에 일어난 토사 유출양의 증가에 수반한 섬밭의 발달에 관해서는 네야가와시寝屋川市 사사라군讃良郡 바둑판 구획 유적에서도 확인되고 있으며, 카와치 평야부부터 동부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일어났던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 


그림5 섬밭의 발달을 둘러싼 인간 활동과 자연환경의 관계




다만 형성된 충적 리지를 모두 밭으로 만들지 않고, 인위적인 가공을 행하여 밭과 논이 번갈아 분포하도록 만든 이유에 대해서는 지형 변화에 대한 대응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당시 사회에서 쌀의 가치와 밭작물의 유통 상태 등 농촌을 둘러싼 사회적·경제적 정세와의 관련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유적의 정보에서 농경사를 해독하기 위하여


논과 밭터에서 농경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구의 배치를 정태적으로 조망하는 것이 아니라, 형성 과정을 상세하게 검토하고 그 변천을 파악해야 한다. 그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도 충분하지 않은 점도 많지만, 이케시마·후쿠만지 유적에서 행한 발굴조사 성과를 검토한 결과, 농경은 하천 활동에 의한 모래와 진흙의 퇴적·지형 변화 등에 의하여 계속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지만, 관개 기술과 농지 조성 기술·토지 조건의 변화에 대응한 작물 재배기술을 구사하여 계속하여 나아갔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인간 활동이 원인이 되어서 자연환경이 변화하고, 그것이 경작 형태를 변화시켰던 일도 있었다. 다만, 농경의 형태는 자연환경만으로 결정될 리는 없고, 하나의 형태를 선택하는 데에 당시의 사람들을 에워싼 사회 정세도 중요한 요소였다는 것은 명확하다. 즉, 경작지 경관은 자연환경과 인간 활동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형성되고, 변화해 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논과 밭터의 발굴조사 자료는 과거의 농경 상태를 생각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한 자료는 전국 각지에서축적되어 왔으며, 그 검토를 통하여 농경사를 복원해 가기 위한 전제는 게속 정리된다고 생각한다. 검토할 때에는 종래의 고고학적 방법만이 아니라, 자연과학의 수법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활용해야 한다. 고고학 연구자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의 연구자가 함께 유적에 서서, 각각의 입장에서 검토를 행한다. 그리고 검토 결과를 단순히 그러모으는 것이 아니라, 층을 이룬 순서에 기초하여 유적 형성 과정 안에 적절하게 자리매김하고, 유적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 이와 같은 종합적 연구야말로 과거의 경작지 경관을 상세하게 복원하고, 그 배경에 있는 자연환경과 인간 활동의 관계를 해명하는 일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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