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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5





기고2

농서에서 보는 농업의 모습

사사키 타케오佐々木長生






농서란


농서란 근대의 서양 농업 도입 이전의 농업기술서를 가리키며, 근세 농서라고도 부른다. 그에 대하여 근대의 서양 농업을 도입한 이후의 것을 메이지 농서라고 부른다. 


농서, 곧 근세 농서는 촌장(쇼야庄屋)과 마을공무인(무라야쿠닌村役人) 등의 상층 농민과 하급 무사·학자 등에 의해 저술되어 왔다. 지방 농서라고도 부르는 농민에 의하여 저술된 것은 그 토지의 기후와 토양 등의 자연환경에 맞춘 자급 농법에 대하여 경험과 관습을 바탕으로 저술된 것이 많다. 그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농서로서, 아이즈会津 지방의 자연에 맞추어 저술된 죠쿄貞亨 원년(1684)의 <아이즈 농서>나 덴와天和 2년(1682) 성립된 토카이東海 지방의 <백성전기百姓傳記>와 호에이宝永 4년(1707) 성립된 카가加賀 지방의 <경가춘추耕稼春秋> 등이 있다. 한편, 학자와 무사가 저술한 대표라고도 할 수 있는 미야자키 야스사다宮埼安貞의 겐로쿠元禄 10년(1697) 간행된 <농업전서農業全書>가 있다. <농업전서>의 저술 이후는 이것을  본으로 하여 각지에서 많은 농서가 출현한다. 농서의 저술 방법도 시대의 추이와 함께 변천하여, 에도 후기에는 음양오행 사상의 보급과 함께 그 영향을 받은 농서도 출현한다. 분세이文政 11년(1828) 간행된 고니시 아츠요시小西篤好의 <농업여화農業余話> 등은 그 한 예이다. 또한 농서 중에는 그림으로 농업의 모습을 표현한 그림 농서라고도 부르는 것이 있다. <경가춘추>의 그림 농서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농업도회農業図絵>나, 액자와 사계절 경작도 병풍 등도 있다. 


농서는 근세의 농업 기술과 농민의 생활, 마을 형태 등을 반영한 시대의 거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기고에서는<아이즈 농서>를 중심으로 근세 농업의 모습을 조망해 보고자 한다.




농서 출현의 배경


통설에서는 약 2500년 전에 우리나라에 벼농사가 이입된 이래, 겐로쿠 시대(1688-1703)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는 농서라고 부르는 농업기술서는 저술되지 않았다. 근세에 이르러 바쿠한幕藩 체제의 쌀 녹봉제(石高制)를 기축으로 한 정책이 확립되어 갔다. 쌀을 중심으로 한 농업생산체제에서 연공年貢의 쌀을 세금으로 안정된 형태로 징수하는 것이 정책의 기반이었다. 이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근세 마을의 탄생이 농서 출현의 배경에 있다. 그 특징은이른바 핵가족을 중심으로 한 일부일처 소가족에 의한 농업경영에 있다. 지금까지의 중세적 마을의 복합 대가족제에서 소농민 경영에 의한 농업기술로의 전환이다. 


소농민, 곧 백성들은 노동력과 농기구의 부족, 농업기술의 늦음 등 불안정한 상황에 있었다. 이들 불안정한 소농민들이 안정하여 농업을 경영하고, 규칙적으로 쌀과 잡곡·공예작물 등의 연공을 공출하는 것이 한의 정책으로 요구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농작물의 재배방법을 기술한 메뉴얼 서적인 농서가 출현하고, 예를 들면 초기의 농서에는 안정된 연공 확보를 위한 자급 농법에 대하여 기술되었다.


에도·오사카 등 삼도三都만이 아니라, 지방의 성시(城下)에서도 인구 증가에 수반한 도시의 발달에 의해 채소와 목면, 담배, 과수 등 농산물을 도시로 공급하는 근교 농촌이 출현한다. 도시의 발전과 함께 농촌도 상업작물을 재배하는 마을로 변용해 간다. 이러한 농업의 발전과 함께, 농서도 특산물의 기술서라는 성격을 가지게 된다. 오쿠라 나가츠네大藏永常의 덴포天保 13년(1842) 간행한 <광익국산고広益国産考> 등은 그 대표라고 할 수 있다.


농서는 시대의 추이와 함께 그 내용과 저술 형태도 변용하고, 농업이 경영되고 있는 지역의 자연조건에 관련하여그 지역성과 민속성도 다분히 저술되게 된다. 농서는 단순히 농업기술만이 아니라, 당시 농민의 살림살이, 사상, 사회질서 등 근세의 농민 생활을 오늘날에 전하고 있는 문화유산이다.




<아이즈 농서>와 마을 풍경


다음으로 <아이즈 농서>를 한 예로 농서에서 나오는 근세 농업의 모습을 보려고 한다.


<아이즈 농서>는 죠쿄 원년(1684)에 현재의 후쿠시마현 아이즈와카마츠시会津若松市 코자시무라神指町 마쿠노우幕內, 당시의 마쿠노우치촌幕內村의 키모이리肝煎(촌장)인 사제 요지佐瀨与次 에몬右衛門에 의하여 저술되었다. 요지 에몬은 겐로쿠 4년(1691)의 분한장分限帳을 바탕으로 가족수, 논밭의 보유수, 말의 수를 비롯하여 마을 산과 제방 등 마을 공유재산과 이웃마을과의 교류의 상황 등 당시의 마쿠노우치촌의 모습을 기재한 <아이즈 막지내지幕之內誌>를 저술한다. 곧, <아이즈 농서> 출현 당시의 마쿠노우치촌의 모습을 지지풍으로 남기고 있다. 또한 사제 집안에는 아이즈번에서 마쿠노우치촌으로 전달하는 문서를 편집한 기록, <사제가佐瀨家 기록>(현재는 1, 4, 10권)이 있으며, 번과 마을의 관계, 정책 상황 등 칸분寬文 시기(1661-1672)부터 쇼토쿠正徳 시기(1711-1715) 기간의 것이 있어 농서 출현의 시대 배경을 볼 수 있다.


이들 요지 에몬이 저술한 저서는 <아이즈 농서>의 농업기술과 더불어 마쿠노우치촌을 비롯한 아이즈 지방의 근세마을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이즈번에서는 엔포 8년(1680)의 <아이즈 농서> 저술 직전에 번령 전역의 검지検地를 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 집에 거주하고 있던 둘째아들, 셋째아들 등의 자식들에게 각각 균등하게 논밭을 주어 분가 상속시키는 정책을 실행했다. 이 단게에서 현재의 마을의 원형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쿠노우치는 앞에 적은 <아이즈 막지내지>에 의하면, 칸분 시기 이전(1661년 이전)부터 칸분 시기이후(1672년 이후)까지에 11호에서 32호로 호수가 증가하고 있다. 분가 상속은 그뒤에도 계속되어, 에도 말기에는 헤이세이平成 21년 현재와 거의 동수인 60호 정도가 된다. 마쿠노우치는 사제·하세가와長谷川·키무라木村·호즈미穂積 등의 성을 가진 일족에서 분가 상속하여 그 본가 일대에 있는 집에서는 '하세가와 미노슈美濃守' 등 무사의 신분을 나타내는 호칭이 있었던 것을 <아이즈 막지내지>에서 볼 수 있다.


<아이즈 농서>의 저술에서도 당시의 농업 실태가 <아이즈 막지내지>에서 보는 것처럼 일부일처 소가족에 의한 농업경영으로 변용했단 것을 알 수 있다. 벼농사를 중심으로 밭작물, 목면, 쪽, 담배 등의 공예작물을 계절마다 계획적으로 재배하는, 이른바 복합 경영에 의한 농업이 정식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아이즈 농서> 중권에 나오는 작부체계의 확립과 식량 채소의 채취 등에 의한 쌀 보충 등은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근세 마을의 형성 배경이 되었던 농업 기술에 대하여 <아이즈 농서>는 다음의 여러 점을 들고 있다. 이 농업 기술의 향상은 아이즈 지방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발견될 것이다. 


(1) 모내기를 앞당기면서 수확량이 많은 늦벼의 재배 촉진, 품종 개량. 

(2) 다종다양한 밭작물의 재배화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작부체계의 확립.

(3) 도시 발달에 수반한 근교 농촌화와 상품작물의 재배화.

(4) 목화, 쪽, 홍화 등의 특용작물의 재배화.

(5) 밑거름, 외양간거름, 풋거름 등의 자급 거름과 소주 지게미, 깻묵, 말린 정어리, (콩이나 생선의) 찌끼 등의 금비(구입 비료)의 보급.

(6) 농업용수 보와 하천 등의 토목 기술 발달.

(7) 새로운 논 개발에 수반한 경작지의 확대 등.




<아이즈 농서>의 농업


<아이즈 농서>는 상권의 벼농사, 중권의 밭농사, 하권의 농가사익부農家事益部, 즉 영농의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내용으로는 저자 사제 요지 에몬의 체험과 '향담鄕談'이라 부르는 옛 관습·구전에 따른 농업 기술의 실험·검증 결과 등이 기술되어 있다. 아이즈 영내는 광대한 면적을 가지기 때문에, 평탄부의 '리향'과 산간부의 '산향'으로 나누어 기술한다. 또한 초목의 싹틈과 개화, 잔설의 출현 상황, 곤충의 움직임 등으로 계절을 판별하고, 농경의 시기를 파악하는 일 등 자연에 의거한 농업의 방법을 설명한다. 경험과학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내용이다. 또 한편으로 논밭의 토양 분류와 그 무게·색·맛·양분의 함유량이나, 쌀과 밭작물의 파종량, 수확량, 노동력의 투하인수, 재배 기간의 수치에 따른 기술 등 실증과학적인 기재를 많이 볼 수 있다. 곧 경험과학적인 측면과 근대 과학의 방법도 받아들인 실증과학적인 측면의 양방을 겸비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요지 에몬은 마쿠노우치라는 리향의 농민이기 때문에, 산향의 기술에 대해서는 각지의 노농이라 부르는 정농가에게서 정보를 수집하여 <아이즈 농서>를 저술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와 같은 사업이 가능해진 데에는 아이즈번의 관여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요지 에몬은 말하자면 편집국장으로서, 각지의 정보를 편집하여 <아이즈 농서>를 집필했을 것이다. 아이즈번에서는 번령의 지지로서 역할을 담당했던 <아이즈 풍토기>가 칸분 6년(1666)에 성립하고, 그 완성된 칸분의 풍속장風俗帳이 각지에 남아 있다. 번에서는 풍속장의 완성은 <아이즈 농서> 저술의 이듬해 죠쿄 2년(1685)에도 행해지고, 각지의 농업을 비롯하여 의식주, 연중행사, 관혼상제 등에 대하여 기재되어 있으며, 근세의 아이즈 민속을 보여주는 유력한 자료가 되고 있다. 마쿠노우치 부근에서는 나카아라이조中荒井組(현재의 아이즈와카마츠시 키타아이즈무라 나카아라이 주변)의 민속을 기술한 죠쿄 2년의 <나카아라이조 풍속장>이 있으며, <아이즈 농서> 저술 당시의 농민 살림살이도 볼 수 있다.


이처럼 배경의 바탕에 <아이즈 농서>가 저술된 뒤, 당시 식자력이 높지 않았던 농민들이 더 배우기 쉽고 알기 쉽도록 하자는 요망이 있었기 때문에, 요지 에몬은 <아이즈 농서>의 내용을 1669수의 노래로 지은 <아이즈 노래 농서>를 호에이宝永 원년(1704)에 저술한다. 리듬을 붙여 흥얼거리며 배우도록 한 것이다. 당시의 농민들에게 이러한 노래로 흥얼거리는 풍습이 존재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중에는 옛 관습이나 구전에서 취재한 '옛 노래'도 덧붙여져 있다. 또한 원래는 여기저기에 그림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베끼는 단계에서 몇 개의 그림이 생략되지만, 일부 메뚜기 등 곤충과 새의 그림이 있으며, 그림 농서로서의 성격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아이즈 농서>의 내용을 시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1 사제 요지 에몬 저 <아이즈 노래 농서>. 호에이 원년(1704), 사제 데츠하루哲治 씨 소장.




또한 요지 에몬은 노농(요지 에몬)과 농민의 문답 형식으로 당시의 농업 어휘와 농경 의례, 전설, 작물 금기 등에대하여 상세하게 해설한 <아이즈 농서 부록> 8권(현존은 2, 4, 6, 8권)을 저술한다. 예를 들면, 제4권은 겐로쿠 4년(1691)부터 호에이 6년(1709)의 19년 동안에 걸친 날씨와 작황에 대하여 기술한 것으로, 당시의 기상 정보를 알 수 있다. 특히 서리, 가뭄, 냉해, 병충해 등의 기술로부터 기상과 농업에 대한 실증적인 자료를 제공한다. 


요지 에몬이 철저히 한 농민들 지도는 사위인 하야시 에몬에게 계승되어 간다. 하야시 에몬은 쇼토쿠正徳 3년(1713)에 마쿠노우치에서 농업기술서인 <마쿠노우치 농업기農業記>를 저술한다. 친자식 2대에 걸친 농서의 저술이다. 요지 에몬의 <아이즈 농서>부터 하야시 에몬의 <마쿠노우치 농업기>까지 30년 동안 마을 형태는 뚜렷하게 발전을 이룬다. 마쿠노우치는 한 예를 들면, 요지 에몬의 시대에 자급을 목적으로 했던 농업에서 하에시 에몬의 '엽원장葉園場'이라고 부르는 근교 농촌의 상품작물 재배로 변화해 갔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증명하듯이, 마쿠노우치라는 한 마을에서 새로운 일련의 농서가 저술되어 간다. 이 겐로쿠 시기에 일어난 마을의 변용은 분카文化 시기(1804-1817)가 되어 더욱 가속하여, 마쿠노우치는 와카마츠 성시에 채소를 공급하는 '채원장'이라는 마을로, 분카 6년(1809)의 <신편新編 아이즈 풍토기>에 기재되게 된다.





<아이즈 농서>와 마을사람


<아이즈 농서> 저술로부터 20여 년이 경과하여 성립한 <아이즈 노래 농서>와 <아이즈 농서 부록> 안에는 가뭄과 된서리의 피해가 연대와 함께 기재되어 있으며, 당시 마을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그 하나로 '도천稻泉'이란 쌀을 둘러싼 에피소드가 있다. '도천'은 수확량이 많고 맛도 우수했기 때문에, 죠쿄 무렵부터 재배되게 되었다. 사람 좋은 요지 에몬은 마을사람이 청하여 '도천'의 볍씨를 모두 마을사람에게 주고, 자신이 재배할 볍씨가 없어 아내에게 야단을 맞는다. 그러나 겐로쿠 5년(1692)은 늦은 된서리에 의해 '도천'은 전멸해 버린다. '도천'의 볍씨가 수중에서 없어졌기에 할 수 없이 중도中稻와 조도早란 다른 품종을 심은 요지 에몬은, 다행스럽게도 수확을 할 수 있었다. 요지 에몬은 이 실화를 <아이즈 농서>에서 기술하고, 벼의 한 품종 농사 등 치우친 재배를 경계하며 많은 품종을 논에 심어 모내기의 기일을 달리 행하도록 지도하고 있다. 자연 재해로부터 절멸을 회피하는 방책이다. <아이즈 농서>의 전체를 관철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연과 맞서는 농법이 아니며,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자연을 살리는 농법이다. 현대의 농업은 이 가르침을 잊은 듯이, 고시히카리와 히토메보레 등 상표 쌀의 한 품종 재배 경향으로 나아가는 듯하다. 


요지 에몬과 마을사람의 관계를 보여준 기술은 <아이즈 농서 부록>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 하나로 도열병의 기재가 있다. 도열병의 기재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마쿠노우치 주변에서는 '이리모치(도열병)'이 생기면 조릿대를 찌르면 좋다는 옛날부터 전해오는 구전이 있으며, 이것은 최근까지 전승되어 왔다. 요지 에몬의동생 한 에몬은 미신이라고 말하며 조릿대를 꽂지 않았다. 동생의 벼는 전멸하고, 조릿대를 세운 요지 에몬의 벼는 반쯤 피해를 보고 끝났다. 마찬가지의 기술은 카가加賀의 농서 <농사유서>에도 있고, 카가에서는 상수리나무를 찌르면 좋다고 한다. 니시아이즈마치西会津町의 호자카宝坂에서는 밤나무 가지를 찌르면 좋다고 하며, 1945년 무렵까지 실행해 왔다.


<아이즈 농서>에는 농업 기술을 통하여 마을사람의 생활방식이 많이 이야기되어 와, 아이즈의 민속 연구에 다대한 가치를 주고 있다. 예를 들면 '하야시다拍子田'라고 부르는 모내기와 덴가쿠田楽의 습속이 이 시대의 아이즈 지방에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중세 동일본에서 덴가쿠의 습속이 거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주목할 만하다. 


또한 칸엔寬延 원년(1748) 사본인 <아이즈 농서>에는 백여 점의 농기구가 기재되어 있다. 당시 아이즈 지방의 농기구 존재 상황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풍구의 사용에 대해서는 <아이즈 농서>의 기술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유리오케汰桶'에서 '유리이타汰板'로 발달하는 과정과 목매의 변천 과정 등 근세 농기구의 발달 과정에 대하여 구체적인 연대와 작업능률이 아울러 기재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농기구 역사를 생각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이다. 


그림2 <아이즈 농서> 저술 당시의 농기구. <저묘대천동조만풍속개장猪苗代川東組萬風俗改帳>(부분) 죠쿄 2년(1685), 오카베 코스케岡部孝助 씨소장



유리오케




<아이즈 농서>는 현대의 생활에서 소멸된 민속과 어휘를 소생시켜 준다. 그 한 예로, '화경火耕'이 있다. 화전을 가리키고 있는 단어이다. 아이즈 지방에서는 화전은 카노라고 부르고 있는데, 근세에는 '화경(카코)'라는 단어가있었다. 사이타마현埼玉県 지치秩父 지방에도 '화경'이란 단어가 존재했던 것은 <신편 무사시武藏 풍토기고風土記稿>에 의하여 알 수 있다. '화경'이란 어휘는 각지에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화경'을 구실 삼아, <아이즈 농서>의 저자 사제 요지 에몬으로부터 현대의 우리에게로 전하는 메시지라고 보고 싶다. 그곳에는 현대의 농업이 직면한 물음에 대하여, 요지 에몬의 답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물어 이르길, 농가에서 밭을 갈 때 화경으로 한다고 하는 건 무엇입니까?

답하여 말하길, 가령 풀이 많이 자라는 밭을 늦게 메밀을 심으면 그 풀이 전혀 썩지 않고, 그것을 메밀 중간을 자를 때 불태워 버린다. 그리하면 풀뿌리도 끊어지는 데다가 재는 양분이 된다. 이를 화경이라 한다. 또한 저 밭 태우기도 모시풀이 많이 자라고 있을 때 태워도 곧 화경이다.


또 묻기를 ……. 농가에서 밭을 가는 데에 '화경으로 한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것입니까? 

답하여 말하기를 ……. 예를 들면 풀의 뿌리가 많이 만연해 버린 밭에서, 황급하여 메밀을 심으면, 그 밭은 좀처럼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파종 전의 중간 자르기를 할 때 괭이로 캐내고 불태워 버린다. 그렇게 하면 풀뿌리가 끊어지고, 더구나 재는 비료가 된다. 이것을 '화경'이라고 한다. 또한 밭 태우기도 모시풀이 많이 너무 자랐을 때 밭을 태우는 것도 화경이다. (일본 농서 전집 제19권 <아이즈 농서·아이즈 농서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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