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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5




서장

농경과 환경의 관계 1만년의 역사

사토 요이치로佐藤洋一郞






농경의 현대적 문제


현재 세계의 인구는 대부분 옥수수, 벼, 밀 세 가지 작물로 지탱되고 있다. 이 가운데 옥수수의 상당 부분은 가축의 사료로 소비되고 있기에, 인간의 입에 들어가는 식량이란 관점에서 말하면 쌀이 첫번째, 밀이 두번째이다. 어느쪽이라 하더라도 세계 인구의 식량은 겨우 몇 종의 식물로 지탱되고 있다. 대략 1만년 전, 인류가 처음으로 농업을 개시했을 때에는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종이 전분의 공급원으로 쓰이고 있었다고 생각되기에, 종 수의 감퇴에는 두드러진 것이 있다.


각각의 종에 있는 품종의 수도 또한 계속하여 크게 감소해 왔다. 특히 1960년대의 '녹색혁명' 이후 품종 수의 감소는 매우 두드러진다. 그 이유는 '녹색혁명' 이후 특히 곡물 재배에서 비료(특히 화학비료)를 다용하여서 생산성을 높이는 품종의 개발이 맹렬히 이루어졌다. 다비 조건에서 벼와 밀은 키가 자라서 수확 전에 쓰러져 버리는 일이 많다(이를 도복이라 함). 도복이 일어나면 생산성이 떨어지거나 품질이 떨어지거나 하기에, 키를 줄이는 품종 개량이 행해졌던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곡물에서 키가 작은 재래품종이 선택되어 그것을 교배에 이용하여 도복이 잘 되지 않는 품종 -이들은 반왜성 품종이라 부름- 이 등장했다.


이때 쓰였던 반왜성 품종은 밀에서는 일반산 품종인 '다르마達磨'였다. 벼에서는 타이완 품종 '저각오첨低脚烏尖'이었다. 일본에선, 예를 들면 교토부 무코시向日市에서 발견된 품종 '아사히旭'와 큐슈의 재래품종 '십석十石'이 반복하여 교배에 이용되었다. 게다가 '아사히' '십석' '저각오첨'의 반왜성은 어느 것이나 똑같은 유전자에 의한 것이다. 이처럼 어느 특정 품종이나 그 품종의 자손이 반복하여 교배친으로 사용되어서, 그 작물 전체의 유전적 다양성은 두드러지게 저하되었다. 게다가 이와 같은 반왜성 품종은 국제연구기관에서 육성되어, 유전적 다양성의저하는 세게적으로 퍼졌다. 어쩌면 이만큼 유전적 다양성이 낮은 농업을, 인류는 이때까지 경험한 적이 없다.


유전적 다양성의 상실과 함께 문제가 된 것이 농약과 화학비료 등의 화학물질을 다용하는 것이다. 앞에서 적었듯이, 반왜성 품종이 찬양되었던 것은 화학비료의 다용으로 인한 도복의 방지가 긴급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화학비료의 다용에 의해, 식물의 신체는 부드러워졌다. 또한 풍부한 비료분은 잡초의 생육도 촉진시켰다. 얄궂은 일이지만, 화학비료는 잡초의 해를 크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제초제 도입의 견인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또한 나중에 상세히 쓸 텐데, 작물과 그 품종의 수가 감소하여 특정 병이나 해충이 유행하게 되었다. 그에 대한 대책으로 여러 가지 살균제와 살충제가 개발되었는데, 그 다용에 의해 해충이 아닌 곤충과 거미류, 또는 미생물이 배제되었다. 이것으로 논밭 안의 다양성은 제거되었다. 더욱이 이들 화학물질은 토양과 수질을 오염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것이 농업의 지속성을, 더 나아가서는 생태계의 지속성을 위협하게되었단 것은 널리 인정되고 있다. 





유전적 다양성의 감소가 가져온 것


지구 환경문제의 큰 기둥 가운데 하나로 생물다양성의 저하를 들 수 있다. 지금까지는 특히 자연의 생태계에서 인간이 받고 있는 은혜 -이른바 생태계 서비스- 의 저하만이 부각되어 왔지만, 똑같이 심각한 영향을 준다고 하는 것이 종 안의 다양성인 유전적 다양성의 상실이다. 유전적 다양성이 저하되어서 돌발적인 추위와 따뜻함 등의기후변화에 작물이나 기술이 적응할 수 없고, 결국 생산이 감소하는 이른바 '흉작'이나, 그것이 심하여 기근이 발생하는 등의 사례가 상세하게 연구되어 왔다.


그중에서도 잘 알려진 것이 19세기 중반의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대기근이다. 이것은 '역병'이라 부르는 감자의 역병에 의한 생산의 대타격에 원인이 있었기에 '감자 기근' 등이라 부른다(Salaman 1985, 山本 2008). 감자 기근에는 그 200년 정도 전에 아일랜드에 전해진 감자 재배가 다른 작물을 쇠퇴시켰기 때문에, 감자 일색의 농업 생산이 되었던 것이 원인이라 이야기된다. 더하여 그 감자가 가진 유전적 다양성도 필시 매우 적었다고 생각된다. 만약 감자의 품종이 다양하여 역병에 대한 저항성에 차이가 있다면, 이 정도의 대타격은 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농업 생산은 이 1만년 사이에 여러 번 붕괴를 되풀이해 왔다. 다행스럽게 모든 인류 집단이 모두 다 붕괴를 맞이하지는 않았지만, 집단의 규모에 한하여 본다면 붕괴는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붕괴의 빈도는 집단의 규모와 반비례하는 듯하다(佐藤 2008).


그러면 유전적 다양성이 높다면 흉작과 그에 이어지는 기근은 방지될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오랜 의론이 있었는데, 몇 년 전 많은 품종을 섞은 재배가 병과 해충의 해를 감소시킨다는 것을 실증한 신뢰성 높은 연구결과가 나왔다(Zhu 외. 2000). 이 결과의 보편성은 아직 잘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의 연구 동향에는 주목할 가치가 있다.


곡류에 한하지 않고 유전적 다양성의 상실은 온갖 작물에 미친다. 채소류에서는 F1 품종의 보급이 그 방아쇠를 당겼다. F1이란 잡종 제1대를 의미하는 유전학의 용어로서, 파종에 사용되는 종자는 세대마다 F1 세대의 종자가사용된다. 이들 종자는 전문 기업 등에 의하여 해마다 다량으로 제공되어야 하는데, 품종 육성에는 많은 비용과 노동력이 요구되기에 품종의 수는 필연적으로 적어진다. 따라서 유전적 다양성은 필연적으로 뚜렷하게 저하된다.가축도 또한 마찬가지 원리로 F1이 이용되는데, 유전적 다양성의 저하는 채소 이상으로 심각하다고 이야기된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유전적 다양성이 저하된다고 반드시 흉작이 되거나 기근이 일어나거나 할 리는 없다. 유전적다양성의 저하는 기후변화와 병원균의 출현 같은 자연현상과 인간 사회의 움직임 등과 함께 복잡한 상호작용 환경을 이루고, 그 상호작용 환경은 마치 하나의 체계와 같이 복잡한 움직임을 나타낸다. 기근이나 사회의 붕괴는 그와 같은 복잡한 움직임의 결과이며, 무언가 하나, 또는 소수의 인자만이 원인이 되어 초래되는 것이 아니다.





농경과 물


현대 농업의 높은 생산성을 지탱하고 있는 것으로 화학비료와 농약, 품종 외에 물을 들 수 있다. 물은 인류의 생존에 필수의 물질이며, 그 확보가 고대 문명의 도시에 있던 여러 가지 장치를 만들어 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물 수요라고 하면 바로 앞에서 언급한 생물로서의 수요를 생각하기 쉽지만, 산업으로서 고려하면 농업에서의 수요가 가장 많다고 할 수 있다. 이 사정은 태고부터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를 펼쳐 읽으면, 인류는 '물 부족'과 '물 잉여'의 양방으로 고뇌해 왔다. 그들에 대응해 온 것이 관개의 기술이다(관개라고 하면 물 부족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음). 관개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는 이미 중국 장강 유역의 유적(6000년 전)에 등장하고, 그뒤에도 여러 가지로 진화를 성취해 왔다. 메소포타미아의 우르 제3왕조 시기에는 관개의 상황이 문서에 묘사되어 있다고 하는데(Maekawa 1984), 그 뒤에도 건조지대나 반건조지대에서는 여러 가지 유형의 관개시설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관개는 여러 가지 마이너스의 측면을 인류에게 가져왔다. 토양의 염성화가 그 하나이다. 이에 대해서는 최근 와타나베 츠기히로渡邉紹裕 씨와 공저로 출간한 <소금의 문명지>(일본방송출판협회 2009)에 상세히 적어 놓았으니 여기를 참조해 주시기 바란다.


이 책에도 적었지만, 건조지나 반건조지에서는 시기와 장소를 묻지 않고 염해가 발생했던 것 같다. 물론 염해가 어떻게 인식되었는지, 또 그 피해의 정도는 어떠했는지, 회피의 수단이 강구되었는지 등 여러 가지 차이점은 있지만, 그럼에도 토양 표면에 모인 염류가 농업 생산에 마이너스의 영향을 주었던 것에 변함은 없었다. 


관개는 또 주변 지역의 수자원에 무언가 부하를 지워 왔다. 예를 들면, 어느 하천의 상류에서 누군가가 계속하여 물을 끌어가면, 그 하류에서는 그 분량의 물이 흐르지 않게 되어 가뭄을 일으키거나, 또는 생태계에 변화가 발생하거나 한다. 물을 끌어가는 일이 대규모로 이루어지면 질수록 그 영향은 커진다. 나카오(2006)는 중국의 서북부, 지금의 내몽골부터 간쑤성에 걸친 흑하에서 과거 천 몇백 년 동안 상류에서 있었던 취수로 인한 하류의 영향을 조사했다. 그에 의하면 상류부에서의 농지 개발에 수반한 취수는 하류부의 유목민의 삶을 혼란시키고, 또 가장 하류에 있던 거연택居延澤이라 부르는 호수를 소실시켰다. 물 부족에 의한 초원의 축소, 풀의 양 감소는 유목민의 생활만 압박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지나친 방목을 불러와 초원의 교배와 사막화를 촉진시켰을 수도 있다. 


건조지대에 있는 내륙하천에서 하천의 유량은 자주 상류부에서 많고 하류부에서는 적다. 하천은 그 가장 하류에서는 사막 안으로 흡수되듯이 사라져 간다. 일본 등 계절풍 지대의 하천에서 하천의 유량은 하류 근처가 많은 것이 보통이라 조금 뜻밖이란 생각도 들지만, 이와 같은 사정 때문에 상류에서의 취수는 하류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케시마池島 후쿠만지福万寺 유적의 사람과 자연


계절풍 지대에서도 물은 농업 생산의 열쇠를 쥐어 왔다. 게절풍 지대에서 물은 은혜를 가져오는 동시에 홍수를 불러왔다. 이 책에서는 이노우에 토모히로井上智博 씨가 홍수를 시작으로 하는 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하여 오사카부의 이케시마 후쿠만지 유적을 사례로 적고 있다. 상세한 건 그에 양보하고, 여기에서는 유적이 빈번하게 경험해 왔던 홍수 가운데, 중·근세에 발생한 것에 대하여, 그 전후의 농업 생산과 사람들의 생활에 대하여 밝혀 온 일을 적어 두겠다.


그 유적은 오사카 평야의 동부, 이코마산生駒山부터 시기산信貴山의 산기슭에 있다. 여기는 18세기 초 무렵까지 야마토강大和川이 북서로 흐르고 있던 곳으로, 홍수가 빈발하여 사람들을 괴롭혔다. 홍수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는 다분히 이코마산의 산림 벌채와 그에 수반한 토사 붕괴에 있었을 것이다. 이코마산은 지금은 숲으로 덮인 푸른 산이지만, 역사적으로는 민둥산이었던 시대가 오래되었고, 그 민둥산의 모습은 근세의 그림 등에도 묘사되어 있다(木村栄美, 편지). 다만 숲이 사라진 이유는 시대에 따라서 같지는 않고, 개발 외에 방목의 전개 등도 생각할수 있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어쨌든 가파르고 험한 이코마산 자락의 서쪽 산기슭이 열려 버리면, 큰비가 내릴 때마다 산이 무너져 큰 홍수를 발생시켰을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홍수는 산림의 벌채 그것에 원인이 있다기보다는 토사 붕괴와 토사 붕괴가 가져오는 산사태에 원인이 있다. 또는 급격한 토사의 퇴적에 의한 하천 바닥의 상승 -토사가 차서 강바닥이 주변 지형보다 높은 하천인 천정천- 에 원인이 있다고 한다. 옛 야마토강은 유명한 천정천으로 이름이 나고, 제방이 터져 무너지는 일이 피해를 크게 만들었다.


홍수의 또 한 원인은 인간에게 있다. 중세 말부터 근세 초 무렵의 이 땅은 군사적 요충으로, 자주 전투의 무대가 되었다. 때로는 전략적 이유에서 제방을 무너뜨려, 말하자면 인위적 홍수가 지역을 엄습하기도 했다. 또는 성채의 건설을 위해, 또는 전후 부흥을 위해, 일시적으로 다량의 나무가 벌채되기도 했다.


이 땅의 홍수가 얼마나 심했는지는 유적에 퇴적된 토양의 깊이에서도 엿보아 알 수 있다. 장소에 따라 다르지만, 현대부터 야요이 시대 중기까지의 대략 2000년 사이에 5센티미터를 넘는 토사가 퇴적되어 있다. 단순히 계산하면, 토사 퇴적의 속도는 1년에 2.5밀리미터에 이른다. 


홍수는 고대에도 일어났다. 10세기에 일어난 대홍수는 근방의 식생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것이었던 듯하다. 게다가 이때 몇 십 년이란 매우 단기간에 몇 번의 홍수가 잇달아 일어났던 듯하다. 


홍수의 전후에는 무엇이 변화했을까? 전모는 아직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특징적인 것을 들자면 품종의 교대를 들수 있다(자료는 미발표). 이 자료는 유적에 있는 각각의 지층에서 출토된 플랜트 오팔(宇多津 2008)의 형상으로부터 밝혀진 것으로, 논벼농사에 잘 적응하는 온대 자포니카의 계통에서 열대의 밭벼 지대 등에 적응하는 열대 자포니카의 계통으로 변화한 것이 나타나고 있다. 열대 자포니카는 일본에서도 재배되었다(佐藤 1992).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의 <초본草本 육부경종법六部耕種法>(1834)에서는 일본의 근세에 고지古志, 입봉笠縫, 출운出雲, 일향日向이라는 네 가지 생태형의 품종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인 고지 종은 그 형태도, 또 적응하는 환경도 열대 자포니카의 그것에 유사한 듯하다. 


홍수 이후 그 유적 부근의 사람들이 열대 자포니카를 수용한 배경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점은 몇 가지 있다. 하나는 볍씨를 잃은 사람들이 어딘지 다른 곳에서 새로운 볍씨를 양도받았을 가능성이다. 이것은 상식적으로는 가장 자연스런 생각이지만, 약간 달랐을 가능성도 있다. 그것은 일련의 홍수 이후, 사람들이 그곳을 버렸지만, 그뒤에 다른 집단이 들어와 정주했다는 것이다. 이 어느쪽이 올바른지를 결정할 자료는 아직 없지만, 어느쪽이더라도 홍수가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엿볼 수 있다. 


홍수는 사람들에게 어쩔 수 없이 벼농사를 중단하도록 만들었다. 앞에도 적었듯이 홍수는 한 번이 아니라, 불과 몇 십 년 사이에 여러 번 일어났다. 게다가 홍수와 홍수의 사이에는 적지만 경작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결국은홍수가 빈발하는 와중에 벼농사가 반복해 행해져 왔다는 것이다. 플랜트 오팔의 분석 결과에서도 유적 주변에서 단위년수당 벼의 생산량은 중세기에는 근세의 약 1/4, 고대기의 약 1/2에 지나지 않는다.


이 생산성의 저하를 모두 홍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홍수에 의한 휴경을 엿볼 수 있는 상황 증거의 하나로 홍수 직후 잡초의 종이 증가한 것이 있다. 벼농사가 닫힌 공간 안에서 끊임없이 계속 행해지면 잡초 종의 수가 증가할 리는 없다. 홍수 직후의 잡초 종의 증가는 밖으로부터 새로운 잡초 종을 가지고 들어왔음을 시사한다. 즉, 홍수의 토사에 포함되어 다른 곳에서 운반되어 왔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중세 후기에서 근세로 들어오면, 홍수에 의한 토사를 이용한 '시마바타(섬밭, 島畠)'가 성행하여 축조된다. 이것은 문헌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근세에는 섬밭을 이용한 목화의 재배가 활발히 행해졌다고 알려져 있다. 카와치河內 목면木綿의 등장이다. 섬밭은 그 '밭'의 기능만이 중요시되지만, 밭과 밭 사이는 아마 홍수 전 밭의 높이까지 파낸 이른바 파 올린 논이 생기고, 그곳에서는 벼농사가 영위되었을 것이다. 즉, 섬밭은 홍수 뒤에 논벼농사를 부흥하기 위한 방책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섬밭이란 장치를 지음으로써 논·밭에서 한결같이 농업을 촉진시켰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홍수가 단지 사람들에게 재해를 가져오기만 하는 존재는 아니었다고 새삼스레 이해할 수 있다. 분명히 홍수를 당한 사람들은 목숨을 빼앗기고, 재산을 잃고, 병으로도 고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급성시기'를 넘긴 사람들의 사회는 홍수와 그것이 가져온 변화에 적응하고, 새로운 생존방식과 사회를 모책했다. 그 의미에서 '홍수'는 완전히 마이너스의 재산은 아니다. 동시에 그것은 새로운 기회이기도 했다. 아니, 사람들은 홍수도 기회로 바꾸어 살아 남은 것이다. 다음에 그 적응의 모습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적응의 두 가지 기술


홍수 등 여러 가지 재해에 대한 인간과 그 사회의 적응 방법 -나는 이를 '견딤의 기술'이라 부름- 은 농학적 적응과 공학적 적응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古川 1997). 두 가지 대응 방법에는 일장일단이 있어 어느쪽이 어떻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앞에 기술한 품종의 고대 등은 전형적인 농학적 적응의 사례이다. 한편, 공학적 적응에 포함되는 적응 방법도 있다.


앞에도 기술했듯이, 중세 말 무렵에 이 땅에서는 홍수 이후에 섬밭이란 특수한 장치가 만들어져, 그 위에는 밭작물을, 그리고 섬밭과 섬밭 사이의 낮은 곳에는 벼를 심었다. 중세에 들어와 섬밭의 밭작물 종류는 잘 알 수 없지만, 앞에 기술했듯이 근세가 되면 그곳에는 목화가 재배되었다. 즉, 홍수가 엄습한 뒤 사람들은 퇴적된 모르랠 섬밭이란 모양으로 쌓아서 논을 회복해 왔던 것이다. 훌륭한 '견딤의 기술'이라 할 만한데, 이것 등 공학적 적응의 선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사카 평야에서는 수해가 너무 심하여 에도 막부가 야마토강의 흐름을 바꾸어서 이 토지를 홍수에서 구제하려 했다. 이는 나카 진베中甚兵衛 등이 열심히 탄원을 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내실은 마을에 따라 하천의 물길 전환에는 찬반이 있어, 막부도 물길 전환의 가부에 대하여 판단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야마토강 수계 뮤지엄네트워크 2007). 그러나 찬반으로 나뉜 것은 당연하여, 새로이 물길을 끌어온 토지의 농민은 농지를 잃게 된다. 게다가 공사에 걸리는 노동력의 제공 등의 부담도 짓누른다.


야마토강의 물길 전환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00년 전의 공공공사이다. 우리들은 300년 전의 공공공사의 사후평가를 하는 입장에 있지만, 조금 조사해 보더라도 공사에는 음과 양 두 측면이 있었던 것 같다. 야마토강 전환 이후 이 땅에서는 토사의 퇴적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즉, 홍수에 의한 토사의 퇴적은 급격히 감퇴한 것이다. 그와 함께 주변에서는 우물터가 출토된다. 즉, 일부의 토지에서는 지하수를 퍼올려야 하기까지 건조화가 진행된 것이다. 하천의 전환 이후, 하천의 유량이 감소했던 것은 틀림없다. 그 증거로 야마토강을 전환시킨 다량의 물은 다량의 토사를 운반하여 하구에 있던 국제적 항구였던 사카이항堺港을 황폐하게 몰아넣었던 것이다.




환경결정론


그런데 벼의 생산성과 기후의 관계에 대하여 흥미로운 점이 밝혀졌다. 여기에서는 한 꼭지를 두어서 이에 대해 적어 보고자 한다. 


그림1에는 고이즈미小泉(2007)에 의해 여기 2000년 사이의 기온 추정치를 그리고 있다. 그림에서 밝히듯이 플랜트 오팔의 생산량으로부터 추정한 벼의 생산성과 해당 시기의 기온 및 기온의 변화 사이에는 명확한 경향은 확인할 수 없다. 즉, 그림에 나타난 비교적 장기의 기온 변동과 벼의 생산성 사이에는 명확한 관계성은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림1 과거 2000년 사이의 기후(추정치)와 플랜트 오팔의 양에서 본 벼의 생산성. 추정 기온은 고이즈미(2007)에 의함.




에도 시대의 기근에 대하여, 그 원인을 이 시대가 '소빙기'에 있었던 점에서 구하는 논고가 자주 보인다. 이 시대가 '소빙기'라고 부르는 시기였던 점도, 또 이 시대에 기근이 빈발했던 점도, 어느쪽도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기근의 원인을 '소빙기'의 기후에서 구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또한 둘 사이에 소빙기라는 저온→흉작이란 인과관계가 있더라도, 그 관계의 강도는 잘 연구되어 있을 리 없다. 실제, 기근 가운데 최대의 규모였다고 하는 덴메이天明의 기근에서는 그 직접 원인을 아사마산浅間山의 분화와 그에 의한 토석류가 토네강利根川 유역을 엄습했기 때문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게다가 '소빙기'와 '흉작' 사이에는 몇 가지 요인이 관계하고 있다. 앞으로는 그들 요인을 포함한 포괄적인 인관관계의 해명을 진행시켜야 한다. 


기근이 심각화한 것에 대하여, 에도 시대 '쌀 본위제'라는 말에 나타나는 벼농사 일변도의 농업정책에 그 원인을 구하는 의견도 있다. 본래 벼농사 지대가 아니었던 도호쿠·칸토우의 땅에 반강제로 벼농사를 도입한 정책의 실패라는 것이다. 아사마산의 분화에 대해서는 분화 이후의 몇 년 사이 저온이 계속되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것이 기근을 가져왔던 직접적 원인이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기후변화라는 자연현상과 기근이란 사회적 사건은 모두 '사람과 자연의 상호작용 환경'에 포함되며, 다른 사건과의 사이에서 복잡하게 관계되어 왔다고 보아야 한다. 


근세에 기록한 벼의 생산성에 대해서는 예를 들면 사토(1980)에게서 상세하다. 사토(1980)는 근세 후반의 코슈甲州 10개 마을에 있었던 단위면적당 수확량에 대하여 상세하게 검토한다. 이것을 보면, 벼의 생산성은 예를 들면 헤미逸見 일대 아사오浅尾 마을에서는 단위면적당 수확량(되/평)은 1770년부터 1872년까지 100년 사이에 매우 완만하게 증가하고 있는데, 마을에 따라서는 감소하고 있는 곳도 있다. 즉, 코슈 전체에서는 단위면적당 수확량은 정체되어 있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향은 시즈오카현 등 다른 지역에 대해서도 대체로 똑같다. 또한 이미 사토(2005)에 의해 밝혀졌듯이, 이 시기의 단위면적당 수확량은 그 전후의 시기와 비교해도 큰 증감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점을 생각하면, 역시 '근세의 소빙기'가 벼의 생산성을 낮추었다고 하는 건 명확한 사실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단 생산성의 연차 변동은 컸던 것 같다. 사토의 자료를 보더라도 연차 사이의 생산성 변동은 실로 크다. 또한 1853년 같은 특정 연도에는 어느 마을이라도 큰 수확의 감소를 기록하며, 이와 같은 해에 이른바 냉해가 발생했을 가능성은 지적할 수 있다. 소빙기라는 짧은 기간의 기후변화는 이와 같은 생산성의 불안정함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근세의 특질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앞으로 연구할 주제이다.





잡초·해충·병원균


1만년에 이르는 농업 생산의 장에서, 인간을 괴롭혀 온 것이 잡초와 병해충이다. 일상생활의 장에서도 병해충은 인간 생활에 해를 미치고, 여러 번 인구를 격감시켜 사회를 혼란에 빠뜨려 왔다. 인류의 역사는 이들과의 싸움의 역사였다고도 할 수 있다. 나는 그들을 '마을에서 불러온 손님'이라고 부른다. 이들 불러온 손님들과의 싸움은 과학기술이 진보해도 결말을 내지 못한다. 


역사를 돌아보고 생각하면, 이들 불러온 손님들은 그 대부분이 농경의 시작과 함께 인간의 생존권인 '마을'에 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인간이 농경이란 행위에 수반하여 자연히 생겨난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들의전략은, 물론 식물인 잡초와 곤충인 해충, 미생물인 병원균에 따라서 다르다. 잡초에서는 그 생활 환경과 외형을 작물과 비슷하게 하는 '의태'의 전략이다.


잡초라고 부르는 식물 가운데에는 오늘날 지구적 지위를 쌓아 올린 작물의 오늘을 떠받친 역할을 수행한 것도 있다. 예를 들면, 빵밀(T. aestivum)은 서아시아에서 생긴 뒤 고대 이집트 등에서도 재배되었던 엠머밀(2립계 밀)과 그 밭에 잡초로 생겼던 야생 염소풀(Aegilops tauschii)과의 자연교잡에 의하여 발생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8500년 정도 전, 카스피해 남안의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벼에서도 똑같은 시나리오가 써졌다는 것이 알려져 왔다. 벼에는 인디카, 자포니카라는 두 가지 큰 유형이 있고, 자포니카의 벼는 1만년쯤 전에 장강 유역에서 생겼다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佐藤 2008, Fuller & Sato 2008). 인디카는 중국 출신 자포니카가 열대에서 저지로 운반되고, 그곳에 있던 야생 벼와의 사이에서 자연교배를 일으켜 발생했다는 가설이 유력하다.


생산량 세계 제8위의 대두에 대해서도, 최근 그 재배화의 과정에 빵밀과 인디카 벼와 같은 자연뵤개의 과정이 지적되어 왔다. 대두는 연속강좌 <유라시아 농경사>에서 아베 쥰阿部純 씨가 기술하듯이, 동아시아의 여러 장소에서재배화되었다고 생각된다. 어딘가 다른 곳에서 재배화된 재배형이 다른 환경에 운반되고, 그 땅에 있던 야생종 또는 수반하는 잡초와 교배를 반복하면서 새로운 재배형을 만들어내 왔다.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잡초를 배제하려 하고자 생각하지만, 잡초에는 중요한 작물을 만들어내 왔던 역사가 있다. 장래의 환경 변화를 생각하면, 잡초는 일면으로는 귀중한 자원으로 보호되어도 좋은 존재이다. 


해충과 병원균은 가축과 작물의 신체에 매달려 영양을 빼앗거나, 독소를 내어 그 건강을 해치거나 한다. 


해충도 병원균도 잡초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농경이란 활동에 의하여 등장한 것이다. 원래 작물과 가축(숙주)의 원종(선조가 된 야생종)은 여러 가지 곤충과 미생물과 공존해 왔다. 물론 공존의 관계는 다양하여 단순한 기생도 있다면, 공존공영 같은 공생의 관계도 있다. 농경이 시작되더라도 숙주와 기생자의 관계는 기본적으로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농경의 확대에 의해 작물과 가축의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해충과 병원균도 그 수를 늘려 왔다. 그들이 작물과 가축에 기생해 왔던 존재인 점을 생각하면, 그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다.


숙주와 기생자의 관계는 농경의 진전과 함께 차차 변화한다. 숙주의 종류가 줄고, 특정 종만이 돌출하게 되면, 그소수의 숙주에 매달린 기생자만이 늘어나고 다른 건 자꾸 줄어 간다. 또는 그들도 유력 숙주에 매달리듯이 진화해 나아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생자의 다양성도 저하되고, 대수롭지 않은 일로 격증하거나 격감하거나 하기 쉬워진다. 이 사태는 숙주의 쪽에서 보면 유행이 일어나기 쉬워진다고 하는 것이다. 숙주의 종 안에서도 다양성이 저하되어 있기 때문에, 유행의 위험성은 한층 증대된다. 이리하여 벼에 있는 도열병과 멸구 등의 심각한 병해와 해충이 등장했다. 소의 BSE도(원인물질 프리온은 미생물도 없으면 해충이 매개하는 것도 아니지만) 유전적 다양성의 상실에 수반하는 유행이라는 의미에서는 유사한 현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녹색혁명' 이후는 이들 '불러온 손님'들을 근절시키고자 하는 농약이 차례로 개발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약제가 개발될 때마다 그들은 그에 대한 저항성을 획득해 왔다. 결국 인류는 불러온 손님에게 아직까지도 이혼을 요청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뿐인가, 그들은 한층 사납게 계속 숙주를 습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나움은 인간이 그들을 구제하려고 하면 할수록 날이 서 인간의 기술과 함께 공진화를 이루어 왔다. 


미래의 사회에서 인류는 이들 '불러온 손님'과 어떻게 사귀면 좋을 것인가? 그들은 어느 의미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이다. 일본에서는 옛날부터 만물에 인간과 똑같이 '불성'이 있어 그 생명을 존중한다는 사상이 있다. 우메하라 타케시梅原猛 씨에 의하면 그것은 헤이안 시대 말기에 등장한 불교의 사상인 본각사상과 깊은 연관이 있다. 본각사상은 '초목국토실개성불草木國土悉皆成佛' 또는 '산천초목실개성불' 등이라는 말에 그 내용이 나타나는데, 요컨데 그것은 불러온 손님이더라도 그들도 공존하도록 해야 한다는 사상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또는 그들은 존재에 대한 그림자 같은 것은 아닐까? 즉, 그림자를 사라지게 하려면 존재를 사라지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불러온 손님들의 역사를 생각하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불러온 손님들을 제멋대로 하게 두면 생산은 크게 감소해 버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근절시키려 하는 노력은 말하자면 쓸데없는 일은 아닐까? 그러한 반성도 가까운 장래에 필요하지 않을지 생각하게 된다.





농경에서 불의 역할


농경의 역사는 농지 개발의 역사였다. 특히 계절풍 지대를 비롯해 산림이 탁월했던 지역에서는 산림을 개간하는 일이 농지의 개발이었다. 어쩌면 건조지대의 산림이 없던 지역을 별도로 하면, 세계의 도처에서 산림이 농지로 개간되어 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산림을 개간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불을 사용하는 것이다. 불을 놓아서, 도구가 없는 시대에도 개간은 대단히 쉽게 행해지게 되었다. 아니, 불태운다는 것 자체가 훌륭한 도구의 하나였던 것이다. 더욱이 불태우는 것으로 산림의 식물체가 가지고 있던 또는 토양 안의 여러 가지 미네랄 성분은 흡수할 수 있는 형태로 변하여 작물의 영양이 되었다. 재가 비료로 사용되는 이유이다. 불을 사용하지 않으면, 베어낸 식물체가 분해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오랜 시간이 걸리면 모처럼 개간한 토지에는 잡초들이 침입하여 토지를 점유해 버린다.


불태운 직후의 대지에 작물의 종자를 심으면, 남은 불의 열에 의하여 종자의 휴면성이 풀리고 발아가 잘 된다. 작물을 해롭게 하는 곤충과 미생물도 잠깐 동안은 있지만 피난한다. 


불을 사용한 개간이라고 하면 '화전'을 맨 먼저 떠올린다. 물론 현대의 화전과 태고의 개간을 동렬로 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국 고대의 전승인 '상경조전象耕鳥田'이나 <제민요술>의 '화경수누火耕'에 등장하는 농지를 준비하는 방법은 불과 물을 사용한 생태계의 교란이 옛 시대의 벼농사 개시의 경작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던 것을 웅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화전은 국제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확실히 지구적 경제의 진전 안에서 플랜테이션 농업을 위하여 열대의 산림은 벌채되고 불태워져, 재생이 안 되는 산림 파괴가 진행되어 왔다. 산림 파괴는 그자체가 환경 파괴라고 인식한다면, 이러한 대규모 화전은 환경 파괴의 행위 그에 다름이 없다. 그러나 화전 자체는 어쩌면 농경의 매우 초기 단계부터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던 농법의 하나이다. 이와 같은 화전(여기에서는 그들을 '전통적 화전'이라 부르기로 한다)은 이 시리즈 제2권 제3장에서 카와노 카즈아키川野和昭 씨가 상세히 논하고 있듯이, 지속성이 높은 농법이다. 이것은 우리의 프로젝트에서도 '화경반火耕班'의 연구활동을 통하여 자세히 논해 왔던 바이기도 하다. 


전통적 화전에서 숲은 늘 재생되어, 그 재생된 숲을 불태워서 미네랄 등을 순환시켜 성립해 왔던 농업의 형태이다. 그것은 요즘 언어를 사용하면, 정말로 '순환'과 '재생'의 농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화전이 가진 이와 같은 좋은 측면을 보지 않고 한때의 '산림 파괴'란 측면만을 보아 그것을 금지하거나 비난하는 태도는 농업의 지속성과 더 나아가서는 지속성에 오히려 반하는 것이다. 일찍이 동남아시아 어느 나라의 정부가 농가의 전통적 화전을 실질적으로 금한 일이 있다. 화전을 그만두고, 저지에서 논벼농사를 경영하면 나라도 사회도 풍요로워진다는 설명이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저지에서 하는 논벼농사에서는 확실히 산림은 불태워지지 않았지만, 그 대신 화학비료와 농약의 사용을 증가시키게 되었다. 이들의 제조, 사용은 화석연료를 소비하고,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의 배출로 이어진다. 환경문제를 생각할 때 언제나 고려해야 할 것은 어느 행동이 나중의 시대에 예기하지 않던 무언가 반작용을 가져온다는 점이다. 불의 사용에 대한 일면적 이해가 더욱 나쁜 결과를 만들 가능성도 있다. 우리들은 불에 대해서도, 종합적으로 생각해 판단하는 것이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마치며


농약과 환경을 하나의 체계로 생각하면, 이 체계를 장기에 걸쳐서 유지하는 데에는 '투입'과 '산출'의 수지가 유지되어야 한다. 이 체계 안에서 작물과 가축의 생산을 '산출'이라고 하면, '투입'은 태양열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내부에서 보급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물과 이른바 화석연료나 금속원소 등이다. 하지만 '산출'이 '투입'보다 큰상태가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는 원리는 -영구기관이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는 원리와 같이- 매우 보편성이 높은 원리이다.


'투입'을 크게 하는 것은 태양광 에너지의 이용효율을 최대로 하는 것이지만, 이것도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다.태양광 패널 등이 주목을 받고 있지만, 패널의 생산과 그 내구년수를 생각하면 그만큼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패널을 바다나 육지에 부설하거나 하면, 그 토지의 기후가 변화하는 위험성이 있다. 이처럼 생각하면, 지구에서 수억 년의 역사를 가진 식물에 의한 광합성이란 체계가 얼마나 우수한 것인지 이해하게 된다. 결국 인류는 식물의 광합성에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실제로 태양 에너지를 이용하는 농업에 의해 현생인류는 지금까지 그 수를 증가시켜 지구를 '지배'해 왔다. 인구의 급속한 증가는 곡물이 유아의 사망률을 대폭 낮춘 것에 의한 것인지, 여성의 출산부터 다음 임신까지의 기간을 대폭으로 단축시킨 것에 의한 것인지 상세한 것은 검토해야 할 연구과제이지만, 농업에 의한 식량 생산이 인구를 크게 확대시키고 불어난 인구는 한층 더 식량 증산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 '악순환'의 괄과가 모두에 적었던유전적 다양성의 상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생산을 늘리는 방책만을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농업과 환경의 관계사를 펴서 읽었을때, 또 하나의 선택지 -소비를 줄이는- 것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려할 때가 온 것은 아닐까? 우리는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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