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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4




기고6

동서 안의 동양의 끽다 문화

키무라 에미 木村





시작하며


일본은 16세기가 끝날 무렵, 다도라는 독자의 끽다 양식을 확립하여 오늘날까지 전통 예술로 그 모습을 남기고 있다. 그것은 당초의 모습은 물론 아니고 시대의 변천 안에서 잔치를 베풀고 놀며 끽다, 다례, 다도라고 다양한 모양과 요소를 포함시켜 왔다.


이 기고에서는 끽다 문화가 중국에서 일본으로 수용되는 과정과 중세의 그 전개부터 근세에 일어난 서양과의 교류 속에서 동양의 끽다 문화는 서양인의 눈에 어떻게 비추었는지, 게다가 서양에 있는 끽다의 자리매김이 어떠한것이었는지를 고찰하면서, 동양 문화, 동서 문화의 안에 있는 끽다의 다양성에 대하여 찾아 보고자 한다.




중국 끽다 문화와 당나라풍 끽다의 수용


차의 신 육우陸羽(?-804년 무렵)는 차를 남방의 가목嘉木이라 불렀다. 남방이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 중국의 장강 하남 유역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끽다가 더없이 융성한 8세기 후반에 명차는 양자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개한다. 차의 재배, 끽다의 기원이 언제쯤인지를 엄밀하게 해명하는 일은 아직 곤란하지만, 차의 산지는 쌀과 공통이며, 그 기원을 더듬어 찾으면 차는 벼농사와 함께 전개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차는 중국에서 당초 약으로 이용되었을 것이지만, 6세기 중엽 북위의 양현지楊衒之가 저술한 <낙양가람기>에는 북쪽에 있는 음료 낙장酪漿과 그 북쪽에 수액水厄이라 멸칭되었던 차에 대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남제 제2대 황제 무제(440-493, 재위 482-493)를 섬긴 왕숙王肅(464-501)은 부형제를 무제가 죽였기 때문에 북위 제6대 황제효문제(467-499, 재위 471-499)를 섬겼다. 그때 왕숙은 북위의 양고기, 낙장 등은 먹지 않고, 즉어鯽魚(붕어)의 국을 먹고, 명즙茗汁(차)을 마셨다. 여기에서 중국의 북방에서는 유제품과 목축이란 조합에 반하여, 남방에서는 물고기와 차의 조합이란 음식생활이었던 것이 주목된다. 당시 북방에서는 차의 쓴맛이 재앙이고, 낙노(유제품의 노예) 또는 수액(단 남조에서는 수액은 물의 재앙이며, 차라는 뜻은 전하지 않았음)으로 취급되었다. 몇 년 뒤, 왕숙은 궁정에서 효문제와 회식할 때 양고기와 낙죽(우유가 들어간 죽)을 많이 먹었다. 효문제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해 "중국의 먹을거리 가운데 양의 고기는 물고기의 국과 비교해 어떤가, 명음은 낙장과 비교하여 어떤가?"라고 물은 바, 왕숙은 양고기는 육산, 물고기는 수산으로 모두 최고이지만 양은 춘추 때의 제와 노와 같은 대국에서, 물고기는 주와 거와 같은 소국에서 비교해 추정했다고 평하였다. 그러나 명에 대해서는 낙의 노예라고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답했다. 명이 낙의 노예에 적합하지 않다는 건 왕숙이 당초 북방의 낙에 친숙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명, 곧 차는 남방에서 북방의 낙에 필적하는 음료로 자리매김되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육우가 저술한 차 책 <다경茶經>(760년 무렵 성립)에는 남방에서 차는 3세기 무렵부터 관료의 검소한 향응에 사용되고 있었단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8세기 후반 이후 끽다는 서민에게도 보급된다. 동시에 궁정과 사원을 중심으로 향응 안에 차와 술은 병용되어 받아들여 쓰고, 선사품으로도 이용되게 되었다. 더욱이 차에 세금이 부과되게 되어, 궁정은 전용 차 정원을 후저우湖州의 고저산顧渚山에 설치한 일로부터 차는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이렇게 중국에서 전개된 끽다 문화는 9세기 초 무렵에 영충永忠, 공해空海, 최징最澄 등 유학승이 당나라 문화를가져옴에 따라 일본에도 이미 받아들여졌다고 추측된다. 특히 사가嵯峨 천황(786-823, 재위 809-823)을 중심으로 한 궁정 사교모임에서는 <경국집經國集> <문화수려집文華秀麗集> 등 시가에서 차를 읊고 있는 점으로부터 당나라풍 문화에 대한 동경으로 끽다를 즐긴 것 같다. 그러던 중, 홍인弘仁 6년(815) 사가 천황이 오우미近江 가라사키唐崎로 행차했을 때, 범석사梵釋寺 주지 영충(742-816)이 유연 중에 자신의 차를 헌상한 일은 사가 천황의 당나라풍에 대한 생각을 더욱 강하게 한 것이 아닐까? 그 1개월 뒤에는 키나이畿内·오우미·탄바丹波·하리마播磨 등에 차를 심도록 칙명을 내리는 것이 사가 천황의 차에 대한 깊은 생각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영충은 약 30년이란 오랫동안 당나라에 머물며 끽다 융성의 상황을 눈으로 보았을 텐데, 그것을 전하는 문헌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영충이 체재하던 장안의 서명사西明寺에서는 석제 차 맷돌(그림1을 참조)이 출토되고 있는점으로부터 당나라에 체재할 때도 차를 마시고 있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 진언종의 개조 공해(774-835)는 유학 당초, 영충이 있던 서명사에 머물고, 귀국 후에도 영충과 친교가 있었다. 사가 천황이 지은 시에는 공해와 차를 마시며 교제했다고 생각되는 시가가 있고, 또한 공해 자신도 시가 안에서 차를 노래하며, 당나라에 있는 끽다를 귀국한 뒤에도 개인적으로 즐겼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림1 차 맷돌. 대덕사大德寺 소장 '오백나한도' 부분




한편 일본 천태종의 개조 최징(767-822)는 수제자인 태범泰範(778-?)이 공해의 밀교에 심취해 최징의 수하로 돌아오지 않았을 때, 자신의 수하로 돌아오도록 차를 10근 편지에 넣어 보낸다. 이것으로부터 차가 선사품으로도중시되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사가 천황 이후 끽다의 풍조는 쇠퇴한 것처럼 보이지만, 10세기 즈음 다이리內裏의 '토노모료主殿寮 동東'(東北角)에는 차 정원이 설치되었다. 그곳에서 재배된 차는 봄가을 두 계절에 행해지는 계어독경季御讀經에 쓰였다고 추측된다. 또한 우다宇多 법황法皇(867-931, 재위 887-897)의 50세 축하에는 술 대신 차를 음용했던 일이 <서궁기西宮記> 등에서 볼 수 있는 점에서 향응에는 술이 빠지지 않았던 것과 함께 차도 점차 술과 동격의 중요한 음료로향응 안에 자리매김되어 갔다고 추측한다. 그뒤 축하에 쓰는 차에 대해서는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지만,시라카와인白河院(1053-1129, 재위 1072-1086), 고시라카와인後白河院(1127-1192, 재위 1155-1158)의 50세 축하에서 다시 차를 준비하게 되어, 고시라카와인 때에는 우다 법황의 다기를 이용하게 되었다. 다만 이와 같은 고대에 있던 당나라풍 끽다는 아직 문화라고 부르기에는 단편적이며, 일본 독자의 끽다 문화를 형성하는 데에는 중세를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중세 끽다 문화가 크게 개화한 것은 고대에 있던 당나라풍 끽다가 기반이 되었단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중세 끽다 문화의 전개


중세에 끽다는 일반에도 보급되었지만, 그 과정은 중국에서 있었던 8세기 후반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에이사이栄西(1141-1215)는 <끽다양생기喫茶養生記>(1211년 성립, 1214년 수정)를 저술하고, 차의 효용, 끽다법이 어떠한 것인지 하는 점을 중국의 차 자료를 바탕으로 명확히 전하고 있다. 이것은 육우가 <다경>을 저술하여 차에 관한 온갖 문헌을 활용해 차란 어떠한 것인지 그 효용과 음용법을 밝히려 한 것과 유사하다. 에이사이가 <끽다양생기>의 전반에 문제삼고 있는 차의 자료는 송나라대 초기의 비슷한 책 <태평어람太平御覽>의 내용을 참고한 것이라 하며, <다경>을 실제로 보았는지 어떤지 명확하진 않다. 그러나 그가 일본 끽다 문화 안에서 수행한 역할은 송나라대의 끽다법과 묘에明惠 대사의 일화에서 문제삼고 있는 차의 종을 전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끽다양생기>를 저술함에 따라 차의 실용성을 널리 전하여 끽다 보급의 원동력이 되었던 점을 크게 평가하고 싶다. 사카이堺의 카이에지海会寺(임제종 동복사東福寺파) 주지였던 계홍대서季弘大叙(1421-1487)가 <자헌일록蔗軒日錄>에서 <끽다양생기>를 '차상경茶桑經'이라 칭하고 있는 것에서도 에이사이는 일본에서 육우와 같은 존재로 자리매김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세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선종이 끽다 문화에 큰 영향을 준 점이다. 물론 차의 생산에서는 아마 선종보다도 현교와 밀교 사원에서 하던 재배가 중시된다. 그러나 선종에는 '청규清規'라고 부르는 규범이 있어, 연간 중요한 행사에는 끽다가 자리매김되고 다례로 확립되어 있었다. 그와 같은 선종의 영향을 받아, 끽다는 공식을 중심으로급속히 보급되고, 공식의 다례로서 전개된다. 또한 혼간지本願寺 3세 카쿠뇨覚如(1270-1351)의 생애를 묘사한 '모귀회사慕歸繪詞'에는 승속 사이에 행하는 연가連歌의 모임에서 다양한 향응 요리 안에 차를 준비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또는 <태평기> 등에는 공식 잔치에서 차 산지의 몇 종류인지를 마시고 비교하여 맞추며 경쟁하는 투차鬪茶가 행해졌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그 한편에서 사원과 신사의 문앞에서는 <칠십일번직인가합七十一番職人歌合>에서 볼 수 있듯이 '끓임 행상' '차 한 번 마시고 1전' 등도 나타나, 참배하는 서민에게도 차를 마실 기회가 늘어난다. 근세 초두에 확립된 다도는 이와 같이 중세에 있던 관민의 끽다가 융합해 만들어진 형식이 아닐까 하고 추측한다.


중세 이후 차와 쌀은 일상적으로 빠질 수 없는 것이 되었는데, 차는 식문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선원을 중심으로 사원에서 먹을거리는 쌀만이 아니라, 우동·만두·소멘·키시멘·권병·온병粉物 등 밀을 중심으로 한 분식도 더해진다. 이와 같은 경향은 <끽다왕래> <정훈왕래> 같은 문헌, 또는 '모귀회사' '주반론회권酒飯論繪卷' 등의 회화 자료에 나오는 향연 요리에도 묘사되어 있는 점으로부터 공식·사원에서 밀을 이용한 요리가 보급되기 시작했단 것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일본에서 차를 분말로 만들어 마시는 방법은 당나라대에 있던 음용법을 수용했다. 그 기원은 명확하지 않지만, 차를 분말로 만든 것은 제차법이 엽차가 아니라 고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차를 억지로 고형으로 만든 이유는 장기보존이 가능했단 점, 또 하나는 가지고 다니기 편리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차를 분말로 만들기 위해서 당초는 무엇을 사용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아마 절구 같은 도구일 것임). 당나라대 이후는 차 맷돌(일본에서는 다련茶硏이라 부름)을 쓰고, 유송년劉松年(12세기 무렵)의 '연차도攆茶圖'(타이페이 고궁박물원)에도 묘사되어 있듯이, 나중에 맷돌도 사용하게 된다. 둘의 사용용도에 따른 구별은 명확하지 않지만, 일본에서 차는 세련된 차 맷돌(그림2)로 갈던 것과 달리, 중국에서는 잡곡용이 아닐까 생각되는 큰 맷돌을 사용한다.



그림2 차 맷돌. 오사카 텐만天滿 죠센보定專坊 소장 '신란親鸞 성인聖人 전회傳繪' 부분





차는 설령 고형이더라도 그냥 갈아서 뜨거운 물을 부으면 잎에 수분을 머금은 진액은 추출되어 충분히 마실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왜 굳이 분말로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물론 약이란 요소도 있지만, 더 추측하자면 차와 밀의관계도 고려했던 것이 아닐까? 밀은 날로 먹을 수 없고, 맷돌로 갈아 가루로 내 조리한다. 그와 같이 가루로 만든다는 점에서 힌트를 얻어, 쓴 차도 분말로 만드는 쪽이 마시기 쉬워진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추측의 영역을 아직 넘을 수는 없지만, 역사를 되돌아보면 차는 밀과 쌀의 가교였을지도 모른다. 





서양인이 본 동양의 끽다 문화


서양에 있는 끽다 풍습의 보급은 중국, 일본에 비하면 훨씬 늦은 17세기 무렵이다. 


16세기 예수회는 카톨릭 포교를 위해 동양에 진출해, 동양의 습관·문화 등 전반을 이해하고자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선교사들은 동양의 끽다를 어떻게 보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포르투갈 사람 조앙 로드리게스(1561-1633)의 <일본교회사> 또는 마테오 리치(1552-1610)의 <중국 카톨릭교 포교사>에서 엿볼 수 있다.


16세기 후반에 일본에 온 선교사 로드리게스는 다도에 대하여 "이 왕국의 우아한 습관 중에서도 주요하고, 일본인이 가장 존증하고 전력을 기울이는 것은 차를 마시는 일에 초대하는 것일 테지만, 그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또한 손님에게 차를 내오는 장소를 꾸미는 것에 대해서도 특수한 건물, 그 건물로 가는 통로와 입구, 또 이런 장소의 목적에 적합한 기타 여러 가지 것에 정성을 다한다"고 묘사되어 있다. 다도 및 그 공간이 되는 다실, 또는 다도구라는 것이 얼마나 서구인의 눈에 기이하게 비추었는지 짐작되고, 그것은 그들의 문화에는 없는 동양 안의,가장 일본의 독자적인 대접이며 문화였다. 


한편 리치는 한자 이름 리마두利瑪竇라 부르고, 중국에 뼈를 묻었다. 그는 중국에서 포교활동을 하면서 차의 존재에 대하여 "우리들 나라의 산야에도 이 종의 나무가 있을지 모른다"고 기록한 점으로부터, 아직 서구에서 차는 별로 일반적이지 않았고, 혹은 그 존재조차 아직 별로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리치는 중국인에 대하여 차도 술도 여름이더라도 뜨겁게 하여 마신다고 하며, 유럽인이 차가운 것만 마셔 결석이나 요사병尿砂病에 걸리는 것과 달리, 건강하게 장생한다고 하는 점은 주목된다. 


그런데 중국의 끽다 풍습에 대해서는 리치 이전에 중국에 체재했던 가스파르 다 크루스(?-1570)도 <16세기 화남 사물지>에 기록하고 있다. 그가 본 끽다 풍습이란 "신분 있는 사람은 집을 방문하는 사람, 또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누구라도 화려한 쟁반 위에 올린, 1개 또는 사람 수의 자기에 차라고 부르는 미지근한 물을 담아서 바치는 것이 그들의 습관이다. 차는 약간 쓴맛이 있는 약초를 달여주는 것으로, 다소 붉은 빛을 띠고, 매우 약효가 좋으며, 그들은 이것을 늘 마셔 지인이든 아니든 가리지 않고 조금이라도 존중할 만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이 차로 대접한다."는 것이었다. 


리치는 또한 중국과 일본에 있는 차의 음용법에 대해서도 비교한다. 일본에서는 차의 잎을 가루로 갈아서 찻잔에넣어 거기에 뜨거운 물을 붓는 데 반하여, 중국에서는 그 잎을 용기에 넣고 거기에 뜨거운 물을 붓고 잎을 남기고마신다고 그 차이를 기술한다. 그들은 아직 차에 친숙해질 수는 없었지만, 중국과 일본이란 동양의 차에 대단히 흥미를 돋우었을 것이다. 


리치가 본 끽다의 시대는 명나라이다. 그 이전은 고급 또한 차는 고형으로 만든 것을 가루로 만들어 마셨는데, 명나라대에는 고형으로 만드는 제차법을 폐지했다. 리치가 기록한 엽차를 뜨거운 물에 담그어 잎을 남기고 마시는 방법은 포차泡茶라고 부른다. 그것은 일본에서 말하는 지금의 전차법에 유사한 것이기에, 이 명나라대의 포차는 이윽고 일본의 전차법 도입의 열쇠가 될 것이다. 


다만 명나라대의 회화 자료 안에는 맷돌이나 차 맷돌로 차를 가는 모습도 많이 묘사되어 있는 점으로부터(그림3), 또는 엽차를 사용해 가루로 만든다는 습관도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림3 명나라대의 차 맷돌.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 당인唐寅 '품차도品茶圖'





서양의 끽다 문화


앞에 기술한 대로 서양에서 차가 보급된 것은 17세기부터로, 애프터눈 티의 본고장 영국에서는 18세기 말에 드디어 차는 일상생활의 필수품이 되었다. 서양에서 차가 도입되었던 당초, 그것은 매우 고가이고 약효를 가진 것이란 의식은 중국, 일본과 공통된다. 중국에서는 육우를 기준으로 차가 지닌 속세를 초월한 신성성을 경애하여 기호품으로 삼고, 일본은 그 영향을 받아 차를 수용했다. 이에 반하여 서양, 특히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한 유럽인은 당초 동양의 신비라는 호기심에서 차에 흥미를 보이며 수용했다. 그러나 그들, 특히 영국에서는 의학적 논쟁과 차의 수입에 얽힌 사회적 경제 논쟁을 일으키고, 차를 둘러싼 찬반 양론을 되풀이한 끝에 드디어 서양의 문화로 끽다가 정착되었다는 경위는 다르다. 


동양, 곧 중국과 일본에서는 갈색을 띤 녹색의 액체에 그 산뜻한 향과 쓴맛 안의 달달함, 곧 감로甘露를 음미하며 마신다. 서양에서는 최초 그와 같은 녹차를 받아들였다. 차를 즐기는 식기도 중국에서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러나 서양, 특히 영국에서는 점점 우롱차를 좋아하게 되고, 더구나 우롱차를 완전발효시킨 홍차를 즐겼다. 홍차를 좋아한 이유는 홍차란 마실거리가 서양인의 식생활, 풍토에 적합한 맛과 향이며, 그때까지 익숙하게 마시던 커피, 코코아에 더 가까운 색조였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서양의 차 마시는 방법은 차에 설탕과 우유를 넣는 것이다. 차에 설탕과 우유를 넣는다는 발상은 서양인 특유의, 홍차이니까 그럴 것이다. 




마치며


동서의 끽다 문화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하게는 논하지 못하고 있지만, 차는 정치·경제·문화에서 동서에 다양한영향을 주었다.


일본인에게 '일상다반'이란 단어가 보여주듯이, 차는 쌀과 함께 하루하루 빠질 수 없는 먹을거리가 되었다. 그 한편에서 밀을 재료로 한 요리가 충실해지자 식문화의 너비도 넓어지고, 거기에도 차가 개재해 있었던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서양에서는 불과 200년 정도 사이에 서양 나름의 끽다 문화를 구축해 왔다. 밀크티는 그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서양과 동양 융합의 결정이기도 하다. 동서의 기호는 다르지만, 하나의 잎에서부터 제차법을 변화시킴에 따라 차는 다양화되어 유라시아 풍토에 뿌리를 내리고 대륙을 하나로 연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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