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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4





제3장

화전의 생업 주기와 뿌리작물 종류의 저장 체계

-파푸아뉴기니의 사례에서 보는 '농경 사회'의 다양성

호소야 아오이細谷葵









시작하며


이 장에서 사례연구로 다루는 파푸아뉴기니의 밀른베이Milne Bay주와 동東하이랜드의 사회는 뿌리작물을 중심으로 한 화전 경작을 영위하는 농경 사회인데, 수렵과 어로, 채집도 동시에 중요한 생업이며, 그들을 적절히 조합하여 나날의 식량을 얻고 있다. 이러한 뿌리작물 농경사회는 과거에는 그다지 농경사의 연구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것은 '농경만으로 생활'하지 않는 사회의 상태가 '전업의 농경사회'로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탓이라 말할 수 있다. 단계론적인 역사관 가운데 '수렵채집사회'와 '농경사회'의 연구 틈새에서 누락되어 버렸는데, 이와 같은 유형의 농경사회가 아닐까? 그러나 다각적인 자원이용의 일환으로 농경이 있다고 하는 상태는 사실 농경사회의 기본적인 모습임과 함께, 농경사회의 발전 가운데 한 유형이기도 하다. 생업 속에서 농경의 비율을 늘려 갔던 사회만이 농경사회가 아니라, 곧 농경사회에는 다양한 모습이 있다고 하는 것을 인식하는 데에 더하여, 본래 농경이란 어떠한 것인지를 이해하고 뿌리 깊은 '혁명'적 농경관에서 탈각하기 위해서도 화전과 뿌리작물 농경사회의 연구는 앞으로 중요성을 더해 갈 것이다. 


이 장에서는 그 관점을 가지고, 나날의 생업 주기와 저장 형태의 특징이란 문제에 중점을 두면서, 화전 농경을 포함한 다각적인 자원 이용을 행하는 파푸아뉴기니 농경사회에 대하여 논해 나아가고자 한다.





농경사 연구의 현상과 과제


'농경의 기원'에 관한 연구의 과거와 현상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그 배경이 되는 농경사 연구의 현상과, 그곳에서 어떤 새로운 관점이 요구되는지에 대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농경의 기원'은 세기를 넘어서 학식자, 연구자의 흥미를 모아 온 문제이다. 그 흥미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지 생각하면, '농경'이란 것을 시작함에 의하여 인간 사회가 크게 변화하는, 그것도 문명으로 발전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감각이, 자명한 이치처럼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겠다.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고고학자 고든 차일드(1892-1957)의 잘 알려진 '신석기 혁명'론(Childe 1981[1956])은 마르크스주의 사관의관점에 기반을 두고, 인간은 선사시대부터 단계적으로 진보해 왔다는 사고방식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농경의 개시는 목축의 개시나 토기와 직물의 발명과 함께 일어났던, '물건을 직접 만들어 내는' 단계로 혁신적으로 도약했다고 생각하여, '혁명'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그뒤 각국에서 조직적인 고고학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서, 토기의 제작과 농경의 기원은 필연적인 관련을 갖지 않는다는 등 사실관계로서 차일드의 이론이 성립하지 않는 점이 많이 판명되어 왔다. 그러나 그래도 농경의 개시가 인류사에서 어느 종의 혁명적인 사건이며, 그것을 계기로 인간 사회는 크게 발전했다고 하는 무의식의 개념은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기존의 것보다 적어도 오래된 재배식물의 유존체가 발견되면, '재배의 기원이 거슬러 올라갔다'고 신문 등에서 크게 다루는 것도 재배 활동이 존재했는지 아닌지로 그 사회의 평가, 발전 단계의 인식이 크게 바뀐다는 사고방식이 유포되어있는 표시일 것이다. 일본의 조몬시대에 대한 인식에서도, 이 시대는 수렵채집 단계이며 농경 단계가 아니기 때문에 식물 재배가 있을 리 없다는 반쪽짜리 믿음 같은 선입관이 석권하고 있던 시기가 오래 이어졌다. 이러한 선입관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조몬 농경론'이 나타난(藤森 1970) 터인데, 식물 이용의 실태가 여러 식물 유존체자료로부터 파악되어 온 현재까지도 조몬 시대에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은 '조몬 농경'이란 이름의 무언가 특이한 것처럼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최신의 식물고고학 연구의 성과는 이러한 '혁명'적 농경관에 반하여, 근본적인 다시 보기를 계속 강요하고 있다. '혁명'적 농경관에서는 재배기술을 받아들인 사회집단은 그것에 의하여 생업형태를 곧 크게 바꾼다는 인상이, 웬일인지 공유되고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건 없었다는 사실이 세계의 주요 곡물 가운데 두 가지인 밀과 쌀의 기원지 모두에서 지적되고 있다. 탄노丹野·윌콕스(Tanno&Willcox 2006)는 밀의 재배 기원지인 터키동남부 및 시리아 북부에 대하여, 밀의 재배 활동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재배형 밀이 태어나기까지 1000년 이상이나 걸렸다는 것을 식물 유존체 자료에 기반하여 논하고 있다. 그리고 재배화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던 이유의 하나로, 재배 활동이 시작되어도 야생 밀의 이용도 적절히 계속되었을 가능성을 들고 있다. 또한 풀러 외(Fuller rt al. 2009)는 쌀의 재배 기원지인 중국 장강 유역에 있는 절강성 전라산 유적의 자료 분석에 의하면, 쌀의 재배 활동이 곧바로 시작되는 기원전 4900년부터 4600년의 300년에 걸쳐서 식물 유존체의 전체에서 점하는쌀의 비율은 8%에서 24%로 완만한 증가밖에 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유존체의 태반을 점하는 것은 마름이나 도토리 등 야생의 식용식물이다. 이들의 연구 성과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재배 활동을 개시한 뒤에도 상당히 오랫동안 인간은 생업 기반이 수렵채집어로뿐이었던 시대가 계속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다각적인 자원 이용을 이어 왔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고고학 이외의 관련 분야에서도 최근 제시되고 있다(々木 2007, 佐藤 2008). 이 점에 대하여, 더욱 의론을 진행하고자 한다.




농경사회에서 '다각적인 자원 이용'


다각적인 자원 이용의 개념이라고 말하면, 일본의 선사 연구에서는 '조몬 달력'이란 사고방식이 있다(小林 1996)(그림3-1). 조몬 사람이 사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얼마나 잘 다양한 자원을 이용했는지를 도시한 것으로, 현재로서는 조몬시대의 생업을 이야기하는 데 빠질 수 없는 개념이라 받아들여져 여기저기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야요이 시대 등 확실히 농경을 받아들였다고 하는 사회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자원 이용에 관한 '달력'을 보는 건 거의 없다. 이것 자체가 농경을 받아들인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와 완전히 별개라는 '전제'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 '농경을 받아들인 사회의 자원 이용 달력'의 희한한 예로서 그림3-2(甲元 2004)가 있다. 두 가지 달력을 비교해 보면, 농경의 도입이 생업 형태의 모든 걸 바꾸는 필연성 등이 없는 것이 명백하다. '농경'은 말하자면, 다각적인 자원 이용의 일환으로 덧붙이는 것이라 말해도 좋다. 게다가 이 달력 안에 농경이 점하는 비율이 그뒤 자연히 늘어 가야 할 필연성도 발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각적인 자원 이용의 상태 그대로 잘 작동하는 사회라면, 그대로 역사를 거듭해 가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 상태라면, 만약 여러 가지 조건이 변하여 농경을 계속하는 것이 어려워진다면, 비교적 간단히 '농경이 없는 상태'로도 변할 수 있을 것이다. 한번 농경을 시작한 사회집단이 농경을 그만두고 수렵채집을 기반으로 한 생활을 하는 일은 마치 '역사 역행'적인 특이한 현상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농경이 단순히 다각적 자원 이용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매우 자연스런 일이다.



그림3-1 조몬 달력. 삽화 木村政司, 小林 1996, 111쪽



그림3-2 농경을 수반한 다각적 자원 달력. 甲元 2004, 167쪽




다만 실제의 역사에서는 대부분의 사회가 '농경'을 달력의 면적 대부분을 점하는 데까지 늘어나고, 그 결과로서 어느새 '농경이 없는 상태'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유형인 '농경사회'를 구축해 왔다. '농경'의 비율이 늘어난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일찍이 '농경이 기원한 이유'로서 의론되어 온, 환경 변화나 인구압 등은 물론 '농경'의 비율이 늘어난 이유로서 생각하는 쪽이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중요한 건 어떤 직접적 계기가 있었던 것으로 생업 달력 안에 '농경'의 비율을 증가시킨 것이 '필연'은 아닌 이상, 최종적인 '이유'는 모든 사회적 사정에 기여하는 것이었단 점이다. 재배는 본래 다른 여러 가지 자원 이용과 균형을 잡으면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없다. 만일 환경이나 인구 상황이 자원을 부족하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면, 물론 더 한층 잘 균형을 잡는 일을 고려할 것이다. 그러하면 농경 부분을 '부자연스럽게' 성장시키는 선택은 사회조직으로서의 무언가 목적성을 가지고 행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여기에서 '농경사'를 참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중요한 점을 두 가지 들 수 있다. 하나는, 왜 대부분의 사회에서 '농경'의 비율이 증가해 갔는지 하는 문제는 농경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느냐는 문제에서는 완전히 독립된 별개의 이야기로 고찰되어야 한다. 또 하나는, '농경의 비율이 증가해 갔던' 이유를 생각하기 위해서 과거의 환경 변화를 복원하거나 인구의 변동을 추측하거나 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들의 자료도 당시의 사회 사정의 문제와 맞추어 의론되지 않는 한 별로 의미는 없다.


이와 같은 새로운 관점에서 농경사의 연구를 진행해 가기 위해서는 농경 '이전' '이후'라는 선입관에 구애되지 않는 선사 생업 형태의 복원을 해 나아갈 필요가 있다. 곧, 농경을 받아들인 사회이기 때문이라고 하여 야생식물의 이용 등을 '부차적인 것'이라 경시하지는 않으며, 농경도 채집도 동렬에 서 있는 '자원 이용 달력'을 만들어 가는것이다. 앞에 나온 풀러 외(Fuller et al. 2009)에도 볼 수 있듯이, 특히 중국 등 농경 기원지에서의 초기 농경 시기의 연구에서는 그것이 요구되고 있다. '자원 이용 달력'이 올바로 복원되는 것에 의하여, 처음으로, 그뒤 왜 농경의 비율이 증가해 갔는지 하는 문제의 고찰로도 논의를 진행시킬 수 있다. 이 '농경을 받아들인 사회의 자원 이용 달력'을 복원해 가는 데에는 현재도 생업 주기의 안에서 비교적 '농경'의 비율을 늘리지 않고 다각적인 자원이용을 행하고 있는 사회의 생활 방식이나 특성을 관찰·분석하는 일이 큰 도움이 된다. 이 장의 주안점은 그곳에 있다.





파푸아뉴기니, 야밤yabam 섬의 생업과 화전

 

조사지에 대하여


우선은 필자가 와세대 대학 선사고고학 연구소 조사단의 일원으로 2005-2006년에 조사(高橋 외 2007, 2008)했던 파푸아뉴기니 밀른베이 주에 있는 야밤 섬에서의 생활과 화전 농사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그 생업 주기와 사회에 대하여 고찰하겠다.


파푸아뉴기니는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북쪽, 적도의 바로 남쪽에 위치하는, 뉴기니 섬의 동반부 및 주변의 섬들을 포함한 나라이다(그림3-3). 전체의 면적은 46만2천 평방미터, 인구는 577만 명(2004년 현재)을 센다(山口· 2006). 인구의 95%가 멜라네시아계인데, 지역 집단마다 문화적 독립성이 높고 언어도 800가지 이상 존재한다(Burke et al. 2005). 전반적으로 열대우림 기후이고, 12월부터 3월 무렵이 우기, 5월부터 10월 무렵이 건기이다(Burke et al. 2005). 다만 이 장에서 주요 대상으로 하는 동부의 밀른베이 주에서는 우기와 건기의 시기가 역전되어 있다(高橋 외 2007).


그림3-3 파푸아뉴기니의 위치




밀른베이 주는 알로타우를 주도로 하고, 뉴기니 본섬 동부의 밀른만을 낀 두 개의 반도와, 약 600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주이다(高橋 외 2007). 주민의 대부분은 화전 경작을 중심으로 한 자급자족의 생활을 영위하는데, 작물 중에서도 특히 얌이 중요시되며, 일반적으로 '얌 하우스'라 부르는 마루를 높게 쌓은 고상식 저장시설을 가진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야밤 섬은 밀른베이 주의 해안에 따라 주요 도시인 이스트 케이프에서 남동으로 약 9km 바다를 건넌 곳에 위치한, 지름 약 55미터의 찌그러진  사각형을 한 작은 섬이다(高橋 외 2007). 인구는 30-40명 정도인데, 섬 사이의 이동이 많기 때문에 일정하지 않다(高橋 외 2007).


조사진은 2005년 8월에 1주일, 2006년 8월에 2주일, 야밤 섬에 머물며 민족조사를 행했다. 필자는 특히 해당 지역에서 생업과 나날의 일정, 저장 형태 등에 초점을 두고서 청취 조사와 동행 조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필자의 2005년 조사에 대해서는 문과성 과학연구비 보조금, 장려연구(조사번호 17904030) <일본 식물고고학의 기초 만들기 -조몬·야요이 문화의 고고식물 자료 집상과 민족조사를 중심으로>에 의하여 행했다.




야밤 섬의 생업


야밤 섬에서 어느 부부의 전형적인 하루 생활은, 청취 조사에 의하면 아래와 같다.


아내

오전     집 앞 비질→우물에서 물긷기→아침 밥짓기→가족과 함께 아침 식사→화전에서 수확, 김매기, 씨뿌리기→점심 밥짓기

오후     점심 이후, 휴식→저녁 밥짓기


남편

오전     집 앞 비질→땔감, 코코넛 모으기→코코넛 과육을 갈아서 잘게 만들기, 불 피우기 등, 아침 밥짓기의 준비→카누로 물고기 잡기→아침 식사→화전에서 나무를 베는 등의 일

오후     점심 식사→(필요가 있는 경우) 집을 짓는 등의 일→ 저녁 식사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화전(그림3-4)은 생업의 중심으로서, 섬사람이 기본적으로 매일 나가는 장소이다. 이 청취 사정에서는 아내와 남편이 함께 오전 안에 화전에 간다고 이야기하는데, 실제로 동행 조사를 행해 보면 화전에 가는 시간은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고, 적당한 작업을 하는 듯하다.


그림3-4 비탈면에 만든 화전(야밤 섬)




화전의 역할은 말하자면 슈퍼마켓과 식량창고를 겸하는 것이라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화전에는 늘, 뿌리작물 종류를 중심으로 한 작물이 10종류 정도 심어져 있다(표3-1). 한 집의 주부는 매일 화전에 가서, 그날 가족이 먹을분량의 작물을 이것저것 선택해 수확한다. 그것과 동시에 수확물의 일부를 '씨앗'으로 밭에 심는다. 영양번식이 가능한 뿌리작물 종류가 작물의 대부분이기 때문에 쓰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야밤 섬의 화전 농경에서는 수확과 파종이 동시에 진행되어, 그날마다 행하는 것이 최대의 특징이다. 밭 그것이 식량의 저장 장소와 같기 때문에, 하루분 이상의 작물을 수확하여 어딘가에 저장해 놓는 일은 없다. 씨앗으로 보관하지도 않는다. 나중에 상세히 기술할 얌에 대해서만, 파종과 수확의 시기가 1년에 한 번씩이라 결정되어 있고, '1년'이란 주기로 재배와 저장을 하고 있지만 일상적으로 소비되는 식량에 대해서는 이 '1일' 주기의 농경이 기본이 된다. 이러한 1년 동안 이용된 화전은 휴경하고, 새로운 화전을 만들어 재차 '1일' 주기의 수확과 파종이 시작된다.



장소

소유주

작물

야밤 섬

M1

얌 2종, 파인애플, 바나나, 타로, 사탕수수, 콩, 닥풀

B

바나나, 닥풀, [네타과], 고추, 호박, 타로 3종, 파파야, 얌 

S

고구마, 바나나, 타피오카, 사탕수수, 닥풀, 타로, 얌

M2

양배추, 땅콩, 바나나, 닥풀, 타피오카, 감자, 타로, 파인애플, 얌

N

바나나, 타로, 파파야, 파인애플, 닥풀, 고추, 양배추, 얌

D

얌, 바나나, 타로, 파파야, 파인애플, 닥풀, 호박, 사탕수수

신부

얌, 바나나, 타피오카, 사탕수수, 닥풀, 감자, 호박

파히레레 섬

W

타로콩콩, 사탕수수, 타피오카, 파파야, 얌, 토마토, 아스파라거스, 게마히, 콩, 파인애플, 옥수수

R

자이언트 타로, 타피오카, 사탕수수, 파파야, 바나나, 닥풀, 게마히, 감자, 얌, 파인애플

B

닥풀, 타피오카, 바나나, 타로, 자이언트 타로, 파인애플, 고구마, 얌

표3-1 화전에서 재배되는 작물




'1일' 주기의 유형은 생업활동의 전체에 공통이다. 야밤 섬 사람들의 중요한 단백질원은 어패류인데, 그 정기적인 공급원은 주부, 아이들이 날마다 행하는 소규모 고기잡이이다. 야밤 섬은 산호초로 둘러싸여 주위의 바다는 멀리까지 물이 얕기 때문에, 특히 정오가 조금 지난 무렵의 썰물 시간에는 어느 정도의 난바다까지 걸어서 들어간다. 주부와 아이들은 그 시간을 노려서 바다에 들어가, 낚시줄에 바늘과 미끼(바닷가에 생식하는 소형 육산패陸産貝 종류)만 매다는 간단한 도구를 사용해, 던질낚시를 한다(그림3-5). 그날 먹을 분량인 몇 마리를 낚으면, 고기잡이는 끝난다. 문어나 대왕조개 등도 바닷가 근처에서 간단히 포획할 수 있고, 날에 따라서 이용한다. 남성이 가끔 반쯤 여가로 행하는 고기잡이에서는, 카누로 난바다에 나가서 작살을 가지고 바닷속에 잠수하는 등 조금 커지고, 잡는 물고기의 양도 늘어난다. 그래도 기껏해야 이틀 먹을 만한 정도의 양이다. 하루에 먹을 수 없는 분량은 불 위에서 훈증해 보존하는데, 이튿날에 먹어 버리지 않으면 부패해 버린다고 한다. 곧, 어로활동도 또한 '1일' 단위를 기본으로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3-5 던질낚시 도구와 어획물(야밤 섬)



화전의 작물에 더하여 야생의 식물도 일상적으로 이용되는데, 이것도 그날마다 적당히 채집된다. 야밤 섬의 식사에서 기본은 뿌리작물 종류, 어개류, 잎채소이며, 이들을 각각 코코넛 밀크로 끓여, 소금이나 재배하고 있는 고추등으로 조미한다. 잎채소로는 화전에서 재배하는 '닥풀'이란 작물이 쓰이거나, 산에 자생하는 '네타과'라 부르는 나무(학명 Gnetum gnemon L.)의 어린잎이나 꽃차례를 사용하거나 하고, 재배·야생의 구별 없이 날마다 골라서이용된다. 날마다 하는 요리에서 빠지지 않는 코코넛을 비롯한 과실류도 필요에 따라 채집된다. '오카리 넛츠'라고 부르는 야생의 나무 열매는 언제나 과자 대신에 캐서는 먹고 있다. 


이렇게 하여 밭, 바다, 산에서 그날 그날 채집된 식재료가, 식탁을 형성하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재배, 어로, 채집이란 서로 다른 생업활동이 매우 자연스럽게 녹아서 하나가 되어 있다. 이것은 각 활동의 비중을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마음대로 바꾼다는 것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날씨가 나빠서 고기잡이를 할 수 없는 날은 물고기를 먹지 않는 만큼의 식량을 늘리거나, 밭의 작물 수확이 시원치 않을 때는 산에서 채집하는 것을 늘리거나 하는 대응을 할 수 있겠다. 또한, 이 섬에는 전기가 없기 때문에 요리는 돌을 늘어세운 간단한 화로에서 불을 붙여서 하며, 거기에서 태우는 땔감도 주워다 말린 코코넛의 껍질, 나뭇가지 등 주거와 화전의 주변에서 모을 수 있는 것이다. 조리도구도 요즘은 '일찍 익힌다'고 하는 이유로 금속제의 냄비가 쓰이고 있지만, 예전에는 여성들이 직접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여 그 기술은 지금도 계속 내려오고 있다(高橋 외 2007, 2008). 기본적으로 이입품 없이 식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자급자족의 생활 태도를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화전 만들기


야밤 섬의 복합적인 생업 가운데 화전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 것일까? 청취 조사, 동행 조사를 통하여 조사해 보았다. 


화전은 기본적으로 한 세대가 하나씩 소유한다. 아이가 결혼하여 독립하면, 먼저 자신의 밭을 준비하게 된다. 화전의 위치는 사용할 수 있는 토지 중에서 흙의 상태가 좋은 장소를 골라서 정한다. 산비탈인 일이 많다. 크기는 심을 수 있는 '씨앗'의 양에 따라서 결정한다. 화전은 1년마다 장소를 이동하고, 대략 3-4년 주기로 원래의 장소를 다시 사용할 수 있다. 


화전 만들기는 풀베기부터 시작한다. 남녀가 협력하여 행하고, 베어낸 풀은 그 장소에서 2주일 정도 건조시킨다.풀이 충분히 마른 곳에서 불놓기를 행한다. 불놓기는 하루만 하고, 불을 태우는 실질 시간은 30분에서 1시간 정도이다. 불놓기는 밭으로 만드는 부분만 잘 타도록 하는데, 실패하여 상당히 불이 번져 버린 예도 보았다. 밭터에자라고 있는 나무는 기본적으로 그대로 남긴다. 그러나 말라 죽어서 쓰지 못하는 나무의 경우는 며칠 걸려서 서 있는 채로 태워 버리기도 한다. 불놓기 다음은 타버린 등의 폐기물을 제거하는 데 2-3일 걸린다. 흙의 표면이 깔끔해지면, 통나무를 비탈에 대해 가로로 늘어 놓는다. 이것은 흙이 쓸려 내려가지 않도록 막는 목적인데, 가족의 각 구성원이 지닌 구획을 표시하는 역할을 겸하는 경우도 있을 것 같다.


밭의 준비가 마무리되면, 우선은 남성이 흙을 갈아엎는다. 이어서 여성이 흙속에 남은 뿌리를 제거하면, 파종을 행한다. 파종은 여성의 일인데, 타로를 심는 경우만 남성이 심지 않으면 잘 자라지 않는다는 전승이 있다. 파종에는 구멍을 파는 막대기를 쓴다(그림3-6). 가족 이외의 혈연자 등이 작업을 도운 경우에는 보답으로 작물을 나누어준다.


그림3-6 구멍 뚫는 막대를 사용한 파종(야밤 섬)




재배하는 식물은 10종류 안팎으로, 소유주가 그때마다 판단하여 결정한다. 따라서 내용은 각기 다르지만,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의 먹을거리로 빠지지 않는 얌에 대해서는 어느 세대나 반드시 재배한다. 야밤 섬의 남쪽 약 2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하는 같은 규모의 작은 섬 파히레레 섬(高橋 외 2007)에서도 화전 작물에 대하여 조사했다(표3-1). 야밤 섬과 파히레레 섬은 친족 관계로도 깊은 관련을 가지며, 주민도 빈번히 왕래하고 있다. 파히레레 섬에서는 야밤 섬보다 흙이 양질인 듯하여 밭도 더 넓고, 작물의 종류도 많다. 야밤 섬에서는 수분 부족으로 농사가 어려운 타로 등도 많이 농사짓고 있다. 다만, 얌이 빠지지 않는 점과 생업 형태, 화전 관련된 작업 방식 등은 야밤 섬과 마찬가지이다. 


작물 중에서 가장 내성이 있는 것은 타피오카 같으며, 휴경하고 있는 밭이나 폐기된 밭에서도 자연적으로 자라고있는 걸 여러 번 발견했다. 야밤 섬과 파히레레 섬의 주민에 의하면, 얌은 충분한 양분이 있는 흙이 아니면 잘 자라지 않지만, 타피오카는 기후가 안 좋아 다른 작물이 자라지 않는 때에도 수확할 수 있다고 하여, 구황식의 역할을 하기도 한단다. 주민들에게 작물 중에서도 '중요한 먹을거리'는 무언인지 들어본 바, 야밤 섬에서는 의례에서 먹는 얌이라는 답이 많았는데, 파히레레 섬에서는 '어떤 때라도 수확할 수 있는' 타피오카라는 답이 많았다. 타피오카 이외에도 호박 등이 휴경하고 있는 밭에서 계속 자라고 있는 걸 본 적이 있었는데, 그들도 적당히 식용으로 쓰는 등, 유연하게 밭을 이용하고 있는 듯하다. 




야밤 섬의 토지 소유 관념과 생업 주기


또한, 화전 만들기의 기반이 되는 토지 이용의 체게에 대하여 청취를 중심으로 조사했다.


야밤 섬에서는 토지를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주민은 4명뿐이다. 야밤 섬의 토지 모두가 기본적으로 이 4명에게 속한다. 이 4명은 최초로 야밤 섬에 이주해 온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세 딸의 직계 자손 및 2세대 전에 이스트 케이프에서 표착하여 섬사람의 허가를 얻어 정착한 사람의 자손이라 구전되고 있다. 토지 소유자는 이 네 가계에 고정되어 있으며, 매매 등으로 변화하는 일은 없는 듯하다. 밀른베이 주는 모계사회이기에 딸과 자매 등의 여성, 또는 여계의 조카가 토지를 상속한다. 예외적으로 지주 가운데 한 사람은 본인은 여성이지만 지주의 가계에 같은핏줄인 건 부친이라는 남계의 혈연관계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녀가 노인이고 가까운 친척을 갖지 않기 때문에 섬사람의 재량으로 변칙적으로 허가된 것이며, 그다지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는 이야기라고 한다.다만 그녀의 사후는 그 모친의 출신지인 이스트 케이프에 매장되어야 한다. 야밤 섬의 토지는 그녀의 친척인 여성에게 상속된다. 만약 그녀가 야밤 섬에 매장되기를 강하게 바라거나, 기후의 관계로 이스트 케이프로 유체를 옮기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야밤 섬에 매장한 경우는 그 보답으로 토지는 야밤 섬의 다른 지주의 것이 된다고 한다. 


지주는 아닌 사람이 토지를 사용하는 권리로는 토지 영세사용권 같은 것이 있다. 어느 여성은 부친이 야밤 섬 출신이라는 남계의 혈연관계로 섬에 살고 있으며 지주도 아니지만, 부친이 이미 '보상(compensation)'을 해결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자손들이 대대로 그 토지에 계속 살 수 있다고 한다. 다만 그녀가 매장될 때는 자기 모친의 출신지인 이스트 케이프에 매장되어야 하는데, 이것도 지주와의 교섭에 따라 바뀔 수 있다. 그리고, '보상'에는 5만-6만 키나, 경우에 따라서는 10만 키나 이상의 현금 및 전통적인 음식에 의한 지불이 필요하다. 그 액수는 토지 사정사가 결정한다.


화전으로 토지를 사용하는 건 이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토지의 권리를 가지지 않아도 지주 누군가와 교섭하여 일정한 구획을 사용해도 좋다고 허가를 받으면, 화전을 만들 수 있다. 특히 지불도 필요없다. 그 대신 이 허가는 유동적으로, 지주의 사정으로 급히 토지사용을 중단시키는 일도 있다. 또, 가장 양질의 토지는 지주가 사용하기에, 그 이외의 부분에서 장소를 골라야 한다. 사용권은 본인 뿐이며 상속도 할 수 없고, 따라서 자손에게 넘겨주는 것은 화전 만들기의 노하우와 씨앗(뿌리작물의 씨앗, 바나나의 접목 등) 뿐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야밤 섬의 토지 소유에 대해서는, 매장되는 장소가 어디가 되는지 하는 점이 가장 큰 문제인 듯하며, 화전이란 생산 단위에는 별로 토지재산으로서의 중요성을 두지 않는다. 논과 밭을 경영하는 대규모 단작 사회와는 크게 다른 토지 관념이라 말할 수 있겠다. 토지 소유는 좋은 토지를 화전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으로 이어지지만, 그것은 토지를 가진 특권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 자체가 사회적 지위나 신분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야밤 섬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심을 수 있는 작물이나 그 효과적 방법에 대한 지식이다. 심을 수 있는 장소인 화전의 위치는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 더욱이 농경이 생업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토지와 생업의 고정화되지 않는 관계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화전이란 유연성이 높은 농경 형태, 그리고 그것을 핵심으로 하여 다각적으로 자원을 이용하는 '1일' 기반의 생활 주기가 토지의 사용방법, 상속의 방식 같은  사회제도면에도 반영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화전 생업 주기 속의 '1일' 기반의 자원 이용 형태에서는 작물이든 어획이든 '저장'이 행해지지 않는 점이 특징적이었다. 그러나 그 한편에서 얌에 대해서만은 야밤 섬만이 아니라 밀른베이 주의 여러 섬을 비롯해 몇몇 지역에서 '얌 하우스'라는 저장시설이 만들어져 있다. 얌 하우스에 하는 저장은 '1일' 기반의 화전 생업 주기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는 것일까? 다음 절에서는 이 문제를 통하여 화전 생업 주기의 특성을 더욱 생각해 보고자 한다.





뿌리작물 종류의 저장 체계 -얌 하우스의 역할


얌 하우스에 대하여


'얌 하우스'란 그 이름과 같이 얌을 넣어 놓기 위한 집, 곧 독립된 저장시설이다. 고상식으로, 대부분은 맞배지붕을 가진 작은 오두막 형태를 하고 있다(그림3-7). 파푸아뉴기니에서는 밀른베이 주의 섬들에서 특히 일반적인 시설이며, 지역 문화의 특징으로 이야기되고 있는데, 다른 지역에서도 볼 수 있다.



그림3-7 얌 하우스(야밤 섬)




얌 하우스에는 반드시 얌만 수납한다. '1일' 기반의 생업이 영위되는 화전 생업 주기의 생활 속에서 얌은 유일하게 '1년' 기반으로 재배·수확되는 작물이다. 필자가 조사한 선에서는 얌의 파종, 수확의 시기는 지역에 따라서 다르지만, 각각이 1년에 1회의 정해진 시기에 행해진다는 유형 자체는 어디에서나 공통되었다. 단순히 생각하면,기본적으로 작물을 저장하지 않는 '1일' 기반의 생활에서, 얌만이 '1년' 기반의 주기에 놓여 있기 때문에, 대규모단작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저장'이 행해지는 것이라고 해석하기 쉽다. 그렇지 않으면, 역시 '1일' 기반의 사회이기에 독특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 절에서는 몇몇 얌 하우스를 지닌 지역의 사례로부터 이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작물 중에서도 얌을 중시하고, 얌 하우스를 가진 문화라고 말하면 밀른베이 주가 대표적이다. 이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행하고 있던 독특한 형태를 지닌 교역인 '쿨라 교역'(말리노프스키 1980[1922])에 관련된 교환 물자로도 얌이 등장한다(後藤 2002). 그중에서도 트로브리안드 제도의 키리위나 섬에 대해서는, 파푸아뉴기니의 다른 지역에는 존재하지 않는 '파라마운트 치프Paramount chief'라는 권력자가 존재하는데, 대량의 얌을 수확하여 얌 하우스에 수납하는 '얌 축제'가 그 권력의 표상이 되고 있는 점으로부터, 얌 하우스에 관련하여 이 땅에서 대부분의인류학적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淺川 1991, Wilson 1988 등). 그 때문에 일반적으로, 키리위나 섬의 사례가 얌하우스의 대명사처럼 받아드려지는 경향이 있다. 거기에서 얌 하우스를 대규모 단작 사회의 저장시설과 같은 예라고 생각해, 나날의 식량을 보증하는 시설로서 그 풍요로움이 권력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각지의 얌 하우스 사례를 보면, 그 모습은 지역에 따라서 여러 가지이며, 키리위나 섬의 사례는 오히려 특수한 한 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는 굳이 키리위나 섬 이외의 얌 하우스 사례를 중심으로 비교검토해 보는 것으로, 저정시설이란 본래의 얌 하우스의 의미를 검토하고자 한다.




야밤 섬·파히레레 섬의 얌 하우스


2005년 야밤 섬 조사 및 2006년 야밤 섬과 파히레레 섬 조사에서는 얌 하우스의 이용 방식에 관한 여러 점에 대해서도 조사를 행했다. 


두 섬이라도 얌 하우스는 맞배지붕의 고상식 건물이다. 마루 아래의 공간은 토기용 흙 등이 두기도 하는데, 원칙적으로는 통풍을 좋게 하기 위하여 물건은 두지 않는 곳이었다. 얌밭의 소유에 따라서 만들기 때문에, 대략 한 세대에 한 채를 소유한다. 밭의 소유에 수반한 것이기 때문에, 섬사람의 친족으로 섬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섬 안에얌밭은 소유하고 있어서 얌 하우스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예도 야밤 섬에 3채 있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파종과수확의 시기에만 야밤 섬으로 온다. 제초 등 밭의 관리는 섬에 사는 친족이 행한다.


야밤 섬에서는 2005년 조사에서 사용되고 있는 얌 하우스 6채와 폐기되어 있는 1채를 확인했다. 2006년 조사할 때에는 사용되고 있는 것이 5채로 줄었다. 그 이유는 2005년에는 야밤 섬 교회에 부임 목사가 없었기 때문에, 파히레레 섬에서 교회의 사무장 부부가 파견되어 와 야밤 섬에 살아, 얌 하우스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2006년에는 목사 부부가 왔기 때문에 사무장 부부는 파히레레 섬으로 돌아가고, 얌 하우스도 흔적 없이 정리되었기때문이다. 새롭게 부임한 목사 부부는 아직 얌 하우스를 만들지 않았다. 주거, 부엌의 건물은 그대로 사무장 부부에게서 목사 부부에게 인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얌 하우스는 인계되지 않았던 점에서 일시적인 건조물로 취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얌 하우스의 크기는 소유하는 얌밭의 크기 및 수확량에 대응한다. 건조는 기본적으로 그 세대의 남성이 한다. 한 채 만드는 데에 1-2주일 걸린다고 한다. 건축재에 대하여 특별히 정해진 바는 없고, 산속에서 입수할 수 있는 목재를 적당히 사용한다. 지붕을 이는 재료는 코코넛 또는 사고야자의 잎이다. 코코넛 잎으로 이은 지붕은 1년 정도밖에 견디지 못하지만, 사고야자의 잎이라면 4-5년이나 견딘다고 한다. 그러나 섬 안에는 사고야자가 생육하지 않고, 이스트 케이프에서 가져오는 수고가 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코코넛 잎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몇 채 있었다. 지붕이 못 쓰게 되면 지붕을 다시 이는 등은 하지 않고, 얌 하우스 그것을 폐기해 버린다. 앞에 기술한 야밤 섬을 떠난 교회 사무장 부부는 얌 하우스를 완전히 정리하고 떠났는데, 그대로 방치하여 삭게 하는 예도 많은 듯하다.


얌 하우스를 만드는 위치는 주거의 근처, 또는 산속의 밭 근처라는 두 유형이 있다. 대부분은 주거 근처에 세우며, 밭 근처에 세운 것은 야밤 섬과 파히레레 섬에서 각 1채씩 뿐이었다. 그러나 청취 조사를 해보면, 주거 근처에 얌 하우스를 가진 사람들이라도 사실은 밭 근처에 세우고 싶었다고 하는 의견이 많다. 얌의 운반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거 근처에 세운 것은 얌의 도난을 우려하기 때문이라 한다. 


또한, 주거 근처에 세운 얌 하우스는 대부분이 길에서 보아 침소나 부엌의 건물에 가려지는 듯한 위치에 놓여 있다. 그 이유는 얌 하우스를 남이 볼 수 있게 하면, 얌밭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으로 시샘을 받아 주술을 걸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얌 하우스에 넣는 얌은 용도별로 구분한다. 큰 것은 제사용, 작은 것은 씨앗용이고, 그 중간 것이나 상처가 있는 건 일상 식용이다. 식용인 것은 수확한 뒤 2-4개월이면 다 먹어 버린다. 곧 저장 대상으로서 가장 오래 보관되어있는 건 씨앗용과 제사가 있을 때를 대비하여 두는 얌 뿐인 것이다.


야밤 섬과 파히레레 섬의 사례를 보면, 얌 하우스는 저장시설이지만, 대규모 단작 사회에서 일반적인 '곳간'의 인상과는 상당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큰 차이는 대규모 단작 사회에서는 나날의 식량을 보관하고, 보증하기위하여 저장시설이 존재하지만, 야밤 섬과 파히레레 섬의 얌 하우스에는 그 역할이 매우 희박하다. 저장되는 주체는 씨앗과 제사용 얌의 비축이며, 일생생활 속에서 정기적으로 저장물을 꺼내 먹는다는 생활 유형은 아니다. 야밤 섬에서 살고 있지 않아도 얌밭만 소유하기에 얌 하우스를 소유한다는 사람들의 사례가 있다거나, 본래는 얌하우스를 밭 근처에 짓고 싶다고 하는 것이 사람들 대부분의 의지라는 등 얌 하우스가 오히려 주거보다 밭에 수반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것이 일상생활의 일부를 이루는 저장시설이 아니라는 점을 반영하고 있다. 항상적인 건조물로서 만들지 않지만, 화전 그것과 똑같은 일시성, 유연성의 개념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얌 하우스가 지닌 저장시설이란 특성이 화전 생업 주기의 사회에 공통되는 것인지, 더욱 시야를 넓혀서 밀른베이 주 섬들의 사례를 보고자 한다.  




밀른베이 주의 얌 하우스


이미 언급했듯이, 밀른베이 주에는 600개 이상의 섬이 포함된다. 필자는 2008년 2월에 약 2주일 동안, 과학연구비 보조금, 젊은 연구 스타트업(과제번호 19820059) <일본 열도 선사 사회의 생업 형태 재고 -민족지 조사에의한 식물고고학 연구의 기반 형성을 위하여>에 의해, 파푸아뉴기니 대학, 파푸아뉴기니 국립박물관의 연구자들의 협력을 얻어 밀른베이 주의 여러 섬들에서 얌 하우스에 대하여 민족조사를 행했다. 조사 대상은 누아카타 섬, 노르만비 섬, 도부 섬이다. 이들 섬들에서도 얌이 사회적으로 중요시되어, 일반적으로 얌 하우스를 소유한다.


누아카타 섬은 야밤 섬의 동쪽 약 7.5킬로미터의 장소에 위치하는 지름 약 5킬로미터의 섬이다. 노르만비 섬은 길이 약 70킬로미터의 큰 섬으로, 누아카타 섬의 북쪽 약 17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이 두 섬은 야밤 섬, 파히레레 섬과의 교류가 비교적 빈번하고, 야밤 섬 노인의 이야기로는 두 섬에 토기를 이출하고 보답으로 얌을 얻었던 일도 있다고 한다. 도부 섬은 노르만비 섬의 북단 근처 3킬로미터 미만 떨어진 위치에 있다. 지름 약 3킬로미터로 작은 섬이지만, 사실은 이 섬을 중심으로 한 도부 사람들의 지구는 쿨라 교역의 중추였다고도 이야기되는 장소로서, 말리노프스키(1980[1922])에 의하면 "쿨라의 연계 안에서 가장 중요한 고리의 하나를 이루고 …… 교역, 산업, 그리고 전반적인 문화적 영향력의 중심지"(107-108쪽)이다. 인구도 밀집하고, 역시 쿨라 교역의 중추로서 알려진 키리위나 섬보다도 예전에는 사회적으로 상위에 있었다고 한다(말리노프스키 1980[1922]). 이들 세 섬에서 얌 하우스에 관련된 청취 조사를 행했다. 노르만비 섬은 크기 때문에 장소에 따라서 관습 등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남쪽의 부나마 마을 및 서쪽의 세와 에디 마을 두 곳에서 조사했다. 또한 후자에는 토지의권력자인 '빅맨'이 있어, 그 본인에게서 청취를 행했다. 이 조사의 결과, 야밤 섬이나 파히레레 섬과의 공통점, 상이점에 대하여 흥미로운 유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야밤 섬, 파히레레 섬과 이 세 섬 사이에 공통되는 것은 얌 하우스 그것의 성격이다. 첫째로, 얌 하우스가 수명이 짧은, 일시적인 시설로서 만들어지는 점이다. 도부 섬에서 행한 청취에 의하면, 재료에 따르지만 얌 하우스의 수명은 대략 1-2년이고, 길어도 10년이라고 한다. 형상은 야밤 섬과 파히레레 섬의 것과 똑같고, 맞배지붕의 고상식 건조물이다. 둘째로, 얌 하우스는 역시 기본적으로 타인의 눈에서 숨기는 듯한 위치에 지어진다.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 건 질투를 받아 주술을 걸어 생명을 단축시키는 일을 피하고자 함이란 이유를 드는 것도 공통된다. 다만 세우는 장소는 미묘하게 다르다(표3-2). 누아카타 섬에서는 야밤 섬에 많았던 것처럼, 주거의 배후에해당하는 위치였다ㅣ. 도부 섬은 그 변형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마을의 배후에 있는 숲속에 각 사람의 얌하우스가 여기저기 세워져 있었다. 한편, 노르만비 섬 부나마 마을에서는 오로지 밭 근처에 세운다고 한다. 같은 섬 세와 에디 마을의 빅맨 집에서는 씨앗용 얌 하우스는 밭 근처, 수확물을 넣는 얌 하우스는 주거의 뒤라는 구별을 하고 있었다.


장소

얌의 구분

얌을 먹는 시기

얌 하우스 위치

매일 먹는 것

누아카타 섬

식용, 제사용

수확 때에, 떨어진 것만 먹음

집 뒤

타피오카

노르만비 섬(부나마 마을)

남과 나누어 먹기 좋은 것,가족용, 제사용 등

수확철만

밭 근처에만

타피오카

고구마

노르만비 섬(세와 에디 마을, 빅맨 집)

제사용, 씨앗용

매일 먹음

집 뒤(식용)

밭 근처(씨앗용)

얌, 바나나, 고구마, 타피오카, 호박 등

도부 섬

일상식, 손님 및 제사용, 씨앗용

매일 빠짐없이 식탁에 있어야 함

마을 배후의 숲속

주거에서 떨어짐

밭의 근처에 만드는 경우도있음

얌, 고구마, 

타피오카, 바나나

표3-2 밀른베이 주 세 섬에서 얌을 둘러싼 습관




한편, 안에 넣는 얌의 취급과 이용 방식에 관한 것에는, 장소마다 차이가 보인다(표3-2). 수확한 얌을 제사용과 일상 식용, 그리고 씨앗으로 구분한다는 것은 공통된다. 그러나 구분을 누가 하느냐에 대해서는, 예를 들면 누아카타 섬과 도부 섬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전자에서는 남성이 주가 되어 하고 여성은 씨앗만 관리하지만, 얌 하우스에 접근하는 건 남녀 함께 할 수 있다. 그러나 후자에서는 용도의 구분부터 얌 하우스의 관리까지 완전히 여성만의 일이며, 남성이 얌 하우스에 접촉하는 일은 허락되지 않는다. 아내가 숙박할 예정으로 떠나거나 하면, 그동안 남편이나 아이는 얌을 먹지 못하고 참아야 한다고 한다. 말리노프스키(1980[1922])에 의하면, 도부 섬에서는 여성이 높은 지위를 점하고, 주술 등의 특권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관습이 현재도 살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얌의 먹을거리로서의 지위에서도 차이가 있다. 누아카타 섬이나 노르만비 섬 부나마 마을에서는 얌을 평소의 식사로 먹는 것은 수확의 시기 즈음뿐으로 일상식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것은 야밤 섬, 파히레레 섬과 마찬가지이다. 누아카타 섬에 이르러서는 일상식으로는 수확할 때 넘쳐흘러 떨어진 얌만 먹는다고 한다. 그러나 노르만비 섬 세와 에디 마을의 빅맨 집과 도부 섬에서는 비록 단 한 조각이라도 날마다 식탁에 반드시 얌이 있어야 한다. 도부 섬에서는 1년 가운데 저장된 얌이 점점 줄어들어 소량밖에 먹을 수 없게 되는 시기를 '기아 시기(starvation period)'라고 부른다. 다른 작물이 아무리 풍부하더라도 '기아'이다. 얌을 충분히 갖지 못한 가정은 '먹을거리가 없는 집'이라 업신여겨진다고도 들었다. 앞에 기술했듯이 도부 섬에서 얌 하우스의 관리는 여성의 일이기에, 얌을 1년 동안 먹을 수 있도록 견딜 수 있는지 어떤지로 그 여성이 지혜로운지 아닌지 결정된다고 한다.


밀른베이 주 세 섬의 사례를 보면, 일시적인 건조물인 점 등 얌 하우스 그것의 성질은 공통되는데, 나날의 식량을보관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 아닌지 하는 저장시설로서의 성질에 대해서는 고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곧, 도부 섬 및 노르만비 섬의 빅맨 집에서는 저장된 얌을 1년 동안 계속 먹는 일이 매우 중요시되고 있다. 대규모 단작 사회의 저장과 가까운 감각이라 말해도 좋다. 하지만 한편으로, 벼농사 등의 대규모 단작 사회에서는 저장 대상으로 한정된 종류의 작물 이외에는 사실상 '주식'이 아니지만, 도부 섬과 빅맨 집의 사례에서는 얌 이외의 다종의 화전 작물 외에 다양한 자원이 이용되는 생업의 방식은 다른 밀른베이 주의 사례와 똑같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얌을 매일 먹는 일은 '필수'가 아니라는 사실이 있다. 도부 섬에서 얌의 재고가 줄어드는 시기를 '기아기'라고 부르지만, 이는비유적인 표현이며 실제로 먹을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 여기에서 도부 섬은 쿨라 교역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섬인 점, 또 빅맨도 사회적 지위가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이 매일 먹는 얌은 오히려 일종의 신분을 나타내는 음식이라 파악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곧 다른 섬들에서 얌 하우스의 주요한 내용물이 되고 있는 제사용 재고를 매일 먹고 있는 것이라 말해도 좋으며, 대규모 단작 사회의 식량 저장과는 언뜻 비슷하나 다른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밀른베이 주 섬들의 사례를 정리하면, '1일' 기반의 화전 생업 주기에서 얌 하우스라는 저장시설은 존재하긴 하지만 저장 식량의 이용이 나날의 생업 주기에 필수적인 일부로서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기본 유형은 공통된다. 그것은 얌 하우스가 일시적인 건조물인 점, 주거보다 밭과의 연계가 강한 점이라는 일관된 유형에 반영되어 있다. 얌 하우스에서의 저장은 오히려 밭에서 하는 재배 활동에 수반된 것이다. 그것과 함께 사회적 수요에 응하기 위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사회적 수요의 정도 차이에 따라서 일상생활 속에서 얌 하우스와의 관계 방식에 차이가 발생하며, 생업의 일환으로서의 물리적인 수요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1일' 기반의 화전 생업 주기의 사회에서 독자적으로 완성된 저장 문화라고 말해도 좋으며, 대규모 단작 사회의 저장 문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체계로 생각할 만하다. 이 점에 대하여 고찰을 깊게 해야 하며, 밀른베이 주 이외의 얌하우스 사례도 보고자 한다.




동하이랜드의 얌 하우스


파푸아뉴기니 본섬의 3000미터 급의 고산이 동서로 이어진 지역은 '하이랜드 지방'이라 부른다. 그 동부에 위치한 코코다 계곡 주변의 지역에 대하여 2008년 7월에 1개월의 조사를 행했다. 종합지구환경학연구소 <농업이 환경을 파괴할 때> 프로젝트 연구 활동의 일환이며 주체는 고고학 조사였는데, 필자 외 몇 명은 인근 마을들에서 청취 조사·동행 조사에 의한 민족조사도 실시했다. 


이들 마을에서는 산간부이기에 단백질원은 밀른베이 주처럼 어개류 중심이 아니라, 수럽으로 얻는 작은 동물이 중심이다. 그러나 수렵은 어로만큼 확실성이 없기 때문에, 평균적으로 단백질을 뺀 식사가 대부분이다. 또한 뉴기니 본섬에 위치하고, 큰 마을과 육지가 이어져 있어 물자가 이입되기 쉽기 때문에, 구입 먹을거리의 비율도 비교적 늘어난다. 이러한 차이는 있지만, 화전을 핵심으로 한 '1일' 기반의 생업 주기이고, 다각적인 자원 이용을 하고 있다는 기본은 밀른베이 주와 똑같으며, 또한 대부분의 세대가 얌 하우스를 가진다. 그래서 밀른베이 주와의 비교 사례로서 고찰하고자 한다.


조사한 코코다 계곡 주변의 마을들에서는 대부분이 얌 하우스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밀른베이 주만큼 확실하고 사회적으로 얌이 중요시되고 있지는 않다. 인근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에 따른 습관 차이가 크고, 제사에서 얌이 중요시되는 마을, 타로가 중요시되는 마을, 그 두 가지가 동등한 마을 등 여러 가지이다. 이와 같이 얌에 대한 서로 다른 사회적 가치관과 얌 하우스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조사 사례 가운데 얌의 사회적 가치 상태가 가장 밀른베이 주에 가까웠던 것은 사바야 마을로, 얌은 의례의 음식과 결혼, 교환재 외에 프로포즈의 선물 등으로도 중요시된다. '훌륭한 얌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한 사람 몫의 남자'라고도 하며, 얌밭을 가장 잘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 마을의 주도권을 획득한다는 사실도 있는 듯하다. 다만 의례의 음식과 결혼에는 타로나 바나나도 아울러 사용되고, 밀른베이 주만큼 얌만 돌출되고 있지는 않다. 이 마을에 있는 얌 하우스는 대부분 밭의 근처에 만들어지는데, 도난이 특히 걱정되는 경우는 집 근처에 만든다. 안에 있는 얌에 대해서는 일상 식용의 것은 빨리빨리 다 먹어 버리고, 씨앗과 제사용 얌만 오래 저장되고 있다는 상황도 야밤 섬과 누아카타 섬 등의 사례와 똑같다.


얌과 타로가 동등하게 중요시되고 있는 예로는 카만다라 마을이 있다. 여기에서는 역시 일상식으로서의 얌은 수확기에만 먹으며, 씨앗과 제사용으로 간직하는 얌을 주로 얌 하우스에 보관한다. 얌 하우스의 위치는 밭의 근처이다. 한편 동등하게 중요한 타로에는 그와 같은 저장시설은 없고, 말하자면 밭에 심은 채로 '보관'하고 있다. 타로에는 번식의 중심이 되는 어미 타로와 그 주변에 생기는 아이 타로가 있는데, 일상식으로는 아이 타로를 먹고, 제사에는 어미 타로를 캔다고 한다. 


타로 쪽이 중요시되는 마을로는 에베이 마을, 한제리 사우니 마을, 사가 마을, 코코다 마을이 있다. 이 가운데 전자의 두 마을은 의례 음식과 결혼에 얌도 함께 제공되는데, 후자 두 마을은 오직 타로를 제공하고 얌은 없어도 괜찮다고 한다. 그리고 이 후자의 두 마을 가운데 사가 마을에서는 얌 하우스를 볼 수는 없었다. 코코다 마을에서도얌 수확이 특히 많을 때만 얌 하우스를 만들고, 씨앗은 나무 아래에 두고서 덮개를 덮어 놓기만 한다고 했다. 의례 음식에 얌도 제공되는 두 마을은 얌 하우스를 소유하는데, 에베이 마을에서는 수납하는 건 씨앗뿐이다. 얌 하우스는 밭 근처에 만들고, 식용 얌은 모두 집으로 가지고 돌아온다. 한제리 사우니 마을에서는 씨앗 외에 제사용 얌도 수확한 뒤 1년 동안 얌 하우스에 보관하는데, 얌 하우스는 수확할 때마다 새로 만든다고 하며, 건조물로서의 일시성이 유난히 높다. 일상식으로 먹는 얌은 수확기부터 1-2개월 이내에 먹어 치워 버린다. 이들 네 마을 함께 가장 중요시되는 타로에 대해서는 저장시설은 없고, 카만다라 마을과 똑같이, 제사에는 밭에 보관했던 어미 타로를 사용한다. 


동하이랜드의 마을들에서는 밀른베이 주와 비교하여, 얌 하우스는 전체적으로 간이한 것이다. 의례 음식으로서 얌이 가장 중요시되는 마을에서도 타로 등 다른 작물이 아울러 사용된다고 하여, 얌의 사회적 돌출성이 희박한 것이 반영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저장의 주체가 씨앗과 제사용 얌인 점은 밀른베이 주와 공통된다. 그리고 의례 음식으로 얌이 중요시되지 않고, 따라서 제사용 비축의 필요가 없는 경우에는 얌 하우스를 만들지 않는 방향으로향한다. 여기에서도 또한 얌 하우스라는 저장시설은 생업 주기에 필수인 것으로 존재하지는 않으며, 사회적 수요의 산물로서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타로에 대해서는 의례 음식으로 중요시되고 있는 사례에서도 저장시설이만들어지지 않는 건 캐 버리면 보존이 안 된다고 하는 뿌리작물 종류의 성질 때문일 것이다. 곧 얌 하우스는 보존이 되는 얌의 뿌리작물 종류로는 특이한 성질과 특이한 사회적 수요가 합해져 완성된, 화전 생업 주기 사회에서 발생한 독자적 저장 문화의 형태라는 것을, 동하이랜드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트로브리안드로 -얌 하우스란?


논벼농사 등 '1년' 기반으로 움직이는 대규모 단작의 생업 주기에서는 1년 1-몇 회라는 한정된 횟수의 수확 작업에 따라서 1년 동안 계속 먹을 식량을 확보한다. 그러므로 그 식량을 저장해 놓는 저장시설은 생업 주기의 일환을 짊어진 빼놓을 수 없는 일부임과 함께, 나날의 생활 속에서 정기적으로 관계를 지녀야 하는 시설이기도 하다(細谷 2009). 그러나 '1일' 기반의 생업 주기에 따른 사회에서는 수확물을 저장한다는 과정은 그 일환을 이루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사회에 있는 저장시설인 얌 하우스는 대규모 단작의 저장시설과는 전혀 이질적인, 독자의 저장 문화로 완성되어 있는 것이라는 점을 지금까지 보아 온 사례를 통하여 이해할 수 있다. 얌 하우스에 행하는 얌의 저장은 생업 주기의 일환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적 수요에 응하여 행해진다. 말하자면 '사회적인 저장'이어서 '1년' 기반 사회의 저장시설처럼 나날의 식량을 보증하거나, 또는 그 풍요를 상징하거나 하는 역할은 담당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조사 성과를 근거로 하여, 얌 하우스의 '대표'로서 다루어져 온 트로브리안드 키리위나 섬의 사례를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앞에 기술했듯이, 키리위나 섬의 얌 하우스는 타인에게 보여주어 권위를 나타내는 역할을 가지며, 얌 하우스를 오히려 남의 눈에 보이지 않게 하던 다른 밀른베이 주의 사례와는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보인다. 키리위나 섬에서 얌 하우스로 상징되는 권위란, 무엇에 기반한 것일까?


앞에 기술한 2008년 7월에 실시한 동하이랜드의 조사에서, 필자는 키리위나 섬도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4일이란 짧은 방문이었지만, 인류학 관계 논문에서 자주 본 얌 하우스의 실제 모습을, 파라마운트 치프의 그것을 비롯한 여러 마을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얌 하우스'라고 한 마디로 불리기 쉬운 키리위나 섬의 얌 하우스이지만, 실은 두 종류가 한 묶음으로 되어 있다. 야고구라고 부르는 씨앗용 하우스와 부웨나라고 부르는 먹을거리용 하우스이다. 얌의 수확이 적은 세대에서는 이 두 가지 기능을 똑같은 얌 하우스의 위와 아래의 부분으로 해결해 버리는 일도 있지만, 대부분의 세대, 그리고 치프들의 세대에서는 반드시 두 종류의 하우스가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마을의 중앙광장 등에 세워 '과시하는' 것은 먹을거리용 부웨나뿐이며(그림3-8), 씨앗용 야고구는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 세워진다. 현실적으로 장래의 풍요로운 생산에 결부되며 중요한 것은 씨앗이지만, 그것과 권위의 문제와는 관계가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역시, 식량의 풍요로움이란 쪽이 강조되는 것일까? 


그림3-8 중앙광장에 세운, 치프의 부웨나(키리위나 섬).




그러나 권위의 최고봉인 파라마운트 치프 세대의 사례를 보더라도, 얌 하우스에 저장하는 건 사실 그다지 식량의확보와 연결되지는 않는다. 파라마운트 치프를 위한 얌은 여러 명의 아내들의 형제, 남자 친척이 재배하여 헌상한다. 모계인 트로브리안드 사회에서는 치프의 친아들은 지위를 계승하지 않고 자매의 아들이 계승하기 때문에, 여러 아내를 가진 것은 후계자의 확보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헌상되는 얌의 양이 증가하는 데 이어진다. 선대의 파라마운트 치프에게는 22명의 아내가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확실히 입수할 수 있는 식용 얌의 양은 일반인보다 훨씬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1년 동안의 식량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파라마운트 치프라면 부양해야 할 인간도 많고, 또 쿨라 교역의 파트너 접대용이나 제사용 얌은 쓰지 않고 확보해 놓아야 한다. 일상식용 얌의 비축은 제한적일 테고, 필자가 방문한 해에는 수확 상황도 나빴던 듯하며, 먹을거리용 얌 하우스인 부웨나는 수확한 다음 달이라고 하는데 일찍 텅 비었다. 얌 하우스의 건물 그것에 대해서도, 밀른베이 주와 동하이랜드의 얌 하우스에 비교하면 튼실한 만듦새이고, 특히 부웨나는 파라마운트 치프의 상징 등으로 화려하게 디자인되어 있는데, 길게는 20년, 보통은 5-6년에 다시 짓는, 역시 일시적이라 해도 좋은 건조물이다. 주거와 동등하든지, 경우에 따라서는 더욱 견고하게 짓는 대규모 단작 사회의 저장시설(細谷 2009)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필자가 관찰한 파라마운트 치프의 부웨나는 이미 내용물을 소진한 것도 있었던지, 반쯤 무너져 있었다. 곧, 일상식용 얌이라 하든, 얌 하우스라 하든 그닥 '유지'에는 구애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럼 구애되는 물건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수확 시점에 가능하면 많은 얌을 부웨나에 넣어 보이는 데에만 있다. 얌을 헌상하는 아내들의 남자 친척은 전원이 거의 같은 날에 수확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식량으로서의 유지를 고려하면, 오히려 날을 달리하여 수확하는 쪽이 좋을 테지만, 그보다도 가능한 한 많은 얌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쪽이 선택된다. 그 수확과 부웨나에 넣는 행위가 이른바 '얌 축제'이다. 곧, 여기에서 권위의 상징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풍요로운 식량'이 아니다. 부웨나에 넣은 얌은 안정된 식량원이 되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렇게 하겠다는 강한 의향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여주고 있는 건 많은 얌을 헌상시킬 수 있는 사회적 지위 및 그것을 지지하는 인맥이며, 얌은 그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에서 부웨나가 텅 비게 된다고 해도 치프가 굶주리는 일은 없다. '1일' 기반의 생업 사회에서는 식량은 하루하루 얻을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계속 공급해 주는 인맥을 치프는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먹고 살기 위해 중요한 것도 저장 얌이 아니라 인맥 쪽이다. 


이와 같이 본다면, 키리위나 섬의 얌 하우스는 얼핏 밀른베이 주나 동하이랜드의 그것과는 다른 듯하지만, 기본적인 체계는 공통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밀른베이 주, 동하이랜드의 사례에서는 얌 하우스의 기본적 기능은 '사회적 저장'이었다. 그리고 키리위나 섬의 얌 하우스도 부웨나에 있는 식용 얌의 저장은 생업 주기의 빼놓을 수 없는일환이라고는 말하지 않고, 오히려 소유주의 사회적 지위, 인맥을 권위로 과시하는 도구인 셈이다. 곧, '사회적 저장'이 유난히 비대한 것이 키리위나 섬의 부웨나인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 있다.


웨이너(Weiner 1987)는 트로브리안드 사회에서 중요시되는 얌이 일상식으로서는 그만큼 이용되지 않는다는 상황에 대하여,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얌의 재배와 그에 이어진 교환에, 이렇게나 사람들의 주의가 쏟아지고 있는것에 관게없이, 왜 매일 먹는 것은 타로 등 다른 작물이냐며 이상하게 생각하는 경향도 있을 것이다. 그 물음에 답하려면, 얌은 먹을거리가 아닌 재화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84쪽, 필자 번역). 또한 얌 하우스는 말하자면 은행 구좌, 얌은 예금이며, 오히려 가능한 한 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라고도 논하고 있다. 곧, 얌 하우스는 저장문화로서 대규모 단작 사회의 그것과는 이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저장되어 있는 얌 그것도 사실은 대규모 단작 사회의 기준에서 말하는 '식량'조차 아닌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수요를 위하여 사용되는 '재화'인 것이다.


파푸아뉴기니에서 볼 수 있는 '1일' 기반에서 다각적인 자원을 이용하는 화전 농경 사회는 기본적인 농경 사회의모습임과 함께, 농경 사회 발전의 한 유형으로 생각할 만한 것이기도 하다고 모두에서 기술했다. 그리고 얌 하우스라는 저장 문화의 고찰을 통하여, 지금까지 '고육한 농경 사회'라고 생각해 왔던 사회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농경 문화가, 그곳에서는 발전해 왔다는 점이 이해되었다. 농경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논과 화전 같은 표면적인 기술만의 차이가 아니라 생업 체계의 차이까지 깊이 파고드는, '다양성'의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거에 대해서도, 다른 문화에 대해서도 '우리의 기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많은 기준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마치며 -'농경 사회'의 다양성


모두에서도 기술했듯이, 차일드(Childe 1981[1956])의 '신석기혁명'론에서 기술되고 있는 내용에는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무의식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농경 사회'의 이미지에 연결되는 것이 많다. 예를 들면, 농경을 시작하여 인간 사회가 훨씬 '진보'했는지에 대하여, 차일드는 이처럼 기술하고 있다. "(농경의 개시에 의하여) 사람은 교역에 의지하지 않고 모든 필수품을 직접 만드는, 완전한 자급자족의 사회를 형성했다." "아무리 단순한 농경이라도, 잉여 작물을 생산하여 1년 동안의 식량과 씨앗에 해당한다는 계획성을 가지게 되었다. … 그 저장시설은 주거보다도 손을 대어 지을 수 있다"(Childe 1981[1956]), 78쪽, 필자 번역). 지금까지 기술해 온 파푸아뉴기니의 사례를 보면, 이와 같은 개념이 꼭 들어맞지 않는 농경 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화전 농경을 경영하는 밀른베이 주와 동하이랜드의 사회에서는 확실히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의 생활이지만, 그것은 농경 그것의 힘이라기보다 농경만이 아닌 다각적인 자원 이용이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농경에만 의존하는 대규모 단작 사회일 정도로, 자급자족성은 사라져 갈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뿌리작물 종류를 주대상으로 하는 '1일' 기반의 화전 생업 주기에서는, 식량의 저장이 빼놓을 수 없는 일환은 아니다. 그 대신, 얌 하우스 같은 '사회적 저장'이라고도 이야기할 법한 독자적 저장 형태가 생기기도 한다. 세계의 농경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농경 사회의 유형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점, 그것도 표면적인 농경 기술의 다양성만이 아니라 근본적인 생업 체계의 다양성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점을 파푸아뉴기니 화전 사회의 사레는 시사하고 있다.


그럼 우리가 사는 일본의 농경사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경우, 이 문제는 어떻게 바뀌어 왔을까? 일본의 농경사에서는 야요이 문화의 개시를 알리는 논벼농사의 도입이, 이미 완성된 그것을 대륙에서 받아들인 점도 있고, 문화의 중추가 되는 지역에서는 비교적 급속히 대규모 단작화를 촉구하여 사회조직 상태에도 영향을 미친 점을 생각할 수 있다(細谷 2009). 그러나 그와 같은 면만이 일본의 농경사가 아니다. 노모토 켄이치野本寬一 씨(1994)는 일본 문화의 중추에는 없었던 지역에서 행한 생업의 모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화전을 계속 운영해 온 산골짜기에서는 …… 상수리나무·졸참나무·떡갈나무·밤나무 등의견과류, 도코로마·호도·칡뿌리 등의 근경류를 적극적으로 채집하고, 산천어·곤들메기 등의 민물고기를 잡고, 토끼·산새·비둘기 등의 소형 짐승과 조류를 포획하여 식생활에 편입하여 가을, 화전 작물의 결실에 앞서 행하고, 작물을 망치는 맷돼지를 포획하기 위한 공동 수렵을 행하는 곳이 많았다. …… 정말로 '수렵채집'과 '농경'의문화 복합이다."(野本 1994 6쪽)


이것은 확실히 다각적인 자원 이용을 경영하는 화전 생업 주기 사회의 모습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모양의 생업은 일본의 농경사 안에서 대상 외가 되어 왔다. 그 이유는 문화의 중추 지역이 아닌 곳에서 영위되고 있었다는 점 때문에, 문헌사료가 적다는 점도 크지만(原田 2007), 근본적으로 이러한 생업의 태도가 '고유한 농경 사회'의 그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단 점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곧, 농경 사회에는 다양한 생업 체계에 기반한 그것이 있다는 사실이 인식되지 않았던 것에 다르지 않다. 이 생업 체계로서의 다양성이란 시점이 불충분하다면, 일본의 역사에 있는 다양한 농경을 논하는 경우에도 주식이 쌀이었는지 아닌지 같은 측면에 이야기가 집중되기 쉽다. 


그러나 비록 주작물과 농경 기술이 똑같은 사례라도, 생업 체계에 대해서는 다양할 수 있다. 더욱이 주작물과 농경 기술은 변화가 없는 채, 생업 체계만이 역사 속에서 변화해 간다는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화전 농경에 관한 근대화에 대하여, 노모토 씨(1994)는 이렇게 논하고 있다.


"화전은 본래, 화전 농민이 자신들의 식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자급자족형, 식량확보형 돌려짓기였다. 그와 같은 화전 농업의 안으로, 근세 이후 차츰 환금작물인 차, 양잠을 위한 뽕나무, 삼지닥나무 등이 도입되기 시작해, 근대에 들어와 현금 수입의 필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그들은 더욱더 적극적으로 재배되게 되었다. …… 말하자면, 근대적인 화전 돌려짓기이며, 화전의 근대화이기도 했다." (野本 1994 615쪽)


곧 근대화 속에서 화전을 중심으로 한 다각적인 자원 이용으로부터 환금 수단으로서의 부업적인 화전으로, 생업 체계 및 화전 그것의 성질이 변천되었던 점이 여기에서 기술되고 있다. 농경사에서는 화전이란 농경 기술의 존부이상으로 이와 같은 생업 체계로서의 변화 문제가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생업 체계의 다양성과 변천을 농경사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에 의하여, 서로 다른 생업 체게를 가진 사회들의 상호관계의 태도 문제 등, 더욱 증층적인 농경사를 복원해 나아갈 수 있다. 많은 농경 사회에서 왜 '농경' 부분이늘어나는 데에 이르렀는지 하는, 모두에서 기술한 문제에 대해서도 여기에서부터 고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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