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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4




기고3

호리병박 -실용과 상징의 문화지

유아사 히로시 湯淺浩史






호리병박은 잘록한 부분이 있는 독특한 모양의 과실로서, 널리 알려지고, 관상용으로 재배, 또 가공하여 장식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호리병박의 일면에 지나지 않는다.


그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 호리병박은 가장 오래된 재배식물 가운데 하나로 토기에 앞서 1만 년을 넘는 역사를 지니고, 더욱이 인류의 이동에 관여하며, 선조의 탄생과 농작물 기원의 신화에 얼굴을 내밀고, 200가지 이상의 여러 가지 용도로 깊게 생활에 밀착되어 있던 중요한 식물이다.




호리병박의 기원과 전파


호리병박은 아프리카가 원산지이다. 그 근거로서 호리병박속 Lagenavia의 현존하는 야생종 3종은 모두 아프리카와 마다가스카르에 분포한다(표1).



종 이름

분포

草性

암수

개화

과실

L. sieraria

L. sphaerica

L. brevifolia

L. abyssinica

사헬 원산?

동아프리카/마다가스카르

동아프리카 산간

동아프리카 산간

한해살이

여러해살이

여러해살이

여러해살이

異花

異株

異株

異株

밤-아침

여러 모양

공 모양

공 모양

공 모양

표1 호리병박(Lagenaria)속의 분포와 형질




또한 종자의 다양성에서도, 아프리카의 재배 호리병박 중에 플라나리아 모양의 아시아계, 또 색이 짙고 돌기를 결여한 남미계 등 세계 각지에 종자의 유형이 모두 존재하여 아프리카 원산설을 뒷받침하고 있다(湯淺 1979).


더욱이 재배 호리병박의 야성종에 대해서는 짐바브웨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보고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아프리카를 기원으로 함에도 불구하고 호리병박은 조몬시대 조기에 일본에까지 도달했다. 그 가장 오래된 기록은비와호琵琶湖의 아와즈코테粟津湖유적에서 출토된 종자의 9600±110y.B.P.이다(辻誠一郞他 1992). 다음으로 후지이현 와카사쵸若狹町 미카타고호三方五湖의 토리하마鳥浜 패총에서 발견된 과피의 8500y.B.P.이다. 


또한 놀라운 점으로는 멕시코의 동굴 유적에서 9920±50y.B.P.의 종자가 출토되고 있다. 에릭슨 외(2005)가 그 DNA를 해석한 바, 가장 오래된 종자에서의 검출은 할 수 없었지만, 8685±60y.B.P.의 종자에서 얻었던 3개소의 DNA 표지는 모두 아시아계였다.


아메리카 호리병박의 유래에 대하여 휘태커는 아프리카에서 과실이 흘러 왔다는 설을 1973년에 제시하고, 그것이 널리 받아들여져 왔다. 그에 반해 나는 아시아에서 배로 이주하여, 그때 물의 용기로 가지고 갔다고 보았다(湯淺 1979, 1999). 


미지의 장소로 이주를 적극적으로 하든, 어쩔 수 없이 하든 단행하며 최소한 필요한 휴대품의 하나는 물일 것이다. 특히 바다로 타고 나갈 때는 물이 보증되지 않으면 안정된 항해는 바랄 수 없다. 물의 용기로는 토기도 생각할 수 있지만, 무겁고 질그릇에서는 누수가 일어날 것이고, 첫째, 1만 년을 넘는 이전에 토기를 가지고 있던 지역은 일본 이외는 드물다. 


폴리네시아의 섬들에 널리 호리병박이 분포하는 것도, 그 증거이다. 




호리병박의 모양과 이름의 변천


일본으로 호리병박이 도래한 건 고고학자는 해류에 의한 표착설로 기울어지지만, 아메리카로 1만 년 전에 전파된걸 보더라도, 사람이 의도적으로 가지고 들어왔음이 틀림없다. 그럼 어디에서 가져왔을까? 적어도 류큐 열도에서는 남쪽으로부터 도입되었음이 부르는 이름에서 생각될 수 있지만, 그 전에 먼저 호리병박의 어원을 기술하겠다.


호리병박의 이름은 오해에서 생겼다. 논어에서 공자가 애제자인 안회(안연)의 청빈을 칭찬하는 "一簞之食瓢之飮"이나 도잠의 한시 '五柳先生'의 '簞瓢'를 헤이안 시대, 타치바나 나오모토橘直幹가 나오모토 갑문甲文의 1절(954년)에서 '瓢簞屡空'이라 인용하면서 퍼졌다. 본래 瓢와 簞은 다른 물건으로, 단은 부수인 죽에서도 알 수 있듯이대나무 제품으로 얇게 쪼갠 대나무를 짠 도시락통을 말한다. 안회는 가난하여, 식사와 음료가 결여되어도 학문에힘쓴다는 예로 표현된 것인데, 그것을 표와 단으로 호리병박이라 해석해 버린 것이다.


일본어로서 본래의 호리병박의 이름에는 몇 가지 기원이 있다. 하나는 히사고ひさご로서, 이것은 덩굴(히사ヒサ)을이루는 과실(고)을 의미하며, 그것을 가공한 '히사쿠ひさく'에서 히샤쿠ヒシャク(국자)가 생겼다. 일본의 전통 노래에서 습관적으로 일정한 말 앞에 놓는 수식어 침사枕詞인 '히사카타ひさかた'는 히샤쿠 모양을 한 북두칠성의 모양, 또는 그것을 가리키는 방향에서 파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예로부터 내려온 호리병박의 이름에는 또한 바가지도 있다. 이것은 잘록한 부분이 없는 둥근 모양이나 단지 모양을 가리키며, 부푼 '단지'에서 유래한다. 애초 단지 그것도 본래는 호리병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호리병박의 과실은 여러 모양으로, 크게 일곱 가지 모양으로 분류할 수 있다(湯淺 1983, 鄭·湯淺 1990). 


야생종은 모두 공 모양만 있지만, 그 과실 자루의 부근이 조금 길어지는 전구의 모양에 가까운 단지 모양으로, 아프리카를 처음으로 세계의 호리병박은 이 모양이 적지 않다. 오래된 토기의 대부분이 단지 모양인 것도 호리병박을 모델로 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일본의 조몬시대에 출토 호리병박도 이른바 잘록한 부분이 있는 호리병박은 볼 수 없고 단지 모양이다.


이시가키지마石垣島, 오키나와, 아마미오오시마奄美大島 등에서는 호리병박을 츠부루ツブル라고 한다. 옛날에는 츠부르란 이름도 기록되어 있다(슈리首里 왕부 <혼효험집混效驗集>). 대만의 츠오우족이 부르는 이름은 다부,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에서는 라부라고 부르며, '츠보'와의 관련이 시사된다(그림1).


그림1 이시가키시마. 단지 모양의 연적.



일본어에서 호리병박의 또 하나의 이름은 유우가오ユウガオ(박)이다. 호리병박의 꽃은 저녁 무렵에 피어 이것으로부터 '저녁 얼굴(夕顔)'이란 이름이 생기고, <원씨물어源氏物語>와 함께 그 우아한 이름은 보급되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유우가오는 잘록한 부분이 없고, 공 모양의 둥근박과 수세미 모양의 긴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박고지는 박으로 만들고, 호리병박과 달리 쓴맛이 없다. 쓴맛은 쿠쿠르비타신 계통으로, 우성으로 유전한다. 


또한 박도, 호리병박도 자유로이 잡종이 생기고, 그 첫 대는 단지 모양이고, 2대 이후 분잡한다. 여러 가지 모양이어도 재배 호리병박은 격리 없이 잡종이 생겨, 동일 종의 기원을 증명한다. 




호리병박의 신화와 표징성


호리병박은 성숙하면 텅 비고, 그곳엣 수백, 큰 과실에서는 천 개나 되는 종자가 맺힌다. 공간의 생성과 종자의 다산, 그 두 가지 면에서 호리병박은 상징화되어 수많은 신화가 생겼다. 동아시아에서 그것이 짙게 남은 것은 중국 남부의 소수민족과 대만의 선주민족이다.


운남성과 귀주성에서는 사로잡힌 번개신이 물을 원하여 그 희망을 들어준 남매에게, 물을 마시고 힘을 회복한 번개신이 하늘로 떠나면서 치아를 뽑아 주고, 그 치아를 시키는 대로 땅에 묻은 바, 금세 자라 큰 공 모양의 호리병박이 이루어져 번개신이 대홍수로 복수할 때 남매만 호리병박에 타서 구조되어 나중에 결혼, 조상이 되었다는 홍수 신화가 널리 전해진다(聞一多 1989).


호리병박의 종자는 확실히 치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 그 재배, 또 물을 가져옴과 함께 물에 뜨는 특성 등 호리병박의 특징과 깊게 연결된 신화이다. 


호리병박의 빈 공간은 자궁을 연상시켜, 대만의 부눈족에서는 호리병박에서 선조가 탄생했다고 한다. 또한 종자가 많은 건 곡물의 다산으로 연결되어, 주식인 조를 가져온다. 츠오우족은 덩굴을 전하러 하늘에 오른 아이가 양조를 시작으로 다양한 기술을 전한다는 전설이 있다. 힘차게 뻗는 덩굴과 하늘을 연결시킨 우의전설적인 민화도 한국과 오키나와에 전한다.


<금석물어今昔物語>에 실린 은혜 갚은 참새에는 할머니의 도움을 받은 참새가 호리병박의 종자를 물고 와서 그것을 심은 바, 다 자란 과실에서 쌀이 계속 나온다. 이것도 호리병박에서 작물을 얻는 신화의 변형이라 볼 수 있다.


중국 도교의 팔선의 한 사람 철괘鐵枴 선인은 선약이 든 호리병박을 지니며, 그곳에서 만들어진 영기로 불로불사를 유지한다. 이것으로부터 중국에서는 호리병박은 한방의의 상징으로 현호懸壺란 이름의 간판으로도 취급되었다. 이 전설은 대만에 남아, 현재도 개업 광고에 쓰이거나 한다.


또한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호리병박 내부의 공간에 이차원의 별세계가 있다고 생각했다.일본의 속담인 '호리병박에 말'이나 술이 떨어지지 않는 양노 전설도 똑같이 다른 차원이 기층에 있다.


이상과 같이 호리병박은 선조 파생, 곡물 기원, 참새 이야기 등 신화나 전승으로 각지에 결부된다.




인류의 기준이 되는 기물


호리병박은 정신세계의 표징만이 아니라, 생활에 바탕한 실용성도 풍부하다. 그 세계적인 용도는 여러 가지 악기를 제하고도 2백 몇십에 이르며, 식물로서는 가장 범용성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 가장 다양하게 옛날부터 이용되어 온 용도는 용기이다. 동물은 물을 마시는 곳에 가지 않으면 물을 마실 수 없다. 사람은 그 물을 운반 또는 저장하는 것으로 조절하고, 생활권을 넓혀 왔다. 


물을 마시는 경우에, 사람은 동물처럼 직접 입을 수면에 대지 않는다. 떠서 입으로 나른다. 그것은 손으로도 가능하다. 교토의 미시마三嶋 신사에서는 '쿠보테くぼて'라는 얕은 용기가 있다. 틀림없이 '窪手'로서, 손의 오목한 곳에 물을 따라 마신다는 자취이다. 다만 그렇게 하여 물을 떠 마셔도 멀리 운반하는 일은 할 수 없다. 물을 뜸과 동시에 나르는 용기로는 가볍고, 게다가 밀폐성이 좋은 호리병박이 최적이며, 큰 호리병박은 물을 저장하는 데에도 뛰어나다. 일본의 뾰족바닥 토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역에서 최초의 토기가 단지 모양인 것도 호리병박이선행했기 때문일 것이다.


속이 빈 공간인 식물에는 이외에 야자나무와 대나무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야자나무는 열대지역만, 대나무도 분포가 온난하고 다습한 지역에 한정되는 데다가 단단한 대나무를 가로로 잘 자르는 데에는 석기로는 어렵고 금속 칼날의 출현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호리병박으로 만든 용기는 수통과 저수 등의 물 용기 이외에, 술과 기름, 우유, 벌꿀 등 다양한 생활잡기로 쓰일 수 있다. 또한 일본에서는 생화의 화병으로도 쓰이며, 리큐利休가 안회라고 이름을 지은 한 물건은 현재도 호소카와 에이세이細川永靑 문고로 전한다.


액체 이외에도 차를 담고, 필리핀의 육포와 과일 등의 용기나 쌀궤, 한국의 밥통, 일본의 과자통, 양념 용기, 중국의 약통과 비연호鼻煙壷, 또 귀뚜라미 싸움의 귀뚜라미통, 인도네시아부터 대만에 걸쳐서 빈랑을 씹을 때의 석탄통, 부탄의 산초통 등이 지금도, 또는 최근까지 사용되었던 용기이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중세 중국에 표착한 류큐의 배에는 둥근박 모양의 용기에 의상이 들어 있었다. 현대에도 아프리카의 카메룬 북부에서는 신부의 의상함으로 지참되고 있다. 게다가 천성호리병박千成瓢簞을 화승총의 화약통으로, 중국 운남성에서는 화약을 담는 무기로 사용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보석을 상감한 아름다운 여성용 화장품통이나 비연호가 있었다. 전란으로 현재는 끊어져 버린 게 아닐까? 파리의 인류박물관에는 그 수집품이 남아 있다. 중국 청나라대의 코담배통의 비연호에도 묘기를 장식한 세공이 적지 않았다. 대만의 고궁박물관에 그 우수한 작품이 모여 있다. 청나라의 강희제는 호리병박(둥근박)으로 식기인 완, 맹, 분, 합을 만들었다고 한다.




생활 잡기


용기 이외에도 여러 가지 호리병박으로 만든 생활 잡기가 있다. 중화요리의 '숟가락'은 일본에서는 '렌게蓮華'라든지 '치리렌게散り蓮華'라고 부르며 연꽃의 꽃잎 이미지인데, 중국에서는 파오, 즉 瓢로서 작은 단지 모양의 호리병을 반으로 잘라 사용한 흔적임을 알 수 있다. 대만의 부룬족은 술잔으로 이용, 일본에서도 무사의 마상잔으로 쓰였다. 


전차도煎茶道의 일부에서는 머리가 긴 호리병박의 머리끝을 잘라내고 둥근 부분을 조금 깎아 그곳에 뜨거운 물을 떠내, 머리로부터 쏟는 국자가 사용된다. 이외에 베트남의 쌀 저울, 중국의 기름 저울, 한국의 등잔이나 전기 스탠드, 필리핀의 큰 둥근박 모자, 태국 아카족의 술병 등 독특한 이용을 각지에서 볼 수 있다(그림2). 호리병박으로 만든 담뱃대는 아프리카에 많지만, 유라시아에서는 방글라데시에서 물담뱃대를 볼 수 있다.


그림2 필리핀의 호리병박 모자




어구


한국의 제주도 해녀는 물질할 때 부표로 테왁이란 지름 30cm 정도의 공 모양 호리병박을 사용했다. 태평양 전쟁이전에는 츠시마로 돈벌이를 다녀온 해녀는 반드시 그 호리병박을 껴안고 왔다. 목숨을 맡기는 중요한 용구였던 것이다. 그것이 최근은 발포 스티로폼 제품으로 바뀌어 버렸다. 


필리핀의 바탄 제도에서는 소프트볼 크기의 호리병박을 그대로 건조해서, 대형 물고기를 낚는 찌로 썼다. 


오키나와에서는 일찍이 사바니(어선)용 물 퍼내는 용기를 호리병박으로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똑같은 사용법이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단지 모양의 호리병박에 여러 구멍을 뚫어, 물고기를 잡는 통발로 삼았다.




농기구


중국에서는 옛날엔 종자 파종기로 이용했다. 공 모양의 둥근박의 가로에 구멍을 뚫고, 그곳으로 콩이나 곡물의 종자를 담아 관통시킨 가느다란 대나무 관으로 종자를 점뿌림했다. 이것은 점호로点胡籚라고 부르며, 6세기의 <제민요술>에 파의 파종기로서 규호竅瓠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다. 예를 들면, 한 예로서 하북성에서 원나라대의 점호로가 1980년에 출토된다.


인도에서는 일찍이 탈립하기 쉬운 곡류를 받아서 수확하기 위한 시드비타라는 호리병박을 반으로 잘라 만든 용기가 사용되었다.


이시가키시마에서는 단지 모양의 호리병박을 반으로 잘라서, 조를 날려고르기할 때 키로 사용했다.


종자의 보존 용기로도 일본과 한국 등 사용했다. 화로가 있는 실내에 매달면, 그을음 때문에 벌레가 달라붙기 어려운 데다가 습기를 막고, 둥그스름하기에 쥐에게 갉아먹히는 일도 없다. 벼의 씨앗 등을 저장하는 데 이용되었다. 




가면


가면을 뒤집어쓰면 다른 성격, 이질적 세계로 뛰어들어 연기하게 되며, 자기를 떠난 존재로 승화할 수 있다. 이상한 공간을 가진 호리병박으로 만든 가면 효과는 더욱 높다. 호리병박의 가면은 아프리카, 뉴기니아, 남미 등으로 사이를 두고 존재하는 것도 그것을 뒷받침한다.


유라시아에서 호리병박 가면은 한국의 가면극이 유명하다. 한국 농촌의 가면극은 전통적인 민족예술로서, 지역에따라서 독자적으로 발달했다(그림3). 양주 별산대극, 송파 산대극, 통영 오광대극, 가산 오광대극, 동래 야유, 수영 야유 등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과 동물의 가면은 바가지라고 부르는 둥근박을 가공하고, 코에는 작은 단지 호리병박이 쓰이는 가면도 있었다. 다만 최근은 플라스틱 제품으로 교체된 가면도 적지 않다.


그림3 양주 별산대극(한국) 가면





제사기, 주술 도구와 상징


한국의 가면은 방상씨의 벽사 가면과 무속의 신성 가면에서 기원한다고 한다. 호리병박에 특별한 힘이 존재하여서 이것을 성스런 제기나 또 주술 도구에 이용하는 예는 세계 각지에서 볼 수 있다.


대만의 파이완족 주술사는 호리병박 점술 도구의 위에 무환자나무의 종자를 떨어뜨려 점을 치거나, 어깨에 호리병박을 얹고 병의 치료를 행한다. 루카이족은 흙으로 만든 작은 신이 들어간 신기를 가지고 있었다. 츠오우족은 조의 첫 이삭을 유부누라고 하는 호리병박 제기에 담아서 제사를 지냈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변소신이라 하던 자고신紫姑神의 신체에 호리병박이 사용된 예도 있다. 


대만의 사당 경내에는 금로金爐라고 부르는 건조물이 있어, 그곳에서 사자에게 돈으로 가정한 금지와 은지를 태워 보내주는 습속을 널리 볼 수 있는데, 금로의 꼭대기는 호리병박을 본딴다. 이것은 호리병박에 영력이 있다고 하는 신선사상으로, 똑같은 생각에서 중국에서는 지붕의 가운데나 탑에도 자주 호리병박으로 만든 물건이 장식된다. 卍은 호리병박의 덩굴이 얽힌 것에서 생긴 자손 번영의 표지라고 하는 중국에서의 견해가 있다.


일본에서는 물의 상징으로 기후현 히다이치노미야飛騨一宮 미나시水無 신사는 여섯 가지 호리병박을 조합해 신사의문양으로 삼고 있다. 헤이안 시대의 조정 의식인 스모의 절회節会에서는 오른쪽의 역사는 박의 꽃을 머리에 꽂고,가뭄일 때에는 왼쪽의 강한 햇살을 상징하는 접시꽃을 머리에 꽂은 역사에게 이기게 했다.




악기


호리병박의 공동성은 음을 높이는 것만이 아니라, 내부의 부드러운 복잡한 작은 무수한 융기가 잡음을 흡수하는 우수한 효과가 있다. 그 때문에 현대에는 순한 음이 들을 만하다고 스피커로 활용될 정도이다.


민족 악기로 이용되는 일도 여러 갈래로 알고 있다. 활과 호리병박의 조합이 현악기의 뿌리라고 하며, 그 가장 현의 수가 많은 악기의 하나는 인도의 시타르Sitar이다. 한편, 인도에서는 호리병박으로 된 한 현을 길게 한 엑타라Ektara도 있으며, 그 사이에 여러 가지 줄 수의 호리병박 공명기를 지닌 트위터(tweeter)계의 현악기가 알려져 있다. 캄보디아에서도 한 현의 호금瓠琴인 핀 남 타오가 있다. 베트남의 돈코는 호궁胡弓에 유사한 류트계 악기이다.


리드가 달린 기명 악기 중에서 아시아의 대표는 생황(笙)으로, 중국에서는 호로생胡蘆笙으로 여러 가지 유형이 존재한다. 그 흐름은 동남아시아 산악민족에도 널리 전해져, 태국 리스족의 생황은 T자형의 긴 대나무로 만든 관을 갖는다. 이 흐름에는 보르네오섬의 다야크족의 겔팃토와 카리만탄의 게레디 등도 있다.


인도의 코푸라 피리는 스리랑카나 방글라데시, 파키스탄에서도 볼 수 있다. 또한 인도에는 리드가 달린 진귀한 코 피리도 있다.




호리병박 예술


호리병박은 부드럽고 세공하기 쉽다. 그 때문에 자르고, 새기고, 뚫고, 벗기고, 갈고, 메우고, 태우고, 그슬리고, 그리고, 칠하고, 뿜어 칠하고, 물들이고, 씌우고, 붙이는 등 여러 가지 기법을 구사한 예술작품을 만들어 낸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틀에 끼우면, 변형과 상처에 의한 켈로이드 모양의 새김, 오목한 모양의 문자나 그림이 성장한 과실에 꽉 눌려서 나타나는 돋을새김 등 참으로 다채로운 용법이 구사될 수 있다. 또한 크고 작은 여러 가지 모양에 기반하여, 용도에 맞는 장식품을 만들게 된다.


한국의 벽 장식을 처음으로, 터키의 선각과 중국, 일본에서는 장식용으로 호리병박 세공이 발달했다. 동남아시아의 석회통, 태국 산악민족의 목걸이 등 실용품에서도 미적 감각이 발휘되고 있다. 


호리병박 그것의 가공이 아니라 섬유 지스러기나 대나무 등의 소재로 모양에 따라서 엮어, 호리병박의 보호와 함께 아름다움을 다투는 용기는 동남아시아의 산지, 인도네시아, 필리핀, 대만 등 도서의 여러 민족에게 우수한 민예품이 많다. 




식용

 

이른바 잘록한 부분이 있는 일본의 호리병박은 쓴맛이 있지만, 이 우성의 쓴맛을 없앤 호리병박이 교토, 토야마, 카나가와神奈川 등에서 스구키酸茎 절임이나 나라 절임 등의 장아찌에 이용되고 있다. 홍콩이나 필리핀에서는 역시쓴맛이 없는 호리병박이 생선 채소로 팔리고 있다.


둥근박, 긴박, 단지 모양 호리병박 등은 인도부터 동남아시아, 중국 남부나 대만에 이르는 광범위에서 서민의 일상 채소로 국의 재료, 찜, 또 카레의 재료, 구이 등에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미얀마에서는 튀김으로도 쓰이고 있었다.


다만 박고지로 먹는 건 예전에는 중국에서도 존재했는데, 현대는 일본에 거의 한정되어 있다. 그 대신 일본에서는 생선 채소로 이용하는 건 오키나와를 제외하고 유통되지 않는다.




호리병박 문화의 쇠퇴


지금까지 다방면에서 유라시아의 호리병박 문화의 여러 예를 기술했는데, 식용, 민족 악기의 일부를 제외하고, 전체에서 호리병박 문화는 쇠퇴의 일로에 있다. 그것은 1만 년의 오랜 세월에 걸쳐 가벼움과 밀폐성으로 목제품,토기, 청동기, 철기, 유리 등의 용재를 견디어 냈던 호리병박이 20세기 후반의 플라스틱, 비닐 제품의 보급에 의해 쓰임의 아름다움을 고려하지 않는 저렴한 대량생산, 일회용품의 파도에 삼켜져 버렸기 때문이다.


석유 제품의 범람에 의한 생활문화의 파괴는 안타깝지만, 직접 키워 수확해 세공하는 작품 활동은 새로운 호리병박 문화를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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