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유라시아 농경사 권4




서장

농경의 장에서 생물다양성

사토 요우이치로佐藤洋一郞




시작하며


인간이 재배화한 식물은 참으로 여러 가지이다. 재배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떠한 형태로 이용했던 것을 포함하면그 수는 아마 몇 만이란 숫자가 될 것이다(堀田 외(편) 1989). 재배화된 식물 중에서는 그뒤 원산지를 떠나 세계의 각지로 운반되어 신천지에 정착한 것도 있다. 이 책에서는 그들 가운데 박과에 속하는 식물, 게다가 잡곡이라 총칭되는 벼과식물 등을 문제삼는다.


매우 흥미로운 점으로 이들 재배식물은 총칭으로 전 세계에 퍼졌지만, 종의 수준에서 보면 분포 지역이 한정되어있다. 몇 안 되는 예외는 박과 안의 호리병박과 잡곡 안의 기장 정도일까? 그들 예외를 제외하면, 저들은 세계의 다양한 풍토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많은 종을 산출하는 전략을 취했다. 한편 벼와 밀 등은 1개 또는 소수의 종 안에 다양한 품종을 분화시켜서 세계에 퍼졌다. 밀 안에서 마카로니밀은 분포가 지중해 연안의 유럽 일대에 한정되지만, 빵밀은 전 세계에 분포한다. 벼도 인디카와 자포니카라는 두 가지 아종(실질적으로는 종이라 불러도 지장이 없음)이 분포의 범위를 비키어 퍼져 있다. 벼, 밀과 이 책에서 다루는 다른 재배식물은 세계에 퍼질 때에 서로 다른 전략을 취했다.


이번 권에서는 이러한 농경의 장에 있는 종과 품종의 다양성을 다루면서, 이들 다양한 재배식물들의 여러 가지 적응의 모습을 조망하려 한다.




일본 열도에서 농경의 기원 


이 권에서는 특히 일본 열도에 관점의 중심을 놓고서 의론을 진행하고자 한다. 일본 열도에서 농경의 기원은 오래 의론되어 왔던 문제의 하나이다. 특히 신석기시대의 전반에 상당하는 조몬시대에 농경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야마노우치 스가우山內淸男(1902-1970) 이래 논쟁적이기도 했다. 일본의 고고학계가 오랫동안 조몬시대의 농경을 인정하지 않아 온 배경에는 논벼농사의 흔적이 조몬시대에는 확인되지 않는다는 경험칙이 있다. 벼농사의 시작=농경의 기원이란 그때까지의 도식에서 보면, 논벼농사가 없다는 사실은 농경 그것이 없었다는 판단으로 이어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1996년, 나는 공동연구자와 함께 밤나무 재배화의 가능성을 지적했다(山中愼介 외, 1999). 유적에서 출토된 밤DNA의 다양성이 현존하는 야생의 밤 집단의 그것에 비교하여 작다는 관찰에 기반한 것으로, 많은 의론을 불렀다. 밤 재배화의 가능성을 지적한 것은 우리들이 최초는 아니다. 이미 사카즈메 나가오酒詰仲男(1902-1965)는 밤재배화의 가능성을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지적하고 있었다(酒詰 1957). 우리가 발견한 것은 출토된 밤의 열매 집단의 DNA 표지의 유전적 다양성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밤에 한하지 않고 식물이 어떤 DNA 표지를 가졌는지는 외견상 구별은 되지 않는다. 집단 유전학의 이론에 의하면, DNA표지의 유전적 다양성이 저하된 사실은 무의식적인, 그런 강한 선발이 작용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본래는 다양한 DNA 표지를 가지고 있었던 야생 집단 안에서 '열매가 크다' '생산성이 높다' '병에 강하다' 등의 개체를 연속적, 계통적으로 계속 선발한 결과가 DNA 표지의 다양성도 저하시켰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람에 의한 설발이 DNA 표지 등의 다양성을 저하시켰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례는 그밖에도 있다. 벼에서는 Kuroda 외.(2002)와 Muto 외.(인쇄중) 등이 잘 알려진 예이다. 


서일본에서는 벼잎의 세포화석이 30곳 가까운 조몬시대의 유적에서 검출되어, 조몬시대에 벼농사가 있었다는 생각도 받아들여지게 된다(外山 2000). 다만 벼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벼농사가 현재의 그것처럼 사람들의 칼로리를 지탱하는 주곡이었을리도 없고, 더구나 평지 전체에 논이 펼쳐져 있었을리도 없다. '조몬 벼농사'의 모습을 복원하는 것은 상당히 곤란하지만, 논벼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야요이 시대에도 사람들의 먹을거리를 지탱했던 최대의 자원이 도토리였다는 테라사와 카오루寺澤薫 씨(1981)의 지적은 큰 힌트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매우 많은 양의 조몬 토기 등으로 상징되듯이, 조몬시대의, 특히 중기 이후에 사람들은 정주의 정도가 강한 생활을 지내고 있었다는 건 확실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거주 지역의 가까운 토지는 개간하고 교란을 받아, 지금으로 말하자면 '마을'이 되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교란을 받은 생태계에 적응할 수 있는 동식물은 작물과 가축, 또는 그들에 수반하는 잡초와 수반동물에 한정된다. 나는 마을이 생겼던 시점에서 이미 원초적인 농업이 시작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을의 경관이 그 토지의 원식생과 기후 등에 의해 여러 가지 달랐을 것이란 점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또한 이 주변의 일에 대해서는 5권에서 다시 상세하게 논하겠다.




일본 열도에서 '벼농사 이전'


일본 열도의 원초적 농경을 생각할 때 간과할 수 없는 존재의 하나가 피이다. 피에 대해서는 본래라면 츠바키자카 야스요椿坂恭代 씨에게 집필을 부탁해야겠지만, 지면의 형편과 이 책의 간행 직전에 피의 논고(細谷·佐藤 2009)가 나오게 된 것도 있어 여기에서는 할애했다. 


돌피(Echinocloa drus-galli)의 원산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결정적 증거가 없었다. 야나기타 쿠니오柳田國男가 "피의 역사는 누구나 모두 전혀 지식이 없다"고 할 만큼 연구가 더디었다. 내가 아는 한에서는 유일하게 사카모토 사다오阪本寧男 씨가 '피 일본 열도 원산지 설'라고도 할 만한 설을 내놓은 것이 최초이자 최후이다.


그럼 그 피의 재배화의 시기는 언제일까? 이에 대해서는 크로포드Crawford 외에 의한 종자 크기의 변화 연구에 의하면, 조몬시대 중기 무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1983). 종자 크기의 변화는, 곡류에서는 종종, 재배화의 과정에서 일어났던 변화라고 이야기된다. 그것은 크게는 틀리지는 않을 테지만, 엄밀히 말하면 재배화의 이후에 일어났던 과정이란 것이 좀 더 올바를 것이다(Fuller 외. 2009).


그런데 최근, 현존하는 피의 계통의 분석에서도 '돌피 일본 원산설'을 지지하는 연구가 나오고 있다. 노자와 시게키野澤樹 씨는 열도의 각지에 점재하는 돌피의 게통을 다수 모아 그들의 DNA 표지의 다형多型에서 재배형의 돌피가 일본 열도에서 자생하는 야생형 돌피의 계통으로부터 생겼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열도의 북부가 재배화가 일어났던 장소일 가능성을 논한다(Nozawa 외. 2006). 노자와 씨의 연구에서는 대륙부의 연안에서는 피의 DNA 다형이 조사되지 않았기에, 피의 기원지로서 대륙 연안부를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본 열도가 일찍이 피의 재배화의 무대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두도 또한 '일본 원산'의 재배식물이다. 아베 쥰阿部純 씨는 대두의 품종이 재배형인 종래의 품종과 그 토지에 있던 야생형 돌콩의 교잡을 반복하여 성립해 왔다고 생각한다(Xu- 외. 2002). 대두는 좁은 일본 열도의 안에서도 여러 가지 지방 품종으로 분화되어 있다. 단바丹波 지방의 검은콩, 검은콩과 일반 품종의 중간형이라 생각되는차콩(茶豆), 야마가타현 쇼나이庄内 지방에 있는 독특한 향을 지닌 '다다차콩' 등은 그 한 예이다. 대두만이 아니라 콩류는 주곡에 버금갈 만큼 중요한 작물로, 이 책 제4장의 카시와기柏木 씨에 의하면, 인류가 식용으로 재배하는 콩과식물은 80가지 정도 있다고 한다. 또한 그 재배의 역사도 곡류에 필적할 만큼 오래된 것이 많다(前田 1987). 일본 열도에서도 이 책의 츠바키자카 야스요 씨나 오바타 히로키小畑弘己 씨의 논고에 있듯이, 대두 외에 팥과 녹두의 무리가 조몬시대부터 이용되어 왔다. 다만 콩과의 작물들은 왜인지 강한 지역고유성을 가진 것이 많고, 지금은 전 세계에 퍼진 대두도 아주 최근까지는 동아시아의 고유종이었다. 


피와 대두가 일본 열도에서 재배화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하면, 조몬시대의 일본 열도에서도 이미 서서히 재배화가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조문시대의 농경을 완고하게 부정하는 것은 일본 열도만이 특수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똑같다. 도대체 어디에서 그러한 사고방식이 나온 것일까?




건너온 농경의 요소


그렇다고 해도, 일본 열도에서 농경의 요소 대부분은 외부에서 건너온 것이다. 곡류에서도 앞에 적었던 피 이외의 대부분, 예를 들면 벼와 밀, 보리, 조, 기장 등은 모두 건너온 산물이다. 뿌리작물인 토란, 고구마 등도 마찬가지이다. 


여러 가지 재배식물이 일본열도에 건너온 걸 최초로 계통적으로 논한 것은 아마 아다치 이와오安達巌 씨일 것이다. 그 저서 <日本食物文化의 起源>(1981)에는 조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각 시대에 일본 열도에 건너왔던 재배식물이 열기되어 있다. 이 초판은 1981년으로 30년 가까이 전의 것으로 정보가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보아 정당성을 잃지는 않았다. 시대마다의, 건너온 재배식물의 수를 아다치 씨에 기반을 두고 정리하면 표1과같다. 여기에서도 밝히듯이 나중의 시대에 운반되어 온 것이지만, 건너온 시기로는 7-8세기(아스카·나라 시대)와 18-19세기(에도 후기·메이지 시대)로 크게 두 시대가 있었다. 


시대구분(주석)

건너온 동식물 수

%

조몬시대

야요이시대(기원전 3-기원후 3세기)

고분시대(기원후 4-6세기)

아스카, 나라 시대(기원후 7-8세기)

헤이안 시대(794-1184)

가마쿠라, 무로마치 시대(1185-1543)

남만 무역시대(1544-1602)

전기 도쿠가와 시대(1603-1745)

도쿠가와 후기, 메이지 시대 전기(1746-1900)

현대

24

20

21

48

22

12

16

88

159

46

5.3

4.4

4.6

10.5

4.8

2.6

3.5

19.3

34.9

10.1

총수

456

100

표1 일본 열도에 건너온 재배동식물의 시대별 수(아다치, 1982). 

주석: 시대구분은 연대치를 포함해 아다치의 기술을 그대로 이용. 또한 아다치 이후에 건너온 것은 포함되지 않음.



이렇게 보면, 농경의 도래, 전파에는 세계화의 경향이 이미 아스카 시대부터 밀어닥치고 있었던 것이 재확인된다.



농경에서 북쪽의 요소와 남쪽의 요소 -유전적 다양성의 중요성-


일본 열도에서 농경의 요소를 볼 때, 또 하나 언급해야 할 건 그것이 크게 말하여 남북 두 가지 요소군으로 나뉜다는 점이다. 그 전체상은 이 책에서는 타카미야 히로토高宮広土 씨와 야마다 고로山田悟郞 씨·츠바키자카 씨의 논고에 기술되어 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세 사람의 논고는, 한쪽은 류큐 열도를, 다른쪽은 홋코이도를 중심으로 한 것으로, 그들 양극을 빼면 일본 열도의 농경문화는 일원적이란 견해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래도 나는 일본 열도의 농경의 요소는 남북 두 가지로 나눈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예는 한 종에 속하는 작물 안에 남북 두 가지의 요소를 가진 작물이 있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예가 오오바 타카시靑葉高(1916-1999)에 의하여 상세한 연구가 행해진 순무, 파 등의 채소들이다. 순무는 전 세계에 널리 분포하는데, 일본 열도를 중심으로 고려하면 서양종 순무와 일본 순무의 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 양자는 형태적으로도 분화되어 있는 외에, 용도도 다르다. 일본 순무는 찌개와 절임의 재료로 일본 요리에서는 널리 사용된다. 특히 교토의 '센마이즈케'는 일본 순무의 절임으로 유명하다. 한편 서양종 순무는 주로 일본해 쪽부터 동일본의 각지에서 재배되는, 굳이 말하자면 소형이고 추위에 강한 품종군이다. 잎에 '잔털'이라 부르는 가느다란 털이 나는 것도 특징의 하나이다(靑葉 2003). 


두 가지 계통의 경로를 더듬어 찾으면, 일본 순무의 계통은 중국 대륙에서 겨우 도달한 것에 반하여, 서양종 순무는 중국 동북부에서 시베리아를 경유해 유럽에까지 이른다고 생각한다. 즉 두 가지 순무의 계통은 그 계보도, 도래한 경로도 크게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다.


파에 대해서도 비슷한 점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일본에서 재배되는 파의 품종에는 크게 휴면형(겨울철에는 성장을멈춤)의 품종군과 겨울에도 생육을 계속하는 품종군이 있다. 전자는 추운 겨울의 기후에 적응해 뿌리에 흙을 수북히 덮어 재배한다. 이렇게 하여 동해로부터 식물체를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흙을 덮은 부분은 하얘지고, 그곳에 당이 모여 달아진다. 이 계통의 파는 가하군加賀群이라 부르며, 칸토우 이북의 지역에 많다. 한편 녹색의 잎 부분이 많은 계통은 구조군九条群이라 부르며, 서일본을 중심으로 재배된다. 구조 파의 계통은 희고 단 부분이 적다.칸사이 지방에서 스키야키에 흰 파 없이 양파를 넣는 건 구조 파가 흰 파처럼 달지 않기 때문이라고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들 두 가지 계통은 중국 대륙에서도 마찬가지로 위도대에 평행하게 분포하고 있다고 한다.


순무와 파의 사례에서는 남북으로 다른 분포를 나타내는 것은 품종이었다. 즉, 종으로서는 일본 열도 전체에 퍼져 있다. 여기에서 소개한 것 같은 남북차를 보존한다고 하는 건 유전적 다양성, 즉 종 안의 다양성을 보존하는 것이기도 하다. 순무와 파 외에도 무가 비슷한 남북 분화를 보이는 것을 이 책 기고4에서 야마기시 히로시山岸博 씨가 기술하여 흥미롭다. 


'남북 분화'는 이미 이 시리즈 제3권 제3장에서 타케다 카즈요시武田和義 씨에게 해설을 부탁한 보리에서도 볼 수 있다. 보리는 곡류로서 세계 제4위의 생산량을 올리고, 거의 전 세계에서 옛날부터 재배되어 온 곡물의 하나이다. 보리 연구의 대가였던 타카하시 류헤이高橋隆平(1910-1999)는 일본 열도의 재래 보리 품종의 지리적인 분포를조사해, 일본해 쪽의 지역에서는 겉보리라 부르는 품종군이 많은 데 반해 태평양 쪽과 세토나이瀨戶內에서는 쌀보리라 부르는 품종군이 많다는 것을 밝혔다(Takahashi 1955 이 시리즈 제1권 지도 참조).


일본 열도의 보리 품종의 분포에 관하여 다카하시의 원칙에는 포함되지 않는 예외가 하나 존재한다. 그것은 야마다 고로 씨가 언급하고 있는, 쌀보리의 존재이다(山田 2009 이 책 52쪽). 쌀보리는 보리의 한 품종 집단으로, 혼슈우 부근에서는 칸토우의 남부부터, 큐슈 남부를 제외한 태평양 쪽에 분포하는 품종군이다. 그런데 어쩐지 이품종군이 기원전 5세기 무렵부터 홋카이도 하고도 동쪽 부분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 기원을 더듬어 가면, 러시아의 연해주에 다다른다고 한다. 라성裸性의 보리가 왜 이 땅에 있는지, 이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다룰 문제의 하나로 기억해 놓고자 한다. 


그럼, 남북차를 볼 수 있는 건 어떤 작물이나 가축만이 아니다. 대저 일본 열도의 잠재식생은 북(동)으로 낙엽광엽수림, 남(서)로 상롭광엽수림이란 식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지금은 숲의 이 분포를 보기 어려워졌지만, 그래도사람이 드문 지역 등에서 방치된 토지의 식생은 원식생에 비슷하다. 게다가 작물과 가축에 수반하는 동식물에도 유사한 남북차를 확인할 수 있다. 요네카와 히로미치米川博通 씨와 모리와키 카즈오森脇和郞 씨는 일본 열도에서생식하는 생쥐의 두 가지 아종에 대하여, 그들의 지리적 분포를 조사했다. 생쥐(M. musclus)에는 무스클러스musclus와 카스타네우스castaneus의 두 가지 아종이 알려져 있다. 일본 열도에서는 1990년대 당시 대략 모리오카시盛岡市 부근을 경계로 그북쪽에는 카스타네우스가, 그리고 남쪽에는 아종 무스클러스가 분포하고 있었다. 다만 재밌는 점으로 중국에서는 분포의 남북 패턴이 달라서, 카스타네우스는 남부에 분포하고 있다. 이 일본과 중국에서 남북의 역전이 왜 일어났는지는 아직 수수께끼이지만, 어쨌든 이와 같은 남북 분포를 볼 수 있다(米川·森脇 1993).




요소

동(북)의 요소

서(남)의 요소

경계선

생태계

산림식생

식재 벚나무


낙엽광염수림(졸참나무)

왕벚나무·많음


상록광엽수림(조엽수림)

산벚나무

피안벚나무·많음


재배식물

순무

보리


벼(주2)

서양종 순무가 존재

밑동에 흰 부분이 많은 파

'서쪽형(전 세계 수준에서:주1)이 있음

겉보리·많음(사츠몬擦文 시대의 홋카이도)

두터운 흙덮기에 저항성 품종·적음

타입1·많음(주3)

주로 일본 순무

잎파

주로 동아시아형

쌀보리·많음

많음

타입4(주3)


동물

연어(주4)

많음

적음


수반종

카스타네우스

무스클러스


표2 남북(동서)로 분화된 일본 열도의 동식물 요소의 예

주1. Takahashi(1955)에 의함

주2. 벼의 종자에 10cm 두께로 흙을 덮었을 때의 출아율(싹이 지상으로 나오는 비율), 佐藤(1993)

주3. 野沢樹(2006)에 의함

주4. 산란하는 하천의 하구





표2에 지금까지 기술한 남북의 경계를 ①부터 ④의 번호로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똑같은 남북이라고 하더라도 그 경계는 물정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다르다. 더구나 이 경계선은 보리 품종에서 '서쪽형' '동쪽형'을 나누는 경계선에 대체로 일치한다. 보리에서 이 경게선은 조선반도 남부를 지나, 중국 대륙에서는 회하와 진령산맥을 지나고 더 서쪽으로 뻗고, 히말라야의 남쪽 산기슭을 지나 인도 북부에 이르고 있다. 나는 이 선을 타카하시의 업적을기리며 '류헤이 라인'이라 부르고 싶다. 


또한 일본 열도의 남의 요소는 전 아시아적인 시야에서 보면 조엽수립 문화의 요소와 겹친다. 북의 요소는 사사키 타카아키 씨에 의하면 '졸참나무숲 문화'의 요소이고(1993) 또한 조엽수림 문화의 남쪽에는 '우기에 잎이 나오는 숲 문화'라고도 말할 수 있는 문화가 펼쳐져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교토의 먹을거리와 農의 특수성 -시론 


그런데 교토는 '남북 두 가지의 일본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여기에서의 의론 가운데 어느 위치에 있는 것일까? 교토는 우리의 연구소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기에 조금 야릇한 마음이 없지 않지만 여기에서 시론이란 형태로 문제점을 정리하고자 한다. 


교토는 도쿄(에도)나 오사카에 비해 바다에서는 비교적 먼 지역이다. 쇼와 초 무렵까지는 교토시의 남부에 오구라이케巨椋池라는 거대한 연못이 있어 근대까지는 요도가와강을 오르던 배는 지금의 후시미伏見 근처에 배를 댈 수 있었는데, 그래도 오사카만에서 잡힌 물고기 가운데 산 채로 교토로 운반된 건 갯장어 정도였다고 할 수 있다.한편 교토에서는 고등어, 청어, 대구 등을 건조, 또는 염장하여 운반하는 보존식의 문화가 있었다. 그들은 각각 고등어 초밥, 거두절미해 발기어 말린 청어, 대구포 등으로 교토 요리의 식재료로 사용되고 있다. 이들 식재료는 모두 일본해에서 잡은 것으로, 지금의 후쿠이현 츠루가敦賀에서 뱃짐을 풀어 비와호를 경우해 교토로 전해졌다. 요컨대, 교토에는 물고기에 대하여 동(북)의 요소와 서(남)의 요소가 혼재해 온 것이다.


또한 교토를 시작으로 오사카 등 칸사이에서 국믈을 내는 데 사용되는 다시마도 홋카이도 등 북일본에서 수확되어 똑같이 일본해 쪽을 경유해 운반되었다. 한편, 앞에 적었던 순무, 파 등의 채소에 대해 말하면, 이른바 교토 채소라고 할 수 있는 '쇼고인聖護院 순무'도 서쪽형 품종이다. 다만 교토시 북부의 타카가미네鷹峯 마을에서는 흰 파의 계통에 속하는 품종이 옛날부터 재배되었다고 한다. 식물성 식재료에 대해서도 교토는 동서(남북)가 뒤섞였던 토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교토는 과거 1000년 이상에 걸쳐서 천황이 계속 소재하여 각지에서 문화 요소를 쭉 흡수해 왔다. 물론 그 구심력이 쇠퇴했던 시대도 있었지만, 그래도 전체로는 높은 구심력을 유지해 왔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교토가 표2의 경계선 가운데 어디에나 가깝고, 결국은 기후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동서(남북) 두 가지 요소의접점 가까이에 있어 늘 그들을 융합시켜 왔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곧 숲을 시작으로 하는 생물상과 그것에 지탱된 문화의 다양성이 교토의 구심력의 기원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 대표인 두 가지 숲(낙엽광엽수림과 상록광엽수림)의 쌍방을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것도 교토의 큰 특색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더구나 교토 분지의 숲의 변천에 대하여 이 책 기고1에서 코다 시게유키光田重幸 씨가 종래의 해석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코다 씨의 해석이 맞다면, 교토는 태고에는 지금보다 훨씬 강하게 북의 요소에 지배되고 있었을 것이다.


교토에는 고대부터 도래인인 진씨秦氏가 있었다고 하며, 교토시 우쿄구右京区에 있는 태진太秦이 그 땅이라고도 이야기한다. 도래인은 조선반도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말하지만, 그 생물학적인 출신에 대해 상세한 건 알려지지 않았다. '도래인'은 사실은 지금의 유럽의 사람들에 가까웠을 가능성을 검토해도 좋다.




지구 환경문제에 미치는 눈길


그래서 이 책은 "유라시아 농경사"라고 제목을 지은 시리즈의 네 번째인데, 이 시리즈는 지구연에서 연구 프로젝트 '농업이 환경을 파괴할 때'의 성과를 모체로 하고 있다. 지구연의 연구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로서 이 프로젝트도 지구 환경문제 해결에 기울이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프로젝트의 문제의식 전체상은 이 시리즈 마지막 권의 ㅈ베5장에서 소개하고, 여기에서는 '여러 재배식물과 농경문화'라고 제목을 붙인 이 권에 요점을 펴 보이고자한다.


이 책에서 핵심어 가운데 하나는 '생물다양성'이다. 농경의 분야에서 고려하면, 생물다양성은 재배식물의 종류의숫자와 각각의 재배식물에서 품종의 숫자 등으로 이해된다. 고시히카리 일변도의 벼농사 사정은 품종의 다양성 상실이다(이것은 유전적 다양성이라 할 수 있음). 채소에서 제철의 상실, 한 지역에서 행해지는 대규모 재배 등은 종의 다양성 상실의 전형적 사레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생물다양성이 사라지면 작물과 품종의 이름이 사회에서 사라진다. 그에 의하여 전통 요리법과 재배법이 사라진다. 농경에 수반한 의례가 사라진다. 그리고 이들 과정을 통하여 문화의 다양성이 사라져 간다.


1만 년에 걸친 농경의 역사 속에서 인류가 일관하여 행하여 온 것은 농경의 무대인 '마을'에서 서비스를 구하는 행위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산성 향상을 위한 말하자면 부산물로서 여러 차원에서의 다양성을 필연적으로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인간의 이 행위는 사회집단으로서의 행위일 뿐만 아니라,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국가 권력에 의한 강력한 후원이 있었다. 일본 열도에서는 '논벼농사' 수용의 강제와 그에 대한 사람들의 저항이란 구도도 있어서 이야기는 복잡하고, 단위면적당 수확도 별로 증가하지 않았다(佐藤 2005).이 양상이 일변하는 건 메이지 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로, 단위면적당 수확량은 그뒤 130년 동안 3배가 되는 대신에 재배되는 품종의 숫자(유전적 다양성)은 대폭 후퇴했다.


그러나 이 130년 동안 다양성의 상실에 의하여 발생할지도 모르는 여러 가지 문제, 예를 들면 병과 해충의 유행에는 두드러진 것이 없었다. 다만 1993년에 북일본을 중심으로 심대한 피해를 발생시킨 냉해에 의한 흉작은 유전적 다양성의 감소가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이 해의 냉해는 여름철 날씨가 좋지 않고 벼의 생육이 늦어서 생산이 떨어지는 '지연형 냉해'와 개화 등 생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돌발적인 저온 등이 내습하여 일어나는 지연형 냉해가 있다. 이 해의 냉해는 지연형의 양상으로 정확히 벼가 개화하는 시기에 '높새바람'(오호츠크 고기압에서 부는 차가운 북동풍)이 불었던 것이 큰 원인이 된다. 재배되는 품종이 다양하고, 또 파종 등의농사에도 다양성이 유지되고 있다면 이 정도의 피해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병과 해충의 큰 피해가 발생하지 않는 데에는 농약의 개발이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농약은 가령 그 독성이 낮더라도 다량의 에너지를 생태계로 가지고 들어간다는 관점에서는 문제가 남는다. 화학비료의 대량 시용에 의한 환경파괴의 대가로 손에 넣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이 고려하면 농경, 또는 그에 의한 생산성의 추구는 아직도 환경에 부하를 계속 주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큰 기후변화가 예상되고 있는 현재, 품종의 다양성만이 아니라 작물의 다양성을 일정 정도로 계속 유지하는 농업정책이 매우 중요하다. 다양성의 유지는 생산성에 영향을 주는데,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의 실현에는 그것을 수용하는 사회와 개인의 합의가 그 전제라는 점은 말할 필요가 없다.


728x90

'농담 > 읽을거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조로가이케에서 보는 교토의 옛 문화  (0) 2018.08.21
농경과 문화의 전파  (0) 2018.08.20
풍토에 대한 방황  (0) 2018.07.19
낟알 문양의 유라시아  (0) 2018.07.19
맥류 풍토의 주역들  (0) 2018.07.1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