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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4




기고1

미조로가이케深泥池에서 보는 교토의 옛 문화

미츠타 시게유키光田重幸




시작하며


교토에서 산 지 40년 이상이지만, 아직도 교토는 불가사의한 곳이라 생각한다. 천년의 수도라는 겉옷의 너머에 있는 옛 문화, 곧 헤이안 천도보다 훨씬 예전의 이 땅은 '점착질의 어둠'이라 해도 좋을 만큼 필터에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화려한 수도 문화를 연출하기 위하여 그 이전의 문화를 표면에서는 의도적으로 없애 버렸다고 생각하는 쪽이 좋을지도 모른다.


버블 무렵, 교토의 번화가인 시조가와라마치四条河原町 주변에서 땅투기가 있었다. 건물이 무너지기 직전에 근처의부인이 현장감독에게 "이곳의 미이사마(뱀신) 어떻게 하나요"라고 사납게 대들었다고 한다. 내가 사는 후난부府南部에서는 뱀신 신앙이 아직 살아 있어, 이것도 반드시 꾸며낸 이야기라 생각하지 않는다. 기온 마츠리의 주신이지만 소머리를 한 신인 점이 평소 얼마만큼 의식되고 있는 것일까? 어떤 번화가일지라도 생각치도 않은 곳에서 옛 문화가 얼굴을 슬쩍 비치는 것이 교토답다. 


'쿠라마鞍馬의 히마츠리火祭'로 대표되는 교토의 불 신앙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이 많다. 예전부터 나는 '아오이마츠리葵祭'의 근저에 '불의 풍요 의례'가 잠재해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곧 '산성국 풍토기 일문逸文'에 있는 화뢰신火雷神에 의한 다마요리비메玉依姫의 임신 이야기는 <고사기>가 전하는 카무야마토이와레히코노미코토カムヤマトイワレヒコノミコト의 황후 선정의 단계의 에피소드와 다른 듯하나 대체로 같다는 점, 거기에 등장하는 타타라히메라는 신격은 헤이안 시대에 타타라메라고 불렀던 식물이 제비꽃이라는 점으로부터 제비꽃에 관련된 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 다마요리비메가 '제비꽃을 나를 대신하는 것으로 여기세요'라고 꿈에서 이야기했다는 전승이 있는 점. 제비꽃의 꽃은 다갈색 병 모양이고, 두 갈래로 나뉜 잎자루 아랫 부분에 위치한다는 점으로부터,여성의 신격으로서의 필연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 그 제비꽃을 화전 적합지의 지표식물로 가정한다면 '쿠라마의 히마츠리'에서 제창되는 "사이레, 사이료우'라는 성원하는 소리가 순순히 "자, 넣자, 자, 넣겠다(표면적으로는 불을 넣는 것이지만, 별도의 육체적 의미도 있음)"라고 이해되어, '아오이마츠리'와 '쿠라마의 히마츠리'의 수수께끼가 동시에 해결된다는 것을 논했다.


그것은 교토의 원주민이라고도 할 만한 카모賀茂 씨에 관련된 교토의 옛 문화가 지닌 한 요소일 것이다. 다만, 그것을 문헌으로 입증하는 것은 곤란했다. 제비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증한 연구는 과거에 한번도 실시되지 않았는지, 제비꽃의 의미를 언급했던 고문헌조차 전혀 없다. 그러한 중, 카모 씨의 거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미조로가이케의 이탄층에서 출토된 메밀 꽃가루에 대해서는 가모 씨와 화전을 연결시키는 유일한 '물적 증거'가 아닐까하고 당시의 나는 생각이 들었다. 메밀속은 원래 일본에서는 자생하지 않은 식물로서, 바람에 의하여 날아가는 일이 거의 없는 충매 꽃가루를 가진다. 그 꽃가루가 뒤에 기술하듯이 미립탄과 함께 연못의 퇴적물에서 촐토된다는 건 2000년 이상 옛날에 연못을 둘러싼 산의 비탈이 불태워져, 그와 관련해 메밀속 식물이 재배되었던 유력한증거인 까닭이다.




미조로가이케의 출토품이 말하고 있는 건?


교토시 키타구北区와 사쿄구左京区에 걸쳐 있는 미조로가이케는 평지에 있으면서 빙하시대의 생물상이 짙게 남아 있는 장소로서, 국가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1977년-1980년에 행해진 종합학술조사에 의하여 연못의 바닥에 퇴적된 이탄층에 약 10만 년 분량의 역사가 새겨져 있고,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에 포함되어 있는 화산재와 꽃가루 분석의 성과는 <미조로가이케의 자연과 사람>(교토시 문화관광국 1981)에 정리되어 있다.


그 개략은 이러하다. 꽃가루 분석을 담당했던 나카호리 켄지中堀謙二 씨에 의하면, 연못의 주변에서는 몇 번인지한랭한 기후와 온논한 기후가 반복되어, 최종 빙하기인 약 1만 년 전에는 낙엽광엽수림이 퍼져 있었다. 그뒤 '조몬 해진海進'이라 부르는 온난기를 맞이해, 7000년 정도 전에 난지성 조엽수림(상록광엽수림)으로 뒤덮였다. 조몬 만기부터 야요이 시대에 걸쳐서, 틀림없이 땔감과 주거재료로 숲에서 대규모 수탈이 시작되어, 소나무를 중심으로 하는 2차림으로 변했다. 즉, 이미 그 무렵에 196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마을산의 원래 풍경이 시작된 것이다.


이 분석은 킨기 지방 그밖의 사례와도 큰 모순은 아니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이들의 역동적인 변화의 사이에서 기묘한 변동이 틈으로 살짝 엿보이는 건 최근까지 간과되어 왔다. 그 하나는 1만 년 이상 전부터 증가해 최종 빙하기 무렵에 정점에 이르고, 조몬 만기 무렵까지 계속된 다량의 숯(미립탄)이 퇴적된 것이다. 또 하나는, 꽃가루 분석의 결과로부터 극상림인 조엽수림과는 공존하지 않을 2차림과 초지 식생에 속하는 초목이각각의 시대의 특징을 나타내면서 어느 시기에는 상당히 다량으로 출현하는 점이다(그림1).


그림1 오구라 준이치椋純一(2002)에 일부 추가




전자에 대해서는 교토 세이카精華 대학의 오구라 준이치 씨의 연구에 의해, 그 양적 변화가 상세하게 보고되었다.기존에 산불에 의한 것이라 이야기되어 온 숯의 양이 한랭기에 오히려 급증하는 점, 그 양에는 확실히 시대적 변화 경향이 있고, 본래 확률적으로는 거의 일정, 혹은 온난기에 증가할 산불에 의한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점.즉, 숯의 증감은 단순한 자연현상에 의한 것이란 해석은 곤란하며, 아마 무언가 인위적 요인이 짐작되었다.


또 하나의 2차림과 초지 식생 구성원의 꽃가루 양이 변동하는 것은 지금까지 거의 중시되지 않았다. 오구라 씨는이 문제를 미립탄과 관련지어 처음으로 논한 점에서, 역시 특필할 만하다. 그 연구에서 남겨 둔 최대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그가 이 의미에서는 별로 중시하지 않았던 오리나무속일 것이다. 앞에 적은 교토시의 보고서에서 나카호리 씨는 "산지성 오리나무 종류는 2차림의 구성원이며, 극상림과는 공존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서 볼 수 있는오리나무속은 습지성의 종류이다"라고 했다. 같은 시기에 2차림의 대표적인 구성원인 소나무속의 꽃가루가 조금밖에 출현하지 않는 점으로부터, 나카호리 씨의 견해는 언뜻 보아 올바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리나무속 식물이 산지성인지 습지성인지를 논하는 과정에서,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2차림의 구성원인 물푸레나무속이 오리나무속의 증감과 거의 똑같이 행동을 하고 있는 점에서, 나카호리 씨는 언급하지 않았다(오리나무속에 비하여 꽃가루의 양이 적은 것은 물푸레나무속은 충매화이고 꽃가루의 절대량이 원래 적기 때문임). 이 물푸레나무속의 종이 나카호리 씨가 오리나무 종류에서 생각했듯이 역시 습지성 종류라면, 일본에서는 유일한 습지성 종인 들메나무가 된다. 현재 일본 열도에서 들메나무의 분포는 중부지방 이북이며, 1만 년 이전의 한랭기는 별도로, 온난화가 진행된 조몬 해진 이후의 조엽수림 시대의 미조로가이케와 그 주변에서 들메나무가 대량으로 살고 있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물푸레나무속의 식물은 현재도 미조로가이케 부근에서 예사롭게 있고, 온대 지역부터 난대 지역까지 널리 분포하고 있는 산지성 물푸레나무 종류, 게다가 골똘히 생각해 말하자면 쇠물푸레나무가 중심이라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그림2).


그림2 교토의 쇠물푸레나무. 교토 대학, 花明山 식물원 표본

 

 



밤나무속 꽃가루는 거의 1만 년 전부터 많이 나오기 시작하여 조몬 해진 이후는 오히려 증가하고, 메밀속의 꽃가루가 출현하는 것과 거의 같은 시기 이후 다시 적어진다. 밤나무는 전형적으로 양지에서 잘 자라는 나무로, 너도밤나무와 물참나무의 숲과는 공존할 수 있지만, 조엽수림과는 공존할 수 없다. 조엽수림대에서는 밤나무도 또한 산지성 2차림의 지표식물이다. 충매화이고 꽃가루의 절대량이 적은 밤나무가 조몬 해진 이후의 온난기에 이만큼 나왔다는 건 소나무속 이외의 구성원을 중심으로 하는 2차림이 퍼져 있었다고 생각할 만한 것이다. 소나무속은 부식토 등의 유기물 층이 거의 사라진 토지에서 우점하기 때문에, 조엽수림의 파괴가 곧바로 소나무숲의 성립으로 직결될 리도 없다. 대량의 밤나무속 식물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계속해서 보였다는 것은 유기질을 일정량 이상 포함하도록 2차림을 유지관리했던 사람들이 있었단 것을 의미한다.


이상의 점을 고려하면, 나카호리 씨가 생각한 '오리나무속→습지성 오리나무'라는 전제 그것이 매우 부자연스러워진다.


그럼, 이 오리나무속 식물은 무엇일까? 미조로가이케 주변에는 현재 습지성 오리나무가 약간 있어, 완전히 그것을 배제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물푸레나무 종류 등과 마찬가지로 산지성 오리나무 종류를 먼저 고려할 만하다. 조몬 해진 이후에도 꽃가루는 계속해서 출현하고 있기 때문에, 난대에서도 온대에서도 생육할 수 있는 종류가 먼저 그 후보가 된다.  곧, 물오리나무와 좀잎산오리나무, 넓은잎오리나무(Alnus sieboldiana), 좀사방오리나무(Alnus pendula) 가운데 어떤 것인지, 또는 23종이 타당할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산지성 오리나무속 식물은 뿌리에 질소고정능력이 풍부한 방선균을 공생시키기 때문에, 척박한 땅에서도 잘 생육한다. 그 때문에 메이지 이후 사방용으로 식재되어, 현재의 분포에서 과거의 분포를 추정하기가 어렵다. 정확히는, 이들 오리나무속의 꽃가루 형태와 DNA로부터, 어느 종인지 특정할 수 있도록 연구가 진행되길 기다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미립탄微粒炭과 여러 꽃가루의 연동적 변화는, 무엇을 의미할까?


미조로가이케의 보링 코어에서는 연대의 지표가 되는 화산재 층이 몇 개나 끼워져 있다. 그 가운데 깊이 360-363cm에 있는 건 아카호야アカホヤ 화산재라고 부르는 약 7300년 전(보정한 뒤의 수치)의 것이다. 깊이 567-568cm에 있는 것은 울릉 오키隱岐 화산이라 부르는 약 1만7백 년 전(같음)의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층상에 퇴적되어 있고, 산상産狀으로부터 1차 퇴적이라 볼 수 있기 때문에 특히 중요하다. 이것보다 깊은 곳에 있는 화산재는 산재하는 경향으로 퇴적되어 있어 2차 퇴적일 가능성이 높다.


미립탄의 양과 반비례하듯이 변동하고 있는 수목은 오리나무속과 물푸레나무속이다. 한편 정비례하듯이 변동하고 있는 것은 사초과와 벼과, 포자식물 같은 풀이다(깊이 800cm보다 얕은 부분에 한함). 오리나무속과 물푸레나무속의 식물은 이미 논했듯이 산지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변동으로부터 순순히 결론지을 수있는 것은, 1. 오리나무속과 물푸레나무속 식물이 많이 살고 있던 산의 비탈은 반복해서 불탔다. 2. 그 빈땅에 양지를 좋아하는 벼과, 사초과, 포자식물이 번성했다, 는 점일 것이다.


아카호야 화산재보다도 얕은 층에 한정하면, 조엽수림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밤나무속의 꽃가루가 분명히 늘어나기 시작하는 점, 소나무속의 꽃가루(현대에 연결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적송이라 판단해도 좋을 것임)가 점차 증가하는 점으로부터, 밤나무의 선택적 벌채 회피 또는 그 반재배가 행해지고, 병행하여 토지에서 유기물의 수탈이 진행되었다고 보아도 좋다. 곧, 화전 같은 산지의 농경이 행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앞에 기술했듯이, 밤나무속의 꽃가루는 약 1만 년 전부터 많이 나오기 시작한다. 같은 시기에 칠엽수도 증가하고있기 때문에, 그 무렵부터 두 종의 선택적 벌채 회피 또는 반재배가 행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똑같은 시기에 미립탄의 출현량이 두 번째 정점을 맞이하기 때문에 어떠한 산지 농경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그렇다면, 1만 년 전 이후부터 메밀속 꽃가루의 출현까지 계속된 오리나무속 식물의 꽃가루는 야마나시현 나라다奈良田에서 최근까지 행해졌듯이, 지력 회복을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심어졌을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에 비하여 깊이 680cm 부근에서 정점에 이르는 미립탄의 대량 출현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낙엽성 졸참나무종류가 전성기를 맞이하는 이 시기는, 대륙형 건조 기후가 퍼졌다고 생각하는 견해도 있고, 산불도 고려에 넣어야 할지도 모른다. 중위 화산재라고 부르는 것의 퇴적이 확인되는 시기가 있지만 산재해 있으며, 2차 퇴적의 가능성을 완전히 버릴 수 없기 때문에, 연대를 짐작하기 어렵다. 분명한 건, 아이라 화산보다는 상위이기 때문에, 2만 년보다는 가까운 시대인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건조 기후라 하더라도 바람에 휘는 일이 적고 불을 붙이기도 나쁜 졸참나무 종류의 숲에서, 이만큼의 산불이 자연적으로 일어났던 것일까? 오구라 씨의 연구에 의하면, 이 시대에도 출토되는 미립탄의 대부분은 초본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화전의 시작'이라 생각하기도 현재의 자료로는 너무 무모하다. 한 가지 가능성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건 '수렵을 위해 의도적으로 일으켰던 산불'이다. 빈땅에 자라던 어린 나무와 참마 종류, 풍부한 풀은 사슴과 멧돼지 등의 동물을 불러모은다. 즉 '잠복하고 기다리는 사냥의 장'으로서 중요하다. 사누키암과 규질암 같은 딱딱하지만 깨지기 쉬운 석기로 큰 나무를 베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만, 형성층 부분까지를 고리 모양으로 자르는 '고리 모양 껍질 벗기기'를 한다면 수목은 말라 죽는다. 그뒤 불을 놓으면 숲을 태우는 건 어렵지 않다. 이만하면 구·신석기시대에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와 같은 '잠복하고 기다리는 사낭의 장'을 정기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반복해서 초원에 불을 놓았던 것이 아닐까?


최근 들어서 미조로가이케의 남서쪽에 펼쳐진 식물원 북쪽 유적군 출토품의 분석이 진행되어, 구석기시대의 석기와 조몬 중기 후반의 토기, 조몬 만기의 옹관묘, 야요이 시대 전기의 토기, 고분 시대 중기의 수혈주거터 등이 발견되고 있다. 현재의 교토시 지역에서 가장 풍부하고 연속된 유적을 볼 수 있는 것이 이 지역이다. 그곳은 또, 카미카모上賀茂 신사와 오카게御蔭 신사(함께 '아오이마츠리'의 거점 신사)를 연결하는 선 위에 있으며, 카모 씨의 거점이었던 지역이기도 하다. 생태학적인 지식을 사용해, 불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 문화를 전하던 카모 씨의모습이 어슴푸레하면서 눈앞에 선연히 떠오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나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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