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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3



기고6

풍토에 대한 방황 

-스벤 헤딘과 오오타니 코우즈이大谷光瑞

쿠라타 타카시鞍田崇




"저것은 다른쪽에서… 무의식적인 탐색이었던 것이 아닐런지 생각하고 있다고" -<두 가지의 동시대사>



메이지 41년(1908) 11월 9일 오후 6시, 달빛이 비추는 와중에 일본 최초의 1만 톤이 넘는 호화 여객선으로 같은 해 봄에 준공된 덴요우마루天洋丸가 고베항에 입항했다.


선상에는 스웨덴의 탐험가 스벤 헤딘(1865-1952)의 모습이 있었다(그림1). 명저 <트랜스히말라야>로 알려진 3번의 중앙아시아 탐험을 마치고 3년 남짓한 귀국길에 오르는 참에, 도쿄 지학협회의 초빙을 받아 상하이에서 3일의 항해 끝에 요코하마까지 향하는 도중 잠시 들렀다.


그림1 티베트 민족의상을 입은 헤딘. "오늘 고베에 도착한 스벤 헤딘 박사"로서 메이지 41년, 11월 9일 신문 지면에 게재된 사진(게재지 불명). 헤딘 재단 소장 스크랩북.




도중 기항이라 하지만, 고베에서는 불세출의 대탐험가 헤딘에게 이 날은 일본에서 보내는 최초의 밤이기에, 옛 거류지의 미카도Mikado 호텔에서 환영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같은 호텔에 모였던 고베 측의 유지와 함께 그 도착을 기다렸던 건 '교토에서 온'(<오사카 아사히 신문>, 메이지 41년 11월 10일) 니시혼간지西本願寺 제22세 법주 오오타니 코우즈이(1876-1948)이었다.


헤딘과 코우즈이, 유라시아 내륙에서 수차례에 걸친 탐험을 기도했던 두 사람의 대면. 미카도 호텔에서 그들은 어떤 회담을 나누었을까?


당시 고우즈이는 신장과 몽골을 주요 대상으로 파견된 제2차 오오타니 탐험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이 이듬해인 1909년, 대원인 타치바나 즈이쵸우橘瑞超는 헤딘이 발견했던 누란 고성에 도달해, 저 이백문서李柏文書(중요문화재 <이백척독고李柏尺牘稿>, 그림2)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일본에 왔던 헤딘이 고우즈이에게 보여준 누란의 위치 정보에 의한 것이라 이야기된다. 


그림2 이백척독고. 중국의 정사 <진서晉書> 장준전張駿傳에 기재되어 있는 전량前凉의 서역 장리長吏 이백이 서역 여러 나라의 왕에게 보낸 편지의 초고라고 한다. 함화咸和 3년(328), 중요문화재, 류코큐龍谷 대학 학술자료센터 소장.




헤딘을 마중하려고 고우즈이가 교토에서 고베로 급히 달려간 것도 그러한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무언가 그 이상의, 굳이 말하자면 정신의 친환성 같은 것이 있었던 것처럼 생각된다.


도대체 그들을 중앙유라시아의 탐험을 하도록 자극을 주어 움직인 건 무엇이었을까?


예를 들면, 소년 시절에 눈앞에서 직접 보았던 노르덴시욀드Nordenskiöld의 웅대한 모습이 불러 일으켰던 '이상할 정도의 흥분'(헤딘 <탐험가로서의 나의 생애>)에 대한 기억, 또는 불교가 점점 동쪽으로 세력을 넓힌 경로를 해명할 만한 '불자이면서 아시아인'(德富蘇峰 <史傳大谷光瑞師>)이라는 자각.


탐험으로 두 사람을 휘몬 정신적 배경을 사전史傳은 그처럼 말해 왔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의도는 없지만, 그것만으로는 죄다 말하지 못하는 집요함을 가지고 그들은 인적미답의 땅을 지향했다. 명확한 목적의식을 넘어무언가가 그들을 사로잡아, 마치 열에 들뜬 듯이 두 사람의 혼은 익숙한 모국을 멀리 떠나 다른 풍토에 있는 유라시아의 오지를 계속 방황했다.


그리하여 탐험이란 용맹한 단어의 맞은편에서, 정처없이 방황하는 그들의 혼은 만났다. 그런 생각이 든다.


고베에서 시작해, 그뒤 1개월에 걸쳐서 일본에 머문 헤딘에게는 직접적 교류는 아니지만 늘 고우즈이의 그림자가붙어 다녔다.


아니, 일본에 도착하기 전부터 그러했다.


앞서 기술했듯이 공식적으로 헤딘이 일본에 온 이유는 됴코 지학협회에 의한 초빙이었는데, 같은 협회의 대표로서 대륙에서부터 그에 수행한 니시혼간지 출장원 호리 켄유堀賢雄는 고우즈이와 함께 유럽에 유학하고, 그 귀로에 감행한 제1차 오오타니 탐험대(1902-1905)에서 와타나베 텟신渡辺哲信과 함께 타클라마칸 사막을 종단한 인물이었다. 호리는 일본에 머물 때에도 통역으로 헤딘의 행선지에 동행한다.


헤딘의 체재 일정은 이동과 단기간의 방문지를 제외하면, 도교 지학협회 주최의 강연회와 저녁만찬 등 공식행사가 거듭되었던 도쿄에서의 2주일과 니시혼간지를 시작으로 교토 시내 및 킨기 각소를 방문한 교토에서의 1주일, 크게 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고우즈이와의 관계에서 말하면 물론 후자가 중요해지지만, 그것은 다음으로 기약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도쿄에 체재할 때에 연관된 에피소드를 적어 보겠다.





일본 옷을 입은 탐험 박사


미카도 호텔에서의 환영회 이후 덴요우마루에서 하룻밤을 보낸 헤딘은 다음날인 10일 저녁에 고베항을 출발, 12일 요코하마항에 입항했다. 공식적으로 도쿄에 들어간 건 15일이 되어서지만, 그 전날인 14일 숙소로 잡았던 요코하마 스웨덴 공사관에서 상경하여 니혼바시日本橋의 미츠코시三越 고후쿠텐吳服店을 방문한다.


"대탐험가 헤딘 박사는 이미 기록한 것처럼 14일 오전 9시 30분, 스웨덴 공사 및 부인과 동반하여 상경, 바로 마차를 타고서 미츠코시 고후쿠텐으로 향했다. 그 가게에서는 전날 미리 준비하도록 해, 접대계인 점원 타카야나기高柳 및 이즈미야泉谷 부부(아내는 독일인)가 현관에 마중하여 3층 사이로 청해, 대저 내빈 오오모리大森 박사 부부, 츠보이坪井 박사, 야마사키山崎 이학사 부부, 오가와小川와 야마가미山上 두 이학사, 호리 켄유 씨 등과 함께 가게 안을 안내했다."(<시사신보時事新報>, 메이지 41년 11월 15일 *읽기 좋게 적당한 구절점을 보완했다. 이하 신문에서 인용한 내용도 마찬가지)


동행했던 건 스웨덴 공사 부부 외에 지진학자인 오오모리 후사키치大森房吉 부부를 시작으로 인류학자 츠보이 쇼우고로坪井正五郞, 지리학자 야마사키 나오마사山崎直方 부부, 오가와 타쿠小川琢治, 야마가미 만지로山上萬次郞 등 도쿄 지학협회 소속의 각원, 그리고 호리 켄유였다. 가게 안을 순람한 일행은 그 가게의 사진실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오찬 자리에 도착했는데, 일본 요리에 흥이 났는지 식사 이후 헤딘은 새삼스럽게 사진실에 들어가 오가와의 하오리를 빌려 가게 안에 마련된 일본 옷을 입고, 부채를 한 손에 쥐고서 홀로 기념촬영을 했다(그림3). 오오모리, 야마자키의 두 부인을 독촉해 다시 함께 촬영할 정도로 신명이 났던 듯하다.


그림3 일본 옷을 입은 헤딘 씨. 메이지 41년 11월 14일, 도쿄 미츠코시 오후쿠텐에서 가게에 비치된 일본 옷은 입고 촬영, 다음날 15일의 <시사신보>에 게재되었다. 하오리는 동행했던 오가와 타쿠지의 것이라 한다. 헤딘 재단 소장 스크랩북.





"당일, 혼간지 호리 켄유 스님은 박사에게 줄 만한 일본 옷 한 벌을 그 가게에 주문했는데, 하오리는 검은 비단 이중에 다섯 개의 무늬, 검은 비단 이중의 상의, 금실과 은실로 무늬를 짠 띠, 센다이 특산 견직물로 만든 하의로 매우 공을 들인 것이며, 하오리의 무늬는 박사가 기사 작위를 받았을 때 황제에게 받은 문양을 기본으로 하여 도안한 것으로, 약간 긴 모양의 방패 모양으로 상부에 지구를 그리고, 중앙에 은색 띠를 비스듬히 긋고, 띠의 아래에 3개의 조개 모양을 늘어놓아서 자못 재밌는 고안이다." (<중외일보中外日報>, 메이지 41년 11월 17일)


헤딘은 예전부터 일본의 의복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고, 미츠코시를 방문했을 때 호리의 주선으로 일본 옷 한 벌을 맞추게 되었는데, 위의 인용에도 있듯이 학계에 공헌한 공으로 1902년 귀족의 반열에 들었을 때 스웨덴 황제 오스칼 2세에게 수여받은 휘장을 바탕으로(그림4) 일부러 특별주문한 가문의 문양을 고안할 만큼 심혈을 기울인 듯했다. 고등문관의 초임 봉급이 50엔 정도된 당시의 금액으로 '가격 300엔'(<京都日出新聞>, 메이지 41년 12월 3일)이었다고 한다. 


그림4 헤딘 씨의 일본 의상의 문양. 왼쪽 아래의 그림은 미츠코시에서 지었던 일본 옷에 들어간 가문 문양의 당초 도안. 미츠코시 점원과 상담한 결과, 새 모양의 투구 부분을 생략하고, 아래쪽의 방패만 흰색 원의 안에 나타내게 되었다. <時事新報>, 메이지 41년 11월 15일. 헤딘 재단 소장 스크랩북



고우즈이가 기증한 물품이었다(그림5).


그림5 일본 옷을 입은 헤딘. 일본에 체재한 기념으로 교토 기온祇園 마루야마円山의 나루이成井 사진관에서 촬영했다. 몸에 걸치고 있는 일본 옷은 도쿄 미츠코시 오후쿠텐에서 지었고, 고우즈이에게 선물을 받은 것. 메이지 41년 12월 6일. 스벤 헤딘 재단




츠키지니시혼간지築地西本願寺에서


다음날 15일 오후에 헤딘은 공식적으로 도쿄에 들어갔다. 그 이후 도쿄에 체재한 일정에서 주목되는 것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15일 환영식(도쿄 지학협회 회관), 환영만찬회(華族會館)

16일 코우쥰샤交詢社 오찬회(동 회사), 도쿄 제국대학 강의, 외무상 만찬회(외무상 관저)

17일 시가 시게타카志賀重昻 오찬회(동 관저), 와세다稻田 대학 방문, 영국 대사 만찬회(영국대사관)

18일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대학 방문, 도쿠가와 요리미치德川賴倫 후작 오찬회(동 관저), 만찬회(요코하마 스웨덴 공사관)

19일 오찬회(오코하마 스웨덴 공사관), 도쿄 지학협회 강연회(청년회관)

20일 닛코日光 방문 

21일 위와 같음

22일 칸인노미야閑院宮 오찬회(동 궁저), 만찬회(요코하마 스웨덴 공사관)

23일 제국교육회 환영회(동회 회관), 문부성 차관 초대회(제국 호텔)

24일 도쿄 제국대학 오찬회(코이시카와小石川 식물원), 고등사범 방문, 다과회(精養軒), 송별회(紅葉館)

25일 미츠이 하치로우에몬三井 八郎右衞門 오찬회(미츠이 집회소), 송별 만찬회(화족회관)

26일 궁궐에 가서 메이지 천황 알현, 노기乃木·도고東鄕 두 대장 오찬회(제국호텔)


닛코 방문을 제외하면 연일 강연과 파티로 헤딘은 몹시 바빴다.


그런 나날이 시작되자마자 16일 교바시京橋 코우쥰샤에서의 오찬회에서 돌아오는 길, 헤딘은 오가와 타쿠지, 야마사키 나오마사 등 지학협회의 동행들과 함께 호리 켄유의 안내로 '츠쿠지나루 니시혼간지'(<시사신보>, 메이지 41년 11월 17일), 곧 츠키지니시혼간지를 방문한다.


"이 절은 지난 11일부터 종조宗祖의 보은강으로 16일은 그 마지막 날에 해당하고, 특히 15일의 기일 전날 밤부터는 법주 오오타니 고우즈이 스님의 대리로 그의 형제인 적덕원 오오타니 손유우大谷尊由 스님, 교토에서 왔다. 근식勤式 중이어서 박사는 그 모습도 보고, 또 참배를 드렸다." (<시사신보> 게재)


츠키지혼간지에 도착했던 헤딘은 고우즈이의 동생 손유우가 다수의 승려와 함께 수행하는 근행의 진행을 지켜보면서 광대한 본당 내부가 일반 신도로 가득찬 모습에 압도된 듯하다. 보은강에 참여하는 사람들 속에 그도 구면인 후쿠시마 야스마사福嶋安正의 아내도 있다는 것을 호리에게서 듣고서 '그런가, 그런가'라고 더욱 감동한 모습을보였다고 한다. 후쿠시마는 육군 정보장교로 인도 시찰을 정리한 <인도기행>을 쓴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또 본당 내부 오른쪽에 책상을 놓고서, 신자가 내는 쌀과 돈 등을 거두고 있는 곁에 다가가, 시물로 금화를 끄집어 내려 하였는데, 야마사키 박사 등께서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말렸다. 이리하여 박사는 그 건축의 장대함을 칭찬하고, 이 본당은 메이지 이후 3번 화재가 나서 세번째 신축한 것이라는 설명을 호리 스님에게 듣고서, 종교의 힘이 크다는 걸 느끼며, 또 여기저기 구경하면서 그동안 옆을 지나가는 소아의 머리를 누르고 턱을 쓰다듬는 등 애교를 부리며, 다시 휴게소에서 휴식한 뒤, 이날 밤 강연회를 열어야 하는 도쿄 제국대학으로 향했다." (같은곳에 게재)


헤딘이 방문했던 츠키지혼간지는 관동 대지진을 화재가 일어난 뒤에 고우즈이의 지도를 받으며 재건된 현재의 그것과는 물론 다르다.


하지만 이 당시 고우즈이는 츠키지혼간지 재건 때에도 계승되는 디자인을 충분히 포함시켜, '이 나라에 둘도 없는 진귀한 건물'(이토 주타伊東忠太)이라 평가된 새 별장, 니라쿠소二樂莊(그림6)를 로코산六甲山 기슭에 계속 건설했다. 굳이 마음대로 상상하여 말한다면, 츠키지혼간지의 '장대'함을 칭찬했던 헤딘의 뇌리에는 그 전모를 드러냈던 니라쿠소를 고베의 먼바다에서 우러러 보았던 기억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림6 니라쿠소 본관. 고우즈이의 새 별장으로 메이지 41년 3월 17일 기공, 헤딘이 귀국한 뒤인 이듬해 메이지 42년 9월 20일에 준공했다. <니라쿠소와 오오타니 탐험대 Ⅱ>(아시야芦屋 시립미술박물관)에서


잠깐이지만, 보은강을 할 때 츠키지혼간지를 방문했던 일은 도쿄 체재 이후에 교토에서 재회할 고우즈이의 경력을 아는 절호의 기화가 되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헤딘은 도쿄를 떠나 철도로 교토를 향하는 길에 나고야에서 하차해, "혼파혼간지本派本願寺(니시혼간지)의 전도대회에 출석하여 그 자리의 강연을 하는"(<시사신보>, 메이지 41년 11월 24일) 준비도 갖추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고우즈이 자신도 지학협회 회원이다. <일본풍경론>으로 알려진 시가 시게타카가 강조하듯이, 확실히 헤딘은 '도쿄를 떠나서도 일본에 체재하면서는 지학협회의 초빙객'(<大阪每日新聞>, 메이지 41년 11월 27일)이었다.


하지만 일본에 체재할 때 그의 마음을 사라잡았던 건 어디까지나 오오타니 고우즈이 그 사람은 아니었을까? 교토에서 고우즈이를 방문할 때 헤딘의 모습을, 어느 신문은 이렇게 전한다. "탐험 박사 헤딘 씨는, 일본에 와 앞서서혼파혼간지의 법주에게 향하여, 고승을 알현하기 위해 도선하고 타전이 오는 사이, 어제 아침은 그 기다리고 기다린 법주와 면회하는 날이 되어, 특히 기쁜듯이 보였다"(<京都日出新聞>, 메이지 41년 12월 3일)라고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츠키지혼간지에서 도쿄 지학협회의 야마사키가 불전을 만류했다는 에피소드는 매우 상징적인 이야기처럼 생각할 수 있다. 


츠키지혼간지 방문으로부터 10일 뒤, 드디어 도쿄를 떠나기 전, 시바芝의 코우요우칸紅葉館에서 개최된 도쿄 지학협회 주최의 송별만찬회 자리에서 헤딘은 앞서 미츠코시에서 지었던 고우즈이가 기증한 일본 옷을 입고 나타났다.


이때 공표된 옷을 교토에 머물며 헤딘은 반복해 착용한다. 니시혼간지에서 고우즈이를 방문했을 때에도 몸에 걸치고, 그 가족과 함께 기념촬영했다(그림7). 그곳에서는 고우즈이의 분신처럼, 일본에 머물던 헤딘에게 붙어 다니던 호리 켄유의 모습도 있었다.


그림7 니시혼간지를 방문했던 헤딘. 앞줄 왼쪽부터 고우즈이의 누이동생 타케코武子, 헤딘, 고우즈이의 아내 카즈코籌子, 고우즈이. 뒷줄 오른쪽 끝은 호리 켄유. 메이지 41년 12월 2일. 스벤 헤딘 재단




(후기)

이 기고는 스톡홀름의 스벤 헤딘 재단이 소장하는 헤딘의 일본 방문 당시의 신문기사(1908년 11월 6일-12월 18일)의 스크랩북을 주요 참고자료로 했다.


전부 382건으로 이루어진 수록기사의 대부분은 일본의 신문이지만, 영자 신문의 스크랩도 적지만 있고(9건), 일본어 기사에 수기의 영어로 주석을 기록한 곳도 있다. 일본의 신문 중에서는 스크랩하지 않고 본지를 통째로 붙인 것도 있다(6건).


스크랩북의 표지는 통가죽으로 만들고, 뒷표지에 "Sven Hedin Japan"이라 수기로 적은 종이가 붙여져 있다. 권두에는 '헤딘 박사에 관한 여러 신문 스크랩'이라고 붓글씨로 적어 놓고(그림8), 수록기사에 첨부된 게재지 등의주석 기록에는 같은 글씨라고 생각되는 것도 있다. 헤딘 재단 이사인 호간 볼퀴스트Håkan Wahlquist 씨에 의하면, 이 스크랩북은 헤딘 생존시의 것인데, 편찬 경위 등의 상세함은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


그림8 헤딘이 일본에 방문했을 당시의 신문기사 스크랩북. 권두에 붓글씨로 '헤딘 박사에 관한 여러 신문 스크랩'이라고 있다(필자 불명). 스벤 헤딘 재단 소장 2009년 촬영




또한 이 재단에서는 고우즈이로부터 헤딘에게 보낸 합계 8통의 서간과 전보도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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