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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4



제1장

농경과 문화의 전파

타카미야 히로토高宮広土/ 야마다 고로우山田悟郞/ 츠바키사카 야스요椿坂恭代






Ⅰ 남南의 농경(다카미야 히로토)



시작하며


영국의 유명한 고고학자 고든·V·차일드(Childe 1935)는 수렵채집에서 농경으로 변천한 것을 인류사의 '산업혁명'에 필적할 정도의 대혁명이라 상정하고, '신석기 혁명'이라고 표현했다. 차일드에 의하면, 농경이 시작된 결과, 인구가 증가하고 도시가 생기며, 또한 문명이 발흥했다. 즉, 농경 없이 문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실제로 세계6대문명의 생산기반은 모두 농경이었다. 한편 <총·균·쇠>(다이아몬드 2000) 등의 밀리언셀러 저자 제라드 다이아몬드 씨는 농경의 기원에 관하여 차일드와 180도 다른 견해를 지닌다. 그에 의하면, 농경의 시작은 "인류 역사에서 최악의 실수(The worst mistake in the history of the human race)"이다(Diamond 1987). 교과서적으로 '농경의 시작'은 '진보'처럼 표현되고 있지만, 여기 40년 정도의 인류학자에 의한 수렵채집민에 대한 조사는 다이아몬드의 견해에 기초가 되고 있다. 이 시리즈 감수자인 사토 요우이치로 씨도 제1권에서 "왜, 농경 등이란 '성가신' 일을 시작한 것인가"라고 의문을 던지고 있다(佐藤 2008 5쪽). 노동시간(또는 여가시간), 칼로리를 포함한 영양상태, 위생상태와 건강상태, 사회적인 스트레스 및 식량의 안정성 등의 점을 비교하면 모든 점에서 농경민 쪽이 수렵채집민보다 고생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농경에 따른 장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단위면적에서 얻을 수 있는 식량이 수렵채집민과 비교하여 뚜렷하게 많다는 점이다(Lee 1968; Diamond 1987). 예를 들면, 농경의 시작에서 중요한 유적인 아브 후레이라Abu Hureyra(시리아)에서는 농경이 시작된 뒤 여성에 대한 신체적 스트레스가 급증했단 점이 판명되었다(Moore, Hilman and Legge 2000). 게다가 농경의 시작은 환경파괴의 시작으로,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환경문제의 근원은 '신석기 혁명'에 있었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왜, 인류는 수렵채집에서 농경으로 가는 길을 선택한 걸까? 이 주제는 인류학만이 아니라, 많은 관련 분야에서 대단히 의의가 있는 연구주제가 되고 있다.


적어도 세계 7개소에서 독자적으로 농경이 시작되었단 점이 이해되고 있지만(다이아몬드 2000), 최근의 인류학과 관련 분야에서 '농경의 시작'에 더하여 '농경의 확산'도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간결히 서술하자면 '왜 수렵채집민은 아주 귀찮은 농경을 받아들였을까?'라는 것이다. 농경은 일본 열도의 남쪽에까지 퍼졌다. 이 장에서 대상으로 삼는 '남'이란 큐슈 섬과 타이완 사이에 이어진 류큐 열도의 섬들을 목표로 한다. <조선왕조>에 의하면, 15세기에 여나국與那國에 표류한 조선인은 이 무렵에는 여나국 섬부터 오키나와 본섬의 섬들에서 조와 벼가재배되고 있었단 것을 보고한다(李 1972). 당연히 이들 재배식물은 류큐 열도에서 재배화된 것이 아니다. 곧, '농경의 확산' 결과 가져온 것이다. 여기에서 류큐 열도에서 농경사가 갑자기 중요해진다. 곧, 류큐 열도는 섬들로성립되어 있다. '섬은 자연의 실험실'이라 하듯이, 대륙과 큰 섬과 비교하여 과거에 있던 현상을 이해하기 쉬운 경우가 있다. 본론에서는 아마미奄美·오키나와 제도를 중심으로 류큐 열도에서 있었던 농경의 시작 시기 및 그 요인에 대하여 검토한다. 그렇지만 먼저 배경으로서 아마미·오키나와 제도의 편년과 식물유체를 회수하는 방법 -부유선별법-에 대하여 소개하겠다.




배경


(a) 편년

일반적으로 오키나와 제도의 선사·원사 시대의 편년은 구석기시대에 시작하여, 구스쿠 시대에 그 막을 연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표1-1). 문제는 그 사이의 시대 명칭으로, 오키나와 제도의 선사시대의 독자성을 나타내는 것을 목적으로 '패총시대'를 이용하는 연구자(金武正紀·当真嗣一 1986: Scheme 2)와 오키나와 제도의 토기문화가 본토의 조몬문화에서 파생된 것을 중시하여 '조몬시대, 야요이-헤이안 병행시대'라고 호칭하는 연구자가 존재한다(高宮廣衛 1992: Scheme 1). 이 글에서는 본토의 여러분이 자주 듣는다고 생각하는 Scheme 1을 사용한다. 또한 아마미 제도의 선사·원사 시대의 문화의 흐름도 대략적으로는 오키나와 제도와 똑같은 흐름이기에, Scheme 1을 사용함으로써 아마미 제도의 선사·원사 시대도 본토와 비교할 수 있다.




오키나와 제도

일본 본토

(홋카이도 이외)

Scheme 1

Scheme 2





구스쿠 시대


야요이-헤이안 병행시대

후반

전반


조몬시대

만기

후기

중기

전기

조기


구석기

구스쿠 시대


패총시대

후기 후반

후기 전반


패총시대

중기

전기

조기

조기

조기


구석기

가마쿠라 시대


고분-헤이안 시대



야요이 시대

만기

후기

중기

전기

조기

초창기


구석기

표1-1 오키나와 제도 원사 시대의 편년




(b) 부유선별법

그리고 수렵채집에서 농경으로의 변천 또는 과거에 있었던 식물 식이용을 해명하기 위하여 많은 방법이 개발되어왔다. 그중에서도 1960년대 후반에 개발되어 발굴조사에 도입된 부유선별법이라 부르는 방법은 선사학/고고학에 '혁명'을 가져왔다고 이야기된다(Cowan and Watson 2006). 일본에서는 부유선별법으로 알려지고(椿坂 1992), 1970년 전후부터 발굴조사에 도입되었다. 즉 일본 열도에서도 약 40년의 역사가 있는 셈인데, 부유선별법에 관해서는 아직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고, 또는 오해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부유선별법에 대하여 간단히설명하려 한다.


부유선별이란 콜라 플로트나 커피 플로트에 아이스크림이 떠 있듯이 영어의 Float, 즉 '뜨게 하다'에서 온 말이다. 무엇을 뜨게 할까? 주요 목적은 유적에서 샘플로 얻은 토양에서 식물유체를 뜨게하여 회수하는 것이다. 그림1-1은 부유선별 장치의 한 예이다. 이 장치는 바깥쪽의 통과 안쪽의 용기 두 종의 구조이다. 안쪽의 용기 바닥은 1밀리미터의 그물망이 펼쳐져 있다. 안쪽의 용기에 있는 어느 정도 건조된 토양 샘플을 옮기면, 1밀리미터 이상의동물유체와 토기 등은 침전되어 회수되는 것이다. 한편 탄화 종자 등의 가벼운 건 토양에서 떠오르고, 1밀리미터와 0.425밀리미터의 체에서 회수된다(그림1-1의 왼쪽에 이들 체를 겹치게 함). 앞에 기술했듯이, 부유선별법은주로 탄화 식물유체를 회수하기 위하여 개발된 장치인데, 이 방법에 의해 가느다란 탄화 식물 종자를 회수할 수 있는 것만이 아니라, 1밀리미터 이상의 동물유체와 토기, 석기 또는 옥류 등의 미소한 인공유물도 회수할 수 있어, 일석이조의 유물 회수법이다.


부유선별법은 분명히 체질 방법(Dry Screening)과는 다르다. 후자는 미소한 인공 유물과 동물유체를 회수하는 데에는 적당한 방법이지만, 식물유체를 회수하는 데에는 적절한 방법이 아니다. 실제로 미국의 사례에서 1/4인치(약 6밀리미터)의 체에서 얻은 식물유체와 체를 통과시킨 토양 샘플을 다시 부유선별 처리하여 식물유체를 회수한 바, 후자에서 전자의 50배 이상의 식물유체를 얻을 수 있었다는 보고가 있다(Munson, Parmalee and Yoarnell 1971). 즉, 체질 방법으로는 대부분의 식물유체가 약 6밀리미터의 그물망을 통과해 버리는 것이다. 또한 토양 샘플을 체질함으로써 원래 약한 탄화 종자(또는 식물유체)가 토기나 석기 또는 돌 등에 의하여 파괴될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체질 방법에 의하여 식물유체를 회수하는 것은 빗나간 셈이다.


다음으로, 부유선별법과 자주 혼동되는 방법으로 워터 세퍼레이션이 있다. 이쪽은 일본에서는 수세별법으로 소개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체로 토양 샘플을 옮기고, 그 토양 샘플에 호스 등으로 물을 끼얹어 토양을 씻어내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수압에 의해 인공유물 등을 깨끗이 한다는 점에서 편리하며, 인공유물과 동물유체의 회수에는적당하다. 그러나 식물유체의 회수에 관해서는 체질 방법과 실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즉, 식물유체는 그물망을빠져나가 버리는 것이다. 또한 수압을 올린다는 점에서는 식물유체의 파괴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또, 양동이에 토양 샘플을 담아, 그곳에 물을 부어 가라앉는 것을 회수한다는 워터 세퍼레이션 방법도 있다. 이 경우는 떠오른 탄화물을 회수하면 부유선별법이 되지만, 일반적으로는 가라앉은 인공유물이나 동물유체를 토양 샘플에서 회수하기 위하여 행한다. 워터 세퍼레이션 방법은 물을 이용하기에 부유선별법과 착각하는 일이 많지만, 그목적은 체질 방법과 마찬가지로 미소한 인공유물과 동물유체를 회수하는 것으로, 이 목적을 위해서는 적당한 방법이다. 그렇지만 식물유체의 회수에는 적당하지 않다. 자주 '부유선별법을 하고 있다'고 연락을 받아 현장으로 가면, 워터 세퍼레이션이었던 경험이 있다. 이들의 현장에서 워터 세퍼레이션에 의해 회수된 것을 보면, 대부분의 경우 미소한 인공유물과 물고기뼈 등의 소형 동물의 뼈였다.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식물유체를 회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부유선별법이 가장 효율이 좋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오키나와 제도에서 '농경의 시작에 관한 연구를 하고 싶다'고 관게자에게 상담한 바, '오키나와에서는 식물유체는 없다/ 생기기 어렵다'고 들었던 것을 어제의 일처럼 기억한다. 이 시점까지 오키나와 제도에서는 체질 방법과 워터 세퍼레이션 방법은 자주 이용되고 있었지만, 부유선별법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럼 남南에서는 언제쯤 농경이 시작되었던 것일까? 우선 본격적인 부유선별법이 도입되기 이전에 회수된 식물유체로부터 어떠한 해석이 있었는지를 소개하고, 다음으로 부유선별법 도입 이후에 판명된 것을 기술하겠다.




아마미·오키나와 제도에서 선사·원사 시대의 식물 이용


(a) 식물유체 -부유선별법 도입 이전(1990년대 무렵까지)

부유선별법이 발굴조사에 도입되기 전, 아마미와 오키나와 제도에서는 발굴조사 기간에 우연히, 또는 실시한 예는 적지만 체질과 워터 세퍼레이션 방법에 의하여 식물유체가 회수되었다. 여기에서는 구스쿠 시대 이전과 구스쿠 시대에 대하여 간단히 기술하겠다. 구스쿠 시대 이전의 몇몇 유적에서 식물유체가 검출되어 보고되었다. 예를들면, 니가마시바루苦増原 유적(조몬시대 만기에 해당, 宮城 1977)에서 졸참나무속과 녹나무과(?) 등의 식물유체가 검출된다. 타카미네高嶺 유적과 누바타키 유적(조몬시대 만기에 해당, 渡辺 1989; 1991)에서도 후박나무가 저장구덩이 같은 유구에서 회수된다. 선사시대의 유적에서 보고되고 있는 식물유체는 모두 야생식물에 속하는 것이었다. 한편, 구스쿠 시대가 되면 20곳 이상의 유적에서 식물유체가 보고되었다(松元 2007). 그렇지만 그 보고내용은 "○○구스쿠에서 벼와 보리가 회수되었다"라는 한 줄부터 몇 줄의 보고가 많고, 재배식물이 출토된 것은 알겠지만 구스쿠 시대의 농경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수준의 자료는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현 오키나와 현립 매장문화재센터 킨죠 카메노부金城亀信 씨의 시도는 특별히 적을 가치가 있다. 1986-1987년에 걸쳐서 토미시로豊見城 마을(현 토미시로시)에 소재하는 타이라平良 구스쿠의 시굴조사에서 킨죠 씨(1989)는 약 24킬로그램의 토양을 샘플로 하여, 5밀리미터와 1밀리미터짜리 그물망의 체로 처리했다. 그 결과, 조(2747알/처리), 보리(503알/처리) 및 벼(165알/처리)를 회수했다. 보리와 벼 등의 조금 대형의재배식물에 더하여, 그는 오키나와 본섬에서 처음으로 조의 검출 및 동정에 성공한 것이다. 게다가 1989-1990년에 걸쳐서 킨죠 씨(1991)는 이토카즈糸数 구스쿠의 발굴조사에서 다시 토양을 샘플로 하여 이번회는 양동이를이용한 부유선별법에 따라 처리했다. 그 결과, 벼(154알/처리), 조(96알/처리), 보리(2837알/처리) 및 콩류(134알/처리)를 얻었다. 킨죠 씨의 시도에 의해 처음으로 구스쿠 시대의 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그의시도를 계승한 조사는 당장은 실시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부유선별법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에 회수된 식물유체에서 생각할 수 있는 식물의 이용 및 문제점을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우연/체질 방법/ 워터 세퍼레이션 방법에 의하여 회수된 식물유체에서, 구스쿠 시대에는 보리와 벼 등의 재배식물이 주로 이용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킨죠 씨(1991)의 시도에 의해 벼와 보리 같이 조금 대형의 재배식물에 더하여, 조도 이용되었단 점이 밝혀졌다. 또한 구스쿠 시대 이전은 수렵채집의 시대였을 가능성이 시사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이해된 아마미와 오키나와 제도의 선사·원사 시대의 생업(특히 식물 이용)은 이 정도이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점이 많았다. 예를 들면, 선사시대의 유적에서는 야생의 식물유체만 알려졌는데, 재배식물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마미와 오키나와 제도의 선사시대인이 수렵채집민이었다고 한다면, 매우 의의가 깊은 주제를 제공하게 된다. 곧, 세계 대부분의 섬은 농경민에 의하여 식민하게 된다. 그것은 섬의 면적이 수렵채집으로 생존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점이 많기 때문이다(Cherry 1981). 아마미와오키나와 제도 같은 섬에서, 선사시대에 수렵채집민이 존재했던 섬은 내가 아는 한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Takamiya 2006). 또한 구스쿠 시대의 농경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든다. 구스쿠 시대의 유적에서는 재배식물이 회수되고 있지만, 그 체계는 어떠한 체계였던 것일까? 일반적으로 본토의 야요이 시대의 농경은 벼 중심이라 생각되는데, 구스쿠 시대의 농경도 똑같이 벼가 중심이었던 것일까?



(b) 식물유체 -부유선별법 도입 이후(1990년대- :그림1-2)

앞서 기술했듯이, 킨죠 카메노부 씨에 의하여 시행착오의 과정에서 도입된 부유선별법은, 그 이후의 조사에서 곧바로 채용된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1992년부터 본격적인 부유선별법에 의해 체계적으로 식물유체를 회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조사가 몇 곳의 유적에서 실시되었다. '오키나와(아마미) 제도에서는 식물유체가 생기기 어렵다'는 건 확실했다. 예를 들면, 나자키바루那崎原 유적에서는 약 1600리터의 토양을 샘플링한 것에 반해, 회수된 부유물은 약 120그램뿐이었다. 곧, 평균하여 1리터의 토양에서 약 0.07그램의 부유물뿐이었다(高宮 1996). 다른 유적에서도 부유물의 회수율은 많지 않다. 확실히 식물유체는 오키나와의 유적에서는 '회수하기 어렵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식물유체를 회수하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점도 분명해졌다. 아래에 부유선별법에 의하여 회수되어 계속 이해되고 있는 '남의 농경'에 대하여 정리해 보고자 한다.


그림1-2 오키나와 제도의 선사·원사 시대 출토 식물유체. 

상단 1-9: 타카치쿠치바루高知口原 패총 출토, 하단 1-14: 나자키바루 유적 출토




먼저, 구스쿠 시대의 농경에 대해서이다. 구스쿠 시대의 유적에서 본격적인 부유선별법이 채용된 유적은 기노완시宜野灣市에 소재하는 모리카와바루森川原 유적이다. 이 유적은 중산왕 삿토察渡의 출생지라고 하는 유적(14-15세기)이다. 도중 경과이지만, 약 1870(알/처리)의 탄화 종자가 회수되었다. 가장 많았던 건 밀로서 약 500(알/처리), 다음으로 조가 약 360(알/처리)였다. 벼는 합계 50(알/처리)였다(高宮 1994). 또한 기노완시의 북쪽 읍인 챠탄마치北谷町에 소재하는 대형 구스쿠의 하나인 챠탄 구스쿠에서는 이것도 도중 경과이지만 약 2만(알/처리)의 식물유체가 회수되었다. 챠탄 구스쿠의 경우는 밀이 가장 많아 1만1천(알/처리) 정도이고, 다음으로조(약 1200알/처리) 및 벼(약 930알/처리)였다(高宮 인쇄중 a). 킨죠 카메노부 씨 외의 결과 등에서 구스쿠 시대의 농경은 잡곡이 중심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렇지만 2002년에 아마미오오시마奄美大島 카사리쵸笠利町(현 아마미시)에 소재하는 아카키나赤木名 구스쿠에서 행한 조사결과에서는 2점,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12-13세기의 산성이라고 하는 구스쿠에서 대규모인 구스쿠의 하나이다. 첫 번째 점은 토양의 샘플 양으로서, 6.6리터라는 매우 소량의 토양에서 아마미·오키나와 제도치고는 상당한 식물유체가 회수되었던 것이다. 합계 237(알/처리) 회수되어, 그 밀도는 1리터당 34.4(알/처리)나 포함되어 있었다. 두 번째 점은 회수된 식물유체 가운데 대부분이 벼였다는 점이다. 곧, 227(알/처리) 가운데 188(알/처리)는 벼였다. 기타는 조(26알/처리)과 기장(7알/처리) 등이 회수되었다(高宮 2003a). 1980년대에 발굴조사되었던 나키진今歸仁 구스쿠城에서는 보고서에 의하면 주곽主郭에서 대량의 벼가 검출되었다고 한다(金武 1983). 안타깝게도 부유선별법은 실시되지 않았는데, 이들 결과로부터 오키나와 본도 중남부는 잡곡 중심, 북부 및 아마미 제도는 벼 중심인가 하고 생각되었다. 나키진 마을에 소재한 시이나 구스쿠(高宮 2004) 및 요미탄讀谷 마을에 소재한 우간히라 북방 유적(高宮 인쇄중b)에서 회수된 식물유체는 이 가설을 암시하는 것이지만 강하게 긍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2004년부터 2008년에 걸쳐서 나키진 구스쿠에 수반한 마을에서 회수된 식물유체가 분석되었다(宮城·与那嶺 2005; 高宮 2007; 赤嶺·喜名 2008). 그 결과, 마을의 사람들은 잡곡이 주요 식량원이었던 것이 드러났다. 여기에서 상정된 것이 나키진 구스쿠 안의 지배층은 벼, 마을의 서민은 잡곡이란 가설이었다. 지난해의 센다 히로유키千田寬之 씨에 의한 주곽 유래의 토양 샘플 분석 결과는 구스쿠 안의 사람들도 잡곡을 주로 먹었던 듯하다(千田 2009). 현시점에서 구스쿠 시대의 농경은 어느쪽이냐면 잡곡이 중심이었던 것 같다.




농경의 시작 1 -조몬시대


그럼 아마미·오키나와 제도에서는 언제쯤부터 농경이 시작되었을까? 세계의 많은 섬이 농경민에 의하여 식민된 사실을 바탕으로, 아마미·오키나와 제도에 처음으로 적응한 사람들은 농경민이었다는 가설을 1993년에 제창했다(高宮 1993). 유적 수를 바탕으로 과거의 인구를 복원한 바, 사람의 집단이 아마미·오키나와 제도에 적응한 건 구석기시대가 아니라 조몬시대 중기의 끝부터 후기에 걸쳐서라는 결과를 얻었다(高宮 1997a). 이 시기를 <조몬시대 후기>라고 가칭한다. <조몬시대 후기>의 사람들은 농경을 생활의 근원으로 했을까? 위에 기술했듯이, 우연히 검출된 식물유체는 야생식물로 구성되어 있었다. 


부유선별법을 실시했던 주요 조몬 후기 이후의 유적은 아래의 유적이다. 먼저 기노자宜野座 마을에 소재하는 메바루前原 유적(조몬시대 후기)이다. 유구로서 20기 정도의 저장구덩이가 확인되었다. 이들의 유적에서 회수된 식물유체를 동정한 츠지·오마츠大松 두 사람(1999)은 오키나와우라지오가시(Quercus miyagii)가 다수 출토했다고 보고하는데, 재배식물은 검출되지 않았다. 또한 필자(1999)는 물구덩이 유구라고 일컫는 식물 등을 던져 버렸다고 해석된 유구의 식물유체를 분석했다. 저장구덩이 유구와 비교하면 견과류는 적었지만, 역시 모두 야생식물이었다.


다음으로 조몬시대 만기에 해당하는 오키노에라부沖永良部 섬 치나마치知名町에 소재하는 스미요시住吉 패총이다. 이 유적에서는 14동의 수혈주거가 확인되어, 조몬시대 만기가 되면 더욱 정주적인 생활이 영위되었단 점이 이해되었다. 여기에서는 주로 수혈주거로부터 토양을 샘플링했다. 주요 식물유체는 구실잣밤나무 등의 견과류였다. 역시 재배식물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高宮 2006a).


최근 이토 신지伊藤愼二(2006)는 토기의 연속성으로부터 아마미·오키나와 제도에서 사람의 집단이 처음으로 적응한 시대는 <조몬시대 후기>가 아니라 조몬시대 조·전기라는 가설을 제창하고 있다. 그럼 그 무렵의 식물 이용은 어떠했을까? 기노완시의 미군기지 안에 소재한 아라쿠즈쿠시챠바루新城下原 제2유적은 이 시기의 유적인데, 여기에서도 회수된 식물유체는 야생식물에 속했다(고궁 2006a).




농경의 시작 2 -야요이-헤이안 병행시대

그럼 후속하는 야요이-헤이안 병행기는 어떠할까? 오키나와현 요미탄촌에 소재하는 타카치쿠치바루 패총은 야요이-헤이안 병행기 전반의 유적이다(3-5세기). 류큐 열도에서 최초로 본격적인 부유선별법이 실시된 유적이었다.'부유선별법에 의해 오키나와에서도 식물유체를 회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약 2600리터라는 다량의 토양을 샘플링했다. 결과는 견과류와 후박나무 등의 식물유체로 구성되며, 재배식물은 포함되지 않았다(高宮 1998a). 한편, 8-9세기부터 10세기의 유적인 나하시에 소재한 나자키바루 유적은 타카치쿠치바루 패총 다음으로 부유선별법이 실시된 유적이다. 약 1600리터의 토양 샘플을 회수한 결과, 소량이지만 벼와 조, 밀 및 보리 등이 확인되었다. 게다가 견과류는 포함되지 않았고 마디풀과와 사초과 등의 탄화 종자가 검출되었다. 또한 205기 이상의 뽕나무속 터와 농경에 관련되었다고 해석된 고랑 흔적이 2줄 검출된다. 이들의 자료를 바탕으로 아마 나자키바루 유적의 사람들은 재배식물을 주요 식량원으로 했다고 생각되었다(高宮 1996). 이 두 유적의 분석 결과에의해, 타카치쿠치바루 패총과 나자키바루 유적 사이의 시기에 농경이 시작되었단 것이 시사되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전반에 걸쳐서 이 기간에 속하는 유적에서 토양 샘플이 가능해졌다. 아마미오오시마 카사리쵸(현 아마미시)에 소재한 요우미사키用見崎 유적(高宮 1997b), 마츠노토 유적(高宮 2006c), 아라고安良川 유적(高宮 2005) 및 오키나와현 이에촌伊江村에 소재하는 나가라바루 동패총이었다(高宮 1998b, 2000, 2001, 2002a, 2002b, 2003b, 2006c). 모두 네 유적에서 얻은 토양 샘플을 부유선별 처리했는데, 검출된식물유체는 적었다. 결과적으로는 견과류와 후박나무 등의 야생식물의 유체만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결과로부터, 아마미·오키나와 제도에서는 나자키바루 유적의 시기에 농경이 시작되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시작은 '돌연'이었다. 여기에서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우선, 왜 '돌연' 수렵채집에서 농경으로 변천했을까? 다음으로 나자키바루 유적의 농경이 구스쿠 시대의 농경의 토대가 되었을까? 나자키바루 유적에서 얻은 식물 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던 무렵에는 아마 그러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농경이 받아들여졌을 경우, 그 뒤의 인구 급증이 예측되는데, 실제로 10세기부터 12세기에 인구가 증가했다는 자료가 없다. 즉, 자료의 해석이 올바르다면, 나자키바루 유적의 농경은 일시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 아마미·오키나와 제도에서 농경의 시작은 10세기부터 12세기 사이, 또는 구스쿠 시대 직전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요 몇 년, 아마미오오시마의 북동에 위치한 키카이섬喜界島에서의 발굴조사가 류큐 열도에서는 큰 화제가 된다. 구스쿠 유적군으로 알려진 유적군이다. 키카이섬은 면적 약 55평방킬로미터의 섬이다. 유적군의 면적은 약 10만평방미터 이상으로, 8개의 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9세기부터 14세기 무렵까지 이영되었던 유적으로, 100동 이상의 건물터(그중에는 넓은 주거지도 포함됨), 본토산 토기와 중국 도자기, 활석제 돌냄비, 카뮈야키カムィ焼 등이 보고된다. 다자이후太宰府와의 관련이 지적되고 있는 유적이다(澄田· 2007).


여덟 유적 가운데 야마다나카니시山田中西 유적에서, 2007년에 시도하여 약 80리터의 토양 샘플을 토갱묘에서 회수했다. 그 결과, 보리와 벼가 함께 4(알/처리) 검출되었다. 또한 밀(2알/처리) 및 조(1알)이 회수된다. 재배식물(또는 식물유체)의 검출수는 적었지만, 이 시도로부터 야마다나카니시 유적에서는 농경이 생업이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高宮 2008). 다만, 유적은 키카이섬 안에서도 표고가 높은 곳에 소재하고, 오늘날 사탕수수밭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마 오키나와 본섬의 구스쿠 시대처럼, 잡곡이 주요 생업이라 생각되었다. 이듬해 2008년에약 400리터의 토양을 구스쿠 유적군의 하나인 야마다한다山田半田 유적의 토갱묘 등의 유구에서 샘플링하여, 구스쿠 유적군의 생업을 해명하는 데 몰입했다. 먼저, 지난해의 결과에서 이끌어냈듯이, 출토된 식물유체는 재배식물이 주였다. 구스쿠 유적군의 입지 특징에서 예측했던 생업과는 달리, 재배식물 안에는 벼(96알/처리)가 가장 많았다(高宮 인쇄중c). 재배식물 중에서는 다음으로 조(18알/처리), 보리(8알/처리) 및 밀(2알/처리)이었다. 구스쿠 유적군의 생업은 농경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지난해 센다千田 씨에 의하여 오키나와현 나고시名護市에 소재한 야베메다屋部前田 유적에서 출토된 식물유체가 분류되었다. 역시 11세기 중반의 유적이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식물유체도 주로 재배식물이었다. 다만, 구스쿠 유적군의 두 유적과는 달리, 잡곡 쪽이 많았다(千田 2009). 최신 자료에 의하면, 11세기 무렵에 역시 '돌연히' 수렵채집에서 농경으로 변천했던 것 같다.




농경의 시작 -요인


아마 중부 류큐권에서 농경이 시작되었던 건, 10세기부터 11세기 중반일 것이다. 그럼 왜 농경이 도입되었던 것일까? '농경의 화산'은 인류학, 선사학, 고고학 및 관련 과학에서 '농경의 기원'과 똑같이 가장 관심이 있는 주제이다. 농경의 시작이 '최악의 선택'이었다면, 농경민 근처의 수렵채집민은 왜 이 새로운, 그리고 '최악의' 생업을선택했던 것일까? 세계적인(또는 대륙의) 차원에서는 환경이 복잡한 점, 명확한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 점 때문에 이 요인을 이해하는 일이 곤란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마미·오키나와 제도는 섬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더 쉽게 요인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미·오키나와 제도에서 농경민과 접촉함으로써 농경이 시작되었다(이른바 문화전파 가설)고 한다면, 농경의시작되었을 가능성은 조개의 길을 통하여 본토의 야요이 문화와 교류했던 시기, 또는 야광패의 교역이 존재했다고 한다면 고분 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타카치구치바루 패총, 나가라바루 동패총, 요우미사키유적, 아라고 유적 및 마츠노토 유적의 식물유체 분석에서 보았듯이, 본토 야요이 문화의 사람들과 접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마미·오키나와 제도의 사람들은 농경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굳이 말하자면 '돌연' 농경이 시작되었다. 남에서 있던 농경의 시작을 이해할 때, '돌연'이 핵심어가 된다고 생각했다. 1990년대 이후, 오키나와 제도에서 옛 인골의 연구가 두드러지게 진전된다. 일련의 연구 중에서 아래의 3점은 매우 중요한 점이다. 먼저 토이 나오미土肥直美 씨에 의한 선사시대 사람과 구스쿠 시대 사람 및 근세 사람의 비교이다. 근세의 사람들은 현대 오키나와 사람의 직접적 선조이고, 또 구스쿠 시대 사람의 직접적 자손이다. 토이 씨에 의하면 선사시대 사람은 '작은 신장, 연약함, 단두短頭(거의 원에 가까운 모양)'라 특징지을 수 있다고 한다. 한편, 구스쿠 시대 및 근세 사람은 '큰 신장, 튼튼함, 장두長頭'라는 특징을 가진다(安里·土肥 1999). 다음으로 토도 유키오百々幸雄 씨(1992)에 의해 형태 소변이小變異의 연구이다(그림1-3). 이 연구 이전은 일반적으로 아이누, 조몬 및 오키나와 사람들이 하나의 집단을 이루고, 도래계 야요이 사람과 그 자손 및 조선반도의 사람들이 또 하나의 집단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토도 씨(1992)의 연구에 의해, 근세 오키나와 사람은 아이누 및 조몬 사람들의 집단이 아니라 도래계 야요이 사람과 그 자손의 집단에 속한다는 것이 명시되었다. 게다가 Pietrusewsky(1997)은 인본인과 아시아인의 고인골의 계측적인 분석을 실시했다. 이 결과도 종래의 인류학에서는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곧, 토도 씨 등의 연구를 지지하는 결과였다(그림1-4). 최근의 형질인류학적 자료에더하여, 언어학자는 약 1세기 전부터 류큐 사투리가 일본 고어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주장해 오고 있다(服部 1959; 外間 1977, Hudson 1994). 호카마外間에 의하면, 류큐 사투리와 본토 사투리의 어휘와 문법 등을 검증한 결과, 둘은 형재자매어라고 생각해도 좋다.


그림1-3 형태 소변이에 의한 집단 관계(토도 1999에서 고침)



그림1-4 계측적 자료에 의한 집단 관계(Pietrusewsky 1999)



형질인류학과 언어학적 자료가 시사하는 바는 무얼까? 필자는 '돌연' 농경이 시작되었단 점에 대한 힌트가 된다고 추측했다. 곧, 아마미/오키나와 제도에서 농경이 '돌연' 시작되었던 요인은 '장신, 튼튼함, 장두' 및 일본 고어를 모어로 하고, 농경을 가졌던 사람들의 식민이었던 것은 아닐까(高宮 1998c; 2005; 安里·土肥 1999)? 그들은 농경이란 생업으로 아마미·오키나와 제도에서 적응에 성공하고, 그뒤 단기간에 사카시마先島 제도에도 확산했다. 그러므로 구스쿠 시대가 되어서 처음으로 중부 류큐권과 남부 류큐권이 동일한 문화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가설에 관한 최대의 문제점은 농경민의 식민 시점이다. 식물유체의 분석으로부터 식민의 시점은 10세기부터 12세기 사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언어학자에 의하면 그 시점은 2/3세기부터 8세기 사이라고 한다(部 1959; 外間 1977). 졸저 안에서는 고어는 변경에 남아 있다는 언어지리학적 가설로 설명을 시도했다(高宮 2005). 최근의 <오모로사우시おもろさうし>의 연구에 의하면, <오모로사우시>에는 무로마치 시대의 단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듯하다(阿部 2009). 또한 언어학적으로 일본어의 하행 자음에 대한 류큐 사투리의 p음에 대하여, 전자가 오래되고 후자가 새로운 것이라는 가설을 바탕으로 두 사투리의 분기 년이 나라 시대 이전이라 생각되었는데, 최근의 연구에서는 류큐 사투리의 p음은 사실은 새롭게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中本 2009). 곧 최신 언어학 연구에 의하면 류큐 사투리의 성립은 나라 시대보다 새로울 가능성도 있다. 이 '북쪽으로부터의 식민'을 고고학적으로 검증했던 타카나시高梨(2009)에 의하면 고고학적으로도 지지된다는 결과를 보고한다. 류큐 열도에서 농경의 시작은 북쪽으로부터의 농경민의 식민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마치며


1980년대까지 우연에 의하여 발견된 식물유체로부터 선사시대는 수렵채집의 시대, 그리고 구스쿠 시대는 농경의 시대라고 생각되었다. 1990년대부터 부유선별법이 도입되어, 체계적으로 식물유체가 회수되었다. 이제 십 몇년 동안 계속 이해된 남방 여러 섬 중부권의 생업은, 우선 구스쿠 시대는 확실히 농경이 생업의 기반이었지만, 밀과 조를 중심으로 하는 잡곡이 주로 이용되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오키나와 제도 중북부 및 아마미 제도에서 얻은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구스쿠 시대의 농경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이들 지역의 자료가 필요하다. 또한 이른바 지배층과 서민의 재배식물 이용도 이후의 흥미로운 주제이다. 


다음으로 우연에 의하여 발견된 식물유체에서 시사된 선사시대의 생업은 수렵채집이란 것이었다. 부유선별법 도입 결과, 이 해석을 강하게 지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점은 세계적인 차원에서 보면 매우 중요한 점이다. 곧, 아마미·오키나와 제도 같은 섬에서 선사시대에 수렵채집민이 존재했던 섬은 따로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필자(1997)의 해석에 의하면 적어도 약 3000년, 이토伊藤(2006)의 해석에 의하면 5000년 이상 섬의 환경에서 수렵채집민이 존재했던 것이 된다. 그들이 어떻게 섬의 환경에 적응했는지, 더 상세한 분석이 기대된다. 


마지막으로 아마미·오키나와 제도에서 수렵채집으로부터 농경으로 변천하는 일이 일어났던 건 10세기부터 12세기 사이였을 가능성이 계속 밝혀지고 있다. 선사시대에는 본토 야요이 사람/문화라는 농경민과의 접촉이 있었지만 농경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왜 이 약 2세기 사이에 농경이 시작되었을까? 이 요인을 이해하는 핵심어는 '돌연'이었던 것이다. 언어학, 형질인류학 및 최근의 고고학적 자료에 의해 '돌연' 농경이 시작된 요인은 북쪽으로부터 농경민이 섬으로 식민하고, 이 새로운 생업으로 적응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작하며'에도 기술했듯이 자주 '섬은 자연의 실험실'이라고 예를 드는 곳이다. 이과계의 실험실에서 얻은 결과가 현실세계에서 채용될 수 있듯이, 섬에서 얻은 결과는 모델로 다른 지역의 과거를 이해하는 지침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농경의 확산'은 '농경의 기원'에 버금가는 가장 중요한 연구 주제이다. 아마미·오키나와 제도에서 농경의 확산이 '농경민의 식민'이었다고 한다면, 일본 열도를 포함한 다른 지역에서 농경의 확산도 이 관점에서 검증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Ⅱ 북北의 농경(야마다 고로우/ 츠바키사카 야스요)




시작하며

1981년부터 1982년에 걸쳐서 삿포로시의 홋카이도 대학 구내에서 사츠몬擦文 문화기(9세기 중엽-10세기)의 사쿠슈코토니강 유적의 발굴조사가 행해졌다. 그들 유구에서 다량의 토양을 채취하여 부유선별 작업이 행해지고,부유물 중에서는 조와 기장 등 다량의 탄화 작물종자가, 침전물에서는 연어의 뼈와 유리치遊離齒를 얻고, 하천에서 연어잡이를 행하는 조금 높은 곳에서 조와 기장 등 잡곡 농경을 행했던 것이 밝혀졌다. 


그때까지도 사츠몬 문화기의 유 적에서 보리, 기장, 자소속 등의 종자가 겨우 출토되어, 사츠몬 문화의 집단이 재배식물을 이용했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뒤를 이어 근세 아이누 문화기의 농경이 조방적인 것이라 하고있었기 때문에, 사츠몬 문화의 생업은 하천에서 연어와 송어잡이이고, 텃밭 수준의 작물 재배가 이루어졌던 정도라고 간주되었다.


사쿠슈코토니강 유적에서 다량의 작물 종자가 출토된 것을 계기로 홋카이도 안 각지에서의 발굴조사에서 부유선별 작업이 적극적으로 도입되어, 탄화 작물 종자와 연어류의 뼈와 이빨의 출토 보고가 잇따랐다. 사츠몬 문화기에는 하천에서 연어와 송어잡이를 행함과 함께 조와 기장 등을 재배하던 잡곡 농경을 행했던 점, 뒤를 이어 중세부터 근세 전반기(14-18세기 전기)의 아이누 문화기에도 잡곡 농경이 계속 받아들여졌다는 점 등이 밝혀졌다. 


본격적으로 잡곡 농경이 행해진 건 사츠몬 문화기에 들어서부터이지만, 그 이전의 조몬문화와 조쿠조몬문화続縄文의 단계에도 삼과 우엉 같은 대륙 동북부의 졸참나무숲 지대를 분포역으로 하는 재배식물이나 자소속, 메밀 같은조엽수림대를 분포역으로 하는 재배식물을 이용했다. 조몬시대 조기부터 피속을 길들이기 시작해, 조몬시대부터 조쿠조몬시대에 걸쳐서 둥그스름함과 두툼함이 증가해 재배 피에 가까운 형태를 보이는 것도 나타나기 시작했다.또한 사츠몬 문화와 병행하여 오호츠크해 연안에서 전개된 오호츠크 문화의 집단도 보리와 조, 기장을 이용했단 것도 밝혀지게 된다. 작물 종자의 출토 사례 증가에 의해, 대형 보리의 종자에 대해서는 형태의 비교가 가능해지고, 장립과 단립 두 종류의 보리가 존재했음이 밝혀졌다. 게다가 오호츠크 문화의 유적에서도 단립 보리 등이 출토되기 시작한 점으로부터 남의 혼슈 쪽에서 받은 영향만이 아니라, 북의 대륙 동북부와의 교역활동이 있었던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그림1-5 皮性 보리 삿포로시 사쿠슈코토니강 유적(a등쪽 b배쪽)




유적명

시기

보리

기장

수수

網走市

모요로 패총


網走市

ニッ岩 유적


湧別町

川西 유적


常呂町

常呂川 하구 유적


雄武町

雄武 수혈군 유적


枝幸町

目梨泊 유적

刻文期



貼付文



貼付文期



貼付文期



貼付文期



貼付文期

















































































표1-2 오호츠크 문화기의 유적에서 출토된 작물 종자





그림1-6 裸性 보리 아바시리시網走市 모요로 패총(a등쪽 b배쪽)





오호츠크 문화기의 작물 종자


5세기부터 9세기 말에 걸쳐서 홋카이도의 오호츠크해 연안부를 주요 활동범위로 하여 바다에서 수렵과 어로활동을 생업으로 하며, 대륙 동북부와의 교역으로 금속제품과 유리제품 등을 입수했던 오호츠크 문화가 전개되었다. 탄화 작물 종자의 출토는 이 가운데 7세기부터 9세기 말의 각문기刻文期, 첩부문기貼付文의 유적으로 한정된다. 오호츠크 문화의 주거터는 긴지름이 10미터 안팎, 짧은지름이 9미터 안팎의 육각형 내지 오각형이고, 긴지름의 산 쪽에는 큰곰의 머리뼈 등 짐승의 뼈를 신으로 모신 뼈무덤이, 바다 쪽에는 물고기의 뼈와 조개류를 신으로 모신 뼈무덤이 남아 있는 예가 보이며, 탄화된 작물 종자는 주거터 바닥면과 짐승을 신으로 모신 뼈무덤에서 출토된다. 


아바시리시 모요로 패총은 오호츠크 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2003년부터 6년 동안 사적 정비를 목적으로 한 발굴조사가 행해져, 각문기의 8호, 9호 주거터와 19기의 토광묘, 패총 등이 발굴되었다. 8호와 9호 주거터 바닥면에서는 군데군데에서, 9호 주거터의 큰곰의 머리뼈를 신으로 모신 뼈무덤에서는 집중하여, 여러 종의 야생식물종자와 단립이고 이삭이 유착되어 있지 않은 나성 보리, 조, 기장, 수수, 삼 등의 종자가 출토된 외에, 토광묘의 위에 엎어 놓았던 항아리에서는 부장된 기장의 종자가 출토되었다. 에사시쵸枝幸町, 오무초雄武町, 유베츠초湧別町, 도코로초常呂町, 아바시리시에서 발굴된 각문기에 이은 첩부문기(8-9세기)에 속하는 다섯 유적의 주거터 바닥면·뼈무덤에서도 나성 보리, 조, 기장이 출토되어, 각문기에 쭉 계속해 식량으로 이용되었다는 것 외에, 뼈무덤에서도 의식에 이용되었던 모습을 나타낸다. 




사츠몬 문화란


사츠몬 문화란 토기의 전면에 나무주걱으로 문질러서 귀얄로 바른 자국 같은 흔적이 남은 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데에서 연관을 지어 이름을 붙인 토기 문화 이름이다. 그 성립에 대해서는 혼슈에 중심이 있는 하지키土師器 문화가 지방화된 것으로, 홋카이도와 도호쿠 지방 북부 등 율령제의 영향이 희박한 지역에서 7세기부터 11, 12세기 무렵에 걸쳐서 분포했고, 4세기부터 6, 7세기 무렵까지 혼슈의 농경문화와의 오랜 밀접한 교류를 통하여 조쿠조몬문화의 토대 위에서 점차 그 기초가 형성되어 성립했다. 도호쿠 지방의 주거구조나 생업의 변화에 대응하여, 홋카이도의 문화도 똑같이 보조를 맞추어 변화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야요이 시대 전기에는 아오모리현에까지 이르렀던 논벼농사는 츠가루 해협을 넘어서 홋카이도까지 확대된 건 아니었다. 


사츠몬 문화기의 마을 대부분은 충적 저지대를 흐르는 중소 하천을 따라 약간 고지 위에 분포하고, 주거의 구조도 그때까지 원형이나 타원형 수혈 주거에서 4개의 기둥으로 만든 화덕을 지닌 사각형의 주거로 변한다. 수천 년동안 장식되어 온 조몬이 토기에서 사라지고, 또 귀얄로 바른 자국이 남은 토기를 사용하며, 석기를 만들지 않고 금속기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풀무의 풍구나 방추차도 출토되는 점으로부터 대장일이나 베짜기 기술이 도입된 것을 알 수 있다. 벼농사가 행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밭에서 조와 기장 등을 주로 재배한 잡곡 농경이 본격적으로 개시되어, 하천에서 행하는 연어와 송어잡이와 함께 생업의 기반이 되는 등 그때까지의 문화와는 내용이 크게 변혁된 시기였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사용하는 철기 등의 금속제품을 혼슈와의 교역으로 입수하지 않으면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자기완결경제의 일부가 붕괴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사용된 사츠몬  토기의 형태·문양의 차이를 바탕으로 전기(7세기 후반-9세기 전반), 중기(9세기 후반-11세기), 후기(11세기-13세기)의 세 시기로 구분된다. 




사츠몬 문화기의 잡곡 농경


지금까지 사츠몬 문화 전기부터 후가까지의 50곳의 유적에서 조, 기장, 피, 피속, 수수, 피성·나성 보리, 밀, 쌀, 메밀, 팥, 자소속, 삼, 홍화, 십자화과, 박과, 호리병박 등 16종류의 작물 종자가 출토되고 있다.


시기가 중시되는 유적도 있지만, 마을 유적의 분포가 홋카이도 중앙에서 서쪽으로 한정되는 전기의 17개 유적에서 조, 기장, 피, 피속, 장립이고 과실에 이삭이 붙어 있는 피성 보리, 메밀, 팥, 자소속, 삼, 쌀, 십자화과 등 12종류의 작물 종자가 출토되고 있는데, 쌀은 혼슈에서 가지고 들어온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작물 종자가 출토된 유적도 홋카이도 가운데로 한정된다. 다만 7세기대에는 오타루시 란시마蘭島 D 유적에서 쌀이 출토된 정도이고, 본격적으로 작물 종자가 출토된 것은 8세기에 들어서부터이다. 전기의 단계에서는 조와 기장이 주가 되고 나머지몇 종류의 작물이 공반되는데, 피성 보리와 밀은 겨우 출토되는 정도이다. 


전기의 에니와시惠庭市 가시와기栢木 11 유적의 불에 탄 가옥에서는 바닥면 전역에서 조와 기장의 종자가 약 1만 알 검출되는데, 다른 종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마을 유적의 분포가 홋카이도 가운데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이긴 하지만, 그곳을 넘어 이시카리石狩 평야 안의 깊숙한 부분과 아사히카와시旭川市, 일본해 쪽의 오비라초小平町와 도마마에초苫前町 등 홋카이도 북쪽과 동쪽에도 마을을 형성했던 중기에는 앞의 시기에 출토된 작물 외에 홍화, 박과, 호리병박이 더해져 15종류의 종자가 출토되는데, 주가 되는 건 역시 조와 기장이고 피와 피속, 피성·나성 보리, 밀 등을 수반한다. 피와 피속의 출토는 홋카이도 중앙에 한정되고, 밀의 출토는 홋카이도 중앙 및 그 서쪽으로 한정되고, 양성 보리와 짝이 되어 출토되는 예가 많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것이 삿포로시 사쿠슈코토니강 유적으로, 9세기 중엽부터 10세기의 다섯 채의 주거터와 토광, 탄화물의 집적 지점 등에서 기장 5만 알 이상, 조 8만 알 이상, 피성 보리 2만 알 이상, 밀 5천 알 이상이 출토되었다. 또한 쌀을 포함한 11종류의 작물 종자가 출토되고, 농작물의 이용이 활발해진 외에 홋카이도에서는 재배할 수 없었던 쌀도 혼슈에서 가지고 들어와 이용되었단 것을 보여주고 있다. 유적의 옆을 흐르고 있던 옛 하천 터에서는 하천을 횡단하는 모양으로 말뚝이 박아놓은 '어살 모양 유구'와 연어과의 유리된 이빨과 척추뼈도 다량으로 발굴되어, 잡곡 농경과 연어잡이가 행해졌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일본해 연안의 도마마에초 카가와香川 삼선三線 유적과 카가와 6 유적에서는 강치와 물개 등의 바다짐승의 뼈와 고래의 뼈 등과 함께 조와 기장, 나성 보리, 자소속의 종자가 출토되어, 홋카이도 중앙을 넘어서 북으로 진출한 사츠몬 문화의 집단은 바다짐승 수렵을 행함과 함께 잡곡 농경을 행했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홋카이도 중앙의 유적에서는 피성 보리와 밀이 짝을 이루어 출토되는데, 홋카이도 북쪽의 유적에서는 나성 보리가 출토되기는 하지만 밀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후기에는 사츠몬 문화의 집단은 거의 모든 홋카이도 일원에 진출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홋카이도 남쪽부터 동쪽까지의 유적에서 홍ㅎ화를 포함한 15종류의 작물 종자의 출토가 보고되고 있다. 역시 주로 재배된 것은 조와 기장, 피성·나성 보리로서, 유적에 따라서 메밀, 수수, 팥, 자소속, 삼, 홍화 등의 몇 가지가 함께 수반되는 외에, 홋카이도 중앙 및 그 서쪽의 유적에서는 밀, 피, 피속과 혼슈에서 가져온 쌀이 함께 수반된다.


표1-3 사츠몬 문화의 유적에서 출토된 작물 종자




홋카이도 동쪽의 우라호로초浦幌町 十勝太若月 유적에서는 불에 탄 주거터의 화덕 앞에서 항아리에 담긴 상태로 나성 보리가 출토되고, 주거터 중앙의 탄화재 위에서 기장과 자소속, 북서쪽 모퉁이에서 기장이 출토된다. 주거 한가운데에 깔린 판재 위에서 자소속과 기장의 선별을 행하면서 식사를 위해 토기에 담은 보리를 끓이려 하는 떼에 화재가 발생한 것이라 추정된다.


사츠몬 문화기의 작물 종자가 출토되는 상황은 7세기 말부터 9세기 중반까지는 홋카이도 중앙 및 그 서쪽의 유적에 한정되고, 홋카이도 북쪽과 동쪽의 유적에서 출토되는 것은 9세기 후반 이후부터이다. 유적에 따라서 한 종류의 작물 종자만 출토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몇 종류에서 11종류가 조합되어 작물 종자가 출토되며, 유적에 따라서 재배되었던 작물 구성이 다르다.


지금까지 철제의 괭이날이 14점, 낫이 34점 출토되어 철제의 농기구를 사용하여 조와 기장 등의 작물을 경작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밭터는 확인되지 않는다.


잡곡 농경의 기본 작물이 되었던 것은 조와 기장이고, 나성·피성 보리, 자소속, 삼, 팥 등을 수반하고, 홋카이도중앙에서는 밀과 피, 홋카이도 중앙의 서쪽에서는 밀도 함께 수반되지만, 홋카이도 북쪽과 동쪽에서는 밀과 피가출토되지는 않는다. 또한 재배형 피는 삿포로시, 지토세시千歳市, 아츠마초厚真町 등의 여덟 유적에 한정되고, 피와돌피의 중간 형태를 보이는 피속 종자가 삿포로시, 에니와시, 지토세시, 엔가루초遠輕町의 열 곳의 유적에서 출토된다. 피와 피속은 홋카이도 중앙의 한정된 지역에서 재배되고, 예외적으로 동쪽의 엔가루초에서도 피속이 재배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22개 유적에서 출토된 대형 보리에 주목하자면, 피성 보리는 칸토우에서 도후쿠 지방의 헤이안 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는 것과 똑같은 형태로, 8세기부터 13세기까지의 홋카이도 중앙에서 남쪽에 걸친 일본해 쪽의 사츠몬 문화 유적에서 출토된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태평양 쪽의 유적에서의 출토 사례는 없다. 나성 보리는 7세기부터 9세기의 오호츠크 문화의 다섯 유적에서와, 10세기 이후의 홋카이도 동쪽과 북쪽의 사츠몬 문화의 유적 및11세기 이후의 홋카이도 중앙의 유적에서 출토되고, 홋카이도 중앙을 경계로 하여 서쪽에는 피성 보리가 분포하고, 동쪽에는 나성 보리가 분포하는데, 홋카이도 중앙에서는 11세기 이후 양자가 혼재했던 모습을 보인다. 피성 보리의 계통은 도호쿠 지방에서, 뒤에 기술하는 나성 보리의 게통은 대륙 연해 지방에서 찾을 수 있다.




연해 지방의 보리


대륙 연해 지방의 유적에서 출토된 작물 종자에 대한 보고가 있는데, 그중에서 홋카이도 북쪽과 동쪽의 유적에서 출토된 나성 보리의 계측치에 유사한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으로부터 1993년에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극동지부 극동제민족역사·고고·민족학 연구소가 보유하는, 연해 지방의 초기 철기시대 전기(기원전 7세기 무렵)부터 금나라 시대(12-13세기)까지의 열일곱 유적에서 출토된 작물 종자 조사를 행했다.


열일곱 유적에서 출토된 작물 종자는 보리, 밀, 호밀, 기장, 조, 피, 수수, 메밀, 팥, 완두콩, 들깨, 삼, 홍화이고, 호밀과 완두콩을 제외하면 사츠몬 문화의 집단이 홋카이도에서 재배했던 작물과 거의 유사한 작물 구성이다.


러시아 연해 지방에서는 초기 철기시대 전기(기원전 7세기 무렵)의 마라야 바드셰스카 유적에서 나성 보리와 기장이 출토되기 시작해, 초기 철기시대 후기(기원전 5-기원 무렵)의 유적에서 나성 보리, 밀, 기장, 조, 팥, 완두콩, 들꺠가, 오리가 물화기(1-8세기)의 유적에서 나성 보리, 기장, 조가 출토되는 등 기원전 7세기부터 8세기까지의 여섯 유적과 발해 시대의 유적에서 나성 보리가 출토되고, 금나라 시대가 되어 처음으로 피성 보리가 더해져 나성·피성 두 보리가 재배되었다는 것을 밝히게 되었다. 연해 지방의 유적에서 출토된 식물 유체의 보고 사례가 증가한 최근에는 발해 시대의 코르바트카 성터 유적에서도 피성 보리, 피가 출토되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고한다. 


오호츠크 문화의 집단이 대륙과의 교역을 행하고, 대륙에서 만든 금속제품 등을 입수했던 7세기부터 9세기 무렵,연해 지방에서는 나성 보리, 조, 기장 등이 재배되고, 금속제픔 둥과 함께 이들의 작물 종자가 홋카이도에 들어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림1-7 나성 보리. 러시아 연해 지방 마라야 바드셰스카 유적(a등쪽 b배쪽)




오호츠크 문화를 흡수했던 사츠몬 문화


오호츠크 문화의 집단이 7세기 무렵부터 9세기에 걸쳐서 나성 보리, 조, 기장 등의 곡물을 이용했단 것은 앞에 기술한 대로이다. 그 무렵 홋카이도 중앙에서 하천에서의 연어, 송어잡이와 함께 잡곡 농경을 행했던 사츠몬 문화의 집단은 조와 기장 등을 재배·이용했는데,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전반의 유적에서는 지금으로서는 피성 보리를 이용했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홋카이도 중앙의 사츠몬 문화의 집단이 피성 보리의 재배·이용을 시작한 것은 8세기 후반이 되어서부터로, 보리의 이용은 오호츠크 문화의 집단 쪽이 빨랐다. 


오호츠크 문화의 집단이 보리와 기장, 조 등을 재배했던 흔적은 지금으로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대륙과의교역 활동이 활발히 행해진 것은 7세기의 일로, 이후는 별로 활발히 행해졌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어, 7세기 무렵에 가지고 들어왔던 보리와 기장 등의 작물이 재배되고, 발아할 수 있는 상태로 계속하여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홋카이도 동쪽과 북쪽에 진출했던 사츠몬 문화의 집단은 9세기 후반에는 오호츠크 문화의 집단과 접촉하여 융합을 시작해, 10세기에는 사츠몬 문화가 오호츠크 문화를 흡수하고 두 문화요소가 혼합된 토비니타이トビニタイ 문화가 형성된다. 그 과정에서 진출했던 사츠몬 문화의 집단에 나성 보리 등의 작물 종자가 발아할 수 있는 상태로 계속 받아들여짐에 따라, 10세기 이후가 되어 홋카이도 동쪽과 북쪽에서, 11세기가 되어 홋카이도 중앙의 사츠몬 문화의 집단에 의하여 이와 같은 작물의 재배가 개시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츠몬 문화가 성립할 무렵에 도호쿠 지방 북부에 진출했던 농경문화와의 교류를 통하여 그 기초가 만들어진 것으로부터 농경기술과 작물은 남쪽에서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대륙과의 교역 활동을 행했던 오호츠크 문화의 집단이 더 옛날 시기부터 단립의 나성 보리 등을 이용했단 점이 밝혀졌다. 또한 북쪽으로부터 작물이 도래한 경로도 있고, 7세기부터 8세기에 걸쳐 홋카이도에서는 남과 북으로부터 작물 세트가 도래한 경로가 존재하며, 계통이 다른 작물이 재배되고 있었다. 


이처럼 오호츠크 문화기와 사츠몬 문화기에 보리를 시작으로 한 작물 종자가 남의 혼슈에서, 북의 대륙 연해 지방에서 홋카이도로 건너와, 유적마다 작물 종자의 취사선택이 행해져, 몇 가지의 작물이 묶음이 되어 재배되었던것이다. 두 종류의 보리 분포역에서 밀을 수반하는지 아닌지의 차이는 생육환경을 반영했던 것인지, 작물 이용에문화적 제약이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현시점에서는 알 수 없다.


아이누 민족이 재배했던 기장 중에서 극조생이고 키가 작으며, 받침껍질(護穎)의 색이 자색이고 가장 끝에 털이 난 것이 있는데, 그들의 형질은 중앙아시아와 유럽의 기장에 보이는 특징으로 북방 경로로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특징을 가진 기장도 오호츠크 문화의 집단이 가지고 들어온 기장이 사츠몬 문화의 집단을 경유하여 아이누 문화에서 사람들에게 전해졌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나성 보리도 홋카이도 중앙의 아츠마초 앗포로厚幌 1 유적의 근세 전반기의 아이누 문화기의 유물 포함층에서 출토되어, 아이누 민족에게 계속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까지 야마다 집필)




콩류의 동정에 대하여 


저습지 유적처럼 특별한 보존 상태를 보이는 유적에서는 당시 이용되었던 식물 유체가 양호한 상태로 출토되고, 인간이 직접 관여했음이 분명한 식물 유체를 검출할 수 있다면 당시의 생활과 환경의 복원이 쉬워진다. 그러나 저습지 유적 같은 특별한 보존 상태의 유적에서 얻은 식물 유체의 정보만으로는 당시의 이용 상태를 명확히 하기에 충분하지 않고, 구릉과 단구段丘 등의 건조한 유적에서 출토되는 식물 유체의 정보 수집이 필수적이다.


홋카이도에서는 1974년부터 오시마渡島 관내 시카베초芽部町(현 하코다테시)에서 초의 교육위원회와 캐나다 토론토 대학 인류학부의 직원이 공동으로 조몬시대 전·중기의 수혈주거터 들의 발굴조사가 몇 년 동안에 걸쳐서 행해졌다. 발굴작업에 일관하여 부유선별 작업이 도입되고, 건조한 유적에서 채취된 토양에서 동정할 수 있는 탄화된 벼과 종자와 견과류, 과실 종자 등의 출토가 알려지게 되어 그 수법이 홋카이도 각지에서 행해졌던 발굴조사들로 급속히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홋카이도에서는 구석기시대부터 근세의 아이누 문화기까지, 약 1만2천 유적의 분포가 알려져 있는데, 그 대부분이 구릉과 주위보다 높고 평탄한 땅, 약간 높은 땅 위에 입지했고, 식물 유체의 보존에 적합한 저습지 유적의 수는 매우 조금이었다. 야생·재배 식물 유체의 출토가 보고되는 유적 수를 보면 분명해지듯이, 약 2백 몇 십 유적에서 식물 유체의 출토가 보고되는데, 이른바 저습지 유적에서의 보고 사례는 십 몇 곳의 유적에 한정되며, 그 대부분이 구릉과 주위보다 높고 평탄한 땅, 자연 제방 위 같은 약간 높은 곳에 입지했던 건조한 유적에서이다. 이와같이 조몬시대부터 근세 아이누 문화기에 걸친 유적에서의 식물 이용과 생활 환경의 복원을 행하기 위해서는 건조한 유적에서 채취한 토양 속에 포함된 탄화 식물 유체를 추출하는, 부유선별 작업이 중시되기 시작했다.


이 절에서는 부유선별법을 사용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하고, 특히 콩과 종자의 동정 결과에 대하여 고찰하며, 앞으로의 과제를 제시해 보려 한다.




콩과 종자의 동정에 대하여


콩과 종자의 동정에 대한 의론은 후쿠이현 미카타초三方町 토리하마鳥浜 패총의 조몬시대 전기의 층준에서 출토된 콩과 종자를 둘러싼 고찰로부터 시작되었다. 토리하마 유적에서는 호리병박의 종자와 함께 탄화된 콩과 종자가 아홉 알 검출되어, 이 아홉 알 가운데 몇 가지가 그 알의 모양과 배꼽의 형태에 의하여 소립의 팥일 가능성을 남기면서 녹두라고 동정되었다. 그뒤 주사형 전자현미경으로 관찰된 종피의 그물 모양 구조 유무 등으로부터 녹두만이 아니라 검은녹두(black gram)의 무리도 포함된다고 한다.


녹두는 말할 것도 없이 인도 원산이라 생각되는 것으로, 일본에서 보면 남방 기원의 식물이다. 이 견해는 토리하마 패총의 호리병박의 존재와 더불어 고고학의 영역에서 이렇다 할 의문도 품지 않고 받아들여지고 있었는데, 작물학의 입장에서 콩과 종자를 연구하고 있는 옛 고치高知 대학 농학부의 마에다 카즈미前田和美 씨는 이 견해에 의문을 나타냈다. 필자는 출토되는 재배식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토리하마 패총에서 얻은 콩과 종자의종피 표면 구조가 녹두라고 동정하는 근거가 된다는 견해에 관심을 가져, 마에다 카즈미 씨가 제공한 현생 녹두 등을 탄화시켜서 주사형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했다.


필자가 사용한 현생 녹두는 종피의 표면이 약간 매끄럽고 윤기가 나는 것이었는데, 그중에 그물 모양 구조가 발달하고 흰빛을 띠며 광택이 없는 꺼칠한 표면인 것이 소량 섞여 있었다. 그것이 한 품종의 변이인지 어떤지 알 수없지만, 중국에서 입수한 자료도 똑같은 외견을 보이고 있었다. 이와 같은 두 종류의 유형이 혼재하는 것이 보통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실험을 진행해 보면, 문제의 종피인 그물 모양 구조는 가열되면 상당한 부분이 판별하기어려워지는 걸 알게 되었다. 가열하는 온도에 따라서는 그물 모양의 구조가 거의 소실되는 예도 있었다.


앞에 기술했듯이, 현생 녹두에는 종피에 광택이 있는 유형과 꺼칠한 표면의 것이 혼재해 있어, 그물 모양 구조를 보이는 건 후자뿐이다. 그에 더해, 매몰 종자의 경우에는 열이 가해져 표피가 박리되어 있는 상태의 것이 많은 점도 고려하면, 출토 콩과 종자에 대해서는 그물 모양 구조를 단서로 삼는 동정 방법은 이용할 수 있는 범위가 매우한정된다. 또한 마에다 카즈미 씨가 시사한 주사형 전자현미경 관찰에 의한 울타리 모양 세포의 형태 차이도 필자의 관찰 능력이 낮기 때문인지 동정의 단서로는 이용할 수 없었다. 




현생 콩과 종자와 비교


출토 콩과 종자의 동정에 대하여, 간편한 방법이 발견된 건 호시카와 키요치카星川淸親 씨가 제창한 작물학의 텍스트에도 그려서 보여주고 있는 형태적 특징의 분류 방법을 적용해, 현생 콩과 종자를 해부하여 비교관찰이 진행되고 나서부터의 일이었다. 


콩과 종자에서는 배를 구성하는 떡잎 안에 있는 첫잎의 위치와 형상에서 종류에 따른 차이가 발견되는 것으로부터, 현생·출토 종자의 양쪽에 대하여, 이 수법으로 동정을 실시해 보면, 동정의 효율은 매우 높아짐이 밝혀졌다.다만 이 방법으로 분류할 수 있는 건 ①팥의 무리, ②녹두의 무리, ③대두의 무리라는 큰 식별이며, 그보다 미세한 종의 판정은 곤란하다. 또한 보존 상황에 따라서 배축과 첫잎이 소실되어 있는 사례도 있어 만능이 아니지만, 종자의 크기와 표면의 형태로 할 수 없었던 식별이 가능해졌다.


여기에서 현생 콩과 종자를 바탕으로 분류 기준을 보여준다(그림1-8, 그림1-9).


그림1-8 현생 콩과의 자료



그림 1-9 팥, 녹두, 대두의 첫잎 비교와 부위의 명칭(星川 1980에 의함)

1: 녹두(일본에서 재배되었던 재래품종)   

2: 팥의 씨앗 -a발아구 b배꼽 c돌기(種瘤) d떡잎 h배축 i첫잎 r어린뿌리

3: 대두의 씨앗 -a발아구 b배꼽 c배꼽줄 r어린뿌리 h배축 i첫잎 d떡잎 db떡잎이 붙은 부분




(A) 팥 Vigna angularis(야생) Ohwi et Ohashi,  새팥 Vigna angularis var. nippoonensis,  풀팥(草アズキ)

[알 모양] 세 종류이지만 기본적으로는 타원형, 긴타원형

[알의 크기] 새팥, 풀팥은 생육하고 있는 환경에 따라서 크기에 차이가 있지만, 중·근세 이후의 재배형 팥은 앞에 기술한 두 종류보다 확실히 크다. 다만, 이러한 크기가 언제부터 출현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 수 없다.

[종피의 색 등] 새팥, 풀팥은 얼룩무늬가 주이다. 재배 팥에는 얼룩무늬가 적고 주로 적색이 많으며, 흑색과 황색 그중에는 녹색과 황색에 붉은 얼룩무늬가 섞인 것이 있다.

[배꼽의 형태] 세 종류 모두 네모에 가까운 타원형.

[첫잎의 형태] 첫잎은 짧고, 잎끝이 모가 나고, 배꼽의 선에 대하여 비스듬히 위치한다. 첫잎은 떡잎에 대하여 작다(그림1-8-1·2, 그림1-9-2). 


(B) 녹두 V. radiata R. Wilczek, 검은녹두 V. mungo Hepper

[알 모양] 녹두는 약간 사각형에 가까운 타원형이고, 검은녹두는 원형에 가까운 타원형. 생육 환경에 따른 변이의 폭이 넓은 듯하다.

[종피의 색 등] 녹두는 녹색이 많고, 얼룩무늬가 없다. 광택이 있는 것에 거친 표면인 것이 소량 섞여 있다. 검은녹두에는 얼룩무늬가 많다. 녹두와 마찬가지로 광택이 있는 것에 거친 표면인 것이 소량 섞여 있다.

[배꼽의 형태] 녹두는 짧은 타원형이며 오목한 모양. 검은녹두는 긴 타원형이며 볼록한 모양. 

[첫잎의 형태] 첫잎의 끝이 떡잎 중앙부까지 아래로 늘어지는 경향이 있다. 첫잎은 떡잎에 대하여 대형(그림1-8-3·4, 그림1-9-1).


(C) 대두 Glycine max (L.) Merr., 돌콩 Glycine max subsp. soja, 잡초대두(풀)

[알 모양] 돌콩은 긴 타원형, 잡초대두는 타원형이나 원형. 재배 대두는 품종에 따른 변이가 많다. 편평, 타원형,구형인 것이 있다.

[크기] 돌콩은 생육 환경에 따라 크기에 변이가 있는 듯하다. 재배 대두는 품종에 따라서 크기와 형태에 변이가 보이지만 대개 균질하다.

[종피의 색 등] 돌콩은 적갈색이고 흑색 바탕에 갈색의 얼룩무늬에 얇은 껍질이며 광택이 없다. 잡초대두는 흑색. 재배 대두는 흑색, 연갈색 또는 황색, 얼룩무늬.

[배꼽의 형태] 돌콩은 평탄하고 긴 타원형. 잡초대두와 대두는 구형, 타원형.

[첫잎의 형태] 어린뿌리와 배축이 다른 종류에 비하여 좁고 길며 종피를 따라서 구부러지고 끝에 작은 첫잎이 달려 있다. 떡잎으로 축 늘어지는 건 없다(그림1-8-5·6, 그림1-9-3)

 

(D) 동부 Vigna sinensis (L.) ENDL.

[알 모양] 품종에 따라서 크기와 형태에 변이가 있지만 균질하다.

[종피의 색 등] 적색, 흑색, 백색, 갈색, 얼룩무늬.

[배꼽의 형태] 역삼각형이고 약간 볼록함. 종자의 장축에 대하여 하부에 위치한다. 

[첫잎의 형태] 배축은 두껍고, 쑥 내민 끝에 큰 첫잎(그림1-8-7).


(E) 강낭콩 Phaseolus vulgaris L.

[알 모양] 긴 구형, 신장 모양.

[크기] 품종에 따라서 크기와 형태에 변이가 있지만 균질하다.

[종피의 색 등] 백색, 주황색, 진자주색, 얼룩무늬.

[배꼽의 형태] 짧은 타원형. 종자의 장축에 대하여 중앙부에 위치한다.

[첫잎의 형태] 배축은 중간 정도로 두껍고, 쑥 내민 끝에 약간 작은 첫잎(그림1-8-8).




출토 콩과 종자의 동정


다음으로 직접 관찰할 수 있었던 출토 탄화 종자를 소개한다(그림1-10).



그림1-10 출토 콩과 자료. 

팥의 무리- 1 토야마현 오야베마치 사쿠라마치 유적, 조몬시대 중기 말엽; (未), 후쿠오카현 아사쿠라마치朝倉町 카네바金場 유적, 야요이시대 중기 초; (未), 3·4 홋카이도 삿포로시 H519 유적, 사츠몬 문화(서기 9세기 후반-10세기 전반); 2006년 5월, 5 홋카이도 유후츠군勇払郡 앗포로厚幌 1유적, 중세(서기 15세기 전후); 2004년 

대두의 무리- 6 토야마현 오야베마치 사쿠라마치 유적, 조몬시대 중기 말엽; (未), 7 후쿠오카현 아사쿠라마치 카네바 유적, 야요이시대 중기 초; (未), 8 아오모리현 카미키타군上北郡 도호쿠마치東北町 아키비라赤平 3유적, 헤이안시대(서기 10세기 후반-11세기 전반); 2007년 9월, 9 아오모리현 카미키타군 도호쿠마치 아키비라 3유적, 헤이안시대(서기10세기 후반-11세기 전반); 2007년 10월, 10 홋카이도 유후츠군 앗포로 1유적, 중세(서기 15세기 전후); 2004년




(A) 팥(그림1-10-1)

오야베마치小矢部町 사쿠라마치櫻町 유적(조몬 중기 말엽)의 쓰레기장 유적에서 80알 출토. 종자의 형태와 간신히 남아 있는 배꼽의 특징, 첫잎이 작고, 배꼽의 선에 대하여 비슴듬히 위치하는 점으로부터 팥의 무리라고 생각된다. 야노 아즈사矢野梓 씨(전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매장DNA 실험실)는 팥 그것의 연대측정을 3알에서 실시해, SA1:4155±140, SA2:4130±120, SA3: 4130±70B.P.y의 연대측정치를 얻었다.


(B) 대두(그림1-10-6)

사쿠라마치 유적의 쓰레기장 유적에서 1알 출토된 것으로 종자는 편평. 종피와 배꼽은 박리되어 있지만, 종피를 따라서 구부러진 타원형을 한 배꼽의 박리흔과, 종자의 크기로부터 대두라고 판단했다. 대두는 다른 종류에 비하여 첫잎은 극단적으로 작기 때문에, 열이 가해져 거의 남지 않고 알 모양은 끓이면 구형에서 타원형으로 변형되는 특징이 있다. 출토된 것이 한 알이라서 연대측정은 실시하지 않았다.


(C) 팥(그림1-10-2)

아사쿠라마치 카네바 유적(야요이 중기 초)의 37호 흙구덩이에서 한 덩어리로 200알 정도 출도. 종자의 형태는 타원형. 종피와 배꼽이 박리되어 있는 점으로부터 완전한 형태의 종자를 반으로 쪼개서 첫잎을 확인하고, 첫잎이작고 배꼽의 선에 대하여 비슴듬히 위치하는 점으로부터 팥의 무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D) 대두(그림1-10-7)

카네바 유적의 팥이 출토된 것과 똑같은 유적에서 한 덩어리로 출토. 알 모양과 타원형을 한 배꼽 형태의 특징, 크기로부터 대두라고 판단된다. 대두 그것의 연대측정을 행한 결과, 2160±40 B.P.y.의 연대측정치를 얻었다.


(E) 팥(그림1-10-3)

삿포로시 H519유적의 사츠몬 문화(서기 9세기 후반-10세기 후반)의 수혈주거 안의 생활면에서 출토. 종자의 형태는 타원형. 종피와 배꼽이 박리되어 있기 때문에, 종자를 반으로 쪼개서 첫잎의 확인을 행한 결과, 첫잎이 작고 배꼽의 선에 대하여 비스듬히 위치하는 점으로부터 팥이라 판단된다.


(F) 팥(그림1-10-4)

그림1-10-3에 보이는 팥과 마찬가지 유적에서 출토. 알 모양과 배꼽 형태의 특징으로부터 팥이라 판단된다. 종자의 보존상태가 좋으면 첫잎의 확인을 하더라도 동정할 수 있다.


(G) 대두(그림1-10-8)

도호쿠마치 아카히라 3유적의 헤이안 시대(서기 10세기 후반-11세기 전반)의 수로터에서 출토. 알 모양, 종자의크기, 타원형의 배꼽 형태의 특징으로부터 대두라고 판단된다.


(H) 돌콩(그림1-10-9)

그림1-10-9의 대두와 같은 유구에서 출토. 종자는 편평한 타원형이고 종자의 장축에 대하여 약간 하부에 긴 타원형의 배꼽이 있다. 이와 같은 특징은 대두의 선조종인 돌콩의 형태를 나타내는데, 형태에서 상세한 분류는 곤란하다.


(I) 팥(그림1-10-5)

아츠마정 앗포로 1유적의 중세(서기 15세기 전후)의 탄화물 집중구에서 출토. 종자는 타원형이고 반으로 쪼개진상태로 출토. 떡잎 부분에 첫잎이 잔존하고, 첫잎이 작고, 배꼽의 선에 대하여 비스듬히 위치하는 점으로부터 팥이라 판단된다.


(J) 대두(그림 1-10-10)

그림 1-10-10의 팥과 같은 유구에서 출토. 종자는 편평하고, 종자의 장축에 대하여 약간 중앙부 아래에 타원형의 배꼽이 있다. 표피에는 대두 특유의 작은 구멍 모양의 조직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이들 특징으로부터 대두라고 판단된다.


이상의 동정에서, 혼슈에는 새팥이 분포하고 있는 점, 출토된 팥의 계측치에서 현재의 팥과 비교하여 알의 지름 차이가 크다는 점 등으로부터 새팥, 풀팥일 가능성도 고려할 수 있기 때문에 팥의 무리라고 분류했다.


팥이라 분류했던 것은 조몬시대의 자료와 비교하면 전체에서 알 모양이 커지고 있는 점, 홋카이도에는 새팥이 분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혼슈에서 재배 팥으로 반입되었을 가능성이 고려되는 점으로부터 팥이라 분류했다. 


콩과 종자의 출현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직접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던 콩과 종자는 팥의무리와 대두에서는 조몬 중기의 사쿠라마치 유적에서이며, 홋카이도에서는 사츠몬 문화기(혼슈의 헤이안 시대에 상당)에서이다. 녹두에 대해서는 후쿠이현 토리하마 패총 유적에서 출토된 콩과 종자는 녹두가 아니라, 팥의 야생종 또는 풀팥이라 수정되고 있기에, 지금으로서는 녹두의 보고는 확인되지 않는다.




DNA에 기반한 형태적 동정의 검증


콩과 종자에 대해서는 토야마현 오야베마치 교육위원회에서 제공한 사쿠라마치 유적에서 출토된 조몬시대 중기의 출토라고 하는 탄화 콩과 종자에 대하여 형태와 첫잎을 활용한 동정 결과가, 당시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매장DNA 실험실의 야노 아즈사 씨가 실시했던 동일 자료의 DNA 감정의 결과와 일치했다. 형태 관찰에 DNA 분석을더함에 의하여 녹두의 무리와 팥의 무리는 종의 구분이 가능해졌다.


야노 아즈사 씨에 의하면, 첫잎 관찰을 위하여 반으로 쪼갠 콩 떡잎의 자료에서, 첫잎이 부착되어 있지 않은 쪽에서는 DNA를 추출하기 어려운데, 첫잎이 포함되어 있는 쪽에서는 높은 빈도로 추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DNA 분석에서 판명된 야노 아즈사 씨의 결론을 그림1-11에 나타내 놓는다.



그림1-11 팥, 녹두와 그 근연종의 계통도. 야노 외 2001에 의함.




앞으로의 전망


부유선별법에 의한 형태적인 관찰에서 팥의 무리, 녹두의 무리, 대두의 무리 같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고고식물학의 입장에서는 출토된 팥, 대두, 녹두가 재배화의 어느 단계에 있는 것인지, 또는 어떠한 형상을 보이느냐는 점에서 재배종이라 말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지만, 그들에 대해서는 판단 기준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 탄화 종자에서도 DNA 등을 추출할 수 있게 되었기에, 분자 수준에서의 확인 작업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를 위해서는 부유선별법으로 얻은 재배종자, 견과류 그것의 연대측정을 실시하고, 확실한 연대를 파악하는 일이 필수적이며, 또한 일본 전토의 토기 편년체계에 따른 고고식물에 관한 자료를 축적해 나아가야 할 강한 필요성이 있다. 


최근에는 복제법의 발달에 의하여 토기 바탕흙에 대한 부착 압흔에서 식물 종자 등의 분석이 가능해져, 큐슈에서는 조몬시대 후·만기, 야요이시대의 토기 조각에서 콩과 등의 압흔이 보고되고 있는 외에, 야마자키현에서도 조몬시대 중기의 토기 조각에서 대두와 팥의 무리가 보고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일본에서 재배식물이 언제까지 거슬러 올라가느냐 하는 문제는 예상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복제법의 연구성과에 의하여 재배식물의 출현 시기가 예측되기 시작했다. 앞으로 DNA 고고학의 발달과 복제법과 부유선별법의 새로운 자료의 증가가 기대된다. (이 절까지 츠바키사카 야스요)





마치며


13세기에는 계속 직접 만들어 온 끓이는 도구로 쓰이는 토기가 만들어져, 혼슈에서 입수된 철냄비를 사용하기 시작한 아이누 문화기를 맞이한다. 지금으로서는 홋카이도 중앙 및 남쪽에 집중되는데, 14세기부터 18세기까지의 25개 유적에서 쌀, 야생 보리, 밀, 조, 피, 기장, 수수, 메밀, 팥, 십자화과, 자소속, 삼, 참깨속, 박과 등 14종류의 작물 종자가 출토되고 있다. 사츠몬 문화기의 유적에서 출토된 작물 종자와 비교해도 홍화, 호리병박만 없고, 사츠몬 문화의 집단이 재배했던 작물 구성과 거의 동일한 구성이었던 것을 보여준다. 다만 사츠몬 문화기와 크게다른 것은 사츠몬 문화기에는 피가 비주류 작물이고 조와 기장이 주로 재배된 데 반하여, 아이누 문화기에 주로 재배된 것은 피와 조이고 기장은 비주류 작물이었단 점이다. 주요 작물 교대의 요인은 알 수 없지만, 14세기부터18세기에 걸쳐서 기후가 서서히 악화되었던 점이 하나의 요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밭에 대해서는 곤도 쥬조近藤重蔵(1771-1829)의 <곤도 쥬조 에조치蝦夷地 관계사료>(1798년 간)에는 "특히 미개인이라 농법이 없고, 나무의 가지, 아이누의 짧은 칼 등을 써서 흙을 평평히 하고, 전체에 씨를 뿌리고, 두둑도 짓지 않고, 거름도 쓰지 않고, 김을 매지도 않는다. 물론 괭이와 낫도 없다."라고 18세기 말경에는 괭이와 쟁기 같은 철제 농기구 없이 나무의 가지나 특유의 단도로 쟁기질하고 두둑도 없는 밭을 만들었던 일이 기록되어 있어, 이들의 기술을 바탕으로 아이누 민족의 농경은 두둑을 짓지 않는 밭을 만들고 제초도 하지 않는 매우 조방한 것이었다고 이야기되었다.


그러나 약 10년 전쯤부터 17세기 중엽에 내린 화산재와 부석에 뒤덮여, 괭이와 쟁기 등의 농기구가 없으면 만들지 못하는 두둑을 지닌 밭터가 17개 유적에서 발굴되는 외에, 숫자는 적지만 철제 괭이와 쟁기가 출토되어 규모는 작지만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여 두둑이 있는 밭을 만들었단 점이 계속 밝혀지고 있다. 농기구를 사용하지 않는 점에서 조방적이라 이야기된 근세 아이누 민족의 농경 활동이 재검토되는 시기가 되고 있다. (이 절, 야마다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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