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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3




기고 4

누란의 농업과 염해     -이토 토시오伊藤敏雄





누란은 염해로 멸망했다?


누란 왕국은 돈황 서쪽 최초의 오아시스 도시국가이고, 실크로드의 요충에 해당하며, 동서 교역으로 번영했는데,어느 사이에 역사에서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이 누란 왕국 멸망의 요인에 대하여 최근 염해를 그 요인의 하나로 드는 견해가 제출되었다. 인구 증가에 수반하여 식량이 부족해지고, 이모작을 행하게 되었기 때문에 관개에 의하여 염분이 집적되어 농업 생산이 가능한 약간의 토양도 황폐해져 버렸다고 한다(山田 2005).


흥미로운 지적으로, 메소포타미아처럼 건조지역에서 관개농업을 전개하면, 지나친 관개에 의하여 염해가 발생하는 것은 상정할 수 있다. 그러나 사료적인 근거는 보이지 않고, 억측에 지나지 않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문헌 사료와 고고학적 성과에 의하여 누란의 농업 사정과 염해의 가능성에 대하여 검토하려 한다.



그림1 누란 주변의 유적 분포도. 누란 고성은 스테인의 편호로 LA. 신장 문물고고연구소 <2002년 소하묘지 고고조사와 발굴보고>([신장문물] 2003-2)의 그림1을 바탕으로 작성.





누란의 농경과 목축의 개시


1979년에 고묘구古墓溝에서 발견된 '누란의 미소녀' 미이라는 모직물로 감싸고, 새의 깃털을 꽂은 펠트 모자와 소가죽 신발을 몸에 착용하고, 머리가 있는 곳에 식롱食籠(밀 씨앗 등을 담은 풀로 짠 바구니)이 놓여 있었다. 그 곁에는 유아의 미이라가 작은 관에 장사지내지고, 모직물로 감싸여 앞가슴에 식롱이 놓여 있었다. 고묘구에서는 이외에도 모직물로 감싼 백골 사체와 펠트 모자, 식롱 등이 여럿 출토된다. 1980년에 철판하鐵板河 고묘에서 발견된 '누란의 미녀' 미이라는 머리에서 가슴에 걸쳐서 풀로 짠 키 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얼굴은 양가죽으로 덮여 있으며, 상반신은 모직물로 감싸고 하반신은 양가죽으로 덮여 있었다. 또 새의 깃털을 꽂은 펠트 모자와 소가죽 신발을 몸에 착용하고, 머리의 왼쪽에 식롱이 놓여 있었다. 고묘구는 3800년 전 무렵의 묘이며, '누란의 미녀' 미이라도 거의 같은 무렵의 것이다. 


또 1934년에 스웨덴의 헤딘이 조사했던 소하묘(5호묘)가 2000년에 재발견되어, 2002년부터 신장 문물고고연구소에서 재조사해 '새로운 미녀' 미이라 등이 발굴되었다. 동서 약 74미터, 남북 35미터의 모래언덕 위에 약 140그루의 호양나무(뒤에 기술) 그루가 서 있고, 그 아래에서 호양의 옆널과 뚜껑을 짜맞춘 관이 여럿 발굴되고, 관의 대부분은 선지피가 묻은 소가죽으로 덮여 있었다. 관 속에서는 모직물로 감싼 미이라와 밀 씨앗 등을 담은 식롱 등이 발견되었다. 이 소하묘는 4000-3000년 전 무렵의 묘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림2 소하묘




2006년부터 종합지구환경학연구소의 프로젝트(대표 사사키 요우이치로)에서 소하묘에 관한 중국과의 공동연구를 진행해, 출토된 소가죽, 소머리와 밀 등의 조사를 행하여 소는 가축종, 밀은 재배종임이 밝혀진다. 


그러므로 4000-3000년 전 무렵 공작하와 그 지류인 소하의 수량은 풍부하고, 소하묘 주변에서는 근처에 호양(포플러과의 나무이지만 포플라와 모습이 다르고, 버드나무 모양의 잎과 손바닥 모양의 잎 등 여러 잎이 달리며, 큰 나무가 되는 경우도 많음)의 숲이 있으며, 초지에서 소와 양을 사육하고, 농사지을 수 있는 땅에서 밀 등을 재배하며, 농경과 목축이 개시되었다고 상정된다.




누란 왕국의 환경과 농업


주지하듯이, 누란의 이름이 중국의 역사서 <사기>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건 기원전 176년의 일로, 그 이전부터 왕국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역사는 알 수 없다. 한의 무제 시대부터 한의 세력이 서역에 미치게 되면, 흉노와 한에 끼어서 농락을 당하여 기원전 77년에는 한에 의해 왕이 살해되고, 국명도 선선이라 고쳐졌다. 


이 누란(선선)에 대하여 가장 정리된 기술이 <한서> 서역전 선선국조에 보이며, 거기에서 누란의 환경과 생활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선선국, 본래는 누란이라고 이름을 짓다. 왕은 한택성扞澤城에서 다스린다. 양관으로부터 1600리, 장안으로부터 6100리, 가구 1570호, 인구 1만4100명, 병사 2912명이다. (중략) 땅은 모래소금으로 농지가 적고, 이웃나라에게 농지를 부치고 곡식을 얻는다. 나라는 옥을 생산하고, 갈대·능수버들·호동胡桐·백초가많다. 백성은 목축에 따라 물과 풀을 좇는다. 당나귀가 있고, 낙타가 많다. 병기를 잘 만들고, 뤄창婼羌과 같다.


곧 선선국은 원래 이름이 누란이고, 한택성을 국도로 하며, 염분이 있는 건조지(모래소금)이어서 농지가 적었기 때문에, 이웃나라에서 농지를 빌리거나, 이웃나라에서 곡물을 구입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갈대'는 갈대, 능수버들은 새양버들, 호동은 호양을 가리키며, 백초는 대남풀로 추측되며, 호양과 새양버들, 갈대 등이 번성하는 풍요로운 오아시스였던 것도 알 수 있다. 그와 같은 환경에서 사람들은 목축에 종사하고, 물과 풀을 뒤좇아서 생활했는데, 약간이나마 농지가 있었기에 반농반목의 생활을 행했다고 생각된다. 가축으로는 당나귀와 낙타를 들고 있는데, 소와 양, 말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상과 같이 건조에 강한 호양과 새양버들, 갈대로 이루어진 풍부한 식생이었는데, 농경의 측면에서는 염분이 있는 토지가 많아 농지는 적었다고 할 수 있다.




누란 고성은 누란의 국도인가?


누란의 가장 대표적인 유적은 누란 고성이다. 고성은 1980년의 새로운 표정標定에 의하면 동경 89도 55분 22초, 북위 40도 29분 55초에 위치하고, 공작하 남서의 지류가 분기하고서 합류하기까지의 사이에 있으며, 로프노르호숫가에서 약 28킬로미터 떨어진 눈에 들어오는 야르당(바람과 물에 깎인 불규칙한 지형)의 안에 있다.


고성은 서북으로 기울어진 한 변이 약 330미터인 정돈되지 않은 모양의 네모꼴(동 333.5미터, 남 329미터, 서와 북 327미터)의 평면도를 가지는데, 성벽은 조금만 남아 있고, 특히 동북풍의 영향으로 북서의 성벽은 심하게 파괴되어 있다. 성 안도 모래바람에 토막토막 사라져 있는데, 햇볕에 말린 벽돌로 쌓은 불탑(봉수대라는 설도 있음)과 '세 칸 방'(헤딘이 관공서라고 부른 곳으로, 중앙의 방 셋이 잘 남아 있기에 중국에서 이렇게 통칭) 외에, 옛 수로의 흔적과 호양의 목재 등을 사용한 주거터가 남아 있다. '모래에 묻힌 도시'라고 형용되는데, 오히려 '모래바람에 깎인 도시'라고 부르는 게 낫다.


그림3 누란 고성의 항공사진 <시비로운 로프 호수 중국과학원 신장분원 로프노르 종합과학고찰대>(과학출판사, 1985년에서)





이 누란 고성이 일본에서는 누란(선선)의 국도라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국도에 대해서 예전부터 여러 설이 있어,대략 다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1. 줄곧 누란 고성의 위치에 있었다(북방설).

2. 처음에는 누란 지구에 있었지만, 기원전 77년에 개명할 때 뤄창若羌(차크크릭) 또는 미란米欄으로 남천했다(남천설).

3. 줄곧 남방의 뤄창과 미란에 있었다(남방설).


이 가운데 북방설이 가장 성립하기 어렵다. 고성 및 그 주변에서 옛 돈을 제하면 전한 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고성 안팎에서 얻은 탄소 14법에 의한 절대년대도 전한 만기부터 후한 시대의 수치를 나타내기 때문에, 고성은 전한 시대의 유적이 아니라 전한 만기부터 후한시대에 건설되어 위진 시기에 서역 장사부의 소재지로 기능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3-4세기의 카로슈티Kharoṣṭhī 문서에서 보는 역전驛傳 경로에서 국도를 가리키는 쿠바니Kuvani도 뤄창에 상당한다고 생각된다.


한편, 남천설도 기원전 77년의 천도는 생각하기 어렵고, 남방설도 로프노르와의 관계와 돈황에서 로프노르 북방을 경유하는 경로를 설명하기 어려워, 현재 발견되어 있는 뤄창의 유적도 전한 시대의 유적은 아니다. 현시점에서는 전한의 서역도호 설치(기원전 60년) 전후인지 전한 전기에 누란 지구에서 뤄창으로 남천했다고 생각해야 할 듯하다. 아무튼 누란(선선)의 멸망에 대해서는 국도가 남방의 뤄창에 있었다고 상정하고 검토해야 한다. 




위진 시기 둔전의 수리개발


3-4세기에는 위진에 의한 서역 경영의 거점으로 누란 고성에 서역 장사부가 설치되고, 누란 지구에서 주둔군에 의한 둔전이 행해졌다.


누란은 자칫하면 사막이란 인상을 주기 쉽지만, 누란에서 출토된 문자 자료에는 물이 풍부했다고 이야기하는 기재가 있다. 


물이 큰 파도로 깊고 반드시 넘칠 것이라는 기록이나, 부대장인 장충張忠이 병사인 노평세魯平世를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평세가 물에 빠져 죽어서 그 책임을 묻고 처벌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보이며, 수량이 늘어나거나, 물에 빠져 죽지 않을 정도의 상황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대로 물이 말라 물 부족인 때도 있었던 듯하고, 잠깐 물이 오는 걸 바랐지만 절대 이르지 않았다는 기록과 흘러오는 물이 적다는 기록도 발견된다.


이상과 같이 갈수기를 제하면 물도 풍부했다고 생각되는데, 이와 같은 상태의 물을 저수지와 수로, 제방을 쌓아서 확보하고 이용했다. 우선 '수제병守堤兵'과 '진군제鎭軍堤'란 단어가 보여 제방이 쌓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방에 관련하여 '큰물 때문에 동방에서 6개소가 터져 무너지고, 물이 제방을 넘어서 이미 큰 홍수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제방이 크게 터져 무너진 상황과 제방 보수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사순史順이 병사를 모아서 동방에 깊고 큰 대탁지大涿池(저수지)를 만들었는데, 흘러 오는 물은 적어 추계하면 월말 전후에 누란에 도달할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강물을 둑으로 막아 저수지를 축조해 일단 모은 물을 수로를 통해 누란 방면으로 흐르게 했음이 상정된다.


이와 같은 수리개발에 관련하여 <수경주水經注> 하수河水의 주에 다음처럼 고사가 전해지고 있다.


행이사行貳師 장군으로 대표된 돈황의 색려索勵가 주천과 돈황의 병사 천 명을 이끌고 누란에서 둔전을 하려 하여, 백 채의 집을 짓고, 선선과 언기焉耆, 구자龜玆 삼국의 병사 각 천 명을 소집하여 주빈하注濱河(공작하)에 둑과 제방(댐)을 쌓으려 했는데, 둑과 제방이 완성되는 날 큰물이 밀어닥쳐 둑과 제방을 부수어 버렸다. 색려는 왕존王尊(한대의 사람)과 왕패王覇(후한대의 사람)의 고사를 들어서 물의 신에게 기도했지만 기세는 쇠하지 않았다. 그래서 군진을 짜서 무기를 갖추고 큰북을 울려 우렁찬 소리를 일으키고, 검으로 베거나 활을 쏘거나 하며 3일 동안 강의 흐름과 맞서 싸운 결과, 물의 기세는 쇠하고 비옥한 들을 관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3년 동안 많이 경작해 조 백만 섬을 비축하고, 외국을 위복시키게 되었다.


이 고사는 언제쯤의 일인지, 사실인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한인의 누란 진출과 둔전, 수리개발을 반영하고 있다. 이 고사에서 둑과 제방을 쌓아서 강물을 가로막고 관개하여 둔전을 개발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음과 함께, 홍수에 대처하는 것이 어떻게 큰일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위진 시기의 둔전에서는 저수지와 수로, 제방 등의 수리시설을 건설하고, 수세의 상황을 감시하면서물을 확보해 이용하며, 농지를 관개하여 농경을 행했을 것이다.




위진 시기 둔전의 농업활동


위진 시기 누란의 둔전에서는 '將……'이란 부대장에 통솔되어 '……部'라고 불리는 각각 20-30명 안팎의 부대로 편성되어서, 평시에는 수리개발과 농경에 종사했다. 관개와 농경의 실태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다음의 기록이 있다.


장將 장첨張僉이 통솔하는 부대는 현재 병사 21인이 있고, 보리밭 2경頃(약 3만 평) 가운데 모두 20무畝(약 3000평)를 쟁기질하고, 밀밭 37무 가운데 모두 29무를 쟁기질하며, 조밭 1경85무 가운데 20무를 관개하고 90무를 사이갈이하며, 기장밭 90무 가운데 70무를 관개했다. 장將 양양梁襄이 통솔한 부대는 현재 병사 26인이 있고, 보리밭 66무 가운데 모두 50무를 쟁기질하고, 밀밭 63무 가운데 모두 50무를 관개하며, 조밭 1경70무 가운데50무를 사이갈이하고 50무를 관개하며, 기장밭 80무 가운데 70무를 관개했다.


월별 작업기록이라 생각되는데, 이에 의하면 장수 장첨의 부대는 병사 21인으로 총계 512무, 1인당 24.4무를 경작하고, 장수 양양의 부대는 병사 26인으로 총계 379무, 1인당 14.6무를 경작한 것이 된다. 20-30명 안팎의규모인 부대가 누란 지역에 산재한 농경지에서 보리와 밀, 조, 기장 등을 재배하고, 관개와 쟁기질을 행하거나 사이갈이하거나 했음을 알 수 있다. 농기구로는 '가래(胡臿)'를 다수 보관한 기록이 있기에 서역에서 만든 철제 가래도 사용했는데, 쟁기와 소를 함께 검사하는 기록도 보여 소쟁기질도 도입하고 있었던 듯하다.


관개에 관련해서는 장수 윤의尹宜가 통솔한 부대가 북하의 밭 1경을 관개했단 것을 6월26일에 보고한 기록이 있어, 북하의 강물을 이용하여 관개했음과 함께 북하의 유역에 농사땅이 개척되어 있었음을 이야기한다. 북하는 누란 고성 북쪽에 있는 공작하나 그 지류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또한 '참으로 성안의 밭에서는 내일 이후 토지를 갈아서 씨를 뿌리라'는 기록도 있어, 누란 고성 안 등에도 농사땅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1980년 조사에 의하면, 고성의 동북과 남서 교외의 야르당 안에 부식토와 교란된 토양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누란 지구의 주요한 농경지는 주로 관개에 적합한 고성 북쪽부터 공작하 지류 유역에 걸쳐서 산재하여 분포했는데, 누란 고성 주변에도 농경지가 있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이처럼 산재한 농경지에서 쟁기질, 써레질, 파종, 사이갈이라는 공정과 관개, 특히 사이갈이 과정에서 관개 작업을 확인할 수 있다. 농산물의 명칭으로는 조, 기장, 보리, 밀 등의 곡물과 채소 등을 확인할 수 있는데, 1980년의 조사에 의하면 대량의 기장 씨앗 외에 보리의 씨앗과 밀의 이삭, 복숭아 씨앗 등이 발견되어 보리와 밀, 기장에 대해서는 그 재배가 고고학적으로도 확인된다.


이상과 같이 누란의 둔전에서는 저수지와 수로, 제방 등의 수리시설을 건설해 수세의 상황을 감시하면서 물을 확보해 이용했다. 병사는 '장수'라고 부르는 부대장이 통솔하고, 각각 20-30명 안팎의 부대로 편성되어 평시에는 수리개발과 농경에 종사했다. 누란 지역의 주요한 농경지는 주로 관개에 적합한 고성 북쪽부터 공작하 지류 유역에 걸쳐서 산재하여 분포했는데, 누란 고성 주변에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농경지에서 관개를 행하고, 쟁기질과 써레질, 파종, 사이갈이 등을 행하거나 하여, 보리와 밀, 기장 조 등의 곡물 외에 채소도 재배했다.




누란에 염해는 있었을까?


원래 염분이 있는 건조지에서 이상과 같은 관개에 의한 농업 활동을 전개한다면, 염류집적을 일으킨다고 추측할 수 있다. 3-4세기의 농경이 누란 지구의 염해를 불러와, 누란 지구의 폐기에 박차를 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는 문헌과 출토된 문자 자료를 보는 한, 논증할 수는 없다. 또한 누란 지구에서 관개와 농경을 추진했던 건 누란(선선)의 사람들이 아니라 위진 시기 둔전의 병사들이다.


더구나 누란(선선) 왕국은 남방의 뤄창으로 남천했기 때문에, 그 멸망과 연결시킬 수는 없다. 뤄창 방면에서는 미란의 한과 당 시기라고 하는 관개수로망을 제외하면, 수리와 농경의 관계는 문헌적으로도 고고학적으로도 알 수 없다. 미란의 관개수로망도 막연히 한과 당 시기라고 하여 시기와 이용자가 특정되지 않기에, 누란(선선) 왕국의 멸망과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누란 지구에서 행하던 3-4세기의 둔전에 의한 염해의 가능성은 있지만, 누란(선선) 왕국 멸망의 요인이라 연결시키기는 어렵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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