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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3




기고3

황토 고원의 농경과 환경의 역사     

                                                               -무라마츠 코우이치村松弘一





2000년 전의 황토 고원 -문헌사료와 화상석


지금으로부터 대략 2000년 전의 중국 후한 시대, 영락 4년(129)의 일. 서방의 강족의 반발로 애먹고 있던 후한왕조가 자주 침공을 받았던 박방의 군현을 방기한 것에 대하여, 상서尙書 복사僕射의 직에 있던 우후虞詡라는 인물이 아래와 같은 상소를 올렸다.


옹주雍州(현재의 산시성)는 비옥한 들이 천리인 땅이며, 그곳의 곡물 수확량은 매우 많습니다. 또한, 북방의 구자龜玆(현재의 위린시楡林市 북쪽)에는 소금못이 있어, 그것은 백성에게 이익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물과 풀은 풍부하고, 그 토지는 목축에 적합합니다. 소와 말은 앞뒤로 대열을 이룰 만큼이고, 양떼도 길을 가로막을 정도로 많습니다. 북쪽은 산하로 막히고, 지형이 좁고 험한 토지입니다. 거수渠水 관개, 물레방아와 조운漕運에 의하여 적은 노력으로 군량이 풍족합니다. 그 때문에 전한의 무제와 후한의 광무제는 북쪽의 황하를 따라서 삭방군朔方郡을 세우고, 서하군西河郡을 개척하며, 상군上郡을 설치했습니다. (<후한서> 서강전西羌傳)


글 속의 전한 시대의 삭방군이란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의 임하臨河부터 우라터기烏拉特旗 부근까지의 지구, 서하군이란 내몽골의 오르도스Ordos시부터 황하 양안을 남하하여 후커우壶口 폭포에 이르기까지의 지역, 상군이란 북쪽은 신목현神木縣부터 남은 연안延安, 황릉黃陵에 이르는 지역이다. 즉, 삭방군, 서하군, 상군은 황하 고원 북부에 해당한다. 상소문에서는 그 땅에는 목축에 적합한 정도의 풀과 물이 풍부하게 있으며, 또 거수 관개에 의하여 농경도 가능하다고 한다. 즉, 이 땅은 목축과 농경 모두에 적합한 토지였다. 목축민과 농경민의 다툼이 이 땅의 역사를 형성했다고 말해도 좋다.


그림1 황토 고원 관계 지도(전선의 범위 안=황토 고원)




산시성 북부(산북 지역)을 흘러, 황하로 흘러 들어가는 하천은 그 수량이 적기 때문에 흐름이 정해져 있지 않은 강, 곧 '무정하無定河'라고 이름을 붙였다. 우후가 상소한 2000년 전, 이 무정하 유역에서는 화상석묘(묘 안이 돋을새김으로 장식된 묘)가 다수 조영되었다. 화상석묘는 후한 시대에 유행하여, 산둥과 허난, 장쑤, 쓰촨과 산북등에서 발견된다. 돋을새김의 디자인에는 서왕모 등의 신화와 거마 출행도, 시황제 암살 미수 사건 등의 역사 고사 외에, 대저택의 주방과 정원, 연회 등의 풍경이다. 예를 들면, 한 마리의 소가 짧은 성에의 쟁기를 끌고 있는 그림(그림2-①), 두 마리의 소가 쟁기를 끌고 있는 그림(그림2-②), 퇴비로 만들기 위하여 말의 똥을 모으는 그림(그림2-③) 등이 발견된다. 소쟁기질 그림의 위아래에 조의 이삭이 늘어져 있는 그림이 배치된 디자인도 있다(그림2-④). 그밖에 투우, 닭, 양, 사슴, 말 등의 목축과 활로 조수를 뒤쫓는 수렵의 광경도 볼 수 있다. 정말로 농경과 목축이 혼재된 산북 지역의 풍경을 묘사한 것이다. 이 묘의 주인은 남쪽에서 입식한 한인이다. 한왕조에 의하여 산북 지역은 유목민, 흉노와 싸우는 최전선에 위치했다. 전한 시대에는 곽거병霍去病과 위청衛靑이 흉노와 격심한 공방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후한 시대가 되면 흉노가 남북으로 분열되어, 남흉노는 한에 귀순하고 북흉노는서쪽으로 옮겨, 북방 변경은 안정화되었다. 화상석묘가 건설된 시기는 기원후 90년부터 139년까지의 대략 50년동안으로 제한된다. 140년에 흉노는 남쪽으로 침공해, 무정하 유역에 거주하던 한인은 남쪽의 관중 지역또는 황하 동안의 리석離石으로 도망갔다. 리석에서 무정하를 따라 같은 디자인의 화상석묘가 발견되고 있는 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한나라의 백성이 떠난 뒤, 그 땅은 다시 목축의 장이 되었다. 정말로 황토 고원은 농경과 목축의 쌍방에 적합한 토지였다.


그림2 위부터 ①왕득원王得元 묘(수덕현綏德縣 출토), ②수덕현 백가산白家山 출토, ③수덕현 하가만賀家灣 출토, ④수덕현 손가차孫家 출토(모두 <수덕 한대 화상석> 산시 인민미술출판사, 2001년에서 인용) 




황토 고원 -황사의 발생원


황토 고원이란 서쪽은 칭하이성의 오초령烏梢嶺, 동쪽은 태행산맥太行山脈, 남쪽은 진령산맥秦嶺山脈에 이르는 60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황색 대지를 가리킨다. 이 황색 대지의 흙은 2백 몇 십만 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국서북부의 사막부터 감기어 올라간 모래가 태행산맥과 진령산맥에 가로막혀, 퇴적된 것이라 생각해 왔다(최근에는주변 토지 표층의 미세한 표토가 집적된 것이란 생각도 있음). 황토의 두깨는 50미터에서 80미터, 가장 깊은 곳에서 200미터에 이른다. 황토 고원 북부는 연간 강수량이 400mm 선상에 위치하고, 그보다 북쪽은 건조지대에 들어가 농경에는 적합하지 않다. 산북 지역은 사막화의 최전선에 위치해, 북쪽에서는 마오우쓰 모래땅이 펼쳐져 있다. 황토 고원이라 말하면, 횡혈식 야오통窰洞 주거에 살고, 사막화 속에서 괴로운 생활을 계속하는 빈곤 지역이란 이미지가 있다. 그 한편에서 20세기 초 무렵의 독일 리히트호펜Richthofen이 '황토는 비옥하다'라고 기록을 남기고 있듯이, 황토 고원에는 농업에 적합한 풍부한 토지라는 인상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이미지를 가진 황토 고원은 토양이란 관점에서 보면 역시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황토'를 토양 모재로 형성된 '황색 대지'는 토양학적으로 황면토黃綿土, 흑로토黑爐土 및 루토塿土로 크게 분류된다. 지금 <중국 토양도>(그림3)에서 그 위치를 확인하면, 황면토는 북부의 산북 지역부터 산시성 북부, 흑로토는 징허涇河 상류의 류판산六盤山 일대, 루토는 황토 고원 남단부의 곧 관중평원과 산시성 펀허汾河 유역에 분포한다. 이 가운데 황면토는 입자가 가늘고 점질이 없는 보슬보슬한 토양으로, 비에 의하여 무너지기 쉽고, 물과 흙 유출의 원인이 된다. 게다가 초봄에 감기어 올라간 흙은 일본에까지 날아와, '황사'로 보도된다. 흑로토는 숲과 초원이 존재하는 것을 가리키는 토양인데, 그 분포는 매우좁은 범위에 한정된다. 그리고 루토는 '비옥한 흙'의 바탕이다. 함유하는 점토광물과 부식이 양분이 되는 양이온을 끌어당기고, 또 흙에 보수력을 갖게 하는 떼알구조를 만드는 작용을 한다. 그 때문에 '황토'는 물만 있으면 농작물이 자라는 토양이라 이해되었다. 그러나 그 전제에는 계속적인 시비가 빠질 수 없었다. 곧, 이 토양의 존재는그곳에 거주했던 사람들이 오랫동안에 걸쳐서, 게다가 계속적으로 농경을 행해 왔던 것을 보여준다. 그에 반하여북부의 황면토는 루토가 되지 않았다. 황면토의 지하 토양을 보면 흑로토 등이 층을 이루고 있는 장소도 있다. 그것은 이 토지에서 토지이용이 오랜 시간 속에서 숲과 초원, 농경 등 다양하게 변화했단 것을 보여준다.때로는 숲과 초원으로 사람의 손이 미치지 않고, 때로는 농경을 하며, 때로는 목축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생각한다면,황토 고원의 농경과 목축의 역사를 보면서 농경이 계속 행해졌던 관중평원과, 농경과 목축이 복잡하게 교체되어 행해졌던 황토 고원 북부 지역에 걸쳐서 살펴야 할 것이다. 


그림3 중국 토양도(황토 고원 지역) <중국 토양>(제2판)의 지도를 바탕으로 작성




황토 고원 북부의 농목 경계지역


황토 고원 북부 특히 산시성陝西省 북부(산북)에서 산시성 대동에 걸친 지역은 농업과 목축의 경계선, 곧 '농목 분계선'이라 부른다. 역사지리학의 시점에서 황토 고원의 자연환경 역사를 연구했던 사념해史念海 교수의 연구에서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의 진한시대와 300년 전의 명청시대의 숲 분포는 그림4처럼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진한시대에는 산북과 오르도스에도 숲이 발견되고, 동쪽의 뤼량산맥呂梁山脈도 녹색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2000년 가까이에 걸친 농지 개발의 결과, 명청시대가 되면 숲은 소멸했다고 생각한다. 


그림4 황토 고원 숲 변천도. 위부터 ①진한시대 ②명청시대




황토 고원 북부의 토지이용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던 큰 원인은 농경을 주요한 업으로 삼는 인구의 증가에 의한 북방으로의 입식과 지구 규묘의 기후변화에 의한 유목민의 남하이다. 사념해 씨의 연구에 의하면, 한대와 당대 그리고 명대의 시기에 한족의 입식에 의한 황토 고원의 농지화가 적극적으로 권장되었다. 한의 무제 시대에는 70만 명이 황토 고원 북부 및 오르도스로 이주되었다. 당대에는 확대된 땅에서 말 방목이 행해졌는데, 이주자의 증가에 의해 새롭게 설치된 주州의 수도 많고, 농지화가 진전되었다. 명대에는 왕성히 장성선長城線에 둔전이 시행되었다. 특히 소금 상인이 변경을 지키는 군에 곡물을 보냄에 따라 소금의 판매권을 얻을 수 있는 개중법開中法이 시행되면서 서북 변경에 해당하는 황토 고원의 농지화는 진행되었다. 이들 시기에 농지화된 토지에서는 조방적인 경영이 행해져, 현지의 식량을 조달할 수 있는 정도의 생산력이고, 인구 증가와 재해 발생시에는 더욱 세찬 농지 개발이 권장되었다. 그 과정에서 숲과 초원은 파괴되어, 토양의 침식도 진행되었다고 한다. 기후변화에 관해서는 축가정竺可禎 씨의 연구가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문헌사료 등에 기반한 분석에 의하면, 기원전 3-1세기의전한시대는 현재보다 2도 정도 기온이 높았는데, 기원후 1세기, 곧 후한시대 이후는 한랭화가 시작되어 7-8세기의 당대에 이르러 겨우 온난해졌다고 한다. 한랭화의 시대는 흉노의 남하 또는 북방 유목민이 화북을 지배한 오호십육국, 북조 시대와 합치한다. 한랭화가 산북과 오르도스 지역의 목축화를 불렀다고 말할 수 있다. 게다가 12세기의 남송 시대, 13세기의 원, 17세기의 청대 초기에 한랭화의 경향이 나타나, 그 시기는 요, 금, 몽골, 청 등의 북방 유목민의 남하 시기와 일치한다. 이처럼 기후변화의 영향을 직접 받은 것이 농경과 목축에 적합했던 황토 고원 북부의 지역이었다.


그러나 토지이용의 상태는 '농목 분계선'이란 형식에서 단순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복잡하게 뒤얽혀 있었다. 장성선의 북쪽에서 농경이 행해지기도 했다면, 남쪽에서 목축이 행해진 경우도 있으며, 확실하게 농·목의 선이 그어질 리 없다. 이 지역의 농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물이다. 전술한 1-2세기 후한시대의 무정하 유역에서 농경이 행해졌던 건 물을 얻기 쉬운 하천 옆의 평지이고, 하천 양안의 구릉지에서는 수렵이 행해졌다고 생각한다. 4세기 오호십육국 시대가 되면, 유목민이 남하하고 흉노의 혁련발발赫連勃勃이 처음으로 산북을 방문했을 때, '이 언덕은 아름답고 넓은 호수에 접해 청류를 품고 있다. 나는 여러 곳에 갔지만, 여기만큼 아름다운 곳은 못 보았다"라고 말했다 한다. 풍부한 물을 상상시키는 기재이다. 또한 최근 통만성統萬城 동남의 홍돈계에서는 6세기부터 10세기에 걸친 묘지墓誌 47건의 발견이 보고된다. 이 가운데 당시의 환경을 엿볼 수 있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수나라의 질노연휘叱奴延輝 묘지에 '모래땅의 남쪽 산 양陽(남)에 매장한다'와 당의 양현도王玄度 묘지에 '모래톱 만 리'라는 것에서 매장지의 주변은 모두 모래 안에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에 반하여 안민安旻의 묘지에는 '험하고 이어진 모래언덕에 면하다'라고 하는 한편, '물가와 육지가 복잡하고'라고 하여 모래땅과 물, 초원이 복잡하게 분포하고 있었단 것도 상정할 수 있다. 현재, 통만성을 방문하면 남으로 흐르는 무정하는 많은물을 채우고, 그 양안에는 모래언덕이 형성되어 있는 광경을 눈으로 볼 수 있다. 물의 존재가 이 지역에서는 생업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산북 및 그보다 북쪽의 지역이어도 충분한 물을 확보할 수 있다면 관개농업을 행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황토 고원의 서쪽 끝에 해당하는 닝샤 寧夏 회족 자치구의 은천銀川에서는 황하 본류에서 무수한 관개도랑을 끌어와, 진거秦渠와 한거漢渠라고 이름을 붙인 도랑 용수도 있다. 황토 고원 북부의 정변현靖邊縣에서도 황하의 지류인 무정하 상류의 물을 이용한 관개농지가 현재도 행해지고 있는 것을 위성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내몽골 자치구의 포두包頭 부근의 황하 유역에서도 관개가 행해지고 있다. 풍부한 물을 얻을 수 있다면(물론 계속적인 시비는 빼놓을 수 없지만), 농경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대규모 관개의 뒤에는 염해가 발생한다. 이 점에 배려한 농업을 빠뜨릴 수 없다.




관중평원의 농경과 관개


황토 고원의 남단은 진령산맥의 북쪽 기슭에 해당한다. 이 진령산맥의 북쪽에 펼쳐진 위하渭河의 남북 양안에 펼쳐진 하곡평원(강에 침식되어 발생한 골짜기의 평원)이 관중평원關中平原이다. 동쪽의 함곡관, 서쪽의 롱관隴關·대산관大散關, 북쪽의 소관簫關, 남쪽의 무관武關이란 관에 사방을 둘러싸였기 때문에, '관중평원'이라 부른다. 이 평원에는 서주의 주원, 진의 함양, 한의 장안, 그리고 당의 장안이 위치하여 2000년 동안 중국 고대 문명의중심지였다. 그것은 이 땅이 곡창지대였다는 것에 기인한다. 현재의 토양도에서 루토가 양성되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땅에서는 2000년 이상에 거쳐 계속적으로 농경이 행해져 왔다. 소규모 농업생산이라면 천수 농법(빗물에만 의지하는 경작방법)으로도 충분하지만, 고대 문명의 중심인 이 지역에서 생산력의 향상은 빼놓을 수 없으며 자연히 관개가 행해졌다. 그러나 위하는 분지의 저부를 흘러 남북 양안은 단계적으로 넓은 평지가 넓어지는 높은 들이 되어 위하에서 물을 끌어오기 어렵다. 그에 반하여 관중평원을 서북에서 동남으로 흘러 위하로 흘러 들어가는 경하는 관중평원 동부를 관개하는 수원으로 지리적으로 적합했다. 이 경하를 이용한 관개 체계는 '인경관개공정引涇灌漑工程'이라 부르며, 기원전 3세기에 진나라가 정국거鄭國渠를 축조한 이래 2000년 이상을 거친 현재도 경혜거涇惠渠라고 부르는 관개 체계가 기능하고 있다.  




표1 역대의 주요한 경하 관개 공정


         3세기      진나라   정국거

기원전 2-1세기    전한     육보거六輔渠 백거

기원후 4세기       전진     경수 상원을 열다(정·백거의 보수)

         5세기      서위      백거  부평언富平堰

         7세기       당       정백거

     10-12세기     송       삼백거 정백거 풍리거豊利渠

         14세기      원       왕어사거

         15세기      명       광혜거

         16세기      명       통제거

         18세기      청       용동거

         20세기   중화민국   경혜거




그림5 관중평원 관개도(정국거와 백거)  사선 부분은 원생염함지(소금땅)




정국거는 기원전 246년, 진의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기 이전 한의 스파이로서 파견된 수공水工 정국이 진의 국력을 피폐시키기 위하여 거의 건설을 제안한 데에서 시작된다. 건설 중에 정국이 스파이임이 발각되지만, 시황제는 그대로 건설을 속행시켜 완성했다. 경하에서 취수하여 석천하石川河를 지나 낙하洛河에까지 이르는, 약 150킬로미터의 수로였다. 그 관개 효과에 의하여 생산력이 상승하고, 그것을 원동력으로 진은 통일에 이르렀다. 정국거에서 시작되는 경하의 물을 이용하는 관개사업은 표1에 보이듯이, 그 뒤 한대의 백거白渠, 당대의 정백거鄭白渠, 송의 삼백거三白渠와 풍리거豊利渠, 명의 광혜거廣惠渠와 통제거通濟渠, 그리고 청의 용동거龍洞渠로 계속되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건, 북방 유목민이 관중평원을 지배했던 시대여도 그때까지 한족의 토지이용 전통으로하고 있던 관개거의 보수와 개착이 행해졌다는 것이다. 오호십육국 시대·씨족의 전진, 북조·선비족의 서위에서는 백거가 보수되고, 몽골의 원나라에서는 왕어사거王御史渠가 개착되었다. 그러므로 2000년에 걸친 계속적인 농경이 이 땅에서 행해져, 그 결과로 루토가 형성된 것이다.


경하를 이용하는 것에 의해 관개용수가 확보되고, 또 강의 물에 포함된 진흙을 거름으로 이용할 수 있으며, 또 그진흙과 물에 의하여 토양 염분을 흘러가게 할 수 있다. 한대의 백거에 관한 기재에는 '경수 한 섬, 그 진흙은 몇 말. 농지를 적시고 비료를 주어 내가 조와 기장은 많이 기르고, 경사京師(수도권) 억만 인구의 의식을 지원한다(<한서> 구혁지溝志).'라고 한다. 이 진흙이 고이는 일로 정기적인 준설이 필요하지만, 한편으로 그 진흙에는 많은 영양소가 함유되어 그것이 비료가 된다. 경하의 상류는 육반산의 자락에 위치하고, 그 땅은 흑로토층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숲과 초원이 펼쳐진 지역이다. 그 토양 및 목축을 할 때 동물의 똥을 포함한 진흙이 경하를 통하여 관중평원으로 흘러 백거 등의 관개거를 통하고, 그 결과 시비가 행해지게 된다. 


경하를 이용하여 행해졌던 또 하나의 효과가 지표 염분의 제거였다. 정국거에 관한 <사기> 하거서의 기재에는 그도랑물이 '소금땅'을 물로 씻는다고 한다. 염류집적지에는 원래 지하수의 염분이 축적하기 쉬운 움푹 팬 땅의 원생염함지와 대규모 관개를 행한 뒤에 지하수위가 상승해 땅속의 염분이 지표면으로 드러난 재생염함화(재생알칼리화)로 분별할 수 있다. 이 <사기>의 '소금땅'은 정국거에 의한 대규모 관개가 행해지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원래소금땅, 곧 원생염함지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지표에 존재하던 염분을 물과 진흙으로 흘러가게 해, 그땅을 농지화했던 것이다. 그것은 위에서 기술한 진흙에 함유된 영양분과 합쳐져 해당 땅의 농업생산력을 향상시켰다. 다만정국거 이후의 관개 체계에서는 원생염함지의 염분을 흘러가게 하는 기능은 없었다. 한의 무제 시기에 축조된 백거 이후, 그 관개 대상구역은 경하-석천하 사이, 곧 정국거의 관개구역 가운데 서부에 한정되었다. 석천하-낙하 사이의 움푹 팬 땅에서는 현재도 염류집적이 심하고, 일부에서는 제염공장이 되어 있는 곳도 있다. 즉, 백거 이후의 관개거는 정국거의 관개 대상구역 가운데 염류집적이 심한 동부는 방기하고, 비교적 관개의 효과를 높이기 쉬운 서부만을 그 대상으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관개를 계속하는 이상, 경하-석천하 사이에서도 재생염함화가 일어날 수 있다. 재생염함화를 막기 위해서는 지하수위를 7미터 이하로 유지해야 하며, 그를 위해서는 배수 도랑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 성립보다 전에는 배구 도랑을 만든다는 대처법이 취해지지 않고, 도랑을 서서히 남쪽으로 비키어 가는 것으로 염류의 집적을 어떻게든 막고 있었다. 또한 도랑의 최상위는 물의 흐름에 의하여 깎일 수 있기 때문에, 서서히 상류로 이동시켜야 했다. 그래서 경하의 물을 끌어온다는 기본적인 물을 끌어오는 방법은 불변하더라도, 왕조마다 새로운 관개시설을 건설해야 했다.


그래서, 관개거에 의하여 농사지었던 곡물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한대는 조를 주로 한 양식이 주류였다. 보리 가루를 가공한 가루식이 보급된 건 3세기의 위진 시기 이후의 일로, 8세기의 당대가 되면 겨울밀은 조를 대신해 주식이 되었다. 그 원인의 하나로는 당대의 온난화가 있다. 당대에는 정백거가 건설되어, 수로의 주변에 연애碾磑라고 부르는 맷돌 방앗간이 건설되어 제분이 행해졌다. 이 밀의 생산이 당나라의 수도 장안의 사람들에게 먹을거리를 지원하고,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화북 지역에서 많이 먹고 있는 만두나 찐방을 보급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며


이상과 같이, 황토 고원 북부에서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서 농업과 목축이 뒤섞였던 여러 토지이용이 행해졌다. 그에 대하여 관중평원에서는 2000년 동안에 걸쳐서 경하를 이용한 도랑물에 의한 관개농경이 계속 행해졌다. 이와 같은 토지이용의 역사적 차이가 황면토와 루토라는 토양의 차이로 나타났던 것이다. 황토 고원의 농경과 환경의 역사는 현재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자연환경과 이어져 있는 것이다.


현재, 사막화가 진전되는 산북 지역과 내몽골에서는 방목 금지 정책과 '농사를 그만두고 숲으로 되돌리는' 정책, 생태이민(농경민과 목축민의 도시로의 집단이주) 정책 등이 권장되고 있다. 실제 그와 같은 정책에 의하여 사막화의 진전은 억제되고 있다고 보고되며, 또한 인간이 들어가지 않고 개발을 방기하면 아주 간단히 자연이 회복했다는 사례도 있다. 한편, 루토의 형성 과정을 고려하면 황토를 재료로 하고 있는 점에서는 황면토도 공통되어 있기 때문에 장기간에 걸친 적당한 정도의 유기시비를 행하는 일로 황면토의 루토화를 기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만 수자원의 확보라는 점을 해결해야 하겠지만.


지금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농경=환경파괴와 목축(방목)=환경파괴라는 고정적인 구도가 아니라 새로운 견해가 필요한 시기에 와 있다는 점이다. 정책이 아니라, 그때까지의 현지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그에 기반을 하여 새로운 사회의 형성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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