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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3





기고2

인더스 문명 지역의 농경사     -우에스기 아키노리上杉彰紀






인더스 문명 개관


인더스 문명이란 기원전 2600-기원전 1800년 무렵에 걸쳐서  인도 아대륙 북서부에 넓게 전개한 문명사회이다.모헨조다로 유적과 하라파 유적이 대표적인 도시 유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외에도 크고 작은 여러 유적이 발견, 발굴되어 인더스 문명사회는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광대한 지역에 펼쳐져 있으며, 그리고 필연적으로 사회, 문화적으로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었단 점이 계속 밝혀지고 있다. 


세계 4대 문명의 하나라고 가르치는 인더스 문명은 다른 문명과 마찬가지로 도시와 문자를 가지고 있다. 도시의 존재는 인더스 문명사회가 도시를 거점으로 사회, 문화적으로 통합된 사회인 것을 보여주고, 문자의 존재는 공통의 의사소통 체계의 존재를 시사하고 있다. 이외에도 문명사회 각지에 편재하는 자원을 이용, 가공하여 광범위한 유통을 가능하게 하는 문명권 내의 네트워크가 고도로 발달해 있었다는 점도 알고 있다.


게다가 인더스 문명도 포함한 기원전 3000년대의 서남아시아 문명 세계를 생각할 때 중요한 것이 인더스 문명과서방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또는 이란 문명과의 교류관계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 문서에는 인더스 문명을 가리킨다고 추정되는 멜루하Meluhha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또한 메소포타미아의 유적에서도 인더스 문명 특유의 인장이 출토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란 고원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도 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인더스 지역의 각지에 문명 시기 이전부터 저마다 자연환경에 적응한 사회, 문화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 지역사회, 문화가 네트워크에 의하여 연결되어 있었다. 문명 시기 이전의 지역사회, 문화군은 농경, 목축을 생업기반으로 하며, 인더스 문명 시기로 계승되는 기술전통을 키워 왔다. 


인더스 지역 내부에서 축적되어 있던 생활기술의 전통과 네트워크에 의하여 유입해 온 새로운 정보, 기술이 혼재했던 것이 인더스 문명사회이다. 따라서 인더스 문명사회를 이해하고자 할 때, 시간축과 공간축을 서로 횡단시켜야 한다. 이것은 인더스 지역의 농경사를 고려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다양한 자연환경


앞에서 기술했듯이, 인더스 문명은 광대한 지역이 교류 네트워크에 의하여 연결됨으로써 성립했는데, 그곳에는 다양한 자연환경이 포섭되어 있다. 


인더스강 유역은 사방으로 뻗어 가는 건조지대의 동쪽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은 거꾸로 말하면 동쪽에서 뻗어 오는 습윤지대의 서쪽 가장자리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인도의 수도 델리 부근을 1000mm 안팎의 연간강수량의 경계로 하여, 서쪽으로 갈수록 강수량은 감소해 간다. 그것은 당연히 식생의 차이로도 나타나 동쪽은 녹색이 풍부한 숲이 펼쳐지고, 서쪽으로 향하면 모래언덕을 포함한 떨기나무가 군데군데 있는 경관이 일반적이 된다.



그림1 인더스 문명 시기의 대표적인 유적과 강수량의 분포




또 하나 주목되는 건, 다양한 지형 환경의 존재이다. 문명사회를 말할 때 높은 농업생산력을 수용하는 충적평야, 곧 큰강의 존재를 강조하는 것이 통설인데, 실제로는 충적평야의 주변에 펼쳐진 고원지대와 산간지대도 문명사회의 안에 짜 넣어 있다.


충적평야와 고원, 산간지대의 관계는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란 점에서 상호보완적이며, 어느 것 하나를 빠뜨리면문명사회는 성립할 수 없다. 인더스 문명사회란 그러한 다양한 자원을 수용하는 여러 가지 자연, 지형 환경에 의하여 성립한 것이다.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또는 라키가리Rakhigarhi 같은 인더스 문명을 대표하는 도시 유적은 모두 평원부에 위치하고있기에 평원부가 문명사회의 중심적 열할을 수행했다는 것은 확실하겠지만, 크고 작은 여러 읍과 마을을 연결하여 펼쳐지는 네트워크 없이는 도시가 존재할 수 없다는 걸 고려하면, 일률적으로 평원부의 중요성만을 강조해 보아도 문명사회의 구조를 잘못 보게 될 것이다.


강수량, 지형의 다양성은 당연히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자연환경이 생활양식의 짜임새를 형성하며, 다양한 자연환경은 생활양식, 즉 문화의 다양성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현재의 남아시아 세계에서 보면, 사람들의 생활양식에서 중요한 건 동과 서 사이에 나타나는 주식의 차이이다. 델리보다도 서쪽의 건조도가 강해지는 지역에서는 필연적으로 밀이 주력 작물이며 주식으로 삼는다. 거꾸로 동쪽의 강수량이 많은 지역에서는 쌀에 대한 의존률이 높아진다.


현지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델리의 서쪽에 펼쳐진 하리아나주에서는 쌀보다도 밀로 만든 로티라고 부르는 빵 모양의 먹을거리 쪽을 좋아한다고 한다. 한편, 동쪽의 우타르 프라데시주에서는 로티도 먹지만 쌀을 먹지 않으면 식사를 하지 않은 것 같다고 한다. 우리 일본인과 공통되어서 흥미로운 말이다.


그림2 밀로 만든 로티




또한 주거 건축에서 보면, 목재 자원이 부족한 평원부에서는 벽돌을 쌓는 건축이, 목재와 점토가 부족한 고원부에서는 돌을 쌓는 건축이, 또 산간부의 목재 자원이 풍부한 곳에서는 목조 건축을 한다.


이와 같은 자연환경의 차이에 의하여 형성된 생활양식, 문화의 차이를 들자면 셀 수 없지만, 남아시아 세계가 얼마나 자연환경 및 문화란 점에서 다양성으로 채색되어 있는지, 그것은 남아시아의 역사를 고려할 때 중요한 관점이다.




남아시아의 재배식물


앞에 델리를 경계로 하여 서쪽은 밀을, 동쪽은 쌀을 먹는 비중이 높아진다는 걸 기술했다. 현대의 남아시아에서는 이 두 작물이 주식이 되고 있지만, 이외에도 다양한 식용 식물이 재배되어 온 역사가 있다. 특히 콩류와 조(잡곡)은 밀과 쌀을 보완하거나, 또는 그들을 대신해 주식이 되어 왔다.


남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여름과 겨울의 두 계절에 다른 식용 식물이 재배되고 있다. 여름작물을 카리후라 하고, 쌀과 조가 포함된다. 이들은 7-8월을 중심으로 하는 계절풍이 불러오는 강우를 이용하여 재배된다. 한편, 겨울의 건기에는 밀, 보리, 각종 콩류가 재배된다. 이들 겨울작물을 라비라고 부른다. 라비의 생육은 겨울의 한정된강우에 의존한다. 이 여름과 겨울의 이모작이 남아시아의 농경을 특징짓는다고 말해도 좋다. 



그림3 우타르 프라데시주의 모내기 풍경




농촌 지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은 이들 곡물의 경작을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절의 변화가 논의 쟁기질, 파종과 모내기, 수확과 연동되고, 계절의 변화에 대응하여 여러 제례가 생활 속에 반영되어 있다. 또한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계절이 바뀌는 때는 중요하여, 도시와 농촌의 차이에 상관없이 공통된 제례가 발달해있다. 정말로 계절의 변화가 남아시아 문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데 이들 재배식물의 배경에는 여러 가지 역사가 숨어 있다. 서아시아 방면에서 남아시아로 이입된 것, 아프리카 방면에서 전파된 것, 남아시아 북동부의 동쪽에서 퍼진 것, 또한 남아시아 각지에 원생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역사적 경위의 바탕에서 재배식물의 이동과 치환이 축적되어 오늘날의 남아시아 농경의 전통과 문화적 경관을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인더스 지역에서 농경의 역사적 전개


이 절에서는 위와 같은 남아시아의 환경과 역사의 특성을 근거로 하여, 인더스 문명이 전개된 지역에서 농경의 역사적 전개에 대하여 개관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연구의 현상은 인더스 지역의 농경사를 복원하기에는 아직 먼 상황이다. 남아시아에서도 1940년대부터 유적에서 출토된 탄화 식물의 동정이 행해지고 있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종과 속의 동정에 그쳐, 각각의 식물이 유적 안에서 어떻게 이용되며 지역의 경관을 형성했는지 평가하는 데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식물고고학은 단순히 출토 식물 유존체의 동정만이 아니라, 유적 또는 지역이란 공간 안에서 어떤 식물이 분포했는지, 그것이 인류에 의하여 어떻게 이용되었는지, 정성적이고 정량적으로 분석하는 학문 분야이다. 유적에서는 다양한 현태로 식물 유존체가 채집되는데, 그 출토 상황은 저장용 토기와 조리에 사용된 화로 흔적 또는 폐기된 시설 같은 사람들의 여러 생활행위와 관계되어 있다. 당연히 그 상황에 따라서 출토되는 식물 유존체의 종류와 조합, 유존의 정도 및 상태는 달라진다. 그러한 특정 상황에서 얻은 유존체의 분석 자료를 겹겹이 쌓고, 생활 공간(유적과 지역) 안에서 출토되는 다른 생활 흔적과 관련짓는 것으로 식물 이용 또는 식량 소비의 동태를 복원하는 것이 식물고고학의 최대 목적이다.


몇 곳의 유적에서는 식물 유존체의 상세한 분석 결과가 축적되어 있으며, 국지적으로 식물 이용의 역사적 전개를추측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인더스 지역 전체에서 이루어진 식물 이용의 동향을 복원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이와 같은 전제를 근거로 하면서 인더스 지역의 농경사를 개관하고, 앞으로 기대되는 연구의 방향성에 대하여 언뜻 살펴보겠다.





(1) 서아시아에서 이입된 재배 식물

인더스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농경에 의한 식물 이용의 증거가 발견되는 건 파키스탄 서부에 펼쳐진 발루치스탄 고원이다. 특히 그 동쪽 가장자리 부분, 곧 고원부에서 인더스강이 형성하는 충적평야로 변천하는 곳에 위치하는메르가Mehrgarh 유적이 중요하다.


이 유적에서는 기원전 6500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문화층에서 보리, 밀이 발견되고 있다. 그와 함께 염소, 양을 주체로 하는 가축 동물을 수반하여, 서아시아 형의 농경과 목축이 경영되었던 걸 말해주고 있다. 


이들 맥류는 콩류와 조합되어 겨울의 강우를 바탕으로 재배된다. 발로치스탄 고원에서 인더스 평원에 걸쳐 있는 지역은 건조지대에 해당하지만, 겨울에 비교적 한번에 내리는 강우가 있어 그것이 라비, 즉 겨울작물의 재배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겨울작물은 대략 4000년을 지난 인더스 문명의 시대에도 발로치스탄 고원부터 인더스 평원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을 지탱했다. 하라파 유적에서는 기원전 3500년 무렵의 거주 개시 이후, 기원전 2000년 무렵까지밀과 보리를 주체로 하는 식물 유존체가 발견되고 있다. 현재도 파키스탄 서쪽의 건조지역에서는 밀을 주로 하는곡물의 재배, 이용이 눈에 띄는데, 그것은 이 지역의 기후환경 안에서 역사적으로 계승되어 온 식량 생산의 기술 전통인 것이다.




(2) 여름작물의 확산

그 한쪽에서, 하라파 유적에서는 카리후, 즉 여름작물도 확인되고 있다. 쌀과 조가 그것이다. 그들은 수량적으로는 결코 많지 않고, 맥류 주체의 식량을 매우 일부 보완하는 정도이다. 그러나 겨울작물만이 아니라 여름작물도 재배, 이용하고 있었단 것은 다양한 작물을 다각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식량 공급을 안정시키려고 고안했다고 생각한다(Weber 1999, 2003). 거대한 인구를 수용하는 도시를 지탱하기 위하여 식량 생산의 다각화가 행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름작물의 생육은 그 이름이 보여주는 대로, 여름의 남서 계절풍이 불러오는 집중적인 강우에 의거하고 있다. 풍부한 물이 필요하여, 건조지역에서는 국지적으로 풍부한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을 제외하고는 재배가 곤란하다.앞에 기술했듯이 델리부터 동쪽으로 이동하면 강수량이 증가하는데, 이 지역이 쌀을 먹는 걸 지향하는 지역인 것은 그러한 기후조건이 배경이 되고 있다.


남아시아의 쌀의 기원에 대해서는 동아시아만큼 활발하게 의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남아시아 북동부의 아삼 지방이 벼농사의 기원 후보지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했지만, 남아시아의 쌀 기원과 전개를 검토할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가 부족함 점이 그 이유이다.


그런데 최근 인도 북부에 펼쳐진 우타르 프라데시주의 중앙부에 위치하는 라후라데와 유적에서 기원전 6500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을 가진 쌀의 유존체가 발견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Tewari 외. 2003). 최종보고서는 현재 준비단계라고 들었는데, 출토된 쌀이 재배종인지 야생종인지 하는 판단을 차치하고라도, 인더스 지역 동쪽의 강가 평원에서 있었던 식물 이용의 역사가 새로이 칠해진다는 건 확실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강가 평원에서 기원전 6500년 무렵에는 벌써 벼농사의 역사가 전개되고 있었다고 한다면 인더스 문명 시기의 식물 이용의 이해에도 큰 변경이 뒤따르게 될 것이다.


무릇 인더스 지역에서는 지금까지 인더스 문명의 종말에 가까운 무렵, 즉 기원전 2000년 무렵의 유적에서 쌀이 발견된다고 보고되고 있었다. 발로치스탄 고원 동쪽 가장자리 부근의 유적에서도 보고 사례가 있기 때문에, 막연히 동쪽에서 쌀이 반입 또는 벼농사가 이입되었다고 추정되었지만, 강가 평원에서 행하던 벼농사의 역사가 밝혀진다면 인더스 문명 사회와 강가 평원의 관계라는 새로운 연구 주제가 떠오르게 된다.


인더스 지역 북동부, 가가르Ghaggar 평원에 위치하는 쿠날Kunal 유적에서는 인더스 문명 직전의 시기부터 쌀의 유존체가 보고되고 있다(Saraswat and Pokharia 2003). 이 동정에 의문을 나타내는 연구자도 있지만, 강가 평원에 인접한 가가르 평원에서 다른 지역보다도 일찍부터 쌀이 이용되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앞으로 조사에 의하여 인더스 문명 동쪽 가장자리 또는 동쪽의 자료가 축적된다면, 문명기에 있었던 식량 이용의 다양성과 재배 식물의 전파에 대한 짜임새가 밝혀지게 될 것이다.




(3) 조의 도입


쌀에 아울러 중요한 여름작물이 조이다. 조는 전반적으로 건조함에 강하고, 맥류와 쌀에 비하여 적은 물로 생육할 수 있다. 인더스 지역에서는 향모, 수수, 진주조 등이 대표적인 조로서 확인되고 있는데, 서인도의 사우라슈트라Saurashtra 반도 중앙부에 위치한 로지디 유적에서는 출토된 식물 유존체의 대부분을 조가 점하고 있었다(Weber1991, 1999). 이것은 조가 단순히 맥류와 쌀의 보완작물로서만이 아니라 주력 작물로서 재배된 지역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가가르 평원에서는 지금은 무수한 관개수로에 의하여 히말라야 산맥에서 기원하는 풍부한 물이 널리 퍼져 관대한맥류의 밭이 전개되어 있지만, 현지의 사람들 이야기에 따르면 50년 전만 해도 진주조가 주요한 작물임과 함께 식량이었다고 한다. 로지디 유적의 출토 자료와 함께, 인더스 문명의 시대에도 조가 주식이었던 지역이 적지 않게 존재하고 있었단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림4 진주조로 만든 로티




조에 관련되어 하나 더 주목되는 건 진주조, 수수, 향모 같은 품종은 남아시아에서 야생종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수의 재배화 기원은 아프리카 대륙 동부에서 찾고 있으며(Zohary and Hopf 2000), 인더스 문명 시기에 수수의 존재는 문명기에 아프리카 대륙에서 이입된 것일 가능성을 강하게 보여준다. 사실, 인더스 문명 시기에는 아라비아 반도와 교류했음이 다른 고고자료에 의하여 밝혀져 있어, 수수가 아프리카 동부에서 아라비아 반도를 경유하여 남아시아에 가져왔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명사회의 교류 네트워크와 재배 식물


인더스 문명이 만개한 기원전 3000년대는 이집트부터 인더스까지, 중앙아시아부터 아라비아 반도까지를 포함한넓은 의미에서 서남아시아 세계의 각지에 문명사회가 탄생한 시대이다. 세계 4대문명 가운데 3곳이 서남아시아 세계에 포함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서남아시아 각지가 사람의 이동과 접촉을 수반한 교류 네트워크에 의하여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임이 틀림없다. 


앞에 기술했듯이 발로치스탄 고원 동쪽 가장자리의 메르가르 유적에서는 기원전 6500년 무렵에 서아시아 식의 농경이 존재했음이 확인되고 있는데,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교류 네트워크가 존재했음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맹아 상태였을지도 모르지만, 그뒤 역사적 전개를 펴서 읽으면 서남아시아 각지를 연결하는 교류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그를 통해 문명사회가 탄생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여러 정보와 각지에 편재하는 희소 자원이 교류 네크워크에 실려 왕래하고 있었는데, 재배 식물도 또 그러한 네트워크를 통해 이동해 온 것이다. 인더스 지역은 서아시아의 맥류 농사, 강가 평원 동쪽의 벼농사, 아프리카 대륙의 조 재배가 교차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들이 조합되어 농경의 체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인더스 지역 전체에서 등질적인 농경 체계가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서두에서 기술했듯이, 다양한 자연환경에 의하여 채색된 남아시아에서는 특정의 식량 자원만으로는 인류의 생활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의 한정된 지역 안에서도 미시적 지형과 기후 환경에 따라서 식량 자원은 다양화되며, 거시적으로 인더스 지역 전체를 파악하더라도 등질성, 균질성보다 오히려 다양성, 혼재성이 인더스 지역의 특질로 부각될 것이다.


이 다양성은 인더스 문명사회만이 아니라 남아시아 역사의 토대가 되고 있다. 다양한 사회, 문화가 그때그때의 역사적 배경에 의하여 하나의 사회 체계에 통합되어, 새로운 지역의 역사를 만들어내며 나아간다. 그들이 시간축에 퇴적하여 중층화된 결과, 남아시아의 역사로서 우리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남아시아의 역사를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전체를 내다보면, 때로는 얼핏 관계없어 보이는 것이 혼재되어 번잡하고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지만, 대체적 판국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무수한 역사적 사상이 시간축과 공간축 위에서 서로 뒤얽히면서 전체가 구성되어 있는 것을 깨닫는다.


인더스 문명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선사시대 이래 다양한 자연환경 안에서 축적되어 왔던 사회의 짜임새와 문화의전통이 기원전 3000년대의 서남아시아 세계를 배경으로 하나의 문명사회 체계로서 통합된 결과, 우리가 인더스 문명이라 부르는 역사적 산물이 태어났던 것이다.


인더스 지역의 농경사도 또한 그러한 중층화된 지역의 역사성과 문화전통에 의하여 연결되어 있다. 인더스 지역에서 주력 작물로서 사람들의 생활을 지탱한 맥류, 동쪽 지역에서 가져온 쌀, 멀리 아프리카 대륙에서 일부러 들여온 품종을 포함한 조. 본래 그 재배화의 기원은 인더스 지역에 없었지만 그들을 지역의 농경 체계 안에 짜 넣어 남아시아의 농경 전통이 형성되었단 것은 올바르게 평가되어야 한다.


도대체 국경이 없던 시대에 사람들의 이동을 방해한 장벽은 현대사회 같은 모양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각 시대의역사적 배경과 그 중층성의 바탕에 형성된 문화 전통이 여러 요소로 구성한 역사성은 남아시아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라 해도 결과는 다르더라도 그 과정은 근본 부분에서 서로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농경의 역사는 단적으로 말해서 인류의 역사이다. 인더스 지역의 농경사를 묘사하려면 앞으로 한층 더 연구가 추진되어야 하지만, 그 연구를 통해서 인더스 지역이 가진 자연과 인류 사회·문화의 다양성이 창출하는 역사의 역동성을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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