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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3




기고1

메소포타미아의 종교와 농경    -와타나베 치카코 渡千香子





우르크의 항아리


2003년 이라크 전쟁이 발발한 직후에 발생한 바그다드 박물관 약탈로 '우르크(와르카)의 항아리'(그림1)라고 부르는 익숙했던 작품이 사라졌다. 이 단지는 기원전 4000년대 후반에 설화석고로 만들어진 단지로서,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예술작품이라 간주된다. 바그다드 박물관에서는 몇 개의 파편으로 발굴된 것을 정성껏 수복하여 전시 상자 안에 가느다란 실을 펴서 지탱하게 하여 전시했다. 파손을 우려하여 굳이 소개하지 않고 전시관에 그냥 놔둔 것이었다. 그러나 부시 정권의 미군에 의한 바그다드 침공의 혼란 속에서 폭도들이 박물관을 습격하고, 유리상자는 파괴되어 안에 있던 항아리를 가지고 도망가 버렸다. 이후 사라진 이라크의 문화유산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으로 다루어져, 이라크 안팎에서 약탈된 문화재의 반환을 큰소리로 호소했다. 잠시 뒤, 항아리는 산산조각난 상태로 박물관에 반환되었다. 원래 부분적으로 결손되어 파손되기 쉬운 상태였던 항아리가 약탈의 혼란으로 뒤섞인 데다가, 돌아온 파편도 단편적일 수밖에 없었다. 파손에 의하여 영원히 사라져 버린 부분도 많다고 생각하는데, 현재 이탈리아가 협력하여 그 수복이 진행되고 있다.


그림1 우르크의 항아리. 기원전 4000년대 후반 우르크 출토. 설화석고로 만든 높이 92cm. 이라크 박물관 수장(Strommenger 1964: plate 19에서 찍음)




'우르크의 단지'는 초기 메소포타미아의 농업과 종교를 고려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높이 약 1미터의 항아리는 입구 가장자리 부분부터 몸통 중앙부에 걸쳐서 약간 잘록하게 굽어 있고, 하반부의 몸통 부분은 폭이 좁아지는 원통형을 보이며, 그 아래에 원뿔대의 바닥 부분을 지닌다. 고대 그리스의 원기둥에 사용된 배흘림의 부풂과 정확히 반대방향으로 굽어서, 이 약간의 잘록함이 항아리 전체에 섬세하고 빼어난 아름다움을 부여한다. 정교하고 치밀한 돋을새김이 장식된 길쭉한 몸통과 그것을 지탱하는 바닥 부분의 대가 이루는 구성은 절묘하며, 그시대 권력자가 특별한 기회에 이용한 용기로서 당시의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든 작품이라 생각한다.


돋을새김은 크게 위아래 3단으로 나뉘고, 가장 위에는 수확물인 공물을 받는 여신(또는 여신의 대리를 종사하는 여사제)가 묘사되고, 그 앞에는 여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나체의 종자가 있다. 이 종자의 뒤쪽에 봉납주인 왕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되는데, 안타깝게도 이 부분은 발굴할 때부터 결손되어 있다. 왕의 뒤쪽에는 주인의 의장 일부로 보이는 큰 술 장식을 손에 든 시종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공물을 받아든 여성이 우르크의 주신 이난나 여신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면, 메소포타미아에서 신을 도상으로 표현한 가장 오래된 작품이 된다. 여신의뒤쪽에는 이난나 여신의 상징이라 하는 '기드림'이 2개 서 있고, 그 배후에는 암컷 염소의 위에 설치된 대좌에 '기드림'과 여신관 2명이 묘사되어 있다. 그에 이어서 봉납된 공물이 늘어서 표현되어 있다. 


돋을새김의 중간 단에는 나체의 남성들이 공물이 든 바구니를 받쳐 들고서 행진하는 모습이 표현된다. 가장 아랫단은 다시 상하 두 층으로 나뉘어 윗단에는 2종류의 가축의 행렬이 묘사되고, 아랫단에는 2종류의 식물이 엇갈리게 심어져 있으며, 가장 아랫단에는 2개의 물결선으로 물이 흐르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가축의 행렬에 묘사된동물의 한쪽은 정수리 부분에서 좌우로 자라는 큰 뿔(아래쪽으로 굽음)과 긴 턱수염을 가지며, 수컷 염소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수컷 양일 가능성도 있다. 다른쪽은 둥그스름한 느낌을 띠는 체형으로 뿔도 턱수염도 수반하지 않는다. 이쪽은 아마 양(암컷 양)을 묘사한 듯하다. 염소와 양은 아카드어 문헌에서도 항상 '작은 동물들'이라 통합하여 표현되며, 이들 2종류의 동물은 가축으로 함께 사육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랫단에 묘사된 식물의 한쪽은 수직으로 자라는 줄기에서 좌우로 잎이 펼쳐지고, 줄기의 맨끝에는 이삭이 형성되어 그곳에서 위쪽으로 자라는 5-6개의 까락을 묘사한다. 도상으로서 상당히 추상화되어 있지만, 이 식물은 맥류를 묘사한 것이라 해석된다. 다른 한쪽의 식물은 수직으로 자란 줄기가 꼭대기 부분에서 셋으로 나뉘고, 포크 같은 형상을 나타낸다. 줄기와 가지의 각각 세 개씩을 다발처럼 표현하고, 바깥쪽 부분은 촘촘한 잎 같은 것을 표현한 것처럼도 보인다. 오랫동안 이 식물이 무엇을 묘사한 것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크로포드는 이것을 아마亞麻를 양식화한 것이라고 해석했다(Crawford 1985).


이들 가축과 식물은 수메르의 대표적인 산업을 보여주는 것이다. 양털로 만드는 모직물은 수메르의 대표적인 교역품이고, 양과 염소는 일상의 유제품과 식용 고기의 공급원이었다. 맥류의 품종 중에서는 보리의 생산이 어느 시대에나 압도적으로 많았던 점이 문헌과 고고조사에서 밝혀지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주식인 빵과 맥주의 제조에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던 것만이 아니라, 가축의 사료로도 사용되었다. 아마에 대해서는 줄기를 길게 강조해 묘사하고 있는 바로부터, 아마유가 아니라 줄기에서 얻는 섬유를 이용할 목적으로 재배했다고 생각한다. 여름의 기온이 50도 가까이 오른다는 이라크 남부에서는 린넨 의복은 필수품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우르크의 항아리'는 수메르인들의 일상에 빠질 수 없는 대표적인 농업생산물과 목축을 밝히면서, 농경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사명이며 그 수확은 일차적으로 신에게 바쳐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단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인간은 신들을 대신하여 농경과 운하의 유지 등의 중노동을 담당하기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이야기하는 세계관에 연결되어 있다.



맥류와 소의 모티브


'우르크의 항아리'와 비슷한 무렵, 정확히 도시문화가 형성되어 가고 있던 시기의 메소포타미아에서 '농경'을 강하게 의식한 도상 모티브가 등장한다. 이라크 남부의 유적 우르에서 출토된 동석(Steatite)으로 만든 주발에는 '소'와 '맥류의 이삭'이란 모트브가 반복하여 돋을새김으로 표현된다(그림2). 소의 몸통은 측면에서 보는 모습으로 파악되고, 머리 부분은 거의 정면에서 보는 것에 가깝게 묘사되어 있다. 소의 머리 뒤쪽부터 등에 걸쳐서 거대한 맥류의 이삭이 크게 휘듯이 묘사되어 있다. 이삭은 4줄로 나뉘어 있고, 그 각각에 5-6개의 알곡이 묘사되며, 그 끝에는 각각 2개씩 합께 8개의 긴 까락이 자라 있다. 이 이삭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라 가정하여 도상에는 보이지 않는 이면에 또 2줄의 알곡이 있다고 상정한다면, 이것은 6줄 맥류를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의 도상 표현에서는 사물을 반드시 보이는 대로 묘사하지는 않기 때문에, 알곡이 모두 4줄이라고 이해한 묘사일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소'와 '맥류의 이삭' 같은 모티브는 기원전 4000년대 후반의비슷한 무렵에 제작된 원통 인장의 무늬에도 등장한다(그림3). 측면에서 본 것으로 묘사된 소의 발굽 앞쪽에서 맥류의 줄기가 길게 자라고, 그 이삭은 높게 소의 등 상부까지 자라 있다. 알곡은 합계 7개, 엇갈리게 2줄로 배열하고 각각의 알곡에서 까락이 자라 있다. 어느 쪽의 도상에서도 소의 크기에 비하여 맥류가 현실보다 꽤 크게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 도상에 표현된 맥류의 존재가 소에 뒤떨어지지 않고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일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농업에서는 거세된 수소 외에 당나귀도 농작업에 부려서, 그들은 밭을 쟁기질이나 써레질하거나, 또 파종할 때에 활약했다(Heimpel 1995).


그림2 동석으로 만든 주발(소와 맥류의 모티브). 기원전 4000년대 후반. 우르 출토. 동석으로 만든 높이 5.5cm. 이라크 박물관 수장(Strommenger 1964: plate 28에서 찍음)



그림3 원통 인장의 인발(소와 맥류의 모티브). 기원전 4000년대 후반. 출토지 불명. 돌로 만든 높이 3.8cm. 루브르 미술관 수장(Strommernger 1964: plate 16, 셋째 줄 오른쪽에서 찍음)




문헌에 언급된 곡물


고대의 경제생활과 물질문화의 기본적 '사전'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어휘집 HAR-ra=hubullu의 곡물 부문은 콩류(gu)에 이어서 엠머밀, 밀, 보리로 분류되어 있다. HAR-ra=hubullu는 종의 목록은 아니지만, 재배되고 있던 대부분의 종을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SE는 보통 보리를 의미하지만, 더욱 일반적인 '곡류(grain)'나 영어의 corn(곡물)의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수메르의 초기 왕조시대 이후 메소포타미아의 문헌에 언급된 주요한 곡물은 보리(se), 엠머밀(ziz), 밀(GIG) 세 종류이다. 그중에서도 보리가 언급된 빈도가 압도적으로 많고, 이어서 엠머밀, 가장 적은 것이 밀이다. 이 빈도는매우 초기의 파라(고대 이름 슈르팍Shuruppak)이나 아브 짜라비크アブ・ツァラビク에서 출토된 문서의 시기(대략 기원전 3000년대 중반 무렵)부터 변하지 않는다. 보리, 엠머밀, 밀은 가을의 거의 비슷한 무렵에 심는다. 그외에 비주류인 곡물 5종류가 언급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특정되지 않는다. 기원전 3000년대에는 1종 내지 그 이상의 잡곡이 재배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이것도 종을 특정하지는 않는다. 문헌에서 보는 한, 보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으뜸인' 곡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Powell 1984). 


보리(se/SE.BAR/uttetu)는 어느 시대에나 가장 많이 언급되는 곡물로서, 나머지 일반적인 곡물보다도 가격이 싸고, 가축의 먹이로도 사용되었다. 내염성이 뛰어난 것만이 아니라 건조함에도 강하기에, 이라크 남부의 기후 조건에 적응한 작물이었다는 건 의심할 수 없다.


엠머밀은 '가공되어 있지 않은'(탈곡하여 세정된 잔이삭) 상태로 있다면 보리와 거의 비슷한 정도의 가격으로, 그것은 밀 가격의 약 반값이었다. 엠머밀이 가축의 먹이로 사용되었단 증거는 없다. '기본적인 가공을 행한 상태'의 엠머밀(ziz-an)은 낟알이 왕겨에서 분리된 속껍질이 있는 엠머밀로서 맥주의 양조에 사용되는 외에, 다른 식용 목적으로 쓰였다. 그로츠라고 부르는 맷돌질(mun-du)을 한 엠머밀은 초기 왕조시대에 신들의 아침밥으로 봉납되었다. 그로츠란 가루와 낟알 사이의 단계로서, 알곡이 바수어지고, 찧어 바수고, 맷돌질한 상태가 된 것을 가리킨다(Postgate 1984b). 우르 제3왕조 시대와 옛 바빌로니아 시대의 봉납물인 그로츠에도 아마 속껍질이 있는 엠머밀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엠머밀은 '달달한 맥주'에도, 또 달지 않은 맥주에도 사용되었다. 달달한 맥주는 대추야자의 열매에 의하여 단맛이 더해졌다. 가공된 상태의 엠머밀은 bututtu라고 부르며, 정확히 독일어로 Grünkern이라 부르고 있는 스펠트밀의 푸른 낟알에 상당한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엠머밀을 분쇄하여 가공한 bututtu를 스프로 먹었다.


엠머은 밝은 흰색부터 짙은색을 나타내는 것까지 있는데, 메소포타미아의 엠머밀은 색에 따라 3종류로 나뉘었다.'흰 엠머(ziz babbar)'와 '구니다 엠머(ziz gu-nida)'은 매우 일반적인 종이고, 맷돌로 갈아도 거의 똑같으며, 모두 똑같은 시기에 똑같은 밭에 심을 수 있었다. 둘은 파라 문서에서도 가까운 관계이며, 구니다 엠머는 '자연탈곡 엠머'라고 오역되는 일이 있다. 한편 '적갈색 엠머'는 매우 드물게 언급된다.


통상 '밀'이라 번역되는 곡물은 탈곡을 필요로 하지 않는 유형의 밀을 의미한다고 생각되는데, 언급되는 빈도는 주요한 세 가지의 곡물 가운데 가장 적다. 파라 문서의 시기까지 기록된 문헌에서 보리는 60회 이상, 엠머밀이 15회 언급되는 데 반하여, 밀은 2회밖에 언급되지 않는다. 밀은 수메르어부터 신바빌로니아 시대에 이르기까지 GIG로 표기된다. 그러나 GIG/Kibtu의 언급은 모든 시대에서 몹시 적고, 종의 특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식물 유존체에서 본 곡물


메소포타미아에서 재배되었던 곡물을 고고조사에서 확인된 식물 유존체에서 더듬어 가는 연구가 렌프루에 의하여 정리되어 있다(J. M. Renfrew 1984). 다루고 있는 시대는 기원전 6000-기원전 2000년으로 폭넓고, 그 대부분은 195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에 걸쳐서 출판된 헬백H. Helbaek의 일립밀은 그 잔존 사례의 적음으로부터 말하더라도, 메소포타미아에서 별로 성공한 곡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마 이라크 남부의 충적평원과 관개를 통한 재배에 별로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마라 시기(기원전 7000년대 말-기원전 6000년대 전반), 우바이드 시기(기원전 6000-기원전 5000년대) 등 초기의 유적(자르모, 초가 마미)에서는 야생의 일립밀(Triticum boeoticum)이 발견되고 있다. 재배종인 일립밀(Triticum monococcum L.)은 자르모, 움 다바기야,텔 에스 소완, 초가 마미, 젬데트 나스르, 텔 하르말 등의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엠머밀(Triticum diccocum)은 고대 이라크의 유적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밀이다. 자르모에서는 재배종 엠머밀이 야생종 엠머밀의 잔이삭이나 낟알과 함께 출토되고, 텔 에스 소완에서는 엠머밀이 보리나 일립밀과 함께 출토되고 있다. 이신 라르사 시대(기원전 2004-기원전 1763년 무렵)나 후리 시대(기원전 2000년대)의 엠머밀 사례는 이라크 북동부 쿠르디스탄의 유적 텔 바즈모시안, 바그다드 근교에 위치한 이신 라르사 시대의 유적텔 하르말에서 출토되고 있다. 우르에서는 우바이드 시기에서만 엠머밀이 발견된다. 바그다드 근교의 카파제 하루에 위치한 유적 이쉬차리에서 엠머밀은 이신 라르사 시기의 토기에서 확인되는 곡물의 모양틀 중 10%를 점하고, 옛 바빌로니아 시대(기원전 1894-기원전 1595년 무렵)의 카파제에서는 곡물의 모양틀 가운데 40%가 엠머밀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엠머밀은 초기 메소포타미아의 농민에게 밀의 중요한 작물이었는데, 지역에 따라서는 점점 보리로 대체된다고 생각한다. 우르에서는 우바이드 시기에는 엠머밀, 아마, 보리가 발견되는데, 그 이후는 보리로 대체되고 있다. 보리의 내염성 때문에, 관개에 의한 토양 염화의 영향을 지적하는 견해가 있다. 이신 라르사 시기의 우르에서는 보리만이 재배되고 있었던 데 반하여, 듀칸 계곡의 텔 바즈모시안에서는 양질의 밀이 재배되어, 그것은후리 시대까지 계속된다. 엠머밀은 앗시리아 시대(기워전 1000년대 전반)이 되면 예전만큼 중요한 작물은 아니게 되었다. 


이라크 북서의 야림 테페와 기원전 7000년대 중반 무렵의 중앙 아나톨리아의 엘바바에서는 스펠트밀(Triticum spelta L.)의 잔이삭이 발견되고 있다. 가장 초기의 자연탈곡 밀은 기원전 6000년 무렵의 텔 에스 소완에서 확인된다. 그뒤 초가 마미, 젬테트 나스르, 우르 왕묘 등에서도 발견되었다. 님루드의 샬마네사르 3세 요새터에서 발견된 밀의 대부분은 자연탈곡 빵밀이다. 기원전 3000년대의 유적 텔 타야Tell Taya(이라크 북서)에서는 보리 다음으로 두번째로 일반적인 것이 빵밀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농업이 시작된 초기의 시대부터 탈곡이 필요 없는 밀이 알려져 있었는데, 더 간단히 가공할 수 있는 종이 아니라 오히려 겉껍질이 붙은 밀(엠머밀, 일립밀)을 계속 재배한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야생 보리(Hordeum spontaneum)에 대해서는 자르모에서 발견된 것이 야생종인 두줄보리에 가깝고, 모두 재배화가 시작되었다는 특징을 나타낸다. 이외의 야생종은 자르모, 움 다바기야, 초가 마미에서만 출토되고 있다. 재배화된 두줄겉보리(Hordeum distichum)에 대해서는 기원전 5000년대의 마타Matarrah(쿠르디스탄 대지)나 초가 마미, 텔 차가에서 발견되고 있다. 텔 에스 소완에서 나온 보리의 대다수는 겉껍질이 붙은 두줄겉보리이다. 


고대 이라크에서 재배된 보리에는 이삭에 여섯줄의 낟알이 달리는 것이 있고(Hordeum vulgare), 그것은 두 가지품종으로 나뉜다. 하나는 겉껍질을 쓴 것으로, 탈곡한 뒤 씨앗과 왕겨가 분리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쌀보리로서, 이것은 초기의 유적에서만 발견되었다. 쌀보리는 움 다바기야, 텔 에스 소완, 초가 마미, 야림 테페에서 발견되었는데, 초가 마미에서는 쌀보리의 양은 시간이 흐르며 감소했다. 한편, 겉껍질을 쓴 여섯줄겉보리는 이라크의 초기 농경에서는 별로 널리 재배되고 있지 않았다. 텔 에스 소완과 초가 마미에서는 여섯줄쌀보리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여섯줄겉보리가 매우 조금 발견되었다. 우르크 시기의 와르카Warka에서는 여섯줄겉보리의 존재가 알려져있다. 우루에서는 왕묘에서 여섯줄겉보리가 발견되고 있다. 겉보리와 쌀보리 유형의 여섯줄보리는 이라크에서 농경이 시작되고 얼마되지 않아 야생종의 두줄보리에서 발달하여, 어느 지역에서는 재배 보리의 주요한 품종이 되었다. 그 한켠에 두줄겉보리도 일반적인 품종으로 남아 있다. 그외에 잡곡으로 드물게 장목수수의 재배가 행해졌지만, 귀리의 재배에 대해서는 증거가 없다.




설형 문서에 나오는 수확량에 관한 문제


수메르 농업의 가장 주목할 만한 달성은 수확량 비율이라 말할 수 있다. 수확량 비율이란 어느 일정한 토지에 심은 종자의 양과 그 토지에서 수확된 곡물의 양 비율을 가리킨다. 마에카와 카즈야前川和也 씨의 논문(Maekawa 1984)에서 의론된 우르 제3왕조 시기의 기르수girsu에서 출토된 문서에서 보리의 수확량 비율은 1대30을 달성하고,엠머밀에 이르서는 더욱 높다. 그 이전의 초기 왕조시대에서는 어느 일정한 구획의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록한 문서가 없지만, 마에카와의 설(Maekawa 1974)과 야곱센의 설(Jaconsen 1982)은 함께 1대76이란 매우 높은 수확량 비율이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나 버츠는 이 해석에 의문을 나타내고, 이만큼의 수확량 비율은 현실에서다른 고대도시와 현대의 수확량에 비추어도 너무 높다고 한다(Butz 1984).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용된 혁신적인 '파종기'가 이 높은 수확량 비율에 공헌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똑같은 기술을 현대에 적용하더라도 그에 필적할 듯한 수치는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Postgate 1984a). 이 비율을 역사의 사실로 확인하기 위해서 앞으로 더욱 많은 연구와 비교 자료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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