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농경사 권3

 

 

 

제1장

서아시아에서 탄생한 농경 문화       아리무라 마코토有村誠

 

 

 

 

 

서아시아에 있는 농경 문화의 기원

 

인류는 그 탄생부터 수백만 년의 오랜 세월이 지나서 야생의 동식물을 이용하며 생존해 왔다. 그동안 동식물 이용에 관한 다양한 기술혁신과 지식의 누적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초기 단계에서는 민첩하게 움직이는 동물을 잡지는 못하고 죽은 동물의 고기를 찾아다니던 인류는 마침내 동물을 몰아넣는 기술을 깨우치고, 게다가 창과 화살같은 수렵용구를 마련해 뛰어난 수렵민이 되었다. 시행착오의 마지막, 신변에 자생하는 유용식물의 수를 확장하여 다종다양한 식물을 활용하는 지식을 축적해 나아갔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1만 년 전을 경계로, 인류는 농경과 목축에 의하여 자신의 식량을 생산하는 생계로 생활의 기반을 바꾸어 나아갔다. 일찍이 G. 차일드가 '신석기혁명'이라 부르며 그 중요성을 강조했듯이, 이 식량 획득양식의 변화에 의하여 사람들의 생활은 온갖 방면에서 영향을 받았다. 고고학에서는 수렵채집 사회에서 농경목축 사회로 변천한 것을 신석기화(Neolithisation)라고 부르며 그것이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 진행되어 갔는지에 주목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최초에 신석기화가 시작된 지역이 서아시아이다. 이 장에서는 서아시아에서 일어난 신석기화, 즉 농경 문화의 시초에 대하여 개관하려고 한다.

 

 

 

그림1-1 서아시아의 지도

 

 

 

서아시아는 유라시아 대륙 서부의 중위도 지방에 위치하고, 그 지형은 매우 기복이 많다(그림1-1). 레반트 지방(지중해 연안)에는 아프리카 대륙의 대지구대에 이어진 사해 지구대라고 부르는 깊은 골짜기 지형을 볼 수 있다. 이 지구대를 따라서 레바논 산맥 등의 1000-3000미터급의 산들이 남북으로 이어진다. 북부로 눈을 돌리면 아나톨리아부터 이란에 걸쳐서 3000미터급의 산들을 거느리는 타우로스 산맥과 자그로스 산맥이 우뚝 솟는다. 이들 산맥의 앞은 아나톨리아 고원, 아르메니아 고원, 이란 고원 같은 표고 1000미터 안팎의 고원지대가 펼쳐진다. 아나톨리아 남동부를 수원으로 하고,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라는 두 개의 큰강이 페르시아만으로 흘러간다. 이 두 큰강에 의하여 형성된 충적평야가 메소포타미아라고 부르는 지역이다. 그리고 서아시아의 내륙부,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에는 광대한 사막이 펼쳐진다.

 

이러한 기복이 많은 지형은 다양한 기후를 만들어낸다. 레반트 지방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적은 온난한 지중해성 기후이고, 강우량도 연평균 600밀리미터 안팎에 이른다. 이에 반하여 내륙부는 기온의일교차가 크고, 강우량도 매우 적은 사막 기후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경관이 다채로운 동식물상을 만들어내는 바탕이 되었다. 서아시아에는 사람들이 재배화, 가축화하게 되는 동식물이 풍부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이 장에서 다루는 서아시아의 시대 호칭과 배경에 대해서 간단히 서술하겠다(그림1-2, 그림1-3). 여기에서 관련되는 건 고고학의 용어에서 말하는 구석기시대의 말기부터 신석기시대에 걸친 기간으로, 대략 기원전 12000년부터 기원전 6000년 무렵까지의 기간이다. 이것은 지질학에서 말하는 갱신세의 말부터 완신세의 초 무렵에 상당한다.

 

 

그림1-2 서아시아, 레반트 지방의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신석기시대의 편년

 

 

 

 

그림1-3 본문에서 언급한 신석기시대 유적의 위치

 

 

 

구석기시대 말기(기원전 12500-10000년)의 서아시아에는 레반트 지방의 나투프 문화로 대표되는 정주하는 수렵채집민이 거주하고 있었다. 구석기시대 말기의 사람들은 그 이전의 수렵채집민보다도 정주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이해된다. 그것은 이 문화의 고고학적인 증거, 예를 들면 초석을 사용한 견고한 주거, 식량을 저장하는 구덩이, 주거에 비치된 무거운 석기류의 존재 등으로부터 유추된다. 인구의 증가가 있었다고 생각하며, 떡갈나무와피스타치오로 이루어진 레반트 지방의 산림지대에서는 그때까지는 없는 규모(1000평방킬로미터를 넘는다)의 마을이 출현했다.

 

서아시아 고고학에서는 기원전 1만 년 무렵부터 신석기시대라고 부르는 시대가 된다. 차일드는 신석기시대의 특징으로, 재배식물과 가축의 출현, 마을의 출현, 직업의 시작, 간석기의 사용, 토기의 사용 등을 드는데, 서아시아의 신석기 문화는 토기를 가지지 않는 문화로 발생했다. 토기가 보급된 건, 신석기시대가 시작하고 수천 년 지난 대략 기원전 7000년 무렵의 일이다. 일반적으로 서아시아의 신석기시대는 토기의 유무를 기준으로 토기 이전 신석기시대와 토기 신석기시대로 구분된다. 또한 레반트 지방의 토기 이전 신석기시대는 다시 몇 개의 시기로 세분된다. 오래된 순으로, PPNA기, PPNB전기, PPNB중기, PPNB후기 같은 방식이다(그림1-2).

 

그리고 현재는 신석기시대라고 이야기하면 농경과 목축을 기반으로 하여 식량 생산을 시작한 시대라고 하는 정의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부터 언급하듯이, 농경목축이 탄생한 서아시아에서는 신석기시대에 들어와 곧바로 농경목축에 의존한 사회가 출현한 것은 아니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 대부분은 매우 정주적인 마을로 이루어진다. 그 주거는 흙반죽 또는 햇볕에 말린 벽돌을 사용하여 지었다. 신석기시대도 후반이 되면 광장과 도로, 공동시설 등을 갖춘 마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마을의 시설을 만들 때 동네 구획이 행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대부분의 유적은 구석기시대의 유적보다 훨씬 크다. 그중에서도 3만 평을 넘는 것은 메가 사이트라고 부르고, 후대의 유적과 비교해도 두드러지게 크다. 만약 유적 전체에 마을이 펼쳐지고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메가 사이트는 읍이라 할 만한 규모의 마을이었다고 할 수있다. 이러한 유적 규모의 대형화는 인구 증가와 특정 마을로 인구가 집중되었다는 걸 나타낼 것이다. 이 시대에는 제사와 의례, 공예, 교역 등 사회의 다방면에 걸친 활동에서 그때까지와는 다른 전개가 발견된다. 이들의 고고학 정보에서 신석기시대에 사회의 복잡화가 급격히 진전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재배식물이 나타나다

 

서아시아는 실로 다양한 식물이 재배화된 지역이다. 밀, 보리, 호밀 등의 맥류를 시작으로, 누에콩, 렌즈콩, 병아리콩 등의 콩류, 포도, 올리브, 아몬드 등 우리에게 친근한 채소와 과일이 이 땅을 기원으로 하고 있다. 최초로 재배화된 식물로 맥류와 콩류가 있다.

 

농경의 기원을 찾으려면 물론 유적에서 출토되는 식물 유존체(탄화물이 많음)의 연구가 가장 중요한 정보원이다.이러한 식물 유존체를 대상으로 하는 고고식물학의 연구에 의하여 재배 맥류의 기원지와 맥류 농경의 기원에 대해서 최근 눈부신 성과를 올리고 있다. 재배 맥류의 기원지가 서아시아에 있다는 건 오랫동안 알려져 있었지만, 언제, 어디에서라는 물음에 대하여 최근의 연구는 더욱 상세하게 답하고 있다(丹野 2008).

 

서아시아에서 맥류의 재배화는 언제쯤 시작되었을까? 예전에는 신석기시대의 개시와 함께 농경이 사작되었다고 하여, PPNA기의 유적에서 재배 맥류가 출토된다고 이야기되었다. 그러나 PPNA기의 맥류를 정성껏 조사해 보면, 재배 맥류라고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게 밝혀졌다. 재배 맥류가 출토되기 시작한 건 신석기시대가 되고 1000년 이상 경과한 기원전 8500년 무렵(PPNB 전기)의 유적에서이다.

 

다음으로 맥류가 재배화된 지역을 살펴보자. 지금까지 행한 연구에서 레반트 지방이 그 유력한 후보지라고 알려져 왔다. 이 지방에서 신석기시대에 재배화된 맥류에는 일립밀, 엠머밀(그림1-4), 보리 등이 있다. 서아시아 신석기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된 맥류를 분석한 연구에 의하면, 출토된 맥류의 종류는 지역에 따라서 다른 경향이 있으며, 각각의 종류가 각지에서 재배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Willcox 2005). 즉, 재배 맥류의 기원지는 단일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립밀은 레반트 지방에서도 북부(터키 남동부와 시리아 북부)의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는데, 남부(요르단과 팔레스타인)에서 출토된 건 거의 없다. 이것은 이 맥류 본래의 자연분포가 레반트 북부에 있었다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일립밀은 터키 남동부에 자생하고 있다(그림1-5). 최근의 DNA 연구에 의해서도 고고학적 자료를 증명하듯이, 일립밀의 기원지는 터키 남동부에 있다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림1-4 시리아 북서부 케르크Kerkh  유적(토기 신석기 시기) 출토의 엠머밀

 

 

 

그림1-5 터키 남동부에 자생하는 야생 일립밀

 

 

 

 

언제, 어디에서 맥류가 재배화되었는지 하는 기원지의 문제와 함께, 어떻게 맥류 농경이 정착되어 갔는지 하는 문제도 중요하다. 단노丹野와 윌콕스는 신석기시대의 다른 시기의 유적을 대상으로 출토된 맥류의 야생형과 재배형의 비율을 검토했다(Tanno and Willcox 2006a). 그에 의하면, 신석기시대의 전반(기원전 8500년 무렵)에 나타난 재배 맥류는 곧바로 야생 맥류를 대신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재배형이 야생형보다 우세해지는 데 3000년이란 긴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 밝혀졌다. 지금까지 비교적 단기간(수십 년부터 수백 년)에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있던 야생형에서 재배형으로의 치환이 매우 서서히 진행되었다는 견해는 흥미롭다.

 

콩류의 재배화에 대해서는 맥류만큼 분명하지는 않다. 적어도 PPNB전기에는 시리아와 터키에서 이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시리아 북서부에 위치한 케르크 유적에서는 병아리콩과 누에콩이 대량으로 출토되어, 이 종의 콩에 대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사례의 하나가 되었다(Tanno and Willcox 2006b). 또한 터키 남동부의 네발리 코리Nevalı Çori 유적에서는 출토된 인골에 포함된 탄소와 질소의 안정동위체를 조사한 바, 질소안정동위대비(δ15N)이 매우 낮고, 렌즈콩 등의 콩류를 상당히 소비했다는 것이 추측되다(Lösch 외. 2006).

 

 

 

 

도구에서 본 농경의 시작
서아시아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는 맥류의 재배와 가공에 관련된 도구(유물)와 설비(유구)가 자주 발견된다. 이와 같은 맥류 농경에 관련된 유물과 유구에서도 맥류 농경의 정착 과정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을 앞에서 기술한 식물 유존체의 연구와 비교함으로써 농경의 시초가 어떠했는지 그 실상에 더욱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맥류 농경에 관련된 도구로는 토지를 갈아엎는 경기용과 수확용 도구 등이 있다. 경기용 도구에 대해서는 우리가그것을 알 법한 유물은 서아시아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것은 드물고, 존재했는지 어떤지 불분명하다. 수확용 도구에는 서아시아의 선사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되는 낫날이라 불리는 석기가 있다(그림1-6). 이 석기는 벼과 등의 식물을 베는 데 사용하고, 날 부분에 벼과 식물을 자를 때 붙는 규소 성분에 의한 광택을 볼 수 있다. 통상은 목제와 골제의 자루에 하나 내지 여러 개를 장착해 사용했다. 낫날과 자루의 장착에는 비튜멘(천연 아스팔트)과 나뭇진 등이 접착제로 사용되었다. 

그림1-6 서아시아 신석기시대의 낫날.
① 와디 헤메

Wadi 27호 유적 출토(Edwards 1991: Fig. 12에서)

② 할룰라

Halula 유적 출토(Ferran Borrell 씨 제공)

③ 무레이베트

Mureybet 유적 출토의 석회암제 낫의 자루(Anderson-Gefaud 외. 1991: Fig. 6에서)

④ 복제된 플린트로 만든 낫날을 장착한 석회암제 자루(

Anderson-Gefaud 외. 1991: Fig. 6에서)






수확된 맥류 이삭에서 씨앗을 얻을 때는 이삭에서 잔이삭을 분리하는 탈곡과 각각의 잔이삭에서 알곡을 골라내 씨앗을 얻는 매조미 같은 작업이 필요하다. 특히, 서아시아 신석기시대에 이용된 일립밀과 엠머밀 등 옛 유형의 밀은 탈곡이 어려운 성질이라 씨앗을 골라내기까지 탈곡과 매조미라는 작업에 수고를 들여야 한다. 탈곡과 매조미에 사용되었다고 생각되는 도구에 절구가 있다. 절구는 바리 모양의 돌절구와 돌공이의 묶음으로 이루어지고, 공이를 위아래로 움직여서 사용한다(그림1-7-①, 그림1-7-②).

그림1-7 서아시아 신석기시대의 돌절구① ② 나투프

Natuf 문화의 돌절구와 돌공이(BarYosef 1983: Fig. 5에서)

③ ④ 신석기 문화의 갈판과 갈돌(아부 고쉬Abu Ghosh 유적 출토, Khalaily and Marder 2003: Fig. 6. 1.에서)

⑤ ⑥ 신석기 문화의 안장형 갈판(saddle quern)과 갈돌(케르크 유적 출토, Yoshizawa 2003: Fig. 43에서)

 

 

 

그리고 이러한 씨앗을 골라내 결국 먹을 수 있게 되는데, 서아시아의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맥류를먹었는지 증거는 많지 않다. 그러나 서아시아의 역사시대와 현대의 사례에서 생각하면, 아마 신석기시대에 빵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빵 이외의 먹는 법으로 볶은밀이나 죽으로 먹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지만, 서아시아에서는 증거가 없다. 밀을 가루로 내려면 돌절구가 필요하다. 서아시아에서 사용된 돌절구에는 앞에 기술한 절구에 더하여 맷돌도 있었다. 맷돌은 평평한 면을 가진 갈판과 그 위에 얹는 갈돌의 묶음으로 이루어져, 갈돌을 갈판 위에서 전후좌우로 움직여서 사용한다(그림1-7-③, 그림1-7-④). 이렇게 만든 밀가루에서 빵을 만들 수 있는데, 서아시아 신석기시대의 유적에서는 빵 그것의 출토 사례는 거의 없다. 상상하기에, 현재의 서아시아에서 먹고 있는 것 같은, 얇은 무발효 빵이었지 않을까? 빵을 굽는다고 한다면 달군 돌이나 가마 같은 설비가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도구와 설비가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신석기시대에 걸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아래에 그 발달사를 개관해보자.


구석기시대 말기
우선 맥류 농경 관련 도구의 발달사에서 중요하고 새로운 기원을 여는 시기가 되는 건 구석기시대 말기(기원전 12500-10000년)이다. 맥류의 수확을 보여주는 낫날, 매조미와 제분에 사용된 돌절구와 갈판 등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낫날은 구석기시대 말기의 나투프 문화에서 증가한다. 낫날의 대부분은 길이 2-3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돌조각을, 동물의 뼈와 뿔을 이용한 자루에 여러 개, 한 줄 드물게 두 줄로 줄지어 장착했다(그림1-6-①). 나투프 문화의 유적에서는 낫의 자루가 비교적 많이 출토되고, 그 대부분은 길이 30센티미터 정도의 직선 낫이다. 구석기시대 말기의 유적에서는 아직 맥류의 재배종은 출토되지 않았기에, 이들 낫은 야생종의 수확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낫날에 남은 사용흔의 분석에서도 추측되고 있다. 
절구(돌절구, 돌공이)도 낫날과 똑같이, 나투프 문화에서 많이 만들어졌다(그림1-7-①, 그림1-7-②). 절구는 나투프 문화에서 제작된 간석기 중에서 주류의 도구이며, 깊이 몇십 센티미터나 되는 거대한 돌절구가 자주 제작되었다. 이러한 절구는 맥류의 탈곡, 매조미, 제분에 사용된다. 절구에 비하여 수는 많지 않지만, 맷돌(갈판, 갈돌)도 구석기시대 말기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들 절구와 맷돌은 용도가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석기를 제작하여 사용한 실험에 의하면, 절구의 장점은 제분 작업보다 매조미이며 제분 작업에 더 적합한 도구는 맷돌 쪽인 것 같다. 물론 맷돌이 언제나 맥류의 제분에 사용되었을 리는 없고, 콩류를 시작으로 다른 식물의 제분, 그리고 안료의 제작에도 종종 사용되었음은 틀림이 없지만, 구석기시대 말기의 맷돌의 사용흔과 잔재를 분석해 보면,이 시대에 맷돌을 사용한 맥류의 제분이 시작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Dubreuil 2004). 구석기시대 말기에 곧바로 맥류의 탈곡, 매조미와 제분 작업이 절구와 맷돌 같은 도구로 분화되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구석기시대 말기에 나타난 낫날과 돌절구의 존재는 이 시기에 그때까지와 비교하여 훨씬 맥류 이용이 활발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 일은 뒤따르는 신석기시대에 맥류 농경이 시작된 점을 생각하면, 맥류 농경 개시 직전의 모습으로 매우 자연스럽게 생각된다. 그러나 식물 유존체의 분석 결과에 의하면,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신석기시대 초 무렵에 걸쳐서 맥류 이용이 활발해졌다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Savard 외. 2006). 오히려 맥류는 이 시기 대부분의 유적에서 양적으로 제한되며, 콩류와 견과류 등 다양한 식물을 이용하는 상태가 일반적인 듯하다. 이처럼 도구와 식물 유존체의 정보를 맞추면 맥류는 구석기시대 말기에 먹을거리의 한 날개를 담당하고는 있었지만, 아직 중요한 식량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에 들어가면 맥류 농경과 관련된 도구에 변화가 보이고, 또 새로운 유형의 도구가 나타난다.
먼저 눈에 띄는 변화로, 맥류의 수확을 보여주는 낫날의 증가를 들 수 있다(그림1-8). 앞에 기술했듯이, 낫날은 구석기시대 말기에는 곧바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석기 가운데 점하는 비율은 약 2-3%로 높지 않다. 신석기시대 초 무렵에는 점점 증가하는 경향이 있지만 큰 변화는 아니다. 뚜렷한 변화가 발견되는 건 PPNB중기부터이다.석기 가운데 10-20%를 점하는 데까지 증가한다.

그림1-8 레반트 지방의 유적에서 낫날의 수량 변화와 낫의 형태 변화. Sayej 2004 등에서.


낫의 형태 변화에 대해서 통시적으로 검토해 보면, 신석기시대 전반(PPNA기-PPNB전기)에서는 구석기시대 말기와 마찬가지로, 낫날이 여러 개 장착된 직선 낫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큰 돌조각을 한 개체로 활용하여 칼처럼 사용한 것도 있었다. 석기를 그대로 손에 쥐든지, 또는 석기에 손잡이를 붙이든지 하여 사용했던 듯하다. 드문 사례이지만, 유프라테스 강가의 무레이베트 유적에서는 수확 칼의 자루라고 생각되는 석회암제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그림1-6-③, 그림1-6-④). PPNB중기가 되면 활처럼 굽은 낫이 사용되기 시작한다(그림1-6-②).
이 직선에서 활처럼 굽은 모양으로 낫의 형태가 변화한 건 중요하며(그림1-8), 아마 수확 작업의 효율화에 연결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직선 낫은 한 손으로 이삭을 모아 이삭 다발을 비벼서 자르는, 또는 낫을 대는 도구로 삼아 꺾어 거두는 식으로 사용한다. 한편, 활처럼 굽은 낫은 이삭을 모아서 베어 거둘 수 있고, 직선 낫에 비하여 수확 속도가 높아 짧은 시간에 더 많이 수확할 수 있다. 현대의 철제 낫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활처럼 굽은 낫은 베어 거두는 작업에 매우 적당한 형태이다. 또한 활처럼 굽은 낫이 출현한 배경에, 당시의 석기 제작기술의 발달이 있었음도 간과할 수 없다. 신석기시대에 들어와 원석에서 길이 10센티미터 정도의 규격성이 높은 돌날을 연속하여 벗겨내는 기술이 발달했다. 이리하여 제작된 돌날을 그대로든지, 또는 적당한 길이로 정돈하여 분할한 것(그림1-9)을 장착하여 더 간단하게 칼날의 길이가 긴 활처럼 굽은 낫을 만드는 일이 가능해졌다. 

그림1-9 시리아 케르크 유적(PPNB 후기) 출토의 낫날



그 한쪽에서 탈곡의 도구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새로운 유형의 도구가 발달되고 있다. 하나는 염소와 양의견갑골을 이용한 도구이다(그림1-10). 견갑골의 얇고 평평한 부분을 깎아서 두 갈래로 가공하고, 그 안쪽에 몇 개의 홈을 새긴다. 한 다발의 이삭을 두 갈래의 사이에 통과시키면 잔이삭이 홈에 걸려 탈곡되는 구조이다. 이 홈과 그 주변에 광택과 선상흔 등 이삭 다발을 통과시킬 때 닿았다고 생각되는 흔적이 관찰되었다. 유례는 적지만, 재미난 발명품이다.

그림1-10 골제 탈곡 도구. Stordeur and AndersonGerfaud 1985: Fig 2, 4, 8에서.
간즈 다르흐

Ganj Dareh 유적 출토 유물(좌)와 추정되는 그 사용방법(우)

 

 

 

또 하나, 탈곡 썰매라는 도구가 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지중해 세계의 각지에서 사용되고 있는 도구이다. 보통 길이 1.5미터 안팎의 목제 썰매이고, 그 뒷면에 돌과 철제 날이 박혀 있다(그림1-11). 이 썰매를 수확한 맥류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서 동물에게 끌게 하면, 썰매의 무게(썰매 위에 사람이나 무거운 걸 올림)도 더해져 상당한 마찰이 썰매와 이삭 사이에 일어나 탈곡이 이루어진다. 또 이 방법에서는 탈곡만이 아니라 동시에 맥류의 짚을 대량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도 특별히 적는다. 맥류의 짚은 가축의 먹이와 햇볕에 말리는 벽돌을 만들 때 혼합물 등에 사용된다. 똑같은 도구는 고대의 서아시아에서도 사용되었다. P. 앤더슨Anderson 씨의 일련의 연구에 의하면, 탈곡 썰매의 이용은 확실히 청동기시대 전기(기원전 30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듯하다(Anderson 2000 등).이 시대의 유적에서 탈곡 썰매에 장착된 석기가 자주 발견된다. 앤더슨에 의하면, 이런 유의 탈곡 썰매에 장착된 석기는 신석기시대의 유적(기원전 8000년대 후반부터 7000년대 전반의 유적)에서도 출토되며, 탈곡 썰매의 사용은 신석기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신석기시대가 되어 대규모로 탈곡 작업하는 듯한 규모의농경이나, 또는 건축재와 토기의 바탕흙에 끈지게 하는 재료로 섞는 등 맥류 짚의 적극적인 이용이 시작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하면, 탈곡 썰매가 신석기시대에 곧바로 등장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림1-11 현재 튀니지에서 사용되고 있는 탈곡 썰매. Patricia Anderson 씨 제공.

 

 

그리고 탈곡, 매조미, 제분의 도구인 돌절구에서 변화는 발견할 수 있을까? 이미 많은 연구자가 지적하듯이, 신석기시대가 되면 절구(돌절구, 돌공이)가 감소하고, 대신에 맷돌(갈판, 갈돌)이 증가한다(그림1-7-③, ④). 맷돌은제분에 적합한 도구이기에, 신석기시대가 되어 맥류의 제분이 활발해졌음을 상정할 수 있다. 다만, 여전히 안료의 제작에 사용되었다고 생각되는 갈판도 많이 발견되기에, PPNB전기까지의 맷돌은 다목적 제분 도구로 이용된것이 많았을 것이다. 맥류의 제분에 특화된 도구라고 생각되는 건 안장형 갈판이다. 갈판에 비교하여 대형이고, 가늘고 긴 윗돌(갈돌)을 두 손으로 잡고 체중을 실어서 앞뒤로 움직여 효율적인 제분을 행한다. 그 가장 오래된 건 구석기시대 말기에 출현하고, PPNA기에 이미 대부분의 유적에서 발견된다(그림1-12). PPNA기에는 아직 재배 맥류가 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기의 안장형 갈판은 야생 맥류의 제분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PPNB중기부터 후기에 걸쳐서 대부분의 유적에서 일반적이게 된다(그림1-7-⑤, 그림1-7-⑥). 이 뒤, 안장형 갈판은 회전 갈판이 출현하기까지 오랫동안 제분 도구의 주역이었다. 신석기시대에 보급된 안장형 갈판이 얼마나 제분 도구로서 완성도가 높았는지 알 수 있다. 
그림1-12 시리아 와디 툼바크(PPNA기) 출토의 안장형 갈판과 갈돌(화살표). 

Frédéric Abbès 씨 제공.





빵을 굽는 설비는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갈까? 빵 굽는 가마라고 보이는 유구가 나타난 건 PPNB 중기이며(舟田 1998, 藤本 2007), 유례가 늘어나는 건 토기 신석기시대가 되고 나서로 더욱 늦다. 이들의 대부분은 돔 모양의 상부구조를 가진 가마로서 현대의 서아시아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과 유사하며, 아마 지금과 마찬가지로 가마의 내벽에 빵을 붙여서 구웠을 것이다. 또, 빵을 굽는 다른 방법으로 숯불을 이용한 땅을 옴폭 판 화로가 사용되었을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

田 1998, 藤本 2006). 이와 같은 땅을 판 화로는 구석기시대 말기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의견도 있다. 빵을 먹는다고 하는 문화 그것은, 오랜 옛날 맥류 이용의 개시와 함께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신석기시대에 걸쳐서, 맥류 농경에 관련된 도구와 설비의 변천을 좇아 왔다. 낫날과 돌절구는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출현하며, 맥류 이용이 조금씩이지만 이 무렵부터 활발해졌단 것을 보여준다. 
맥류의 재배와 이용에 관한 다양한 도구, 설비가 시대의 추이와 함께 증가, 출현 또는 충실해지는 걸 생각하면, PPNB 중기부터 후기(기원전 8000-7000년) 즈음을 맥류 농경이 정착한 시기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도구와 설비의 발달사에서 얻을 수 있는 견해는 앞에 기술한 야생 맥류에서 재배 맥류로 이행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단노와 윌콕스의 설에 긍정적이다.


동물의 가축화
서아시아에서 탄생한 농경문화의 다른 하나의 중요한 측면에 동물 사육의 시작이 있다. 서아시아 원산의 동물에는 양, 염소, 말, 돼지, 낙타(단봉)이 있다. 낙타를 제외한 다른 4종의 우제류는 모두 신석기시대에 가축화되었다. 오늘날 주위를 둘러보면, 얼마나 우리의 생활이 이들 가축이 생산해 내는 자원에 의존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들 동물이 서아시아 신석기시대에 가축화된 의의는 크다.
위에 4종의 우제류보다 전에 가축화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동물에 개와 고양이가 있다. 개는 구석기시대 말기의 나투프 문화에서 몇 가지 사례가 알려져 있다. 모두 사람의 매장에 동반하여 발견된 것으로, 사람과 개의 특별한 관계를 엿볼 수 있다. 고양이의 사례는 최근 고양이의 기원을 새롭게 하는 발견으로 화제가 되었던, 신석기시대 초 무렵의 키프로스섬에 있다(Vigne 외. 2004). 이 섬의 실로로캄보스

Shillourokambos 유적에서 기원전 8천 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양이의 매장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가장 오래된 반려동물 고양이의 사례이며, 고양이의 사육이 신석기시대의 서아시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이기도 하다. 또한 최근의 DNA 연구에 의해서도 고양이의 기원이 서아시아에 있다고 한다.

 

서아시아에서 우제류를 가축화한 기원은 재배식물의 기원에 비교해 해명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우제류에서 최초로 가축화된 것이 염소, 양이며, 그것은 터키와 이라크의 산간지대에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리고 이것에 조금 뒤늦게 소와 돼지가 가축화되었다고 생각해 왔다. 또한 동물의 가축화는 시간적으로 식물의 재배화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석기시대의 후반(기원전 7500-6000년 무렵)에 걸쳐서 일어났던 일이라 이해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통설은 최근의 키프로스섬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 유적에 의해 재고하게 되었다(Peltenbeurg and Wasse 2004 등). 지중해에 떠 있는 이 섬에서는 기원전 8500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적(실로로캄보스, 미로크티아 등)이 발견되어, 그곳에서 원래부터 섬에 생식하지 않는 소, 염소, 양, 돼지, 사슴 등의 동물뼈가 출토되었다. 이들은 분명히 육지(레반트나 아나톨리아)에서 가지고 들어온 것이며, 가축화된 동물이 일거에 섬으로 데려왔다는 신석기시대판 '노아의 방주'로 평가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발견된 동물에 명료한 가축화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은 점, 사슴 등 끝까지 가축화되지 않았던 동물이 포함되어 있는 점 등에서, 키프로스섬에 데려온 동물은 야생동물이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고 있다. 왜 야생동물을 섬에 데려왔을까 하는 물음에 답하는 건 어렵지만, 섬을 방문한 사람들이 식량원 또는 상징적 의미로 동물을 섬에 풀어놓고, 그것을 수렵했다는 해석이 제시되고 있다.
키프로스섬에서 발견된 동물군이 야생이었는지 가축이었는지 하는 문제를 일단 차치하더라도, 이들 동물이 육지에서 데려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이 시대의 사람과 동물의 관계를 나타내고도 있다. 기존의 생각과 달리, 신석기시대의 전반에 벌써 동물의 가축화가 시작되었을 가능성도 검토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레반트 북부의 PPNB전기의 동물뼈를 상세하게 분석해 보면, 몇 곳의 유적에서 크기의 축소화, 성별의 편중 등이 확인된다고한다(Peters 외. 1999). 최근에는 터키 남동부에서 양과 염소의 가축화, 시리아와 유프라테스강 중류 지역에서 소의 가축화 등, 최초로 우제류를 가축화한 것은 PPNB 전기의 레반트 북부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견해가 계속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면 가축화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가축화의 과정을 검토하려면 유적에서 출토된 동물 조성의 변화를 보는 게 유효하다. 그림1-13은 레반트 남부의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PPNB기에 걸친 동물 조성의 변천이다.  이것을 보면, 구석기시대 말기(나투프 시기)부터 신석기시대 초 무렵(PPNA기)에 걸쳐서 압도적으로 많은 건 야생동물인 가젤이다. 그러나 PPNB기가 되면 이 상황은 아주 달라진다. 양과 염소가 점하는 비율이 급증하는 것이다.
그림1-13 레반트 남부의 나투프 시기부터 PPNB기까지 동물상의 변천. Bar-Yosef 1998: Fig. 8에서


PPNB기에 동물상의 변화는 어떠했을까? 그림1-14는 레반트 북부와 키프로스섬의 PPNB기에 동물상의 변천을 정리한 그래프이다. 이 그래프에 의하면, PPNB전기 10-20% 정도였던 가축이 서서히 증가해, PPNB 후기에는 그 점하는 비율이 80-90%에 이르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1-14 PPNB기의 야생종과 가축종의 비율 변천. 

야생; 가젤, 사슴, 야생 염소 등. 가축; 염소, 양, 소, 돼지Machecoul 외 2008: 그림5에서

 

 

 

터키 남동부에 위치하는 차요누

Çayönü 유적에서는 가축화의 과정에 관한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本鄕 2002). 이 유적은 PPNA기부터 토기 신석기에 이르는 오랜 기간 거주한 유적으로, 한 유적에서 통시적으로 가축화의 과정을 검토할 수 있다. 여기에서도 동물 조성의 변화가 관찰되었다. 가축화되는 염소, 양, 소, 돼지 4종이 거주 기간을 거치며 서서히 증가해 나아가는 경향이 발견되고, 특히 염소와 양은 PPNB 후반부터 PN이 되면 출토되는동물뼈의 절반을 넘을 정도로 늘어난다. 가축화의 지표가 되는 크기의 축소화, 사망연령 구성의 변화에 대해서는먼저 PPNB 중기 무렵에 그 특징이 보이기 시작해, PPNB기가 끝날 무렵에는 뚜렷해진다. 차요누 유적의 성과로중요한 건 가축화가 단기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수백 년에서 1천 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서 천천히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현재, 레반트 지방의 동물뼈 분석에서는 이하와 같은 가축화의 시나리오가 그려질 것이다. 먼저 PPNB 전기까지 어느 정도 염소와 양, 소 등의 우제류의 관리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이 시기의 몇 곳의 유적에서 발견되는 동물뼈크기의 축소화와 성비 편중에서 추측된다. 그러나 가축종은 급속히 늘어나지는 않았다. 출토된 동물뼈의 조성에 나타나듯이(그림1-14), PPNB 중기까지 가젤 등의 야생동물이 점하는 비율은 여전히 높고, 염소와 양을 중심으로 하는 가축의 비율이 높아진 건 PPNB 후기부터이다. 차요누 유적에서 분명해지듯이, 야생종에서 가축종으로 이행한 것도 맥류의 재배화와 똑같이 오랜 시간이 걸린 완만한 변화이며, 가축을 사양하는 일이 주요한 생업이 된 것은 PPNB 후기 이후의 일이라 생각한다.



유물이 말하는 가축화
맥류의 재배와 이용이 다양한 도구, 설비를 필요로 하며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유물과 유구가 비교적 풍부한 데비하여, 가축 사육에 관련된 유물과 유구는 거의 없다. 그 때문에 동물뼈 이외에서 가축화의 과정을 탐색하는 건 어렵지만 그 시도를 두 가지 정도 들어보겠다.


찌르개(尖頭器)의 변천


하나는 수렵 도구인 찌르개(창날, 화살촉)의 변천에서 간접적으로 가축화를 검토하는 시도이다. 서아시아의 신석기시대에는 다양한 형태의 찌르개가 제작되었다. 이들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서 형태와 제작방법에 차이가 발견되기 때문에 편년을 위한 시기 구분과 지역 문화를 설정할 때 지표가 되고 있다. 
신석기시대를 거치며 찌르개의 중요한 변화로 대형화가 있다. 그림1-15는 시리아 북서부 케르크 유적의 사례이다. PPNB전기(그림1-15-①)의 것은 길이 5센티미터, 너비 1.5센티미터 정도의 것이 많고, 아마 화살촉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 상정된다. 이것이 토기 신석기 시기(그림1-15-②)가 되면 길이 10센티미터, 너비 2센터미터 정도의 것이 주류를 이루고, 두께도 1센티미터 정도의 두꺼운 것이 많다. 그 크기로부터 창날로서 사용되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림1-15 시리아 케르크 유적 출토의 찌르개
①PPNB 전기 ②토기 신석기 시기


크기의 변화 이외에도 가공(수정)의 방식에도 변화가 발견된다. PPNB 전기의 찌르개는 끝, 가장자리, 밑 부분으로 한정된 부분에 가공이 이루어진다(그림1-15-①). 끝은 튀어나와 찌르는 부분이기에 날카롭도록 가공한다. 가장자리 부분의 가공은 멀리서 공격하는 무기로서 빼놓을 수 없는 석기의 모양을 좌우대칭으로 모양을 가지런히 할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밑 부분의 가공은 자루 부분과 장착하는 것에 관련된다. 이와 같은 가공의 방식은 찌르개의 기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에 반하여 토기 신석기 시기의 찌르개는 가공된 부분이 매우 많다. 그림1-15-②에서는 찌르개 하반분의 전면에 가공이 이루어진다. 그림1-16은 거의 같은 시기의 시리아 크데일 유적에서 발견된 찌르개이다. 압압떼기(

押壓剝離)라는 기법으로 행해진 가공은 석기의 한 면 전체를 뒤덮고 있다. 가공의 의미가 기능적인 것에서 장식적인 것으로 변화한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림1-16 시리아 크데일 유적(PPNB 종말기) 출토의 찌르개. Frédéric Abbès 씨 제공.

 




한편 그 수량에 대해서도 변화가 발견된다. 유적에서 제작된 찌르개의 수량이 감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찌르개가감소하기 시작하는 시기는 유적(또는 지역)에 따라서 차이를 보인다. 이 현상은 빠른 유적에서는 PPNB 후기부터 시작되지만, 시리아 북서부 등에서는 토기 신석기 시기의 중반부터 후반(기원전 7000년대)으로 상당히 늦다.그 시초에 대해서는 유적에 따라서 시기차가 발견되기는 하지만, 대체로 찌르개의 감소는 PPNB 후기부터 토기 신석기 시기(기원전 8000년대 후반부터 기원전 7000년대)에 걸쳐서 레반트 지방 전역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신석기시대를 거치며 일어난 찌르개의 변화는 대형화, 가공도의 증가, 수량의 감소라는 세 가지로 정리할수 있다. 대형화에 대해서는 PPNA기부터 PPNB기에 걸쳐서 서서히 진행되는 경향을 볼 수 있고, PPNB 중기에 돌날 제작기술의 발전을 배경으로 그때까지 없던 너비가 넓고 두꺼운 대형 찌르개가 등장한다. 가공에 대해서는 PPNB 후기 이후 그 정도가 늘어난다. 그리고 수량의 감소는 PPNB 후기부터 토기 신석기 시기에 걸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이상의 찌르개에서 볼 수 있는 변화를 통시적으로 정리하면, PPNB 중기까지 대형화되고 있던 찌르개가 PPNB 후기 이후 차츰 만들지 못하게 됨에 따라 기능적인 이유를 넘어서 과도하게 가공되는 것처럼 된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찌르개의 변화 상태는 수렵도구인 찌르개의 상징적, 경제적인 사정이 변화했다는 것을 추측하게 한다. 시기적으로 보아도 PPNB 후기 이후의 야생동물의 수렵에서 가축 사육으로 동물 자원의 비중이 이동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동물 표현
유물에서 가축화의 추이를 탐색하는 다른 하나의 시도는 조각과 조형에서 보는 동물 표현의 변천에 주목한 연구이다(Helmer 외. 2004). 

그림1-17 토기 이전 신석기시대에 동물 표현의 변천. Helmer 외. 2004:tableau 2에서.

 

 

 

 

그림1-17은 토기 이전 신석기시대에 표현되어 있는 동물의 변천에 대하여 정리한 것이다. 신석기시대 전반(PPNA기-PPNB전기)에는 표현되는 동물은 소, 고양이과의 동물, 새, 뱀 등 변화가 풍부하다. 이 시대, 동물 표현으로서 석제의 우상과 돌에 묘사한 선각화 등이 있는데, 그와 같은 조형물이 수없이 발견된 유적에 터키 남동부의 괴베클리

Göbekli 유적이 있다. 이 유적에서는 원형 또는 직사각형의 제사용이라 생각되는 건물이 한데 모여 발견되었는데, 이들 건물에는 몇 개의 T자 모양 기둥이 우뚝 솟아 있었다. 기둥은 바위 하나를 가공하여 만들었고, 그 크기는 큰것은 높이 5미터, 무게 10톤이나 된다. 팔레스티나의 예리코에서 발견된 '타와'와 비교되는, 서아시아의 초기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거석 기념물이다. 인식된 동물은 10종류에 이르고, 특히 뱀과 여우, 멧돼지 등이빈번하게 묘사된다(Peters and Schmidt 2004). 그림1-18은 T자 모양 돌기둥의 한 예로, 측면에 소, 여우, 학 세마리가 표현되어 있다. 또한 다른 면에는 소의 머리라고 생각되는 표현도 있다. 중요한 건 이와 같은 T자 모양 돌기둥에 표현된 동물종의 대부분이 유적에서 출토된 동물뼈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이다. 식량 또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획득된 동물이 T자 모양 돌기둥에 묘사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림1-18 터키 괴베클리 유적에서 발견된 T자 모양 돌기둥. Cauvin 2000: Fig. 70에서.

 

 

 

이처럼 신석기시대 전반에 발견된 동물 표현의 다양성은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사라져 간다. PPNB 중기 이후 염소, 양 등의 가축을 표현했다고 생각되는 포유동물의 조형이 많아진다. 특히 늘어난 건 이들 동물을 표현한 토우이다. 그림1-19는 터키 아칼차이 테페アカルチャイ・テペ 유적(PPNB 중기)에서 출토된 양 모양 토우인데, 이것에서 볼 수 있듯이 손바닥에 들어갈 듯한 크기로 만들었다.

 

 

그림1-19 터키 아칼차이 테페 유적 출토의 양 모양 토우

 

 

 

이와 같이 통시적으로 보면, PPNB 중기 무렵부터 표현의 대상이 되는 동물이 사람들이 포획했던 다양한 야생동물에서 가축으로 옮겨가는 걸 알 수 있다. 이러한 동물 표현의 변화에서 간파할 수 있는 건 신석기시대 후반이 되면 가축이 사람들에게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는 점이다. 역시 PPNB 후기 이후에 가축 사육이 본격화되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농경목축 문화의 정착과 그 이후

 


여기까지 최근의 동식물 유존체의 성과와 그에 관련된 고고유물을 다루어서 식물의 재배화와 동물의 가축화 과정에 대하여 생각했다. 재배화와 가축화는 모두, 신석기시대 최초의 무렵이 아니라, 조금 시간이 경과한 PPNB 전기에 레반트 북부에서 그 최초의 징후가 발견된다. 그러나 농경목축에 강하게 의존하는 듯한 사회가 탄생한 건 PPNB 후기 이후의 일이며, 최초의 재배화와 가축화가 일어나고 나서 1000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재배화와 가축화의 실태란, '신석기 혁명'이라는 명칭에서 상상되는 것처럼 급격한 변화가 아니라 완만한 이행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그림1-20). 이것은 오랫동안 계속해 왔던 수렵채집생활을 그만두고 전례가 없는 생활양식을 시작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랄 일은 아니며, 신석기화의 과정은 다양한 시행착오의 반복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림1-20 서아시아의 신석기화 개념도



요동치는 영거 드라이아스 시기라는 설
재배화와 가축화에 관한 의문 가운데 가장 답하기가 어려운 건 '왜'라는 물음일 것이다. 농경의 기원에 대하여 요새 20년 정도 받아들여지고 있는 설은 이 책 제2장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영거 드라이아스기(기원전 1만1000-기원전 1만 년 무렵)에 일어났던 기후가 다시 한랭해진 영향을 주요한 요인이라 하는 것이다. 이 설에서는 구석기시대 말기에 원래 맥류의 이용을 시작했던 나투프 문화의 사람들이 영거 드라이아스기의 한랭화가 원인이 되어식물자원의 감소에 직면하고, 그에 대처하는 방법으로서 맥류로 확 기울어져, 그것이 재배화로 이어졌다고 한다.그러나 앞에 언급했듯이 맥류의 재배화는 매우 천천히 진행되었고, 또 가장 오래된 재배종이 출토된 것도 영거 드라이아스기에 상당하는 구석기시대 말기는 커녕 신석기시대 초반(PPNA기)도 아닌PPNB전기이기 때문이다. 영거 드라이아스기라는 설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점이 많다. 
동물의 가축화에 대해서는 동물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여 가축화된 것이냐는 문제에 직결된다. 적어도 육식만을 목적으로 가축화가 행해졌을 리는 없다고 대부분의 연구자가 지적해 왔다. 그 대신 젖 이용이 그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三宅 1999)과 동물을 소유하는 것에 사회적 의미가 있었다는 설(本鄕 2002, 

Machecoul 외. 2008) 등이 제안되고 있다. 

 

그렇다 치더라도, 왜 농경목축은 구석기시대(갱신세)가 아니라, 신석기시대(완신세)가 되어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왜 서아시아처럼 독자적으로 농경목축이 시작된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이 있을까? 이 오래되고 새로운 문제는 항상 흥미가 떨어지지 않는 '수수께끼'(

Diamond 2000)이다.

 

 

 

서아시아 초기 농경문화의 그 이후 -기원전 7000년대의 변화
PPNB 후기에 이어진 기원전 7000년대는 마을의 재편기에 해당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PPNB 문화의 붕괴'라고 표현되는 대형 마을의 방기이다. 'PPNB 문화의 붕괴'설에서는 자주 레반트 남부에서 PPNB 후기에 성립된 대형 마을이, 주변 환경의 악화에 의하여 파탄되었다고 이야기된다.
이 설이 최초로 주장된 건 요르단의 아인 가잘 유적의 사례였다(Rollefson and 

Köhler-Rollefson 1989). 이 유적에서는 PPNB 중기부터 후기에 걸쳐서 마을의 대형화가 발견된다. PPNB 후기까지 3만 평을 넘는 규모로까지 확대된다. PPNB 후기에는 양과 염소의 사육과 보리의 재배 등에 중점을 둔 생업이 행해지고, 이에 더하여 주변의 다양한 야생 동식물도 소비하고 있었던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다음 시기(PPNC기=기원전 7000년대 전반)가 되면 마을 규모가 축소되고, 주거 형태와 석기 제작, 매장 등 여러 방면에서 변화가 발견된다.

 

이러한 변화를 가져온 요인으로 PPNB 후기의 인구 증가에 수반한 농지 확대, 염소의 방목, 연료 획득을 목적으로 한 산림벌채 등 마을 주변의 환경에 계속 주었던 압박이 불러온 주변 자원의 고갈이 지적되었다. 아인 가잘 유적과 때를 같이하여 레반트 남부에서는 PPNB 후기의 몇몇 대형 마을(메가 사이트)가 방기되는 것으로부터 'PPNB 문화의 붕괴'가 일어났다고 알려졌다.  'PPNB 문화의 붕괴'는 레반트 지방 일대에서 확인되는 현상인 것처럼 이야기되는 일이 적지 않지만, PPNB 후기부터 토기 신석기 시기에 걸쳐서 존속했던 유적은 수없이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레반트에서 일어난 현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대저 신석기시대에 한하지 않고 고대 서아시아에서 수천 년에 걸쳐서 영속되었던 마을과 읍은 대부분이 없다. 다양한 요인으로 수십 년이나 수백 년으로 마을이 방기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마을 방기를 문화 붕괴라고 간주해도 좋을지에도 의문이 남는다. PPNB 후기에 발견되는 마을 방기를 새삼스레 크게 평가할 만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기존의 인류사에 없는 규모로 발달한 PPNB기의 몇몇 대형 마을에서는 그때까지의 수렵채집을 기반으로 하여 농경목축을 도입했던 것으로, 마을 주변의 자연환경을 크게 손상시키는 난개발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리고 주변 자원의 고갈에 대응하여 너무 크게 구성된 마을을 해체하고, 더 소규모 마을로 나누는 형태로 마을 재편이 행해졌을 것이다. 이 기원전 7000년대의 마을 재편도 신석기화의 과정에서 겪은 인간의 시행착오, 환경에 적응하기의 하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외에 기원전 7000년대에 발견되는 중요한 유적 동태의 변화에 농경목축이 주변 지역으로 확산된 것이 있다.
확산의 방향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서아시아 내륙부의 반건조지대로 확산된 것이다. 기원전 7000년대 전반에 가축인 양과 염소를 동반한 야영지라고 생각되는 유적이 반건조지대에서 출현하기 시작한다. 가축을 동반한 유목민이 등장했던 증거라고 한다. 시리아 내륙부의 크데일 유적은 그러한 최초의 유목민이 남긴 야영지의 하나이다. 동물뼈와 함께 플린트 석기의 제작터가 발견되었다. 건물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지만, 석기와 동물뼈의 면적인 확장을 꼼꼼히 살펴보면 천막이 설치되었다고 생각되는 장소가 추정되었다(그림1-21). 이 유적에서 발견된 동물뼈의 분석에 의하면, 크데일의 사람들은 가축 양을 소유하고, 내륙 초원 지대에서 생식하는가젤 등의 야생동물을 수렵하면서 살아갔다. 매우 조금이지만, 낫날과 곡물이 출토되기 때문에, 맥류의 재배도 행했다고 생각한다. 유목민의 출현은 PPNB 후기에 성립한 초기의 농경 마을에서 탄생한 새로운 과실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림1-21 시리아 크데일 유적(PPNB 종말기)에서 유물의 출토 상황도(위)와 크데일 유적에서 사람들의 활동 복원도(아래). 

Frédéric Abbès 씨 제공.

 

 

 


또 하나는 서아시아에 인접한 지역으로 확산된 것이다. 기원전 7000년대를 경계로, 맥류 재배와 염소, 양, 소를 사육하는 생업은 동으로는 유럽으로, 서로는 중앙아시아와 인더스 방면이라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로 퍼져 나갔다. 이 농경목축이 확산되는 실태란 대규모 농민의 이주였거나, 농민과 접촉한 현지의 수렵채집민이 농경목축이란 신기술을 받아들이거나 하는 등 지역에 따라 다양했을 것이라 생각한다(벨우드 2008). 그것은 또한 서아시아에서 탄생한 농경문화가 각지의 풍토에 걸맞게 변용되어 나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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