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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3




서장

맥류 풍토의 양성     佐藤洋一郞사토 요우이치로






시작하며


이 시리즈 세번째 권에서는 '맥류의 풍토'를 다룬다. 밀을 중심으로 하는 맥류는 대략 1만 년 가까이 전에 서아시아의 '비옥한 초승달' 한 구석에서 태어났다고 이야기된다. 그것이 '목장'의 풍토인 유럽을 시작으로 전 세계로 전해져, 현대 문명의 물질적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 


철학자였던 와츠지 데츠로는 유라시아를 '계절풍' '사막' 그리고 '목장'의 세 가지 풍토로 나누었다(和辻 1979). 그러나 이 세 가지 풍토의 역사에 대해서, 와츠지는 거의 아무것도 써 놓지 않았다. 세 가지 풍토는 도대체 언제부터 지금 같은 모습이 되었을까?


와츠지의 <풍토>에 이어서 역시 풍토를 논한 우메사오 타다오梅棹忠夫도 왜인지 그 역사에 대해서는 별로 상세한 의론을 전개하지 않는다(梅棹 1998). 이 시리즈 첫번째 권의 서장에서도 기술한 대로 '사막'의 풍토는 수천 년 전부터 사막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이것도 여러 군데에서 소개하고 있듯이,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소하묘 유적(기원전 1000년 무렵)에서는 밀의 씨앗과 소의 머리뼈 등 농업과 목축업의 존재를 엿볼 수 있는 유물이 여럿 출토되고 있다. 또 다른 상황증거에서도 타클라마칸 사막을 중심으로 하는 지금과 같은 '사막'의 풍토가 지금보다는 훨씬 습윤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 규모가, 예를 들면 오아시스에서 행하는 농업이라고 정확히 한정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전체적으로 퍼졌던 본격적인 것이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불분명하지만, 만약 후자였다고 한다면 그 시대의 이 지역을 '사막'의 풍토라고 부르는 건 아마 적당하지 않다. '사막'의 풍토는 시대와함께 움직였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현재 사막이 되어 있는 지역은 수천 년 전에는 푸른 대지가 펼쳐져 있던 건 아니었을까? 즉, '사막'의 풍토는 최근 수천 년 사이에 급속히 확대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 가설을 지지하듯이 '사막'의 풍토에서 사막화의 진행은 어쩌면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우즈베키스탄 남부의 달베르진 테페Dalverzin-Tepe에서는 중세(기원후 몇백 년 무렵)의 유구에서 벼, 조 등의 씨앗이 목재와 함께 다량으로 출토되어, 지금은 사막으로 뒤덮인 이 땅에 숲과 벼의 생산지가 있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는 당나라의 승려 현장 삼장이 인도로 가는 여행을 감행한 그 직전의 시기에 해당하는데, 현장의 여행기를 보아도 당시의 중앙아시아 일대는 지금보다 훨씬 습윤했단 것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기술이 발견된다. 한 예를 들면,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 가장자리에 있던 고창국이란 나라의 존재가 그러하다. 현장의 일기에는 그가이 땅을 여행할 때, 고창국의 국왕은 현장을 오랫동안 나라에 머무르도록 여러 모략을 두루 생각해내지만 그렇게안 되고, 결국 현장에게 인도로 여행을 가도록 허락하는 일이 적혀 있다. 당시의 고창국에는 4천 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그는 기록하고 있는데, 만일 그 숫자에 과정이 있었다고 해도 국가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을 지탱하기 위한 생산이 있었다는 건 사실일 것이다. 만약 그 인구를 1만이라 하고, 또 그들의 에너지가 밀로만 조달되었다고 한다. 사람 1명의 연평균 소비량을 150킬로그램, 밀의 단위면적당 수확량을 3000평당 1톤이라 한다면, 필요한 최저한의 밭 면적은 450만 평(약 4킬로미터 사방)이 된다(주; 야마타 카츠히사山田勝久의 추정으로는 8킬로미터 사방). 그런데 지금, 예전의 고창국은 완전한 폐허이며, 그 주위도 가장 최근 개방된 관개수로가 함양하는 포도밭을 제하면 온통 사막 지대이다. 


게다가 다섯 번에 걸쳐 중앙 유라시아를 탐험한 스벤 헤딘의 <떠돌아다니는 호수>에 의하면,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 가장자리를 동으로 흐르는 타림강의 유역에는 19세기 말까지 벵골 호랑이가 생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더구나 최근의 발굴 성과에서는 예를 들면 앞에 기술한 소하묘 유적에서 스라소니의 것이라 생각되는 동물의 털도 나오고 있다. 호랑이와 스라소니는 숲에 서식하는 동물이고 또 먹이사슬의 정점에 자리하기에, 그 생식은 광대한 숲의 존재를 시사한다. 3000년 전의 옛날부터 100년 전까지 2900년 사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며 상당한 면적의 숲이 그곳에 성립되어 있엇을 가능성이 높다. 타클라마칸의 건조화, 숲의 후퇴는 이 1세기 사이에 진행된 것이다. 추측하면 현재의 실크로드 일대는 지금도 아직 건조가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막'의 풍토는 지금 '목장'의 풍토와 같았을까? 이것은 또한 이 3천 년 사이의 '목장'의 풍토가 어떠했는가 하는 물음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목장'의 풍토


그래서 우선 유럽의 풍토인 '목장'의 풍토에 대하여 의론을 진행하겠다.


유럽의 풍토를 그 농경에 비추어서 기술한다면, 남유럽은 '맥류와 가축'의 풍토, 북유럽은 '감자와 가축'의 풍토가 될 것이다(佐藤 2009). 여기에서 농경의 핵심을 이루는 건 가축인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특히 가축의 젖이 사람들의 단백질 공급원으로 유용했다. 또한 대서양에 면한 해안 지역에서는 '감자와 물고기'라는 풍토도 전개한다. 목축에 쓰이는 가축이란 무리를 이루는 대형 포유류로서 소, 말, 양, 염소, 낙타 등을 가리킨다. 대형 포유류에서도 돼지와 물소는 무리를 이루지 않기에 그 사육은 목축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이러한 정리를 하면, '계절풍'의 풍토에는 원칙으로 목축이 없었다고 해도 좋다. 물론 예외는 있다. 인도부터 동남아시아에 걸쳐서 있는 인도소는 그 한 예이다. 또한 일본 열도에서도 말의 목축은 특히 열도의 북반부를 중심으로 왕성히 행해졌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시 이 시리즈의 네번째 권에서 다루기로 한다.


목장의 풍토에서 일어난 농경사에 관해서도 많은 연구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P. 벨우드의 <농경기원의 인류사>(長田, 佐藤(번역) 2008)을 바탕으로 소개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유럽으로 농경이 확산된 건 목축을 수반하여 매우 오랜 과정을 거쳤다. 서아시아에 있는 농경의 기원지에 가까운 지역에서는 이른 시기부터 환경의 변화가 일어나고,숲이 파괴된 토지에서는 토사가 흘러 평야에 퇴적되기도 했다. 농경은 북유럽과 대서양 연안의 지역에는 수천년의 시간을 거쳐 전해졌다. 재미있는 점으로 그것은 유럽 전체를 구석구석 퍼진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농경을 받아들인 지역은 멀리 떨어진 것처럼 분산되며, 그 사이에는 농경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지역이 있었다. 이와 같은 지역에서는 상당히 이후인 중세까지 '유목'이라 부를 수 있는 비농경민이 있었다. 동아시아와 마찬가지로 유럽에서도 농경민과 수렵채집민은 최근까지 동거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가축을 지탱하던 것이 중세의 삼포식 농업과 그것에 이어진 돌려짓기 농업으로, 이들이 현재의 이른바 혼합식 농업이 되었다. 삼포식 농업에서 가축은 작물 이후의 휴경지에 방목되어 지력의 회복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아무튼 유럽의 풍토는 가축의 세계였다고 할 수 있다.


'목장'의 풍토에서 전분 공급원으로 쓰였던 건 밀, 보리를 중심으로 하는 맥류, 감자, 순무 등의 뿌리채소류, 게다가 메밀 등일 것이다. 이 가운데 맥류에 대해서는 <맥류의 자연사>(佐藤, 加藤 편집 2009)에 상세하기에 그에양보하려 한다. 새삼스럽게 하나만 지적하고 싶은 건 '맥류'라고 일본어와 중국어가 총칭할 정도로 유럽의 문화는 그들을 일괄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다른 경로, 다른 경위로 지금의 유럽에 전해지고, 그리고 정착했을 것이다. 또한 감자에 대해서도 <감자가 온 길 -문명, 기근, 전쟁>(山本 2008)나 <감자의 세계사 -역사를 움직인 '빈자의 빵'>(伊藤 2008)라는 훌륭한 저서가 있기에 여기에서는 상세한 건 생략하겠지만, 매우 개략적으로 적으면 감자는 16세기에 전해졌을 때부터 주로 유럽의 북부에 침투했다. 밀레의 '만종'(1855-1857년 무렵)은 감자를 수확하는 가난한 부부가 기도를 드리는 풍경을 묘사한 그림으로, 이 시기의 프랑스에서는 모든 감자가 서민의 식량으로 침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메밀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등의 나라에서 일본 이상 생산된다(FAO의 통계에 의함). 또 리투아니아도 국토 면적이 6만5200평방킬로미터(일본의 1/6)로 작으면서 생산은 일본의 2/3 정도나 된다. 메밀의 기원지는 중국이라 하는데, 언제 어떻게 유럽에 전해졌는지 연구의 여지가 남아 있다.


'목장'이란 이름은 물론 와츠지에 의한 것인데, 이 시리즈 첫번째 권에서 사사키 다카아키 씨와의 대담에서도 화제가 되었듯이 와츠지는 유럽의 풍토를 운운할 수 있을 만큼 유럽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1927년 3월, 마르세이유에 상륙한 뒤 조금 여행만 한 뒤에는 독일의 베를린에 체류했다. 확실히 여러 번 채류한 파리나 추위를 피할 겸 이탈리아 각처를 돌아다니는 등 유학 시절의 와츠지는 독일 이외의 유럽 각지를 방문하지만, 남유럽이나 북유럽, 동유럽 등은 거의 아무것도 몰랐던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풍토를 '목장'의 풍토라고 일별한 바는 와츠지가 천재인 이유도 있고, 또 육식 사회인 유럽이란 인식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막' 풍토의 목축 


현재 '사막'의 풍토는 그 생업에 비추어 말하면 '유목의 풍토'라고 부르는 것도 가능한 풍토이다. 물론 건조한 정도가 가장 심한 토지에서는 가축의 먹이가 되는 약간의 풀도 없고, 온갖 종류의 생업을 거절하는 환경도 존재한다. 와츠지의 '사막'이란 이와 같은 인상의 풍토였다고도 할 수 있다.


사막이라고 한마디로 이야기하지만, 사막에는 흐름모래의 사막도 있다면 '고비' 같이 자갈의 사막도 있다. 또한 그곳은 물이 없기 때문에 식물이 살지 못한다고만 말할 수 없고, 1년에 한 번 또는 몇 년에 한 번 대량의 눈 녹은물이 홍수를 일으켜 근처를 물에 잠기게 하기도 한다. 식물의 생육이 보이지 않는 건 토양에 포함된 염 탓이다(佐藤, 渡邉 2009). 이 책 제2장에서 쿠보타 쥰페이窪田順平 씨가 상론하고 있듯이, 사막의 실태는 우리 일본인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복잡하다. 


유목이란 여러 가족이 단위가 되어 소, 말, 양, 염소 등의 유제류의 무리를 이동하면서 관리하는 생업을 말한다. 유목민들은 가축의 무리를 관리할 때 갓 태어난 새끼를 '인질'로 삼거나, 무리를 통제한다. 새끼를 '인질'로 삼는것으로 어미의 젖을 수탈하는 일도 가능하다. 흔히 유목민은 가축의 고기를 얻는다고 생각하지만, 고기를 얻는 행위는 가축을 죽여 버리는 것이기에 그들은 가축을 많이 죽이는 일은 하지 않는다. 다만 수컷은 거세하여 고기용으로 사용하는 기술이 등장한다.


유목의 기원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의 대립된 견해가 있다. 마츠바라 마사키松原正毅 씨는 "(인류가) 야생의 유제류 무리를 뒤쫓으면서 무리에서 떨어진 개체를 수렵의 대상으로 삼았을 것이다"([유라시아에서 유목민의 역사적 역할] 2005년 3월 18일, 국립민족학박물관)라고 서술하며, 수렵이라는 바탕에 거세와 착유라는 기술을 실어서 유목이 성립했다고 한다. 한편 후지이 스미오藤井純夫 씨와 혼고 히토미本郷一美 씨는 유목은 이동 목축의 발전형태이며, 그 기초에는 원시농경이 있었다고 생각한다(예를 들면 혼고 [가축화의 초기 과정과 유목의 시작], 일본인류학회 진화인류학분과회 제18회 심포지엄, 2007년 6월 16일, 교토대학). 대립하는 이들 두 가지 견해는 당연히 농경과 목축 어느 쪽이 일찍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도 대립된 견해를 보여준다. 전자는 유목을 수렵의 계속이라 보기에 유목이 일찍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한편 후자는 논리적이고 필연적으로 농경이 유목보다 먼저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가축화와 초기 농경에 대해서는 이 책 제1장에서 아리무라 마코토有村誠 씨도 상론하고 있기에 그쪽도 참조해 주시기 바란다.


농경민과 유목민은 단순히 기후의 차이에 의하여 그 생활역을 달리하고 있는 건 아니다. 유목민들은 가축의 무리를 재산으로 가진다. 한편, 농경민의 재산은 토지이다. 두 가지 생업은 근본적으로 다른 논리를 가지고 있다. 토지를 농경민이 점유하고, 목초에 대신하여 작물을 심어 버리면, 유목민의 가축 무리는 살아갈 수 없게 된다. 반대로 유목민의 가축 무리가 작물의 밭을 불시에 덮치면, 몇개월 걸린 노력은 일순간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유목민과 농경민은 몇천 년 동안 항상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양자의 관계가 완전히 적대적인 관계였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양자는 교역을 통하여 생존에 필수인 것을 서로 얻어 왔다. 유목민이 제공한 건 소금, 젖 등의 산품, 농경민이 제공한 것은 곡류, 일용품 등이었다. 농경민과 유목민은 이처럼 서로 대립하면서도 보완하는 복잡한 관계에 있었다.


근현대 국가의 탄생은 지구에 모든 토지를 국경이라는 선으로 분단하고, 사람과 사물의 왕래를 관리하는 제도를 완성시켰다. 이것은 유목민의 생존 기반을 근저에서 빼앗는 것이었다. 토지를 관리하여 모든 자원을 둘러싸 가둔다는 논리가 승리한 것이다. 그것은 일본 열도에서 논이란 장치에 자본을 투입하는 논벼농사가, 조몬시대 이후의 수렵과 채집에 기초를 둔 자원관리에, 1500년 이상의 시간을 들여서 '승리'한 것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맥류의 풍토


이 책 제3장 Ⅱ에서 가토 켄지加藤鎌司 씨가 상세하게 적고 있듯이,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소하묘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그 근방에 사람이 살며, 목축을 수반한 농업을 경영하고 있었단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곳에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물이 있어 숲이 전개되고, 풍부한 생태계가 있었단 것도 필시 사실일 것이다. 이러한 대량의 물의 존재, 숲의 존재는 우즈베키스탄 남부의 달베르진 테페 유적(기원후 2세기 무렵부터 몇 세기 동안)에서도 시사된다. 그 중세의 유구에서는 과일의 씨앗 등에 섞인 다량의 벼 종자가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에서도 언급했듯이 그 시기는 정확히 현장 삼장의 인도 여행 무렵에 해당한다. 현장이 이 땅을 여행했을 때, 쌀을 먹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천년의 단위에서 그 과거를 돌아볼 때, '사막'의 풍토는 지금의 그것과 같이, '목장'의 풍토와 엄격히 구별할 수 있는 건조, 반건조의 풍토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와츠지가 말한 '목장'과 '사막'의 풍토를 보충하는 광대한 '맥류의 풍토'라고도 부를 만한 풍토가 전개되어 있었을 것이다. 요컨대, 유라시아의 풍토가 이 시대에는 세 가지로 나뉘어 있던 것이 아니라, '벼의 풍토'라고도 부를 만한 계절풍의 풍토와 '맥류의 풍토' 두가지로 나누어 있었다고 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맥류의 풍토'가 지닌 역사적 변천에 대해서는 많은 검토 과제가 남아 있다. 그들의 농업이 어떠한 농업이었을까, 특히 목축에 대한 의존도가 어느 정도였을까, 또 그 목축은 지금의 유목과 같았던 것일까? 그 주변의 숲의 규모는 어느 정도의 것이었을까? 또한 물 수지가 어떠했을까? 이러한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자료를 우리는 아직 준비하고 있지 않다. 




맥류라는 식물


그런데 '맥류의 풍토'라고 했을 때 그 '맥류'란 어떤 것일까? 율무나 메밀을 별도로 하면, 맥류(작물과 식물로서 의론하는 경우, 이 책에서는 '맥류'라고 표기한다)란 보통 '가을에 심어서 다음 해의 봄에 수확하는 두해살이 벼과의 곡물'을 두고 말한다. 다만 기후가 매우 한랭한 지역에서는 '춘파형'이란 특수한 품종을 사용하는, 봄에 씨앗을 심어서 그 가을에 수확하는 봄파종의 재배법을 취하는 일도 있다. 식물이란 면에서 맥류에 대하여 말한다면, <맥류의 자연사> 안에서 카와하라 타이하치河原太八 씨가 상세하게 적고 있듯이, 맥류는 벼과 안의 여러 계나 속에 걸치는 곡류의 총칭이다.


다만, 이들 맥류 사이에는 그 중요성에서 서열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생산량이란 관점에서 보면, 밀의 지위는 다른 것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높다. 더욱이 같은 밀에서도 6배성의 빵밀의 지위는 다른 듀람밀이나 일립밀(Einkorn wheat)보다도 뚜렷하게 높다. 그렇다고 하지만 보리의 두줄보리처럼 양조용으로 특화되어 다른 걸로 대신할 수 없는 지위를 구축한 것도 있다. 또 현대에 들어오면 종을 넘은 교배에 의하여 완전히 새로운 종이 만들어지는 사례도 나온다. 예를 들면, 밀과 호밀의 교배에서는 라이밀(triticale)이 만들어져 일부 실용적으로 쓰이고 있다. 또한실험적으로는 보리와 밀의 잡종도 만들어져, 가까운 장래에 이러한 종 사이의 서열에 변경이 더해질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러한 서열에는 각각의 종의 역사가 관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빵밀의 압도적 우위의 이면에는 그 높은 적응성이 있다. 빵밀은 지금으로부터 7500-8000년 정도 전에 지금의 아나토리아부터 카스피해의 남안 지대에서 엠머밀이라 불리는 4배성 품종과 그 밭에서 잡초로 자라던 야생 염소풀이 자연교배하여 탄생했다고 한다. 즉, 거리가먼 두 가지 종의 유전자를 가지는 것으로, 밀은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는 높은 적응성을 획득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라이밀은 츠지모토 히사시辻本壽 씨에 의하면 그것 자신이 잡초였던 것이 한랭지에서 작물로 '승격'된 것이라고 한다(츠지모토 [밀밭의 수반 잡초 라이밀의 진화], <맥류의 자연지>). 아마 밀밭의 잡초로서 수반되었던 라이밀이지만 조건이 나쁜 토지로 전파되었을 때, 곡물인 밀이 원래의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사이에 라이밀의 생산성이 상대적으로 높아져 이윽고 사람들은 라이밀 가운데 뛰어난 종을 선발하여 작물의 모습을 잡아 나간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고 하면, 라이밀에는 본래 '잡초'였다는 의미에서 그늘에 사는 사람의 인상이 따라다녔기에, 이것도 서열화에 영향을 드리우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작물과 잡초의 관계는 벼에도 꼭 들어맞아 흥미롭다. 벼에는 인디카, 자포니카라는 두 가지 아종 수준의 품종군이 존재하는데, 인디카는 최근의 연구에서는 온대 태생의 자포니카를 열대에 가지고 들어갔을 때 그곳에 있던 미지의 야생종과 교배를 일으켜 성립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佐藤 1996).


또한 '맥류의 풍토'에서도 유럽에서는 16세기 이후 감자를 가지고 들어가, 식사에 혁명이 일어났다. 특히 밀의 생산이 어려웠던 북유럽으로 침투한 데에는 놀라운 것이 있었다. 이 감자의 급전개에는 19세기 중반의 아일랜드를 중심으로 한 '감자 기근' 등의 부산물도 수반되는데, 그런데도 전체를 보면 감자의 공헌은 지극히 크다고 할 만하다.




'계절풍' 풍토의 맥류들


그런데 맥류의 어느 종은 꽤 이른 시기부터 '계절풍'의 풍토에도 침입한다. 특히 보리는 조몬시대에 일본 열도까지 이르러, '계절풍'의 풍토로 건너온 것이 상당히 일렀다고 미루어 생각된다. 이 책 제3장 Ⅰ에서 타케다 카즈요시武田和義 씨도 지적하고 있지만, 매우 흥미로운 것으로 계절풍 지대에서 재배되는 보리는 그 유전자형에서 상당히 특수하다(Takahashi 1955). 즉 그들은 전 세계에 분포하는 보리 품종 가운데 특수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그 성질이란 껍질이 잘 떨어지는 성질, 찰기의 성질, 키와 이삭의 길이가 줄어드는 성질 등으로 모두 단지 하나의 열성 유전자의 지배를 받고 있다. 더구나 최근의 연구에서는 '여섯줄 성질'이란 열성 유전자를 상세하게 조사한 바, 세 가지 다른 유전자가 발견되어 계절풍 지대의 보리 품종은 거의 예외 없이 어느 특정 유전자를 가진다고 한다. 


밀의 경우는 보리의 경우만큼 두드러진 사례는 눈에 띄지 않지만, 그래도 동질효소, 몇 개의 DNA 표지 등에서 계절풍 지역에 특이한 유전자형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마카로니밀에 대해서는 인도와 중국 신장 위구르자치구의 일부 지역에서 매우 소수의 품종이 알려졌을 뿐, 계절풍 지대에서 재배의 역사는 대부분 없다. 바꾸어 말하면, 계절풍의 밀 품종은 강한 '병목 효과'에 의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즉 맥류는 매우 작은 집단으로계절풍 지대에 가지고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건너온 경로는 여러 가지였을 것이다. 보통밀에 대해서는 <맥류의 자연지>에서 가토加藤 씨는 이른바 실크로드와 히말라야 남쪽 기슭의 경로라는 적어도 두 가지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보리에 대해서도 일찍이 코니시小西(1986)는 두 가지 이상의 도래 경로를 보여준 적이 있다.


계절풍의 풍토에 도달한 맥류는 그곳에서 특수한 식품을 탄생시켰다. 기울은 그 전형적인 것이다. 기울은 밀가루 그것도 단백질 함량이 높은 강력분으로 만들 수 있다. 그것을 물로 개어 완자로 만들어, 잘 반죽하고서 그 전분을 정성껏 씻어 없애면 뒤에 글루텐을 주성분으로 하는 단백질이 남는다.  이것이 이른바 '생기울'이다. 


계절풍 풍토로 건너온 건 강한 병목 효과에 의한 특수한 품종군을 성립시켰다. 그것과 함께 특수한 맥류 농경 문화와 식문화도 완성시켰다.





풍토와 고대 문명


풍토는 고대 문명의 성립과 쇠망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일본의 교과서에서는 세계의 고대 문명으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네 곳이 소개되는 일이 많다. 최근에는 이것에 장강의 문명을 더하여 5대문명 등으로 하기도 한다. 이 다섯 가지 문명을 지도 위에 기재하고 새삼스럽게 조망해 보자. 우선 이들은 모두 온대지역의큰강 어귀에서 발달한 문명이다. 자주 지적하듯이, 장강 문명을 제외한 네 곳의 문명이 번영한 지역은 지금은 모두 건조하고, 인구 지지력을 잃었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사막'의 풍토와 '목장'의 풍토가 접한 토지에성립한 문명이다. 또한 인더스 문명과 황하 문명은 '계절풍'과 '사막'의 풍토에 접한 토지에서 탄생한 문명이다. 요컨대, 네 곳의 고대 문명은 모두 '맥류의 풍토' 남과 동의 가장자리 부분, 그것도 와츠지가 말한 '사막'의 풍토 가장자리 부분에 있다. 고대의 문명이 시작부터 메마른 토지에서 성립되었을 리는 없다. 그러하면 '사막'의 풍토는, 적어도 그 일부에 대해서는 고대 문명이 파탄된 뒤에 등장했던 풍토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도대체 '사막'의 풍토를 만들어 냈던 주체는 누구였을까?


이 물음에, 예를 들어 기후학자라면 수천 년의 기간으로 생기는 건조화를 그 원인으로 들 것이다. 또한 야스다 요시노리安田喜憲 씨(Yasuda 2005)처럼 연료의 확보와 밭의 개발을 위하여 숲을 베어버린 일이 기후변화를 야기하고, 그것이 문명을 쇠퇴시켰다는 설을 취하는 연구자도 있다. '기후변화'라든지 '인간 활동' 같은 단일한 요인이 그것만으로 건조화, 사막화를 야기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고, 여러 가지 요인이 서로 원인이 되어 결과를발생시키면서 복잡한 계를 이루고, 그 계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과정에서 사막의 풍토가 생기고, 또 문명이 명말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싶다.


다섯 곳의 문명이 있던 지역 가운데 장강 문명이 있던 장강 유역만이 아직도 높은 인구밀도를 가지며, 높은 토지생산성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벼농사가 맥류 농사보다 환경에 조화롭기 때문이다'라는 지적도있지만, 나는 이 지적에는 신중하다. 왜냐하면 벼농사에 대해서도 보리농사에 대해서도, 현시점에서 그것은 어느쪽이라도 환경에 조화롭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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