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농경사 권2



기고5

찹쌀에서 멥쌀로 

-태국 동북 지역에서 전통 벼농사의 전환     미야가와 슈이치宮川修一





태국 동북의 쌀


인도차이나 반도의 중앙부, 구체적으로는 태국 동북부 및 태국 북부, 라오스, 미얀마 동북부, 베트남 서북부, 그리고 중국 남부에서는 찹쌀을 일상의 먹을거리로 삼는 문화이며 찹쌀의 생산이 널리 행해진다. 와타나베 타다요渡部忠世 씨는 이것을 '찰벼 재배권'이라 이름을 지었다. 태국 동북은 코라트 고원이라고도 부르며, 표고 100-200미터의 완만한 기복이 있는 평원이다. 내륙부에 위치하기 때문에 강우량도 적고, 관개수원이 되는 하천도 적기 때문에 재배에 필요한 물을 빗물에 의존하는 천둥지기 벼농사가 널리 행해지고 있다. 태국 동북의 중부 이북은 타이라오계의 사람들이 많고, 납부에는 타이코라토 및 크메르계의 사람들이 많다. 마치 이 민족 구성에 대응하듯이, 전자는 찹쌀 지대, 후자는 멥쌀 지대로 나뉜다. 즉 태국 동부에는 찹살과 멥쌀 어느 쪽이 주요한 재배품종인지, 또 소비량이 많은지를 나눌 수 있는 경계선을 그을 수 있다는 것이다. 


태국 동북의 중앙에서 약간 서쪽으로 콘깬이란 행정지역이 있는데, 여기도 전형적인 찹쌀 지대이다. 그 지역의 어느 마을을 1980년대 초반에 조사한 바, 20가지 이상의 논벼 품종이 있고 밭벼 품종도 포함하면 30가지 정도의 품종이 마을 전체에서 재배되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찹쌀 품종이고, 멥쌀 품종은 다섯 가지에 지나지 않았다. 밭벼는 모두 찹쌀 품종이었다. 또한 찹쌀의 재배면적은 논벼 전체의 약 90%를 점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태국 동북 전체의 논벼 품종 구성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찹쌀 재배 지대에서는 이 마을과 비슷한 품종 구성이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 마을의 논도 천둥지기로서, 가뭄이나 때로는 근처 하천의 범람으로 홍수 피해를 입어 수확량은 안정되지 않았다. 토양은 모래땅인데 1970년대까지는 비료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확량도 매우 낮았다. 필연적으로 생산된 쌀도 자급용뿐이고, 농가는 3년 분의 소비량을 조달하는 저장량을 가진 쌀창고를 가지고 흉년에 대비하고 있었다. 농가는 어지간히 쌀이 남지 않는 한 파는 일은 없고, 당연히 판매를 목적으로 쌀을 농사짓는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이것이 1980년대 중반까지 태국 동북의 찹쌀 지대의 전형적인 벼농사의 모습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이 되면 태국 전체가 눈부신 경제성장을 하여, 태국 동북의 농촌에도 그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콘깬의 마을에서는 경운기가 보급되고, 화학비료의 사용이 시작되며, 강우 부족일 때는 가솔린 펌프로 하천이나 호수에서 물을 보급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으로 생산량은 증가했지만, 그러했어도 역시 찹쌀을 주체로 한 재배는 변함이 없었다. 안심할 수 있는 자급 벼농사가 되었다. 그런데 똑같은 찹쌀 지대의 마을에서도 멥쌀의 재배가 성행하여, 이 쌀을 왕성하게 판매하는 마을이 동부에서 중부에 걸쳐서 나타났다. 즉 태국 동북의 중앙에 그어져 있던 찹쌀 멥쌀 경계선이 북으로 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찹쌀의 품종 교대


태국 동북에서 일반적인 찹쌀의 조리법은 쪄서 지에밥으로 먹는 것이다. 전날 밤 또는 몇 시간 전부터 물에 불려놓은 찹쌀을 대나무 찜소쿠리에 넣고, 물을 담았던 알루미늄 단지에 집어넣는다. 이것을 불에 걸치고 40-50분 찐다(그림1). 대나무로 만든 뚜껑과 알루미늄 냄비 뚜껑 등을 덮어 놓는다. 잘 찐 지에밥은 일본의 것보다 딱딱하다. 이것은 만들어진 지에밥이 원래 쌀에 대해 1.46배의 무게인데, 일본의 1.6-1.9배에 비해 수분함량이 적기때문이다. 지에밥은 나무 그릇에 쏟아서 식히고, 밥소쿠리에 담는다. 보통은 아침과 저녁 때에 찌고, 아침밥과 점심밥 남은 건 저녁 때 또 다시 쪄서 먹는다(그림1).


그림1 찹쌀을 쪄서 밥소쿠리에 담는다.




예전에는 많은 품종이 있긴 했지만, 쌀창고 안에는 이듬해에 쓸 볍씨 이외는 섞어 버리고, 특히 맛있는 품종 같은건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에는 많은 품종은 모습을 감추고, 대신 개량품종 고코홋크(RD6)가 거의 독점적으로 재배되게 되었다. 마을사람에게 다른 품종을 버리고 이 품종을 택한 이유를 조사한 바, 부드럽고 맛있기 때문에, 아침에 밥을 지으면 저녁까지 부드러워 다시 찔 필요가 없기 때문에 같은 답이 돌아왔다. 마을에 따라서는 수확량이 많기 때문에, 라는 답을 첫째로 든 경우도 있다. 이 품종의 교대 시기는 정확히 찹쌀 멥쌀 경계선이 이동을 개시한 시기에 상당하고 있다. RD6 자체는 197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품종으로 1980년대 초반에는 이미 각 마을에도 조금씩은 재배되었는데, 대규모로 재배된 적은 없었다. RD6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배경은 시대적으로 보아 멥쌀 지대에서 일어났던 멥쌀로의 전환과 공통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찹쌀 지대에서 멥쌀이 확장되다


1980년대 후반에는 위에서 기술하듯이 전통적인 찹쌀 생산지대의 일부에서 멥쌀 품종의 농사가 확대되는 것이 발견되었다. 


필자가 1991년부터 1994년에 걸쳐서 조사한 태국 동북의 334개 마을의 멥쌀 품종 농사비율과 KKU-Ford 프로젝트가 조사한 1970년대의 행정구역별 멥쌀 품종 농사비율을 비교한 바, 로이엣트, 무크다한, 얀톤 및 본라챠타니 같은 중동부의 여러 지역에서는 그때까지 없었던 40% 이상의 논에 멥쌀 품종을 농사짓는 마을이 발견되고 있음이 밝혀졌다. 북부 여러 지역에서는 대부분이 20% 이하인 한편, 남부의 여러 지역에서는 80% 이상의 마을이며, 이들 지역에서는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었다. 또한 이 조사에서는 완전히 멥쌀을 농사짓고 있지 않은 마을이 6개 마을, 반대로 완전히 찹쌀을 농사짓고 있지 않는 마을이 29개 마을이었다. 이 시점에서는 찹쌀은 RD6가, 또 멥쌀은 카오드크마리 또는 카오차오마리, 카오홈마리 같은 소수의 품종이 태국 동북의 논을 뒤덮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우량해진 카오드크마리 105(KDML105)는 1950년대 말에 나타난 품종인데, 맛이 좋은 데다 물 부족에도 강하여서 천둥지기가 많은 태국 동북에서 일찍부터 퍼졌다.


동부에 있는 얀톤의 마을에서 한 조사에 의하면, 1970년대 말까지는 찹쌀을 자급용으로 재배하기만 했지만, 1980년대에 찹쌀인 RD6가 화학비료와 함께 도입이 되면서 논벼 생산량은 크게 상승했다. 그 결과 소비량도 웃도는 잉여가 생겼지만, 이들은 저장으로 돌리지 않고 자가소비분을 제하고 대부분을 판매하게 되었다.


이처럼 기술 개량은 많은 찹쌀 재배 마을에서 진행되었는데, 콘깬의 마을에서는 자급의 강화를 선택해 어지간히 남을 때가 아니면 판매는 하지 않는다는 방침이 변하지는 않았다. 이와 같은 차이의 이유는 천둥지기 특유의 재배 입지조건, 즉 강우의 안정성에 차이가 있다. 태국 동북의 동부부터 북부에 걸쳐서는 남부와 서부보다 강우량이 많아 해마다 안정적인 생산을 기대할 수 있다. 얀톤의 조사 마을에서는 1980년대 말에는 찹쌀에 대신하여 멥쌀의 재배가 증가한 결과, 자가의 식용 찹쌀도 부족해져 찹쌀을 구입하는 농가도 나타났다. 이 역전 현상은 쌀의 가격차에 의한다. 나카타 요시아키中田義昭 씨에 의하면, 1990년대 초반 같은 마을에서 나락의 판매가격은 찹쌀이 12킬로그램당 40바트 안팎이었는데 반해, 멥쌀은 50바트 안팎이라 약 10바트 높았다. 어차피 판다면 농가는가격이 높은 멥쌀을 선택한다. 이것에서 비싼 멥쌀을 팔아서 싼 찹쌀을 산다는 경영도 성립할 수 있었다. 이 가격차는 태국 국내에서는 일반적이다. 특히 방콕을 중심으로 하여 많은 인구를 감싸안는 태국 중부는 멥쌀 지대이며, 멥쌀의 수요는 매우 많다. 게다가 세계 최대의 쌀 수출국으로서, 멥쌀에 큰 '흡인력'을 주고 있다. 태국 홈마리 쌀의 상품명은 세계에 울려 퍼지고 있다.


쌀의 안정적 다수확은 화학비료의 투입 증가와도 연결되어 있다. 1990년대 초에는 얀톤의 한 마을의 화학비료 투입량은 콘깬의 마을에 비하여 거의 3배에 달했다. 기존 천둥지기에서는 가뭄에 의하여 투입이 쓸데없어지는 일이 많기에 화학비료의 적극적인 투입을 행하지 않는 일이 많지만, 강우량이 많은 지대에서는 이 우려가 적다.


그와 같은 대량의 비료를 투입하는 자금의 조달에 대해서도, 마을의 입지가 관계되어 있다. 얀톤의 경우 토양의 질에 대한 관계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활발해졌던 카사바 같은 상품작물 재배가 곤란했다. 자연히 농가외수입을 찾아 방콕으로 돈을 벌러 대량으로 이주가 행해졌다. 공장 상점 등이 많은 콘깬과는 달리, 통근할 수 있는 사무소가 적은 얀톤에서는 마을사람의 거의 반이 돈을 벌러 떠나, 가계의 현금 수입의 거의 절반은 돈벌이 이주에 의하여 산출되었다. 이 돈이 화학비료 등의 투자를 촉진한 것이다. 한편 쌀 판매에 의한 수입은 13%로, 돈벌이 이주 이외의 고용노동인 20%보다 적었다. 벼농사 경비는 분명히 판매에 의한 소득을 상회했다. 상품작물로서의 멥쌀은 그런대로 수입을 가져오고는 있지만, 실제로 멥쌀 생산은 돈벌이 이주에 의하여 지탱되어 왔다고 말하는 편이얀톤의 벼농사 구조이다. 


높은 가격의 멥쌀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농가는 많다. 예전부터 멥쌀을 재배하던 지대에서도 화학비료 등의 투입으로 생산은 높아져, 현재 태국 동북 전체에서는 찹쌀의 생산량을 멥쌀이 뛰어넘었다고 이야기된다. 그럼에도 농가 생산지의 가격차는 2배 정도까지 벌어져 있다.


이처럼 원래는 찹쌀 주체의 생산이었던 농촌이 멥쌀 생산으로 전환했지만, 마을 안에서 멥쌀의 용도는 판매와 약간의 면 가공에 제한되어 있다. 찹쌀은 밥쌀 외에 가금류의 사료, 돼지의 사료, 승려에게 시주, 행사 의례, 물물교환과 다방면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농촌 사회에서는 높은 가치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멥쌀 소비자의 증가와 전기밥솥


그런데 찹쌀 지대인 태국 동북에서도 도시의 식당에서는 멥쌀밥이 보통이며, 태국 동북 요리전문점에 가지 않는 한 찹쌀의 지에밥은 나오지 않는다. 농촌 출신자가 도시에 살면 집에서도 멥쌀을 먹게 된다고 한다. 


태국 동북의 전통적인 멥쌀 취사는 이른바 끓인 뒤 물을 버리고 찌는 방법으로 분류되는, 물을 미리 많이 붓고서 밥을 짓고 도중에 뜨거운 물을 버리고 다시 가열하는 것이다. 콘깬에 주재하는 시라이 유우코白井祐子 씨에 의하면, 예전에는 아래와 같은 세 가지 방법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가장 오래된 방식은 구이 요리의 단지(모딘)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 단지는 몸통의 아래쪽이 크고, 주동이가 점점 오므라진 , 주둥이가 넓은 삼각 플라스크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 수순은 다음과 같다. 


  1. 쌀을 씻는다. 일본의 쌀로 밥을 짓듯이, 전날 밤부터 물에 불려 놓는 건 하지 않는다. 쌀로 밥을 짓기 직전에대충 더러운 걸 건지는 정도로 쓱 씻는다.

  2. 씻은 쌀을 모딘에 바로 넣는다. 쌀과 물의 비율은 햅쌀의 경우는 쌀 1에 대해 물이 3. 묵은 쌀의 경우는 쌀의 상태에 따라서 물의 가감을 많이 한다. 쌀과 물을 넣으면 냄비를 불에 올린다.

  3. 가끔씩 뒤섞어서 쌀이 모딘에 들러붙지 않게 한다. 뒤섞으면서 쌀밥이 다 되었는지를 확인한다.

  4. 쌀이 부드러워지면 물을 덜어낸다. 덜어낸 물은 버리지 않고 소금을 쳐서 마신다. 이것은 가장 맛있다.

  5. 물을 따라낸 뒤, 불을 약불로 줄여 다시 15분 정도 끓인다.

  6. 쌀의 맛있는 향기가 나고, 손을 대 쌀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러운 상태가 되고, 쌀의 색이 밥을 짓기 전과 달리 흰색이 되고, 쌀이 터졌는지를 본다. 불에서 내리고 완성된다.


또한 식힌 밥은 그대로 모딘에 남겨 놓기에, 또 불에 올려 다시 데워 먹는다. 또한 누룽지(카오탄)이 생기는데,이것도 또한 맛있다.


이 흙으로 만든 단지를 대신해 알루미늄 냄비를 사용하는 방법이 퍼졌다. 이 방법에서 쌀밥을 짓는 수순은 흙으로 만든 단지와 완전히 똑같은 경우 외에 뜨거운 물을 덜어내지 않고 밥을 짓는 방식도 행해졌다. 그 경우에는 최초에 넣은 물의 양을 적게 한다. 그 수순은 모딘의 경우와 3단계까지는 똑같은데, 물의 양이 줄어들면 불을 약불로 줄인다. 약불로 줄인 뒤에는 모딘과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밥을 짓는다. 이 경우도 누룽지가 생기고, 맛있게먹을 수 있다.


게다가 그뒤 알루미늄 찜기를 사용하는 방법도 행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수순은 다음과 같다.


  1. 쌀을 씻는다. 여기는 모딘과 똑같다.

  2. 찜기의 가장 아래 단에 물을 절반 분량보다 좀 적은 듯하게 넣는다. 씻은 쌀을 작은 차 공기에 몇 개 담아서 찜기의 2단째에 넣는다. 미리 차 공기에 담아서 밥을 지으면, 뒤엎어서 예쁜 모양으로 그릇에 담을 수 있다.

  3. 쌀의 맛있는 향기가 나고, 손을 대 쌀이 부드러운 상태이며, 쌀의 색이 밥을 짓기 전과 달라지고, 쌀이 터졌는지 등의 모습에서 쌀밥이 다 되었는지 보고 불에서 내린다. 


다만 이 밥짓는 법에서는 누룽지도 생기지 않고, 쌀의 미음도 마시지 못하게 된다.


현재 태국 동북의 가정에서 멥쌀로 밥을 짓는 건 대부분이 전기밥솥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찹쌀 지대의 마을에 있는 집에서도 부엌에서 전기밥솥을 보는 일도 많아졌다. 1991년 무렵, 콘깬의 마을에 구면의 집에서 전기밥솥을 보고서 이유를 들으면 자식이 돈을 벌러 가서 있던 태국 중부에서 며느리를 데리고 돌아왔다고, 며느리는익숙한 멥쌀을 먹기 위하여 전기밥솥도 가지고 왔다고 했다. 전기밥솥이 없어도 화덕에 걸었던 냄비로 멥쌀밥을 지어도 괜찮기는 하지만, 스위치를 누르면 알아서 밥을 지어주는 점이 마을에서 읍의 사무소로 통근하는 등으로 바빠진 마을의 청년층에게 선호되는 것이다. 이제는 찹쌀도 가스렌지 위에서 끓이고 찜소쿠리를 놓고서 찌고 있는 시대이다. 땔감을 모으는 수고와 숯불을 피우는 수고도 아까운 것이다. 후쿠이는 읍내에 살게 되면, 찹쌀을 찌는 수고와 연료의 입수가 곤란하기 때문에 멥쌀을 먹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림2는 태국 동북과 똑같은 멥쌀을일상적으로 먹고 있는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의 가전제품 상점의 판매대인데, 실로 다종다양한 밥솥이 팔리고 있다. 게다가 전기 찜기도 늘어서 있다. 점원은 이것으로 지에밥도 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상 기술했듯이, 전통적인 '찰벼재배권'이라 볼 수 있었던 태국 동북에서도 찹쌀을 대신하여 멥쌀의 재배가 진행되고 있다. 그 큰 원동력은 전기밥솥으로 상징되는 듯한 근대적인 소비형태의 확대와 화학비료로 상징되는 듯한 근대적인 재배기술의 보급에 있었다. 거기에다가 쌀의 가격차를 만들어 내고 있는 국내 도시 및 세계의 거대한 멥쌀 수요가 이 움직임을 강하게 추진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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