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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로, 깊어가는 가을

 

 

 

 



추분이 지나면 가을은 점점 짙어져 본색을 드러낸다. 단풍본색이다. 찬이슬이 맺힌다는 한로가 되면 아무리 온난화라 해도 날을 추워지기 마련이다. 아직도 한낮의 날 씨는 조금만 일하면 땀을 흘리게 하여 가을 날씨라 하기에 좀 그러하지만 점점 늘어나는 찬바람의 기세를 보면 역시 가을임에 틀림없다.
한로가 되면 제비와 기러기가 교체를 한다. 추분에 내려가지 못한 제비들은 마지막 채비를 차려 강남 가고 북에서는 기러기가 내려온다. 본격적인 추위가 느껴지는 계 절을 바쁘게 오가는 철새들이 알려준다.
논과 밭에서는 오곡백과를 거두느라 바쁜 철이다. 벼를 거둔 논에서는 미꾸라지를 낚아 추어탕을 해 먹는다. 추어탕의 추鰍자가 가을을 뜻하는 것을 보면 추어탕은 분 명 가을 음식이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 했으니 남자들의 정기를 돋우는 추어탕을 먹어주어야 가을이 가을다운 게 아닌가 싶다. 요즘은 추어탕을 아무 때나 먹으니 추어탕도 계절을 잊고 남자들도 계절을 잊은 것 같다.

어제는 일찍 심은 밭벼를 수확하고 오늘은 논을 만든 회원이 드디어 첫 수확을 했다. 나의 논은 아니지만 내가 구한 종자로 뭉텅이 직파법을 적용한 첫 논이라 나도 적 잖이 흥분이 되는 것 같았다. 첫 수확이라 기분도 좋았겠지만 올해 날씨가 벼에는 아주 좋아 풍년이 들어 더욱 기분이 업up 되었다. 밭벼는 알곡을 세어보니 한 이삭 가지에 150알이 달렸고 논벼 중 녹토미(파란쌀)는 130알이 달렸다. 이 정도면 확실히 잘 된 것으로 보인다.
들깨도 수확했는데, 영농일지를 뒤져보니 6월 29일 모종을 정식했다. 밀 수확한 곳에다 심었는데 밑거름은 하나도 주질 않고 웃거름으로 풀만으로 만든 퇴비를 주었는 데 예상 외로 알곡이 많이 달렸다. 탈곡을 해 봐야 알겠지만 공짜 농사를 진 것 같아 기분도 좋고 왠지 미안하기도 했다. 풀도 딱 한번 매주었다.
밭벼, 콩, 서리태, 팥, 갓끈동부, 수수, 옥수수, 고구마, 오이 등 여름 곡식들은 다 장마가 시작되는 6월 말경에 심었다. 늦게 심어 크질 않아 수량은 적을지 모르나 쓰러질 염려가 없고, 장맛비를 맞기 때문에 발아 속도도 빠르고 초기 생육이 좋아 풀에 대한 경쟁력이 높다. 늦게 심었으니 남들은 벌써 수확했거나 수확할 날을 손꼽 고 있는 것들이 나는 이제야 익어가고 있다. “이러다 된 서리 내렸는데도 안 익는 것은 아닐까”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한로가 되면 이제 밀, 보리를 심어야 한다. 따뜻한 남쪽에서는 좀 더 늦게 심어도 되지만 중부 지방에선 적어도 10월 중순 전에 심는 게 좋다. 온난화 때문에 늦게 심 어도 되지 않을까 싶지만 온난화라는 게 무조건 따뜻해지는 날씨라기보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날씨라고 보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올 초봄, 아직 동장군 세력들이 남 아있을 때인데도 여름 날씨처럼 덥다가 서리가 물러갈 곡우도 지나고 입하도 지났는데 별안간 늦서리가 들이닥쳐 여름 작물들이 냉해를 입기도 했으니 마음을 놓을 일 이 아니다.
밀, 보리는 겨울이 오기 전에 세치 정도는 자라 있어야 추운 겨울을 버틸 수 있다. 어린 싹 상태에서 찬바람을 맞으면 얼어 죽을 수 있다. 아직 베지 않은 벼가 있으면 사이짓기로 벼 사이에 심어도 된다. 매년 이렇게 해오고 있는데 풀이 훨씬 덜 하다. 작년부터 밀을 뭉텅이 직파로 심었는데 그 기세가 아주 좋아 풀을 두 번 밖에 매질 않았다. 벼 사이에 괭이로 골을 낸 다음 밀을 30알정도 씩 뭉텅이 넣은 다음 흙이 아닌 퇴비로 피복을 했다.
사이짓기로 파종하는 것이라 밑거름 넣기도 힘들고, 흙으로 피복한 다음 또 거름을 넣어주려니 이중 일인 것 같아 꾀를 낸다고 흙이 아닌 퇴비를 덮어준 것이다. 당연 히 완숙된 퇴비였다. 한 구멍에 한 주먹씩 넣어주었다. 그것으로 밑거름은 끝이다. 봄에 춘분 즈음에서 오줌으로 1차 웃거름 주고 곡우 지나 2차 오줌 웃거름 준 게 다 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밀 뿌리에 서릿발이 서질 않은 것이었다. 보리밟기를 해주지 않아도 된 것이다. 겨우내 흙이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뿌리 밑에서 서릿발이 서 흙 이 들어 올려지는데 따뜻한 봄기운에 서릿발이 녹아 없어지면 빈 공간이 되어 뿌리가 말라 죽는다. 그래서 밟기를 꼭 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서릿발이 안 섰으니 보리 밟기 일이 없어진 것이다.
추측컨대 지난 겨울엔 눈도, 비도 별로 오질 않아 가문 겨울이어서 흙에 물기가 별로 없으니 서릿발도 당연히 서질 않았을 것이거나, 더불어 흙 대신 퇴비로 덮은 바람 에 보온이 잘 되어 서릿발이 서지 않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한로는 또한 씨앗 갈무리하는 철이다. 벼를 비롯한 곡식들을 수확해 갈무리하고, 고추, 오이, 호박 등 여름 과채류들도 씨앗을 받고 고구마도 캐어서 먹을 것은 먹고 씨 할 것도 잘 갈무리해두어야 한다.
벼를 씨로 쓸 것은 조금 일찍 거둔다. 아직 줄기에 푸른 기가 있을 때, 알곡이 덜 영글었다 싶을 때 베었다가 거꾸로 매달아 놓는다. 잘 말랐다 싶으면 탈곡을 하는데 도리깨나 탈곡기 같이 알곡을 강타하는 것들로 탈곡하지 말고 홀태 같은 것으로 훑어주어야 좋다. 콤바인 같은 기계도 당연히 좋지 않다. 씨앗이 타격을 받으면 병에도 약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씨를 건강하게 받아야 자랄 때도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다. 양이 작으면 손으로 훑어 주어도 된다.
조, 수수, 옥수수 같이 양이 적은 것은 이삭 채 거두어 잘 말린 다음 처마 밑이나 벽에 걸어두었다가 이듬해 파종할 무렵 꺼내어 털어서 씨로 쓰면 된다.
고구마는 종자로 쓸 것은 상강 전에 캐는 게 좋다. 서리를 맞으면 잘 썩어서 종자로 쓸 수가 없다. 물론 먹는 데에는 이상이 없지만 보관이 오래가질 않으니 먹기 위한 것이라도 상강 전에 캘수록 좋다.
오이, 가지, 호박의 채종은 좋은 열매를 찍어두었다가 무를 때까지 놔둔다. 물러 터져도 괜찮지만 열매가 터지면 씨앗 줍기도 힘드니 그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열매를 손으로 만져보아 물렁물렁할 때면 된다. 과육의 영양이 씨앗으로 몰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속을 파고 씨앗부분을 훑어서 물에 담그면 씨만 물에 가라앉는다. 쭉정 이 씨와 찌꺼기들은 가벼워 물에 뜨므로 조리로 일러 건져낸다. 가라앉은 씨를 걸러내 말리면 된다.
오이씨는 젤 형태로 껍질이 붙어 있는데 손으로 떼기가 아주 힘들다. 물에 하루 정도 담가두면 절로 벗겨지므로 힘들여 애 쓸 필요가 없다.
고추는 씨앗을 채종하기가 이렇게 복잡하지 않다. 좋은 포기와 열매를 골라 배를 가르고 씨를 꺼낸 다음 햇빛에 잘 말리면 된다. 더 좋은 방법은 고추와 함께 태양초로 말린 다음 채취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영양이 씨에 몰리기 때문이다. 말리다가 고추와 함께 곰팡이가 피거나 병에 걸릴 수가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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