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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 가을 문턱을 가로막고 있는 마지막 더위

 

 

요즘 불볕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장마가 끝나자마자 가을이 곧 들어 닥칠까봐 뙤약볕이 마지막 기세를 뽐내는 것 같다. 하지만 자연의 변화는 거스를 수가 없는가 보다. 가을이 불볕더위 몰래 어느새 우리 주변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아니, 아직 말복도 남아있는데 어디에 가을이 들어와 있다는 말인가, 황당한 소리 하고 있네....

 

그제는 하루 종일 땀으로 온몸을 적셔가며 풀매고 집에 들어왔는데 샤워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밭에서 온종일 여름 기운과 싸우고 왔더니 어느새 저녁이 되자 집에는 가을 손님이 들어앉아 있는 꼴이다. 그렇지만 가을이 저녁에만 온 것은 아니다. 너무 뜨거워 원두막에 잠깐 피하고 있으면 거기에도 가을이 앉아 있다. 한낮의 뜨거운 뙤약볕 아래 풀 매고 있 중에도 잠깐잠깐 불어오는 바람에 가을이 스쳐지나간다. 하긴 밤에 귀뚜라미가 귀뚤귀뚤 울고 있는 걸 보면 가을이 오긴 분명히 온 것 같다.

 

게으른 농부는 어쩔 수 없는가보다. 늘상 하던대로 9시나 10시쯤 밭에 나가 일을 하던 버릇대로 뜨거운 한여름에도 그 시간에 나가 풀을 맸더니 난생 처음 복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워낙 감기를 모르고 산 사람인지라 한여름 감기에 자못 당황스럽고 황당했다. 이틀을 그렇게 일하고 다음날 서울 나가 오랜만에 에어컨 바람을 온종일 쐬었더니 곧바로 불청객이 찾아온 것이다. 콧물이 질질 나고 기운은 온데간데 없고 머리는 어질어질한데 더위는 탈진 상태로 몰고 갔다. 약이라고는 참으로 싫어하는 성미라, 속으로 이게 더위 먹어 생긴 감기이니 감기를 다스릴 게 아니라 더위를 다스려야 겠다 생각하고 밭에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라있는 익모초를 한 바구니 따다가 믹서에 갈아먹었다. 쓴 것을 썩 기피하질 않았는데 “이야!~, 세상에 이렇게 쓴 것이 있다니.” 온몸을 부르르 떨며 꿀꺽꿀꺽 삼켜야 하는 게 익모초다. 그렇게 두 컵 먹고 복감기를 내 쫓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먼 북녘에서 찾아온 가을 한 자락을 맡아보니 반갑지 않을 수가 없다. 매번 입(立)자 들어가는 절기를 겪을 때마다 옛조상들의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에 탄복하곤 하지만 아마 그 중에서도 입추가 제일 역동적이고 반가운 절기인 것 같다. 반가운 존재로 치면 봄을 가져오는 입춘이 제일이지만 역동성으로 치자면 가을이 들어섰는데 말복이 기다리고 있는 입추가 제일이다.

  

입추가 되면 햇빛은 따갑지만 장마철 무더위처럼 후텁지근하지는 않다. 가을의 서늘한 기운이 곳곳에 숨어 있다. 아직 물러나지 않은 여름 기운 때문이다. 그래서 말복이 지나면 서서히 가을의 찬 기운이 온누리에 퍼져간다.

 

하지만 입추 이후 따가운 가을 햇빛이 곡식을 익게 한다. 장마철 다 자라지 못한 곡식과 벼는 마지막 힘을 내어 마저 자라다 때가 되면 밑바닥에서 이삭을 밀어 올린다. 말하자면 몸체 성장을 끝내고 생식 성장기로 접어드는 것이다. 사람으로 치면 사춘기에 접어드는 셈이다. 그래서 입추 이후에는 비가 그치고 햇빛이 쨍쨍할수록 좋지만 약간의 비가 오는 것도 좋다. 못 다한 성장을 마치기 위해서다. 그리고 처서가 들면 몸 속에 숨겨둔 이삭이 밖으로 드러난다. 바야흐로 이삭이 패는 것이다.

 

이 시기에 꼭 마지막 풀매기를 해주어야 한다. 장마 전에 잡아둔 풀이 장마 기간 동안 또 자라나 있다. 이 때 풀을 잡아주지 못하면 그동안 고생이 도로 나무아미타불이 된다. 온 힘을 다해 이삭을 패 올리기 때문에 흙 속의 기운이 충분해야 한다. 풀만 매지 말고 마지막 이삭 거름을 주면 좋다.

 

풀은 소만(5월 하순 경) 때부터 본격적으로 올라오기 때문에 소만 망종, 곧 장마 전에 잡아주어야 한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장마 전 잡지 못한 풀은 장마 기간 잠깐 비 그친 틈을 이용해서라도 잡아주어야 한다. 그리고 장마 전에 잡았더라도 장마기간 동안 또 풀이 올라오기 때문에 입추 근방에서 또 잡아주어야 한다. 이삭과 열매가 맺으려면 흙 속의 모든 기운을 빨아들여야 하므로 풀만 매주지 말고 웃거름도 줄수록 좋다.

  

입추 때 해야 할 중요한 농작업은 역시 김장 농사 준비다. 우선 밭부터 준비하고 거름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모종을 키울 준비도 해야 한다. 나는 이번에 배추를 모종 반 직파 반 할 계획이다. 앞으로 가급적 모든 걸 직파 재배로 전환할 계획이다. 과도기로 이번만 모종과 직파를 병행하기로 했다.

 

장마가 지나니 고추마다 탄저병이 극성이다. 주말농사 회원이 5평에 몇 포기 심은 고추에도 탄저병이 들이닥쳤다.

 

그런데 직파한 내 고추는 아직 멀쩡하다. 장마 때 시들음병이 1/3 쯤 왔는데 어느새 말짱하다. 탄저는 커녕 역병도 없다. 지주도 박지 않고 끈도 띄우지 않았는데 폭우에 반 채 안되게 쓰러졌다. 반 이상은 멀쩡하지 버티어 서 있다. 참으로 신통방통하다. 하지만 수확량은 예상대로 적다. 많이 달면 쓰러질까봐 스스로 양을 조절하는 것 같다. 그래도 고추 하나하나는 참으로 실하게 생겼다. 곁순도 별로 나질 않아 순지르기도 하지 않았다. 신문으로 피복하고 구멍 뚫어 10알씩 파종한 다음 발아하지 않은 곳에는 따로 모종을 내서 빵구를 떼웠다. 하지만 아주 어린 놈을 뿌리 다치지 않게 옮겨 심었기 때문에 원뿌리가 그대로 살아있다. 그놈들도 뽑아 보면 직근이 튼실하게 힘을 내고 있다.

 

그러니까 직파한 이후 한 일이라고는 빵구 떼우고 풀 두 번 매주고 고랑 피복한 것밖에 없다. 지주나 끈은커녕 매년 해주던 5~6번의 목초액 살포, 곁순 제거는 전혀 해주질 않았다. 지금 이글 쓰고 나면 마지막 풀매기와 쓰러진 놈 세우는 작업을 하려고 한다.

 

들깨와 고구마 빼고는 모두 다 직파를 했는데 매우 만족스럽다. 늦게 심은 탓도 있지만 성장 속도가 좀 느리긴 하다. 그러나 이도 얼마 안있어 따라 잡을 것이다. 그래서 배추도 직파를 하여 튼튼하게 키워서 벌레에 스스로 버티게 해 볼 요량이다. 배추도 모종을 옮겨 심고 나면 꼭 3~5번의 목초액을 주어야 했다. 직파를 하면 모종 몸살도 않고, 또 밀식해서 솎아 뽑아 먹는 재미도 있다.

  

입추 때 찾아오는 명절은 음력 7월 7석과 7월 15일의 백중절이다. 칠월칠석이면 비가 오는 경우가 많은데 앞에서 얘기한 입추 때 잠깐 오는 비일수록 좋다. 입추인 오늘이 칠월칠석인데 비올 기세는 전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비보다는 역시 맑은 날일수록 좋다.

 

입추 때 맑으면 풍년이 들고, 비가 조금만 오면 길하고 많이 오면 흉년 든다고 했다. 맑으면 역시 벼를 비롯한 곡식들이 잘 자라고 익으니 당연히 풍년이 들고 약간 오면 무더운 여름 기운을 적셔주어 덜 자란 놈들에게도 좋지만 김장 농사 준비에도 좋고 많이 오면 벼가 익질 못하니 좋지 않을 수밖에 없다.

 

백중절은 농부에게 매우 중요한 명절이다. 단오와 함께 마을 축제로 단오가 벼농사 시작을 알리는 명절이라면 백중은 벼농사 마무리를 알리는 명절이다. 백중의 다른 이름으로는 호미씻이, 머슴생일, 등이 있는데 이는 마지막 논 피사리를 끝내고 힘든 일 마쳤으니 호미는 씻어 걸어둔다, 머슴이 힘든 일 끝냈으니 격려차 잔치 상을 차려준다 해서 붙여진 것이다.

 

벼는 말복 즈음에서 마지막 피사리를 끝낸다. 그리고 처서가 지나면 이삭이 팬다. 대개 백중은 말 복 이후 처서 전에 오는데 이때가 되면 힘든 논농사는 마무리 하고 밭에서는 먹을 것들이 많이 나올 철이다. 여름 과채류들인 고추, 오이, 호박, 수박, 참외, 그리고 일찍 심은 옥수수 등 먹을 게 많으니 이래저래 잔치 벌이기도 딱 맞는 철이다.

 

하여튼 대표적인 마을 잔치인 단오와 백중은 전형적인 벼농사 중심의 농경 공동체 축제이며 농경 문화의 꽃이라 할만 한데 기계 농사가 보편화되고 그에 따라 두레 문화가 퇴색하면서 아름다운 우리의 전통 문화가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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