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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강, 마지막 농번기 가을의 끝

 

 

 



서리가 내리는 상강霜降이다. 이때까지는 모든 여름 곡식들 수확을 끝내야 한다. 서리를 맞으면 여름 곡식들이 타격을 입어 맛도 덜하고 씨앗의 힘도 약해진다. 다만 서리태라는 콩은 서리를 맞은 후에 수확한다 해서 이름이 그렇게 붙었다.
수확도 해야 하지만 파종해야 할 것도 있다. 밀, 보리, 마늘, 양파가 그것이다. 수확할 것들도 때를 놓치면 안되지만 파종해야 할 것들도 때를 놓치면 안되니 의외로 바쁜 농번기다. 기나긴 겨울 농한기로 접어든다고 마음 놓았다가는 큰 코 다치기 십상이다.
서리도 무서리가 있고 된서리가 있는데 된서리를 맞아야 올해 농사가 파장이 된다. 지표면에서 수증기가 올라가다 찬 공기를 만나 결빙되는 게 서리인데 이 서리는 우리 농사의 성격을 크게 좌우하는 기점이다. 그러니까 서리의 시작과 끝을 잘 파악하는 것은 농사의 성패를 가늠하는 절대적 기준이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무상일수無霜日數라 하여 서리가 내리지 않는 기간이 얼마나 되는가는 그 지역 농사의 성격을 근본짓는 일이 된다.
가령 서리가 늦게까지 내리고 일찍 찾아오는 강원도 산골이나 북쪽 산악 지방에선 벼농사가 힘들다. 반면 한여름 날씨가 서늘해 고랭지채소 농사는 잘 된다. 서리가 일찍 가시고 늦게 찾아오는 남쪽 들녘에선 벼농사가 잘되는데 반해 한여름 채소 농사는 안된다. 반면 겨울 날씨가 따뜻해 겨울 채소 농사는 잘 된다.
앞의 소서, 대서 글에서 우리 농사의 성격을 근본짓는 1순위를 장마라 했다면 2순위는 바로 서리, 곧 무상일수다. 3순위는 춥고 긴 영하의 겨울 날씨다. 이에 대해선 소한, 대한 때 얘기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날씨와 기후가 변하고 있다. 본 장마 때는 비가 적어지고 장마 이후에 비가 많이 내리는 식으로 바뀌어 기상청에서는 장마철을 따로 예보하지 않기로 했다. 서리도 변덕이 심해져 올해 같은 경우는 봄이 다 되었는데도 서리가 내리더니 가을이 되고 상강이 되도 아직 서리 내릴 기미가 없어 보인다. 다행히 여름 같던 가을 날씨가 상강 때 비가 내리더니 가을 맛이 나게 추워지고 하늘도 제법 천고마비(天高馬肥)라는 말답게 높고 맑아졌다.
된서리는 내리지 않았지만 만물의 생명들은 상강을 알아채고 너나 없이 겨울 준비에 들어간다. 상강이 되면 겨울 잠을 자는 벌레들도 마지막 동면 채비를 서두르고 숲의 나무들도 단풍의 화려한 끝을 장식하기에 바쁘다.
코딱지만한 땅에서 농사짓는답시고 나는 정신없이 마지막 농번기에 허둥지둥 대고 있는데 뉴스에선 단풍 구경하는 모습들을 부산스럽게 내보내는 걸 보니 속으로 “참, 놀고들 있네!” 한다. 누가 진짜 노는 건지는 따져봐야겠지만.......

열흘 전에 한로 지나 10월 중순에 밀을 심었다. 작년엔 가을에 비가 제법 내려 배추고 무고 할 것 없이 무럭무럭했고 밀도 파종하고서 금방 싹이 올라왔는데 올해는 가을 가뭄이 너무 심해 배추고 무고 할 것 없이 비실비실한데다 밀을 파종하고서도 걱정만 앞섰다. 그런데 파종하고 일주일이 지나니 뾰족뾰족 싹들이 삐져나온 것이 아닌가? 역시 싹이 터져서 농부에게 주는 기쁨은 참으로 대단하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이야!” 하는 감탄이 절로 났다. 마누라고 누구고 간에 전화해서 막 자랑하고픈 마음이 동한다. 요즘 말로 업(up?) 된 마음을 누르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포스(force?)는 발아력이 아닐까 싶었다.
괭이로 골을 내고 밀씨를 이른바 “뭉텅이 직파법”으로 20~30알씩 뭉쳐서 넣고는 잘 삭은 풀거름으로 흙 대신 덮어주었다. 목발 짚으며 골내는 괭이질이나 일일이 고랑 무너지지 않게 피해가며 씨를 넣는 일은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니다. 단단히 마음먹고는 즐겁게 일을 해나가는데 올 가을 새로 들어오신 어르신 회원 한 분이 얼른 일을 거든다. 농사는 처음인데 뭐든지 일손이 척척 붙는 분이다. 늘 이럴 때마다 떠오르는 게 어릴 때 읽은 “톰 소여의 모험”이다. 힘든 일을 재미있다고 자랑하며 마지못해 친구에게 힘든 일을 떠맡기는 톰 소여라는 녀석이 꼭 나 같아서다.
풀거름으로 씨를 덮어주는 것은 피복용이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밑거름도 끝이다. 풀거름이라 질소질을 보강하기 위해 오줌과 쌀뜨물을 부어준 거름이었다. 아마 그래도 질소질은 모자랄 것으로 보고 내년 봄에 두세번 오줌 웃거름을 잔뜩 뿌려줄 계획이다. 아무튼 흙 대신 풀거름을 덮어주었더니 이슬이 더 잘 맺히고 또 건조도 막아주어 발아가 제대로 되었을 것 같다. 아직 이슬이 마르지 않은 아침에 나가보니 참나무 가지가 드리워진 뒷간 쪽은 이슬이 적게 내려 확실히 발아가 덜 되었다.
밭벼는 수확해보니 일찍 심은 줄뿌림 벼보다 한 달 늦게 심고 양도 적게 심은 뭉텅이 직파벼가 수확량은 두 배 가까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수확하기 전 이 뭉텅이 직파벼를 보더니 “꼭 논벼처럼 이삭이 달렸네” 한다. 그러고 보니 진짜 논벼 처럼 무성하게 이삭들을 달고 있다. 잘된 이삭 하나를 골라 이삭수를 세어보니 151알이 달렸다. 논벼도 보통 150알이 넘으면 잘 된 것이라 하는데 밭벼가 이 정도 달렸으면 잘 되기는 잘 된 것 같다. 내년엔 무조건 뭉텅이 직파법으로 심을 의지를 다져본다. 다만 알 수를 10~20알 쯤으로 줄이려 한다. 30~50알쯤 넣은 것은 잘 되기는 했지만 너무 베어서 서로 치인 것 같아서다.
들깨는 작년에 비해 반 정도밖에 안 심었는데 수확량은 크게 차이가 없었다. 벼를 심다가 자투리 땅이 남아 아무 생각 없이 들깨 모종을 꽂은 것인데 꽂고 나서 보니 영 면적이 작아 보여 저걸 갖고 뭐해 먹나 했다. 나는 왜 이렇게 개념이 없나 하고서 방치하고 있다가 생각해 보니 밑거름도 넣지 않았는데 어느새 풀에 치이고 있어 미안한 마음으로 얼른 풀을 매고 작년에 풀로만 만든 풀거름을 웃거름 주듯이 주었다. 들깨에게 해 준 것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리고 자라는 것을 보니 역시 거름이 적어 덜 자라는 것 같은데 꽃 달리고 이삭 달리는 것을 보니 자란 것에 비해 꽤 달린 느낌이다. 위기에 처하면 새끼를 많이 단다더니 제 놈 먹을 게 모자라서 새끼들을 많이 단 것이 아닌가 싶다.
올해는 고추고 배추고 간에 모종 농사를 실패만 거듭했는데 마지막 양파 모종 농사도 꽝 났다. 벌써 볼펜 굵기만 해져야 하는 양파가 아직도 젓가락 굵기만도 못했다. 만든 상토에 석회를 넣지 않아 강산성인 피트모스의 피해를 본 데다 씨도 한 구멍에 여러 알을 밀식하는 바람에 그랬던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중간에 또 깊게 생각지 않고 오줌 웃거름을 주었더니 그게 더 화를 키웠다. 두 번이나 주고 나서 이끼가 끼는 것을 보고는 정신차리고 숯가루와 목초액을 뿌려주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정식할 때는 가까워 오는데 반은 죽은 이제 와서 솎아주자니 아깝고 임시로 가식하자니 괜히 옮겨심느라 타격만 받을 것 같아 고민하는 중에 우리 농장에서 제일 상농부인 회원이 왔기에 고민을 털어놓았다.
“지금 그냥 정식하면 어떨까요? 가식하면 오히려 더 위험할테고 아직 날이 따뜻하니 서리 오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자라지 않겠어요?” 한다.
“이야, 그거 일리 있네요.” 하고는 바로 정식에 들어갔다. 괜히 기분이 그래선지 모르겠지만 어제 그제 비를 맞고는 양파 모종들이 힘을 받은 것 같아 나도 덩달아 힘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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