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로, 제비 강남 가는 가을
처서도 지나고 백로가 왔는데도 모기도 그대로 있고 풀도 풀 죽을 기세가 뚜렷하지 않다. 확실히 온난화 징후가 곳곳에 뚜렷한 것 같다. 백로인 오늘, 이 글 쓰고 있는 지금 밤 10시 30분 집 실내 온도가 26도나 된다. 당연히 모기향도 피어 놓고 있다. 밭에서 일하고 있는데 뜨거운 여름날 그대로다. 한낮 온도가 30도까지 올라갔다. 물론 온도가 여름 같다고 하나 전체적인 기운은 분명 가을로 접어든 것은 분명하다.
아무튼 올해 가을 배추 농사는 시작부터 고난의 행군이다. 씨도 잘 못 산데다 요령 피워 만든 상토에도 문제가 심각했다. 몇 년 전 당한 적이 있어 어느 종묘 씨앗은 사지 말아야지 한 결심도 세월 따라 희미해진 상태에서 지나던 길에 종묘상이 있기에 들어간 곳이 하필 그 종묘상이었다. 설마 또 그럴 리가 있을까 하고 샀는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설마대로 발아가 반도 되지 않았다. 혹시 흙에 문제가 있을지 몰라 단골로 가던 종묘상에 가서 조금 비싼 씨앗을 사다 또 심었다. 역시 씨앗의 문제였다. 발아가 거의 100% 난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발아는 잘 되었는데 이번엔 자라질 않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흙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자연 흙 채취해오기 힘들어 올 봄 얻어온 경량토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피트모스라는 이끼가 탄화된 수입 가짜 흙이 강산성이라더니 그게 문제인가보다 하고 석회를 섞어 다시 씨앗을 넣었는데 별 차이가 없다.
나와 몇몇 사람만이 잘 자란 것을 골라 겨우 모종을 낼 수 있었지만 나머지 회원들에게는 결국 시장 가서 모종을 사다 주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모종을 옮겨 심었는데 이제는 벌레들이 마구 달려든다. 거세미에서부터 톡톡이 청벌레 귀뚜라미 등 예년보다 더 다양해졌다. 특히 거세미는 봄 여름에 극성인데 가을까지 극성인 것을 보면 확실히 온난화 영향인 것 같다.
회원들 밭을 곰곰이 보니, 게으름 피우느라 풀밭을 매지 않고 부직포로 덮은 밭이 피해가 덜하다. 부직포가 방어막 역할을 한 것이다. 주변 밭이 잡초로 뒤덮인 곳은 피해가 크다. 자료를 뒤져보니 주변 풀밭에 거세미 나방이 새끼를 낳아 그리로 몰려들기 때문이란다. 배추는 가뭄을 잘 타는지라 마르지 말라고 풀 깔기를 회원들에게 많이 권하는데 이번엔 역효과가 나는 것 같다. 거세미가 알을 까놓은 풀을 거두어 깐 셈이 되어 버렸다. 풀을 쉽게 죽이기 위해 부직포를 덮은 밭은 풀도 쉽게 죽인데다 거세미 피해도 예방을 했으니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었다. 다만 부직포로 덮었어도 바로 옆의 밭이 풀밭이라면 효과가 별로 없다. 그 밭에 알을 깐 거세미가 잔뜩 달려들기 때문이다.
백로가 되면 제비가 강남 갈 채비를 서두른다. 그런데 요즘은 제비가 없다. 강남 간 제비가 돌아오질 않으니 강남으로 떠날 제비도 없다. 이래저래 강남은 제비한테도 좋은 세상인가보다. 올 여름 제주도에 토종 찾으러 방문했다가 실컷 제비를 만나고 왔다. 그렇게 많은 제비를 어릴 때 보고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참으로 제비란 놈은 미끈하게 잘도 생겼다는 감탄을 자아낼 만 했다. 물 찬 제비 같다는 등, 제비족이라는 등의 표현들이 다 제비가 잘 생겼기 때문에 나온 말일 게다.
제비가 강남 간다는 것은 이제 날씨가 본격적으로 가을로 접어들고 말 그대로 하얀 이슬(白露)이 내려 추운 날씨로 바뀌어 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로인 오늘 아침, 아직 하얀 이슬이 내릴 흔적조차 보이질 않았다. 아직 여름 같은 게 참 날씨 변덕 심하다 싶었다.
그래도 자연의 이치는 여전하다. 가을의 햇볕 받아 벼 이삭도 잘 익고 있고 밭 열매 채소들도 열매를 잘 달고 있다. 기온도 중요하지만 역시 날씨의 관건은 해의 길이(長日, 短日)에 달린 것 같다.
백로가 되면 이제 농사도 점차 한가해진다. 백중에 호미를 씻어 남정네들이 휴식을 취한다면 여인네들은 백로에 호미를 씻어 오랜만에 친정 나들이를 한다. 휴가를 가는 것이다.
올해는 추석이 빨리 찾아온다. 보통 추분 근방에 오는 적이 많은데 올해는 백로와 추분 중간에 추석이 있다.
추석秋夕은 순 우리말로 한가위다. 추석보다는 한가위라는 말이 더 정겹다. 명절 중에 순 토종 명절은 유일하게 추석뿐이다. 그러니 더더욱 한가위라는 토종 우리말을 썼으면 한다. 한가위는 말 그대로 하면 한 가운데라는 뜻이다. 대개 보름이 가운데에 있으니 제일 큰 보름달이 뜨는 한가위야 말로 제일 한 가운데가 되는 것이다.
나는 한가위만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하는 게 있었다. 일종의 추수 감사절인데 아직 본격적인 추수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추수 감사절이 11월 중순 쯤 일요일인 것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너무도 많이 난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의 추수 감사절이 더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때쯤 되면 대충 다 수확하고 한해 농사를 마무리 할 때이기 때문이다.
한가위 때 차례 상에는 풋 곡식이 올라간다. 덜 익은 벼 중에서도 잘 된 놈을 골라 손으로 훑어 차례 상에 올리고 송편도 만든다. 콩도 풋 익은 것을 골라 송편 속을 한다. 그러니까 뭐든지 풋것을 갖고 상을 차린다. 왜 그럴까? 별로 자료를 찾아보지 않아 확실한 것은 잘 모르겠다. 다만 농사를 지으며 느낀 추측은 있다. 나는 이 추측을 거의 확신하지만 말이다.
우선 풋것으로 조상님께 바치는 것은 제일 좋은 것을 바치는 것이다. 곡식으로 약을 쓰려면 풋것으로 해야 한다. 풋것의 기운이 맑고 힘이 좋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풋것이 좋다는 뜻이다. 속된 말로 비유를 들면 영계인 셈이다. 조상님께 폐계를 바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렇지만 그 풋것을 실제로 먹는 것은 죽은 조상 귀신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이다. 어떻게 보면 조상 핑계대고 오랜만에 몸보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참 지혜롭기도 하다. 사실 명절이나 제사는 오랜만에 가족들이 몸보신하는 날이다. 그리고 자주 보지 못하는 일가친척도 불러들여 함께 나눠 먹고 서로 간에 가족 공동체를 확인하는 날이다. 더불어 마을 축제도 열면서 마을 공동체를 더욱 돈독히 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의 명절이나 제사는 껍데기만 남은 것 같다. 그래도 끈질기게 그 문화가 유지되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 대단하다. 나는 이왕 하는 것이면 좋은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고쳐갔으면 생각해 봤다. 요즘이야 맛난 것도 많고 영양도 넘치는 게 차라리 문제이니 힘들게 제사상 차리지 말고 서로 음식을 해 온다든가, 그것도 되도록 간단하게 해서, 남자들도 설거지 하는 등, 오랜만에 가족들이 만나 서로 배려하고 아끼는 가족 공동체를 돈독히 하는 자리가 되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다만 이런 자리를 통해 우리네 전통문화를 확인하고 공부하는 자리가 되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가령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 중에 제사는 조상님이 돌아가신 전날 지내는 것이라는 오해이다. 나도 얼마 전까지 그렇게 알고 있었다. 간지력을 공부하기 전에는......
원래 하루의 시작은 자시(子時)다. 밤 11시에서 새벽 1시까지를 이른다. 자정(子正)이라 함은 그래서 밤 12시가 되는 것이다. 낮 12시를 정오(正午)라 하는 것도 오시인 낮 11시에서 1시의 가운데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돌아가신 날 자시가 되면 조상이 오신다고 하여 자시에 지내는 것인데 그게 밤 11시가 되다보니 전날 지낸다는 오해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통행금지가 있던 옛날엔 밤 11시에 제사를 지내면 집에 돌아가기가 힘들어 시간을 더 당겨 지내게 되어 결국 제사는 전날 지낸다는 완전히 잘못된 착각이 생긴 것이다. 이미 조상님이 왔을 때는 제사상도 물려지고 후손들은 잠만 자고 있을테니 조상님이 참으로 난감한 꼴이 아닐 수 없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풋것을 거둬 감사절을 지내는 결정적인 이유로 생각되는 것은 풋것으로 종자를 거둔다는 사실이다. 다 말라버린 곡식으로는 당연히 종자로 쓸 수 없을 것이며 적당히 익은 것도 종자로 쓰기에는 최선이 아니다. 후숙(後熟)시키는 과정에 타격을 입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아직 덜 익었지만 잘 생긴 포기를 거둬 곡식은 아직 털지 말고 거꾸로 매달아 놓으면 푸른 포기의 남은 영양이 씨앗으로 몰리면서 씨앗의 후숙이 고르게 잘 될 수 있다.
그러니까 보약이 되는 풋것을 거둬 조상과 인간도 함께 먹고 더불어 후손도 먹을 수 있도록 종자로 쓰는 것이다. 그리고 보름달은 수확을 상징하고 가장 큰 보름달인 한가위야 말로 최고의 수확철이니 더욱 기운 찬 종자를 거둘 수 있는 철인 것이다.
글 : 안철환(귀농본부 홍보출판위원장, 도시농업 위원, 안산 바람들이 농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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