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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서, 끝없는 고온다습의 시작



이제 본격적인 여름철이다. 장마와 무더위가 함께 찾아오는 철이다. 요즘처럼 마른 장마라 해도 날은 습하고 덥다. 일도 많고 날은 무더워 건강을 최대한 주의할 때다. 다행스러운 것은 보리 고개를 지나 이제는 먹을거리가 풍부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망종, 하지 때 수확한 밀, 보리도 창고에 가득하고 밭에서는 늦봄, 초여름에 심은 과일 채소들이 먹을 만큼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밀, 보리는 겨울을 나는 작물로 대표적인 음(陰)한 음식들이다. 뜨거운 양의 계절인 여름에 먹으면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 양식들이 소서 때가 되면 맛이 아주 좋을 때다. 게다가 밭에서 나는 각종 채소 과일들이 농부의 땀을 식혀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때는 결코 놀고먹는 때가 아니다. 어떻게 보면 년 중 제일 바쁜 농번기다. 하지 무렵에 모를 낸 논에는 본격적으로 피가 자라 피살이를 해야 하고, 밭에도 무섭게 풀이 자라기 때문에 한눈 팔 틈이 없다. 하지 무렵 벼를 모내고 나서 바로 심는 콩, 팥, 조, 수수 등 곡식들은 소서 때가 되면 풀을 매주어야 한다.

6월 초 아직 거두지 않은 밀밭 사이에 서리태를 심었다. 이 씨앗은 경북 청송에 가서 구해온 이른바 귀족서리태라는 콩이다. 여느 서리태와 달리 쭉정이도 적고 메주콩처럼 단정하게 자라고 감자 그루작(후작後作)으로 심을 수 있는 콩이다. 맛도 비린내가 적어 뛰어난 편이다. 그런데 작년에 똑 같이 밀 사이에 심은 메주콩에 비해 새 피해가 컸다. 반은 넘게 쪼아 먹었다. 흙 속에 들어간 콩 씨앗을 먹는 게 아니라 싹이 난 떡잎을 쪼아 먹는다. 그러니까 비 예보를 잘 들었다가 비 오기 직전에 심어 빨리 속잎까지 발아되도록 해야 한다.

제일 좋은 것은 장마 때 심는 것이다. 그루작으로 잘 되는 것이면 더 좋다. 경험적으로 볼 때 비를 한번 맞는 것 갖고는 부족하다. 파종하고 바로 비 맞고 3~5일 지나 한 번 더 비를 맞아야 좋다. 이번엔 특히 밭벼와 옥수수, 동부의 파종이 정확히 그 일정에 들어맞았다. 이 녀석들을 파종하고는 바로 비가 오더니 한 3일 후쯤 또 비를 맞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전혀 싹을 내밀지 않았는데 오후의 비를 맞고나서 다음날 가보니 일제히 고개를 빠끔히 내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루작으로 메주콩을 요번엔 밀 수확하고 나서 그 자리에 심었다. 사이짓기를 못한 것이다. 혹시나 또 새들이 먹어버릴까 우려되어 내 나름대로 작전 짜기를 오줌에 버무린 톱밥으로 복토를 한 것이다. 살짝 흙으로 덮고 그 위로 한주먹 톱밥을 덮고 또 그 위에 풀 한줌으로 위장을 했다. 말로 하니 복잡할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다. 우선 딸깍이(귀농1호라는 풀 제초기)로 풀을 다 매고 나서 한 번에 괭이로 심을 구멍을 내고 또 한 번에 콩 씨앗을 구멍마다 세알씩 넣었다. 그리고 오줌에 버무린 톱밥을 양동이에 담아 들고 다니면서 목발로 흙을 살짝 덮어주고는 그 위에다 톱밥을 덮고 또 괭이로 구멍 팔 때 사이사이에 준비해둔 마른 풀을 목발로 슬쩍 덮어준다. 사실 딸깍이로 풀 매는 데 시간이 제일 많이 걸렸지 구멍파고 파종하는 것은 그에 비하면 순식간에 해 치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파종했더니 다음날 비가 장맛비가 내렸고 4일 뒤에 또 비가 내렸다. 속성 발아 전략이 적중한 것이다. 파종 후 일주일 뒤에 가보니 빠른 것은 속잎까지 발아가 되고 있었다. 새 피해가 없지는 않았다. 다행히 서리태에 비해서는 훨씬 덜했는데 대략 20%는 떡잎을 잘라먹은 것 같았다. 잠깐 옆밭에서 들깨 모종을 심고 있는데 까치 한 마리가 콩밭을 서성이는 게 보였다. 가보니 그새 또 콩 떡잎을 잘라먹은 것 같다. 산란기인 5월이 지나면 덜 먹는다 했지만 꼭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누구는 6월이 되면 산에 먹을 게 많아 밭의 콩을 덜 먹는다고도 했지만 요즘엔 산이 우거져 먹을 것을 구하기가 옛날 같지 않아 여전히 콩을 공격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목초액이 그때서야 떠올랐다. 얼른 분무기에 목초액 100배로 희석한 물을 담아 가져와 싹들에 뿌려주었다. 다음에는 톱밥을 오줌으로만 버무리지 말고 목초액으로도 함께 버무리고, 뿐만 아니라 콩 씨앗도 목초액 희석한 물에 담갔다 심어야겠다고 단단히 다짐을 했다.

새가 잘라먹은 서리태 빈 자리에다가는 수수를 심고 완전히 삭은 거름으로 복토를 해주었는데 기대한대로 싹들이 아주 잘 올라왔다. 그래서 다음엔 아예 콩과 수수를 섞어서 심는 것도 궁리해보기로 했다. 목초액을 처리했을 경우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안 먹지는 않을 것 같고, 같이 심은 수수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면 절로 섞어짓기도 되니 땅의 효율은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마른 장마가 계속되고 있다. 내 생각엔 늦봄, 초여름에 비가 많이 와서 그러는 게 아닌가 싶다. 그 때 가뭄이 와야 그것을 메우려 장마가 확실하게 올텐데 가물지 않으니 장마도 별로 힘이 없는 것 같다. 물론 이상기후 현상이라 볼 만도 한데 무조건 이상기후라 하면 괜히 마음만 불안해져서 나는 별로 그런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늘 기후가 똑같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덜할 때도 있고 더할 때도 있는 법이니 호들갑 떨 것까지는 없을 것 같다.

마른 장마라 하지만 후덥지근한 것은 마찬가지다. 지금 글을 쓰기 시작할 때만 해도 하도 더워 물 한번 쫙 끼얹고 다시 시작해야 했다. 물이야 언제나 고마운 존재이지만 요맘 때 물은 더더욱 고마운 님이다.

소서 때 찾아오는 음력 명절로는 음력 6월 15일 유두(流頭)날이 있다. 말 그대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씻는 명절이다. 이 시절 산이나 바다로 놀러가는 피서 문화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유두날은 우리말로 물맞이라고 한다. 흐르는 물에 머리를 씻고 유두음식을 먹으면 더위를 덜 타고 여름을 잘 날 수 있다 했다. 유두음식으로는 밀국수와 햇과일이 있다. 밀국수는 얼마 전 수확한 밀로 국수를 만들어 먹으니 자연히 제철 음식이다. 밭에서는 참외, 수박, 오이 등 막 맺히기 시작하니 햇과일도 풍부할 때다. 게다가 이치에 맞는 것이, 밀은 대표적인 음 기운의 음식이므로 뜨거운 여름에 먹기 좋고 과일 자체도 뜨거운 여름 햇빛을 받고 자라지만 그 속에는 찬 기운을 머금고 있으니 여름을 이기는 데 도움이 된다. 어릴 때 뜨거운 여름날 퇴계원에서 농사짓던 고모네 놀러 갔다 여름 햇살을 내리 쬔 수박을 밭에서 그냥 깨뜨려 먹었을 때 얼마나 시원했던지 참으로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어디 그뿐이랴. 오이를 채 썰어 시원한 물에 먹던 오이 냉국, 또 오이를 소금에 절여 먹던 오이지, 부추와 함께 버무려 만든 오이소박이 등이 이 시절 여름을 잊게 해주는 제철음식들이었다. 참 이렇게 생각해보면 냉장고도 꼭 필요한 기계라 생각되지 않는다. 역설적이지만 냉장고 없으면 항상 신선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냉장고 때문에 오히려 오래된 음식을 먹거나 철을 잊어버린 음식들을 먹게 된다.

내일 또 밭에 가서 마무리 못한 풀매기를 마저 해야 할 생각을 하니 좀 지겹기는 하지만 땀 흘린 후 먹을 막걸리를 생각하니 약간은 마음이 설레인다. 날이 밝으면 어서 풀매러 밭에 가야지...



글 : 안철환(귀농본부 홍보출판위원장, 도시농업 위원, 안산 바람들이 농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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