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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夏至), 장마의 시작



하지에는 망종 때 못한 밀, 보리 수확과 마지막 모내기를 한다. 예전엔 “하지 전삼, 후삼”이라 해서 하지 근방에 마지막 모내기를 하곤 했다. 보통은 망종 전후해서 모내기를 하는데 장마 전 가뭄이 길어지면 하지 즈음해서 찾아오는 장마 직전에 모내기를 한 것이다. 만일 하지가 되었는데도 비 올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으면 대체 곡식으로 메밀을 심거나 조를 심기도 했다.


이래저래 하지가 되면 장마에 대비하랴 혹시라도 있을 가뭄에도 대비하랴 연 중 제일 바쁜 농번기철이다. 옛날엔 뽕잎 따다 누에도 치랴, 밭에서는 풀들이 힘차게 자라 풀도 매랴, 좀 지나면 감자도 수확하랴 일이 보통 많은 게 아니다.


나도 어제 밀 수확하고 바로 마늘, 양파도 수확했다. 감자는 일주일 정도 더 있다가 수확하기로 했다. 강원도에서는 하지에 수확한다고 하여 하지 감자라 하지만 여기서는 하지에 수확하기에는 감자가 아직 덜 영글었다. 물이 많이 필요한 때라 약간 장맛비를 맞추고 잠깐 비가 갠 사이에 캐려고 한다. 그런데 아직 콩, 수수를 심지 못해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마음은 진짜 콩밭에 가 있다.


옛날엔 보리를 많이 심었지만 지금은 보리를 찧을 데가 없어 대신에 밀을 몇 년째 심고 있다. 밀은 탈곡하면 바로 겉껍질이 벗겨져 현미처럼 먹을 수 있어 좋다. 방앗간에 가서 밀가루로 만들어 먹을 수도 있다. 정미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무튀튀하고 푸석푸석하지만 구수한 맛이 아주 좋다. 전 부쳐 먹으면 더 좋다.


밀 사이에는 곡우 지나 뿌려 놓은 밭벼가 세치정도 자라있다. 이른바 사이짓기다. 일주일 전에는 밀 사이에 서리태를 심었다. 새들의 산란기인 5월이 지나면 새 피해가 덜 하다 하여 6월 초에 심은 것이다. 작년엔 5월말쯤 똑 같이 밀 사이에 심었다. 그런데 발아율이 별 차이가 없다. 오히려 작년이 더 좋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산란기가 지났다 해서 아무 것도 먹지 않는 것은 아닐 터이니 너무 방심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현재 판단으로는 서리태 심고 비가 별로 오질 않아 발아가 늦은 탓도 크지 않았나 싶다. 최대한 발아 속도를 빨리 하여 떡잎에서 속잎까지 나오게 해야 할 것 같다. 떡잎까지는 잘라 먹지만 속잎이 나오면 이제는 새가 건들지 않기 때문이다. 밀을 거두고 난 자리에다가는 늦콩, 곧 그루콩을 직파할 계획이다. 이번엔 장맛비가 자주오니 발아 속도를 빨리 하는 전략에 지장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밭벼 사이짓기는 대성공이다. 풀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이짓기가 아닌 맨 밭에 직파했을 때 비하면 거의 풀이 없는 셈이나 다름없다. 그냥 직파하면 눈을 부라리고 무성한 풀 속에서 벼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 상태로 가면 풀도 두세번 매주면 충분할 것 같다.


밀 사이에 콩과 벼를 심는 이른바 사이짓기는 전통농법이다. 그동안 전통농법을 찾아 취재도 다니고 실험도 하면서 최종적으로 얻은 결론이 사이짓기다. 정확히 말하면 사이짓기 점뿌림 직파법이다. 특히 밀이나 벼 같은 경우는 점뿌림할 때 콩처럼 세알정도 넣는 정도가 아니라 30알 이상씩 듬뿍 넣는다. 그렇게 하면 너무 씨 낭비가 심한 것 아니냐 하겠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다. 점뿌림하기 전에는 주로 줄뿌림을 했는데 오히려 씨가 반밖에 들지 않았다. 줄뿌림할 때는 씨 간격을 1센티미터 되게끔 뿌리다보니 더 씨가 많이 드는 반면 발아율은 오히려 더 떨어졌다. 그러다 어느 지방에 가서 오래 농사지으신 한 어른신께 점뿌림해야 한다는 얘길 듣고 작년 가을에 밀을 그렇게 심었다. 그랬더니 씨도 적게 들거니와 발아율이 아주 좋았다.


점뿌림을 하면 발아율이 좋은 이유는 간단하다. 우선 씨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보니 보온이 잘된다. 발아하며 생기는 발아열이 옆에 붙은 씨의 발아를 촉진시켜주는 것이다. 엿기름 만들 때 보리나 밀 씨를 싹을 틔워본 사람은 알 것이다. 싹틀 때의 그 온도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냥 놔두면 고온의 발아열로 밀 싹들이 망가질 수 있어 찬물을 계속 끼얹어주어야 할 정도다.


또 많은 씨를 점뿌림하면 서로 밀착되어 있다 보니 밑으로 뿌리를 깊게 내린다. 뿌리를 깊게 내리면 뿌리의 힘이 좋아 나중에 위로 싹을 밀어 올리는 힘도 좋아진다. 그러나 너무 많은 씨를 넣었기 때문에 나중에 솎아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나도 밀싹이 무성하게 난 것을 보고 저러다 일일이 솎아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걱정을 했었다. 그런데 자라면서 보니 적당히 자기들끼리 균형을 잡아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수확하면서 보니 오히려 씨가 많이 들어간 포기들이 더 튼실하고 이삭도 많이 달렸음을 알 수 있었다.


밀 사이에 뿌린 밭벼도 마찬가지다. 마을 아저씨가 도와준다고 같이 파종했는데 나처럼 씨를 많이 넣지 않았다. 보통 오래 농사지은 사람들은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도와주는 분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어 놔두었더니 역시 내 예측대로 적게 넣은 쪽은 발아가 그보다 훨씬 더 떨어졌다.


밀 사이만이 아니라 완두콩, 강낭콩 사이에도 밭벼 씨를 넣었다. 당연히 뭉텅이로 씨를 넣었더니 아주 발아가 잘되었다. 콩 밭 사이에 넣으니 거름도 아낄 수 있어 좋다. 사실 완두, 강낭콩은 아예 거름조차 넣질 않았다. 작년에 배추 심었던 곳이라 그리 했다. 그러나 밭벼는 웃거름을 줄 계획이다. 그러나 밑거름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만 갖고도 나에게는 공짜 농사나 다름없다.
밀이나, 벼를 사이짓기 할 때도 밑거름을 아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밭에 밀이든 벼든 곡식이 심겨져 있으니 밑거름을 전면 시비할 수가 없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씨를 점뿌림으로 넣고는 거름으로 복토를 하는 것이다. 단 완전히 숙성되어 흙처럼 된 거름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거름 피해가 없다. 그것으로 밑거름은 끝이다. 그리고 자랄 때 웃거름으로 오줌을 두 번 뿌려 준다. 거름을 밭 전면에 시비 하지 않고 과녁을 정해서 주니 거름 손실이 거의 없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정리를 하면 사이짓기 점뿌림 직파법의 장점은 풀을 덜 매고, 거름도 아끼며 땅을 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곡식이 항상 심어져 있으니 땅을 갈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사이짓기 점뿌림 직파법을 우리가 살려야 할 전통농법의 백미라 생각하기로 했다. 다만 사이짓기에서는 꼭 콩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콩은 스스로 거름을 만드는 곡식이라 땅을 비옥하게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되는 작물이기 때문이다.

 
우리 농사의 성격을 가장 크게 결정짓는 기후의 특징은 장마다. 장마철을 어떻게 대비하고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한해 농사 전략의 최대 과제다. 장마가 우리 농사를 규정한 가장 큰 특징은 논과 곡식 농사다. 일 년치 비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장맛비에 피해보지 않고 그것을 이용해 잘 크는 것들이 벼와 곡식들이다. 그러나 채소들은 장마에 맥을 못 춘다. 고추 같은 경우는 장마 지나면 꼭 탄저병이 역병과 함께 찾아온다. 오이도 노균병 같은 게 찾아와 한꺼번에 몰살되는 경우가 많다. 여름을 나는 과실채소들이 다 그렇다. 그래서 장맛비를 피하기 위해 비닐하우스를 설치한다. 도시 근교와 우리 시골을 볼썽사납게 만들고 있는 수많은 비닐하우스의 물결도 다 이 때문이다. 밥상에 채소가 그만큼 늘었다는 것인데 거기에는 육식이 는 것과 관련이 깊다.


그러나 장맛비가 무서워 벼를 비닐하우스에다 재배하는 경우는 없다. 다른 곡식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그 장맛비를 논에 가두어야 벼가 쑥쑥 큰다. 벼도 크지만 엄청난 비를 논에 가두니 홍수 피해도 막아준다. 일석 몇 조나 되는 효과다. 곡식 위주의 이런 농사는 그대로 우리 밥상에도 반영되어 곡식 위주로 고봉밥을 먹고 살았다.

하지 지나면 장마도 문제지만 무더운 더위도 문제다. 고온다습한 우리의 여름은 곡식을 잘 자라게 해 줄지는 몰라도 사람 건강에는 별로 좋은 환경이 못 된다. 식중독 같은 전염병이 좋아하는 환경인지라 먹을 것도 조심해야 하고 과로와 스트레스도 조심해야 할 때다. 기름 도 비싸진 요즘 돈 들여 힘 들여 놀러가기보다 흙냄새 풀냄새 물씬 나는 논밭에서 땀 흘려 일한 후 시원한 막걸리 한잔으로 여름을 이기는 것도 좋은 피서법일 것 같다.



글 : 안철환(귀농본부 홍보출판위원장, 도시농업 위원, 안산 바람들이 농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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