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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종(芒種)-풀과의 싸움이 시작되다



이제 풀이 지긋지긋해지는 때가 되었다. 얼마 전까지 다 먹을 것으로 보이던 놈들이 이제는 작물을 망치고 농부의 육신을 피로하게 만드는 놈들로 변했다. 소리쟁이, 명아주, 비름, 질경이, 고들빼기, 둑새풀 등등... 그래도 향내 진한 꽃이 농부의 피로를 살짝 덜해준다. 찔레꽃의 향이 지나더니 밭 한 구석에 심은 떼죽나무 꽃이 만발하여 그 향이 망종이 다되도록 그칠 줄 모르게 진동을 했다.


5월 5일 입하 절기에 맞춰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 날로 정한 것을 보면 그 분은 분명 절기나 농사를 알았던 듯하다. 입하가 지나면 만물이 어린이 자라듯 쑥쑥 커간다. 그에 맞춰 밭의 풀들도 힘차게 쑥쑥 자라 올라온다. 이 풀을 장마 전에 잡지 않으면 한 해 농사를 장담하지 못한다. 힘들더라도 망종 근방에서는 모든 풀을 다 매주어야 한다. 그리고 장마 지나 한 번 더 매 주어야 풀 대책이 확실하게 설 수 있으니 망종 때쯤 풀을 다스리지 못하면 실농(失農) 가능성이 더 높아질 뿐이다.


그런데 올해는 날씨가 유독 변덕이 심해 아직 장마가 오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장마철처럼 비가 많이 온다. 우리 바람들이 농장의 막내 농부 김석기가 올해 무자년 날씨를 예측했듯이 기습 호우와 한파가 오락가락 한다더니 그 말 그대로다.(텃밭보급소, 도시경작, 14번 “무자년을 꼽으며” 참조) 이른 봄에는 여름날처럼 덥고 건조하여 여기저기서 산불이 나고, 곡우가 지났는데도 늦서리가 두 번이나 오질 않나, 입하 지나면 오기 마련인 가뭄 대신에 한여름 장마처럼 비가 자주 온다.


때늦은 한파에 냉해를 입고, 때 이른 잦은 비에 풀이 드세다. 강낭콩, 완두콩 밭 사이에 사이짓기로 밭벼를 심으려 풀 매러 갔더니 벌써 작물들을 위협할 만큼 풀들이 자라있다. 풀맨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이렇게 자랐다. 그나마 밀 사이의 풀은 훨씬 덜하다. 밀이 땅을 차지하고 있으니 풀이 끼어들 틈이 별로 없어진 때문이리라.


망종(芒種)은 까끄라기 망(芒)이 있는 작물을 거두거나 모내기 하는 철이다. 곧 밀, 보리와 같은 작물을 거두고 벼를 모내기 하는 철인 것이다. 산에서는 뻐꾸기가 울기 시작하고 밭 근처에는 어서어서 모내기 하라고 오동나무꽃, 이팝꽃, 찔레꽃, 떼죽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망종 근방에는 우리 겨레의 제일 큰 명절인 단오(端午)가 있다. 음력으로 5월 5일이다.


단오는 4대 명절(설날, 추석, 한식, 단오) 중에 유일하게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지 않는 마을 축제다. 대신에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현재까지 내려오는 대표적인 마을 제사로는 강릉단오제가 제일 유명하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해와 달을 숭배하는 농경민족이었는데, 달을 숭배하는 잔치가 대보름이라면 해를 숭배하는 잔치가 바로 단오다. 홀수가 겹치는 날짜는 양의 기운이 승한 날인데 특히 음력으로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 9월 9일이 더욱 양기가 배가는 되는 날이다. 이중에서 5월 5일이 제일 양기가 왕성한 날이라 해서 큰 명절로 친 것이다. 곡물 중에서도 양기가 센 벼를 이 때 모내기 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단오는 모내기를 위한 벼농사 축제라 할 수 있다. 단오를 기점으로 모내기를 시작하여 본격적인 여름 농사를 준비하는 것이다. 지역에 따라 단오 전에 모내기를 끝내 단오 잔치를 벌이기도 하고 단오 때 잔치를 하고 이후 모내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마을 두레 회의를 열어 벼 모내기 순서를 정한다. 두레 농악패도 조직하여 흥겨운 잔치를 만든다.


벼 모내기 두레는 철저히 이타적인 공동체 방식이다. 보통은 지주의 논을 제일 먼저 모내기 하고는 마을에서 모내기하기 제일 어려운 논부터 시작한다. 예컨대 몸 불편한 노약자, 과부 등의 논을 먼저 모를 낸다. 말하자면 내것, 네것 가리지 않고 마을의 모든 논을 내 논처럼 여기며 모를 내는 것이다.


반면 품앗이라는 공동체는 이기적인 방식이다. 내가 도움 받은 만큼 돌려준다. 노동력이 적은 사람에게 이틀 도움을 받았다면 노동력이 멀쩡한 사람은 하루만 도와주면 되는 식이다. 소를 빌려와 하루를 일을 해주었다면 건장한 총각의 노동력으로 3일은 일을 해주어야 되갚음이 된다. 그만큼 소의 노동력이 대단했던 것이리라. 두레는 주로 벼농사, 논농사에 적용이 되었다면 품앗이는 주로 밭농사에 적용되었다.


우리의 마을 공동체는 이렇게 일방적인 이타적 방식만을 추구한 게 아니라 이기적 방식도 적용함으로써 균형을 유지하지 않았나 싶다. 공동체가 유지되려면 이타적이기만 해서도 안되고 이기적이기만 해서도 안되니 적절한 균형이 중요한 것이다.


또한 단오날에는 수리취떡이나 각종 백가지 나물을 해먹는다. 단오가 되면 이런 나물을 해먹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단오 즈음이면 꽃대가 올라오거나 쇠져서 나물을 먹을 수가 없다. 또한 단오가 지나면 덥고 습한 장마철이 오기 때문이 식중독 같은 전염병을 예방하고자 쓴 나물을 먹은 뜻도 있다.


단오 즈음이면 궁핍한 보리고개가 절정이다. 춘궁기의 마지막인 것이다. 단오가 지나면 밀, 보리도 수확할 수 있고 이른 봄에 심은 잎채소들도 먹을만큼 자라있다. 그럼 단오 전에는 무얼 먹고 살았을까? 작년 거두었던 식량도 바닥이 나고 묵나물, 김장김치도 동이 났다면 먹을 게 없으니 보리고개는 봄에 반드시 겪어야 할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고개였다. 그 높은 고개를 힘들게 넘게 해준 것은 다름 아닌 들나물, 산나물 들이었다. 시고, 쓰고 질기기만 한 나물들이다.


그런데 사시사철 항상 배부르게 먹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에는 수확의 계절이라 그러지 않아도 먹을 게 많다. 많이 먹어 추운 겨울을 나야 한다. 동면에서 깨어나 봄을 맞이하면 세상엔 먹을 게 하나도 없다. 지난 가을에 쟁여둔 광에도 먹을 게 떨어졌다. 그 때 먹는 게 바로 나물들이다. 요즘엔 웰빙식이다 해서 옛날 가난한 음식이 인기를 끄는 시절이 되었다. 그 가운데 곤두레 밥이라 하면 가난을 최고로 상징하는 강원도의 대표적인 음식이었다. 곤두레라는 산나물을 주재료로 하고 귀한 곡식 보리 몇 알, 그리고 나머지는 물과 된장 풀어 죽을 해 먹은 것이다. 그런데 사실 봄에는 이런 시고 쓴 나물을 먹어주어야 무덥고 뜨거운 한여름을 이겨나갈 수 있다. 천고마비의 가을처럼 봄에도 배 터져라 먹는다면 과연 여름을 견뎌낼 수 있을까?


단오는 대단한 마을 잔치였다. 그 자체가 공동체였고 공동체의 결속력을 지켜가는 가장 큰 잔치였다. 조선 시대에는 이런 백성들의 공동체 문화가 보장되었지만 식민지 시대가 되자 일본 사람들은 이를 불안해했다. 지배의 관점에서 볼 때 백성들의 공동체는 저항의 기반으로밖에 보이질 않았다. 일제가 만주 전쟁을 일으키고는 조선을 전쟁의 전면적인 동원체제로 재편하면서 단오도 강제로 없애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사라진 명절이 되고 말았는데 일 부지역, 곧 강릉과 같은 곳에서 단오 축제를 이어가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망종은 까끄라기 곡식의 철이다. 거둘 것은 거두고 심을 것은 본격적으로 심는다. 벼에서부터 수수, 조, 기장, 콩, 옥수수, 고구마 등을 심는다. 급한 사람은 5월에 다 심었지만 새들의 공격에 그대로 당하고 마는 경우가 많다. 철을 잊고 뭐든지 일찍 심는 게 대세가 되어버렸다. 철을 잊으면 작물도 덜 건강하게 자랄 수밖에 없다.


얼마 전 밭벼 일부를 밀 사이에 심었지만 작년과 달리 새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밀 사이를 뒤지며 볍씨를 까먹었다. 그래도 많이 사라나 싹이 나있다. 나머지는 새의 산란기를 피해 심으면 새 피해가 덜하다 하여 망종 즈음에 심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남들은 다 심었는데 나마 늦게 심으려니 왠지 은근히 걱정이 인다. 내일 아침 일찍 나가 하루라도 빨리 풀을 매어 곡식들을 심으려 한다. 게으른 농부가 오히려 덜 손해를 본다는 믿음으로 말이다.



글 : 안철환(귀농본부 홍보출판위원장, 도시농업 위원, 안산 바람들이 농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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