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만(小滿)은 점차(小) 만물이 생장하며 가득 찬다(滿)는 뜻이다. 곡우, 입하까지만 해도 산야에 연녹색의 기운이 꿈틀거리더니 어느새 신록이 힘차게 올라와 온 세상을 파랗게 물들이고 있다.
곡우 비가 오고 나면 입하 지나 가뭄이 찾아온다. 이 가뭄은 마치 하지 이후 찾아오는 장마를 불러들이는 전야인 것 같다. 장마를 끌어들이기 위한 공간 비우기라고 할까? 비워야 채워지듯이 말이다.
가뭄이라고 하더라도 만물이 자랄 것은 다 자란다. 산 속 나무들도 새순이 어느새 신록으로 변하여 이제는 나무들의 개성들이 파랭이들로 다 가려져버린다. 온통 파랄뿐이다.
게으름 피우다 고추를 곡우 지나서야 겨우 직파했다. 제대로 한다면 청명 지나 바로 해야 하는데 날씨도 이상 저온이 지속되어 그 핑계로 하루 이틀 미뤘더니 그렇게 되었다. 늦었다고 마른 땅에 그냥 뿌릴 수 없어 마냥 비만 기다리다 곡우 이틀 뒤에 비 온다기에 이왕 늦은 것 비에 맞춰 심어야지 했다.
비는 잘 맞추었는데 비가 오고 나더니 늦서리가 찾아왔다. 보통 곡우 비는 서리를 가져가기 마련인데 이건 완전히 거꾸로 되었다. 늦게 심은 것도 억울한데 서리까지 왔으니 참으로 하늘은 게으른 농부를 도와주질 않는다. 이번 늦서리는 일선 농가에 냉해를 많이 입혔다. 감자 싹도 동상을 입혔고 일찍 밭으로 나간 여름 작물 모종들도 피해를 입혔다. 나는 항상 텃밭 회원들에게 입하에 모종을 내라 하는데 이를 듣지 못한 신입 회원들이 시중에 벌써 나온 모종들을 보고는 조급증이 발동하여 피해를 보았다.
올 봄 날씨만큼 변덕스런 경우는 처음 보는 것 같다. 사흘 전에는 밤 날씨가 얼마나 추운지 봄 잠바를 입고 있어도 으스스 했다. 다음날 괴산에서 농사짓는 선배를 만났더니 그곳엔 서리까지 내렸다고 한다. 이른 봄에는 여름 날씨처럼 더워 모종 내기를 서두르게 만들더니 게으름 덕에 냉해를 보지 않았다고 자랑하는 사람들 머쓱하게 만든다.
하여튼 그렇게 심은 고추가 추운 비를 맞고부터는 전혀 비가 오질 않았는데 스스로 싹을 틔웠다. 참으로 기특했다. 직파하여 스스로 싹을 틔운 놈을 보면 그 기운이 남다르다. 확실히 모종 키울 때 강제로 싹 틔운 놈하고는 색택이나 자태가 자못 다르다. 잡초와 같은 야생성이 느껴진다고 할까.
봄 가뭄이 심하면 보리나 밀 이삭이 잘 익을지는 몰라도 감자나 마늘, 양파들에게는 치명적이다. 땅 속의 열매를 영글게 하려면 물이 아주 필요하기 때문이다. 배추나 상추 등 잎채소들도 물이 절실하다. 그런데 입하 이후 비가 자주 오면 상황은 역전된다. 이 시기에는 그냥 적당히 조금 오는 게 좋다. 며칠 전 일요일에 온 비는 그래서 아주 단비였다. 모든 갈증을 다 해갈시켜주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소만 다음날 오늘 아침 일기에 예보에 비가 온다고 하더니 진짜로 하늘이 꾸물꾸물 거려 금방 비올 듯 했다. 진짜로 비가 오면 이 비는 귀찮은 비 일뿐이다. 저번 비로 충분하여 이젠 일을 많이 해야 하는데 비가 오면 일손을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소만은 만물이 점차 생장하는 시기이므로 이에 농사도 발 맞춰 나가야 한다. 벼 모판에도 모들이 힘차게 힘을 받아 올라온다. 작년 가을에 심어둔 밀, 보리의 이삭도 익어가기 시작하고 이른 봄에 심어둔 잎채소들도 빠른 것은 솎아 먹을 정도가 되었다. 나물들도 봄에 꽃을 피운 것들은 열매를 매달아 익히고 있고, 여름 빨간 꽃들이 녹색의 잎사귀 사이사이에서 불긋불긋 피워나기 시작한다. 밭 둘레에는 찔레가 꽃보다 먼저 진한 향내로 인사를 한다. 아침 저녁에는 찔레의 진동하는 향내로 취할 것만 같다. 오늘 밭에서 만난 한 회원은 밭에 일찍 도착했더니 찔레향이 차 안으로 막 쏟아져 들어오더라고 감탄을 연발한다. 찔레향이 쏟아져 들어온다는 말이 참으로 적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벼 모내기는 망종 근방에 하곤 했다. 그런데 요즘엔 소만쯤이 되면 대부분 모를 낸다. 논에 나가보면 이앙기로 모들 내느라 정신이 없다. 옛날에 비해 모를 빨리 키우기도 하거니와 이앙기로 모내기 적당하게 어린 치묘(穉苗)를 모내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또 천수답이 아니라 다들 지하수를 모터로 끌어내 논물을 담으니 물 걱정도 없어 일찍 모들을 낸다.
그러다보니 여러모로 벼가 건강하게 자라는 데 어려운 점이 생긴다. 비유하자면 미숙아를 일찍 젖 떼어 스스로 크라고 하는 셈이다.
그래서 요즘 유기농가에서는 옛날처럼 성묘(成苗)로 키워 모를 내는 경우가 늘고 있다. 성묘로 모를 내면 건강한 모를 날씨도 충분히 따뜻할 때 모내기하게 되고 또 물도 깊게 될 수 있어 보온에도 유리하고 물을 이용한 제초에도 유리하다. 게다가 자운영을 녹비 작물로 재배할 때 늦게 모내기 하면 자운영씨가 절로 떨어져 가을에 따로 파종하지 않아도 될 것을 방금 코투리가 달린 것을 갈아엎어버리니 가을에 다시 씨를 사다 넣어주어야 한다. 자운영 씨를 매년 그렇게 사오는 돈이 자그마치 몇십억원어치나 된다고 한다.
소만 절기에 꼭 놓치지 말아야 할 농작업에는 풀매기가 있다. 풀은 다른 누구보다 생명력이 강해 더욱 힘차게 생장을 거듭한다. 이른 봄에 나온 잡초들은 벌써 씨를 맺기 시작한다. 꽃다지, 냉이, 소리쟁이, 명아주, 보리뱅이 등. 이 때 잡아주지 않으면 풀씨도 맺혀 내년에 더 많이 풀이 발생하기도 하거니와 장마 근방에 가서 잡아주려 하면 힘이 몇 배 더 든다.
풀매기와 함께 더불어 작물에게는 북주기를 꼭 해야 한다. 북주기는 풀제거와 함께 작물을 북돋아주는 효과도 있지만 보이지 않게는 가뭄 예방 효과도 있다. 흙에는 무수한 모세관이 연결되어 있어 흙 속의 습기가 공기 중으로 날아가 건조를 촉진한다. 그런데 호미나 괭이로 북주기를 하면 이런 모세관을 끊어주어 건조를 막아주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북주기는 일타삼피 효과, 그러니까 일석삼조 효과가 있는 셈이다. 열심히 북주기를 할 때다. 북주고 나서는 꼭 오줌 등으로 웃거름 주는 것을 잊지 말자.
글 : 안철환(귀농본부 홍보출판위원장, 도시농업 위원, 안산 바람들이 농장 대표)
'농담 > 농-생태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지(夏至), 장마의 시작 (0) | 2009.09.11 |
---|---|
망종(芒種)-풀과의 싸움이 시작되다 (0) | 2009.09.11 |
입하, 점점 바빠지는 농번기 (0) | 2009.09.11 |
곡우(穀雨), 바야흐로 본격적인 농번기 (0) | 2009.09.11 |
청명, 맑고 화창한 봄날 (0) | 2009.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