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9시 농촌진흥청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얼마 전 번역을 마친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이란 책의 저자인 다카하시 노보루 박사의 아들 다카하시 고시로 씨가 단체로 관람을 온다는 소식을 듣고서요. 그래서 함께 갈 분들을 모아 찾아갔습니다. 안완식 박사님께서도 함께 가 주셔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 혼자 갔으면 할 말도 다 못하고 그냥 쭈볏거리다 돌아왔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분이 미리 선물을 준비해서 저에게 주셔서 들고 왔는데, 그 안에는 자신이 어떻게 농촌진흥청에 자기 아버지의 자료를 모두 기증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이 정리된 짤막한 글을 넣어 놓았더군요. 그래서 함께 읽어 보면 어떨까 하여 집에 와서 차분히 우리말로 옮겼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못된 짓을 많이 한 것은 사실이나 인정할 부분은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귀한 자료를 기증받기까지의 일을 기증자의 입장에서 정리한 글입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남의 일처럼 생각하고 있던 인간의 '죽음'이란 것에 대하여 올해 4월에 저 세상으로 떠나간 아내의 일을 생각하면 결코 남의 일은 아니지만, 나의 몸에 바싹 다가왔다. 살아 있는 인간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음'이 찾아온다. 이 평범한 사실에 깜짝 놀란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저 세상에 가서 이 지구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을 때, 가장 마음에 짐이 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현재 나의 옆에 보관되어 있는, 아버지가 반평생을 걸려 조선 반도에서 조사·연구한 1,3000매나 되는 원고의 행방이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아버지가 조선에서 귀국했을 때 온갖 수단을 써서 일본에 가지고 온 것이다. 그것이 지금 나의 곁에 차 상자 2개 안에 가득 차 있다. 만약 내가 사라지면 이 자료는 어떻게 될까?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것이다.
이런 일을 물은 적이 있다. 아버지에게는 함께 조선 반도에서 옛 만주에 가까운 곳의 농사시험장에서 근무하셨던 친구 분이 있었다. 그분은 북조선에 있는 백두산의 진귀한 풍물이나 그 지방의 귀중한 모습을 찍은 몇 백 장의 사진이 있었다. 일본이 패전한 뒤, 조선에서 귀국할 수 있을 때 그것을 일본에 가지고 왔다고 들었다. 그분이 돌아가신 뒤, 나는 필요가 생겨 그분의 딸께 전화를 했다. 그때 들은 이야기로는, 그러한 귀중한 사진들이 거치적거려서 자신이 모두 태워 버렸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는 조선에서 귀국하여 2개월 뒤에 나의 눈앞에서 저 세상으로 가셨는데, 그때 죽음의 순간에 보였던 원통한 모습을 떠올리면 나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는 다시 나의 가슴에 캐물었다. '내가 사라진 뒤, 아버지가 심혈을 기울여 조사·기록한 이 방대한 유고는 어떻게 될까?' 그러나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원고와 함께 들어 있던 200~300매 정도의 사진이 있었다. 아버지가 조선의 농민, 농기구, 농작물을 찍은 것이다. 6년 전 한국의 농촌진흥청에서 꼭 기증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하기에, "사진은 아버지가 찍은 것이다"라는 것을 설명하는 조건으로 기증했다.
한국 최대의 대도시 서울에서 남동으로 자가용으로 약 1시간쯤 타고 가면, 수원시라고 하는 도시에 도착한다. 민속촌 등이 있어 관광 명소이기도 하고, 인구 120만의 도시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일본의 식민지 시대에 조선총독부 농사시험장의 본장이 있어서, 조선 반도 전역의 농업을 총괄하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한국 농촌진흥청"이라고 명칭을 바꾸고, 한국 전역의 농업을 총괄하고 있다.
4년 전인 2002년 11월에 이 한국 농촌진흥청의 부지 안에 2층 건물의 거대한 "농업과학관"이 건설되었다. 이 농업과학관의 내부는 최적의 습도와 온도가 자동으로 조절되는 근대적인 건축물이다. 내부는 "과거," "현재," "미래,"의 한국 농업의 발전을 보여주는 전시물이 정연하게 전시되어 있고, 한국 전역에서 견학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그 농업과학관의 "과거"의 농업 전시물들 한 구석에 6년 전에 기증한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는 것을 인편으로 들은 것은, 건설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이다. 그것을 듣고 나서는 그 사진이 어떤 모습으로 전시되고 있을지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2~3년 동안은 집안 사정으로 집을 비울 수 없었다. 올해(2006년) 6월이 되어서, 외박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서 방한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6년 전 그 사진에 눈을 두었던 것은, 당시 한국 농촌진흥청의 공보관이었던 성종환이라는 사람이다. 그 성종환 씨는 일본어를 전혀 하지 못하여, 6년 전 그 사진의 일로 우리집에 왔을 때도 일본어를 하는 이철희 씨를 통역으로 데리고 왔다. 이철희 씨는 농학박사의 신분으로 학회 때문에 때때로 일본에 와서 연구 발표를 해서 유창하게 일본어를 할 수 있는 한국 농촌진흥청에서도 드문 한국인 학자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철희 씨와 성종환 씨는 한국 농촌 진흥청의 내부에서는 부서가 달라서, 성종환 씨가 언제나 이철희 씨에게 통역을 부탁할 수 없었다.
그와 같은 이유로, 내가 이번 한국의 농촌진흥청을 방문하여 성종환 씨를 만나서 이야기할 때도 한국어를 자유로이 말할 수 없는 나는 어떻게라도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내가 쿠루메久留米 시내에서 한국어를 반 년 동안 배운 M여사에게 상담한 바, 기분 좋게 맡아 주었다. M여사는 재일교포인데, 일본인을 남편으로 맞아 쿠루메 시내의 여기저기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본어와 한국어 모두 유창하게 하는 베테랑 강사이다.
2006년 6월 29일 아시아나항공 790편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한 나와 M여사는, 거기에서 고속버스로 서울로 향하여 프레지던트호텔에 숙박했다. 다음날 아침, 한국 농촌진흥청에서 남녀 2명의 직원이 마중을 왔다. 남성이 운전하는 차로 약 1시간 뒤 수원시의 농촌진흥청에 도착하여, 성종환 씨의 직무실에서 그와 만났다. M여사의 통역으로 잠깐 성종환 씨와 회담한 뒤, 성종환 씨의 안내로 농업과학관으로 갔다.
농업과학관은 그리 멀지 않아 성종환 씨의 집무실에서 걸어서 2~3분이었다. 농업과학관의 입구는 지붕은 둥그스름한 원통형의 아래쪽에 있고, 그 위쪽에는 벼의 무늬가 크게 디자인되어 있었다. 정확히 초여름의 햇살이 그 벼의 무늬에 반사되어 벼의 이삭이 살아 있는 듯이 빛났다. 과학관 안에 들어가서 농기구나 농작물, 농촌 생활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는 긴 복도를 걸어갔다.
"여기에서 당신의 아버지가 찍은 사진을 조용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이와 같이 전시장의 가장 구석에 이 방을 마련했습니다."
성종환 씨가 한국어로 나에게 말한 것을 옆의 M여사가 나에게 일본어로 곧바로 통역해 주었다.
그 방으로 한 걸음 들어갔는데, 바로 정면의 조금 높은 곳에 그리운 아버지의 사진이 '4절 와이드'로 커다랗게 확대되어 액자에 장식되어 있는 것이 눈에 날아 들어왔다. 그것은 놀라움과 함께 감동이었다. 아마 아버지가 찍은 사진 안에 작은 자신의 사진이 들어 있었나 보다. 그것을 크게 확대하여 전시한 것이다.
"당신 아버지의 이 사진은 빛과 열에 변색되지 않도록 특수 처리를 해서 반영구적으로 그대로 보존됩니다."
이것도 성종환 씨의 설명이었다. 그때, 또 한 사람의 내가 아버지의 사진을 응시하고 있는 나에게 속삭였다.
'여기는 일본국이 아니야. 괜찮을까? 이전에는 반일·항일을 부르짖으며 일본의 국기를 불태운 무리가 있는 한국이다. 그 한국의 목구멍 안에 일본인의 사진이 장식되었어. 그것을 너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방 안을 돌아보면 아버지가 이전에 조선 반도에서 재직했을 당시에 찍은 농민과 농기구, 농작물 등의 사진이 한 장 한 장 4절지 크기로 확대되어 저마다 액자에 담겨 간격을 맞춰 전시되어 있었다. 물론 그 사진의 아래에는 아버지가 찍은 사진이란 것이 한국어로 각각에 명기되어 있다는 것을 M여사의 설명으로 알았다. 더욱이 그 방의 한가운데에는 텔레비전이 놓여 있어, 개관 시간에는 그 텔레비전을 통하여 비디오에서 아버지가 찍은 사진을 방영하고, 한국어로 사진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긴 의자가 있어 누구나 다리도 쉬며 거기에 앉아 방영 사진을 보면서 설명에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6년 전 한국 농촌진흥청의 요망에 따라서 '도움이 된다면'이란 가벼운 기분으로 아버지의 사진을 한국 농촌진흥청에 성종환 씨를 통하여 기증한 것인데, 이렇게 정중히 보존, 전시, 방영되고 있는 것에 감동한 것과 함께, 그것을 찍은 아버지의 사진까지도 화려하게 장식한 것에는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방의 둘레에는 전시용의 유리 진열장이 놓여 있어, 한국 농촌진흥청이 아버지의 사진으로 작성한 '사진첩'이 한 권 툭 전시되어 있었다. 그것을 내가 보고 있으니, 성종환 씨가 옆에 와서 통역의 M여사를 통하여 다음처럼 말했다.
"만약 당신이 자택에 보관하고 있는 아버지의 연구자료를 한국 농촌진흥청에 기증해 주신다면, 그러한 자료는 모두 복사하여 원고는 이 진열장에 넣어 반영구적으로 보존 전시하고 한국 농업 관계자에게 소개하겠습니다. 복사한 것은 한국의 농학자가 연구하게 되어, 당신 아버지의 연구 자세나 한국 농업에 대한 방법을 많은 한국 농민에게 전할 수 있을 겁니다."
견학이 끝난 뒤, 별관에 있는 한국 농촌진흥청의 청장을 성종환 씨의 안내로 방문했다. 이 청장은 김인식이라고 하는데, 일본어를 할 수 없어서 M여사도 동행했다.
"당신 아버지 시대의 학술 관계 자료가 한국에는 너무 부족합니다. 한국에서 받은 것은 참으로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기증하신다면 아버지의 공적으로서 농촌진흥청이 책임지고 영구히 보존 활용하겠습니다."
이렇게 간청하는 청장에게 나는 답했다.
"그러나 13000매의 아버지의 유고 1/3은 모조리 일본어로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이나 <조선 반도의 쟁기>란 표제로 발간이 끝났습니다만……"
"모조리 발간이 끝난 원고도 혹시 기증하신다면, 귀중한 원고로서 영구히 보존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끙끙댈 것이 있을까? 그만큼 한국에서 희구하는 아버지의 유고 전부를 한국에 기증하면, 한국에서는 정중히 취급하여 건네받는 것만이 아니라 한국의 농업에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 아닌가. 내가 아버지의 원고를 2개의 차 상자 안에다 후세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어떤 도움도 되지 않으며, 그것보다도 이와 같이 열망하고 있는 한국 농촌진흥청에 기증하여 최대한 활용하게 하는 쪽이 얼마나 아버지의 희망에 따르는 것이 될까 헤아릴 수 없다.
그리고 다시 성종환 씨의 직무실에 들어왔을 때, 나는 성종환 씨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나의 아버지의 유고 모두를 농촌진흥청에 기증하겠소."
하니 성종환 씨는 큰 손을 내밀어서 나에게 악수를 청하며 다음과 같은 계획을 말했다.
"잘하면 8월 2일에 우리들이 댁에 방문하여 아버지의 유고를 받겠습니다. 왜 그렇게 급하냐고 말씀하시면, 실은 8월 30일부터 9월 3일까지 5일 동안 한국의 '농업 100주년 기념제 행사'가 농촌진흥청을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개최됩니다. 그때는 농업에 관계있는 사람은 물론, 온갖 계층의 사람이 한국 전역에서 이 농촌진흥청에 모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당신 아버지의 자료를 널리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불과 5일 동안의 전시로는 소개하기에는 부족하다 하시면 그전 2주일 동안, 곧 8월 16일부터 29일까지 이 '농업과학관' 안에 전시하여 가능하면 많은 견학자에게 보이겠습니다. 그래서 당신마저 좋다면, 그렇게 부탁하려고 합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다면 나로서는 아무것도 할 말이 없다. 그것이 실현되면 내가 이 세상에서 떠나서 사라져도 아버지의 유고는 안전한 장소에서 보관·활용될 것이다. 그리된다면 아버지도 풀잎의 그늘에서 안심하실 것이 틀림없다.
다음날 6월 30일, 나는 유고의 행방에 밝은 앞길을 발견하고, 아시아나항공기로 인천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일본으로 향했다.
2006년 8월 2일(수), 이날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고를 한국 농촌진흥청에서 받으러 오기로 한 날이다. 그를 위하여 한국 농촌진흥청에서 오기로 한 아래 적은 4명의 직원은 어젯밤부터 쿠루메시의 하이네스호텔에 숙박하고 있다.
단장 성종환, 통역 홍은희(농학박사), 전시 담당(박성일(전기주사), 사진 담당 박형근(시청각 기사)
이 가운데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홍은희 씨뿐이다.
이 사람들과 오전 8시 반에 만날 약속을 했기 때문에 나는 오전 7시쯤 집을 나왔다. 아침 일찍이기 때문일까, 정체가 되어 오전 7시 반쯤 쿠루메의 니시테츠西鐵 전차역에 도착했다. 거기에서 이와타야岩田屋의 입체 주차장에 차를 넣고서, 이와타야의 일부를 사용하고 있는 하이네스호텔에 걸어갔다.하이네스호텔은 2, 3, 4층이 없고, 5층에 접수 겸 로비가 있다. 그 로비에서 전화하여 홍은희 씨를 불렀다. 홍은희 씨는 곧 찾아왔다.
"어젯밤은 힘들었습니다."
홍은희 씨는 나를 보고 갑자기 이랬다.
"왜요?"
"통역하는 M여사가 '요미우리 신문사'의 쿠루메 지국장을 우리들의 방으로 불렀습니다. (쿠루메 지국장의 아내는 M여사의 한글 수강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래서 지국장이 성종환 씨에게 당신과의 지금까지의 경위를 밤 늦게까지 취재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M여사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하이네스호텔의 아래에 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M여사는 대형 검은 자가용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입체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꺼내고, 하이네스호텔의 앞에 주차했다. 이윽고 전원 6명이 두 차에 나눠 타고 야메시八女市로 향했다. 야메의 집에 도착한 것은 9시 반쯤이었다. 집 앞에는 '요미우리 신문사'의 젊은 여성 기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취재하려 왔을 것이다.
나의 집 응접실은 아침부터 에어콘을 틀어 놓아서 쾌적한 실온이 되어 있었다. 모두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런데 성종환 단장이 현관 앞에 서서 응접실 안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어째서 그럴까 의심스럽게 생각하고 있는데 M여사가,
"돌아가신 부인께 예배하고 싶다고 합니다"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불단이 있는 다다미방의 맹장지를 열어서 모두를 불러들였다. 아내의 영정이 있는 불단 앞에 성종환 단장이 앉고, 양초와 향에 불을 붙이고 종을 두드려 예불하고, 뒤에 모두도 똑같이 예배했다.
응접실에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조사연구자료 약 13000매를 미리 테이블 위에, 번호 순으로 쌓아 두었다. 번호는 모두 하여 1부터 7까지이다. 그것을 박성일 씨와 박형근 씨 둘이 솜씨 좋게 묶어서 정리했다. 약 1시간 정도로 가지고 온 8개의 큰 통 안에 모두 넣었다. 그러고 나서 11시쯤에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조사자료의 수집 작업은 끝났다.
이 뒤 M여사의 통역으로 성종환 단장이 다음과 같은 것을 나에게 전했다.
① 이 자료는 8월 16일부터 28일까지 한국 농촌진흥청의 농업과학관의 입구에서 특별전시를 한다.
② 그 뒤에는 8월 29일부터 9월 1일까지 '한국 농업 창립 100주년 기념제'에 전시하고, 다카하시 노보루의 이름과 그 연구 자료를 한국 전역의 농민과 농업 연구자 등 전원에게 소개한다.
③ 그것이 끝나면 이 자료를 복사하고, 전문을 한국어로 번역하고, 원문은 '다카하시 코너'의 방에 있는 진열장에 넣어 영구히 전시한다.
④ 이미 일본어로 출판되어 있는 다카하시 노보루의 저서는 도서관에 전시하고, 열람을 제공한다.
이상인데, 이것만 정중히 처우된다면 돌아가신 아버지도 흡족하실 것이다.
우선 성종환 단장의 희망에 따라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 2책 및 그 해적판 1책은 기증하기로 했다. 해적판은 내가 어떤 루트로 손에 넣은 것으로서 주고 싶지 않았지만 성종환 단장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해적판은 한국의 서점에서는 손에 넣을 수 없다. 이와 같은 것이 한국에서 출판된 것은 한국의 수치이고, 두 번 다시 이러한 해적판이 출판되지 않도록 보여주기 위하여 원본과 함께 나란히 전시해 놓고 싶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이것도 기증하기로 했다.
"다카하시 씨는 뭔가 할 말은 없습니까?"
성종환 단장이 M여사의 통역을 통하여 나에게 물었다. 나는 가장 마음에 걸리는 점을 요망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조사한 연구자료를 한국어로 번역해서도 '이것은 다카하시 노보루가 연구한 것이다'라는 것을 꼭 명기해 주십시오."
하니, 성종환 단장도 홍은기 씨도 소리를 모아 동시에 나를 부르듯이 답했ㄷ가.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죠."
거듭 나는 요망했다.
"전시가 끝나면 '다카하시 노보루의 조사연구자료'에 관한 프로젝트팀을 조직하여 연구해 주십시오."
하니 성종환 단장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한국 농촌진흥청은 한 개의 조직체로 각각이 각자의 부서를 지키고 활동하고 있기에, 그 안에 새로운 '프로젝트 팀'을 조직하는 것은 꽤 어렵습니다. 그러나 가능한 한 노력할 것입니다. 만일 '프로젝트 팀'을 공적으로 조직하는 것이 어렵더라도, 다카하시 노보루는 제가 존경하는 학자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저는 사적으로라도 그와 같은 프로젝트 팀을 조직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여 성종환 단장과 나의 이야기는 끝났다. 그랬더니 옆에 자리하고 있던 '요미우리 신문사'의 젊은 여성 기자가 나를 보고 말했다.
"이번은 제가 다카하시 씨에게 묻고 싶습니다. 다카하시 씨가 이렇게 방대한 아버지의 자료를 한국 농촌진흥청에 기증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자료 모두는 옛 조선 반도의 농업에 관한 자료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자료는 당연히 한국 농업의 발전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자료는 몇 년 동안 일본에서 보관한 것입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1946년이니까, 그때부터 역산하면 정확히 60년 동안입니다. 그러나 최초의 20년 동안은 친척의 집에 맡겨 놓았는데, 그 뒤 저의 곁에서 떠나 곧바로 도쿄의 오치아이 히데오落合秀男 씨에게 보내 유고의 정리를 부탁했습니다. 그 뒤 1989년에 오치아이 씨가 돌아가셨기에 다시 저의 곁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저의 곁에 보관한 것은 그 뒤 17년 동안인데, 일본국 안에 보관한 것은 앞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60년입니다."
"그렇게 귀하게 보관하고 있던 유고를 이번에 한국 농촌진흥청에 기증하기로 결심한 '동기'를 가르쳐주십시오."
"가장 강한 동기는 올해 6월 하순에 방한한 것입니다. 한국 농촌진흥청의 부지 안에 있는 '농업과학관'의 한 귀퉁이에 돌아가신 아버지 다카하시 노보루의 방이 마련되었는데, 여기를 견학한 것이죠. 몇 년 전에 한국 농촌진흥청의 요망에 따라, 저의 곁에 있던 수백 장의 사진을 기증했는데, 이것이 그 방에 돌아가신 아버지 다카하시 노보루의 이름으로 정중히 보존되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유효하게 활용되고 있는 상황을 보고서 감동한 것이 이번에 기증을 경심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이 뒤에도 자잘한 질문을 받고, 정확히 12시가 되어서 모두 식사하러 갔다. '요미우리 신문사'의 여성 기자도 식사에 가자고 했으나 거절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고를 넣은 8개의 짐은 집에 두고서 모두 빈손으로 나와 M여사의 차에 나누어 타고 가까운 '릿카立花 초밥집'으로 향했다. 6명이 들어갈 수 있기 좋은 넓은 방이 비어 있었다. '니기리즈시握りずし'가 나오기 전에 박성일 씨와 M여사는 각각 꽃을 가까운 꽃집에서 사 왔다.
식사한 뒤는 모두 구로키마치黑木町에 있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에 참배하고 싶다고 했지만, M여사는 한글 교실에 가르치러 가야해서 그녀가 사 온 참배용 꽃을 내가 맡았다. 박성일 씨는 멋진 호접란胡蝶蘭 꽃을 사 왔다. 이것은 뒤에 '한국 농촌진흥청 직원 일동'이라고 추도의 긴 띠를 묶어서, 우리집의 현관에 장식해 놓았다.
식사는 약 1시간 정도로 끝나고, 릿카스시 앞에서 M여사와 작별하고, 뒤의 4명은 나의 자동차로 구로키마치로 향했다. 구로키마치에 도착한 때는 오후 3시쯤으로 햇살이 강하고, 가장 더운 시간이었다. 차에서 내려 나를 포함한 5인은 가파르고 좁은 산길을 올라 '다카하시가 누대累代의 묘'라고 석탑에 조각된 묘의 앞에 도착했다. 나는 M여사가 부탁한 묘소용 꽃을 묘석의 양쪽에 꽂아 넣고, 양초와 향에 불을 붙이고 묘 앞에 바치고 예배를 했다. 다른 4명도 나를 따라서 예배했다.
일행 5명은 다시 좁은 길을 땀을 흘리며 내려와서 자가용에 탔다. 차 안은 숨이 턱 막힐 듯한 열기가 가득했다. 나는 운전석에 앉아서 차 안의 에어컨 스위치를 최대한으로 켰다. 그러자마자 차 안에는 무수한 냉기가 가는 실처럼 퍼졌다.
차는 약 20분 뒤에 나의 집에 도착했다. 응접실에 들어온 일행 4명에게 나는 각각 시원한 주스와 수건을 건네고, 모두는 땀을 닦고 주스를 단숨에 들이켰다. 쉬던 곳에서 집에 놓았던 유고가 들어 있는 짐을 하나하나 나의 자동차의 트렁크로 정리해 넣어, 8개의 짐은 어떻게든 트렁크에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 나의 운전으로 쿠루메의 니시테츠까지 배웅하고, 4명은 고속버스로 갈아탔다. 고속버스의 격납고에 8개의 짐을 수납하고, 4명은 후쿠오카공항으로 출발했다.
이것으로 내가 저승에 들어가도 아버지의 유고는 한국 농촌진흥청에 의해 정중히 보관되고 활용될 것이다. 나도 겨우 안심이 된다.
그로부터 4개월 뒤인 11월 하순, 한국 농촌진흥청에서 나의 집에 A4판 크기의 책 하나가 왔다. 열어 보니 280쪽으로, 8월에 기증한 아버지의 육필 원고의 일부가 편집된 것이었다. 표지는 푸른색으로, 책으로 단단히 매어져 있었다. 그 표지에는 일본어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표제 : 조선 반도의 작부방식과 토지이용
저자 : 다카하시 노보루
저작년 : 1942년
내용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휘갈겨 쓴 육필 원고 그대로를 담고 있었다. 또 표지를 열어 보면 마주보는 두 면의 한 쪽에는 인쇄가 찍혀서, 그 판 안에는 한글이 쓰여 있었다. 한일사전으로 찾은 바 다음과 같이 읽는다.
기증 도서
기증자 : 다카하시 고시로
소속 : 일본국
기증일 : 2006년 9월 4일
그리고 일본어로 다음과 같이 쓴 성종환 국장의 메모가 동봉되었다.
"기증해 주신 13000매의 유고의 육필 원고를 내년 1년 동안에 걸쳐 동봉한 책자처럼 항목별로 편집하여 완성하고자 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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