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다카하시 노보루高橋昇 씨의 조선 농업 연구에 대하여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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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다카하시 노보루 씨의 이름을 안 것은 농림성 열대농업 연구센터에서 낸 "옛 조선에서 일본의 농업 시험 연구의 성과"(1976년, 농림통계협회 간행)을 통해서였다. 특히 이 책에 수록된 오치아이 히데오落合秀男 씨의 특별 기고 「조선총독부 농시農試 서선지장장西鮮支場長 ‘다카하시 노보루’」를 읽고 감명을 받은 것과 함께, 오치아이 씨의 옆에 다카하시 씨가 남긴 방대한 필기 자료가 있다는 것을 알고 꼭 그것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당시 교토대학의 동양사 연구실에서는 대학원생을 중심으로 ‘중국 농서 연구회’라는 것이 조직되어, 각종 중국 농서의 윤독회가 열리고 있었다. 나는 조선 농업사에 관심이 있어 그 연구회에 참가하여 많은 것을 배우고 있었는데, 마침 그러한 때에 위에 적은 "성과"가 간행되었다. 그리고 그 책의 총론(아라시 가이치嵐嘉一 씨 집필)이나 인용된 다케다 소우시치로武田總七郞 씨의 저서·논문을 통하여 조선의 고농서를 이해하기 위한 귀띔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농사직설"이나 "산림경제" 등의 고농서를 혼자서 읽고 있었던 당시로부터 20년, 지금 여기서 다카하시 씨의 유고가 공개적으로 간행된 마당에 그 해설의 짐이 나에게 돌아온 것은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1990년 가을에 이이누마 지로飯沼二郞 선생에게 연락을 받아, 다카하시 씨의 유고가 아드님인 고시로 씨의 곁에 보관되고, 이이누마 선생 본인께서 실현하시려는 것, 미라이샤에서 출판할 의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도 1991년 1월 초순에 고시로 씨 댁에 찾아갔는데, 그로부터 7년, 이번에 출판에 이르기까지 이이누마 선생, 다카하시 고시로 씨, 미라이샤의 다구치 에이지 씨가 치른 노력에는 참으로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나 자신은 1991년 4월부터 1년 반에 걸쳐서 한국에 머물고 있어 어떤 안부도 전할 수 없었는데, 그나마 해설의 책임을 맡아서 다카하시 씨의 연구가 널리 알려지는 데 일조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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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노보루 씨의 경력이나 인품, 조선 농업 연구에 대처한 자세에 대해서는 위에 적은 오치아이 씨의 회상문에 상세하다. 여기에서는 오치아이 씨의 문장에도 바탕을 두면서, 약간의 사견도 섞어서 이 책의 저자 다카하시 노보루 씨에 대하여 간단히 소개하려 한다.
다카하시 씨는 1918년에 동경제국대학 농학부를 졸업, 니시가하라西ケ原의 농림성 농사시험장에서 1년 동안 대기 생활을 보낸 뒤, 1919년 6월에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경기도 수원)에 기수로서 부임했다. 이 수원 시대에는 유전·육종 분야의 연구에 종사, 1926년부터 1928년에 걸쳐서 미국, 독일에 유학을 했다. 수원 시대의 연구는 뒤에 학위논문으로 정리하여 공표했다.
‘Studies on the Linkage Relation between the Factors for Endosperm Characters and Sterility in Rice Plant with Special Reference to Fertilization(「벼에서 배유질胚乳質 인자와 불임성不稔性 인자와의 연쇄 관계, 특히 선택 수정에 대한 연구」)’, 조선총독부 농사시험장 구문歐文 보고 3권 1호, 1934년 10월)
귀국한 뒤는 권업모범장의 서선지장(황해도 사리원, 덧붙여 지장의 호칭은 당시의 것에 따랐음)에서 근무, 몇 개월 지나 서선지장장이 되었다. 이후 1944년에 다시 수원에서 근무하기까지 10년 이상에 걸쳐서 사리원에서 연구에 종사했다.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실태 조사는 모두 이 사리원 시대의 것이다. 다카하시 씨의 조선 농업에 관한 조사·연구는 사리원 시대에 꽃을 피웠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동안 총독부의 권업모범장은 1929년에 농사시험장으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제2차세계대전으로 일본의 전국이 악화되는 속에서, 조선에서 농업 시험 연구 체제의 총합화란 움직임이 나왔다. 다카하시 씨는 이 총합화의 중심적 추진자였던 것 같은데, 1944년 새로운 체제가 발족함에 따라서 다카하시 씨는 농업시험장의 총무부장이라는 요직에 취임, 수원에서 일본의 패전=조선의 해방을 맞았다.
해방된 뒤, 1946년 5월에 귀국하기까지의 기간, 다카하시 씨의 조선에서 구체적인 행적은 잘 모른다. 아드님인 고시로 씨의 말에 따르면, 우장춘 씨의 간청을 받아서 수원에 머물며 후진의 지도를 맡았던 듯하다고 한다. 이 책의 모두冒頭에 수록된 「이후의 조선 농업에 대하여」는 해방 이후 수원에서 집필한 것이라고 보인다. 더욱 우장춘 씨는 동경제국대학 농학부의 후배로서, 한국에서는 씨 없는 수박의 발명자(이것은 속설)로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물이다. 그 생애에 대해서는 츠노다 후사코角田房子 씨의 「나의 조국 ― 우 박사의 운명의 씨」(新潮文庫)에 상세하다.
이상이 다카하시 씨의 간단한 경력인데, 그의 연구 궤적에 대해서는 다음의 오치아이 씨의 문장이 간단히 요점을 드러낸다고 생각하여 인용했다.
다카하시 씨가 조선에서 먼저 손을 댄 품종 특성 조사는, 말하자면 형태학적인 연구로서 작물을 하나의 정지한 것으로 다루고 있다. 뒤이어 작물을 살아 있는 것으로서 그 생활 현상을 밝히려고 한 것이 생리학적인 연구이고, 또 작물을 무리로서 파악하고 환경과의 관련을 추급했다. 2년 3작, 사이짓기·섞어짓기를 연구한 시기다. 여기까지는 자연과학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다음으로 인간의 요소가 더해졌다. 다카하시 씨가 자주 했던 말에 “작물은 짓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있다. 인간이 관여하여 비로소 작물이 있다. 당연히 작물과 인간을 결부하여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실태 조사였다. 최후에 거기까지 풍부한 경험을 살찌우고, 조선 농업의 전체를 재편하는 데 노력한 것이다. 그가 걸었던 길은 필연이었다.
형태학形態學 → 생리학生理學 → 생태학生態學 → 인간학人間學의 길이다(앞에서 게재한 특별기고 810~811쪽).
다카하시 씨의 연구가 발전하여 나아간 모습을 뛰어나게 표현한 문장이다. 여기에 또 하나를 더한다면, 역사를 중시한다는 것이다. 오치아이 씨는 이 점에 대해서도 다음처럼 기술하고 있다.
다카하시 씨가 중국, 조선, 일본의 고농서를 사 모은 것은단순한 역사적 흥미 때문이 아니다. "제민요술"부터 시작한 아시아의 농서들 가운데 중국, 조선, 일본으로 흐르고 있는 아시아 농법의 원리를 파악하고, 그 안에서 조선 농업의 발전 방향을 찾으려던 것이다.
“농업 연구자는 문헌이라고 하면 가로쓰기로 쓴 것1)만 생각하는데, 인식 부족이 심하다. 더욱 바로 곁에 있는 아시아의 농서를 왜 공부하지 않는 것일까?”라고 개탄했다(같은 책 787쪽).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유고의 대부분은 오치아이 씨가 말한 인간학 단계의 것으로, 다카하시 씨의 조선 농업 연구의 백미를 이루는 부분이다. 그것만으로 이 책을 간행한 의미는 참으로 크다고 말해야 한다.
3
다카하시 씨의 조선 농업 연구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작부방식의 연구이다.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조선 주요 농작물의 작부방식과 토지이용」이야말로 다카하시 씨의 대표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그 방대한 영농 실태 조사의 주요한 내용을 이루는 것도, 조선의 각지와 각 농가에서 행하고 있는 작부방식에 관한 조사였다. 그럼 왜 다카하시 씨가 작부방식에 주목했던 것일까?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다카하시 씨가 한 연구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카하시 씨는 위에 적은 논문에서 먼저 종래의 작부방식에 간한 서양과 일본의 여러 견해를 검토한다. 그때 그가 특히 강조한 것은, 서양의 작부방식이 1년 경지이용률 100%를 넘지 않는 토지이용 방식을 전제하는 것임에 반해, 동아시아에서는 경지이용률이 100%를 넘는 토지이용이 널리 보인다는 것, 따라서 서양의 작부방식 이론과는 다른 이론이 요구된다는 것 그것이다. 그리고 서양과는 다른 동아시아의 작부방식의 독자성을 처음으로 명확히 지적한 다케다 소우시치로 씨의 견해를 높이 평가하면서, 그것을 더욱더 발전시켜서 다카하시 씨는 조선의 작부방식에 관한 독자의 분류 방법을 제시한다.
그는 조선의 작부방식 분류에 맞춰서 (1) 농사땅 이용 방식에 따른 분류, (2) 토지이용의 정도에 따른 분류의 두 가지 분류 방법을 보여준다. 그리고 전자에 따른 분류로는 논농사법, 밭농사법, 논밭 번갈아 짓는 법의 세 가지를 지적하는데, 여기에서 논농사란 무논, 밭농사란 밭이다. 후자에 따른 분류로는 휴한식, 연작식, 윤재식, 조합식의 네 종류를 들고 있다. 조합식(또는 조합한 식)이란 “같은 밭에 1년에 1작 이상의 농사를 짓는 작부 순서를 정한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이 책 25쪽...나중에 확인).” 이 조합식 작부방익이 널리 보이는 것이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 농업의 특징이고, 매우 다양한 변화를 보이는 조합식 작부방식의 합리성을 이해하는 데에 다카하시 씨가 한 작부방식 연구의 첫 번째 목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다음으로 다카하시 씨가 조선의 작부방식으로 주목한 것이 사이짓기·섞어짓기의 문제다. 사이짓기·섞어짓기의 정의에 대하여 다카하시 씨는 은사라고 할 수 있는 다케다 소우시치로 씨의 것에 따르고 있다. 곧 다케다 씨에 따르면 “사이짓기란 생활 시기를 달리하는 작물을 어떤 기간 같은 곳에 생육하게 하는 것으로, 곧 여름작물과 겨울작물을 조합한 경우”이며, “섞어짓기란 생활 기간을 같이하는 2종 이상의 작물을 같은 곳에 재배하는 것”(33쪽... 나중에 확인)이다. 조선에서는 이 사이짓기, 섞어짓기가 널리 행해지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대체로 뒤쳐진 농법이라는 인식이 농학자 사이에서는 일반적이었다. 그에 대하여 다카하시 씨는 밭농사의 조합식에 널리 보이는 섞어짓기와 밭농사의 섞어짓기 실태를 조선 팔도를 조사하고, 거기에 합리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다카하시 씨는 밭농사의 작부방식을 분류하기 위하여, 밭농사 작물을 벼과에 속하는 것 (A), 콩과에 속하는 것 (B), 벼과·콩과 이외에 속하는 것 (C)로 나누고, 다음처럼 결론지었다.
곧, 조사 면적 62억 7000만 평 가운데 AB의 형식 27억 평에 달한다. 다음으로 큰 것은 A(AA인 것 ―미야지마)이 17억 4000만 평, B(똑같이 BB인 것)이 9억 9000만 평으로서, 여기에 다음 ABC가 1억 7400만 평이다.
벼과와 콩과를 번갈이 기르는 넓이가 두드러지게 넓어서, 조사한 넓이의 약 43%에 달하고, 다음으로 AA의 형식을 가진 곳 28%, CC의 형식인 곳 4.5%, ABC 2.8%이다. 적은 것처럼 조금도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라, 조선 농민이 몇 천년이란 오랜 세월에 걸쳐 경험에 경험을 쌓아 도달한 것으로서, 뜻밖에 조선의 작부방식은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합리적으로 행해진 것을 알 수 있다(90쪽... 나중에 확인).
섞어짓기에 대해서도 똑같은 합리성이 발견된다. 곧 섞어짓기의 경우 주작물을 A·B·C, 섞어짓기 작물을 a·b·c로 표시하면, Ab, Ba의 조합을 하는 면적이 높은 비중을 점하고, 여기에서도 벼과와 콩과의 조합이 우원하다는 것이 발견된다. 이로부터 다카하시 씨는 조선의 작부방식에 대하여 다음처럼 총괄한다.
이상에 따라 보면 현재 조선의 주요 작물의 작부방식은 뚜렷하게 다종다양하고, 대부분 마음대로, 멋대로 어떠한 계획도 없듯이 작물을 심고 있는 듯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 토지이용에서 적지 않게 고심한 것을 엿볼 수 있어, 서양의 윤재식에 비하여 토지이용률이 매우 높음을 알 수 있다. 작부방식의 지역적 분포도 또한 두드러지게 지역적인 특징이 있다.
다음으로 벼과, 콩과의 전화도 또한 농가가 의식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별개하고, 서양 학자가 말하는 원리를 실행하고 있다는 점은 하나의 놀랄 만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중략…
또 이 섞어짓기 작물을 분석한 결과, Ab, Ba의 형식이 단연코 큰 넓이를 점하는 것도 또한 작부방식의 경우처럼 콩과 작물이 땅심 유지에 매우 중요한 것이란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96쪽,,, 나중에 확인).
조선의 작부방식이 지닌 합리성의 발견, 게다가 그것을 방대한 자료에 근거해 증명하는 것이야말로 다카하시 씨가 한 연구의 두 번째 목적이며, 또한 그 최대의 의의라고 할 수 있다. 농민에게 배운다는 태도로 일관한 실태 조사에 바친 열정도 이에 원천을 두었다고 생각한다.
다카하시 씨의 작부방식 연구의 세 번째 목적은 당시의 작부방식을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를 위하여 이 논문에서는 조선 작부방식의 역사적 변천을 다룬 두 절이 포함되어 있다. 이 부분의 기술은 현재의 농업사 연구의 수준에 비추어도 역시 참조할 만한 것이다. 작부방식의 역사를 총괄하고, 다카하시 씨는 다음처럼 기술한다.
조선에서 농작물의 작부방식은 그 토지이용의 정도로 보면 이미 500년 전부터 오늘날 보이는 서양의 윤재식에 비교하여 훨씬 고도화되었다. 과거 몇 천 년 동안 휴한식에서 연작식, 윤재식으로 차츰 집약된 단계를 거쳐 오늘날 보이듯이 집약적 조합식으로 진화한 것이 분명한데, 이것을 지역적으로 볼 때는 그 작부방식의 분포에 두드러진 특이성이 있다(55쪽).
다카하시 씨의 작부 연구의 네 번째 목적은 당시의 작부방식의 이해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어떻게 고쳐 나가야 하는가라는 실천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작부방식의 개량을 위해서는 단순히 농업기술의 문제만이 아니라, 농업·농가를 둘러싼 경제적·사회적 여러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이 책의 대부분을 점하는 개별 농가의 영농 실태 조사는 이러한 개량의 방향을 확실하게 하기 위한 기초 자료로서 행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카하시 씨가 실태 조사를 한 방법에 대하여 오치아이 씨는 다음처럼 소개한다.
다카하시 씨는 절대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의 조사표는 만들지 않았다. 그 까닭은 조사표를 가지고 가면 조사 항목의 칸만 채우면 그걸로 안심해 버리기도 하고, 역으로 조사표에 얽매여서 조사 항목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고 해서이다. 그리고 언제나 갱지로 된 잡기雜記 수첩 몇 권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때로는 소주 한 되를 들고서 농가의 침침한 온돌방에 앉아 아저씨와 잔을 주고받고, 흥이 나면 몇 시간이나 이야기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일부러 조사라는 명목으로 나가지 않아도 회의·강연 등으로 출장을 갔을 때에도 조금 시간에 여유가 있으면 바로 마을로 간 것이다. 이런 일로 도청道廳의 담당 공무원도 적잖게 곤란해 한 적도 있는 듯하다(앞에 말한 특별 기고 802쪽).
이렇게 해서 조선의 농업, 농가의 실태에 정통했던 것이 해방 이후에도 수원에 머물러 달라고 요청받은 까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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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다카하시 씨가 한 연구의 중심을 이룬다고 생각하는 작부방식에 관한 의미에 대해서 적었는데, 이 책에 수록된 여러 논고의 의의는 물론 이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하 조금 마음 내키는 대로지만, 이후의 연구에 대해서 이 책이 지니는 의의를 기술하고 싶다.
먼저 첫 번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농촌 경제 연구의 발전을 위해 이 책이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식민지 시기 조선의 농촌 경제의 실태에 대해서는 수는 적지만 총독부나 조선농회에서 행한 조사 자료가 몇 가지 공간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영농 실태 조사와 같이 개별 농가를 상세하고 종합적으로, 게다가 조선 전국에 걸쳐서 조사한 것은 아예 없다.
다카하시 씨의 조사는 표본 조사라 그 점에 한계가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각 농가의 1년 동안의 노동력 배분과 영농비가 조사되어 있어 이를 통해 해당 농가의 농업수지를 추정할 수 있다. 그것만이 아니라 당시의 농가가 안고 있던 문제점에 대해서도 행간에서 읽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후의 농촌 경제 연구에 바탕이 되는 바, 참으로 크다고 생각한다. 또 고용 노동력의 광범위한 존재나 품삯의 실태 등에 대해서도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두 번째로 농촌 사회의 연구에도 이 책은 큰 의미를 갖는다. 그 가운데도 특히 주목할 것은, 우결의牛結義(쪽 확인....)나 결우結耦(쪽 확인), 계契(쪽 확인) 등의 농촌 공동체에 관한 조사다. 또 특별한 이름은 없지만 품앗이, 두레 등에 관한 언급을 이 책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농촌에서 서로 돕는 조직이 가진 의미를 해명해 가는 것도 이후의 연구 과제일 것이다.
세 번째로 이것은 나의 전문 분야 밖이지만, 민속학이나 언어학의 측면에서도 이 책은 귀중한 자료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앞서 말한 서로 돕는 조직은 민속학의 연구 대상이 될 수 있고, 마을은 연중행사에 관한 취재 조사(쪽 확인) 등도 귀중한 자료일 것이다. 또 농작업이나 농기구의 이름에 대한 조사는 사투리 연구의 자료로도 귀중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네 번째로 좁은 의미에서 농업 연구란 측면에서도 이 책은 풍부한 자료를 제공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 가운데도 특기할 만한 것은 각종 농기구에 관한 조사로서, 그 이름, 구조, 각 부분의 이름 등 매우 상세하게 조사했다. 또 우리들 연구자를 자주 괴롭히는 마지기(斗落), 하루갈이(日耕)라고 하는 조선의 독특한 넓이 단위에 대해서도 이 책에서는 각지의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마지기란 씨를 뿌리는 양에 따른 넓이 단위이고, 하루갈이란 소가 하루에 가는 넓이를 말하는데, 지역에 따라서 그 넓이는 다양하다. 이 책에 소개된 전국 각지의 사례에서 마지기·하루갈이라고 하는 넓이 단위의 의미를 다시금 바로잡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현재 북조선(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 이 책의 서술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다카하시 씨가 오랫동안 황해도의 사리원에서 있었던 관계도 있겠지만, 이 책의 영농 실태 조사에서는 북부 지역이 점하는 비중이 높다. 식민지 시기에 일본의 조선 농업에 대한 관심은 쌀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조사·연구도 벼농사에 중심이 놓였다. 그 때문에 밭농사의 비중이 높은 북부 지역의 조사는 허술했는데,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은 특이한 위치를 차지한다.
최근 보도되듯이 요즘 북조선의 농업 사정은 좋지 않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일 테지만, 자연 조건을 무시한 수리개발이나 옥수수 재배를 강행한 것이 그 큰 원인의 하나란 사실은 거의 틀림없을 것이다. 이 책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 북부 지역의 예전 농업의 모습이 북조선의 농업 부흥에 무엇인가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5
다카하시 씨의 조선 농업 연구는 이상 적은 바와 같이 큰 의의를 가진 것으로, 이후 다양한 분야의 연구에 활용되길 기대하지만, 그의 연구에 여러 제약이나 약점이 있었던 것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예를 들면 영농 실태 조사의 대상이 된 농가의 대개는 중농 이상에 속한 사람으로, 하층 농가의 조사가 허술하단 것은 큰 약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 그런 편중이 생겼는지 여러 원인을 생각할 수 있지만, 역시 다카하시 씨가 총독부 농사시험장이란 식민지배 기관의 일원이었다는 데에 따르는 제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작부방식의 연구에서 농학적인 면만이 아니라, 경제적·사회적 조건도 시야에 넣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조선 농업을 규정하고 있던 식민지라는 정치적 조건에 대해서는 다카하시 씨라고 해도 정면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다카하시 씨의 연구도 큰 제약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또 한 가지, 그의 연구에서 안타까운 점은 언어의 제약이다. 다카하시 씨는 한글은 이해한 듯하나, 조사는 모두 통역을 데리고 했다. 사투리 문제를 생각하면 통역이 없는 조사는 불가능했다는 것도 모르진 않지만, 기초적인 조선말의 회화 능력이 있었다면 조사 기록의 내용은 한층 충실해졌을 것이다. 10년 이상에 걸쳐서 전국을 샅샅이 조사했던 만큼, 이 점이 더욱더 안타깝다.
1) 서양의 필법. 곧 서양의 농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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