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조선의 작부방식 발달사
조선의 작물 작부방식의 발달을 역사적으로 서술하려면, 농업이나 농업경영 방식이 발달한 자취를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농업경영 방식의 발달을 보려면, 그 배경이 되는 조선 민족의 구성이나 지역적 분포 또는 조선 사회 발달의 단계까지 탐구하여 접근해야 한다. 그래서 이들 문제를 간단하게라도 설명하는 것이 필자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두세 문헌을 인용해 조선 사회 또는 조선의 농업 변천의 개요를 기술하고, 각 시대의 농업경영 방식이나 작부방식의 발달 상태를 고찰하고, 이것이 현대에 이르는 연혁을 매우 대략적으로 기술하려고 한다.
조선에서는 석기시대 때부터 인류가 생활한 것이 확실하여, 각지에서 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당시 인류가 과연 농업을 영위했는지, 만약 농경을 했다면 어떤 방법으로 작물을 길렀는지는 지금까지 불분명하다. 그러나 석기시대에는 아마 수렵을 주로 하는 생활을 했을 것이며, 만약 농업을 했더라도 매우 유치했을 것이다.
최근 함경북도 회령 부근이나 평양 부근에서 맷돌(摺石)이라고 하는 것이 석기시대의 유물에서 발굴되었는데, 이것은 아마 조나 피 등과 같은 작은 알의 곡물 종류를 찧거나 팥을 가루 내는 등에 썼을 것이다. 평양박물관에도 있지만, 이집트의 밀을 찧고 가루 내는 도구와 거의 비슷한 것이다. 이로부터 보면, 석기시대의 인류가 이들 작물을 먹었음이 분명하고, 또는 이들 작물을 어느 정도 심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석기시대의 인류는 그 뒤 몽고 서쪽 지방에서 이동해 온 우랄알타이족에게 쫓겨났고, 현재의 조선 민족은 아마 이들 종족의 혼혈을 주체로 해, 그 뒤 몇 번에 걸쳐 대륙에서 이동해 온 한족漢族이나 바다를 건너서 일본 민족과 왕래하며 혼혈되었다고 일반적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조선의 개화는 대체로 수렵시대부터 방목시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농경시대로 들어갔거나, 또는 어떤 특수한 관계에 따라 돌발적으로 농업시대가 출현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또 농업의 기원과 발달도, 그 지리적 관계에서 볼 때 중국과 일본의 사이에 있고, 긴 교통로와 교통의 불편함을 떠올릴 때 이들 근접한 민족에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족이 황하 유역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여러 학자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황하의 유역을 형성하는 황산黃山은 산해관에서 요동 반도를 지나서 북으로는 봉천奉天에서 철령鐵嶺의 북방까지 이어지고, 동으로는 조선의 서해안에 맞닿아 이어져 있다. 그렇기에 당초 황하 지역에 거주하던 원시민족이 인구의 증가나 다른 이유로 이주를 시작하여, 성질이 같은 땅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리하여 몇 천 년 뒤, 마침내 우리 조선 반도에까지 진출했을 것이다.
우리 일본 민족도 또 신라시대 이전에 이미 남선 지방에 왕래하고 교통하며 반도의 농업을 발달시키는 데 공헌한 점은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단군시대는 전설시대라고 하지만, 이 시대에 이미 당시의 민족은 쑥과 마늘(또는 산달래)를 알았고, 나라의 사람들은 조를 먹고 삼베를 입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단군이 상상의 인물이란 건 부정할 필요도 없지만, 옛적에 이미 일부는 농경시대에 들어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뒤 기자가 기원전 1122년(지금에서 3000년 전) 한 무제武帝 시대에 조선에 봉해졌을 때, 그 민족에게 예의禮儀, 전잠田蠶, 직작織作을 가르치고, 또 그 국민은 음식에 변두籩豆를 먹었다는 것이 ?한서漢書?에 보이기 때문에, 조선 반도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됐을 때 이미 농경시대에 들어갔음이 분명하다.
조선 기자 시대(기원전 1122~195) 927년 동안. 다음에 이른바 위만시대가 되어, 기원전 194~109년에 잠시 위만의 조선시대가 출현했다. 하지만 겨우 3세대 85년으로서, 한漢나라는 위만의 조선을 멸하여 한의 식민지로 만들어 낙랑樂浪, 현토玄兎, 진번眞蕃, 임둔臨屯의 4군을 설치했다. 오늘날 보는 평양 부근의 이른바 낙랑의 유적은 당시 낙랑시대의 유물이다. 그 뒤 여러 변동이 있었고, 이윽고 기원전 82년에 한나라는 임둔, 진번 두 군을 퍠하고 현토군을 요동으로 옮겨서 조선에는 낙랑 한 군만 남았다. 그리하여 기원전 935년까지 약 1000년 동안 우리 서선 지방은 한의 식민지가 되었다.
당시 본국인 한나라에서는 이미 철제 쟁기를 쓰고 있었다고 생각되고, 당시 작물을 기르는 방법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농서로 후위後魏 고양高陽태수 가사협賈思勰의 저서 ?제민요술齊民要術?(1300년 전의 책) 안에 한나라 때의 농학자 범승지氾勝之의 농사에서 인용한 부분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그 경작법은 상상 이상으로 집약적이어서 당시의 농업 문화가 얼마나 고도했는지 판명된다. 이러한 고도의 문화를 가진 한민족이 그 식민지였던 낙랑 부근의 농업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당시 아마 쟁기도 수입했을 것이고 그밖에 철제 낫 등도 썼을 테고, 농업은 급속하게 발전했으리라 헤아릴 수 있다. 그러나 낙랑의 농업 문화는 한나라의 농업 문화와 비슷하게 밭농사를 주체로 하는 문화였음이 분명한데, 최근 낙랑의 유적에서 볍씨가 출토되었지만 과연 벼농사가 논벼인지 밭벼인지도 의문이다. 가령 논벼라 해도, 그 재배는 일반적이지 않고 주로 밭농사를 지었을 것이 틀림없다. 한편 남선 지방을 보면, 이른바 삼한시대에는 중남부 조선에 마한馬韓(경기, 충청, 황해), 변한弁韓(전라), 진한辰韓(경상)이 있었다. 강원도에는 예맥족濊貊族이 많이 살고 있었다. 당시 이들 나라의 농업 사정은 ?후한서後漢書?에 기재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 보면
마한의 항에는, 마한은 “마소를 탈 줄 모른다. 5월 밭을 마치고, 귀신을 제사하고, 10월 농사일을 마치고, 또한 뒤에도 이와 같다”라고 한다.
변한(전라)은 “토지가 비옥하고 좋아서 오곡과 벼의 옮겨심기에 마땅하고, 누에와 뽕이 풍부하다”라고 한다.
진한(경상)은 “누에와 뽕을 알고 비단을 짠다. 마소에 멍에를 메운다”라고 한다.
예맥족(강원도)는 “삼을 심을 줄 알고 누에를 길러 무명을 만든다. 과하마가 있다”라 한다.
당시 이미 집짐승으로 마소가 있고, 논농사나 밭작물을 활발히 농사지어 오곡을 기르고, 누에치기와 길쌈도 행해졌음이 분명하다.
삼국시대
이리하여 다음에 나타난 신라, 고구려, 백제의 이른바 삼국시대에는 농업이 더욱더 진보하여 발달한 것을 볼 수 있다. 지금 삼국 각각의 연대 구분(오오하라 도시타케大原利武, ?조선사대계朝鮮史大系?<1929년>)을 들면,
신라(경주慶州) 기원전 59년~935년 994년
고구려(동명왕東明王) 기원전 37년~668년 705년
백제(온조왕溫祚王) 기원전 18년~663년 681년
(후백제) 900~936년 36년
이들 시대는 전설시대에서 이른바 역사시대에 들어온 것으로 ?삼국사기? 「백제본기」나 「신라본기」 등의 문헌이 있어 당시의 상황이 명료하다. 이들 문헌에서 농업에 관계있는 부분을 발췌하여 조금 설명을 덧붙이려 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구수왕 9년(222년) 조에 “봄 3월, 남택南澤에서 백성들에게 농사를 권장했다.” 또 「신라본기」 일성왕逸聖王 11년(144년)에 “봄 2월, 농사는 정치의 근본이요, 먹을거리는 백성의 하늘이다. 모든 주군의 제방을 수리하고, 논밭을 널리 개간하라고 영을 내렸다.” 또한 「신라본기」 눌지왕訥祗王 13년(429년)에는 “새로 시제矢堤를 쌓았는데, 길이가 2170보步이다.” 법흥왕法興王 18년(501년) “봄 3월, 유사에게 영을 내려 제방을 수리했다”라고 한다. 당시 남선 지방의 농업 생산이 주로 벼농사였음이 분명하다. (맥류, 곧 밀의 기록도 여러 곳에 나옴). 낙랑 지방이 한나라 문화라 밭농사 문화였던 것과 대조하면 흥미롭다. 낙랑 시대에는 이미 소를 농경에 썼다고 추정되는데, 남선 지방에서는 신라의 임금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이 처음으로 마소 부리는 법을 가르치고,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1400년 전)이 처음으로 소갈이를 썼다고 한다.
또한 200~300년 무렵 백제에서 처음으로 호미를 썼다고 ?삼국사기?에 나온다(백남운白南雲1)의 ?조선사회경제사朝鮮社會經濟史?). 이상의 단편적인 기록으로 상상하면, 신라 초기까지는 농경 방법도 차츰 소갈이를 시작할 정도로 일반적으로는 경작 기술이 매우 낮은 수준이고, 단위면적의 수익 같은 경우도 오늘날에 비교하여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 그 작부방식은 지금의 화전민의 경작법처럼 휴한식을 주로 하여 집터 부근을 겨우 파헤쳐 여기에 씨앗을 심고, 1~2년 뒤에 땅이 척박해지고 잡풀이 무성해지면 다른 곳에서 농사짓는 형태였을 것인데, 철기의 사용과 소갈이 법의 수입은 농경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을 것이다. 그러나 인구가 매우 적어서 그 토지이용은 뚜렷하게 낮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벼농사에 대해서 보아도 물잡이논에 흩뿌리는 식이라 뒷그루 맥류 등은 아마 아직 심지 않았을 것이고, 거름도 아직 주지 않았을 것이나, 밭에는 틀림없이 맥류를 심었으나 지금처럼 1년 2작이나 2년 3작식의 작부방식은 그다지 많지 았았을 것이다. 그 경종법도 현재에 비하여 매우 조방한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가 흥성했을 때부터 말기에 걸쳐서 토지이용은 꽤 진보하여, 휴한식에서 윤재식으로 나아가고, 조합식으로 진화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려시대
이리하여 고려시대에 들어오면, 토지이용은 급격하게 진전되어 버려 놓은 밭도 경작하도록 장려할 필요가 생겼을 것이다. 그것은 다음 기사에서도 드러난다.
광종光宗 24년(973년) 12월 무렵에 “묵정밭을 일군 사람은, 사전私田은 그에게 첫해 거둔 것을 모두 주고 다음해 처음으로 밭주인과 반씩 나누게 하고, 공전公田은 3년에 한하여 모두 주고 4년째에 처음으로 법에 따라 조세를 거두라”고 했다. 묵정밭이란 한 번 일궜던 밭이고 그 뒤 버려진 이른바 폐경지廢耕地이다. 이처럼 버려진 밭이 일반에 존재했다는 것은 작부방식에서 볼 때는 휴한식이 여전히 많이 존재했다는 증거다. 문종文宗 8년(1054년) 3월 무렵에, “무릇 그 밭의 품등은 묵히지 않은 밭(不易田)을 상上으로 치고, 한 번 묵힌 밭(一易田)을 중中으로 치고, 두 번 묵힌 밭(兩易田)을 하下로 친다. 묵히지 않은 산밭 1결은 평전平田 1결에 준하고, 한 번 묵힌 밭 2결은 평전 1결에 준하고, 두 번 묵힌 밭 3결은 평전 1결에 준한다.” 곧 당시 묵히지 않은 밭은 1/1작 이상의 농사땅이고, 한 번 묵힌 밭은 1/2, 두 번 묵힌 밭은 2/3작식 작부방식일 것이다. 이처럼 휴한식이 꽤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경작을 장려한 이유임을 알 수 있다.
또 백남운 씨(p.147)에 의하면, 성종成宗 11년(992년) 공전의 조세에 관한 판정에 논과 밭을 명확하게 구별하며, 각각 상중하의 3등급제에 따라 징세액이 명기되어 있다. (주. ?고려사高麗史? 권2, 태조太祖 26년 4월 조) 백남운 씨에 따르면, “판범전품判凡田品” 운운한 것은 결코 일반적인 토지 등급제를 처음으로 정한 것이 아니고, 비탈밭, 곧 산밭에 신규 등급제를 적용하겠다고 법적으로 확인한 일이다. 그래서 그 산밭을 2등급으로 규정한 것은 그 경작도耕作度에 기초한 것이다. 곧 해마다 경작하는 묵히지 않는 상전上田, 1년 묵해야 하는 중전中田, 2년 묵혀야 하는 하전下田 등이다. 그 휴경은 물론 폐경지의 땅심을 회복시키려는 자연적 시비법일 테지만, 이런 휴경에 따라 전품을 구별하는 것은 ?전한서前漢書?에 있는 “해마다 경종하는 곳은 묵히지 않는 상전이 되고, 1년 묵히는 곳은 한 번 묵히는 중전이 되고, 2년 묵히는 곳은 두 번 묵히는 하전이 된다”는 구절을 재현한 듯한데, 또한 그 대비의 표준이 되는 평전이란 길든밭을 말한다. “요컨대 산밭과 평전의 대비를 두고서 전품을 통일하고자 한 것은, 산밭에 새로이 전품제를 규정함과 함께, 공전제의 발전을 계획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백남운, p.148)
이상에 따라서 명확해졌듯이, 당시 윤재식 또는 휴한식이 많이 존재했던 것이 분명하다. 서양의 이포식, 삼포식 등의 방식은 우리 조선에서는 이미 고려 초기, 곧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에 벌써 시험이 끝났다. 고려조는 이 휴한식을 할 수 있는 한 연작식이나 윤재식으로 진보시키려고 노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곧 농민은 조세의 중압이나 인구의 증가나 생활 정도의 향상, 당시 정부가 개간을 장려하여 논밭과 들을 개간하는 동시에, 정부는 적극적으로 묵히지 않는 밭이 늘어나도록 꾀하여 묵정밭의 방지책을 세웠음을 다음 인용으로도 알 수 있다.
예종睿宗 6년(1111년) 8월 조에, “3년 이상된 묵정밭을 일구면 2년 동안 거둔 것은 전호佃戶(농사지은 사람)에게 모두 주고 셋째 해는 땅주인과 반씩 나누고, 2년의 묵정밭은 4등분하여 1/4은 땅주인, 3/4은 전호가 갖는다. 1년 묵힌 밭은 3등분하여 1/3은 땅주인이 2/3는 전호가 갖는다”라고 했다. 곧 묵힌 밭을 농사지으면, 묵힌 햇수가 긴 밭일수록 조세 부담을 줄여서 최대한 토지를 이용하게 기하는 것이 명료하게 판명된다. 이렇게 밭을 묵히지 않도록 장려하여 이윽고 길든밭이 늘어나고 2년 2작, 3년 3작 등의 윤재식에서 차츰 2년 3작이나 1년 2작의 조합식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리하여 고려시대에는 새로운 각종 농작물의 수입과 더불어 새로운 작부방식이 고안되어 토지이용이 획기적으로 발전했다고 생각한다. 곧 ?고려도경高麗圖經?(1124년)에 따르면, “나라의 땅이 동해에 닿아 있고,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아 가파르고 험하며 평지가 적다. 그러므로 농토가 산간에 많은데, 그 지형이 울퉁불퉁하여 갈고 일구기 힘들고,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사다리나 층계 같다. 고려에서는 감히 사전私田을 가질 수 없다”라고 했다. 서긍徐兢의 ?고려도경?은 송나라의 선화宣和 원년(고려 인종 2년)에 지은 것이기 때문에, 이는 고려가 융성할 때 농사짓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곧 산간지대의 밭농사 형태로서 그 지형에 따라 밭을 일구는 사업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확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조 충선왕忠宣王 2년 11월 조(약 600년 전)에는, “재추宰樞2)에서 의논해 탐방사探訪使를 모든 도에 보내 세법을 다시 정해야 한다. 혹 말하길, 지금 군현의 논밭은 많이 일구었기에, 마땅히 밭을 헤아려 부세를 늘려서 나라 살림에 덧붙여야 한다고 운운했다”고 나온다. 당시 이미 묵히는 땅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음을 이로써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고려 말기 공양왕恭讓王(527년 전) 시대의 농사땅 넓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
실전實田 |
황원전荒遠田 |
황원전 % |
경기 |
16,1755결 |
8387결 |
5 |
6도 합계 |
49,1342결 |
16,6645결 |
25 |
총계 |
65,3097결 |
17,5020결 |
21 |
포에서 실전의 1결은 황원전의 1결에 비하여 적은 넓이이기에 황원전의 비율은 그 퍼센트보다 커야 하지만, 지금 실전을 묵히지 않는 밭이라 보고 황원전을 묵히는 밭이라 보면, 당시 이미 경기 지역에서는 20뙈기의 밭에서 겨우 1뙈기만 묵혔다. 곧 토지이용율은 95%가 되고, 6도 합계에서는 황원전은 1/4이고 토지이용율은 75%에 해당한다. 이리하여 전국적으로 보면 토지이용율은 79%다.
이 토지이용율의 계산은 실전의 토지이용율을 100%라 간주하는데, 실제로는 당시 이미 2년 3작이나 1년 2작이 성행했다는 것은 조선 초기에 편찬된 ?농사직설農事直設?의 작부방식을 보아도 명확하기 때문에 토지이용율도 아마 전국적으로 보더라도 100% 이상에 도달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
고려의 뒤를 이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인구가 더욱더 늘고 농사땅이 차츰 개간되어 여러 새로운 작물, 예를 들면 목화, 담배, 고구마, 고추 등 여러 작물이 새로이 조선 반도에 수입되거나 또는 고려시대에 들어왔던 것이 급격하게 각지로 전파되어 농민이 이것을 채용해 그들이 기르는 작물에 편입하는데 이르러서, 작부방식은 복잡해지고, 집약도는 높아졌다고 생각한다.
조선 태종太宗 원년(지금으로부터 515년 전) 조에 “근래 사람들이 모여서 논밭을 일군다. 마땅히 타량打量을 더하여 공부貢賦를 정한다”는 법령을 반포했다. 고려시대의 한 번 묵히는 밭 또는 두 번 묵히는 밭이 대부분 남지 않아 1년 1작이나 묵히지 않는 밭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당시 주요 작물은 무엇이었는지는 조선 태종의 친경전親耕田에 심었던 작물을 보면 추측할 수 있다. 곧 조선 초기에 수도는 지금의 개성이었는데, 당시 개성에서 20리里(지금의 8㎞) 떨어진 곳에 서적전西籍田3)을 두고, 동쪽으로 10리(지금의 4㎞) 떨어진 곳에 동적전東籍田4)을 설치하고서 이것을 공전公田으로 하고, 따로 임금이 스스로 농사지을 수 있는 이른바 친경전을 설치하여 해마다 선농제先農祭를 지내고 친경하는 의식을 행했는데, 그때 이러한 적전과 친경전에서 기른 작물을 들면 다음과 같다.
동·서적전 : 논벼, 기장, 수수, 차조, 보리, 밀, 콩, 팥, 녹두, 옥수수, 가시연(董茨), 봄보리
친경전은 여드레갈이이고, 여기에는 이른바 구곡九穀을 길렀다. 당시 구곡은 논벼, 조, 기장, 피, 옥수수, 콩, 팥, 보리, 밀이다.
이로써 볼 때, 당시의 주요 식량작물이 대략 지금의 것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활발히 맥류 농사를 장려한 것은 태종 9년 조에 “동북면의 기아에 왕이 말하길, 동북의 백성은 밀·보리를 심지 아니하니, 비록 보리가 익을 때가 되어도 반드시 진대를 받아야만 살 수 있다. 이제부터 감사와 수령으로 하여금 봄·가을로 절기에 따라 밀·보리를 심도록 권장케 하라”고 나온다. 당시 동북면, 곧 현재의 함경도에는 보리를 심지 않아서 봄보리와 가을보리를 기르도록 장려하고 흉작에 대비하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밀·보리농사를 장려한 것은 곧 토지이용을 한층 증진하여 작부방식이 1년 1작에서 2년 3작으로 나아간 것을 뜻한다. 현재, 함경남북도의 바닷가 지방에서 봄보리를 편입해 일반적으로 2년 3작식을 하고 있는 것과 관련지어 생각하면 매우 흥미롭다.
다음에 세종(499년 전) 7년 조에 “임금이 홍제원洪濟院·양철원良哲院에서 영서역迎曙驛 갈두들(加乙頭)에 이르기까지 고삐를 잡고 천천히 가는 길에 밀·보리가 무성한 것을 보고, 임금이 흔연히 기쁜 빛을 띠었다”라고 나온다. 이 세종 임금은 조선의 역대 왕 가운데 가장 걸출한 임금이다. 임금이 교회에 살찐 말을 타고 밀·보리가 왕성하게 자라는 5~6월의 맑은 날에 천천히 가며 말고삐를 잡고서 기분이 좋아 기쁜 빛을 띠었다는 참으로 세종 임금의 기분을 잘 표현한 한 폭의 그림 같은 느낌이다.
이 세종 임금은 수없이 많은 사적을 남겼는데, 특히 농업 방면에서 빠트릴 수 없는 농서를 편찬했다. 이것이 조선에서 가장 오래된 유일한 것이다. 곧 세종 11년에 각지의 모범 농가를 모아서 ?농사직설?이란 농서를 편찬해 안팎에 배포했다.
이 ?농사직설?에서는 씨를 고르는 법부터 농사땅의 이용, 곧 밭, 척박한 밭, 풀밭의 이용과 그 방법을 설명하고, 또 황무지를 변별해 다루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작물에는 삼, 벼, 조, 피, 콩, 팥, 녹두, 밀·보리, 참깨, 메밀 등을 기르는 법, 거두기 등과 다른 작업까지 상세히 기술한다. 그 기술에서 보면, 지금의 농사법과 거의 다르지 않을 정도로 집약된 작부방식을 거론하고 있다. 그 작부방식은 나중에 이야기할 것이다. 주) 목화를 기르는 법을 거론하는 ?농사직설?이 있는데, 당시 아직 목화는 일반적이지 않았기에 ?농사직설?을 다시 찍을 때 덧붙인 것이다.
성종成宗 원년(446년 전) 조에는 “밀·보리 씨앗은 미리 비축하고, 메밀은 때에 따라 농사짓도록 권해 구황에 대비하라고 하셨다”라고 한다. 또 24년 조에 “늘 농사짓는 곳을 정전正田이라 부르고, 혹은 농사짓고 혹은 묵히는 곳을 속전續田이라 부른다. 그래서 그 정전이라 부르는 곳에서 지품地品이 척박한데 곡식 농사짓는 곳, 또 속전이 기름져 배가 나면 수령은 척박함을 기준으로 관찰사에게 보고해 개정하라”고 한다. 여기에서 늘 농사짓는 밭은 정전이고, 토지이용도에서 보면 1년 1작 이상이다. 속전이란 혹은 묵히고 혹은 농사짓는 곳으로 휴한식에 따르고 토지이용은 1년 1작 이하다. 곧 당시 아직 휴한식의 작부방식이 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보다 후대인 인조仁祖(292년) 시대가 되면 속전, 곧 묵히는 밭이란 말을 쓰지 않고, 황무전荒蕪田과 기경전起耕田을 구별도 않으며 보통의 밭 종류에는 무논, 밭, 습한 밭, 텃밭, 부대밭으로 구별한다. 이 당시 부대밭에는 휴한식이 행해졌겠지만, 일반 농사땅은 이미 1년 1작 이상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이후에는 불역전不易田, 일역전一易田, 양역전兩易田이라든지 진전, 속전, 정전 등의 용어가 확 줄어들었다.
논벼 모내기 금지령
한편 인구가 더욱 늘어났는데, 이에 비해 농사땅의 생산물이 그와 비례하여 늘지 않았기 때문인지 농민은 이전의 논벼를 곧뿌림해 기르다가 활발히 모내기를 시도하게 되었다. 더욱이 논벼의 모내기는 세종 시대(500년 전)에도 이미 경상도의 매우 일부 지방에서 행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때는 대부분 곧뿌림했다고 생각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정벌, 곧 임진왜란 등으로 눈에 띄게 혼란해진 동시에 농업에서도 변화가 보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농가에서는 이전의 물잡이논에 곧뿌림하는 방법에서 천둥지기에 모내기하는 방법을 활발히 시도했지만 수리시설이 갖춰지지 않았기에, 이 논벼 모내기는 매우 위험스러웠다. 숙종肅宗 24년(241년 전) 조에는 “논벼 모내기의 금지령을 내린다.” 그 뒤 헌종憲宗 4년(81년 전)에도 다시 벼 모내기의 금령을 내린다.
현재 벼농사, 특히 시정始政 이후 벼농사의 모내기가 가장 안전하고 다수확을 올리는 재배법이 되어 있는 현재로부터 당시 벼농사의 상태를 상상하면,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1) 백남운(1895~1974)은 전라북도 고창 출생으로, 수원 고등농업학교을 거쳐 일본의 동경대 상과대학을 졸업했다. 1925∼1938년 연희전문학교의 경제학 교수로 재직하며 1933년 한국의 원시·고대 사회경제에 관한 최초의 사회경제사 연구라 할 수 있는 ?조선사회경제사?를 발간하고, 1937년에는 그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조선봉건사회경제사상?을 발간했다.
2) 고려 시대에 둔 재부宰府와 중추원을 아울러 이르는 말
3) 본래 고려시대에 설치된 교채공전郊采公田으로, 개성의 동남문인 보정문保定門 밖 20리에 있으며 땅이 기름지기로 이름났다. 규모는 태종 때 약 300결이었으나, 20여 년 뒤인 세종 때는 70결만 남았다가, 조선 후기의 어느 시기에는 66결 정도가 되었다. 이곳에서 수확한 곡식은 종묘사직 등의 제사에 쓰이는 제물과 종묘의 천신薦新에 쓰이다가, 정조 때부터 호조에 회부하여 적전을 유지 관리하는 비용으로 썼다.
4) 도성 10리 밖에 있었고, 개성 교외에 설치한 서적전西籍田에 대칭하여 부른 이름이다. 규모는 100결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필분각苾芬閣이라는 관아를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특히 이곳에는 국왕이 직접 농사짓는 땅인 친경전親耕田을 두었다.
'농담 > 읽을거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뒷날의 걱정이 없구나 - 다카하시 고시로 (0) | 2009.09.10 |
---|---|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 - 2. 조선 주요 농작물의 작부방식과 토지이용 (4) (0) | 2009.07.11 |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 (0) | 2009.06.11 |
시마타니 농장 (0) | 2009.01.25 |
남선지장의 과거와 현재 (0) | 2009.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