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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읽을거리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을 공부하기에 앞서(2년 전 청산도에서 발표한 내용

by 石基 2010.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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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에서 본 우리의 전통농업


 

들어가며


본론에 앞서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이하 조선반도)은 어떤 책이고, 저자인 다카하시 노보루는 누구인지 간략하게 소개하겠다. 먼저 이 책의 주요 내용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농사시험장에서 일하던 다카하시 노보루가 조선 팔도를 다니며 농민을 대상으로 직접 조사한 농사와 관련된 기록을 모아 놓은 자료이다. 그는 주로 당시 농민들이 농사짓던 방식부터, 무엇을 어떻게 먹고 땅값이나 농산물·농기구의 값은 얼마인지 등을 조사했다. 직접 조사한 내용인 만큼 당시 실정을 느낄 수 있는 생생한 기록이다. 하지만 이 책은 아들이 보관하고 있던 그의 초고를 정리하여 1991년 일본에서 출판한 것으로서, 저자가 직접 정리하지 못한 만큼 체계나 완결성은 좀 떨어진다. 또한 주로 식량 작물에 초점을 맞추어, 푸성귀 등은 다루지 않았다는 한계도 있다. 몇 가지 한계는 있지만 당시 농업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임은 틀림없다. 조선총독부의 주관으로 조사된 다양한 내용들이 지금도 유용하게 쓰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책의 저자인 다카하시 노보루는 1892년 일본 후쿠오카에서 태어나, 1918년 동경대학 농학부 농학과를 졸업했다. 후쿠오카는 일본에서도 농법이 뛰어난 곳으로 알려져, 19세기 후반에는 정부 차원에서 그곳의 농법을 정리해 전국에 보급할 정도였다. 그는 그 이듬해인 1919년부터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 수원지장에서 일하면서 조선에 첫 발을 내딛어, 그곳에서 9년을 일하다가 1928년 황해도 사리원에 있는 서선西鮮지장의 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후 1944년에는 농사시험연구기관을 정비·통합하면서 다시 수원지장으로 돌아와 총무부장이 되어, 1946년 5월까지 그곳에서 나머지 업무를 처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그해 7월 심근경색으로 55살에 숨을 거둔다.



조선 농업 실태 조사


그가 조선반도의 농법을 조사한 가장 큰 목적은 식량 증산에 있었다. 아마도 세계적인 경제 공황과 함께 찾아온 식량 위기가 그 동기였을 것이다. 그는 1937년 7월 6일 경상도로 출장을 가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조사에 나선다. 하지만 이때는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본 것을 적어 놓았을 뿐이고 이후 더 자세하게 조사하려고 길을 나서는데, 그 장소와 일정은 다음과 같다.


1937년 : 7월 29일 경기도→9월 1일 이후 황해도→9월 6~7일 경상도→9월 27일~10월 5일 강원도→10월 24일~11월 1일 평안도

1938년 : 3월 16일 황해도→6월 30일~7월 16일 함경도→11월 6~10일 충청도

1939년 : 2월 26~28일 전라도→4월 30일~5월 6일 황해도→5월 20일~6월 3일 제주도→7월 2~8일 강원도→10월 12~13일 충청도→10월 13~21일 전라도

1940년 : 2월 25일 충청도→3월 4~9일 황해도→10월 26일~11월 3일 함경도→11월 13~25일 경상도

1942년 : 6월 1~5일 강원도

1943년 : 7월 3~9일 경기도


이처럼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쉴 틈 없이 다니느라, 아들의 기억에 따르면 아버지를 볼 새도 없었다고 한다.



전통농업과 현대농업


이야기에 앞서 먼저 전통농업은 무엇인지 짚고 넘어가자. 결론부터 말하면, 전통농업이란 산업화 이전 자급을 위주로 하는 가족이나 마을 단위의 중소농 중심 농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종종 전통의 범위를 좁혀서 우리의 옛 농사만 전통농업으로 한정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유럽도 산업화 이전의 농업, 곧 전통농업에서는 삼포제와 콩을 이용한 농법 등 우리와 비슷한 방식으로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가 상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농민은 노동자로, 자급 중심의 농사는 상품 생산을 위한 농업으로 바뀌었다. 우리도 일제강점기부터 그러한 경향을 보이다, 1970년대 산업화 이후 뚜렷하게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 조선반도란 책의 내용을 보면, 조금씩 금비金肥를 쓰는 모습에서 그 분기점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통농업의 특성은 현대농업의 특성을 살펴보면 저절로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앞에서 전통농업을 산업화 이전 자급을 위주로 하는 가족이나 마을 단위의 중소농 중심 농업이라고 정의했는데, 현대농업은 그와 달리 산업화 이후 상품 판매를 위주로 하는 개인 단위의 대농 중심 농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의 농업 정책이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현대농업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낸다는 경제학의 논리에 맞춰, 넓은 땅에서 많은 에너지를 쓰면서 가장 많은 수확량을 올리는 것이 목표이다. 이러한 목표는 일부 상업적 유기농업에서도 추구하는 바로서, 어떨 때는 관행농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쓰기도 한다.

이러한 현대농업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은 바로 ‘석유’이다. 산업화와 과학기술이 진행되고 발전함에 따라 이제 석유는 일상생활과 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농업도 예외는 아니어서, 산업화에 따라 도시로 떠난 일손을 석유가 대신하고 있다. 각종 농기계부터 비닐, 농약, 화학비료 같은 석유화학제품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 이들 없이는 농사짓고 살 수 없을 정도다.

또 ‘시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생활에서 시장 거래를 통해 얻는 돈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지나치게 돈에 의존하고 맹목적으로 따르면서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현대농업에서는 한정된 땅에서 많은 수확을 얻고자 홑짓기, 석유화학제품과 지하수의 남용 등으로 땅은 물론 사람과 자연까지 병들고 있다. 물론 이는 농촌만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의 소비자들이 몇 배는 더 지나치다. 심지어 요즘 도시 사람들은 이게 콩인지 보리인지도 모르는 숙맥들뿐이다.

지금까지 현대농업을 매우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불거지면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로 전통농업에 주목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 조선반도란 책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자.



작부 체계 ― 사이짓기, 섞어짓기, 그루갈이, 돌려짓기


현대농업과 전통농업의 가장 큰 차이는 작부 체계일 것이다. 작부 체계란 한정된 땅에 몇 가지 작물을 조합하여 순서대로 재배하는 방식을 말한다. 넓게는 작물을 생산할 때 필요한 자원 관리, 자재 투입, 재배 기술 등도 이에 포함된다. 그런 맥락에서 현대농업의 작부 체계가 갖는 특징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수확량만 늘리고자 홑짓기와 석유화학제품을 쓴다는 데 있다. 이러한 방법이 처음에는 비약적으로 생산량을 늘려 녹색혁명이라고까지 찬양을 받았지만, 이제는 지나치게 땅을 혹사시켜 메말리고, 익충까지 죽여 오히려 더 많은 병해충을 불러오고, 더 나아가서는 사람을 죽이고 자연을 파괴하는 결과까지 불러왔다. 이제는 과학기술이 발전해 적정량만 쓰면 안전하다고 하지만, 그 폐단은 고스란히 우리와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의 몫이 되었다.

그러나 자급 위주의 중소농이 중심이었던 전통농업에서는 상품성보다는 먹는 데 초점을 맞춰, 작물들의 다양한 특성을 파악해 한정된 땅에서 서로 어울리게 길렀다. 또한 석유화학제품에 의존하기보다는 사람과 살아 있는 것들 ―소, 미생물 등― 의 힘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실제로 어떤 작부 체계를 운영하였는지 조선반도의 기록을 통해 살펴보자.

먼저 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논벼 그루갈이 보리 ― 순천, 광주, 남원, 보성, 벌교, 통영, 익산, 옥구, 나주, 남지, 영덕, 봉화-밀, 아산.

2) 삼(3월 중·하순 심어 7월 중순 수확) 그루갈이 논벼 ― 경북, 특히 안동.

3) 마늘 또는 감자 그루갈이 논벼 ― 경북.

4) 논에는 거의 논두렁콩을 심는다 ―남조선 전반.


위에서 보듯이 그루갈이를 할 수 있는 남부 지방에서는 대부분 뒷그루로 보리를 심었다. 밀은 보리보다 수확이 늦어 모내기에 영향을 주고 지금처럼 많이 먹지도 않았기에, 논에는 별로 심지 않았다. 삼베는 지금도 안동의 유명한 특산물로서, 당시에도 상품성 때문에 논벼의 앞그루로 심었을 것이다. 삼베 말고도 왕골이나 골풀 같은 작물을 논의 일부에 심어 자리나 농기구 등을 만드는 데 썼다. 마지막으로 논두렁콩을 많이 심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이처럼 논에 그루갈이를 함에 따라 지금과 못자리와 모내기철이 어떻게 달랐는지 살펴보겠다.


못자리에 볍씨뿌리기 : 음력 3월 초(교동도), 4월 17일(수원), 4월 20일(개성), 음력 3월 중순(영흥도), 음력 3월 중순(보성), 5월 초(원주), 5월 10일(제주), 음력 3월 말~4월 말(통영), 음력 2월 초(익산-불이흥업농장)

모내기 : 6월 말~7월 말(제주), 음력 5월 8~20일까지(순천), 음력 5월 10~20일(익산), 6월 15일(옥구), 하지 중심(남원), 음력 5월 22일(보성), 음력 5월 말~6월 10일(통영), 6월 20~30일(나주), 음력 4월 29일~5월 10일(수원), 음력 5월 초~말(교동도), 음력 4월 말~6월 초(영흥도-물이 부족해서), 6월 중·하순(원주), 5월 말~6월 20일(개성), 음력 4월 중순(홍천)


이를 통해 대부분 이팝나무에 꽃이 필 때쯤 못자리를 만드는데, 북쪽으로 갈수록 조금씩 늦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모내기는 지금보다 늦은 하지 무렵이었다. 지금처럼 모내기가 빨라진 데에는 안정적으로 수확량을 늘리는 데 목적이 있다. 벼뿐만 아니라 참외와 딸기 같은 작물을 보면 요즘은 한겨울이 제철인 양 시장에 쏟아진다. 이처럼 현대농업에서는 상품성을 목표로 작물들을 제철이 아닌 때 심고 거둔다. 덕분에 제철에 맞는 농산물을 보기 힘들어졌다. 제철에 맞는 농산물을 내면 오히려 그것이 더 상품성이 높을 정도이다. 작물이 제철을 잃어버린 것과 함께 사람도 철을 모르고 산다. 한겨울에는 반팔, 한여름에는 긴팔을 입는 사람들까지 있다. 농업을 통해 이런 철부지들이 철 좀 들게 해야 하지 않을까.

다음으로는 밭의 작부 체계를 살펴보자. 예상하듯 논보다 훨씬 다양하게 이용했다.


1) 보리 그루갈이 조에 섞어짓기 콩 또는 팥 : 제주, 순천, 안동, 괴산, 수원, 양주, 금곡, 강릉.

2) 보리 그루갈이 콩→보리 사이짓기 목화→보리 그루갈이 콩 : 순천, 광주, 남원, 남지, 나주, 안동, 청주, 대전, 아산, 수원, 원주.

3) 보리 그루갈이 콩에 섞어짓기 수수 : 수원, 양주, 덕적도-메밀, 금촌, 가평, 강릉.

4) 보리 사이짓기 콩 : 의성, 안동, 대전, 개성-수수·녹두, 평창, 강릉.

5) 조 섞어짓기 팥 또는 수수 : 경북, 영덕, 개성, 철원, 신막.

6) 밀 사이짓기 콩에 수수 섞어짓기 : 연천, 원주, 평창, 김화.

7) 보리 사이짓기 조 : 안동, 가평, 강릉, 김화.

8) 콩 섞어짓기 수수 : 나주, 충북, 수원, 금곡.

9) 조나 콩 둘레에 섞어짓기 들깨, 참깨, 아주까리 : 경북, 수원, 양주.

10) 보리 그루갈이 밭벼 : 경북, 청주, 대전.

11) 감자 그루갈이 무·배추 : 남원, 대전, 나주.

12) 콩 또는 팥 섞어짓기 옥수수 : 철원, 세포, 평창.

13) 콩에 들깨 섞어짓기 : 충북, 금촌-수수.

14) 가을보리 줄뿌림에 사이짓기 콩 점뿌림 : 경북, 충북.

15) 보리 그루갈이 무·배추 : 수원, 양주.

16) 보리→조→보리→콩 : 영덕, 괴산.

17) 귀리 사이짓기 콩 : 연천, 세표.

18) 보리 그루갈이 고구마 : 제주, 대전.

19) 감자(겨울) 그루갈이 메밀(여름)→피(여름)→감자 그루갈이 메밀 : 제주.

20) 감자 그루갈이 무→조 섞어짓기 콩 : 제주.

21) 보리 그루갈이 조→풋베기콩→보리 그루갈이 조→풋베기콩 : 제주.

22) 고구마→밭벼→보리 그루갈이 고구마→밭벼 : 제주.

23) 감자 사이짓기 콩·옥수수·팥 : 평창.

24) 감자 사이짓기 콩→가을보리 그루갈이 조 : 강릉.

25) 밭벼 섞어짓기 수수 : 남원.

26) 보리→조→밀→콩 : 괴산.

27) 조 섞어짓기 콩, 수수, 녹두 : 금곡.

28) 봄보리 그루갈이 무·배추 : 홍천.

29) 보리→콩→보리→조·수수 : 울진.

30) 밀 사이짓기 조 : 홍천.

31) 콩 섞어짓기 옥수수 : 평창.

32) 감자 그루갈이 조 : 강원.

33) 가을보리(겉보리) 또는 봄보리(쌀보리)→콩→가을보리→조 : 봉화.

34) 오이 그루갈이 무·배추에 섞어짓기 파 : 수원.

35) 마늘 섞어짓기 상추 : 개성.


밭 작부 체계의 가장 큰 특징은 사이짓기와 섞어짓기이다. 한마디로 사이짓기는 수확기가 다른 작물을 한 곳에서 키우는 방법이고, 섞어짓기는 특성이 다른 작물을 한 곳에서 키우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식은 기계에 의존하여 대규모로 농사짓는 현대농업에서는 실행하기 어렵다. 콩이면 콩 하나만 심어서 비행기로 관리하면 되는데, 여러 작물이 섞여 있으면 하나하나 손이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방식은 중소농이 중심이었던 전통농업의 핵심이다.

또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는 지금과 달리 식량 생산이 주된 목적이어서 보리나 조 같은 작물이 중심이었다. 당시는 대부분이 농민이며 아직 농업이 중심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조선반도를 보면 푸성귀 종류는 대부분 집 근처 채마밭에서 해결했다. 물론 경성 같은 큰 도시 근처에서는 많이 지었지만, 지금처럼 인구밀도가 높지 않아서 도시에서도 채마밭 정도는 일구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도시농업의 활성화가 농촌 인구의 증가로 이어지는 효과도 있지 않을까 예상한다. 물론 수도권 과밀화와 같은 더 복잡하고 다양한 요인들이 있지만.

이러한 전통농업의 작부 체계에서 핵심 작물은 바로 콩이다. 우리의 식생활과 밀접하기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알려진 대로 콩과 작물은 땅힘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유럽의 전통농업에서도 이를 이용하고자 작부 체계에 꼭 콩을 넣었다고 한다. 다음 자료는 콩을 심었을 때의 효과를 기록한 책의 내용이다. 이는 수원 지방에서 수수와 콩·조·들깨를 심었을 때의 수확량을 비교한 결과이다.


1) 수수와 콩일 경우 : 수수 4~5말, 콩 6말 정도.

2) 수수와 조일 경우 : 수수 2~3말, 조 1말~1말 5되.

3) 수수와 들깨일 경우 : 수수 2~3말, 들깨 5~6말 정도.


이를 통해서도 콩의 효과를 알 수 있다. 지금처럼 화학비료에 의존하는 대신, 작부 체계를 짤 때 사이짓기·섞어짓기·그루갈이에 콩을 이용하는 방법을 도입하면 좋겠다. 아래의 기록은 이와 관련해 참고할 만한 사항으로서, 당시 세포농사시험장의 시험 재배 결과이다. 여기서도 작부 체계에 콩과 작물을 넣으면 홑짓기할 때보다는 콩과 작물의 수확량이 떨어지지만, 대신 다른 작물들의 수확량은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시험 넓이

150평 1구역

시험 작물

첫 번째 방식 : 감자, 콩, 옥수수

두 번째 방식 : 팥, 옥수수, 팥

거름 준 양

(300평에)

관습처럼 준 양 : 두엄 100貫, 황산암모늄 1.5貫, 과인산석회 1.5貫, 나뭇재 5貫

표시하고 준 양 : 두엄 200貫, 황산암모늄 3貫, 과인산석회 3貫, 나뭇재 10貫

비고

첫 번째 방식 : 감자 4, 콩 5, 옥수수 1의 비율로 심음

두 번째 방식 : 팥 5, 옥수수 1의 비율로 심음

수확량(300평에) 

섞어짓기(그루 수)

홑짓기(넓이)

첫 번째 방식

표시 : 감자 212.4貫, 콩 0.227섬, 옥수수 0.749섬. 조수입 계 33원 31전

관습 : 감자 160.5貫, 콩 0.284섬, 옥수수 0.663섬. 조수입 계 30원 64전

표시 : 감자 154.8貫, 콩 0.449섬, 옥수수 0.210원. 조수입 계 26원 54전

관습 : 감자 128貫, 콩 0.416섬, 옥수수 0.242섬. 조수입 계 24원 48전

두 번째 방식

표시 : 옥수수 1.113섬, 팥 0.448섬. 조수입 계 27원 41전

관습 : 옥수수 1.191섬, 팥 0.414섬. 조수입 계 29원 49전

표시 : 옥수수 0.386섬, 팥 0.564섬. 조수입 계 18원 96전

관습 : 옥수수 0.364섬, 팥 0.567섬. 조수입 계 18원 85전

 

마지막으로 감자와 옥수수를 보면, 대부분 강원도와 같은 산간 지역에서 심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 땅에는 그런 작물이 어울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품성을 따라서 작물을 선택하여 인위적인 환경을 만들어 재배하기보다는, 그 땅에 어울리는 작물을 선택해 농사를 지었다. 앞에서 “제철”을 말했는데, 그것만큼 중요한 전통농업의 핵심이 바로 “제땅”이다.



그밖에 ― 씨앗, 거름, 쟁기질


당시 볍씨의 경우 농사시험장에서 보급한 다마금, 은방주, 영광, 애국, 적신력 같은 보급종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밭 작물은 대부분 토종을 이용했다. 이 책의 기록을 보면, 농민들에게 품종을 묻는 경우가 자주 나온다. 그럴 때면 농민들은 ‘흰콩’이니 ‘왕콩’, ‘붉은팥’, ‘울산녹두’ 등이라고 대답했다. 그저 수확도 괜찮고 다른 것보다 맛이 좋다거나 하는 이유로 씨를 받아 썼다. 별다른 이름이 없는 그 품종들이 바로 토종이다.

안완식 박사님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의 토종은 산업화 이후 급격하게 감소했다고 한다. 이는 산업화 이후 다수확의 방향으로 방향을 설정한 결과이다. 현대농업이 추구하는 바대로 나아간 결과, 이름 없던 토종은 거의 멸종 상태이다. 이제는 다국적 종자회사가 씨앗을 독점하여 지적재산권을 행사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 문제가 이후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예측만 할 뿐 아무도 알 수 없다. 배고픔은 해결했으니 토종을 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종의 다양성을 살리는 것은 물론, 무엇보다 전통농업의 핵심인 제철에 제땅에서 작물을 키우기에는 토종이 더 알맞다. 유전자를 조작한 작물에는 그 회사의 농약만 쓸 수 있는 것처럼.

현대농업에서 편리하게 쓰는 화학비료는 그 편리함만큼 부작용도 크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다. 화학제품을 쓰지는 않지만 요즘의 상업적인 유기농업도 문제가 많다. 이런 상태로 나아가면 지속가능한 농업은 없을 것이다. 거름 이야기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조선반도의 기록을 보면, 전통농업에서 활용한 다양한 거름 재료들을 볼 수 있다. 못자리나 논에는 개자리(순천), 자운영(광주, 익산, 보성), 말린풀·토끼풀(제주), 털갈퀴덩굴(남지, 청주), 풋베기콩(제주) 같은 풋거름작물부터 풀(나주), 깻묵(옥구), 나뭇재·똥재(괴산), 해초(영흥도), 콩 삶은 것이나 갈잎(황해도) 등을 넣었다. 또 주요한 밑거름인 두엄의 재료로는 왕겨, 볏짚, 풀, 보릿짚, 소·돼지의 똥, 생선거름(덕적도), 태풍에 밀려온 해초(제주) 등 다양한 유기물을 이용해 직접 만들어 썼다. 웃거름으로는 주로 똥오줌, 돼지 오줌, 설거지물 등을 이용했다.

마지막으로 쟁기질이 있다. 한쪽에서는 쟁기질이 흙의 떼알 구조와 보이지 않는 흙속의 다양한 생태계를 망친다고 무경운을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그 입장에서 말하는 쟁기질은 현대의 트렉터 같은 기계를 이용한 로터리 같은 방식의 쟁기질이라고 본다. 물론 그런 방식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소를 이용한 쟁기질 정도는 괜찮다고 본다. 인간은 오래 전부터 소를 이용해 쟁기질을 했지만, 소쟁기질은 지금처럼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는 산업화 이후 석유에 기반한 문명이 시작되면서부터 일어났다. 기계화가 이루어지면서부터 인간은 물론 자연도 소외되었다.

조선반도의 기록을 보면 소쟁기질한 뒤 곰방매를 이용해 덩어리를 깨거나 써레질하고, 아니면 그냥 발로 쓱 문질러 구멍을 내고 콩을 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떼알 구조가 이루어진 흙이 아니면 힘들 것이다. 오랫동안 유기농사를 지어 흙이 살아 있기에 이렇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를 근거로 쟁기질의 목적이 단지 양분을 섞고 흙속에 공기와 물이 통하도록 하는 것만이 아닌, 다른 것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쟁기질은 사이짓기나 섞어짓기 같은 작부 체계에 맞춰 밭을 꾸미는 데 더 큰 목적이 있다고 본다. 실제로 책의 기록에도 이러한 내용이 나오고, 동네 어르신께도 들었다. 두 거웃 갈이의 경우 목화, 고구마, 보리 줄뿌림, 제충국, 보리·밀(수원)을 심기 위한 쟁기질이고, 세 거웃 갈이는 보리 흩뿌림, 조, 밀, 콩, 팥을 심으려고, 네 거웃 갈이는 팥, 메밀, 보리 등을 심으려는 쟁기질이란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얼마 전 단양에 취재를 가니, 그곳에서는 이런 기능 말고도 비탈이 심한 밭의 흙이 유실되지 않도록 하는 기능도 있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사이짓기를 쉽게 하도록 하는 역할도 있다. 작물이 자라고 있는 골 사이에 새로 작물을 심을 골을 내는 건 사람이나 소입니다. 요즘 폭이 좁은 관리기도 나왔다고 하지만 아직 보지 못해 잘 모르겠다. 또한 사이갈이를 통해 김매기는 물론 북주기의 효과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적당한 쟁기질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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