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안산으로 이사 온 지 넉 달째인데 안산이 참 마음에 듭니다. 그래서인지 내가 사는 동네에 대한 애향심도 생기고, 그러다보니 안산에 대해서 궁금하고 알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오늘은 밭으로 가는 길에 무엇이 있는지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저는 밭을 오고 갈 때 자전거를 이용합니다. 밭까지는 자전거로 30여 분 정도 걸리는데 운동 삼아서 타고 다니기에 적당합니다. 하지만 자전거 도로가 딱히 없어서 도로 갓길을 이용하기에 조금 위험합니다. 새로 난 길에는 자전거 도로가 그나마 괜찮게 만들어져 있는데, 전에 만들어진 길 일수록 엉망입니다. 요즘 여러 지자체에서 자전거 도로를 만들어 놓고는 있는데 실제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에는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런 작은 부분들을 보면서 공무원을 위한 전시용 행정이 아니라 시민을 위한 실질적인 행정이 이루어지기를 생각해 봅니다.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서면 성호 이익 선생님의 묘소를 지나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조선 후기 실학자이신 이익 선생님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그 분이 안산에 사셨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럼 저는 신나게 그 동네가 우리 동네라고 자랑을 하곤 하지요. 이익 선생님 같은 분과 한 동네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이익 선생님 묘소 앞 쪽에는 공원이 있는데 이곳 또한 볼만한 것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고인돌 입니다. 이곳의 고인돌은 시화호를 개발할 때 나온 것을 옮겨놓았다고 하는데, 고인돌을 가만히 바라보면 몇 천 년 전의 사람들과 함께 호홉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시공간이 하나로 뭉쳐져 있는듯 한 기분입니다.
공원 옆으로는 수인산업도로 라고 불리는 42번 국도가 지나고 있습니다. 지금은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지만 옛날에는 걸어서 수원과 인천을 오가던 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성호기념관이 있는 근처는 오고 가던 사람들을 위한 주막이 많이 있어서 주막거리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힘차게 페달을 밟아 언덕을 하나 넘으면 점성공원이 나옵니다. 옛 안산에 성포리와 점성리 라는 동네가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가 그 점성리 자리인지 아니면 이름만 가져온 것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익 선생님이 첨성리에 사셨다는 말로 미루어보아 이곳이 점성리 일 것 같기는 합니다. 이익 선생님의 성호(星湖)라는 호는 동네이름인 첨성리에서 '성(星)' 자를 따서 지었다고 합니다. 이 동네는 마당 있는 집들이 많은데, 그 마당 한 켠에 텃밭을 만들어 가꾸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텃밭 농사를 짓는 저로서는 부러우면서도 흐뭇한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점성공원을 지나 부곡동으로 들어서서 한참을 가다 보면 정정옹주 묘를 지나게 됩니다. 정정옹주는 선조의 아홉 번째 딸인데 광해군 2년에 진안위(晋安尉) 유적에게 출가하여 안산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현재 있는 묘는 그 두 분의 합장묘라고 합니다.
이제 텃밭까지 절반 정도 왔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밭이 나오게 되는데 여기서 잠시 쉬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자전거 페달을 밟습니다. 정재초등학교를 처음 보고 ‘여기가 부곡동이라서 한자로 정재(鼎在)라고 부르는 건가?’ 궁금했었습니다. 이 궁금증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풀렸습니다. 정재라는 이름은 조선 숙종 때 형조판서를 지냈던 분이 이곳에 살아서 그 분의 호를 따서 정재(靜齋)골 이라고 한데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 옆 안산공고 쪽에 가보며 시랑 초등학교도 볼 수 있습니다. 이 학교 이름도 마음대로 추리해서 ‘여우랑 늑대가 많이 나타나서 시랑이라고 했나.’ 했습니다. 이것도 나중에 알아보니 정정옹주의 부군이었던 분이 생전에 이부시랑이라는 관직을 지냈다고 해서 시랑골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니, 여우와 늑대랑은 전혀 상관없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42번 도로를 타고 가다보니 교통 안내판에 이곳을 ‘시낭’ 이라고 표기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명에 대한 이해가 없다보니 발음 나는 데로 그냥 표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디서 관리하는지는 모르지만 조만간 시정을 요청해야하겠습니다.
이제 정재초등학교를 지나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고속도로가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에 이곳은 엄청 넓은 들판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봐도 고속도로가 가로질러서 그렇지 넓은 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일대는 벌터 라고 불렸습니다. 들이 하도 넓어서 농부가 소를 크게 불러야 한다고 해서 질우지(叱牛地) 라고 하기도 했다 합니다. 지금도 그 흔적을 조그만 길안내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마을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 마을의 원래 이름은 원부곡(元釜谷)입니다. 한자 그대로 원래 부곡이라는 뜻이지요. 마을 남쪽에 있는 산이 가마를 엎어 놓은 형상이라서 복부산(伏釜山)이라 하고, 그 아래 형성된 마을은 가마골 이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북쪽에 있는 산에는 나무가 많고 숲이 우거졌다고 해서 만수동(萬樹洞) 이라 부르고, 동쪽은 골짜기 안에 있다고 해서 안골 또는 관찰사를 지낸 유석 이라는 분의 묘가 능같이 크다 하여 능안골 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능안골이 바로, 텃밭이 있는 그곳입니다. 이렇게 지명 하나도 허투루 지어진 이름이 없습니다. 지명의 유래에 대해 조사하다 보니 지명에는 그곳의 역사, 문화, 자연 등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역사가 깊은 마을이 지금은 큰 도로에 의해서 맥이 잘리고 사람들은 거의 떠난 것을 보면 왠지 모를 씁쓸함을 느끼게 됩니다.
참, 밭을 지나는 길에 자리하고 있는 청문당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집은 정정옹주의 남편인 유적이라는 분이 젊은 나이에 죽어 고향인 충청북도 괴산에 묻히려 했는데, 한양에서 괴산까지 3백리 이상 되는 거리인 데다가 왕가의 장지는 한양에서 1백 리를 넘을 수 없다는 법도에 따라 이곳에 사패지를 받게 된 것에서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곳에 자리잡게 된 진주 유씨는 조선 중기에는 기호남인(畿湖南人) 3대 집안의 하나로 손꼽힐 정도였고, 조선 후기에는 남인 문사들이 이곳에 모여 교류하면서 실학의 산실이 되었다 합니다. 특히 청문당에 있는 만권루(萬券樓) 라는 도서관은 조선 4대 서고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일동 쪽에 있었던 성호 이익 선생의 집과 함께 엄청난 학문의 요람이었던 곳입니다. 지금은 과거의 그 찬란함은 사라지고 겉모양만 남아 집 앞에 서 있는 200년 넘었다는 은행나무만 그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청문당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금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곤 했는데, 올 해부터 복원사업에 들어가서 그 모습이 깔끔하게 싹 바뀌고 있습니다. 현재 사랑채는 복원사업이 완전히 끝난 상태입니다. 앞으로는 청문당 옆쪽에 있는 공장건물들도 이주를 시키고 집 앞에 있던 연못도 복원할 계획이라고 하니 이후가 더 궁금해집니다.
이제 밭까지 다 왔습니다. 밭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굴다리를 하나 지나야 하는데, 이곳을 지날 때면 ‘센과 치히로의 모험’이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생각나곤 합니다. 두 이야기 모두 굴이라는 것을 통해서 시작됩니다. 뭔지 모를 굴에 들어섰다가 다른 세계로 들어가게 되지요. 이 굴도 그와 마찬가지로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건너가는 어머니의 질 같기도 합니다. 나를 이만큼 변화시켜 놓았으니 그것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