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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어제 날씨가 꽤나 쌀쌀했습니다. 때 아닌 눈에다 황사까지 몰려오는 바람에 더더욱 집에만 박혀있도록 말이죠. 동장군이 마지막으로 기승을 부리는 꽃샘추위인가 봅니다. 꽃샘추위 … 가만히 이 말을 들여다보니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듭니다. 별 생각 없이 꽃샘추위라는 말을 들으면 그냥 넘어갔을 텐데, 그 말을 머릿속에서 음미해보니 입 속에 맴맴 돌면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나뭇가지에 잎이 다 떨어져 속살이 훤히 들여다보이던 그 황량했던 겨울을 지나, 따뜻한 봄이 와 어여쁜 꽃이 피어나는 것을 배 아파하는 동장군의 심술이라는 말이겠지요. 단지 계절의 변화일 뿐이지만 그것 하나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름을 붙여준 마음이 너무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여느 때처럼 똑같이 오는 꽃샘추위이겠지만 며칠 전에 본 텔레비전 소식에 따르면, 미국도 이상 저온이라고 하고, 유럽도 봄인데도 예전보다 춥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무언가 변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하긴 지난 겨울만해도 삼한사온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내리 추웠던 일이나, 전라도에 징글맞게 내리던 눈이나 모두 그런 영향이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무엇이 어떻고 저떻고 하건 간에 봄은 또 찾아왔습니다.


개구리도 놀라 뛴다는 경칩이 어느새 일주일이나 지났습니다. 그 영향 때문인지 저도 놀라 집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그렇게 뛰쳐나가본 세상은 봄내음이 물큰하게 풍겨왔습니다. 집 앞을 오가며 보았던 목련에도, 가끔 밭에 나가 보던 버들강아지에도, 사람들의 옷차림에도, 내 마음에도 봄은 잊지 않고 귓가를 간질이며 바람을 불어넣었습니다. 낙엽만 굴러도 재밌다고 깔깔 웃는다는 소녀들의 마음과 똑같지는 않겠지만 아침에 눈을 떠 창밖에 허연 햇살만 바라봐도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오늘은 심심하게 지내고 있던 때 드디어 밭을 정리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순간 마음이 더욱 울렁이며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개학해서 학교 가는 아이의 맘이 이럴까요? 아니면 소풍 가기 전날 아이의 맘이 이럴까요? 아무튼 이제 새로운 한 해 농사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겨우내 얼마나 근질근질했는지 모릅니다. 가을에는 낙엽이 지고, 산의 색이 누렇게 변하고, 밭의 작물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을 보며 어찌나 쓸쓸했는지 모릅니다. 벌써 세 번이나 겪은 일이지만 겪을 때마다 그렇습니다. 봄이 오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오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온다는 사실을 짧은 인생이지만 충분히 안다고 생각했는데, 농사를 지으면서 접하는 계절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생활하면서 겪었던 그것과는 다릅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때를 알게 되고, 그에 맞는 일을 하게 되면서 나를 자연의 흐름에 맞추게 됩니다. 그러면서 철이 들었습니다. 확실히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서 세상을 정의하며 알아가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겪어보지 않고서 ‘내가 다 알아’ 하면서 남의 사정을 안다고 하는 것은 오만일수도 있습니다. 내 얘기를 남에게 하는 것은 충고를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 받고 따스하게 안겨보고자 하는 것일 겁니다. 헌데 요즘 세상은 잘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 그런지 쉽게 그런 말을 꺼내기도 어렵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바지를 걷어 올려 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다리에는 털들이 새싹을 틔우고 있었습니다. 가을이 오면서 순풍순풍 빠졌던 털들, 그래서 마누라에게 적지 않은 핀잔을 들었던 털들이 봄을 맞아 새롭게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저는 수술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피부에 눌려 힘겨워 하는 털들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봄은 영어로 ‘SPRING’이지요. 그 말 그대로 처음 세상을 접한 털들은 꼬불꼬불합니다. 이것들이 언제 자라서 쭉쭉 펴질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참고로 제 털은 직모에 가까워서 웬만한 털들은 다 곧게 자랍니다.). 이 털들을 보면서 논어에 ‘가까운 몸에서 이치를 알게 된다’는 말이 불현듯 떠오릅니다. 여름에는 ‘아, 덥다’ 겨울에는 ‘아, 춥다’고 느끼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봄에는 ‘……’ 무엇이 자연스러울까요? 설마 이런 것도 느끼지 못할 만큼 바쁘게 사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제 참말로 봄인가 봅니다. 거리를 나서면 마음이 술렁술렁 두근두근 하는 것이 봄바람 난 처녀 같고, 지나간 옛 사람들이 마구마구 떠오르고, 길을 가다보면 동네 개들도 봄바람에 여기저기서 붙어있고, 도무지 겨울처럼 뜨끈한 방구석에서 엉덩이 지지며 앉아있지 못하게 만듭니다. 한 해의 계획은 봄에 세운다고 하는데, 다들 올 한 해의 계획은 세우셨는지요. 이렇게 얘기하지만 저는 별 계획이 없습니다. 우리집 가훈이 ‘오늘만 같아라’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이것이 올 해 계획이라고 얘기하기도 낯간지럽잖아요. 그래도 마음속에는 나름대로 계획이라면 계획인 것이 있기는 합니다.

입춘은 벌써 예저녁에 지났지만 아직까지 아무 계획이 없으시다면, 이달 음력 2월이 가기 전에 세우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마침 보름이라 달이 휘영청 둥글게 빛나고 있네요. 2세 계획이 있으신 분이라면 오늘이 참 날이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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